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말을 들은 진소영은 얼굴이 새하얘지며 고개를 급히 저었다. 내 손을 꼭 잡은 그녀는 다급하게 말했다.“언니, 그런 오해 하면 안 돼요! 그 사진 속 사람... 그런 거 아니에요. 우리 오빠는 다른 여자를 좋아한 적이 없어요. 언니가 첫 번째예요.”그녀가 겁에 질려 손까지 떨고 있는 모습을 보니 더는 놀리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영이는 심장이 약했다. 작은 충격도 조심해야 했다.나는 그녀를 안심시키려 코끝을 손가락으로 살짝 건드리며 말했다.“왜 그렇게 긴장해? 나 다 알아. 네 오빠가 여자 친구 사귄 적 없다고 했어.”진소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하게 덧붙였다.“그리고 다른 여자아이를 좋아한 적도 없어요.”그 말을 듣자 웃음이 나왔다. 이 아이는 정말 순수했다. 마치 세상에 조금도 물들지 않은 채 자신만의 깨끗한 세계에 사는 것 같았다.하지만 그만큼 마음 한구석에서는 걱정도 들었다.이런 순수한 아이가 언젠가 누군가를 좋아하게 된다면, 그녀만큼 순수한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만약 사랑으로 인해 상처받는다면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나는 그런 걱정을 떨쳐내며 부드럽게 말했다.“알겠어. 네 오빠 정말 순수하다는 거 알아. 내가 잘 지켜줄게.”그러자 진소영은 다시 웃었다.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벽에 걸린 사진들을 살폈다. 겉으로는 신경 쓰지 않는 척했지만 여전히 진정우가 소녀를 업고 있는 사진이 마음에 걸렸다.그 소녀는 분명 진소영이 아니었다. 만약 소영이었다면 그녀가 그렇게 긴장하며 해명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그렇다면 사진 속 소녀는 누구일까?이웃집 아이? 아니면 친척? 지금쯤은 다 자랐겠지. 혹시 드라마처럼 갑자기 나타나 “정우 오빠!”라며 찾아오는 건 아닐까?생각이 지나치게 앞서가고 있다는 걸 깨닫고 스스로 피식 웃었다. 이렇게까지 상상하다니, 나도 참 한가하다 싶었다.다시 진정우네 가족사진으로 눈길을 돌렸다. 이번에는 그의 아버지 얼굴에 시선이 멈췄다. 묘하게 익숙했고 마치 어디선가 본 적 있는 얼굴 같았다.“아
진소영은 단순한 동생이 아니었다. 진정우가 마치 딸처럼 키운 존재였다.그런 애틋한 마음이 있었기에, 강철 같은 그도 이렇게 조심스럽고 신중한 사람이 되었겠지.소영이는 진정우와의 추억을 하나둘 들려주었다.이 작은 집은 진정우가 직접 벽돌 하나하나 쌓아 올려 지은 곳이라고 했다.집에 있을 때는 물고기를 잡아 구워주곤 했고 그의 요리는 모두 소영이를 위해 연습한 결과라고 했다.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진정우를 조금 더 이해하게 되었다.책임감과 외로움 속에서 그의 특별함이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니 마음이 아려왔다.소영이는 이야기를 하다가 어느새 잠이 들었다.그 평온한 얼굴을 바라보며 문득 진정우에게 전화를 걸고 싶었다."앞으로는 내가 당신을 더 아껴줄게. 혼자 감당하지 않게."하지만 그 충동은 잠깐 스쳤을 뿐, 행동으로 옮기진 않았다.그런 말은 말로 하는 게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줘야 하는 거니까.하지만 대신 안리영에게 전화를 걸었다.“너 어디야?”피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딘가 상태가 좋지 않은 듯했다.“너 왜 이래? 수술 끝난 거야? 피곤해 보여.”“아니, 아파서 그래.”그 말에 순간 놀랐다. 안리영이 아프다는 말은 좀처럼 듣기 힘들었으니까.“무슨 일이야? 약은 먹었어?”“응. 별일 아니야. 과로 때문이야.”안리영는 담담하게 대답했다.“근데 너 어디야? 무슨 일 생겨서 도망친 거 아니지?”그 말에 나는 웃음이 나왔다.“내가 그런 사람으로 보여?”“아니, 넌 그런 사람 아니지.” 그녀는 나를 잘 알고 있었다.“사실 부탁 하나 하려고.”나는 진소영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런데 그녀가 한참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왜? 네 쪽에 아는 사람 없어?”잠시 정적이 흐른 후에 안리영이 입을 열었다.“...있어. 네 말로 보면 가능할 것 같긴 해.”“정말? 고마워.”그녀의 목소리에 담긴 묘한 분위기를 눈치채지 못한 채 나는 고마움을 전했다.하지만 그녀는 곧 뜻밖의 말을 꺼냈다.“근데 그 사람한테 연락하기 싫어.
