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더 예뻐지고 싶어 한다고들 하지 않던가.나는 이제야 내가 진정우를 신경 쓰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다.손을 씻고 나오자마자 진정우가 다가와 나를 부축하려 했다.나는 괜히 강한 척하며 그의 손을 뿌리쳤다.“괜찮아요. 저 이제 괜찮아요.”그는 억지로 도와주려 하지 않고 내 뒤를 따라 식탁으로 걸어왔다.테이블 위에는 아까 말했던 요리뿐만 아니라 깔끔한 반찬 두 가지와 과일샐러드까지 추가되어 있었다.차려진 음식은 보기만 해도 입맛을 돋웠다.“정우 씨, 동생은 정말 행복하겠어요.”그가 이렇게 정성을 다해 요리하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감탄하며 말했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아무 대답도 없었다. 그의 동생이 심장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이 떠오르며, 갑자기 머릿속에 질문 하나가 떠올랐다.“정우 씨, 고향은 어디예요? 동생은 어디서 살아요?”그는 나를 흘깃 쳐다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나는 웃으며 장난스럽게 물었다.“왜 그래요? 내가 당신 동생한테 뭔가 해코지라도 할까 봐요?”“평진이요. 청평 아래에 있는 작은 마을이에요.”이번에는 의외로 상세히 대답했다.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태연한 척 말했다.“저 이번에 대표님 덕분에 휴가받았어요. 수고했다며 그냥 쉬라고 하시더라고요.”“그래요.”그는 여전히 담담했다.역시 군인 출신이라 그런지 보통 사람들과는 감정 표현부터 다르게 느껴졌다.대표님이 준 휴가 이야기를 하다 보니 자연스레 그 신비로운 대표님이 떠올랐다.“내가 뭘 잘했다고 대표님이 이렇게 잘해 주시는지 모르겠어요. 아직 눈에 띄는 성과도 없는데 말이에요.”그러다 문득 대표님이 강유형의 회사 계약을 거절했던 일이 떠올랐다.“사실 대표님 아니었으면 저 아마 강유형 회사랑 계약했을 거예요. 그 회사 괜찮았고 이익도 꽤 됐거든요. 그런데 대표님이 딱 잘라 거절하시더라고요.”내 말을 듣던 진정우가 슬쩍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왜요?”“글쎄요, 혹시 제가 마음에 들어서 그런 건 아닐까요?”나는 장난스럽
그날 밤, 나는 집을 떠났다. 진정우의 집은 불이 꺼져 있었다. 아무래도 집에 없는 듯했다.강진혁에게서 전화가 걸려 온 건 기차역 대기실에 앉아 있을 때였다.이번에는 비행기 대신 KTX를 선택했다.시간이 두 시간 더 걸리긴 했지만 나는 땅 위를 달리는 KTX가 하늘을 나는 비행기보다 더 안정감을 준다.“지원아, 차 고쳤어. 어디 있어? 내가 가져다줄게.”강진혁의 목소리는 늘 그랬듯 따뜻하고 차분했다.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스마트폰을 바라보는 사람들 사이에서 담담히 대답했다.“수리소에 놔두세요. 제가 직접 찾으러 갈게요.”잠시 침묵이 흘렀다. 강진혁이 다시 입을 열었다.“수리소가 어디 있는지 알아?”“네. 항상 거기서 정비하잖아요.”그는 잠시 망설이더니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정비사가 그러는데 네 차에 누가 일부러 손을 댔다고 하더라.”그 말에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사실, 내가 일부러 조작한 거였으니까.“정말요?” 나는 최대한 놀란 척 물었다.“지원아, 혹시 네 차를 다른 사람이 운전한 적 있어?”그의 질문은 순수한 걱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나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대답할 말을 고민했다. 그때 강진혁이 덧붙였다.“다행히 해를 끼치려던 건 아니었던 것 같아. 다만 조금 번거롭게 하려던 것 같아. 차라리 집에서 멈춘 게 나았지, 밖에서 멈췄으면 더 골치 아팠을 거야.”그의 말에 나는 굳이 변명하지 않기로 했다.“알겠어요. 조심할게요.”잠깐의 침묵이 이어지더니, 강진혁이 다시 물었다.“지금 밖에 있어? 주변이 좀 시끄러운데.”“네.”나는 짧게 대답했다.그는 내 짧은 대답에 더 묻지 않았다. 대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몸조심해.”전화를 끊고 나니 가슴 한구석이 답답했다.요즘 ‘불필요한 인간관계와 소셜 활동을 줄여라’는 영상들을 자주 보게 되는데 그 의미를 이제야 조금 이해할 것 같았다.사람들과의 관계는 때로는 부담스럽고 피곤하게 만들기도 한다.특히 걱정을 해주는 사람이 많을수록 마음이 더 무거워졌다.나는
