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은 너무 실망스러웠다. 눈을 감자, 어린 시절 어머니가 늘 해 주신 말이 떠올랐다.“무슨 일이 있어도 자기 인격과 사업은 포기해서는 안돼.”‘인격...?’ 민호 앞에서는 그녀에게 인격 따위는 무의미했다. 순종적으로 뒤에 조용히 서 있는 아내로만 있어야 하니까.그러나 최근 일어난 일들로 너무나 괴로운 나머지, 지은도 이번엔 민호의 요구에 따르고 싶지 않았다.“안 비서.”안유민이 안으로 들어왔다.“부르셨어요?”“CY그룹 파티에 입고 갈 드레스 한 벌 준비해 줘.”지은은 창밖의 고층 빌딩들을 바라보았다.“알겠습니다.
연회장 밖.지은은 민호의 손을 뿌리쳤다.“무슨 일인데?”“도대체 왜 이러는 건데? 누가 너더러 여기 오라고 했어?”“나도 초대받고 온 거야.”“네가 갑자기 나타나면,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지 생각해봤어?”민호는 분노에 찬 눈빛이었지만, 주변을 의식해 소리를 낮추었다.지은은 담담히 웃었다.“왜 매번 내가 네 기분을 생각해야 하지?”민호는 상황이 다급했다. 오늘 파티에 CY그룹의 대표가 온다는 소문이 있었기에, 자신의 이미지가 조금이라도 깎이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 업계에서 큰 계약을 맺으려면 평판이 중요했다.
“알겠습니다. 다만 조금 시간이 더 필요해요.”지은은 아직도 찢어진 작품을 복구하느라 애먹고 있었다.이야기가 오가던 중, 멀리서 민호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이분은 제 아내, 백지현입니다.”쨍그랑-지은의 손에 들려 있던 술잔이 카펫 위로 떨어졌다. 잔이 깨지진 않았지만, 술이 잔뜩 쏟아져 신발이 젖었다.은희는 웨이터에게 눈짓을 보내 곧바로 치우게 했다.“서 대표님이 나쁜 인간한테 발목 잡힌 것 같아서 내내 보기 안쓰러웠어요.”은희는 오랫동안 PX그룹과 협의하며, 지은에게 인간적인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랬던
지은이는 테이블 위에 흩어진 자수들을 물끄러미 바라봤다.그녀는 핸드폰을 꺼내 민호에게 메시지를 하나 보낸 뒤, 핸드폰을 던져두고 자수들을 정리하며 복구를 이어갔다.한편, 집으로 돌아간 민호는 일부러 핸드폰을 보지 않았다. 지은이 전처럼 먼저 전화를 걸어 사과할 것이라고 기대했기 때문이다.그동안 둘이 다툴 때마다, 항상 잘못했다며 먼저 고개를 숙인 건 지은 쪽이었다.“싸웠어?”김영애는 민호가 잔뜩 인상을 쓴 걸 보며 물었다.민호는 넥타이를 헝클이며 짜증을 내듯이 말했다.“별것 아니에요.”“잘됐어! 차라리 싸우고 빨리
민호는 그녀가 차에 올라탄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머릿속에 오직 지은이 보내온 메시지 내용만 맴돌았다.[우리 헤어지자.]‘헤어지자고?’‘서지은, 네가 날 찬 거야? 말도 안 돼. 헤어지더라도 내가 먼저 말해야지. 네가 감히 나를 차? 도대체 무슨 자격으로!’한편 조수석에 앉은 지현은 한껏 들떴지만 최대한 다정하게 굴며 그를 진정시키려 애썼다. 그러나 그럴수록 민호는 지은이 철이 없다고 생각했다.PX그룹.밤새 자수를 복구하던 지은은 드디어 모두 완벽하게 복구작업을 마쳤다.‘가을 대회가 중요하니, CY그룹과의 협력
다음 날.오전 11시 30분, 가랑비가 막 그쳤다.강민영은 갓 발급된 따끈따끈한 집문서에 적힌 자신의 이름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기쁨에 찼다.그녀는 집문서와 함께 인증 사진을 찍고는 곧바로 SNS에 글을 올렸다.“오빠, 고마워!”민호는 아무 말 없이 차에 올라탔다.핸드폰에 아직까지도 지은의 전화나 메시지가 한 통도 없었다.오히려 PX그룹의 손동표 이사가 전화를 걸어왔다.[강 대표님, 양면수 분야의 강사를 도저히 구하지 못했습니다. 지원자들의 실력이 기준에 못 미쳐서 자수 공예 장인들을 제대로 가르칠 수가 없습니다. 서
