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라요.”진정우는 짧고 간결하게 세 글자로 대답했다.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모르는데 바로 문을 두드렸어요?”그는 썰어 놓은 채소를 접시에 옮기며 태연하게 대답했다.“아래층 아줌마가 알려주셨어요. 당신이 집에 돌아왔다고요.”“...”나는 차 한 모금을 마시며, 요리하는 그의 모습을 감상했다.그런데 갑자기 진정우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뭐가 의심스러워요?”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장난스럽게 대답했다.“의심이라기보다는... 당신이 나를 미행한 거 아닐까 싶어서요.”“뭐라고요?”그는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농담이에요. 정우 씨가 그렇게 한가하지 않다는 건 알죠.”말을 마치고 나는 거실로 돌아가 소파에 앉아 차를 마셨다.차 몇 모금에 몸이 나른해졌다. 휴대폰을 보며 이것저것 확인하다 보니, 어느새 눈꺼풀이 무거워지면서 그렇게 잠에 빠졌다.꿈속에서 대머리 남자가 나를 붙잡아 끌고 갔다. 용진표는 그에게 나를 죽이라고 명령했다. 눈앞에서 번쩍이는 칼날이 내게 다가오자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지원 씨!”“지원 씨, 일어나요!”어느새 누군가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눈을 번쩍 뜨니, 진정우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손이 내 머리를 단단히 감싸고 있었다.“악몽 꿨어요?”그의 낮은 목소리가 조용히 울렸다.아직도 꿈의 공포에서 헤어나지 못한 나는 헐떡이며 말했다.“그날 당신을 둘러싼 그 대머리 남자, 용진표 맞아요. 나 그 사람 봤어요.”진정우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그걸 어떻게 알아요?”“내가 봤다니까요.”나는 그의 손을 더 꽉 잡았다가 천천히 놓았다.“이건 제 일이에요. 당신이 끼어들 필요 없어요. 알겠죠?”그의 목소리는 단호하면서도 무겁게 울렸다.나는 변명하고 싶었다. 진정우의 일이 아니라, 내 아버지의 죽음을 조사하다가 우연히 알아낸 것뿐이라고.하지만 그는 내게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말했다.“용진표는 아주 위험한 사람이에요. 절대로 끼어들지 마요. 정말이에요.”그의 진지
여자는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더 예뻐지고 싶어 한다고들 하지 않던가.나는 이제야 내가 진정우를 신경 쓰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다.손을 씻고 나오자마자 진정우가 다가와 나를 부축하려 했다.나는 괜히 강한 척하며 그의 손을 뿌리쳤다.“괜찮아요. 저 이제 괜찮아요.”그는 억지로 도와주려 하지 않고 내 뒤를 따라 식탁으로 걸어왔다.테이블 위에는 아까 말했던 요리뿐만 아니라 깔끔한 반찬 두 가지와 과일샐러드까지 추가되어 있었다.차려진 음식은 보기만 해도 입맛을 돋웠다.“정우 씨, 동생은 정말 행복하겠어요.”그가 이렇게 정성을 다해 요리하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감탄하며 말했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아무 대답도 없었다. 그의 동생이 심장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이 떠오르며, 갑자기 머릿속에 질문 하나가 떠올랐다.“정우 씨, 고향은 어디예요? 동생은 어디서 살아요?”그는 나를 흘깃 쳐다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나는 웃으며 장난스럽게 물었다.“왜 그래요? 내가 당신 동생한테 뭔가 해코지라도 할까 봐요?”“평진이요. 청평 아래에 있는 작은 마을이에요.”이번에는 의외로 상세히 대답했다.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태연한 척 말했다.“저 이번에 대표님 덕분에 휴가받았어요. 수고했다며 그냥 쉬라고 하시더라고요.”“그래요.”그는 여전히 담담했다.역시 군인 출신이라 그런지 보통 사람들과는 감정 표현부터 다르게 느껴졌다.대표님이 준 휴가 이야기를 하다 보니 자연스레 그 신비로운 대표님이 떠올랐다.“내가 뭘 잘했다고 대표님이 이렇게 잘해 주시는지 모르겠어요. 아직 눈에 띄는 성과도 없는데 말이에요.”그러다 문득 대표님이 강유형의 회사 계약을 거절했던 일이 떠올랐다.“사실 대표님 아니었으면 저 아마 강유형 회사랑 계약했을 거예요. 그 회사 괜찮았고 이익도 꽤 됐거든요. 그런데 대표님이 딱 잘라 거절하시더라고요.”내 말을 듣던 진정우가 슬쩍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왜요?”“글쎄요, 혹시 제가 마음에 들어서 그런 건 아닐까요?”나는 장난스럽
