여형민은 곧바로 허태준에게 연락했다.통화음은 연결되었지만 정작 받는 사람은 없었다.여형민은 당황한 나머지 심유진을 뒤로 하고 곧바로 간호사실로 달려갔다.환자 실종 사건은 병원에게 있어 아주 큰 일이었다. 게다가 얼마 전 옥상에서 뛰어내리는 사고도 있었기에 다들 정신이 없었다. 때문에 간호사실에는 당직 간호사 한 명을 제외하고 몽땅 환자를 수색하는데 나섰다.여형민의 간곡한 부탁에 간호사는 방송을 켰다.“허태준 환자분, 지금 친구분께서 병실에서 기다리고 계시니 방송을 들으셨다면 속히 돌아오시길 바랍니다!”심유진은 그제야 사건의 심각성을 깨달았다.“CCTV라도 돌려볼까요?”그녀가 여형민에게 물었다.“잠시만요.”여형민은 고개를 숙인 채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병실에서 기다리고 있어요.”그는 심유진에게 명령을 내렸다.“병실로 돌아왔는데 사람 없으면 어떡해요.”심유진은 이곳에 남아있어도 도움 되지 못한다는 걸 알았기에 그의 말대로 병실로 돌아갔다.홀 방송은 2분마다 한 번씩 재방송되었고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그녀는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고 온갖 잡생각들이 몰려왔다.삼십분 정도 지나자 여형민이 허태준을 부축하여 병실로 돌아왔다.심유진은 다급히 그들을 반겼다.“어디로 간 거예요?”그녀는 나무라듯 말했지만 걱정과 긴장이 더 컸다.허태준의 안색은 그들이 떠날 때보다 더 안 좋아졌고 지어는 창백하기까지 했다. 중도에 바늘을 빼고 제때 지혈하지 않은 탓에 그의 오른손 손등에는 보기 흉한 핏자국까지 어려있었다.“지인을 만나서 잠깐 얘기 나눴어.”허태준은 무표정으로 말을 꺼내며 오른손을 등 뒤로 숨겼다.“지인이 네 건강보다 중요해?”여형민은 그를 침대에 앉힌 뒤 불만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얌전히 누워있어, 간호사 불러올 테니까 링거나 마저 맞아!”여형민이 말을 다 한 탓에 할 말이 없어진 심유진은 얌전히 옆에 서 있었다.“로열 호텔에 언제 출근해?”허태준이 갑자기 그녀에게 물었다.심유진은 흠칫 놀랐다가 솔직하게 대
“마음대로 해.”허태준은 침대에 누워 이불을 턱 끝까지 올린 뒤 두 눈을 질끈 감았다.**허태준이 링거를 다 맞았을 때는 이미 밤이 깊어진 상태였다.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운전은 여형민이 맡았고 허태준은 뒷좌석에 앉아있었다.조금 전 있었던 일 때문에 심유진은 조심스럽게 조수석을 선택했다.허태준은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여형민은 심유진에게 저녁 식사를 초대했다.“아주머니께서 이미 식사 준비를 마쳤어요.”심유진은 길게 하품하며 그의 요청을 거절했다.“저는 지금 당장이라도 집으로 돌아가서 자고 싶어요.”그녀는 더 이상 버티기 어려웠다.“그래요.”여형민도 더 이상 강요하지 않았다.심유진은 먼저 차에서 내렸고 여형민과 허태준은 여전히 차 안에 머물러 있었다.“어느 지인 만났어?”여형민이 고개를 돌려 허태준에게 물었다. 그의 표정에는 엄숙함 속에 긴장감이 뒤섞여 있었다.“그 사람들?”허태준은 공공장소가 아닌 곳에서 지인과 대화를 나눈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가 직접 병실에서 나오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은 그 사람들밖에 없었다.하지만 허태준은 예상 밖인 대답을 꺼냈다.“아니.”“그럼 누군데?”여형민은 의아했다.“그럼 지인을 만났다는 게 심유진 씨를 속이기 위한 거였어?”아무래도 후자일 가능성이 더 높은 것 같았다.허태준은 옷을 꽉 여민 뒤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들어가서 밥 먹어, 나 배고파.”그는 아예 대답을 회피했다.**심유진은 꽤 긴 시간 동안 잠을 잤다.아침 알람 소리가 울려서야 그녀는 꿈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이는 그녀가 정직을 당하고 나서 첫 출근날이자 스캔들이 터진 뒤 처음 동료들과 만나는 날이다.호텔로 가는 길에 그녀는 마음 준비를 단단히 했지만 그녀의 예상과 반대로--아무도 그녀를 이상한 눈빛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다들 그녀를 동정하며 조 씨 가문을 나무라는 동시에 그녀를 위로했다.“심 매니저, 드디어 돌아오셨네요!”“그동안 수고했어요!”“저희도 심 매니저가 그런
