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그룹.용진표.회사 이름도, 대표의 이름도 너무나 익숙했다.왜냐하면 광화 그룹은 강유형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KS그룹의 최대 파트너였고 강유형의 부모님과 용 대표님은 사적으로도 아주 친한 사이였다.하지만 이 계약서가 열 살 때 돌아가신 아버지의 것이라는 사실은 나를 놀라게 했다.아버지는 KS 그룹의 직원도 아니었고 당시에는 KS과 아무런 연관이 없던 분이셨다. 그런데 왜 이 계약서를 아버지가 갖고 계셨던 걸까?계약 내용을 다시 자세히 살펴보니, 이는 청정에너지 개발을 위한 협약이었다.현재 그 사업은 KS 그룹이 성공적으로 운영하고 있어, 엄청난 수익을 내는 분야였다.엄밀히 말하면 이 계약서는 KS 그룹의 자산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강유형의 아버지 서명이 없었다.나는 계약서를 옆에 두고 아버지의 노트를 펼쳤다.노트에는 대부분 업무 계획이나 이해하기 어려운 화학 기호들로 가득 차 있었다. 계속해서 페이지를 넘기다가 마지막 페이지에서 "계약이 순조롭기를"이라는 짧은 문구를 발견했다.그리고 그다음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아마도 그 이후로 아버지는 사고를 당하신 것 같다.갑자기 아버지가 사고 나기 전날 했던 말씀이 떠올랐다.“다윤야, 내일이 지나면 아빠가 너에게 놀이공원을 지어줄 수 있을 거야.”그때 나는 무슨 말인지도 모른 채 신나서 아빠에게 달려가 안기기만 했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버지가 광화 그룹과 계약을 성사했다면, 아마 지금의 KS 못지않은 대기업으로 성장했을지도 모른다. 놀이공원이 아니라 상업 제국을 이룰 수도 있었겠지.그러나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의 사고가 정말 단순한 사고였을까? 이 계약과 관련된 누군가가 개입한 것은 아니었을까?머릿속에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들이 떠올랐다. 그 생각들 때문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고 나는 그대로 물건들 사이에 주저앉고 말았다.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결국 이 일을 직접
하지만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꼭 알아내야 한다고 생각했다.많이 고민했지만, 결국 강진혁 오빠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로 마음먹었다. 설득력 있는 이유가 필요했다.이런저런 이유를 생각하고 있을 때, 아줌마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전화를 받자마자 그녀의 화난 목소리가 들려왔다.“유형이가 우리 부부를 미치게 하려는 모양이야! 그 여자와 진짜로 결혼하려고 한다면, 나랑 네 삼촌은 차라리 죽어버리겠다고!”아줌마의 반응은 놀랍지 않았다. 나는 조용히 그녀를 달랬다.“아줌마,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요즘은 결혼 문제에 부모가 관여하기 어려운 세상이잖아요.”“우린 그걸 알지만, 이혼한 여자와의 결혼은 절대 안 돼!” 그녀는 단호하게 말했다.내 마음도 이미 복잡하고 상처받은 상태였기에, 더 위로의 말을 건네기도 힘들었다. 사실 그런 말을 해야 할 이유도 없었다. 결국 강유형과 조나연이 나에게 상처를 준 건데, 내가 굳이 그들을 변호할 필요가 있을까? 지금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관대한 태도라고 생각했다.“지원아, 너희 삼촌이 너무 화가 나서 식사도 거부하고 있어. 너밖에 못 말려. 네가 와서 좀 말려줄래?” 아줌마가 전화한 이유가 드러났다.아줌마의 부탁을 듣고 마음이 설렜다. 어쩌면 이 기회에 삼촌의 차량을 이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서 내가 원하는 정보를 확인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나는 곧장 가겠다고 대답했고, 아줌마는 전화기 너머에서 강유형을 계속해서 꾸짖다가 전화를 끊었다.하지만 이렇게 바로 강유형 집에 가는 것만으로는 계획을 완성할 수 있을지 확신이 없어서, 안전하게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강진혁에게도 전화를 걸었다.“지원아.” 강진혁 오빠는 여전히 다정하게 내 이름을 불렀다.“진혁 오빠.” 나는 먼저 그를 이렇게 불렀다. 그에 대한 존경을 표현하면서 우리가 친구라는 사실을 상기시키기 위해서였다.그에게 이런 부탁을 하는 내 자신도 이기적이라고 느꼈다. 그의 마음을 알면서도 그 마음을 이용하려는 건 아닌지