그날 밤, 나는 집을 떠났다. 진정우의 집은 불이 꺼져 있었다. 아무래도 집에 없는 듯했다.강진혁에게서 전화가 걸려 온 건 기차역 대기실에 앉아 있을 때였다.이번에는 비행기 대신 KTX를 선택했다.시간이 두 시간 더 걸리긴 했지만 나는 땅 위를 달리는 KTX가 하늘을 나는 비행기보다 더 안정감을 준다.“지원아, 차 고쳤어. 어디 있어? 내가 가져다줄게.”강진혁의 목소리는 늘 그랬듯 따뜻하고 차분했다.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스마트폰을 바라보는 사람들 사이에서 담담히 대답했다.“수리소에 놔두세요. 제가 직접 찾으러 갈게요.”잠시 침묵이 흘렀다. 강진혁이 다시 입을 열었다.“수리소가 어디 있는지 알아?”“네. 항상 거기서 정비하잖아요.”그는 잠시 망설이더니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정비사가 그러는데 네 차에 누가 일부러 손을 댔다고 하더라.”그 말에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사실, 내가 일부러 조작한 거였으니까.“정말요?” 나는 최대한 놀란 척 물었다.“지원아, 혹시 네 차를 다른 사람이 운전한 적 있어?”그의 질문은 순수한 걱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나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대답할 말을 고민했다. 그때 강진혁이 덧붙였다.“다행히 해를 끼치려던 건 아니었던 것 같아. 다만 조금 번거롭게 하려던 것 같아. 차라리 집에서 멈춘 게 나았지, 밖에서 멈췄으면 더 골치 아팠을 거야.”그의 말에 나는 굳이 변명하지 않기로 했다.“알겠어요. 조심할게요.”잠깐의 침묵이 이어지더니, 강진혁이 다시 물었다.“지금 밖에 있어? 주변이 좀 시끄러운데.”“네.”나는 짧게 대답했다.그는 내 짧은 대답에 더 묻지 않았다. 대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몸조심해.”전화를 끊고 나니 가슴 한구석이 답답했다.요즘 ‘불필요한 인간관계와 소셜 활동을 줄여라’는 영상들을 자주 보게 되는데 그 의미를 이제야 조금 이해할 것 같았다.사람들과의 관계는 때로는 부담스럽고 피곤하게 만들기도 한다.특히 걱정을 해주는 사람이 많을수록 마음이 더 무거워졌다.나는
이곳은 정말로 여행지나 휴양지로도 손색이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나는 주변 풍경에 취해 넋을 놓고 있다가, 갑자기 뒤에서 들려오는 낯선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언니, 누구 찾으세요?”돌아보니, 하얀 원피스를 입은 소녀가 서 있었다. 짙은 흑발을 땋아 가슴 앞으로 늘어뜨린 그녀는 맑고 깨끗한 눈을 가지고 있었다.“혹시 성이 진 씨야?”나는 대뜸 그녀에게 물었다.그러자 소녀의 눈에 놀라움이 스쳤다.“네, 맞아요. 언니는... 우리 오빠를 찾으러 오신 건가요?”그 말을 듣고 그녀가 진정우의 여동생임을 확신했다.솔직히 진정우와 전혀 닮지 않았지만 둘 다 흠잡을 데 없이 아름다웠다.진정우는 강인하고 남성적인 매력을 가지고 있다면, 이 소녀는 자연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청초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다.“응, 나는 네 오빠의 친구야.”나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그녀는 잠시 당황한 듯 보였지만 곧 두 손으로 내 손을 잡았다.“저는 진소영이에요.”기쁜 듯하면서도 어색해하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웃으며 말했다.“안으로 들어가도 될까?”진소영은 그제야 정신이 든 듯, 서둘러 내 손을 놓으며 집 안으로 안내했다.“오빠도 참, 아무 말도 안 하고... 제대로 정리도 못 했잖아요.”나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네 오빠도 몰라. 나 몰래 온 거거든.”그녀는 깜짝 놀라더니 한참 후에야 고개를 끄덕였다.나는 이미 그녀의 집안을 유심히 둘러보고 있었다. 이곳은 볼수록 마음에 드는 곳이었다.“언니, 여기 앉으세요. 제가 꽃차 끓여드릴게요.”진소영은 밝은 미소로 나를 맞이했다. 하지만 괜히 부담을 줄까 봐 나는 사양했다.“괜찮아, 목마르지 않아.”하지만 그녀는 안으로 들어가더 곧 주전자와 말린 꽃잎을 들고나왔다. 나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웃었다.“네 오빠가 사준 거야?”“네. 오빠는 항상 저한테 최고의 것만 주려고 해요.”진소영은 자랑스러운 얼굴로 말했다.꽃차를 끓이며 그녀가 집안을 한번 둘러보더니 말했다.“이