이곳은 정말로 여행지나 휴양지로도 손색이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나는 주변 풍경에 취해 넋을 놓고 있다가, 갑자기 뒤에서 들려오는 낯선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언니, 누구 찾으세요?”돌아보니, 하얀 원피스를 입은 소녀가 서 있었다. 짙은 흑발을 땋아 가슴 앞으로 늘어뜨린 그녀는 맑고 깨끗한 눈을 가지고 있었다.“혹시 성이 진 씨야?”나는 대뜸 그녀에게 물었다.그러자 소녀의 눈에 놀라움이 스쳤다.“네, 맞아요. 언니는... 우리 오빠를 찾으러 오신 건가요?”그 말을 듣고 그녀가 진정우의 여동생임을 확신했다.솔직히 진정우와 전혀 닮지 않았지만 둘 다 흠잡을 데 없이 아름다웠다.진정우는 강인하고 남성적인 매력을 가지고 있다면, 이 소녀는 자연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청초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다.“응, 나는 네 오빠의 친구야.”나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그녀는 잠시 당황한 듯 보였지만 곧 두 손으로 내 손을 잡았다.“저는 진소영이에요.”기쁜 듯하면서도 어색해하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웃으며 말했다.“안으로 들어가도 될까?”진소영은 그제야 정신이 든 듯, 서둘러 내 손을 놓으며 집 안으로 안내했다.“오빠도 참, 아무 말도 안 하고... 제대로 정리도 못 했잖아요.”나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네 오빠도 몰라. 나 몰래 온 거거든.”그녀는 깜짝 놀라더니 한참 후에야 고개를 끄덕였다.나는 이미 그녀의 집안을 유심히 둘러보고 있었다. 이곳은 볼수록 마음에 드는 곳이었다.“언니, 여기 앉으세요. 제가 꽃차 끓여드릴게요.”진소영은 밝은 미소로 나를 맞이했다. 하지만 괜히 부담을 줄까 봐 나는 사양했다.“괜찮아, 목마르지 않아.”하지만 그녀는 안으로 들어가더 곧 주전자와 말린 꽃잎을 들고나왔다. 나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웃었다.“네 오빠가 사준 거야?”“네. 오빠는 항상 저한테 최고의 것만 주려고 해요.”진소영은 자랑스러운 얼굴로 말했다.꽃차를 끓이며 그녀가 집안을 한번 둘러보더니 말했다.“이
“언니, 우리 오빠를 사랑해 줘서 정말 고마워요. 우리 오빠를 받아줘서요!”진소영은 그렇게 말하며 두 손으로 정성스럽게 차를 따라 내게 내밀었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그 순간, 내 눈가도 뜨거워지며 코끝이 찡했다.하지만 나는 웃으며 말했다.“어머, 네 말투가 꼭 너희 오빠가 아무도 받아주지 않는 사람처럼 들리네.”진소영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나는 그녀가 건넨 차를 받아 한 모금 마셨다.입안 가득 퍼지는 맑고 청아한 꽃차 향이 정말 일품이었다. 이렇게 순수하고 깔끔한 맛은 처음이었다.역시 이슬 물로 끓인 차는 다르구나 싶었다. 정말 천상의 맛이었다.“언니, 우리 오빠는 저 때문에 여자 친구도 안 사귀었어요. 나중에 자기 부인이 날 싫어할까 봐, 날 귀찮아할까 봐요...”진소영은 말을 이어가다 멈췄다.그녀가 갑자기 말을 멈춘 이유를 나는 알 수 있었다.아마 오빠가 그녀의 병에 대해 내게 말하지 않았을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혹시 내가 그녀가 아픈 것을 알게 된다면 진정우를 싫어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듯했다.나는 담담하게 웃으며 한 모금 더 마신 후 말했다.“네가 몸이 아프다고 해서 내가 너희 오빠를 싫어할 것 같아? 내가 이렇게 예쁜 소녀를 보고도 그런 생각을 한다면 내가 얼마나 나쁜 사람이겠니?”내 말에 진소영은 다시 환하게 웃으며 긴장을 풀었다.그러고는 다시 물었다.“오빠가 제 병에 대해 말했어요?”“그럼. 아니면 내가 이렇게 먼 길을 와서 널 보러 왔겠어? 네가 궁금해서 온 거야. 그리고...”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고개를 살짝 저었다.진소영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그리고 뭐요?”나는 그녀가 오해할까 봐 다시 입을 열었다.“그리고 널 데려가려고 했지. 하지만 이곳을 보니까 내가 널 데려갈 자격이 없는 것 같아.”솔직히 내가 그녀를 데려갈 곳은 이곳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아무리 좋은 환경을 제공한다 해도 이런 자연 속에서의 자유로운 삶과는 다를 테니까.“언니가 절 데려가신다면 전
“언니, 혹시 방법이 있어요?”진소영이 반짝이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나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방법은 분명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진정우조차 시도하지 않은 일을 내가 감히 나서서 할 수 있을까?성공하면 다행이겠지만 실패한다면?진정우가 평생 나를 용서하지 않는 건 차라리 괜찮다.하지만 그가 소영이을 잃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는 건 차마 견딜 수 없을 것이다.“언니도 방법이 없는 거죠?”