우아한 옷차림의 중년 귀부인이 문을 닫는 순간 사악한 표정을 드러냈다.오래전 기억들이 밀물처럼 밀려오면서 심유진은 당황스러움에 두 눈을 크게 떴다.“짝!”청아한 소리와 함께 그녀의 뺨을 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그해에 비하면 힘은 많이 줄었지만 심유진은 여전히 볼이 따끔했다.“개망신을 전국에 퍼뜨리니까 네가 대단한 짓이라도 한 것 같아? 어쩜 아직도 내 속을 썩여! 네 동생을 좀 따라 배우란 말이야!”예상했던 욕설이 줄줄이 새어 나왔다. 심지어 내용도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심유진은 조건반사로 죄송하다고 사과하려다가 제때 입을 닫았다.그녀는 더 이상 남의 눈치만 보고 사는 소녀가 아니었다.그녀는 이제 성장했고 독립적이며 용감했다.가장 중요한 건 그녀는 이미 그들과 아무런 사이가 아니라는 점이었다.심유진은 입꼬리를 씩 올렸다.얼굴에서 전해지는 고통 때문에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더니 괴이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저번 만남 때 저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씀 기억하세요?”그때 심유진은 핍박에 의해 바닥에 무릎을 꿇고 뺨도 여러 번 맞았었다.“꺼져! 멀리 꺼질수록 좋아! 앞으로 다시는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마! 난 너 같은 딸을 낳은 적 없어!”칼처럼 잔인한 말들이 심유진의 마음을 사정없이 후려갈긴 바람에 지금까지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사영은도 떠오르는 건 마찬가지였다.“네가 일을 크게 벌이지만 않았어도, 네 아빠 친척들때문에 부끄러워서 고개를 들지 못하는 일만 없었어도, 내가 이렇게 널 찾아왔을 것 같아?”그녀는 차갑게 피식 웃으며 말했다.“그때는 당당하게 가출한다느니, 가족들과 인연을 끊겠다느니 그러길래 혼자 얼마나 잘 사나 했더니! 하! 자신의 배우자를 선택할 권리를 가지고 싶다고... 그 권리는 가졌는데 결과는? 시골 남자한테 시집간 것도 모자라 정신병자랑 엮여!”심유진은 예전의 상처가 마음속 깊이 박힌 탓에 그녀가 아무리 윽박질러도 흔들림 없었다.“잘 지내든 말든, 누구한테 시집가든 당신과 아무런 상관도 없잖아요.”사영은
심유진도 처음에는 의아해 하다가 나중에는 화를 내며 따져 물었다.“누가 당신더러 그 사람들한테 돈 주라고 했어요?”조 씨 가문 사람들은 탐욕에 눈이 먼 짐승들이었다.2억이라는 돈벼락을 맞았으니 그들은 물러서기는커녕 또다시 갖은 방법을 동원하여 들러붙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떼낼래야 떼어낼 수 없을 것이다.“좋은 마음으로 도와줬더니 이런 태도로 나와?”사영은은 또다시 화가 치밀어올랐다.“심유진, 고마움도 몰라?”“당신은 날 도운 게 아니라 일을 더 복잡하게 만든 거예요.”게다가 사영은이 이렇게 하는 것도 결국 그녀 자신을 위한 일이었다.조 씨 가문 사람들은 조건웅의 죽음을 심유진에게 밀려고 하고 있다. 만약 그들이 또 다른 빌미를 찾는다면... 피곤해지는 건 심유진이 아니라 사영은이 될 것이다. 심 씨 가문은 원래부터 그녀를 눈엣가시로 여기고 있었다. 때가 되면 그들은 사영은을 더더욱 심하게 비웃을 것이다.“못 본 사이에 대드는 재주가 늘었구나!”사영은은 점점 소리를 높였다.“엄마인 내가 오늘 단단히 혼내줘야겠네! 어른한테 지켜야 할 예의가 있지!”그녀는 심유진의 옷깃을 잡아당겨 의자에서 일으켜 세운 뒤 발로 그녀의 무릎을 걷어찼다.사영은은 뾰족한 가죽 하이힐을 신고 있었다.심유진은 고통을 참지 못하고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그녀는 재빨리 테이블 변두리를 잡아 무릎을 꿇는 걸 방지했다.이 수단은 전에 사영은이 자주 사용하던 수단이었다.심유진이 말을 듣지 않거나 혹은 사영은이 여기기에 말을 듣지 않았다고 생각되는 경우라면 늘 심유진을 무릎 꿇게 만든 뒤 손이나 몽둥이로 때리곤 했다.한번은 심유진의 갈비뼈가 끊어지는 바람에 병원에 석 달 내내 입원해 있었다. 이로 인해 수능을 놓치게 되어 1년을 복학했던 것이다.“무릎 꿇어!”사영은은 그녀가 여전히 자리에 서 있는 것을 보고 다시 한번 걷어찼다.심유진의 무릎은 이미 굽힌 상태였다.심유진은 재빨리 팔을 뻗어 사영은의 옷을 잡아당겼다.사영은은 단번에 그녀와 함께 바닥에 쓰러졌다.