“삼촌...” 내 목소리가 떨리며 나도 모르게 삼촌을 불렀다.“지원아.” 삼촌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반겼다.“머리가... 어떻게...” 나는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만지려 했다.그는 살짝 놀란 듯 물었다. “내 머리가 왜? 헝클어졌니?”그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삼촌은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그래? 아줌마가 무슨 말이라도 했니? 그 사람 말은 신경 쓰지 마. 늘 과장하잖아.”그는 자신의 머리카락이 거의 하얗게 변한 걸 아직 모르고 있었다.며칠 전까지만 해도 새까맸던 머리가, 하루아침에 80%는 희어져 있었다. 한순간에 정정한 중년에서 늙어버린 것 같았다.나는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조용히 그를 끌어안았다. 하지만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삼촌은 나를 다독이며 말했다. “왜 울어? 나 괜찮아. 그저 혼자 좀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야. 네 아줌마가 계속 성가시게 해서 너까지 부른 거야.”그는 내가 하루 종일 문을 잠그고 서재에 틀어박혀 있는 걸 걱정한 줄 알았다.나는 그의 어깨에 고개를 젓고 목이 메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자, 안에 들어가서 차 한 잔 마시자. 삼촌이 직접 끓여줄게.” 삼촌은 나를 걱정시키지 않으려는 듯 의연하게 말했다.하지만 하룻밤 사이 그렇게 변해버린 머리카락이 이미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삼촌.” 나는 그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강유형... 그냥 두세요. 더는 신경 쓰지 마시고요.”지금의 삼촌이 너무 안쓰러웠다. 마치 친아버지처럼 가슴이 아려왔다.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눈빛이 무거웠다. “너무 실망스러웠어. 내가 그 아이를 너무 오냐오냐 키운 탓이야.”“그건 삼촌 탓이 아니에요. 강유형도 이제는 자기 주관을 가진 어른이잖아요.” 나는 애써 그를 달랬지만 삼촌의 표정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삼촌은 겉으로는 온화하고 조용한 사람이었지만 속으로는 굳건하게 자신을 지키는 성격이었다. 누구의 말에도 쉽게 흔들리지 않는 성격이었다.“지원아, 여기 앉
그래, 사람은 누구나 나이를 먹지만 하룻밤 사이에 이렇게 세월이 무겁게 내려앉을 줄이야... 가슴이 아팠다.삼촌은 나를 위해 홍차를 끓여주셨지만 내 입속에 남은 건 씁쓸함뿐이었다.“이 홍차 가져가렴. 집에서도 끓여 마실 수 있을 거야. 피부에도 좋고 몸에 좋아.” 삼촌은 남은 찻잎을 정성스럽게 포장해 내 손에 쥐여 주셨다.삼촌은 마치 나를 친딸처럼 챙겨주셨다. 그 속에는 미안한 마음도 담겨 있는 듯했다. 내가 그걸 거절하면 삼촌 마음이 더 상할까 봐 조용히 받아들었다.“네, 다 마시면 또 삼촌께 부탁드릴게요.” 나도 가볍게 대답하며 삼촌의 마음을 덜어드렸다.“그래, 뭐든 원하면 말해라. 지원아, 넌 내 딸이나 다름없다.” 삼촌의 진심 어린 말에 나도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말했다.“저에게도 삼촌은 친아버지나 다름없어요.”학창 시절에도 항상 부모님이 안 계시다는 외로움을 느끼지 않도록 삼촌이 늘 신경 써주셨다. 가끔은 아줌마가 가고 싶어 해도 삼촌이 “내가 가야, 교장 선생님도 한 번 더 신경 써주지 않겠어?”라고 하시며 직접 학교에 오셨다.삼촌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내 시선이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향하자 미소를 지었다. “지원아, 네 아줌마가 나 걱정 많이 하던데 이렇게 된 걸 알면 얼마나 더 속상해할까?”“삼촌, 지금도 멋지세요.” 나는 웃으며 말했다.삼촌도 머리를 손으로 매만지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래, 나도 멋지지 않니?”나는 눈물이 고이도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삼촌은 언제나 멋져요.”우리가 웃으며 이야기하고 있을 때, 갑자기 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줌마가 목소리부터 내셨다. “지원이 아니면 당신 같은 고집불통 노인은 누가 감당하겠어요!”아줌마는 문 앞까지 오더니 우리가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을 보고 말없이 놀란 표정을 지으셨다. 아줌마의 얼굴에 담긴 미소는 금세 굳어졌고 믿기지 않는다는 듯 삼촌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삼촌과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고 나는 아줌마가 충격받을까 봐 급히