진소영은 내가 떠나는 게 아쉬운 듯, 어떻게든 붙잡고 싶어 했다. 그녀의 세상은 너무나도 외로웠으니까.나는 단 이틀의 휴가만 받았지만 그녀와 더 시간을 보내기 위해 허진호에게 연락해 이틀을 더 연장했다. 하지만 결국 떠나야 할 시간은 찾아왔다.소영이는 내가 떠나는 길에 마시라고 작은 병에 담은 이슬 꽃차를 건넸다.“언니, 이거 꼭 가져가세요.”게다가 꽃가루와 꽃잎으로 만든 음식을 정성껏 포장해 주며 마치 그녀가 가진 모든 것을 나눠주려는 것 같았다.그녀의 마음이 너무나도 고마워 가슴 한편이 저렸다.“언니, 나중에 꼭 다시 와주세요.”소영이는 내 얼굴을 보지 않고 말했다.그녀의 눈에 맺힌 눈물을 들키지 않으려는 것이 분명했다.나 역시 코끝이 찡해져 목소리를 내기가 어려웠다.“응, 꼭 올게.”나는 짧게 대답하며 마음을 다잡았다.이별은 늘 아픈 법이다.나는 소영이를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내 친구가 좋은 의사를 알아봐 주고 있어. 연락되면 네 오빠랑 같이 데리러 올게.”“정말요? 기다릴게요.”그녀의 반짝이는 눈빛을 보며 나는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았다.갈 때는 기차를 탔지만 돌아올 때는 비행기를 선택했다. 피곤했던 나는 비행기에서 깊이 잠들었다. 안리영에게 연락하니 공항에 도착하면 바로 병원으로 오라고 했다.꿈속에서는 며칠 동안 소영이와 함께했던 시간들이 떠올랐다.함께 꽃을 다듬고 강물에서 빨래하고 밤새 이야기를 나누었던 순간들. 그 따뜻한 기억들이 나를 가득 채웠다.착륙 후 곧장 택시를 타고 수리센터로 향했다.가는 길에 휴대폰이 울려서 봤더니 발신인은 강유형이었다.그가 조나연과의 관계를 공개한 후 나를 거의 찾지 않았기에 이번 전화는 의외였다.“지원아, 우리 아버지가 정말 하룻밤 만에 머리가 하얗게 셌다는 게 사실이야?”그 말에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며칠이 지난 지금에서야 이런 사실을 알게 된 것도 기가 막혔고 나에게 이런 질문을 한다는 것조차 어이가 없었다.“직접 가서 보면 되잖아.”나는 냉정하게 말했다.내가
나는 강유형이 무슨 부탁을 하려는지 짐작할 수 없었지만 일부러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는 이어서 말했다.“우리 부모님은 지금 도저히 조나연을 받아들일 수 없어. 특히 엄마가 더 심하셔. 그래서 네가 엄마한테 좀 나연이 좋게 말해 줄 수 없을까?”나는 정말 기가 막혔다.나에게 조나연을 위해 좋은 말을 해 달라니. 제정신으로 하는 말인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아니면 나를 너무 만만하게 보고 있는 걸까?“강 대표님, 만약 저한테 그 부탁을 하실 거라면 미리 말씀드리지만 기대하지 마세요.”나는 굳이 착한 척할 필요가 없었다.“지원아...”“강유형! 내가 천사도 아니고 나랑 조나연은 아무 상관도 없는데 내가 왜 좋은 말을 해줘야 해?”나는 단호하게 되물었다.잠시 침묵이 흐른 뒤, 그는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너 혹시... 질투하는 거야?”“질투?”나는 비웃듯 웃으며 말했다.“아, 날 질투심 많은 사람으로 몰아가고 싶었던 거야? 그렇다면 실망할 텐데. 나 질투 안 해. 오히려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네 본모습을 빨리 알게 됐으니까.”그는 한숨을 쉬었다.“지원아, 그냥 겉보기에 그럴 뿐이야. 내가 빚진 게 있어서 그래. 사실 우리 사이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어...”나는 그의 말을 듣기도 싫어 차갑게 끊어버렸다.“그건 네 일이야. 나랑은 아무 상관 없잖아.”“하지만 너 말고는 내가 얘기할 사람이 없어.”그의 목소리는 낮고 답답해 보였다. 평소 당당하던 그에게서 보기 힘든 모습이었다.그러나 이제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우리는 성인이었고 각자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한다.“미안하지만 난 바빠.”나는 말을 마치고 전화를 끊었다.수리점에 도착해 차를 찾은 뒤, 나는 바로 안리영을 만나러 갔다.이 며칠 동안 진정우는 연락이 없었다. 아마 내가 진소영과 함께 있다는 걸 알고 배려한 듯했다.이소희는 며칠 전 나에게 문자를 보냈다. 조명 조정 작업이 거의 끝났고 진정우는 밤을 새워 조명을 테스트하고 있다고 했다.전에 여유를 부리