“언니, 우리 오빠를 사랑해 줘서 정말 고마워요. 우리 오빠를 받아줘서요!”진소영은 그렇게 말하며 두 손으로 정성스럽게 차를 따라 내게 내밀었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그 순간, 내 눈가도 뜨거워지며 코끝이 찡했다.하지만 나는 웃으며 말했다.“어머, 네 말투가 꼭 너희 오빠가 아무도 받아주지 않는 사람처럼 들리네.”진소영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나는 그녀가 건넨 차를 받아 한 모금 마셨다.입안 가득 퍼지는 맑고 청아한 꽃차 향이 정말 일품이었다. 이렇게 순수하고 깔끔한 맛은 처음이었다.역시 이슬 물로 끓인 차는 다르구나 싶었다. 정말 천상의 맛이었다.“언니, 우리 오빠는 저 때문에 여자 친구도 안 사귀었어요. 나중에 자기 부인이 날 싫어할까 봐, 날 귀찮아할까 봐요...”진소영은 말을 이어가다 멈췄다.그녀가 갑자기 말을 멈춘 이유를 나는 알 수 있었다.아마 오빠가 그녀의 병에 대해 내게 말하지 않았을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혹시 내가 그녀가 아픈 것을 알게 된다면 진정우를 싫어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듯했다.나는 담담하게 웃으며 한 모금 더 마신 후 말했다.“네가 몸이 아프다고 해서 내가 너희 오빠를 싫어할 것 같아? 내가 이렇게 예쁜 소녀를 보고도 그런 생각을 한다면 내가 얼마나 나쁜 사람이겠니?”내 말에 진소영은 다시 환하게 웃으며 긴장을 풀었다.그러고는 다시 물었다.“오빠가 제 병에 대해 말했어요?”“그럼. 아니면 내가 이렇게 먼 길을 와서 널 보러 왔겠어? 네가 궁금해서 온 거야. 그리고...”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고개를 살짝 저었다.진소영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그리고 뭐요?”나는 그녀가 오해할까 봐 다시 입을 열었다.“그리고 널 데려가려고 했지. 하지만 이곳을 보니까 내가 널 데려갈 자격이 없는 것 같아.”솔직히 내가 그녀를 데려갈 곳은 이곳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아무리 좋은 환경을 제공한다 해도 이런 자연 속에서의 자유로운 삶과는 다를 테니까.“언니가 절 데려가신다면 전
“언니, 혹시 방법이 있어요?”진소영이 반짝이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나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방법은 분명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진정우조차 시도하지 않은 일을 내가 감히 나서서 할 수 있을까?성공하면 다행이겠지만 실패한다면?진정우가 평생 나를 용서하지 않는 건 차라리 괜찮다.하지만 그가 소영이을 잃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는 건 차마 견딜 수 없을 것이다.“언니도 방법이 없는 거죠?”내 침묵을 희망이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인 진소영의 얼굴이 금세 어두워졌다.그녀는 고개를 숙이더니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오빠도 시도하지 못했어요. 너무 위험하니까요. 어떤 의사가 감히 자신 있게 도전할 수 있겠어요.”그녀는 한숨을 내쉬더니 곧 고개를 들고 맑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변화가 너무 빨라 보여도, 그건 단지 그녀가 나에게 자신의 우울함을 전하고 싶지 않아서일 것이다.“괜찮아요, 언니. 지금도 저는 충분히 행복해요. 얼마나 살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어쩌면 이렇게 오래오래 살지도 모르죠.”그녀의 이런 말이 오히려 내 마음을 더 무겁게 했다.나는 이렇게 예쁘고 순수한 아이에게 희망을 잃게 하고 싶지 않았다.그래서 위로 삼아 말했다.“사실 내 친구 중에 의사가 있어. 해외에서 공부하고 온 사람이거든. 지금은 산부인과 의사지만 그녀에게는 유능한 의사 친구들이 많아. 심장 분야의 전문가도 있어.”“진짜요?”순간 진소영의 눈빛이 빛을 발했다.그 눈빛은 마치 새로운 희망의 불빛처럼 반짝였다.“그럼. 사실 이번에 온 것도 네 상태를 알아보고 싶어서야.”나는 그녀를 달래려고 한 것도 있지만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은 것도 사실이다.물론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다.하지만 진소영의 눈빛 속에서 느껴지는 간절함은 나를 움직이게 했다.그녀에게 단순히 살아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건강한 삶을 누리고 싶은 열망이 느껴졌다.지금 그녀가 지내고 있는 이곳은 누군가에겐 꿈같은 낙원일지 몰라도, 그녀는 분명 이곳을
