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배우는 예쁘기는 하지만 영혼이 없어. 표현력도 형편없고. 더군다나 이 향수랑은 전혀 어울리지 않아. 똑똑하고 안목도 좋은 문 대표가 어쩌다 이런 배우를 골랐지?”……촬영장에는 많은 사람이 영은을 둘러싸고 있었다. 마치, 하늘의 무수한 별들이 달을 감싸 안은 것 같은 모양이었다.직원 하나가 영은에게 물병을 건넸다. 영은이 웃으며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겉으로는 웃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요제프 감독을 증오하고 있었다.대부분 사람은 영은의 사회적 위치를 의식해 환심을 사기 위해 애썼을 뿐, 누구 하나 감히 그녀의 연기를 비판
영은은 디자이너인 원아를 자기 매니저처럼 대하기 시작했다. 차를 따르도록 한다거나 대본 연습 상대로 삼았다. 심지어 밖에 나사 커피를 사 오라고 시키기까지 했다.영은은 원아를 잠시도 가만히 두지 않았다.원아에게 일을 시킬 때, 영은의 목소리는 나긋나긋 부드러웠고, 말투 역시 애교 섞인 공손한 말투여서 한치의 흠도 잡을 수 없게 했다.광고부 직원들조차 영은과 같은 재벌 집안의 딸이 어떻게 이리 진실하고 사랑스러울 수 있는지 놀라는 눈치였다. 나중에는 모두가 원아의 매니저 역할을 당연하게 여길 정도였다.일반인이 톱스타를 가까이서
원아는 영국에서 몇 년 동안 유학하면서 자연스럽게 영어를 배웠고 아주 유창한 실력을 갖추게 되었다.원아는 자신의 이름이 거론되는 것을 듣고는 감독에게 조심스레 다가갔다.“요제프 감독님, 안녕하세요. 설계 부서 직원 원아입니다. 임영은 씨의 매니저가 휴가로 자리를 비워 제가 대신 돕고 있습니다.”원아의 영국식 발음은 매우 정확했고 매끄러웠다. 만약 그녀의 얼굴을 보지 않았더라면 영국인으로 착각했을 정도였다.요제프 감독은 깊고 푸른 눈동자를 반짝이며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다 미소를 지었다.“원아 씨, 안녕하세요. 나는 당신의
하얀 원피스를 입은 원아는 우아하면서도 패기 가득해 보였다.거기다 크리스털 힐까지 신으니, 키가 마치 십 센티미터는 더 큰 것처럼 보였다.“좋아, 아주 좋아!”요제프 감독은 메이크업을 마치고 의상을 갈아입은 원아를 보고 만족스러운 듯 엄지손가락을 추어올렸다.원아의 얼굴에 긴장한 빛이 역력했다. 이를 알아챈 감독이 원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연기라는 것은 어렵다면 어렵고, 또 쉽다면 쉬운 거예요. 얼굴이나 눈만으로 연기할 수는 없어요. 연기는 마음에서 우러나는 거죠. 원아 씨는 몸과 마음을 집중하기만 하면 돼요. 긴장하
영화에 나온 원아를 본 남자들이 열렬한 반응을 보이는 것을 상상하던 소남은 얼굴을 찌푸렸다. 생각할 필요도 없이 거절의 뜻을 전했다.“아닙니다. 요제프 감독님. 원아 씨는 연예계와 맞지 않아요.”요제프 감독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원아 씨는 가능성이 정말 많은 사람이에요. 당장 영화를 찍을 수도 있는 수준입니다. 성공은 제가 보장하지요.”소남도 당연히 요제프 감독의 실력을 믿었다.그의 스타 발굴 실력은 감히 다른 사람이 따라올 수 없을 정도였다. 유명한 할리우드 스타를 만들어 낸 것도 그였다.하지만 소남은 원아가 연예
소남은 확실히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매력이 있었다. 하지만 영은에게만은 항상 미적지근한 태도로 거리를 유지했다.영은은 그런 소남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나랑 은밀한 관계까지 맺었는데 어떻게 이렇게 차갑게 대할 수 있지?”“문 대표님…….”영은이 입술을 삐죽이다 수줍은 표정이 되었다.그날, 소남과의 뜨거웠던 순간이 떠올랐다.수줍게 두 손을 꼭 쥔 영은이 조용히 물었다.“그날…… 우리 할아버지 생신 날 말이에요. 설마, 그날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잊은 건 아니죠?”소남은 고개를 들어 영은을 한 번 쳐다봤다. 붉
사립 탐정이 떠난 후에도 영은은 자리를 뜨지 못했다. 멍하니 앉아 식어버린 커피잔만 만지작거렸다.팔을 꼬집어 보았다. 통증이 느껴졌다. 눈앞에는 믿을 수 없는 내용이 담긴 종이 뭉치가 번 듯이 놓여 있었다. 비로소 영은은 이 모든 것이 실제로 일어난 일이며, 현실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한 번도 자신이 임씨 집안의 딸이 아니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더군다나 양부모님의 친딸이 언젠가 돌아오리라는 생각은 더더욱 해본 적이 없었다. 이제 자신은 찬밥 신세가 된 것 같았다.오랫동안 마음에 품었던 소남을
원아가 소은을 살살 달랬다.“언니, 전 다른 뜻 없어요. 단지, 지금 언니 증상이 제가 처음 임신했을 때와 너무 비슷해서 그래요. 제 말에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되지만 결국 언니 몸이잖아요. 병원에 가서 검사 받고 나면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확실히 알 수 있으니까 권하는 거예요.”원아는 자신이 처음 임신했을 때의 두려움과 막막함을 떠올렸다. 결혼도 하기 전에 임신했을 때 어떤 결과를 감당해야 하는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처음 대리모가 되었을 때, 원아는 아이의 아빠가 소남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다만, 머릿속으로 어떤 형편없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