안리영은 늘 상황을 명확히 파악하는 사람이었지만 시도조차 하지 않고 결과를 단정 짓는 경우가 있었다.이 점에서 나와는 성격이 달랐다. 하지만 사람마다 성격과 생각이 다른 법이고 내가 그녀의 인생에 간섭할 수는 없었다.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각자의 선택은 존중해야 한다.나는 안리영의 집에서 하루를 묵은 뒤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진정우는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아래층 아주머니는 나를 보자마자 물었다.“남자 친구랑 여행이라도 갔니? 며칠 동안 둘 다 안 보이더라.”그제야 진정우가 집에 한 번도 돌아오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이소희는 진정우가 바쁘다고 말하긴 했지만 나 때문에 여기에 거주하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내가 집에 있으면 매일 돌아오고 내가 없으면 집에 올 이유를 찾지 못하는 거겠지.그가 오지 않는다면 내가 가면 되는 일이었다.놀이공원에 도착하자 이소희가 나를 보며 달려왔다.그녀는 아무 말 없이 나를 안더니, 내 어깨를 두 번 세게 툭툭 쳤다.“언니, 진짜 너무해요. 이렇게 오랜만에 오다니!”그녀의 ‘가벼운 터치’는 꽤 아팠다. 그리고 마치 내가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사람처럼 굴었다.“그래서 지금이라도 왔잖아요.”나는 웃으며 그녀의 등을 토닥거렸지만 시선은 이미 진정우를 향해 있었다.진정우는 안전모를 쓰고 안전벨트에 매달린 채 높은 곳에서 점검 중이었다.그런데 그는 이미 나를 보고 있었다.나는 손을 흔들며 인사했고 그는 옆의 버튼을 눌러 천천히 내려왔다.나는 웃으며 이소희에게 물었다.“왜 그래요? 또 정우 씨한테 또 혼났어요? 표정이 왜 그래요?”“아니에요. 요즘 저 사람 많이 좋아졌어요.”이소희는 나를 빤히 보더니 말했다.“언니, 진짜 변했어요. 예전 같지 않아요.”그 말에 나는 조금 놀라 물었다.“제가요? 어떻게요? 못생겨졌어요? 아니면 더 탔나요?”최근 며칠 동안 진소영과 지내면서 자연 속에서 마음껏 놀았다. 해를 쬐고 바람을 맞으며, 강물에서 첨벙거리다 보니 피부가 살짝 탔을지도 몰랐다.“아니요, 그런
진소영은 분명 내가 다녀간 후 모든 걸 진정우에게 털어놨을 것이다.“그곳이 마음에 든다면 나중에...”진정우가 말을 멈췄다. 그러자 나는 미소를 띠며 물었다.“나중에 뭐요?”그의 목젖이 한 번 움직였다. 그리고 천천히 말을 이었다.“나중에... 그곳에서 여생을 보낼 수도 있겠죠.”“저 혼자요?”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었다.“제가 같이 있을게요. 당신이 원한다면.”그는 여전히 솔직했다.그 순간, 나는 슬쩍 뒤로 물러섰다.‘나중’이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는 생각보다 크다. 특히 ‘여생’ 같은 먼 미래라면 더욱 그렇다.“소영이를 위해 전문의를 찾아봤어요. 그녀의 진단 기록을 제게 주세요.”나는 화제를 바꿔 말했다.어젯밤 안리영은 늘 현실을 회피한다고 속으로 비난했지만 사실 나 역시 다르지 않았다.나 또한 현실에서 도망치려는 경향이 있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진정우를 붙잡아두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예전에 안리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사람은 원래 너무 쉽게 얻은 건 소중히 여기지 않아.”그 말이 떠오르자 괜히 마음이 복잡했다.진정우는 잠시 말이 없었다.그의 침묵은 소영이에 대한 걱정에서 비롯된 것이 분명했다.“우선 소영이의 상태를 확인한 뒤 수술 위험성을 알아볼게요. 최종 선택은 정우 씨가 하세요.”결국 나는 선택의 권한을 그에게 넘겼다.“이미 알아봤어요. 그녀의 수술은 일반적인 심장 수술보다 훨씬 위험해요. 혈액형이 특이한 데다...”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조용히 덧붙였다.“몸에 다른 문제도 있어요.”나는 깜짝 놀라 되물었다.“다른 문제라뇨?”정확히 알아야 의료진에게 제대로 전달할 수 있었다.그는 옆으로 두 걸음 물러나더니 난간을 붙잡았다.나는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그의 무거운 표정을 보니 가슴이 저릿했다.“정우 씨... 무슨 문제죠?”“소영이는 선천적으로 뇌에 종양이 있어요. 수술도 불가능한 상태입니다.”의학 지식은 부족했지만 뇌에 종양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위험한지는 알았다.“언제부터 그런 건가요? 아
갑작스러운 내 포옹에 진정우의 몸이 굳었다. 잠시 후,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저를 불쌍히 여기시는 건가요?”“아니요. 안쓰럽게 여기는 거죠.”나는 그의 말을 바로잡았다.진정우는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서 있었다. 나를 안아주지도 않았고 그저 묵묵히 있었다.슬쩍 물러나려는 순간, 저 멀리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강유형이었다.그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이소희, 이 계집애는 왜 아무 말도 없지? 나를 알려줬을 법도 한데...나는 진정우의 손을 놓으려다 다시 꼭 잡았다.그가 손을 풀려고 하자 나는 더 단단히 쥐고 말했다.