내 말을 들은 진소영은 얼굴이 새하얘지며 고개를 급히 저었다. 내 손을 꼭 잡은 그녀는 다급하게 말했다.“언니, 그런 오해 하면 안 돼요! 그 사진 속 사람... 그런 거 아니에요. 우리 오빠는 다른 여자를 좋아한 적이 없어요. 언니가 첫 번째예요.”그녀가 겁에 질려 손까지 떨고 있는 모습을 보니 더는 놀리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영이는 심장이 약했다. 작은 충격도 조심해야 했다.나는 그녀를 안심시키려 코끝을 손가락으로 살짝 건드리며 말했다.“왜 그렇게 긴장해? 나 다 알아. 네 오빠가 여자 친구 사귄 적 없다고 했어.”진소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하게 덧붙였다.“그리고 다른 여자아이를 좋아한 적도 없어요.”그 말을 듣자 웃음이 나왔다. 이 아이는 정말 순수했다. 마치 세상에 조금도 물들지 않은 채 자신만의 깨끗한 세계에 사는 것 같았다.하지만 그만큼 마음 한구석에서는 걱정도 들었다.이런 순수한 아이가 언젠가 누군가를 좋아하게 된다면, 그녀만큼 순수한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만약 사랑으로 인해 상처받는다면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나는 그런 걱정을 떨쳐내며 부드럽게 말했다.“알겠어. 네 오빠 정말 순수하다는 거 알아. 내가 잘 지켜줄게.”그러자 진소영은 다시 웃었다.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벽에 걸린 사진들을 살폈다. 겉으로는 신경 쓰지 않는 척했지만 여전히 진정우가 소녀를 업고 있는 사진이 마음에 걸렸다.그 소녀는 분명 진소영이 아니었다. 만약 소영이었다면 그녀가 그렇게 긴장하며 해명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그렇다면 사진 속 소녀는 누구일까?이웃집 아이? 아니면 친척? 지금쯤은 다 자랐겠지. 혹시 드라마처럼 갑자기 나타나 “정우 오빠!”라며 찾아오는 건 아닐까?생각이 지나치게 앞서가고 있다는 걸 깨닫고 스스로 피식 웃었다. 이렇게까지 상상하다니, 나도 참 한가하다 싶었다.다시 진정우네 가족사진으로 눈길을 돌렸다. 이번에는 그의 아버지 얼굴에 시선이 멈췄다. 묘하게 익숙했고 마치 어디선가 본 적 있는 얼굴 같았다.“아
진소영은 단순한 동생이 아니었다. 진정우가 마치 딸처럼 키운 존재였다.그런 애틋한 마음이 있었기에, 강철 같은 그도 이렇게 조심스럽고 신중한 사람이 되었겠지.소영이는 진정우와의 추억을 하나둘 들려주었다.이 작은 집은 진정우가 직접 벽돌 하나하나 쌓아 올려 지은 곳이라고 했다.집에 있을 때는 물고기를 잡아 구워주곤 했고 그의 요리는 모두 소영이를 위해 연습한 결과라고 했다.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진정우를 조금 더 이해하게 되었다.책임감과 외로움 속에서 그의 특별함이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니 마음이 아려왔다.소영이는 이야기를 하다가 어느새 잠이 들었다.그 평온한 얼굴을 바라보며 문득 진정우에게 전화를 걸고 싶었다."앞으로는 내가 당신을 더 아껴줄게. 혼자 감당하지 않게."하지만 그 충동은 잠깐 스쳤을 뿐, 행동으로 옮기진 않았다.그런 말은 말로 하는 게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줘야 하는 거니까.하지만 대신 안리영에게 전화를 걸었다.“너 어디야?”피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딘가 상태가 좋지 않은 듯했다.“너 왜 이래? 수술 끝난 거야? 피곤해 보여.”“아니, 아파서 그래.”그 말에 순간 놀랐다. 안리영이 아프다는 말은 좀처럼 듣기 힘들었으니까.“무슨 일이야? 약은 먹었어?”“응. 별일 아니야. 과로 때문이야.”안리영는 담담하게 대답했다.“근데 너 어디야? 무슨 일 생겨서 도망친 거 아니지?”그 말에 나는 웃음이 나왔다.“내가 그런 사람으로 보여?”“아니, 넌 그런 사람 아니지.” 그녀는 나를 잘 알고 있었다.“사실 부탁 하나 하려고.”나는 진소영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런데 그녀가 한참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왜? 네 쪽에 아는 사람 없어?”잠시 정적이 흐른 후에 안리영이 입을 열었다.“...있어. 네 말로 보면 가능할 것 같긴 해.”“정말? 고마워.”그녀의 목소리에 담긴 묘한 분위기를 눈치채지 못한 채 나는 고마움을 전했다.하지만 그녀는 곧 뜻밖의 말을 꺼냈다.“근데 그 사람한테 연락하기 싫어.