내 침묵을 희망이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인 진소영의 얼굴이 금세 어두워졌다.그녀는 고개를 숙이더니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오빠도 시도하지 못했어요. 너무 위험하니까요. 어떤 의사가 감히 자신 있게 도전할 수 있겠어요.”그녀는 한숨을 내쉬더니 곧 고개를 들고 맑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변화가 너무 빨라 보여도, 그건 단지 그녀가 나에게 자신의 우울함을 전하고 싶지 않아서일 것이다.“괜찮아요, 언니. 지금도 저는 충분히 행복해요. 얼마나 살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어쩌면 이렇게 오래오래 살지도 모르죠.”그녀의 이런 말이 오히려 내 마음을 더 무겁게 했다.나는 이렇게 예쁘고 순수한 아이에게 희망을 잃게 하고 싶지 않았다.그래서 위로 삼아 말했다.“사실 내 친구 중에 의사가 있어. 해외에서 공부하고 온 사람이거든. 지금은 산부인과 의사지만 그녀에게는 유능한 의사 친구들이 많아. 심장 분야의 전문가도 있어.”“진짜요?”순간 진소영의 눈빛이 빛을 발했다.그 눈빛은 마치 새로운 희망의 불빛처럼 반짝였다.“그럼. 사실 이번에 온 것도 네 상태를 알아보고 싶어서야.”나는 그녀를 달래려고 한 것도 있지만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은 것도 사실이다.물론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다.하지만 진소영의 눈빛 속에서 느껴지는 간절함은 나를 움직이게 했다.그녀에게 단순히 살아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건강한 삶을 누리고 싶은 열망이 느껴졌다.지금 그녀가 지내고 있는 이곳은 누군가에겐 꿈같은 낙원일지 몰라도, 그녀는 분명 이곳을
내 말을 들은 진소영은 얼굴이 새하얘지며 고개를 급히 저었다. 내 손을 꼭 잡은 그녀는 다급하게 말했다.“언니, 그런 오해 하면 안 돼요! 그 사진 속 사람... 그런 거 아니에요. 우리 오빠는 다른 여자를 좋아한 적이 없어요. 언니가 첫 번째예요.”그녀가 겁에 질려 손까지 떨고 있는 모습을 보니 더는 놀리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영이는 심장이 약했다. 작은 충격도 조심해야 했다.나는 그녀를 안심시키려 코끝을 손가락으로 살짝 건드리며 말했다.“왜 그렇게 긴장해? 나 다 알아. 네 오빠가 여자 친구 사귄 적 없다고 했어.”진소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하게 덧붙였다.“그리고 다른 여자아이를 좋아한 적도 없어요.”그 말을 듣자 웃음이 나왔다. 이 아이는 정말 순수했다. 마치 세상에 조금도 물들지 않은 채 자신만의 깨끗한 세계에 사는 것 같았다.하지만 그만큼 마음 한구석에서는 걱정도 들었다.이런 순수한 아이가 언젠가 누군가를 좋아하게 된다면, 그녀만큼 순수한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만약 사랑으로 인해 상처받는다면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나는 그런 걱정을 떨쳐내며 부드럽게 말했다.“알겠어. 네 오빠 정말 순수하다는 거 알아. 내가 잘 지켜줄게.”그러자 진소영은 다시 웃었다.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벽에 걸린 사진들을 살폈다. 겉으로는 신경 쓰지 않는 척했지만 여전히 진정우가 소녀를 업고 있는 사진이 마음에 걸렸다.그 소녀는 분명 진소영이 아니었다. 만약 소영이었다면 그녀가 그렇게 긴장하며 해명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그렇다면 사진 속 소녀는 누구일까?이웃집 아이? 아니면 친척? 지금쯤은 다 자랐겠지. 혹시 드라마처럼 갑자기 나타나 “정우 오빠!”라며 찾아오는 건 아닐까?생각이 지나치게 앞서가고 있다는 걸 깨닫고 스스로 피식 웃었다. 이렇게까지 상상하다니, 나도 참 한가하다 싶었다.다시 진정우네 가족사진으로 눈길을 돌렸다. 이번에는 그의 아버지 얼굴에 시선이 멈췄다. 묘하게 익숙했고 마치 어디선가 본 적 있는 얼굴 같았다.“아
진소영은 단순한 동생이 아니었다. 진정우가 마치 딸처럼 키운 존재였다.그런 애틋한 마음이 있었기에, 강철 같은 그도 이렇게 조심스럽고 신중한 사람이 되었겠지.소영이는 진정우와의 추억을 하나둘 들려주었다.이 작은 집은 진정우가 직접 벽돌 하나하나 쌓아 올려 지은 곳이라고 했다.집에 있을 때는 물고기를 잡아 구워주곤 했고 그의 요리는 모두 소영이를 위해 연습한 결과라고 했다.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진정우를 조금 더 이해하게 되었다.책임감과 외로움 속에서 그의 특별함이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니 마음이 아려왔다.소영이는 이야기를 하다가 어느새 잠이 들었다.그 평온한 얼굴을 바라보며 문득 진정우에게 전화를 걸고 싶었다."앞으로는 내가 당신을 더 아껴줄게. 혼자 감당하지 않게."하지만 그 충동은 잠깐 스쳤을 뿐, 행동으로 옮기진 않았다.