“가만히 있어요.”그는 다시 움직이지 않았다.나는 여전히 그를 안고 나지막이 물었다.“오늘도 야근해요?”진정우는 잠시 머뭇거리며 대답했다.“네?”나는 살짝 발끝을 들어 그의 귀 가까이 속삭였다.“정우 씨가 해준 밥 먹고 싶어요.”그 말이 끝나자 그의 목젖이 꿀꺽 움직이는 소리가 귀에 닿았다.그리고 짧고 굵게 대답했다.“알겠어요.”내 몸이 떨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고 나는 강유형 쪽을 힐끗 보았다.그는 주먹을 꽉 쥔 채 굳은 얼굴로 자리를 떠났다.나는 진정우를 놓아주고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사실은...”그 순간 멀리서 이소희의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강 대표님, 안녕하세요!”진정우도 고개를 돌려 강유형의 뒷모습을 보았다.그가 다시 나를 바라보았을 때, 나는 그의 눈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아까 내가 했던 행동이 분명 연극처럼 보였을 것이다.사실, 일부러 그런 것도 맞다.그래서 굳이 변명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그때 이소희가 헐레벌떡 뛰어왔다.“팀장님! C구역 7-3조 조명이 장비 설치 중에 부딪혀 망가졌어요.”공사장에서 사고는 늘 피하고 싶지만 사고 없는 날이 더 드물다.진정우는 여전히 당황하지 않고 대답했다.“가서 확인해 봅시다.”그는 말없이 발걸음을 옮겼고 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그를 따라가야 할지, 아니면 그냥 있어야 할지 고민하던 찰나,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소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을 터트렸다.“아닌데. 놀이공원 생각밖에 안 해요. 그리고 이 아름다운 조명들도요.”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 갑자기 팔짱을 끼고는 장난스럽게 덧붙였다.“그리고 언니도요.”그녀의 애교 섞인 말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우리는 곧 문제가 생긴 구역으로 갔다. 진정우는 안전 장비를 착용하고 위로 올라가 손상된 조명을 점검했다. 그는 꼼꼼히 살피며 작은 수첩에 무언가를 기록하고 있었다.“조명 두 세트가 손상됐습니다. 각 세트에 작은 조명이 22개씩 들어가 있었고 13가지 색상을 표현할 수 있었어요.”그는 작업을 멈추고 손상된 조명을 둘러본 뒤 작업 중이던 크레인 쪽을 바라봤다.그리고 이소희를 향해 말했다.“소희 씨, 강 실장님께 연락해 주세요. 이번 사고에 대한 책임 소재와 손실 정리를 확실히 해야 합니다.”이소희는 “네”라고 대답한 뒤 바로 전화를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강진혁이 도착했다.그는 나를 보더니 잠시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태연하게 물었다.“지원이도 왔네. 혹시 현장 점검 미리 하러 온 거야?”그의 말투는 가볍게 농담을 건네는 듯했지만 그 속에는 묘한 뉘앙스가 담겨 있었다. 나는 그저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아니요. 정우 씨 만나러 왔어요.”내 대답에 강진혁의 표정이 살짝 굳어지며 당황스러운 눈빛을 보이더니 금세 평정심을 찾고 담담하게 말했다.“이번 사고에 대해 시공 업체에서 이미 보고받았습니다.”그의 말투에서 더 이상의 논의를 피하려는 의도가 느껴졌다. 그러나 진정우는 단호했다.“업체가 책임을 인정한 만큼 손실 비용은 모두 그쪽에서 부담해야 합니다. 저는 새로운 조명 교체를 바로 진행하겠습니다. 비용 견적서는 강 실장님께 전달해 드릴게요.”진정우의 차가운 태도에 강진혁의 표정이 굳어졌다.“이번 일은 제 관리 소홀에서 비롯된 문제입니다. 제가 책임지겠습니다.”강진혁은 자신의 권위를 드러내며 상황을 종결하려 했지만 진정우는 흔들리지 않았다.“그렇다면 손실 견적서는 강 실장님께 직접
진정우와 나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진소영이 마당의 흔들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을 봤다. 바람에 치맛자락이 살짝 날리며 그 장면이 마치 꿈처럼 비현실적이었다.진소영은 책에 몰입해 있었고 우리가 내린 것도 몰랐다. 이때 도성운이 크게 외쳤다.“소영아, 누가 왔는지 봐봐!”“성운 오빠, 엔진 소리가 어찌 크던지 단번에 오빠인 줄 알았어요.”진소영이 웃으며 말했고 그 말에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도성운은 조금 어색해하며 머리를 긁었다.“나만 온 거 아닌데. 다른 사람도 있어.”진소영은 책을 계속 읽으며 아예 신경을 쓰지 않았다. 도성운이 다시 입을 열려고 하자 나는 가볍게 그를 막으며 사뿐사뿐 진소영에게 다가갔다.“이 책 저번에 같이 읽었잖아?”