내가 온갖 수를 써서라도 타고 싶었던 차에 이렇게 쉽게 탈 수 있을 줄이야. 이제 남은 건 그 주소를 알아내는 건데 아직도 갈 길이 멀다.“저기, 삼촌, 차 좀 잠깐 세워주세요. 속이 안 좋아서 토할 것 같아요.” 차가 반쯤 달렸을 때 약국이 보이자, 일부러 아픈 척하며 차를 멈춰달라고 부탁했다.“그래, 그래.” 삼촌은 백미러로 날 한 번 쓱 보더니 서둘러 차를 세웠다.차가 멈추자 삼촌은 긴장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지원아, 어디 아픈 거야? 병원에 갈까?”“아까 삼촌이 끓여주신 차를 마시고 속이 좀 찬 것 같아서 그래요.” 일부러 삼촌을 언급하면 더 신경 써 줄 것 같았다.배를 살짝 감싸안으며 말했다. “삼촌, 미안한데 오메프라졸 약 좀 사다 주실 수 있을까요? 그거 하나 먹으면 괜찮아질 거예요.”삼촌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여전히 불안한 듯했다. “그래도 병원에 가야 하는 거 아니야?”더 이상 말하지 않자, 삼촌은 내가 굳이 병원을 원하지 않는다는 걸 눈치챈 듯했다. 오랫동안 삼촌 곁에서 일한 사람답게, 내 말 한마디 한마디를 놓치지 않았다.그가 약을 사러 내려가는 걸 보면서 시간을 조금 더 끌어보려고 덧붙였다. “삼촌, 물도 한 병만 사다 주세요.”“찬물은 안 돼, 차 안에 미지근한 물 있으니까 돌아와서 줄게.” 삼촌은 약국으로 향하며 몇 번이나 뒤돌아보았다.그가 약국 쪽으로 서둘러 가는 걸 확인하자, 나는 조심스럽게 일어서서 내비게이션의 운행 기록을 검색했다. 이런 짓을 하면서도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고 마음이 바빠져 한 번도 창밖을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다행히 약국은 길을 건너야 하기에 삼촌이 돌아오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듯했다.서둘러 운행 기록을 뒤졌지만 이상하게도 내가 찾고자 하는 주소는 없었다. 한 달 전의 기록까지 다 뒤졌는데도 말이다. 설마 내가 뭔가 착각한 걸까?아직 포기하지 않고 계속 찾는 중에, 삼촌이 약을 들고 돌아오는 모습이 보였다. 심장이 다시 빠르게 뛰기 시작했고 나는 창밖을 살피
나는 그들의 생일 뒤 세 자리 숫자를 입력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렇게 간단한 조합은 너무 쉽게 유추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강유형이 부모님께 더 사랑받는 것처럼 보였던 기억을 떠올리며 그의 생일을 앞에 두고 강진혁의 생일을 뒤에 붙였다.마지막 숫자를 입력할 때는 심장이 터질 것 같았고 손끝까지 떨렸다. 마침내 비밀 경로라는 회색 문구가 환하게 변하며 비밀번호가 맞았음을 알렸다. 화면에 뜬 “세강 요양원”이라는 네 글자를 보자 나는 가슴 깊은 곳에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세강 요양원은 내가 조사했던 세 곳 중 하나였다. 지금까지 모든 노력이 바로 이 다섯 글자를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다.결국 목표를 달성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불안이 남아 있었다. 나는 급히 검색 기록을 지우려고 손을 뻗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삼촌이 차 문을 열었다. 그의 시선이 내 손과 내비게이션 화면으로 번갈아 향했다. 내 손은 미세하게 떨렸고 등에선 땀이 흘렀다.“지원아, 뭘 하고 있는 거야?” 삼촌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나는 얼른 대답했다.“그냥 음악 좀 들으려고 했는데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어요.”삼촌은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빛을 거두지 않았다. 속이 아프다며 차를 멈춘 사람이 음악을 듣고 싶어 한다는 건 아무래도 설득력이 없었다.이 상황에서 나는 어떻게든 거짓말을 이어 나가야 했다.“속이 너무 아파서 아는 의사 친구한테 물어봤는데 가벼운 음악을 들으면 좀 나을 거라더라고요. 병원 가서 검사도 받아보래요. 급성 장염이나 맹장염일 수도 있대요.”말하면서도 스스로가 너무 한심하고 부끄러웠다. 언제부터 내가 이런 거짓말까지 해야 하는 사람이 되었을까? 하지만 지금은 이럴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의 죽음이 정말 사고였는지, 그 진실을 밝혀야 했으니까.“그랬구나.” 삼촌은 의심스러운 표정을 거두며 약봉지를 건네주었다.“그럼 빨리 병원으로 가자. 음악은 내가 틀어줄게.”“감사합니다, 삼촌.” 나는 얼른 약을 받아 입에 넣고 물도 없이 삼켰다. 약효를 기