“그럼 돌아가. 하지만 지금 네 상태로는 혼자 갈 수 없어.”강유형이 단호하게 말했고 잠시 침묵하다가 강진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형, 지원이랑 같이 가줘.”강진혁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알았어.”나는 거절하고 싶었지만 지금 내 상태로는 아무리 거절해도 그들이 날 혼자 두고 갈 리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럼 너는?”나는 강유형의 머리에 감긴 붕대를 바라보며 물었다.“난 여기 남아서 신지태 나오면 같이 갈 거야.”강유형의 목소리는 단호했다.신지태가 낯선 곳에서 그런 일을 겪고 나왔는데 아무도 기다려주는 사람이 없다면 얼마나 허전할까. 하지만 강유형의 지금 상태로 남아 있는 것도 신지태에게는 더 큰 부담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네가 이 상태로 있으면 신지태가 더 죄책감 느낄 텐데.”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괜찮아. 사고 얘기는 꺼내지 않을 거니까.”강유형은 단호히 답했다. 더는 설득해 봤자 소용없을 것 같아서 나는 화제를 돌렸다.“지태 오빠, 경기 다시 뛸 수 있을까?”이번에는 강진혁이 대답했다.“아직 몰라. 구단 쪽 반응도 봐야 하고 Q클럽의 태도에 따라 다를 거야.”문득 진정우가 떠올랐다. 이 상황에서 가장 적합한 해결책을 줄 사람은 진정우일 텐데 지금은 그에게 도움을 청할 수 없다는 사실이 답답했다.나는 한숨을 쉬며 휴대폰을 꺼내 귀국 비행기표를 예약하기 시작했다.“내 것도 같이 예약해 줘.”강진혁이 말하기 전까지는 그의 표까지 예약해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지만 그렇게 말하니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그럼 여권 정보 줘.”강진혁은 여권을 건네는 대신 휴대폰을 꺼내 들고 말했다.“이미 예약했어. 두 장.”그의 말에 잠시 놀랐지만 그는 이어 말했다.“짐 챙겨. 한 시간 뒤에 공항으로 가자.”나는 무슨 말을 하려다 멈췄고 강진혁이 먼저 강유형을 향해 말했다.“머리 다친 건 별일 아니지만 이제 몸 관리를 더 철저히 해야 해. 네 몸 상태가 예전보다 훨씬 더 중요해졌다는 걸 잊지 마.”그의 말
뉴스?무슨 뉴스?순간 머릿속이 멍해졌다.내가 깨어난 이후로 아무도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나는 망설임 없이 문을 열었고 문 앞에 있던 강유형과 강진혁이 동시에 나를 바라봤다.“무슨 뉴스야?”내가 직설적으로 묻자 두 사람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아마도 나한테 뭔가를 숨기려는 듯했다.하지만 나는 그들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다 들었으니까 숨기지 말고 제대로 말해줘.”강진혁은 짧게 한숨을 쉬고 핸드폰을 꺼냈다.강유형이 말리려는 듯 보였지만 내가 강한 눈빛으로 제지하자 그도 말없이 물러섰다.“이미 알게 된 이상 차라리 직접 확인하고 진정우랑 제대로 얘기하는 게 나을 거야.”강진혁이 말하며 핸드폰을 건넸다.핸드폰 화면에는 웹 기사 캡처가 떠 있었다.[희귀한 황금 혈액형 연인, 여자 친구가 800cc의 피로 남자 친구를 구해줌. 이제 내 피가 당신의 몸속에 흐르고 있어요.]로맨틱한 제목과 함께 내가 강유형의 손가락을 잡고 응원하던 사진이 실려 있었다.그저 힘내라는 뜻에서 손을 잡았던 순간이었지만 제목과 사진이 더해지니 마치 우리가 생사를 함께하는 연인처럼 보였다.“이 뉴스 언제 올라온 거야?”나는 강진혁을 보며 물었다.“3일 전이야. 네가 수혈을 끝내고 바로 올라왔어. 내가 병원에 도착했을 때 이미 실시간 검색어에 올라와 있었고 진정우도 이미 와 있던 상태였어. 진정우가 아마 이걸 봤던 게 분명해.”그 순간 나는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강진혁은 내 표정이 안 좋아지는 걸 눈치채고 조용히 덧붙였다.“바로 사람을 시켜 이 뉴스는 삭제했어. 지금은 인터넷에서 찾아볼 수 없어.”그게 무슨 소용일까.진정우는 이미 이 기사를 봤을 텐데 말이다.나는 다른 사람들이 오해하는 건 상관없었지만 진정우만큼은 아니었다.그가 아무리 나를 믿고 있더라도 이 사진과 제목은 충분히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했다.“이 일은... 내가 진정우한테 직접 설명할게.”강유형이 말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이런 일은 설명할수록 더 복잡