지난번에 봤던 오래된 연애 소설 책이었다. 진소영은 놀란 듯 고개를 돌렸고 나를 보며 눈을 반짝였다.“언니!”나는 환하게 웃었고 진소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내 뒤에 있는 진정우를 보고 급히 책을 던져두고 그에게 달려갔다.“오빠!”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진정우가 진소영을 얼마나 아끼는지 알게 되었다.그는 평소에도 진소영을 많이 챙겼다. 나는 그들 대화를 방해하지 않고 진소영이 읽던 책을 집어 들었다. 「링」이라는 제목의 책이었다. 책이 많이 갈라지고 색이 바래 있었기에 분명 여러 번 읽은 책일 거다.내용이 궁금해져서 책을 넘기다 진소영이 다가와서 책을 빼앗으려 했다.“안 돼요. 보지 마세요.”그녀는 책을 빼앗으며 말했다.“왜? 이 책에 비밀이라도 있어?”진소영은 얼굴이 빨개져서 말했다.“그럴 리가요. 언니는 오빠랑 연애 중인데 이런 소설을 보면 안 되죠.”그녀의 얼굴이 빨개지자, 나는 웃으며 말했다.“아, 그럼 연애 초보인 너에게 딱 맞는 교과서겠네.”“언니!”진소영은 얼굴을 붉히며 나를 쏘아봤다.나는 더 이상 괴롭히지 않고 책을 그녀에게 돌려줬다. 그때 진정우가 내 손을 잡았다.“들어와 물 좀 마셔.”나는 그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진정우가 물을 꺼내
비행기가 착륙할 때쯤, 이미 해 질 무렵이었다.저녁노을이 빨갛게 물든 광경이 너무 아름다워서 가슴이 떨렸다.“이건 내가 본 것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을이야!” 내가 감탄하며 말했다.“나도 그래.” 그러자 진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항상 이렇게 말하지만 나는 이제 별로 감동이 없었다.그런데 차에 앉아 그의 SNS를 보니 조금 전에 본 노을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글귀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네가 옆에 있어서.]한눈에 보면 사진과 글이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지만 비행기 안에서 우리가 나눈 대화를 떠올리니 그 의미가 확 와닿았다. [이건 내가 본 가장 아름다운 노을이야, 네가 옆에 있어서.]진정우는 이렇게 사랑을 표현하는 데 아주 능숙하다.“형, 이번에 결혼식 하려고 돌아온 거야?” 차를 운전하던 남자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그는 진정우의 친구였다. 우리가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그는 우리를 데리러 왔다.“아니. 이번은 아니야.” 진정우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 말은 다음에 한다는 뜻인가?“형수님 미인이시네.” 그 남자가 나를 몇 번이나 슬쩍 바라보며 말했다.“그럼.”진정우는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그 말을 들으니 나도 어쩐지 부끄러워졌다.“형수님 나는 도성운이라고 해요“ 그 남자가 친근하게 자기를 소개했고 나도 웃으며 말했다. “저는 윤지원이라고 합니다.”“알아요. 알아요.” 도성운은 두어 번 반복하며 말했다. “소영이가 매일 말하더라고요. 우리 마을 사람들은 다 알죠. 형수님 이름이 윤지원이란걸.”나는 그제야 부끄러움을 좀 떨쳐내고 있었는데 도성운은 또 다른 말을 덧붙였다.“그래요? 그럼 앞으로 아마 자기 소개할 일 없겠네요.”“그러묭. 이렇게 예쁜 분이 오면 다들 한 번에 이름을 기억할 수밖에 없어요.” 계속되는 칭찬을 들으니 더 이상 말하지 않는 게 현명할 것 같았다.그런데 진정우가 내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보니까, 네가 먼저 분위기 잡은 것 같네.”도성운은 진정우를 많이 존경하고 따라 배우고 싶
그가 진지하게 내게 농담하는 건가?하지만 그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잖아!그래서 나는 그가 진지한 사람이라는 걸 알았고 오히려 순수하지 않은 생각을 하는 사람은 내가 아닌가 싶었다.“안 믿으면 한번 해봐?”진정우의 뜨거운 시선에 내 얼굴이 또다시 붉어졌다.나는 그를 한 번 꼬집으며, 일부러 화난 척했다.“너 계속 듣고 싶어? 안 듣고 싶으면 말 안 할 거야.”“듣을거야!”나는 창밖을 보며, 강진혁이 그때 나에게 했던 말을 진정우에게 전했다.그는 내 마음을 아주 잘 이해한 듯 물었다.“너 걱정되는 거야?”“응, 하지만 나는 강유형이 걱정돼서 그런 게 아니야. 회사가 걱정이야.”내가 그렇게 바로잡자, 진정우는 내 머리를 살짝 쓰다듬으며 말했다.“알아, 너는 이 일이 생각보다 훨씬 복잡할 거라고 느끼는 거지?”진정우는 정말 나를 너무 잘 안다.“너의 걱정이 틀린 건 아닐 거야. 혹시 강진혁이 돌아오는 것도 이미 다 계산된 일일 수도 있어.”진정우의 말에 나는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그럴 수도 있어?”