삼촌과 아줌마는 정말 나에게 너무 잘해주셨다. 그래서인지 그분들을 의심하는 것조차 나 스스로 죄책감을 느낄 만큼 마음이 불편했다.그런데 안리영마저 그런 가능성을 염두에 두는 말을 하니 가슴속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공포감이 몰려왔다.“그래도 난 알아봐야 해!”이런 상황일수록 진실을 반드시 밝혀야 했다. 아버지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서라도, 삼촌에게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안리영은 내 생각을 읽었는지 더 이상 말리지 않았고 대신 짧게 말했다.“언제든 네 곁에 내가 있다는 걸 잊지 마.”그 말속에는 이미 무언가 답을 알고 있는 듯한 기운이 느껴졌다.나는 멈추지 않기로 했다. 진실을 찾을 때까지 결코 포기하지 않을 생각이었다.응급실을 나온 뒤 나는 곧장 택시를 잡아탔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바로 그곳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삼촌의 운전기사가 서 있었다. 그의 손에는 약봉지가 있었고 전화를 하며 걸어가고 있었다.“...네, 차량 내 내비게이션을... 음악을 듣고 싶다고...”그의 말을 듣자 등골이 서늘해졌다. 굳이 듣지 않아도 그가 누구에게 보고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그렇다면 왜 보고를 하는 걸까? 차 내 내비게이션은 그냥 흔한 장비 아닌가?머릿속은 점점 혼란스러워졌고 그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계속해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더는 지체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바로 세강 요양원으로 가야 했다.하지만 내가 도착했을 때, 요양원은 철저하게 보안 관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입구에서 보안 요원이 방문 목적과 방문자를 묻더니, 이름과 방 번호까지 요구했다.이름은 알지만 방 번호는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섣불리 용진표라는 이름을 언급했다간 그들이 본인에게 확인 전화를 넣을 가능성이 컸다. 그렇게 되면 내 의도가 전부 드러나게 될 터였다.결국 가족 상담을 위해 왔다고 둘러댔지만 보안 요원은 이곳은 예약제로 운영되며 상담이 필요하지 않다며 단호히 거절했다.고급 요양원은 역시 다르구나 싶었다. 아무나 드나들
정적이 감돌며 숨이 막힐 듯 답답했다.전화를 끊을 적당한 화제를 찾아야 하나 고민하던 순간, 아줌마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너희 삼촌이 이렇게 된 건 전부 그 여자 때문이야. 그래서 난 절대 그 여자를 받아들일 수 없어.”아줌마의 말투는 단호했고, 이를 악물며 내뱉는 그녀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등골이 서늘해졌다.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한동안 침묵했다.“지원아.”아줌마가 내 이름을 부르며 말했다.“시간 날 때 삼촌 좀 자주 찾아와 줘. 네가 와야 삼촌도 좀 마음이 풀리실 거야.”그 말이 내게 큰 부담으로 다가왔지만, 나는 억지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전화를 끊고 나니, 온몸에 힘이 빠져 자동차 좌석에 기대어 멍하니 앉아 있었다. 무언가에 짓눌린 것처럼 움직일 수도, 제대로 숨 쉴 수도 없었다.집에 도착한 나는 소파에 웅크려 앉아 지금까지의 일들을 천천히 되짚었다.모든 실마리들이 차례로 연결되고 있었지만, 결국 용진표로 향하는 듯했다.특히 용진표와 삼촌이 관련이 있고, 용진표가 있는 요양원 주소가 암호화되어 있다는 사실은 더욱 수상했다.만약 숨길 일이 없다면, 굳이 비밀번호까지 설정할 이유가 있을까?머릿속이 점점 복잡해졌다.답답함에 나는 소파 쿠션을 얼굴 위로 덮으며 스스로를 가뒀다.이렇게 하면 잠시나마 생각을 멈출 수 있었다. 하지만 머리가 터질 것처럼 혼란스러울 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처음에는 환청인가 싶었다.그러나 이어서 문밖에서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나는 쿠션을 내리고 문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아직 낮이라 위험할 것 같진 않았지만, 그래도 조심스레 물었다.“누구세요?”“나예요. 진정우.”그 목소리에 순간 멍해졌다. 진정우가 내 집에 찾아오다니.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문을 열자, 검정 티셔츠와 작업복 바지를 입은 진정우가 서 있었다. 여전히 단정하면서도 매력적인 모습이었다.“여긴 왜 왔어요?” 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그는 말 대신 손을 들어 내 이마에 얹었다.
