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꼭 알아내야 한다고 생각했다.많이 고민했지만, 결국 강진혁 오빠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로 마음먹었다. 설득력 있는 이유가 필요했다.이런저런 이유를 생각하고 있을 때, 아줌마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전화를 받자마자 그녀의 화난 목소리가 들려왔다.“유형이가 우리 부부를 미치게 하려는 모양이야! 그 여자와 진짜로 결혼하려고 한다면, 나랑 네 삼촌은 차라리 죽어버리겠다고!”아줌마의 반응은 놀랍지 않았다. 나는 조용히 그녀를 달랬다.“아줌마,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요즘은 결혼 문제에 부모가 관여하기 어려운 세상이잖아요.”“우린 그걸 알지만, 이혼한 여자와의 결혼은 절대 안 돼!” 그녀는 단호하게 말했다.내 마음도 이미 복잡하고 상처받은 상태였기에, 더 위로의 말을 건네기도 힘들었다. 사실 그런 말을 해야 할 이유도 없었다. 결국 강유형과 조나연이 나에게 상처를 준 건데, 내가 굳이 그들을 변호할 필요가 있을까? 지금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관대한 태도라고 생각했다.“지원아, 너희 삼촌이 너무 화가 나서 식사도 거부하고 있어. 너밖에 못 말려. 네가 와서 좀 말려줄래?” 아줌마가 전화한 이유가 드러났다.아줌마의 부탁을 듣고 마음이 설렜다. 어쩌면 이 기회에 삼촌의 차량을 이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서 내가 원하는 정보를 확인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나는 곧장 가겠다고 대답했고, 아줌마는 전화기 너머에서 강유형을 계속해서 꾸짖다가 전화를 끊었다.하지만 이렇게 바로 강유형 집에 가는 것만으로는 계획을 완성할 수 있을지 확신이 없어서, 안전하게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강진혁에게도 전화를 걸었다.“지원아.” 강진혁 오빠는 여전히 다정하게 내 이름을 불렀다.“진혁 오빠.” 나는 먼저 그를 이렇게 불렀다. 그에 대한 존경을 표현하면서 우리가 친구라는 사실을 상기시키기 위해서였다.그에게 이런 부탁을 하는 내 자신도 이기적이라고 느꼈다. 그의 마음을 알면서도 그 마음을 이용하려는 건 아닌지
“삼촌...” 내 목소리가 떨리며 나도 모르게 삼촌을 불렀다.“지원아.” 삼촌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반겼다.“머리가... 어떻게...” 나는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만지려 했다.그는 살짝 놀란 듯 물었다. “내 머리가 왜? 헝클어졌니?”그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삼촌은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그래? 아줌마가 무슨 말이라도 했니? 그 사람 말은 신경 쓰지 마. 늘 과장하잖아.”그는 자신의 머리카락이 거의 하얗게 변한 걸 아직 모르고 있었다.며칠 전까지만 해도 새까맸던 머리가, 하루아침에 80%는 희어져 있었다. 한순간에 정정한 중년에서 늙어버린 것 같았다.나는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조용히 그를 끌어안았다. 하지만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삼촌은 나를 다독이며 말했다. “왜 울어? 나 괜찮아. 그저 혼자 좀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야. 네 아줌마가 계속 성가시게 해서 너까지 부른 거야.”그는 내가 하루 종일 문을 잠그고 서재에 틀어박혀 있는 걸 걱정한 줄 알았다.나는 그의 어깨에 고개를 젓고 목이 메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자, 안에 들어가서 차 한 잔 마시자. 삼촌이 직접 끓여줄게.” 삼촌은 나를 걱정시키지 않으려는 듯 의연하게 말했다.하지만 하룻밤 사이 그렇게 변해버린 머리카락이 이미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삼촌.” 나는 그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강유형... 그냥 두세요. 더는 신경 쓰지 마시고요.”지금의 삼촌이 너무 안쓰러웠다. 마치 친아버지처럼 가슴이 아려왔다.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눈빛이 무거웠다. “너무 실망스러웠어. 내가 그 아이를 너무 오냐오냐 키운 탓이야.”“그건 삼촌 탓이 아니에요. 강유형도 이제는 자기 주관을 가진 어른이잖아요.” 나는 애써 그를 달랬지만 삼촌의 표정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삼촌은 겉으로는 온화하고 조용한 사람이었지만 속으로는 굳건하게 자신을 지키는 성격이었다. 누구의 말에도 쉽게 흔들리지 않는 성격이었다.“지원아, 여기 앉