그런 말은 말로 하는 게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줘야 하는 거니까.하지만 대신 안리영에게 전화를 걸었다.“너 어디야?”피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딘가 상태가 좋지 않은 듯했다.“너 왜 이래? 수술 끝난 거야? 피곤해 보여.”“아니, 아파서 그래.”그 말에 순간 놀랐다. 안리영이 아프다는 말은 좀처럼 듣기 힘들었으니까.“무슨 일이야? 약은 먹었어?”“응. 별일 아니야. 과로 때문이야.”안리영는 담담하게 대답했다.“근데 너 어디야? 무슨 일 생겨서 도망친 거 아니지?”그 말에 나는 웃음이 나왔다.“내가 그런 사람으로 보여?”“아니, 넌 그런 사람 아니지.” 그녀는 나를 잘 알고 있었다.“사실 부탁 하나 하려고.”나는 진소영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런데 그녀가 한참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왜? 네 쪽에 아는 사람 없어?”잠시 정적이 흐른 후에 안리영이 입을 열었다.“...있어. 네 말로 보면 가능할 것 같긴 해.”“정말? 고마워.”그녀의 목소리에 담긴 묘한 분위기를 눈치채지 못한 채 나는 고마움을 전했다.하지만 그녀는 곧 뜻밖의 말을 꺼냈다.“근데 그 사람한테 연락하기 싫어.
진소영은 내가 떠나는 게 아쉬운 듯, 어떻게든 붙잡고 싶어 했다. 그녀의 세상은 너무나도 외로웠으니까.나는 단 이틀의 휴가만 받았지만 그녀와 더 시간을 보내기 위해 허진호에게 연락해 이틀을 더 연장했다. 하지만 결국 떠나야 할 시간은 찾아왔다.소영이는 내가 떠나는 길에 마시라고 작은 병에 담은 이슬 꽃차를 건넸다.“언니, 이거 꼭 가져가세요.”게다가 꽃가루와 꽃잎으로 만든 음식을 정성껏 포장해 주며 마치 그녀가 가진 모든 것을 나눠주려는 것 같았다.그녀의 마음이 너무나도 고마워 가슴 한편이 저렸다.“언니, 나중에 꼭 다시 와주세요.”소영이는 내 얼굴을 보지 않고 말했다.그녀의 눈에 맺힌 눈물을 들키지 않으려는 것이 분명했다.나 역시 코끝이 찡해져 목소리를 내기가 어려웠다.“응, 꼭 올게.”나는 짧게 대답하며 마음을 다잡았다.이별은 늘 아픈 법이다.나는 소영이를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내 친구가 좋은 의사를 알아봐 주고 있어. 연락되면 네 오빠랑 같이 데리러 올게.”“정말요? 기다릴게요.”그녀의 반짝이는 눈빛을 보며 나는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았다.갈 때는 기차를 탔지만 돌아올 때는 비행기를 선택했다. 피곤했던 나는 비행기에서 깊이 잠들었다. 안리영에게 연락하니 공항에 도착하면 바로 병원으로 오라고 했다.꿈속에서는 며칠 동안 소영이와 함께했던 시간들이 떠올랐다.함께 꽃을 다듬고 강물에서 빨래하고 밤새 이야기를 나누었던 순간들. 그 따뜻한 기억들이 나를 가득 채웠다.착륙 후 곧장 택시를 타고 수리센터로 향했다.가는 길에 휴대폰이 울려서 봤더니 발신인은 강유형이었다.그가 조나연과의 관계를 공개한 후 나를 거의 찾지 않았기에 이번 전화는 의외였다.“지원아, 우리 아버지가 정말 하룻밤 만에 머리가 하얗게 셌다는 게 사실이야?”그 말에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며칠이 지난 지금에서야 이런 사실을 알게 된 것도 기가 막혔고 나에게 이런 질문을 한다는 것조차 어이가 없었다.“직접 가서 보면 되잖아.”나는 냉정하게 말했다.내가
나는 힘없이 웃었다. 허진호가 굳이 전화를 걸어 단순한 안부를 물을 리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그는 분명 내가 제대로 살아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을 것이다. 나는 손목을 들어 올려 작은 방울을 입술에 살짝 대고 조용히 중얼거렸다.“정우야, 네 친구가 널 대신해서 내 안부를 챙겨주고 있어.”해가 질 무렵, 나는 회사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강진혁을 발견했다.붉게 물든 석양 아래 그의 실루엣이 마치 빛을 두른 것처럼 선명했다.그가 서 있는 모습은 단정하고 부드러웠지만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젊은 여자 직원들이 연신 뒤돌아보며 속삭였고 어떤 용기 있는 이는 대놓고 감탄하며 말했다.“오빠, 진짜 잘생겼어요!”그러나 그는 그 모든 시선을 철저히 차단한 채 오직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나는 그에게 다가가 장난스럽게 말했다.“진혁 오빠, 인기 여전하네요?”그는 살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너까지 장난치지 마.”나는 가벼운 농담을 접고 본론으로 넘어갔다.“소희 소식은요? 아직도 못 찾았어요?”“아직이야. 하지만 그녀의 남자 친구에 대해 조사해 봤는데...”그는 말을 잠시 끊었다. 나는 이상한 기운을 감지하고 조용히 물었다.“뭐가 문제예요?”“그 사람, 빚이 많더라. 사채와 온라인 대출까지 뒤얽혀 있었고 동시에 여러 여자와 교제하고 있었어.”그 말에 나는 한숨을 삼켰다. 결국, 그녀가 힘들어했던 이유는 사랑이 아니라 배신이었을지도 몰랐다.