내 말에 용진표는 미소를 지었다.“똑똑한 여자네. 다음 생에선 좋은 집안에 태어나기를...”그는 말을 끝내자마자 일어섰고 나는 몸이 갑자기 앞으로 기울며 그가 신발을 신고 있는 곳으로 거의 쓰러질 뻔했다.용진표의 경호원이 바로 다가와 나를 붙잡으려 했지만 그는 이를 막았고 대신 나를 매섭게 쳐다보며 말했다.“이제 사실을 다 알았으니 뭘 더 하고 싶어? 내가 널 풀어줄까?”나는 그가 날 풀어주길 원했고 나는 아직 죽을 수 없었다. 이렇게 죽으면 너무 억울할 것 같았다.“대표님이 말한 내용이 믿기지 않아요. 내가 원하는 건 대표님이랑 저랑 삼촌과 셋이서 마주하게 해주세요. 아니면 삼촌에게 전화라도 해서 제가 듣고 싶은 말을 하게 해주세요”이 말은 진심이었고 또한 나는 사실 시간을 끌고 싶었다. 시간을 끌어서 누군가가 나를 구하러 오게 하고 싶었다.하지만 누가 나를 구하러 올까?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용진표를 계속해서 바라보며 그를 붙잡고 있었다.하지만 이번에는 그가 나를 무시하고 경호원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 순간 나는 끌려 나갔다.용진표가 떠난 뒤 나는 다시 손발이 묶인 채로 갇혔고 그의 말이 계속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내가 그동안 삼촌과 아줌마한테 받은 친절이 정말 진심이 아니었던 걸까? 그들이 나를 잘 대해준 이유는 부모님에 대한 죄책감 때문일 뿐이었을까? 아니면 그저 내가 강유형을 살릴 수 있는 피가 있어서?’나는 그렇게 믿고 싶지 않았다. 그들은 내게 십 년 동안 변함없이 잘해줬고 그게 가짜라고 생각하기엔 너무 긴 시간이었다.그러니 아마 용진표가 나를 속이고 있을지도 몰랐다.‘그런데 왜 나를 속여야 하는 걸까? 내가 삼촌과 아줌마를 미워하도록 만들기 위해서?’하지만 용진표는 지금 날 죽이겠다고 했으니 내가 그들을 아무리 미워한다고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그렇게 나는 앉아서 고민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밖의 빛이 점점 어두워지는 게 느껴졌다. 심지어 나를 지키는 사람도 없어진 것 같았다.‘용진표가 나를 굶겨 죽일
몸을 앞으로 기울여 내 얼굴을 응시하던 용진표는 미소를 지었다.그가 왜 웃는지 알 수 없었지만 나는 그를 계속해서 쳐다봤다. 마치 그가 나한테 대답하지 않으면 절대로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이 말이다.그가 웃음을 멈추고 나서 말했다.“그러면 너한테 사실을 제대로 알려 주고 죽일게. 왜냐하면 네 부모님이 다른 사람의 돈길을 막았으니까.”그 말에 나는 바로 그와 계약하려던 그 계약서를 떠올렸다.“다른 사람의 돈길을 막았다고요? 그게 왜 제 부모님과 상관이 있나요?”나는 다시 의문을 제기했고 용진표는 웃으며 말했다.“아가씨,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어떻게 돈을 벌었는지 잊었어?”그 말에 나는 깨달았다. 그도 다른 사람한테서 돈을 받았다는 뜻이었다.“그 사람이 누구죠?”나는 급히 물었지만 용진표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나에게 되물었다.“네 생각에는 누구일 것 같아?”내 부모님의 죽음은 결국 그 계약 때문이었고 그 계약은 결국 삼촌에게 넘어갔으니... 바로 그 사람일 것이다.전에도 한 번 의심은 했었지만 용진표는 그 의심을 지워버렸고 심지어 삼촌이 그 계약으로 번 돈을 나에게 따로 저금해 두었다고까지 했다.지금 그가 이렇게 암시하자 나는 정말 혼란스러웠다.“용 대표님, 나이가 드셔서 기억이 잘 안 나세요? 예전에 대표님은 저에게...“내 말투는 점점 자신감이 없어 보였고 그는 줄곧 웃고 있었다. 용진표가 방금 말한 것처럼 그는 다른 사람의 돈을 가지고 대신 일을 처리해 준다고 했으니 그의 말이 전부 사실일 수는 없었다.나는 그런 생각을 하기도 싫었지만 용진표가 계속해서 그런 걸 암시하니 믿을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지금 여기 있는 것도 남의 돈 받고 일을 하시는 거 맞죠?”내가 다시 묻자 용진표는 가볍게 웃었다.“내 생각이 맞았어. 네가 이렇게 똑똑한데...”그의 말에 나는 혼란스러워졌고 몸을 살짝 흔들며 대답했다. “믿을 수 없어요. 대표님이 저를 속이고 있는 거겠죠.”“내가 너를 부모님에게 보내 주려고 하는데 왜 굳이 널 속이겠어