내가 의심하고 있었던 부분을 진정우가 이렇게 직설적으로 말하니, 조금 충격을 받았다. 강진혁이 어떤 사람인지 나는 잘 안다. 그는 늘 나와 강유형을 위해 양보하며, 언제나 성실하고 착한 사람이었으니까.게다가 강진혁은 4년 전에 회사를 떠나고 얼마 전에 돌아왔다. 그렇게 회사를 걱정한다면 굳이 4년 전에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예전에는 몰라도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을 거야.”진정우가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지원아, 사실 너는 남자들에 대해 잘 몰라.”나는 그것에 대해 부정하지 않았다.“그럼 남자의 입장에서 말해봐.”“강진혁이 너 좋아하지?”진정우는 직설적으로 말했다.“응, 나도 이제야 알았어. 예전엔 몰랐고 이번에 돌아와서야 알게 된 거야.”나는 사실대로 말했다.“그는 너를 오래전부터 좋아했어. 강유형이랑 비슷한 시기에 좋아했을 거고 그 감정은 강유형보다 더 강했을 수도 있어.”진정우는 아주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나
그걸 물어볼 필요도 없잖아?누구나 속고 사는 걸 좋아하진 않으니까.나는 그를 바라보며 민감하게 물었다.“혹시, 앞으로 나를 속이려고 하거나 이미 나한테 뭔가 숨긴 거 있어?”진정우는 잠시 침묵했다.“...아니.”그 두 마디가 진실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나는 확실히 내 입장을 밝혔다.“너무 싫어.”그러자 그의 목젖이 조금 움직였다.“알겠어.”만약 그가 나를 속인다면 내가 어떻게 나올지 명확하게 말하고 싶었다.그때 공항 대기실에 비행기 탑승 안내가 나왔고 해외행 비행기였다.나는 본능적으로 강유형을 떠올렸다. 그가 짐을 끌고 보안 검색대로 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해외에 무엇을 하러 가는 걸까?사업 얘기라도 하러? 아니면... “우리 이제 보안 검색대 쪽으로 가자.” 진정우가 내 생각을 끊으며 말했다.“어!” 나는 대답하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 순간, 나는 잠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강유형에게 신경 쓰고 있다는 걸 진정우가 알면 안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진정우의 표정에서는 아무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그럴수록 내 마음은 더 불안하고 조금 죄책감도 들었다. 그래서 나는 먼저 그의 손을 잡았다.“가자.”우리는 보안검색을 무사히 통과하고 비행기도 무사히 탑승했다. 비행기 모드로 전환하기 전, 내 휴대폰에 한 통의 미처 읽지 못한 메시지가 도착했다.강유형이었다.[안전 비행.]그 문자를 보며, 예전에 그가 출장을 갈 때마다 내가 보냈던 메시지가 떠올랐다.그때마다 나는 항상 그렇게 보내곤 했다.어느 날, 강유형은 나를 비웃으며 말했다.“너 그런 말 너무 촌스럽잖아. 다음엔 다른 말로 보내봐. 새로 배운 거 있으면 알려줘.”그 이후로 나는 그 말을 더 이상 보내지 않았다.[안전 비행.]그 문구는 평범하고 진부하지만 내겐 그 무엇보다 중요한 말이었다.부모님이 사고를 당한 이후로, 나는 가까운 사람과 헤어질 때마다 늘 그 말을 떠올린다.다시 볼 수 있을지라는 두려움이 함께 밀려오기 때문이다.하지만 강유형은 내 마음을
“여긴 공항이야, 사람들이 많고 아이들도 있는데.” 진정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알고 있어.”“그런데도...” 내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그러자 진정우는 짧고 단호하게 말했다.“하고 싶어.”그의 단호한 대답을 듣고 나는 본능적으로 그가 강유형을 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질투하는 거겠지.진정우는 강유형을 포기하게 만들려고 그런 걸까?그 생각이 들자 나는 결심하고 눈을 감았다. 심장은 요동치며 공항 대기실에서 진정우의 입맞춤을 기대했다.하지만 그의 입술이 다가오는 대신 내 손에 무게감이 느껴졌다.눈을 뜨고 보니 내 손에 작은 가방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이게 뭐야?” 내가 궁금해서 물었다.진정우는 입술을 살짝 내밀며 내가 열어보라고 손짓했다.내가 의아한 마음으로 가방을 열자 그 안에는 두 장의 카드와 하나의 증명서가 들어 있었다.그 카드와 증명서는 그가 전해주고 싶었던 것들이었다.“이게 무슨 의미야?” 나는 다시 물었다.진정우는 녹색의 책자 하나를 꺼내 들었다.“이건 내가 군 복무를 마친 증명서야. 그리고 이건 내 열정이 담긴 헌혈 증서야. 이 카드들은 내 전 재산이야.”나는 그 말을 듣고 문득 소설 속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에게 전 재산을 보여주는 장면이 떠올랐다.