그래, 사람은 누구나 나이를 먹지만 하룻밤 사이에 이렇게 세월이 무겁게 내려앉을 줄이야... 가슴이 아팠다.삼촌은 나를 위해 홍차를 끓여주셨지만 내 입속에 남은 건 씁쓸함뿐이었다.“이 홍차 가져가렴. 집에서도 끓여 마실 수 있을 거야. 피부에도 좋고 몸에 좋아.” 삼촌은 남은 찻잎을 정성스럽게 포장해 내 손에 쥐여 주셨다.삼촌은 마치 나를 친딸처럼 챙겨주셨다. 그 속에는 미안한 마음도 담겨 있는 듯했다. 내가 그걸 거절하면 삼촌 마음이 더 상할까 봐 조용히 받아들었다.“네, 다 마시면 또 삼촌께 부탁드릴게요.” 나도 가볍게 대답하며 삼촌의 마음을 덜어드렸다.“그래, 뭐든 원하면 말해라. 지원아, 넌 내 딸이나 다름없다.” 삼촌의 진심 어린 말에 나도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말했다.“저에게도 삼촌은 친아버지나 다름없어요.”학창 시절에도 항상 부모님이 안 계시다는 외로움을 느끼지 않도록 삼촌이 늘 신경 써주셨다. 가끔은 아줌마가 가고 싶어 해도 삼촌이 “내가 가야, 교장 선생님도 한 번 더 신경 써주지 않겠어?”라고 하시며 직접 학교에 오셨다.삼촌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내 시선이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향하자 미소를 지었다. “지원아, 네 아줌마가 나 걱정 많이 하던데 이렇게 된 걸 알면 얼마나 더 속상해할까?”“삼촌, 지금도 멋지세요.” 나는 웃으며 말했다.삼촌도 머리를 손으로 매만지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래, 나도 멋지지 않니?”나는 눈물이 고이도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삼촌은 언제나 멋져요.”우리가 웃으며 이야기하고 있을 때, 갑자기 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줌마가 목소리부터 내셨다. “지원이 아니면 당신 같은 고집불통 노인은 누가 감당하겠어요!”아줌마는 문 앞까지 오더니 우리가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을 보고 말없이 놀란 표정을 지으셨다. 아줌마의 얼굴에 담긴 미소는 금세 굳어졌고 믿기지 않는다는 듯 삼촌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삼촌과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고 나는 아줌마가 충격받을까 봐 급히
내가 온갖 수를 써서라도 타고 싶었던 차에 이렇게 쉽게 탈 수 있을 줄이야. 이제 남은 건 그 주소를 알아내는 건데 아직도 갈 길이 멀다.“저기, 삼촌, 차 좀 잠깐 세워주세요. 속이 안 좋아서 토할 것 같아요.” 차가 반쯤 달렸을 때 약국이 보이자, 일부러 아픈 척하며 차를 멈춰달라고 부탁했다.“그래, 그래.” 삼촌은 백미러로 날 한 번 쓱 보더니 서둘러 차를 세웠다.차가 멈추자 삼촌은 긴장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지원아, 어디 아픈 거야? 병원에 갈까?”“아까 삼촌이 끓여주신 차를 마시고 속이 좀 찬 것 같아서 그래요.” 일부러 삼촌을 언급하면 더 신경 써 줄 것 같았다.배를 살짝 감싸안으며 말했다. “삼촌, 미안한데 오메프라졸 약 좀 사다 주실 수 있을까요? 그거 하나 먹으면 괜찮아질 거예요.”삼촌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여전히 불안한 듯했다. “그래도 병원에 가야 하는 거 아니야?”더 이상 말하지 않자, 삼촌은 내가 굳이 병원을 원하지 않는다는 걸 눈치챈 듯했다. 오랫동안 삼촌 곁에서 일한 사람답게, 내 말 한마디 한마디를 놓치지 않았다.그가 약을 사러 내려가는 걸 보면서 시간을 조금 더 끌어보려고 덧붙였다. “삼촌, 물도 한 병만 사다 주세요.”“찬물은 안 돼, 차 안에 미지근한 물 있으니까 돌아와서 줄게.” 삼촌은 약국으로 향하며 몇 번이나 뒤돌아보았다.그가 약국 쪽으로 서둘러 가는 걸 확인하자, 나는 조심스럽게 일어서서 내비게이션의 운행 기록을 검색했다. 이런 짓을 하면서도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고 마음이 바빠져 한 번도 창밖을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다행히 약국은 길을 건너야 하기에 삼촌이 돌아오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듯했다.서둘러 운행 기록을 뒤졌지만 이상하게도 내가 찾고자 하는 주소는 없었다. 한 달 전의 기록까지 다 뒤졌는데도 말이다. 설마 내가 뭔가 착각한 걸까?아직 포기하지 않고 계속 찾는 중에, 삼촌이 약을 들고 돌아오는 모습이 보였다. 심장이 다시 빠르게 뛰기 시작했고 나는 창밖을 살피
나는 그들의 생일 뒤 세 자리 숫자를 입력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렇게 간단한 조합은 너무 쉽게 유추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강유형이 부모님께 더 사랑받는 것처럼 보였던 기억을 떠올리며 그의 생일을 앞에 두고 강진혁의 생일을 뒤에 붙였다.마지막 숫자를 입력할 때는 심장이 터질 것 같았고 손끝까지 떨렸다. 마침내 비밀 경로라는 회색 문구가 환하게 변하며 비밀번호가 맞았음을 알렸다. 화면에 뜬 “세강 요양원”이라는 네 글자를 보자 나는 가슴 깊은 곳에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세강 요양원은 내가 조사했던 세 곳 중 하나였다. 지금까지 모든 노력이 바로 이 다섯 글자를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다.결국 목표를 달성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불안이 남아 있었다. 나는 급히 검색 기록을 지우려고 손을 뻗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삼촌이 차 문을 열었다. 그의 시선이 내 손과 내비게이션 화면으로 번갈아 향했다. 내 손은 미세하게 떨렸고 등에선 땀이 흘렀다.“지원아, 뭘 하고 있는 거야?” 삼촌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나는 얼른 대답했다.“그냥 음악 좀 들으려고 했는데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어요.”삼촌은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빛을 거두지 않았다. 속이 아프다며 차를 멈춘 사람이 음악을 듣고 싶어 한다는 건 아무래도 설득력이 없었다.이 상황에서 나는 어떻게든 거짓말을 이어 나가야 했다.“속이 너무 아파서 아는 의사 친구한테 물어봤는데 가벼운 음악을 들으면 좀 나을 거라더라고요. 병원 가서 검사도 받아보래요. 급성 장염이나 맹장염일 수도 있대요.”말하면서도 스스로가 너무 한심하고 부끄러웠다. 언제부터 내가 이런 거짓말까지 해야 하는 사람이 되었을까? 하지만 지금은 이럴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의 죽음이 정말 사고였는지, 그 진실을 밝혀야 했으니까.“그랬구나.” 삼촌은 의심스러운 표정을 거두며 약봉지를 건네주었다.“그럼 빨리 병원으로 가자. 음악은 내가 틀어줄게.”“감사합니다, 삼촌.” 나는 얼른 약을 받아 입에 넣고 물도 없이 삼켰다. 약효를 기