“지금 그 사람은 어디 있어요?”“체포됐어.”나는 순간 놀랐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면회 가능한가요?”“가능하지. 내가 알아볼게.”그는 그렇게 말하며 차 문을 열어 주었다.차 안에 오르자 내 자리에는 꽃다발이 놓여 있었다. 화려한 장미가 아닌, 연보랏빛 라벤더와 안개꽃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꽃다발이었다.나는 꽃을 조심스럽게 집어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이건...?”그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별을 따다 줄 순 없어서 대신 이걸 준비했어.”그의 말은 부드럽고 낭만적이었
“지원아!”강진혁의 목소리는 예전처럼 부드럽고 듣기 좋은 톤이었다. 하지만 내게는 그 다정함이 오히려 날카로운 가시처럼 느껴졌고 가슴을 찌르는 듯한 통증을 남겼다.겉으로 보기에는 한없이 온화하고 배려심 많은 사람이었지만 그의 내면은 너무나 어두웠다.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 심지어 타인을 짓밟는 일조차 서슴지 않는 사람이었다.나는 감정을 억누르고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오빠, 부탁 하나만 들어줄 수 있을까요?”“말해 봐.”그의 말투는 예전과 미묘하게 달라져 있었다.현재 그는 강유형 대신 KS 그룹을 이끌고 있었고 그 때문인지 목소리에는 자연스럽게 권위가 묻어났다. 역시 사람이 앉는 자리가 그 사람의 말투와 행동까지도 바꿔놓는 법이다.“우리 회사에 있던 직원, 이소희라고 아세요? 제 친구인데 얼마 전에 퇴사하고 연락이 끊겼어요. 혹시 오빠 인맥을 통해 그녀를 찾아줄 수 있을까요?”“이소희?”그는 내 말을 한 번 되뇌더니, 잠시 생각하는 듯한 기색을 보였다.“알았어. 찾아볼게.”“고마워요, 오빠.”나는 여느 때처럼 예의 바르게 감사를 전했다. 그러자 그가 부드럽게 내 이름을 불렀다.“지원아.”“네?”“우리, 만날 수 있을까?”나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좋아요. 언제요?”“네가 편한 시간에 맞출게.”그는 언제나 내 의견을 먼저 물었고 내 뜻을 존중해 주었다. 그는 한 번도 나에게 자신의 기준을 강요한 적이 없었다.그의 마음은 오래전부터 이런 식으로 나를 향해 있었고 나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그의 배려를 받아들이면서도 그 감정을 알아채지 못했다.“그럼 내일 저녁에 봬요. 저를 데리러 와 주세요. 오랜만에 삼촌이랑 아줌마도 뵙고 싶네요.”내 말에 강진혁이 순간 멈칫했다.“...알겠어. 부모님께도 전해 놓을게.”전화를 끊고 나는 손목의 방울을 살짝 흔들었다. 그 맑고 청아한 소리를 들으며 속삭였다.‘정우야, 네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 강씨 집안과 엮이지 말라는 건 대체 무슨 의미였
용설아뿐만 아니라 허진호 역시 진정우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적어도, 그가 겪었던 위험과 고비에 대해서는 나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이제 나는 더 이상 그의 과거를 깊이 파고들 용기가 없었다.그가 어떤 고통을 겪었는지 알면 알수록 더 마음이 아플 테고 그리움만 깊어질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저는 믿을 수 없어요.”허진호가 다시 한번 단호하게 말했다.나 역시도 가슴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진정우가 어딘가에 살아 있을 것만 같았다. 다만 내가 도달할 수 없는 먼 곳으로 떠나버린 것뿐이라고.“그럼 정우가 아주 먼 여행을 떠난 거라고 생각합시다.”나는 손목에 걸린 방울을 살짝 흔들었다. 맑고 청아한 울림이 공간을 가득 채웠고 그 소리에 마치 진정우가 여전히 내 곁에 있는 것처럼 마음 한구석이 조금이나마 따뜻해지는 기분이 들었다.‘다행이야.’그가 남긴 이 작은 방울이, 나를 붙잡아 줄 마지막 선물 같았다. 그때, 허진호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조금만 시간을 줘요. 지원 씨에게 전해줄 물건이 있어요.”“뭐죠?”“직접 보면 알 거예요.”그는 그 말을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나는 그를 붙잡으려 했지만 한 번도 진지한 표정을 지은 적 없던 그가 마치 온 세상을 잃은 듯한 모습으로 걸어가는 걸 보고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그에게도 진정우는 그만큼 소중한 사람이었다. 내게는 사랑하는 사람이었고 허진호에게는 그 누구보다도 신뢰하는 친구였다.그가 느낄 상실감 또한 나와 다르지 않을 터였다.허진호가 떠난 후, 나는 사무실에 앉아 한동안 멍하니 손목의 방울을 흔들었다.그저 작은 움직임이었지만 그 소리는 나를 위로하는 듯했다.점심시간이 되자, 나는 회사를 나와 이소희의 집으로 향했다.전날 그녀에게 연락했지만 휴대전화는 꺼져 있었고 메시지에도 답이 없었다.회사에 알아보니 이미 사직서를 제출한 상태였다. 결국, 직접 그녀의 집으로 찾아가는 수밖에 없었다.“누구세요?”소희의 어머님인 박수미가 나를 경계하는 눈빛으로 바라