심유진은 창문에 기댄 채 뒤를 확인했다.사영은을 포함해 아무도 없었다.그녀는 도로 의자에 기대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여긴 웬일이에요?”그녀는 그제야 이 문제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우연히 지나가다가 들렸어.”허태준의 표정은 덤덤했다.심유진은 당연히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날 기다렸잖아요.”그녀는 서술형 말투로 대답했다.“왜요?”그녀가 더욱 궁금했던 건 이점이었다.“제가 뒷문으로 나올 거란 건 어떻게 안 거예요?”허태준은 여전히 고집을 꺾지 않았다.“그냥 지나가다가 들린 거야.”심유진은 입술을 꽉 깨문 채 구멍이라도 뚫을 듯 따가운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허태준은 그녀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여전히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차는 리친시아에 들어섰다.심유진은 또다시 창문 유리에 기댔다.아파트단지는 여느 때처럼 인적이 드물었다.자동차 바퀴가 낙엽을 밟으며 지나갈 때 은은한 소리가 들려왔다.그들이 사는 아파트 앞에는 웬 낯선 차가 세워져 있었는데 큰길과 등진 탓에 차 안에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심유진은 저도 모르게 긴장되었다.허태준은 그 차 옆에 차를 주차했다.그는 키까지 뽑았지만 심유진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며 귀를 쫑긋 세워 옆 차 움직임을 살폈다.허태준은 그녀가 바라보는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새로 산 차인데 마음에 들어?”그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네?”심유진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재빨리 고개를 돌려 물었다.“지금... 지금 이 차가 당신 것이라고요?”허태준은 보관함에서 보조키 하나를 꺼내 꾹 눌렀다--옆에 있던 차가 갑자기 확 밝아지더니 띡 소리를 냈다.누군가에게 혼이라도 빼앗긴 듯 심유진은 힘없이 주저앉았다.그녀는 의자에 기댄 채 손으로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았다.괜히 놀란 것이었다.다행히도 괜히 놀란 것이었다.“난 또...”그녀는 자신의 리액션이 타당하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고 멋쩍게 웃으며 말을 돌렸다.“차 예쁘네요
그는 당황한 눈빛을 지은 채 손으로 힘껏 오픈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죽고 싶어?”그는 낮은 목소리로 따끔하게 혼냈다.“손으로 엘리베이터 문 막는 게 얼마나 위험한 짓인지 몰라?”이런 상식쯤은 심유진도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이를 알고 있어도 다급한 상황에서 본능적으로 움직이게 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그녀는 소리 없이 손을 뒤로 숨기려고 했지만 허태준이 먼저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그녀의 손바닥과 손등에는 붉은 자국이 남아있었는데 마치 그녀의 부어오른 얼굴처럼 보기 흉했다.허태준의 눈빛이 확 싸늘해졌다. 심유진은 이를 눈치채고 재빨리 손을 빼내려고 했지만 더욱 꽉 잡히고 말았다.“움직이지 마.”그의 목소리는 나긋했지만 말투는 유달리 무거웠다.심유진은 곧바로 그의 말에 따랐다.하지만 이윽고 또다시 고뇌에 빠지고 말았다.그녀가 잘못했다고 해도 결국 다친 건 그녀 자신이었다.그녀는 자신이 그를 마주할 때 왜 이토록 작아지는 건지 알 수 없었다.허태준은 20층 버튼을 눌렀다.심유진은 버튼과 멀리 떨어져 있는 데다 손도 잡혀있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18층 눌러주세요, 고마워요.”허태준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18층?”그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말했다.“여형민한테 볼 일 있어?”아니다.그녀는 단지 집으로 돌아갈 엄두가 없을 뿐이었다.허태준은 그녀에게 대답할 기회도 주지 않았다.“아직 안 왔어, 먼저 내 집으로 가.”이는 상의가 아니라 명령이었다.“...네.”심유진도 거절할 마음이 없었다.**리친시아로 이사 온 지는 몇 달이 되어가지만 이는 심유진이 처음으로 허태준 집에 방문하는 것이었다.같은 평층이지만 천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위층과 아래층 구조는 완전히 달랐다.허태준이 모든 칸막이를 없앤 탓에 입구에서도 집 안 구조를 훤히 들여다볼 수 있어 안이 유달리 넓어 보였다.시야가 닿는 곳에 검은색, 흰색, 회색 외에 다른 색은 없었다. 요즘 유행어로 표현하자면 바로 모던한 스타일이었다.정작 허태준 본인은
