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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2 화

Author: 민설
결혼식 무대 바로 앞에 CY그룹 대표의 비서인 이무진이 앉아 있었다.

주성재의 지시로, PX그룹 대표 두 사람의 결혼식에 참석하러 귀국한 것인데, 결혼식의 주인공인 신부가 바뀐 것도 모자라 원래 신부가 들러리로 참석한 것을 목격하게 된 것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결혼식은 아직 진행 중이었다.

지은은 지현의 손을 민호에게 건넨 뒤, 뒤돌아 무대에서 내려왔다.

“네, 맹세합니다.”

바로 뒤에서, 신랑인 민호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지은은 더 빨리 여기서 벗어나고 싶었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지은이 아는 사람들이었다.

각 대기업의 임원들이 결혼식에 참석한 것은 사실 모두 지은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A 시는 자수로 유명한 도시이다.

지은과 민호가 직접 만들고 키운 PX그룹은 최근 유명해진 회사였고, 회사에 속한 자수 공예 장인들은 모두 지은이 직접 키워 낸 인재였다.

이 때문에 많은 대기업이 지은을 스카우트하려 공예를 들였지만, 그녀는 모든 제안을 거절해 왔다.

도망치다시피 식장에서 빠져나온 지은이 무대 뒤쪽 신부 대기실에 들어서자, 벽에 걸어 두었던 예복에 시선이 들어왔다.

그건 지은의 어머니가 생전에 마지막으로 한 작품이다. 지은의 결혼을 위해 앞서 준비해 둔 것이었다.

뛰어난 자수 공예 장인들은 딸의 웨딩드레스를 직접 만들었다.

이전 세대 장인들은 딸이 태어날 때부터 조금씩 준비하기도 했다.

하지만 워낙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라, 이미 몸이 좋지 않았던 지은의 어머니는 이 예복 한 벌만 겨우 완성하고 세상을 떠났고, 열다섯 살이던 남동생과 지은 단둘이 세상에 남게 되었다.

지은이는 멍하니 한참 서 있다가, 결국 그 예복을 조심스레 챙겨서 가져가려 했다.

테이블 위에 옷을 놓았을 때, 남동생 서지훈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지은은 목소리를 다듬고 전화를 받으며 대기실 밖으로 나갔다.

“지훈아, 무슨일?”

[누나, 저번에 전화 그렇게 급히 끊고선, 결혼식 날짜가 언제로 바뀌었는지는 안 알려 줬잖아.]

...

결혼식이 끝난 뒤, 민호는 지현을 신부 대기실로 데려와 쉬게 했다.

“난 손님들하고 몇 마디 더 나누고 올게.”

“그래.”

지현은 다정한 미소로 답했다. 마치 진짜 ‘아내’라도 된 듯이.

민호가 나가자, 방 안을 휙 둘러보던 지현은 곧 책상 위에 놓인 예복에 시선이 끌렸다.

아직 상자에 담지도 않은 채 그대로 놓여 있던 이 옷은, 분명 지은이 아까 준비해 둔 것이었다.

자신이 준비한 것과 차원이 다른 예복을 보며, 지현은 뭔가 생각이 떠올랐다.

한편, 전화를 마치고 돌아온 지은은 대기실 안 광경을 보고 갑자기 분노로 이성을 잃었다.

“지현 씨, 지금 뭐 하는 짓이에요?”

지현은 지은의 예복을 입은 채 거울을 보고 있었다.

그녀가 입은 예복이 바로 지은의 어머니가 직접 준비해 두었던 예복이다.

“제 예복이 좀 망가져서 말이에요. 찢어진 옷 입고 손님들을 맞이하러 나갈 순 없잖아요? 마침 여기 지은 씨의 예복이 있길래 그냥 잠깐 입어봤어요.”

결혼식을 빼앗기고, 남자친구가 다른 여자와 식을 올린 것까지도 지현이가 곧 죽을 사람이라는 이유로 참고 양보했던 지은이지만, 적어도 어머니가 남긴 유품인 이 옷만큼은 절대 양보할 수 없었다.

어머니가 생전에 그녀를 위해 손수 만든 예복은 지은한테 어마어마한 소중한 선물이다. 너무 아껴서 지은이도 한 번 입어 보지 못 한다.

“지금 당장 벗어요.”

지은의 얼굴은 차갑게 굳었다. 지은의 매서운 표정은 웬만한 사업 파트너들도 그 앞에서 더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로 단호하고 엄중했다.

하물며 어릴 적부터 제멋대로 지내온 부잣집 아가씨인 지현이 이 기세를 버텨 낼 리 없었다.

“왜 그렇게 화를 내고 난리예요?”

지현은 오히려 눈살을 찌푸리며 지은에게 핀잔을 줬다.

지은의 시선을 예복에 떠나지 못했다. 백지현이 벗지 않자, 그녀는 앞으로 다가가 소매 끝을 움켜잡았다.

“얼른 벗어요.”

지은은 소리를 지르지도 욕을 내뱉지도 않았지만, 그녀의 싸늘한 기세에 지현은 순간 겁을 먹었다.

“이거 놔요!!”

백지현은 지은을 세차게 밀쳐 내면서 그 바람에 소매가 옆에 걸린 옷걸이에 걸려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지은은 너무 놀란 탓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백지현 역시 당황한 기색으로 변명하려고 했다.