삼촌과 아줌마는 정말 나에게 너무 잘해주셨다. 그래서인지 그분들을 의심하는 것조차 나 스스로 죄책감을 느낄 만큼 마음이 불편했다.그런데 안리영마저 그런 가능성을 염두에 두는 말을 하니 가슴속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공포감이 몰려왔다.“그래도 난 알아봐야 해!”이런 상황일수록 진실을 반드시 밝혀야 했다. 아버지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서라도, 삼촌에게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안리영은 내 생각을 읽었는지 더 이상 말리지 않았고 대신 짧게 말했다.“언제든 네 곁에 내가 있다는 걸 잊지 마.”그 말속에는 이미 무언가 답을 알고 있는 듯한 기운이 느껴졌다.나는 멈추지 않기로 했다. 진실을 찾을 때까지 결코 포기하지 않을 생각이었다.응급실을 나온 뒤 나는 곧장 택시를 잡아탔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바로 그곳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삼촌의 운전기사가 서 있었다. 그의 손에는 약봉지가 있었고 전화를 하며 걸어가고 있었다.“...네, 차량 내 내비게이션을... 음악을 듣고 싶다고...”그의 말을 듣자 등골이 서늘해졌다. 굳이 듣지 않아도 그가 누구에게 보고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그렇다면 왜 보고를 하는 걸까? 차 내 내비게이션은 그냥 흔한 장비 아닌가?머릿속은 점점 혼란스러워졌고 그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계속해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더는 지체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바로 세강 요양원으로 가야 했다.하지만 내가 도착했을 때, 요양원은 철저하게 보안 관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입구에서 보안 요원이 방문 목적과 방문자를 묻더니, 이름과 방 번호까지 요구했다.이름은 알지만 방 번호는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섣불리 용진표라는 이름을 언급했다간 그들이 본인에게 확인 전화를 넣을 가능성이 컸다. 그렇게 되면 내 의도가 전부 드러나게 될 터였다.결국 가족 상담을 위해 왔다고 둘러댔지만 보안 요원은 이곳은 예약제로 운영되며 상담이 필요하지 않다며 단호히 거절했다.고급 요양원은 역시 다르구나 싶었다. 아무나 드나들
정적이 감돌며 숨이 막힐 듯 답답했다.전화를 끊을 적당한 화제를 찾아야 하나 고민하던 순간, 아줌마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너희 삼촌이 이렇게 된 건 전부 그 여자 때문이야. 그래서 난 절대 그 여자를 받아들일 수 없어.”아줌마의 말투는 단호했고, 이를 악물며 내뱉는 그녀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등골이 서늘해졌다.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한동안 침묵했다.“지원아.”아줌마가 내 이름을 부르며 말했다.“시간 날 때 삼촌 좀 자주 찾아와 줘. 네가 와야 삼촌도 좀 마음이 풀리실 거야.”그 말이 내게 큰 부담으로 다가왔지만, 나는 억지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전화를 끊고 나니, 온몸에 힘이 빠져 자동차 좌석에 기대어 멍하니 앉아 있었다. 무언가에 짓눌린 것처럼 움직일 수도, 제대로 숨 쉴 수도 없었다.집에 도착한 나는 소파에 웅크려 앉아 지금까지의 일들을 천천히 되짚었다.모든 실마리들이 차례로 연결되고 있었지만, 결국 용진표로 향하는 듯했다.특히 용진표와 삼촌이 관련이 있고, 용진표가 있는 요양원 주소가 암호화되어 있다는 사실은 더욱 수상했다.만약 숨길 일이 없다면, 굳이 비밀번호까지 설정할 이유가 있을까?머릿속이 점점 복잡해졌다.답답함에 나는 소파 쿠션을 얼굴 위로 덮으며 스스로를 가뒀다.이렇게 하면 잠시나마 생각을 멈출 수 있었다. 하지만 머리가 터질 것처럼 혼란스러울 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처음에는 환청인가 싶었다.그러나 이어서 문밖에서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나는 쿠션을 내리고 문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아직 낮이라 위험할 것 같진 않았지만, 그래도 조심스레 물었다.“누구세요?”“나예요. 진정우.”그 목소리에 순간 멍해졌다. 진정우가 내 집에 찾아오다니.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문을 열자, 검정 티셔츠와 작업복 바지를 입은 진정우가 서 있었다. 여전히 단정하면서도 매력적인 모습이었다.“여긴 왜 왔어요?” 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그는 말 대신 손을 들어 내 이마에 얹었다.