진정우는 내게 재산을 넘기려는 것뿐만 아니라 그의 신념까지도 함께 전하려고 하는 것이다.특히 빨간 헌혈 증서를 보자 갑자기 코끝이 찡해졌다.“이걸 왜 준비한 거야?” 나는 조금 울컥하며 물었다.“너에게 주는 믿음이야. 이게 사랑 보험보다 더 실용적이야.”진정우는 그렇게 말하며 내가 강유형과 사랑 보험에 가입했던 사실을 안 것 같았다.하지만 그게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그가 내게 주는 것이 모든 것 같았다.“이 두 개는 내가 가질게. 하지만 카드는 네가 갖고 있어.”나는 그가 준 돈을 받을 생각이 없었고 돈에 욕심이 없다. 만약 돈에 눈이 먼 여자라면 나는 강유형과 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진정우는 카드를 받지 않고 조금 난처한 듯 말했
“네, 누구세요?”전화를 받으면서 나는 무심코 강유형을 쳐다보았다.그는 나를 보지 않고 혼자서 멀리 있는 의자 쪽으로 걸어갔다.“저는 하트시그널 보험사의 A8338번 직원입니다. 4년 전, 윤지원 씨와 강유형 씨가 저희 회사 사랑 보험에 가입하셨고 이제 보험 만기일이 다가와 관련 정보를 확인하려고 연락드렸습니다.”이 말을 듣고 순간 머리가 띵해졌다. 본능적으로 진정우를 보았다.그는 내 옆에서 자리를 피하고 내가 전화를 받을 때는 멀리 떨어져 앉았다.그는 내게 충분한 개인 공간을 주고 있었다.진정우는 정말 세심하다. 나에게 필요한 안전감도, 여유도 모두 제공해 주고 있었다.“실례지만 두 분 지금 연애 중인가요, 아니면 결혼하셨나요?” 상대방이 조심스레 물었다.그 말에 나는 다시 강유형을 쳐다보았다. 그는 전화를 받고 있었고 표정은 매우 심각해 보였다.“지원 씨?” 상대방이 내 대답을 기다리며 다시 물었다.나는 침을 삼키는 동작을 하며 대답했다. “네, 듣고 있어요. 저희... “‘이미 헤어졌어요’라는 말을 하려는 순간, 강유형이 갑자기 나를 바라봤다.그 순간, 나는 피할 틈도 없이 그의 시선과 마주쳤다.우리는 그렇게 눈을 마주치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 말이 나오지 않았다. “지원 씨?” 상대방이 또 나를 부르며 물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물어봤다. “왜 남자 쪽은 묻지 않나요?”“묻긴 했습니다. 다른 동료가 강유형 씨와 연락 중입니다.” 그의 대답을 들으니 강유형 역시 이 전화를 받고 있다는 걸 알았다. 세상엔 정말 재밌는 일이 많다.나는 입술이 바짝바짝 말라왔다.“우리는 헤어졌어요.”“확실한가요?” 상대방의 말투가 불쾌하게 들렸다.나는 강유형을 바라보던 시선을 돌려, 가까운 곳에 앉아 있는 진정우를 쳐다보며 손에 낀 반지를 살펴보았다.“저는 이미 결혼했어요.”상대방은 잠시 침묵을 지킨 후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지원 씨. 만약 강유형 씨도 같은 답을 하셨다면, 이 사랑 보험 계약은 보험 규정에 따라
내가 그런 말을 했지만 이건 사적인 일이 아닌가?진정우는 내가 이해하지 못한 걸 알아차린 듯 바로 설명해 줬다. “내가 그 사람한테 말한 거야.”“아, 그렇구나.” 나는 대답하고 계속 죽을 먹었다. 그런데 두어 숟갈 먹고 나서 뭔가 이상한 걸 느꼈다. “너 허 대표님하고 그렇게 친해? 내가 대신 휴가를 부탁했더니 대표님이 그냥 허락하고, 오히려 공손하게 나한테 말까지 했잖아?”진정우는 천천히 음식을 먹으며 말했다. “그렇게 친한 건 아니야.”“친하지 않다고? 내가 보기엔 마치 네가 그 사람의... 대표님 같아.”진정우가 한마디만 하면 허진호는 절대 거절할 리가 없어 보였다.“비슷한 거지.” 진정우가 의외로 그렇게 대답했다. “허 대표님이 나한테 새 제품을 개발해달라고 부탁하고, 내가 돈을 벌어줘야 하니까내가 말하면 거절할 수 없어.”대단하네!나는 마음속으로 존경을 표하며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실력이 있는 사람은 역시 자신감 넘치게 말한다. 이게 바로 진짜 실력이지.“우리 늦지 않았어?” 나는 밥을 다 먹고 물어봤다.“괜찮아. 늦으면 그냥 항공편 변경하면 돼.” 진정우는 정말 나를 방임하는 것 같았다. 나는 여전히 이해가 안 돼서 물었다. “왜 그렇게 급하지 않아? 나 좀 재촉해줘도 될 텐데.”“네 마음대로 하게 하고 싶어.” 진정우가 또 닭살이 돋는 멘트를 하자 나는 당황해서 얼른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래도 불만을 털어놨다. “어제 미리 말이라도 해줬으면 내가 준비했을 텐데.”“어제... 내가 말할 기회가 없었잖아.” 진정우의 말에 나도 순간 뜨끔하면서 얼굴이 빨개졌다.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고, 진정우는 살짝 웃으며 내가 당황한 모습을 보며 평온하게 말했다. “너무 서두르지 마. 천천히 해. 부족한 것 있으면 가서 사면 돼.”“일찍 말했으면 내가 준비 안 했을 텐데.” 내가 그에게 짜증을 내며 말했다.진정우는 화내지 않고 또 한마디 했다. “근데 나는 네가 물건 정리하는 모습 보는 게 좋아.”“