나는 그녀를 보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그녀가 점점 흐려지기 시작했다. 나는 머리를 흔들며 무언가 말하려고 했지만 그때 함소은이 말했다. “용진표의 아내가 꿈을 꾼 게 아니라 용진표가 지원 씨를 만나고 싶다고 했죠.”“뭐라고요?”내가 말을 끝내기 전에 갑자기 나는 함소은이 완전히 보이지 않았다. 그 뒤로 나는 몸이 뜨는 느낌이 들었고 귀에 함소은의 목소리가 들렸다.“잠깐만 자고 있어요.”나는 왜 자야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입을 열지 못했다. 내 몸이 들어 올려지는 걸 느꼈지만 나는 눈은 뜨지 못했고 말도 할 수 없었다.어디론가 데려가졌고 그곳에서 물을 먹은 후 나는 눈을 떴다.눈에 들어온 것은 낯선 큰 남자였고 그가 바로 용진표의 경호원이었다.의식이 흐릿해지기 전에 함소은이 말한 내용을 떠올렸고 나는 이제 모든 걸 알았다. 나는 몸을 조금 움직이며 그에게 물었다.“용진표는 어디 있어?”그 사람은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돌아서서 나갔다.나는 손과 발이 묶여 움직일 수 없었고 눈앞에 보이는 곳은 폐차장이었고 주변에 낡은 타이어들이 쌓여 있었다.그 모든 상황을 파악한 나는 용진표가 나를 잡아둔 이유를 곰곰이 생각했다.그는 아마 내가 그가 한 일을 알게 되는 걸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게다가 내 몸까지 묶었으니 나한테 별로 좋은 일이 벌어질 것 같지 않았다.막심한 공포가 밀려왔지만 나는 스스로를 진정시키려고 애썼다.밖에는 용진표의 경호원이 서 있었고 내가 물을 마시고 깨어났으니 이제 아마 용진표가 올 것 같았다.얼마 지나지 않아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렸고 경호원이 형님이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갇혀 있는 문이 열리자 용진표가 들어왔다. 그는 오늘 마치 무술 도복 같은 흰색 옷을 입고 있었다.“아가씨, 또 만났네.”용진표가 웃으며 말하자 나는 겁먹지 않고 대답했다.“용 대표님, 이런 식으로 만나는 건 영 마음에 들지 않아요.”“마음에 들지 않으면 왜 날 자꾸 자극한 거야?”그가 내 앞에 서자 경호원은 의자
“진정우 씨.” 나는 평범한 동료처럼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인사를 했지만 진정우는 아무 말 없이 나를 쳐다보았고 우리는 그냥 스쳐 지나갔다.하지만 그 순간 내 얼굴에 있는 미소가 조금 씁쓸하게 느껴졌다. 나는 회사 차를 몰고 함소은이 말한 곳으로 갔다.내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 함소은은 아직 오지 않았다. 나는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냈고 그녀는 먼저 자리를 찾아 앉아 기다리라고 했다. 그녀를 기다리면서 나는 다시 휴대폰을 열었고 그때 진소영이 보낸 메시지를 받았다.스크롤을 위로 올려보니 진소영이 보낸 메시지는 거의 다 자책과 내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진정우를 변호하는 내용도 있었지만 나는 딱 한 번만 답을 보냈고 그 후에는 다시 답하지 않았다.[언니, 보면 답장해 줘. 오빠가 나를 방에 가두고 나가지 못하게 해요.]진소영의 메시지를 보고 한참 생각한 후에야 나는 그녀에게 답을 보냈다.[소영아, 나는 괜찮고 이젠 정상적으로 출근하고 있어. 그리고 나랑 네 오빠 사이에 대해선 더 이상 얘기하지 않아도 돼.]그러자 그녀는 바로 답을 보냈다. [언니, 오빠는 언니를 정말 사랑해요. 정말이에요. 맹세해요.]나는 답하지 않았고 그때 다시 메시지가 왔다.[오빠가 언니에게 죽을 끓여줄 때 정신이 없어서 팔까지 데었어요.]그 메시지를 보자 나는 그가 버린 죽을 떠올리며 여전히 답하지 않았다. [오빠가 언니한테 죽을 가져가고 돌아와서 잠도 자지 않고 창문 앞에 서 있었어요. 담배도 피웠고요.] [언니, 나는 언니와 오빠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요. 하지만 언니, 오빠한테 다시 기회를 주면 안 돼요?][언니와 오빠가 이렇게 지내는 걸 보면 마음이 아파요. 난 평생 혼자 살아도 괜찮으니 그냥 언니 오빠가 행복하게 살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그 메시지를 보고 나는 웃음을 지었고 동시에 진소영이 소지훈에 대한 짝사랑을 떠올렸다.나는 또 한 번 메시지를 보냈다. [소지훈이 너한테 연락했어?][아니요!]진소영은 눈물 나는 이모티콘을 덧붙
나는 숨이 잠시 멈췄고 그의 눈빛과 마주쳤고 그는 나를 바라보며 조금도 피하지 않았다.그는 언제나 정직하고 대범하게 대했지만 나는 항상 마음이 불안했다. 마치 헤어진 게 딱 내 잘못인 것처럼 말이다.“호랑이도 자기 말하면 온다더니... 정우 씨, 방금 윤 부장님과 정우 씨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어요.”허진호는 능글맞게 말을 이어갔지만 진정우는 그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네.”“정우 씨에 대해 뭐라고 했는지 궁금하지 않아요?”허진호는 정말 끝내주는 재치로 우리를 괴롭혔다. 진정우는 아무런 말도 없이 고개를 숙였고 허진호는 코를 문지르면서 다시 말을 이어갔다.“정우 씨가 살이 빠졌다고 말했어요. 그리고 또 뭐라고 했던가...”허진호는 말을 잠시 멈추더니 나에게 눈을 찡긋했다.“윤 부장님, 정우 씨에게 알려주지 말자고요.”“하하.”나는 속으로 찐웃음이 터져 나와서 입꼬리가 조금 올라갔고 진정우가 딱 그 순간 나를 바라봤지만 나는 시선을 돌렸다.그가 나를 원하지 않았기에 나도 진정우 없이 잘 살 수 있는 모습을 증명하고 싶었다.