“몰라요.”진정우는 짧고 간결하게 세 글자로 대답했다.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모르는데 바로 문을 두드렸어요?”그는 썰어 놓은 채소를 접시에 옮기며 태연하게 대답했다.“아래층 아줌마가 알려주셨어요. 당신이 집에 돌아왔다고요.”“...”나는 차 한 모금을 마시며, 요리하는 그의 모습을 감상했다.그런데 갑자기 진정우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뭐가 의심스러워요?”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장난스럽게 대답했다.“의심이라기보다는... 당신이 나를 미행한 거 아닐까 싶어서요.”“뭐라고요?”그는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농담이에요. 정우 씨가 그렇게 한가하지 않다는 건 알죠.”말을 마치고 나는 거실로 돌아가 소파에 앉아 차를 마셨다.차 몇 모금에 몸이 나른해졌다. 휴대폰을 보며 이것저것 확인하다 보니, 어느새 눈꺼풀이 무거워지면서 그렇게 잠에 빠졌다.꿈속에서 대머리 남자가 나를 붙잡아 끌고 갔다. 용진표는 그에게 나를 죽이라고 명령했다. 눈앞에서 번쩍이는 칼날이 내게 다가오자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지원 씨!”“지원 씨, 일어나요!”어느새 누군가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눈을 번쩍 뜨니, 진정우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손이 내 머리를 단단히 감싸고 있었다.“악몽 꿨어요?”그의 낮은 목소리가 조용히 울렸다.아직도 꿈의 공포에서 헤어나지 못한 나는 헐떡이며 말했다.“그날 당신을 둘러싼 그 대머리 남자, 용진표 맞아요. 나 그 사람 봤어요.”진정우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그걸 어떻게 알아요?”“내가 봤다니까요.”나는 그의 손을 더 꽉 잡았다가 천천히 놓았다.“이건 제 일이에요. 당신이 끼어들 필요 없어요. 알겠죠?”그의 목소리는 단호하면서도 무겁게 울렸다.나는 변명하고 싶었다. 진정우의 일이 아니라, 내 아버지의 죽음을 조사하다가 우연히 알아낸 것뿐이라고.하지만 그는 내게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말했다.“용진표는 아주 위험한 사람이에요. 절대로 끼어들지 마요. 정말이에요.”그의 진지
“그럼 돌아가. 하지만 지금 네 상태로는 혼자 갈 수 없어.”강유형이 단호하게 말했고 잠시 침묵하다가 강진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형, 지원이랑 같이 가줘.”강진혁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알았어.”나는 거절하고 싶었지만 지금 내 상태로는 아무리 거절해도 그들이 날 혼자 두고 갈 리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럼 너는?”나는 강유형의 머리에 감긴 붕대를 바라보며 물었다.“난 여기 남아서 신지태 나오면 같이 갈 거야.”강유형의 목소리는 단호했다.신지태가 낯선 곳에서 그런 일을 겪고 나왔는데 아무도 기다려주는 사람이 없다면 얼마나 허전할까. 하지만 강유형의 지금 상태로 남아 있는 것도 신지태에게는 더 큰 부담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네가 이 상태로 있으면 신지태가 더 죄책감 느낄 텐데.”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괜찮아. 사고 얘기는 꺼내지 않을 거니까.”강유형은 단호히 답했다. 더는 설득해 봤자 소용없을 것 같아서 나는 화제를 돌렸다.“지태 오빠, 경기 다시 뛸 수 있을까?”이번에는 강진혁이 대답했다.“아직 몰라. 구단 쪽 반응도 봐야 하고 Q클럽의 태도에 따라 다를 거야.”문득 진정우가 떠올랐다. 이 상황에서 가장 적합한 해결책을 줄 사람은 진정우일 텐데 지금은 그에게 도움을 청할 수 없다는 사실이 답답했다.나는 한숨을 쉬며 휴대폰을 꺼내 귀국 비행기표를 예약하기 시작했다.“내 것도 같이 예약해 줘.”강진혁이 말하기 전까지는 그의 표까지 예약해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지만 그렇게 말하니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그럼 여권 정보 줘.”강진혁은 여권을 건네는 대신 휴대폰을 꺼내 들고 말했다.“이미 예약했어. 두 장.”그의 말에 잠시 놀랐지만 그는 이어 말했다.“짐 챙겨. 한 시간 뒤에 공항으로 가자.”나는 무슨 말을 하려다 멈췄고 강진혁이 먼저 강유형을 향해 말했다.“머리 다친 건 별일 아니지만 이제 몸 관리를 더 철저히 해야 해. 네 몸 상태가 예전보다 훨씬 더 중요해졌다는 걸 잊지 마.”그의 말