커플템이라는 세 글자가 순간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심유진은 재빨리 그 생각을 떨쳐버렸다.그는 그저 귀찮은 마음에 대충 구매한 게 틀림없었다.그의 신발장을 보면 알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하지만 슬리퍼 여분은 하나도 없었다.예상 밖의 결과에 심유진은 순간 보송보송한 슬리퍼가 부담스럽게 느껴졌다.허태준은 두 사람의 신발을 신발장에 넣은 뒤 몸을 돌려 심유진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복잡한 눈빛으로 신발장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왜 그래?”그가 물었다.심유진은 그제야 정신을 되차렸다.“아무것도 아니에요.”그녀는 애써 미소를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허태준은 의혹을 도로 되삼켰다.“들어와.”그는 겉옷을 벗어 소파에 대충 걸쳐두었다.“앉아.”심유진은 두 다리를 가둔 채 조신하게 소파 한끝에 앉았다.허태준은 곧바로 부엌으로 향했다.그의 집 주방은 오픈식이라 심유진은 그가 냉장고 문을 열어 재료를 꺼내는 모습을 훤히 바라볼 수 있었다.그는 얼음주머니를 들고 그녀에게 걸어왔다.“찜질하고 있어.”그는 얼음주머니를 심유진의 얼굴에 가져다 댔다.갑작스레 전해져온 차가움에 심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더니 목을 뒤로 움츠렸다.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얼음주머니를 건네받고 얼굴에 가져다 댔다.허태준은 그녀의 옆에 앉아 그녀의 볼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야?”그는 분명 이유를 알면서도 되물었다.심유진은 고개를 푹 떨구며 말했다.“상대하기 어려운 고객님을 만났거든요.”말을 마친 그녀는 차갑게 피식 웃으며 말했다.“이럴 줄 알았으면 당신 말대로 며칠 더 쉬다가 출근할 걸 그랬어요.”허태준은 입술을 꽉 깨문 채 서글퍼진 그녀의 눈빛을 바라보았다.“도와줄까?”차가운 말투와 달리 부드러운 관심이 드러났다.“괜찮아요.”심유진은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그녀는 오른쪽 얼굴이 차갑게 얼어붙은 김에 아예 얼음을 얼굴에 가져다 댔다.“그나저나”그녀는 고개를 돌려 그를 위아래로
**아파트단지 입구 옆에 마트가 하나 있었다.리친시아 주민들은 대부분 도우미 아줌마를 고용했기에 직접 요리하는 일이 별로 없었다. 게다가 도우미 아줌마들은 아침 일찍 재료를 구매하기에 심유진과 허태준이 갔을 때 마트에는 카운터 직원과 몇몇 손님들만 있었고 대부분 재료들은 소진된 채 채소만 덩그러니 남아있었다.시간 절약을 위해 허태준은 신선한 게맛살과 스테이크 및 조미료 몇 가지만 구매했다.두 사람이 계산하려는데 한 사람이 마트 안으로 들어오더니 허태준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서 물었다.“허태준 씨? 여긴 웬일이에요?”심유진이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보니소박한 옷차림의 중년여성이었다. 사오십대로 되어 보였는데 어깨에 큰 주머니를 메고 있었다.아무래도 어느 주민 집 도우미 아주머니인 것 같았다.“장 보러 왔어요.”허태준은 카운터 직원에게서 카드를 건네받은 뒤 물건들을 쇼핑백에 담았다.중년여성은 그와 심유진을 번갈아 보더니 물었다.“그럼 오늘 밥 좀 많이 할까요?”허태준이 말했다.“제 밥도 준비해 줄 필요 없어요.”중년여성은 다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알겠어요!”그녀는 대답하는 동시에 심유진을 흘끔흘끔 쳐다보았다.마트에서 나온 뒤에야 허태준이 심유진에게 알려주었다.“여형민이 찾아준 도우미 아줌마셔.”심유진은 이미 속으로 짐작했기에 별로 놀라지 않았다.“여 변호사님 곧 오지 않아요? 그냥 여 변호사님까지 불러서 함께 저녁 식사할까요?”그저 아무렇지 않게 툭 뱉은 말이었지만 분위기는 순식간에 살얼음처럼 차가워졌다.“아니.”허태준은 걸음을 멈추지 않고 말했다.“신경 쓰지 마.”**허태준은 게맛살을 간단히 손질한 뒤 썰어놓은 생강과 함께 볶았다.이윽고 그는 프라이팬 하나를 꺼내 스테이크를 구우려고 했다.심유진은 사실 그의 요리 솜씨가 별로 믿음직스럽지 않았다.그는 종일 비즈니스로 바쁜 몸이었기에 직접 요리하는 일은 별로 없을 것이다.그가 힘들게 생강을 써는 모습만으로도 그의 진짜 요리 실력을 대충 짐작할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