나는 휴대폰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그래.]그 단어 하나가 머릿속을 텅 비게 만들었다.잠시 후, 나는 내가 보낸 메시지를 다시 확인했다. 이때 강유형이 욕설을 내뱉으며 말했다.“저 자식, 도대체 뭘 하겠다는 거야?”그는 다시 진정우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이번에는 전원이 꺼져 있었다.나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휴대폰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리고 빠르게 창가로 걸어가 밖을 내다보았다. 어둠이 내려앉은 밤공기가 마음을 더 무겁게 만들었다.내 뒤에서 발소리가 들리자 나는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잠시만 혼자 있고 싶어요.”강유형과 강진혁은 내 마음을 이해했는지 더는 말없이 문을 닫고 나갔다.그 순간, 참았던 눈물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내가 왜 울고 있는 걸까? 그가 그렇게 쉽게 헤어지자고 한 말 때문일까?아니면 내가 이렇게 기다렸음에도 나를 보러 오지 않은 것에 대한 서운함 때문일까?나는 진정우를 기다렸고 그는 왔지만 나는 결국 얼굴조차 보지 못했다.그저 긴 잠에 빠졌을 뿐인데 겨우 사흘 동안 못 봤다고 나를 이렇게 대할 수 있는 걸까?분명히 뭔가 이유가 있을 것이다. 혹시 나를 구하는 과정에서 크게 다쳐서 나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은 걸까?아니면 그가 말하지 못할 사정이 있는 걸까? 아니면 그의 가족, 특히 그 유명한 진씨 가문이 나 같은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는 걸까?머릿속은 온갖 상상으로 뒤엉켰지만 나는 스스로를 억누르며 생각을 멈췄다.이럴 때일수록 직접 확인하는 게 나을 테니까.하지만 그가 전화를 꺼둔 탓에 다른 방법을 생각해야 했다.그 순간, 문득 진소영이 떠올랐다. 나는 그녀와 시차가 있다는 사실조차 잊고 전화를 걸었다.“언니!”진소영의 잠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자고 있었던 모양이다.나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잠시 머뭇거렸다.“언니?”그녀가 다시 불렀다.“잘못 걸었어. 미안해, 자는데 깨웠지?”내 목소리에 감정을 숨기려 애썼다.내가 지금 처한 상황을 그녀가 알게 된다면 분명히 걱정할 것이다.“아니에요
“지원아!”강유형이 손을 뻗어 나를 붙잡았다.나는 그의 머리에 감긴 붕대를 잠시 바라보다가, 그와 함께 들어온 강진혁을 향해 말했다.“정우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아요.”그러자 강진혁은 미간을 찌푸렸다.“무슨 일이야? 어떻게 알아?”“확실한 건 아닌데 그냥 느낌이 그래요.”나는 힘없이 대답했다.“전화했더니 바쁘다면서 나중에 연락하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지금까지 아무 소식도 없어요.”나는 이유를 설명했다.“그럼 다시 전화해 봤어?”강유형이 물었다. 사실 다시 걸어보진 않았다.진정우가 나중에 연락하겠다고 했으니, 나는 그냥 기다리고만 있었다.“내가 걸어볼게.”강유형이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한참 후, 진정우의 목소리가 들렸다.“강 대표님.”바로 내 앞에서 전화했기에 대화가 또렷하게 들렸다.“정우 씨, 지금 어디예요?”강유형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비행기 안이에요.”진정우의 대답에 내 숨이 멎는 것 같았다. 강유형이 나를 힐끗 보며 다시 물었다.“비행기? 어디로 가는 중이죠?”“귀국 중입니다.”이 짧은 두 글자에 내 심장은 쥐어짜이는 듯했다. 나는 강유형의 휴대폰을 낚아채며 말했다.“정우야, 무슨 일 생긴 거야?”아무 대답이 없자 내 손은 떨리기 시작했다.“말 좀 해봐. 무슨 일 있는 거야? 지금 어디에 있어? 지금 거짓말하고 있는 거지.”그가 깨어난 나를 보러 오지 않은 이유가 이해되지 않았다. 아무리 바빠도 이런 일에는 반드시 와야 하지 않나?“아니야. 거짓말 안 했어.”진정우가 차분하게 답지만 나는 그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못 믿어. 전에 나 속인 적 있잖아.”그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그래, 나는 거짓말쟁이야. 하지만 이번엔 아니야. 못 믿겠으면 사진 보내줄게.”전화가 끊기고 곧 내 휴대폰에 메시지가 도착했다.그는 비행기 좌석에 앉은 자신의 사진과 함께 비행기표 사진을 보내왔다.그가 진짜 귀국 중이라는 사실이 확인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단 한 번도 나를 보러 오지
강진혁이 내가 사흘 동안 의식 없이 누워 있었다고 말했다. 강진혁이 사흘 동안 이곳에 있었다면, 전화로 곧 오겠다고 했던 진정우도 이미 왔었을 것이다. “물 좀 마셔.”강진혁이 컵을 건네며 말했다. 나는 그의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진정우는 어디 있어요?”그의 표정이 잠시 굳어졌다.“일단 물부터 마셔.”그 말에 불길한 예감이 들었고 목이 점점 더 아파졌다. “아직 안 왔나요?”“아니.”그는 침대 옆에 앉으며 대답했다.“왔었어.”“그럼 지금은 어디 있어요?”내가 의식이 없던 동안 그는 당연히 내 곁에 있어야 하지 않았을까? 아니면 내가 벌이라며 그를 보지 않겠다고 한 말을 그대로 받아들인 걸까?“떠났어. 아마 널 다치게 한 사람들을 처리하러 간 것 같아.”그가 말하며 미소를 지었다.“정말 진정우밖에 없네. 깨어나자마자 걔부터 찾고.”그의 농담에 약간 안도했지만 떠오르는 위험한 상황들이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혼자 갔나요? 언제 떠났는데요?”“정확히는 모르겠어. 하지만 걱정하지 마. 