뉴스?무슨 뉴스?순간 머릿속이 멍해졌다.내가 깨어난 이후로 아무도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나는 망설임 없이 문을 열었고 문 앞에 있던 강유형과 강진혁이 동시에 나를 바라봤다.“무슨 뉴스야?”내가 직설적으로 묻자 두 사람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아마도 나한테 뭔가를 숨기려는 듯했다.하지만 나는 그들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다 들었으니까 숨기지 말고 제대로 말해줘.”강진혁은 짧게 한숨을 쉬고 핸드폰을 꺼냈다.강유형이 말리려는 듯 보였지만 내가 강한 눈빛으로 제지하자 그도 말없이 물러섰다.“이미 알게 된 이상 차라리 직접 확인하고 진정우랑 제대로 얘기하는 게 나을 거야.”강진혁이 말하며 핸드폰을 건넸다.핸드폰 화면에는 웹 기사 캡처가 떠 있었다.[희귀한 황금 혈액형 연인, 여자 친구가 800cc의 피로 남자 친구를 구해줌. 이제 내 피가 당신의 몸속에 흐르고 있어요.]로맨틱한 제목과 함께 내가 강유형의 손가락을 잡고 응원하던 사진이 실려 있었다.그저 힘내라는 뜻에서 손을 잡았던 순간이었지만 제목과 사진이 더해지니 마치 우리가 생사를 함께하는 연인처럼 보였다.“이 뉴스 언제 올라온 거야?”나는 강진혁을 보며 물었다.“3일 전이야. 네가 수혈을 끝내고 바로 올라왔어. 내가 병원에 도착했을 때 이미 실시간 검색어에 올라와 있었고 진정우도 이미 와 있던 상태였어. 진정우가 아마 이걸 봤던 게 분명해.”그 순간 나는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강진혁은 내 표정이 안 좋아지는 걸 눈치채고 조용히 덧붙였다.“바로 사람을 시켜 이 뉴스는 삭제했어. 지금은 인터넷에서 찾아볼 수 없어.”그게 무슨 소용일까.진정우는 이미 이 기사를 봤을 텐데 말이다.나는 다른 사람들이 오해하는 건 상관없었지만 진정우만큼은 아니었다.그가 아무리 나를 믿고 있더라도 이 사진과 제목은 충분히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했다.“이 일은... 내가 진정우한테 직접 설명할게.”강유형이 말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이런 일은 설명할수록 더 복잡
나는 휴대폰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그래.]그 단어 하나가 머릿속을 텅 비게 만들었다.잠시 후, 나는 내가 보낸 메시지를 다시 확인했다. 이때 강유형이 욕설을 내뱉으며 말했다.“저 자식, 도대체 뭘 하겠다는 거야?”그는 다시 진정우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이번에는 전원이 꺼져 있었다.나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휴대폰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리고 빠르게 창가로 걸어가 밖을 내다보았다. 어둠이 내려앉은 밤공기가 마음을 더 무겁게 만들었다.내 뒤에서 발소리가 들리자 나는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잠시만 혼자 있고 싶어요.”강유형과 강진혁은 내 마음을 이해했는지 더는 말없이 문을 닫고 나갔다.그 순간, 참았던 눈물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내가 왜 울고 있는 걸까? 그가 그렇게 쉽게 헤어지자고 한 말 때문일까?아니면 내가 이렇게 기다렸음에도 나를 보러 오지 않은 것에 대한 서운함 때문일까?나는 진정우를 기다렸고 그는 왔지만 나는 결국 얼굴조차 보지 못했다.그저 긴 잠에 빠졌을 뿐인데 겨우 사흘 동안 못 봤다고 나를 이렇게 대할 수 있는 걸까?분명히 뭔가 이유가 있을 것이다. 혹시 나를 구하는 과정에서 크게 다쳐서 나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은 걸까?아니면 그가 말하지 못할 사정이 있는 걸까? 아니면 그의 가족, 특히 그 유명한 진씨 가문이 나 같은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는 걸까?머릿속은 온갖 상상으로 뒤엉켰지만 나는 스스로를 억누르며 생각을 멈췄다.이럴 때일수록 직접 확인하는 게 나을 테니까.하지만 그가 전화를 꺼둔 탓에 다른 방법을 생각해야 했다.그 순간, 문득 진소영이 떠올랐다. 나는 그녀와 시차가 있다는 사실조차 잊고 전화를 걸었다.“언니!”진소영의 잠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자고 있었던 모양이다.나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잠시 머뭇거렸다.“언니?”그녀가 다시 불렀다.“잘못 걸었어. 미안해, 자는데 깨웠지?”내 목소리에 감정을 숨기려 애썼다.내가 지금 처한 상황을 그녀가 알게 된다면 분명히 걱정할 것이다.“아니에요