“당, 당신이 막 잡아당기지만 않았어도...”

짝!!

지은이 지현의 뺨을 세게 후려치자, 백지현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서지은,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바로 그때, 민호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 뒤엔 방금 그와 함께 얘기를 나누던 A시 여러 회사의 대표가 서 있었다.

다들 괜스레 당황하고 겸연쩍은 얼굴로 몇 걸음 물러섰다.

그러나 지은은 문 앞을 막아서며, 여전히 지현을 노려보았다.

“당장 옷 벗으라고 했잖아요. 못 들었어요?”

“민호야...”

백지현은 울먹이며 뺨을 감싸 쥐었다.

지은이 다시 옷을 벗기려 하자, 이번엔 그녀의 몸이 순식간에 흔들렸다. 곧 뺨이 얼얼해지며, 귀가 세게 울렸다.

민호가 지은의 뺨을 때린 것이었다.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거야! 제발 얌전히 좀 있으라고!”

지은이 넘어져 머리가 땅바닥에 부딪힐 때, 그녀는 민호가 지현을 끌어안는 모습을 똑똑히 보게 되었다.

지금 이 순간 지은에게는 민호와 함께 한7년의 세월이 마치 유리가 깨지듯 산산조각 나버렸다. 심한 마음속 고통 때문에 이미 머리와 뺨을 다쳤지만 통증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왼쪽 눈가에서 흘러내린 눈물이 오른쪽 눈까지 번지며 그녀의 시야를 흐리게 했다.

특히 민호가 지현을 감싸는 모습이 지은의 가슴을 후벼 팠다.

...

지은은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민호와 함께 전단을 나누던 시절부터 회사를 함께 세우고, 이제는 CY그룹의 주 대표님과 같은 테이블에 앉을 자격을 얻은 것까지, 그 모든 기억이 한 편의 영화처럼 스쳐 지나갔다.

지은의 손은 자수를 놓느라 매일 찔리고 헐며, 아물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민호는 늘 지은의 고생을 무시했고, 지현만을 보살폈다.

...

정신을 차려 보니, 지은은 병원에 누워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낯익은 사람이 보였다.

‘이 비서? CY그룹 대표실 비서가 왜 여기 있는 거지?’

지은은 팔을 받치며 몸을 일으켰다.

“이 비서님이 왜 여기 계신 거죠?”

“서 대표님께서 갑자기 쓰러지셨는데, 혼자 두면 위험할까 봐 저희 대표님께서 깨어나실 때까지 곁을 지키라고 하셨어요.”

“고마워요. 이제 많이 괜찮아진 것 같아요. 이 비서님 수고 많으셨어요. 저 대신 주 대표님께도 감사하다고 전해주세요.”

사실 무진 입장에서는 전혀 수고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CY그룹은 이미 양면 자수 공예 명장인 지은을 스카우트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양면 자수 공예 장인이 되려면 최소 10년 이상의 경험이 필요하고, 또 뛰어난 재능이 필요했다.

CY그룹에만 몇만 명이 넘는 자수 장인이 있지만, 양면 수를 할 줄 아는 이는 실제로 20명도 채 안 되었고, 그나마도 실력이 뛰어나진 않았다.

지은처럼 해외 대회 수상 경력과, 박물관 전시 이력까지 갖춘 장인은 CY그룹에게 절실히 필요한 인재였다.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이건 주 대표님 명함이에요.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 연락 달라고 하셨어요.”

CY그룹 대표의 명함이 병상 옆 테이블 위에 놓였다.

무진이 떠나자 병실은 조용해졌고, 지은은 명함을 들어 가만히 살폈다.

PX그룹의 다양한 주문과 협력은 대부분 그녀가 직접 담당해야 했다.

외부에는 지은이 예쁜 외모로 남자들을 유혹해 계약을 따낸다는 유언비어도 돌았는데, 그만큼 지은의 외모도 출중했다.

그러나 지은은 공격성이 강한 탓에 지현조차 겁을 먹게 만드는 카리스마도 있었다.

지은은 사업 감각과 자수 실력을 모두 갖춘 인재였고, 모든 회사가 그녀를 스카우트하려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

문이 다시 열리더니 민호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정장 차림에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민호는 지은의 몸 상태를 먼저 묻는 게 아니라 추궁하며 따지듯 물었다.

“방금 CY그룹 대표 비서가 여기 왔었다며?”

“그래.”

민호는 잠시 지은을 응시하더니, 이내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아까 지은의 뺨을 때린 일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미안함은커녕 미세한 흔들림조차 보이지 않았다.

민호는 지은이 얼마나 매력적인 여자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도도하고 강인한 지은의 분위기는 많은 남성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고, 특히 자수 분야에서의 탁월한 실력은 민호조차 감탄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기술을 전수하는 훌륭한 선생으로도 유명했다.

하지만 민호는 여자가 자신보다 우수한 것을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질투와 소유욕은 그의 이성을 잠식하고 있었다.

“CY그룹은 왜 내가 아니라 너를 만나서 거래하려는 거지?”

민호는 지은이 다친 것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은 채, 협력 문제로 무진이 나타난 거라고 확신했다.

그는 지은의 손등을 단단히 짓누르며 차갑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녀를 내려다봤다.

“서지은, 넌 내 거야. 잘 기억하지?”

남자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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