널 구할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이라면 그 문제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을 거야.”강진혁의 말에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그는 진정우의 능력을 신뢰하는 것 같았다.내가 알던 진정우는 평범한 회사원이었을 뿐인데 그의 진짜 정체를 알고 난 후로는 모든 것이 달라졌다. 심지어 해외에서도 이렇게 영향력을 발휘하다니. 문득 강유형이 내게 했던 질문이 떠올랐다.“너 정말 진정우에 대해 다 알아?”지금 생각해 보니 나는 정말 그를 잘 알지 못했던 것 같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더 잘 아는 듯했다.나는 강진혁이 건넨 물을 몇 모금 마시며 물었다.“오빠도 진정우의 정체를 알고 있었어요?”그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너보다 조금 더 일찍 알았어.”“근데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어요?”그렇게 묻고 나니 스스로가 우스웠다. 내 남자 친구의 진짜 정체를 왜 다른 사람이 나에게 말해줘야 한다고 생각했을까?“지원아, 이유가 있을 거야. 직접 만나서 이
수혈을 과도하게 한 탓인지 나는 깊은 잠에 빠져 한참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꿈속에서 누군가가 계속 내 귓가에 속삭이고 있었다.“지원아, 꼭 조심해야 해. 다치거나 피를 흘리면 아무도 널 구할 수 없어.”“왜 그렇게 많은 피를 준 거야... 그러다가 죽으면 어쩌려고.”“바보 같은 년, 누가 너더러 피를 주라고 했어?”“지원아, 제발 날 구해줘. 나... 너무 추워.”꿈속의 목소리는 부모님, 진정우, 그리고 강유형이었다.나는 뭐라도 대답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그러다 꿈속 장면이 멈췄고 강유형이 온몸에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리고 있는 장면이 보였다.마치 수도꼭지를 틀어놓은 것처럼 그의 몸에서 피가 끝없이 흘러내렸다.나는 겁에 질려 소리쳤다.“강유형! 강유형!”손을 뻗어 그의 상처를 막으려 했지만 아무리 막아도 피는 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공포에 몸이 떨리며 나는 그를 계속 불렀다.“강유형! 강유형!”“지원아, 일어나. 제발 정신 좀 차려!”급한 목소리와 함께 꿈에서 깨어났다.눈을 뜨자마자 나는 거친 숨소리를 내쉬었다. 꿈속에서 느낀 공포가 여전히 온몸을 지배하고 있었다.“지원아.”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고 고개를 돌리자 강진혁이 내 손을 꼭 잡고 있었다.“악몽이라도 꿨어?”그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나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빼려 했다.강진혁은 내 손을 놓아주며 물었다.“여기까지 어떻게 오셨어요?”나는 목이 칼에 베인 듯 아파 말을 내뱉는 게 너무 힘들었다.“너와 유형한테 이렇게 큰일이 났는데... 내가 안 올 수 있겠어?”강유형의 생각이 내 머릿속에 떠오르며 꿈속 장면과 현실에서 그가 위급했던 모습이 겹쳤다.나는 아픈 목소리로 물었다.“강유형... 어때요?”강진혁은 다행히도 평온하게 대답했다.“이미 깨어났어. 너를 몇 번 보러 오기도 했어. 하지만 쉬게 하려고 내가 다시 병실로 돌려보냈어.”그의 말을 듣고 나는 깜짝 놀랐다.“제가 그렇게 오래 잤다고요?”창밖을 바라보니 날이 밝았고 사고가
평소 병원에서 검사 결과가 나오려면 최소 30분은 걸리는데 이번엔 단 몇 분 만에 결과가 나왔다.의사는 매우 기뻐하며 말했다.“좋습니다. 지금 바로 수혈을 진행해야 합니다. 대략 400cc에서 600cc 정도 필요할 수 있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나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괜찮아요. 더 필요하다면 더 해도 돼요.”강유형이 내 탓에 다친 것은 아니지만 그가 과다 출혈로 죽게 놔둘 수는 없었다.나는 의사의 안내로 옷을 갈아입고 응급실로 들어갔다.나는 구급 침대에 누워 있는 강유형을 보았다. 그의 얼굴은 핏기가 없었고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의사가 그가 언제든지 생명이 위태로울 수 있다고 말한 생각에 나는 마음이 불안해졌다. 나는 그의 옆으로 걸어가 그의 새끼손가락을 가볍게 잡으며 속삭였다.“강유형, 꼭 버텨야 해. 힘내.”그는 스스로 생명줄을 놓아서는 안 되었고 나는 그의 생명을 이어주기 위해 수혈을 해야 했다.나는 그의 옆 침대에 누웠고 날카로운 바늘이 내 팔을 찔렀다. 붉은 피가 투명한 관을 따라 그의 몸으로 흘러 들어갔다.얼마나 많은 피를 뽑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그의 상태가 나아질 때까지 버티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피가 계속 빠져나가자 나는 점점 눈앞이 흐려지고 머리가 어지러워졌고 졸음이 밀려왔다.나는 이것이 혈액 손실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나는 수혈을 멈출 수 없었다. 