남자는 쉽게 눈물을 보이지 않는다. 특히, 여자 앞에서는 더더욱.하지만 지금, 나는 허진호가 내 앞에서 눈가가 붉어지더니 결국 참지 못하고 눈물을 쏟아내는 모습을 똑똑히 보고 있었다.그가 그렇게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먹먹했다.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조용히 그의 사무실을 나와, 그가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충분히 진정우를 기릴 수 있도록 공간을 내어주었다.이 회사가 진정우의 것이라고 했지만 공식적인 사장은 허진호였다.그만큼 두 사람 사이의 신뢰가 깊었고 진정우는 그를 믿고 자신의 모든 것을 맡겼다.그런데 이제, 진정우가 사라졌다. 그를 기다리던 허진호는 이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의 슬픔도, 나 못지않을 것이다.나는 조용히 발걸음을 옮겨, 진정우의 연구실로 향했다. 그는 연구개발을 했기에 직접 실험을 진행하는 일이 많았고 책상 위에는 각종 실험 도구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하지만 그 많은 장비에도 불구하고 연구실은 전혀 어수선하지 않았다.나는 천천히 다가가 책상 위에 놓인 실험 기록 노트를 집어 들었다. 빼곡하게 적힌 숫자들, 그리고 그가 직접 쓴 강직한 글씨들. 손끝으로 글자를 따라가다가, 다시 가슴이 아려왔다.모든 것이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그는 더 이상 여기에 없었다.그가 남긴 것들은 내 손에 닿지만 정작 그는 닿을 수 없는 곳으로 가버렸다. 그가 있었던 흔적이 이렇게나 선명한데 그를 다시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나는 자리로 앉아 그의 책상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에는 평소 그가 쓰던 펜, USB, 블루투스 이어폰, 그리고 기록 노트가 있었다.그리고 눈에 띄는 투명한 상자 하나가 있어 나는 조심스럽게 상자를 꺼내 열어보았더니 안에는 묘하게 낯선 질감을 가진 가느다란 팔찌가 들어 있었다.시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금속이나 은이 아니라,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재질이었고 잠금장치가 없었다. 혹시 빠진 걸까 싶어 상자 안을 뒤적이다가 몇 개의 미완성 부품과 함께 접혀 있는
신입 사원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씩씩하게 대답했다.“그럼요! 윤 부장님, 밥 사주세요.”그 직설적인 대답에 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좋아, 그럼 오늘 저녁에 다 같이 ‘성해 반점’에서 모이자. 내가 쏠게.”“정말이죠?”“당연하지.”“와! 윤 부장님 최고!”신입 사원은 신나서 뛰어나갔고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별것 아닌 대화였지만 회사 분위기가 한결 밝아진 것 같았다.가방을 내려놓고 주변을 둘러본 후, 나는 허진호가 있는 사무실로 향했다.“들어오세요!”문을 열고 들어서자, 그는 책상 가득 쌓인 서류에 파묻혀 있었다. 누가 들어왔는지도 모른 채 바쁘게 사인을 하고 있었다.나는 그의 책상을 흘끗 바라봤다. 거기에는 내가 맡았던 부서의 서류들도 섞여 있었다.‘역시, 내가 아무 걱정 없이 지낼 수 있었던 건 이 사람이 뒤에서 버텨주고 있었기 때문이구나.'내가 없는 동안, 모든 업무를 그가 대신 처리했을 것이다.“허 대표님, 이렇게 혼자서 모든 걸 떠안고 일할 거면 차라리 사람을 더 뽑는 게 낫지 않아요?”내 말을 들은 허진호는 순간 펜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그는 나를 보자마자 깜짝 놀라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세상에, 윤 부장님! 드디어 돌아오셨네요! 저 정말...”그는 말을 멈췄지만 나는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그는 내가 회사로 돌아오지 않을까 걱정했던 것이다.하지만 만약 내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면 왜 새로운 직원을 뽑지 않았던 걸까? 혹시 내 퇴사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 아닐까?“허 대표님, 저 복직할 수 있는 거죠?” 나는 직설적으로 물었다.“당연하죠! 무조건! 그런데 복직 안 하면 설마 퇴사라도 하겠다는 거예요? 절대 안 돼요. 회사 규정상 최소 1년은 근무해야 사직이 가능하다고요!”그의 말에 나는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계약서에 그런 조항이 있었어? 나 왜 몰랐지?’“이건 말도 안 되는 규정이에요.”나는 장난을 치며 말했다.“서명했으면 끝난 거예요. 이제 와서 불평하