화면이 켜지자, 갓 샤워를 마친 듯 짧은 머리가 젖어 있는 남자가 화면에 나타났다.남자의 새하얀 피부와 검은색 가운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특히 깊은 눈동자는 차분하지만 날카로워 보였다.[무슨 일이야?]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은희는 조심스레 물었다.“서지은 씨가 가져온 작품, 봤어?”[응.]성재는 방금 영상을 확인해 보았다.은희는 머뭇거리며 말했다.“오빠, 혹시 서지은 씨를 우리 쪽으로 데려오려는 거야?”성재는 의자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며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이런 남자가 자수 업계에서
“그리고 네 물건은 밖에 내놨으니 알아서 가져가.” 민영은 지은의 그 모습을 보자 속이 후련하고, 민호가 벌어온 돈을 자기 돈인 양 믿고 잘난척하는 지은의 모습이 정말 꼴 보기 싫었다. ‘여자란, 남자의 말을 들어야 하는 법이거든!’지은은 귀가 세게 울리고 있었지만, 애써 떨리는 목소리를 참으며 말했다. “강민호, 다시 한번 말해봐.” “네 잘못 때문에 치를 대가를 알려줄게. 내가 몇 번이고 경고했지만, 넌 도통 내 말을 듣질 않잖아. 그러니까 이번에는 혼 좀 나야 해. 만약 지금이라도 사과하고 앞으로 나에게 대드는 일
지은의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오늘처럼 좋은 날, ‘강민호’라는 이름을 핸드폰 화면에 발신자로 떠서 그녀의 마음속엔 가시덩굴이 솟아나는 것 같았다. 가시가 지은의 폐부를 깊숙이 찌르고, 그로 인해 피가 배어 나오는 듯한 아픔이 느껴졌다. 지은은 민호의 예상대로 완전히 마음을 접지는 못했지만, 그를 향한 사랑은 이미 지울 수 없는 상처와 미움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녀가 민호를 볼 때 느끼는 아픔은 그저 오래된 감정의 반작용에 지나지 않았다. 그 누구도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잊고 상처 없이 떠나갈 수는 없는 법이다.
“네가 뭘 알아? 이번 PX그룹의 대회 출품작이 서지은이 만든 거였다고!” 민호는 고함을 치며 말을 이어갔다. “서지은이 감히 나를 감쪽같이 숨기고, 뒤에서 딴짓하고 있었다고! 심지어 어떤 늙은 여자랑 짜고 나를 속였어!” 그는 작품을 판매했던 임수진에 대해 떠올렸다. 임수진은 당시 작품을 소개하며 그것이 지은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전혀 밝히지 않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지? 이건 분명 서지은이 나를 함정에 빠뜨리려는 수작일 거야!’민호는 스스로 이렇게 믿으며 자신의 분노를 정당화했다. 그는 자신이
지은의 말이 끝나자, 어느새 한 손이 그녀의 어깨 근처에 얹혔다. 지은이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성재가 서 있었다. 그는 굳건하고 묵직한 존재감으로 그녀 옆에 서 있었고, 그 모습은 마치 흔들리지 않는 산과 같았다. 민호조차 성재의 강력한 아우라 앞에서 조금도 반박하거나 반응할 수 없었다. 성재는 말 한마디 없이 지은의 어깨를 가볍게 감쌌다. 그런 다음 민호의 달라진 얼굴색을 완전히 무시하며 그녀를 데리고 대회장을 떠났다. 이 장면은 남아있던 A 시의 모든 자수 기업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 ‘뭐지? 그
지은의 한마디에 민호의 얼굴은 순식간에 굳어졌다. 입술까지 떨려서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앉아 있었다. 대회장은 고요한 긴장감으로 가득 찼고, 모든 시선이 PX그룹과 민호에게 쏠렸다.‘뭐? 그 작품이 서지은이 한 거라고?’민호는 머릿속이 하얘졌다. ‘서지은이 저렇게 대단한 작품을 만들었다고? 말도 안 돼! 설령 서지은이 했다 해도, 그건 우연히 잘 된 거겠지.’민호는 속으로 부정하면서도, 겉으로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행동했다. 그는 지은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아니, 서