강유형을 살리려면 내 피가 필요했기 때문이다.“이미 600cc나 뽑았습니다.”한 의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하지만 환자의 혈압과 호흡이 아직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더 계속 수혈해야 합니다.”주치의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고 그가 말을 꺼내기 전에 나는 대답했다.“더 뽑아주세요. 괜찮아요.”“더 뽑으면 윤지원 씨가 실신할 수 있습니다.”의사가 나를 보며 경고했다.“아니에요. 지금 제 상태는 아직 아주 좋아요. 정말 괜찮아요. 더 뽑아주세요.”아마도 내가 너무 집착해서 그런 것 같았기에 의사는 주치의에게 물었
우리는 마침내 구조되었다.구조대원 중 한 명은 신지태를 만나러 갈 때 나를 태워준 운전기사였다.나는 그가 진정우의 사람임을 알고 있었다.차가 심하게 찌그러져서 차를 절단해야만 강유형과 운전기사를 구출할 수 있었고 그 과정에서 나와 강유형의 핸드폰도 함께 찾아냈다.“어? 이 전화 아직도 통화 중이네요.”그는 핸드폰을 내게 건네주었다.하지만 그건 내 핸드폰이 아니라 강유형의 것이었다.나는 전에 이 핸드폰으로 진정우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그가 전화를 끊지 않았던 것일까?나는 혼란스러운 상태로 핸드폰을 받아 들여다보니 통화가 막 끝난 상태였고 통화 시간은 67분 12초로 표시되어 있었다.진정우가 계속 전화를 끊지 않았다는 것은 아마도 강유형과 내가 나눈 대화를 들었을까?하지만 강유형과 나는 별로 중요한 얘기를 하지 않았던 것 같아 안도했다.깊이 생각할 여유도 없이 나는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옮겨졌다.검사 결과 나는 가벼운 상처를 입었지만 강유형과 운전기사는 매우 위중한 상태였다.강유형은 과다 출혈로 인한 쇼크 상태였고 운전기사는 머리를 심하게 다쳐 의식이 없었다.셋 중에서 내 상태가 가장 양호했다.이는 전적으로 강유형이 끝까지 자신의 몸으로 나를 보호했기 때문이었다.“강유형 씨의 가족이나 보호자가 계십니까?”의사가 다가와 물었다.우리는 낯선 나라에 있었고 지금 이 순간 강유형의 가족은 그의 곁에 없었다.나는 결국 나서야 했다.“제가 가족입니다. 강유형 씨의 상태는 어떤가요?”의사의 설명은 충격적이었다.“현재 환자가 과다 출혈 상태입니다. 문제는 환자의 혈액형이 매우 희귀한 RhD 음성, RhNULL이라는 점입니다. 우리 병원에는 이 혈액의 재고가 전혀 없어서 즉시 수혈하지 않으면 환자의 생명이 위험할 수 있습니다. 보호자께서는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나는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의사가 강유형 씨의 생명이 위험하다고 말한 것도 충격적이었지만 그의 혈액형이 RhNULL이라는 사실은 더욱 놀라웠다.“혹시 같은 혈
강유형과 헤어진 이후로 이렇게 가까이에서 그를 바라본 건 처음이었다.지금 그는 바로 내 앞에 있었고 심한 상처를 입은 상태였다.차가 뒤집힐 때 나를 안고 보호해 준 사람이 그였고 나 때문에 이렇게 심하게 다쳤을 것이다.“강유형, 말 좀 해봐.”내가 뭐라고 해도 소용없을 것 같았다. 내가 말을 걸어도 그는 점점 더 잠에 빠질 뿐이었다.“무슨 말을 하라는 거야?”그가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하고 싶은 말 다 해봐. 우리가 헤어진 후에 무슨 생각 했는지... 조나연 얘기도 좋고, 얼마 전 네가 왜 갑자기 사라졌는지 말해도 좋아.”나는 마음속에 있는 말들을 한꺼번에 쏟아냈다.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혹시 잠이 든 건가 싶어 다시 불렀는데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지원아, 난 정말 널 사랑했어.”나는 숨을 멈추고 그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았고 뭐라 답해야 할지 몰랐다.“넌 내가 유일하게 좋아했던 여자야. 너를 본 이후로 다른 여자는 그냥 평범한 사람으로만 보였어. 그 어떤 설렘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그는 미소처럼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계속 말했다.“이런저런 여자들이 나한테 고백도 하고 출장 중엔 누군가는 옷까지 벗고 내 침대에 들어와 있었던 적도 있었어. 하지만 난 말하지 않았어. 네가 걱정하고 상처받을까 봐.”“나는 항상 너를 지키고 싶었어. 그래서 어떤 여자를 만나도 손끝 하나 대지 않았어. 그들이 너무 더럽게 느껴졌거든. 내가 그들을 만지면 너까지 더럽혀질까 봐.”그는 잠시 숨을 골랐다가 다시 말했다.“조나연 일이 벌어진 것도 나도 모르게 빠져버린 함정이었어. 조나연은 겉으로 너무 잘 꾸며져 있었어. 아마 하늘이 일부러 우리를 방해한 거겠지...”그가 한참 힘을 주어 눈꺼풀을 들어 올려 나를 바라보았다.항상 강하고 당당했던 그가 이렇게 무기력해진 모습은 처음이었다.“우리 운명이 거기까지였나 봐. 아마도 서로 진심이 부족했나 보지. 우리는 하늘도 어쩌지 못할 운명이었겠지.”나는 그의 말을 받아줬다.강유형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