“왜 안 받아?” 내가 무심코 물었다.“받을 거야.” 진정우가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그러니까 너는 자지 말고 일어나서 씻고 아침 먹어.”나는 깜짝 놀랐다.“아침 벌써 준비했어?”나는 그가 내 옆에서 자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진정우는 이미 아침을 다 준비하고 내가 일어나지 않자 다시 침대에 돌아와서 나와 함께 공부한 거였다. 역시 뛰어난 사람은 항상 뒤에서 묵묵히 노력하는구나.“응, 내가 계란 죽을 끓였어. 일어나서 좀 먹어.” 진정우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렇게 사랑받는 느낌은 정말 좋다. 마치 내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처럼 느껴진다.진정우는 전화를 받으러 나갔고 나는 손을 이불에서 빼내며 내 손가락에 낀 반지를 보고 사진을 찍어서 SNS에 올리면서 한정판이라고 묘사했다.그리고 다시 SNS를 놀다가 잠시 후에야 일어났다. 그런데 진정우의 전화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나는 별 신경 쓰지 않고 화장실로 향했다.하지만 화장실에 들어가서야 나는 안리영이 준 약이 반 통밖에 남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그 전에 약을 4분의 1만 썼던 것 같은데 그럼 진정우가 사용한 건가? 언제였지?혹시 내가 자고 있을 때? 순간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왜 아직도 안 씻었어?” 진정우의 목소리가 문밖에서 들려왔다.어색하지 않게 하려면 그냥 모른 척하고 넘어가는 게 제일이다. 그래서 나는 그대로 말이 나와버렸다. “너 기다리느라 그래.”진정우가 잠깐 멈칫하다가, 목젖이 살짝 움직였다. 분명, 내 말이 그에게 어떤 자극을 준 거였다. 나는 더 이상 아침에 뭔가 일이 일어나지 않길 바라며, 일부러 신경 쓰지 않는 척하면서 서둘러 씻고 그에게 말했다. “빨리 죽 끓여 놓고 나오는 대로 밥 차려줘.”“안 늦었어.” “지금 몇 시인데 아직도 안 늦었다고 해?” 내가 그를 비꼬며 말했다.“10시 비행기야, 시간 충분해.” 진정우의 말에 나는 동작을 멈추었다. 나는 원래 거울 속에서 그를 보고 있었는데 깜짝 놀라서 고개를 돌려 그
“알았어.” 진정우는 여전히 짧고 간결하게 대답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웃음이 터졌다.“이제야 네가 왜 서른이 넘도록 연애를 안 했는지 알겠어. 네가 너무 재미없잖아.”“너도 내가 재미없다고 생각해?”그는 가볍게 내게 물었다. 연애라는 부분에서 그는 약간 둔한 면이 있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웃으며 말했다.“내 말은 네가 여자 마음을 잘 달래주는 방법을 모른다는 뜻이야.”그는 몇 초 동안 조용히 생각하더니 대답했다.“내 생각엔 달래는 건 속인다는 뜻이야.”그의 참신한 대답에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그럼 내가 널 달래줘야겠어?”진정우가 다시 물었다. 어떤 여자라도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다정함은 좋아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거짓이 아니라 진정한 애정에서 비롯된 것이어야 한다. 나는 과거 강유형이 나를 대했던 방식을 떠올리며 말했다.“아니, 지금처럼 해. 난 너의 방식이 좋아. 너는 정말 특별하니까.”그의 품에 더 깊숙이 기대며 덧붙였다.“내가 프러포즈하면 받아줄 거야?”진정우가 갑자기 화제를 바꾸며 물었다. 나는 그 질문을 들어본 적이 없었기에 당황스러워서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말했다.“안 하면서 뭘 물어?”그 순간, 진정우가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이불 안에서 내 손을 꺼내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만지며 말했다.“윤지원, 나와 결혼해 줄래?”순간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이게 네 프러포즈이야?”“아니, 완전한 건 아니지만 맞기도 해.”그의 애매한 대답에 나는 그를 살짝 때리고 싶었다. 솔직히 내가 처음으로 프러포즈를 받을 거라고 상상했던 장면은 이런 게 아니었다. 한때 나는 내 인생 첫 프러포즈는 강유형이 할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지금 내 앞에 있는 건 진정우였다.그 말을 들으니 얼마 전 강유형이 나를 위해 준비한 놀이공원 프러포즈 이벤트가 떠올랐다.나는 가지 않았지만 이후 몇몇 네티즌이 사진을 찍어 온라인에 올렸다. 그들은 그걸 단순히 오픈 이벤트의 리허설로 생각했겠지만 나는 그것이 나를 위한 것임을 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