민호의 비아냥과 깎아내리는 말들은 지은이 PX그룹에 있을 때부터 수년간 반복되어 왔다. 그녀는 이미 그런 말을 들을 만큼 들었고, 이제는 귀에 못이 박힐 정도였다. 과거의 지은이었다면 민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더 열심히 하겠다고 다짐하며 넘겼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이제는 민호의 교만한 태도와 비웃음이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만큼 거슬렸다. 마침 대회 측 관계자가 CY그룹 쪽으로 다가와 1위를 축하하려던 순간, 지은이 목소리를 높여 질문을 던졌다. “만약 외부에서 고급 작품을 구매해 출품한 경우,
지은이 PX그룹에 있을 때, 출품 작품 선정 과정에서 절대적으로 강조했던 원칙이 있었다. 바로 자수 공예 장인들의 이름을 작품에 절대 표시하지 않는 것이었다. 또한, 작품 선정과 투표 단계마다 다양한 부서의 관리자를 참여시켜 공정성을 확보하려 노력했다. 혹시라도 부정행위가 발생하면 정직하게 노력한 자수 공예 장인들에게 너무나 불공평한 결과를 초래했다.그녀는 이 원칙을 철저히 지키며 공정한 경쟁 환경을 만드는 데 주력했다. ...무대 뒤, 선정된 자수 공예 장인들이 대형 스크린에 비치는 작품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
지은은 긴장이 풀린 듯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입선했으면 다행히.’CY그룹에 막 발을 들인 그녀로서는, 첫 대회에서 반드시 성과를 내야만 자신의 자리를 확고히 할 수 있었다. 민호와의 지난 경험은 그녀에게 깊은 교훈을 남겼다. '손에 꽉 쥐고 있어야 내 거지, 그렇지 않으면 언제가 사라질 거야.'뒤쪽에 앉아 있던 CY그룹의 팀장들은 스크린에 비친 작품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그 색감의 조화, 표면에서 반짝이는 광택감, 그리고 투명함을 강조한 디테일! ‘이건 진짜 대가의 작품이야!’그들은 속으로 생각했다.
대회 분위기는 점점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이미 세 개 기업이 작품을 제출한 상황에서, 이제 PX그룹의 차례가 되었다. 양나인은 멀리서 지은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녀는 순간 놀라움과 기쁨이 뒤섞인 표정을 지었다. ‘서 대표님이 정말 PX그룹을 떠나서 CY그룹으로 가셨구나...’ 그녀는 잠시 마음이 복잡해졌다. ‘서 대표님이 그렇게 큰 회사로 가셨는데, 혼자서 팀원도 없이 잘 적응하실 수 있을까?’지은이 없는 PX그룹의 분위기가 퍽 어수선해졌기에, 나인은 지은의 현재 상황이 걱정스러웠다. ‘혹시 서 대표
지은은 민호의 말에 순간적으로 이마를 찌푸렸다. 지금은 상하관계를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그녀는 성재의 팔을 살짝 밀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대표님, 이런 자리에서 강 대표와 다투는 건 적절하지 않아요.” 그녀의 말은 냉정하고 이성적이었다. ‘강민호 같은 사람과 말다툼하는 건 내 품격만 떨어뜨리는 일이야.’하지만 성재는 그녀와는 달랐다. 성재는 말하지 않았지만, 그의 표정은 이미 냉랭하게 굳어 있었다. 이 상황을 놓치지 않은 이는 바로 그의 비서, 이무진이었다. 무진은 성재의 미묘한 신호를 읽고 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