“지원아!”강유형이 손을 뻗어 나를 붙잡았다.나는 그의 머리에 감긴 붕대를 잠시 바라보다가, 그와 함께 들어온 강진혁을 향해 말했다.“정우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아요.”그러자 강진혁은 미간을 찌푸렸다.“무슨 일이야? 어떻게 알아?”“확실한 건 아닌데 그냥 느낌이 그래요.”나는 힘없이 대답했다.“전화했더니 바쁘다면서 나중에 연락하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지금까지 아무 소식도 없어요.”나는 이유를 설명했다.“그럼 다시 전화해 봤어?”강유형이 물었다. 사실 다시 걸어보진 않았다.진정우가 나중에 연락하겠다고 했으니, 나는 그냥 기다리고만 있었다.“내가 걸어볼게.”강유형이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한참 후, 진정우의 목소리가 들렸다.“강 대표님.”바로 내 앞에서 전화했기에 대화가 또렷하게 들렸다.“정우 씨, 지금 어디예요?”강유형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비행기 안이에요.”진정우의 대답에 내 숨이 멎는 것 같았다. 강유형이 나를 힐끗 보며 다시 물었다.“비행기? 어디로 가는 중이죠?”“귀국 중입니다.”이 짧은 두 글자에 내 심장은 쥐어짜이는 듯했다. 나는 강유형의 휴대폰을 낚아채며 말했다.“정우야, 무슨 일 생긴 거야?”아무 대답이 없자 내 손은 떨리기 시작했다.“말 좀 해봐. 무슨 일 있는 거야? 지금 어디에 있어? 지금 거짓말하고 있는 거지.”그가 깨어난 나를 보러 오지 않은 이유가 이해되지 않았다. 아무리 바빠도 이런 일에는 반드시 와야 하지 않나?“아니야. 거짓말 안 했어.”진정우가 차분하게 답지만 나는 그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못 믿어. 전에 나 속인 적 있잖아.”그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그래, 나는 거짓말쟁이야. 하지만 이번엔 아니야. 못 믿겠으면 사진 보내줄게.”전화가 끊기고 곧 내 휴대폰에 메시지가 도착했다.그는 비행기 좌석에 앉은 자신의 사진과 함께 비행기표 사진을 보내왔다.그가 진짜 귀국 중이라는 사실이 확인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단 한 번도 나를 보러 오지
강진혁이 내가 사흘 동안 의식 없이 누워 있었다고 말했다. 강진혁이 사흘 동안 이곳에 있었다면, 전화로 곧 오겠다고 했던 진정우도 이미 왔었을 것이다. “물 좀 마셔.”강진혁이 컵을 건네며 말했다. 나는 그의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진정우는 어디 있어요?”그의 표정이 잠시 굳어졌다.“일단 물부터 마셔.”그 말에 불길한 예감이 들었고 목이 점점 더 아파졌다. “아직 안 왔나요?”“아니.”그는 침대 옆에 앉으며 대답했다.“왔었어.”“그럼 지금은 어디 있어요?”내가 의식이 없던 동안 그는 당연히 내 곁에 있어야 하지 않았을까? 아니면 내가 벌이라며 그를 보지 않겠다고 한 말을 그대로 받아들인 걸까?“떠났어. 아마 널 다치게 한 사람들을 처리하러 간 것 같아.”그가 말하며 미소를 지었다.“정말 진정우밖에 없네. 깨어나자마자 걔부터 찾고.”그의 농담에 약간 안도했지만 떠오르는 위험한 상황들이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혼자 갔나요? 언제 떠났는데요?”“정확히는 모르겠어. 하지만 걱정하지 마. 널 구할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이라면 그 문제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을 거야.”강진혁의 말에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그는 진정우의 능력을 신뢰하는 것 같았다.내가 알던 진정우는 평범한 회사원이었을 뿐인데 그의 진짜 정체를 알고 난 후로는 모든 것이 달라졌다. 심지어 해외에서도 이렇게 영향력을 발휘하다니. 문득 강유형이 내게 했던 질문이 떠올랐다.“너 정말 진정우에 대해 다 알아?”지금 생각해 보니 나는 정말 그를 잘 알지 못했던 것 같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더 잘 아는 듯했다.나는 강진혁이 건넨 물을 몇 모금 마시며 물었다.“오빠도 진정우의 정체를 알고 있었어요?”그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너보다 조금 더 일찍 알았어.”“근데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어요?”그렇게 묻고 나니 스스로가 우스웠다. 내 남자 친구의 진짜 정체를 왜 다른 사람이 나에게 말해줘야 한다고 생각했을까?“지원아, 이유가 있을 거야. 직접 만나서 이