나는 자연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강유형을 바라봤다.“네가 말하지 않아도 상관없어. 난 이미 알고 있으니까.”강현우의 눈빛이 깊어졌다.“누구라고 생각하는데?”내가 대답하지 않자 그는 몸을 일으키며 침대에서 내려오려 했다.“지원아, 설마 형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네가 형이랑 만나려는 것도 결국 진정우의 복수를 위해서야?”오랫동안 나를 사랑했던 사람답게, 내 속마음을 읽는 데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진혁 오빠 아니야? 그렇다면 진짜 배후가 누구인지 알려줘.”내 질문에 그는 잠시 말을 삼켰다가 조용히 대답했다.“지원아, 형은 아니야. 사실 나도 정확한 배후가 누군지는 몰라. 그때 네게 말했던 건 그저 추측이었어.”나는 조급해하지도, 당황하지도 않았다.“아니라면 더 좋지. 그렇다면 내가 진혁 오빠를 받아들이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겠네.”강현우의 표정이 굳어졌다.“지원아…“나는 깊은숨을 내쉬며 담담하게 말했다.“우린 10년을 알고 지냈고 4년 동안 사랑했어. 그리고 나는 진정우를 사랑하게 됐지. 나는 여러 가지 사랑을 경험했어. 짝사랑이 이루어지는 설렘도, 운명처럼 빠져드는 감정도. 하지만 결국 사랑이란 건 너무 피곤한 감정이더라. 이제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을 선택하고 싶어.”“좋아, 네가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는 건 이해하지만 형은 절대 안 돼.”강현우는 강하게 반대했고 나는 미소 지으며 되물었다.“왜 안 되는데? 이유를 말해봐.”그는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지원아, 이유 모를 리 없잖아. 꼭 내가 말해야 해? 내 형이잖아. 너는 한때 내 약혼녀였고. 둘이 같이 있으면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볼 것 같아? 우리 가족은 또 어떻게 보겠어? 나더러 어떻게 널 마주하라는 거야?”나는 잠시 침묵했지만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그럼 네 체면과 감정을 위해, 난 내 행복을 포기해야 한다는 거야?”그는 내 말을 듣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나는 차분한 목소리로 덧붙였다.“마음의 준비
만약 강유형이 정말 이대로 다리를 잃게 된다면 내가 그에게 진 빚이 너무 클 것이다.하지만 그와 더 이상 복잡하게 얽히고 싶지 않았다. 그저 할 수 있는 한 그를 설득해 제대로 치료를 받게 하려는 것뿐이었다.“그렇게 심각하지 않아. 몇 번 더 치료받으면 괜찮아질 거야.”그는 창백한 얼굴로 힘없이 말했고 목소리조차 기운이 없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그렇게까지 고집을 부리는 그를 더 설득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강유형이 나를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네가 돌아왔으니, 내 상처도 금방 나을 거야.”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의도를 모를 리 없었지만 그는 곧장 화제를 돌렸다.“신지태가 널 몇 번이나 찾았어. 내가 말리지 않았으면 실종 신고라도 했을걸?”나는 한동안 연락을 끊고 지냈다. 그동안 나를 걱정한 사람들이 많았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지태 오빠 오늘 와?”나는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갔다.“모르겠어. 네가 왔다고 하면 당장이라도 뛰어올걸?”그는 핸드폰을 집어 들며 신지태에게 연락하려 했다.그러나 팔을 움직이는 순간, 상처에서 뻐근한 통증이 밀려온 듯 그는 순간적으로 멈췄다. 나는 그의 감싼 팔을 조심스레 붙잡으며 말했다.“굳이 전화할 필요 없어. 내가 돌아왔으니, 곧 만나겠지.”그는 통증 때문인지, 혹은 다른 이유 때문인지 알 수 없었지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의사 불러줄까?”그는 살짝 고개를 저으며 입술을 적셨다.“물 좀 줘.”나는 컵을 건네주었고 그는 두어 모금 마신 후에야 얼굴이 조금 나아 보였다.“형은 너 보러 왔어?”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두 번 왔었어.”“어제 돌아오면서 우연히 마주쳤어.”“어디서?”“샤부샤부 집에서.”강유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의 반응이 흥미로워 나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나랑 참 인연이 깊은 것 같아.”그는 내 말을 단숨에 이해했는지,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지원아,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돌려 말하지 말고 그냥 말해.”나는