점심때, 나는 항상 전화를 걸지 말지 고민했던 함소은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는 그녀가 용진표랑 함께 있어서 불편할까 봐 전화하지 않았다.“어떻게 됐어요? 괜찮아요?”전화를 받자마자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오늘은 잘 피했어요.”함소은이 가볍게 말했다.그녀가 어떻게 피했는지 묻지 않았다. 이 여자는 용진표의 곁에서 몇 년이나 보내면서도 여전히 복수를 품고 살아왔다. 그리고 그에게 아이까지 낳은 여인이라면 그만큼 능수능란한 사람이기 때문이다.처음 그녀를 봤을 때 나는 그녀가 단지 외모를 과시하는 여인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했던 내 자신이 정말 부끄러웠다.“그럼 다른 이유로 저한테 전화한 거예요?”“지원 씨가 찾으라고 한 사람을 찾았어요. 그래서 직접 만나보고 싶은지 물어보려고 전화했어요.”나는 예상보다 일이 빨리 진행되고 있다는 말에 조금 놀랐고 이내 흥분해서 대답했다.“가능하다면 직접 만나고 싶어요
“쫓아갈 거야?”나는 쫓아가서 꼭 물어보고 싶었다.하지만 쓰레기통에 버려진 도시락을 보니 더 이상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다.그가 버린 것은 도시락도 음식도 아닌 나에 대한 마음이었다.그렇다면 내가 쫓아가서 물어본다고 해도 결국 스스로 굴욕을 찾는 일이었다.나는 마음을 되돌리고 도시락을 다시 내려놓고 내 병상으로 돌아갔으나 이제는 젓가락을 다시 들고 음식을 먹을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무거웠다.도시락을 주운 사람은 그 변화를 눈치챘는지 조심스럽게 도시락을 다시 내 앞에 놓았다.“가져가세요.”“아, 아니에요...”그 사람은 손을 움켜잡으며 물러섰다.“당신이 주운 거니까 그냥 가져가세요. 게다가 시름 놓고 드시면 돼요. 맛은 있을 거예요.”나는 한숨을 쉬며 음식을 다시 집어 들었다. 분명히 화가 나 있었지만 그런데도 다시 먹기 시작했다.강유형은 옆에서 음식을 먹으려는 내 손을 살짝 눌렀다.“내 음식한테 화내지 마.”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진정우는 아마 내가 여기에 있는 걸 보고 떠난 거 같아.”그 말에 나는 잠시 멈췄다. 방금 강유형이 내 입술 옆을 닦아준 걸 생각하니 마음이아팠다.‘아, 이거 정말... 오해는 점점 더 깊어만 지는구나.’내가 잠시 멍하니 있을 때 강유형은 내가 먹던 음식을 쥐고 아무 말 없이 그것을 치웠다. 그리고 도시락을 손에 쥐고 나가려 했다.그가 어디로 가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그런데 그때 아줌마에게서 전화가 왔다.“지원아, 유형이 너한테 음식을 가져왔을 때 별문제 없었지?”나는 순간적으로 멍해졌다.“아, 아줌마, 무슨 일이에요?”“유형의 입가에 상처가 있더라고. 싸운 거 같아서...”아줌마의 말에 나는 깜짝 놀랐고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설마 강유형이 나가서 진정우랑 싸운 거 아니야?’하지만 난 결국에 이 말을 내뱉지 않았고 아줌마는 또 몇 마디 했고 마지막으로 만두랑 음식이 맛이 어떤지 물었다.전화가 끊기자 나는 병원을 떠났다.다음 날 나는 회사에 갔고 마침 약속이
“잠깐만.”내 말을 들은 강유형은 재빠르게 일어섰다.지금의 그는 내게 무언가를 부탁할 때마다 언제든지 응해주고 내가 부탁하지 않아도 먼저 다가오는 그런 사람으로 변해버렸다.만약 예전에도 이렇게 했다면 아마 난 강유형과 그렇게 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세상에 만일이라는 건 없었고 나는 이미 지나간 일에 대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그를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며 우연히 그의 휴대폰을 봤다. 화면이 멈춰 있었는데 그 영상 속에는 아마 3년 전의 내 모습이었다.나는 그때 내가 뭘 했는지 왜 그런 영상을 찍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휴대폰을 빼앗아 보고 싶었지만 또 그럴 수는 없어서 고민하던 그 순간 강유형이 물을 가지고 돌아왔다.그는 내가 휴대폰을 보고 있다는 걸 알았고 얼굴에 당황한 기색 없이 자연스럽게 웃으며 말했다.“네가 잠드는 동안 예전 사진과 영상을 좀 봤는데 지금 넌 예전보다 훨씬 더 예뻐졌더라.”나는 물을 마시며 그가 한 말에 이어서 대답했다.“그러면 예전엔 내가 안 예뻤다는 거네? 그래서 네가...”“그만해.”그가 내 말을 끊었다.“그 사람은 더 이상 언급하지 마.”물 몇 모금 마시자 나는 목이 좀 편해졌다.“조나연 그 일은 이제 다 정리한 거야?”나는 젓가락으로 목이버섯을 집어 입에 넣으면서 물었고 그 상큼하고 새콤한 맛에 기분이 좋아졌다.강유형은 휴대폰을 다시 들고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그저 그 화면을 보고 있었고 나도 그저 맛있는 음식을 즐기고 있었다.좀 더 먹으려던 찰나 강유형이 입을 열었다.“완전히 깨끗하게 끝냈어.”그 말에 나는 조금 더 생각했다. 그때 그 여자가 남긴 독한 말들을 떠올리며 이 일은 그렇게 간단히 끝날 일이 아닐 거라는 걸 알았다. 그러나 강유형이 이렇게 말하니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고 다시 음식을 먹을 준비를 했다.“알겠어.”“잠시만.”그때 강유형이 나를 막아 나서면서 손으로 내 입술 옆에 묻은 기름을 닦아 주었다.“기름이 묻어서.”나는 입술