수혈을 과도하게 한 탓인지 나는 깊은 잠에 빠져 한참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꿈속에서 누군가가 계속 내 귓가에 속삭이고 있었다.“지원아, 꼭 조심해야 해. 다치거나 피를 흘리면 아무도 널 구할 수 없어.”“왜 그렇게 많은 피를 준 거야... 그러다가 죽으면 어쩌려고.”“바보 같은 년, 누가 너더러 피를 주라고 했어?”“지원아, 제발 날 구해줘. 나... 너무 추워.”꿈속의 목소리는 부모님, 진정우, 그리고 강유형이었다.나는 뭐라도 대답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그러다 꿈속 장면이 멈췄고 강유형이 온몸에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리고 있는 장면이 보였다.마치 수도꼭지를 틀어놓은 것처럼 그의 몸에서 피가 끝없이 흘러내렸다.나는 겁에 질려 소리쳤다.“강유형! 강유형!”손을 뻗어 그의 상처를 막으려 했지만 아무리 막아도 피는 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공포에 몸이 떨리며 나는 그를 계속 불렀다.“강유형! 강유형!”“지원아, 일어나. 제발 정신 좀 차려!”급한 목소리와 함께 꿈에서 깨어났다.눈을 뜨자마자 나는 거친 숨소리를 내쉬었다. 꿈속에서 느낀 공포가 여전히 온몸을 지배하고 있었다.“지원아.”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고 고개를 돌리자 강진혁이 내 손을 꼭 잡고 있었다.“악몽이라도 꿨어?”그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나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빼려 했다.강진혁은 내 손을 놓아주며 물었다.“여기까지 어떻게 오셨어요?”나는 목이 칼에 베인 듯 아파 말을 내뱉는 게 너무 힘들었다.“너와 유형한테 이렇게 큰일이 났는데... 내가 안 올 수 있겠어?”강유형의 생각이 내 머릿속에 떠오르며 꿈속 장면과 현실에서 그가 위급했던 모습이 겹쳤다.나는 아픈 목소리로 물었다.“강유형... 어때요?”강진혁은 다행히도 평온하게 대답했다.“이미 깨어났어. 너를 몇 번 보러 오기도 했어. 하지만 쉬게 하려고 내가 다시 병실로 돌려보냈어.”그의 말을 듣고 나는 깜짝 놀랐다.“제가 그렇게 오래 잤다고요?”창밖을 바라보니 날이 밝았고 사고가
평소 병원에서 검사 결과가 나오려면 최소 30분은 걸리는데 이번엔 단 몇 분 만에 결과가 나왔다.의사는 매우 기뻐하며 말했다.“좋습니다. 지금 바로 수혈을 진행해야 합니다. 대략 400cc에서 600cc 정도 필요할 수 있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나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괜찮아요. 더 필요하다면 더 해도 돼요.”강유형이 내 탓에 다친 것은 아니지만 그가 과다 출혈로 죽게 놔둘 수는 없었다.나는 의사의 안내로 옷을 갈아입고 응급실로 들어갔다.나는 구급 침대에 누워 있는 강유형을 보았다. 그의 얼굴은 핏기가 없었고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의사가 그가 언제든지 생명이 위태로울 수 있다고 말한 생각에 나는 마음이 불안해졌다. 나는 그의 옆으로 걸어가 그의 새끼손가락을 가볍게 잡으며 속삭였다.“강유형, 꼭 버텨야 해. 힘내.”그는 스스로 생명줄을 놓아서는 안 되었고 나는 그의 생명을 이어주기 위해 수혈을 해야 했다.나는 그의 옆 침대에 누웠고 날카로운 바늘이 내 팔을 찔렀다. 붉은 피가 투명한 관을 따라 그의 몸으로 흘러 들어갔다.얼마나 많은 피를 뽑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그의 상태가 나아질 때까지 버티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피가 계속 빠져나가자 나는 점점 눈앞이 흐려지고 머리가 어지러워졌고 졸음이 밀려왔다.나는 이것이 혈액 손실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나는 수혈을 멈출 수 없었다. 강유형을 살리려면 내 피가 필요했기 때문이다.“이미 600cc나 뽑았습니다.”한 의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하지만 환자의 혈압과 호흡이 아직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더 계속 수혈해야 합니다.”주치의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고 그가 말을 꺼내기 전에 나는 대답했다.“더 뽑아주세요. 괜찮아요.”“더 뽑으면 윤지원 씨가 실신할 수 있습니다.”의사가 나를 보며 경고했다.“아니에요. 지금 제 상태는 아직 아주 좋아요. 정말 괜찮아요. 더 뽑아주세요.”아마도 내가 너무 집착해서 그런 것 같았기에 의사는 주치의에게 물었