“지원아, 돌아왔구나?”강진혁이 나를 보며 살짝 놀란 듯, 그리고 반가운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말했다.“네, 오늘 막 도착했어요.”나는‘오늘’이라는 단어를 강조하며 대답했고 안리영도 자연스럽게 말을 받았다.“오자마자 이렇게 마주치는 거 보면 진짜 우연인가 보네요.”강진혁은 그녀의 말에서 숨은 의미를 느꼈는지, 위층을 가리키며 덤덤하게 말했다.“고등학교 친구들이 며칠 전부터 약속 잡고 여기서 모이기로 했어.”마침 누군가 그를 불렀다.“진혁아, 우리 먼저 갈게.”그는 멀리 있는 친구들에게 손짓하며 배웅한 뒤, 다시 우리를 바라보며 물었다.“더 필요한 거 있어? 주문할 거 있으면 내가 계산할게.”그의 말투는 자연스러웠지만 분명 의도적으로 챙기려는 느낌이 들었다.“이미 결제했어요.”안리영이 대신 대답했다. 그러자 강진혁은 다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지원아, 좀 쉬고 나면 집에 와서 밥 한 끼 하자. 부모님이 네 걱정을 많이 하셔.”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조만간 먼저 연락할게요. 그리고... 휴링턴에서 신세 많이 졌어요.”굳이 ‘휴링턴’을 언급한 이유는, 그의 반응을 살펴보기 위해서였지만 그는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짧게 대답했다.“그래.”그는 안리영에게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한 뒤 자리를 떠났다. 우리는 유리창 너머로 그가 차에 올라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그 순간, 안리영이 내 발을 슬쩍 건드리며 장난스럽게 물었다.“뭐야, 강진혁 아직도 너 못 잊은 거 아냐?”나는 시선을 다시 테이블로 돌리며 끓어오르는 국물 속에서 부글거리는 재료들을 바라보았다.“리영아, 나는 지금... 강진혁이 이 모든 일의 배후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뭐라고?”그녀는 놀라서 젓가락을 들던 손을 멈췄다. 나는 휴링턴에서 발견한 것들에 대해 조용히 이야기했다.“앞으로 내가 하는 일이 좀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어. 하지만 이해해 줘.”안리영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이상하게 보인다니, 도대체 뭘 하려고?”나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나는 의료 서적을 넘기며 한 장 한 장 읽어 내려갔다. 문외한인 내가 이런 책을 본다는 게 쉽지 않았지만 지난 한 달 동안 고요한 시간을 보내면서 마음이 차분해져서인지 의외로 집중이 잘 됐다. 어쩌면 이제야 비로소 내 마음이 가라앉았다는 증거일지도 몰랐다.얼마 후, 안리영이 수술을 마치고 돌아왔다. 문 앞에서 나를 보던 그녀는 몇 초간 멈춰 서 있더니, 아무 말 없이 다가와 나를 꼭 안아 주었다.“돌아왔네.”진정우의 일을 나는 오직 안리영에게만 이야기했다. 진정우를 어디에 묻었는지 아는 사람도 그녀뿐이었다.나는 그녀의 어깨에 기대며 익숙한 소독약 냄새를 맡았다.“나, 갑자기 훠궈가 먹고 싶어.”“좋지! 당장 가자!”그녀의 대답에는 묘하게 들뜬 기운이 섞여 있었다. 어쩌면 그녀도 내가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게 반가웠던 걸지도 몰랐다.그래, 나도 이제 다시 살아가야 했다. 진정우는 떠났지만 나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았다.식사를 하던 중, 문득 떠오른 듯 물었다.“강유형, 본 적 있어?”“그럼, 매일 보지. 악어한테 물린 이후로 계속 우리 병원에서 치료받고 있어.”그녀의 말에 나는 젓가락을 멈췄다.“벌써 한 달이 넘었잖아? 아직도 치료 중이야?”“응. 상처가 아물질 않아서 계속 곪고 있대. 이미 몇 번이나 괴사한 살을 도려냈다더라.”그 말을 듣는 순간, 강유형이 악어에게 물렸던 장면이 눈앞을 스쳤다.“그 정도로 심각했어?”“직접 가서 볼래?”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고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응. 나 때문이잖아.”안리영이 고기를 집어 내 그릇에 올려주며 말했다.“많이 먹어. 한 달 사이에 살이 너무 빠졌어.”“그래? 나 하루 세 끼 잘 챙겨 먹었는데.”나는 거짓말이 아니었다. 진정우 곁을 지키는 동안에도 먹고 자는 것만큼은 철저히 지켰다.“그럼... 마음고생 때문인가 보네.”그녀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나는 안리영을 보며 피식 웃었다.“넌 얼굴이 더 좋아진 것 같은데? 교수님이랑 잘 지내나 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