강유형은 결국 강진혁의 불편한 기색을 눈치챘다.나는 물을 한 모금 마시며 대답했다.“그건 직접 물어봐야 할 거야. 그리고... 나는 지금 아무에게도 마음이 없어.”그러자 강유형은 무표정하게 말했다.“너무 자주 말하지 않아도 돼.”“사실을 말한 것뿐이야.”나는 말을 마친 후 기침을 두 번 했고 그러자 강유형은 내 등을 두드려 주었다.“진정우는 네가 사고를 당한 걸 몰랐어?”강진혁의 말은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컵 안에 있는 뜨거운 물의 온기가 몸의 차가움을 녹여주었지만 마음속의 차가운 느낌은 사라지지 않았다.“왔었어. 그리고 다시 갔어.”강유형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고 나는 물컵을 그에게 건네며 말했다.“나 좀 자고 싶어.”내가 눕자 강유형은 그 자리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나는 열이 나서 눈꺼풀이 무겁고 잠에 빠져들기 직전에 강유형의 목소리가 들렸다.“나와 헤어질 때는 네가 이렇게 아프지 않았던 것 같은데.”‘뭐라고 하는 거야?’사실 맞는 말이었다. 강유형과 헤어질 때 지금처럼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은 없었다.“아마 너는 천천히 칼날로 내 마음을 줄곧 찔렀기 때문에 난 아픔에 익숙해졌겠지.”내가 목소리를 낮춰 말하며 뒤로 돌아누웠고 결국 깊은 잠에 빠졌다.나는 밥 냄새에 잠이 깼다. 눈을 떴을 때 강유형이 침대 옆 의자에 앉아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본 내용에 몰입한 듯 내가 깬 줄도 모르고 있었다.하지만 나는 정말 배가 고팠다. 침대 옆 식탁에 놓인 음식을 보며 일어나 보려고 했지만 몸의 상처가 아파서 움직이지 못하고 냉큼 숨을 쉬었다.강유형은 그 소리를 듣고 급히 휴대폰을 내려놓고 다가와 나를 부축했다.“깨어났어? 나한테 말하지.”“배가 고파.”나는 불필요한 말을 하지 않고 간단히 말했고 그는 웃으며 말했다.“알겠어. 네가 배고플 줄 알았어. 예전처럼 감기나 열이 나면 깨자마자 먹는 게 첫 번째잖아.”듣고 보니 난 확실히 그랬었다. 다른 사람들은 병에 걸리면 입맛이 없다고 하지만 나는 배가 고팠다.
옆에 있던 강진혁은 눈빛이 어두워졌다. 방금 그가 내가 머리를 만져준다고 했을 때 난 바로 피했고 강유형이 나를 만졌을 땐 나는 거부하지 않았기에 그는 불편함을 느꼈을 것이다. 나라고 해도 그 상황이면 서운했을 것이다.하지만 우리가 그동안 얘기를 나누었고 강진혁은 별다른 표정을 지어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내가 그를 볼 때 그는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농담을 던졌다.“넌 아직도 강유형의 친밀한 행동에 익숙한 거 같아.”“......”“그건 당연한 소리지. 지원이는 거의 내 아내가 될 뻔했으니까.”“......”“맞아. 거의였지.”강유형은 강진혁을 바라보며 미소를 띠었고 그의 얼굴에는 장난기 어린 표정이 가득했다.“아무래도 이마가 좀 뜨거운 것 같아.”강유형은 말을 끝내며 지나가는 간호사를 불렀다.“체온계 좀 줘봐요.”“괜찮아. 아마도...”내가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강유형이 끊었다.“괜찮은 건지는 그건 네가 스스로 판단할 일이 아니야.”강유형의 말에 간호사는 바로 체온계를 가져와 내 이마에 대었다.“37.7도입니다.”그러자 강유형은 간호사에게 말했다.“의사에게 상황을 좀 전해주세요. 그리고 혈액 검사 결과가 나왔나요? 감염인지 아니면 그냥 물에 젖어서 감기가 온 건지 확인해 주세요.”강유형은 정말 전문가처럼 말을 이어갔다.‘모르는 사람이 보면 의사인 줄 알겠네.’간호사는 대답하고는 떠났고 강진혁은 나에게 따뜻한 물을 부어줬다.“따뜻한 물이라도 마셔. 아마 그냥 몸이 얼어서 그런 거 같아.”두 형제가 이렇게 나를 챙겨주는 모습이 정말 감동적이지만 그만큼 부담도 컸다.나는 그들이 그만 가줬으면 하는 마음이었지만 강유형은 이미 먼저 말했다.“형, 아니면 먼저 돌아가. 내일 선보러 간다고 했잖아? 너무 늦게까지 있으면 피부에 안 좋아.”“오빠, 선보는 거예요? 방금 왜 말을 안 했어요?”나는 조금 놀랐고 강진혁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말할 새도 없이 강유형이 와서 방해했으니까.”이 말의 의미는 강유형이 우리 둘 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