우리는 마침내 구조되었다.구조대원 중 한 명은 신지태를 만나러 갈 때 나를 태워준 운전기사였다.나는 그가 진정우의 사람임을 알고 있었다.차가 심하게 찌그러져서 차를 절단해야만 강유형과 운전기사를 구출할 수 있었고 그 과정에서 나와 강유형의 핸드폰도 함께 찾아냈다.“어? 이 전화 아직도 통화 중이네요.”그는 핸드폰을 내게 건네주었다.하지만 그건 내 핸드폰이 아니라 강유형의 것이었다.나는 전에 이 핸드폰으로 진정우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그가 전화를 끊지 않았던 것일까?나는 혼란스러운 상태로 핸드폰을 받아 들여다보니 통화가 막 끝난 상태였고 통화 시간은 67분 12초로 표시되어 있었다.진정우가 계속 전화를 끊지 않았다는 것은 아마도 강유형과 내가 나눈 대화를 들었을까?하지만 강유형과 나는 별로 중요한 얘기를 하지 않았던 것 같아 안도했다.깊이 생각할 여유도 없이 나는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옮겨졌다.검사 결과 나는 가벼운 상처를 입었지만 강유형과 운전기사는 매우 위중한 상태였다.강유형은 과다 출혈로 인한 쇼크 상태였고 운전기사는 머리를 심하게 다쳐 의식이 없었다.셋 중에서 내 상태가 가장 양호했다.이는 전적으로 강유형이 끝까지 자신의 몸으로 나를 보호했기 때문이었다.“강유형 씨의 가족이나 보호자가 계십니까?”의사가 다가와 물었다.우리는 낯선 나라에 있었고 지금 이 순간 강유형의 가족은 그의 곁에 없었다.나는 결국 나서야 했다.“제가 가족입니다. 강유형 씨의 상태는 어떤가요?”의사의 설명은 충격적이었다.“현재 환자가 과다 출혈 상태입니다. 문제는 환자의 혈액형이 매우 희귀한 RhD 음성, RhNULL이라는 점입니다. 우리 병원에는 이 혈액의 재고가 전혀 없어서 즉시 수혈하지 않으면 환자의 생명이 위험할 수 있습니다. 보호자께서는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나는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의사가 강유형 씨의 생명이 위험하다고 말한 것도 충격적이었지만 그의 혈액형이 RhNULL이라는 사실은 더욱 놀라웠다.“혹시 같은 혈
강유형과 헤어진 이후로 이렇게 가까이에서 그를 바라본 건 처음이었다.지금 그는 바로 내 앞에 있었고 심한 상처를 입은 상태였다.차가 뒤집힐 때 나를 안고 보호해 준 사람이 그였고 나 때문에 이렇게 심하게 다쳤을 것이다.“강유형, 말 좀 해봐.”내가 뭐라고 해도 소용없을 것 같았다. 내가 말을 걸어도 그는 점점 더 잠에 빠질 뿐이었다.“무슨 말을 하라는 거야?”그가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하고 싶은 말 다 해봐. 우리가 헤어진 후에 무슨 생각 했는지... 조나연 얘기도 좋고, 얼마 전 네가 왜 갑자기 사라졌는지 말해도 좋아.”나는 마음속에 있는 말들을 한꺼번에 쏟아냈다.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혹시 잠이 든 건가 싶어 다시 불렀는데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지원아, 난 정말 널 사랑했어.”나는 숨을 멈추고 그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았고 뭐라 답해야 할지 몰랐다.“넌 내가 유일하게 좋아했던 여자야. 너를 본 이후로 다른 여자는 그냥 평범한 사람으로만 보였어. 그 어떤 설렘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그는 미소처럼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계속 말했다.“이런저런 여자들이 나한테 고백도 하고 출장 중엔 누군가는 옷까지 벗고 내 침대에 들어와 있었던 적도 있었어. 하지만 난 말하지 않았어. 네가 걱정하고 상처받을까 봐.”“나는 항상 너를 지키고 싶었어. 그래서 어떤 여자를 만나도 손끝 하나 대지 않았어. 그들이 너무 더럽게 느껴졌거든. 내가 그들을 만지면 너까지 더럽혀질까 봐.”그는 잠시 숨을 골랐다가 다시 말했다.“조나연 일이 벌어진 것도 나도 모르게 빠져버린 함정이었어. 조나연은 겉으로 너무 잘 꾸며져 있었어. 아마 하늘이 일부러 우리를 방해한 거겠지...”그가 한참 힘을 주어 눈꺼풀을 들어 올려 나를 바라보았다.항상 강하고 당당했던 그가 이렇게 무기력해진 모습은 처음이었다.“우리 운명이 거기까지였나 봐. 아마도 서로 진심이 부족했나 보지. 우리는 하늘도 어쩌지 못할 운명이었겠지.”나는 그의 말을 받아줬다.강유형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