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러운 내 포옹에 진정우의 몸이 굳었다. 잠시 후,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저를 불쌍히 여기시는 건가요?”“아니요. 안쓰럽게 여기는 거죠.”나는 그의 말을 바로잡았다.진정우는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서 있었다. 나를 안아주지도 않았고 그저 묵묵히 있었다.슬쩍 물러나려는 순간, 저 멀리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강유형이었다.그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이소희, 이 계집애는 왜 아무 말도 없지? 나를 알려줬을 법도 한데...나는 진정우의 손을 놓으려다 다시 꼭 잡았다.그가 손을 풀려고 하자 나는 더 단단히 쥐고 말했다.“가만히 있어요.”그는 다시 움직이지 않았다.나는 여전히 그를 안고 나지막이 물었다.“오늘도 야근해요?”진정우는 잠시 머뭇거리며 대답했다.“네?”나는 살짝 발끝을 들어 그의 귀 가까이 속삭였다.“정우 씨가 해준 밥 먹고 싶어요.”그 말이 끝나자 그의 목젖이 꿀꺽 움직이는 소리가 귀에 닿았다.그리고 짧고 굵게 대답했다.“알겠어요.”내 몸이 떨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고 나는 강유형 쪽을 힐끗 보았다.그는 주먹을 꽉 쥔 채 굳은 얼굴로 자리를 떠났다.나는 진정우를 놓아주고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사실은...”그 순간 멀리서 이소희의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강 대표님, 안녕하세요!”진정우도 고개를 돌려 강유형의 뒷모습을 보았다.그가 다시 나를 바라보았을 때, 나는 그의 눈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아까 내가 했던 행동이 분명 연극처럼 보였을 것이다.사실, 일부러 그런 것도 맞다.그래서 굳이 변명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그때 이소희가 헐레벌떡 뛰어왔다.“팀장님! C구역 7-3조 조명이 장비 설치 중에 부딪혀 망가졌어요.”공사장에서 사고는 늘 피하고 싶지만 사고 없는 날이 더 드물다.진정우는 여전히 당황하지 않고 대답했다.“가서 확인해 봅시다.”그는 말없이 발걸음을 옮겼고 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그를 따라가야 할지, 아니면 그냥 있어야 할지 고민하던 찰나,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소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을 터트렸다.“아닌데. 놀이공원 생각밖에 안 해요. 그리고 이 아름다운 조명들도요.”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 갑자기 팔짱을 끼고는 장난스럽게 덧붙였다.“그리고 언니도요.”그녀의 애교 섞인 말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우리는 곧 문제가 생긴 구역으로 갔다. 진정우는 안전 장비를 착용하고 위로 올라가 손상된 조명을 점검했다. 그는 꼼꼼히 살피며 작은 수첩에 무언가를 기록하고 있었다.“조명 두 세트가 손상됐습니다. 각 세트에 작은 조명이 22개씩 들어가 있었고 13가지 색상을 표현할 수 있었어요.”그는 작업을 멈추고 손상된 조명을 둘러본 뒤 작업 중이던 크레인 쪽을 바라봤다.그리고 이소희를 향해 말했다.“소희 씨, 강 실장님께 연락해 주세요. 이번 사고에 대한 책임 소재와 손실 정리를 확실히 해야 합니다.”이소희는 “네”라고 대답한 뒤 바로 전화를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강진혁이 도착했다.그는 나를 보더니 잠시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태연하게 물었다.“지원이도 왔네. 혹시 현장 점검 미리 하러 온 거야?”그의 말투는 가볍게 농담을 건네는 듯했지만 그 속에는 묘한 뉘앙스가 담겨 있었다. 나는 그저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아니요. 정우 씨 만나러 왔어요.”내 대답에 강진혁의 표정이 살짝 굳어지며 당황스러운 눈빛을 보이더니 금세 평정심을 찾고 담담하게 말했다.“이번 사고에 대해 시공 업체에서 이미 보고받았습니다.”그의 말투에서 더 이상의 논의를 피하려는 의도가 느껴졌다. 그러나 진정우는 단호했다.“업체가 책임을 인정한 만큼 손실 비용은 모두 그쪽에서 부담해야 합니다. 저는 새로운 조명 교체를 바로 진행하겠습니다. 비용 견적서는 강 실장님께 전달해 드릴게요.”진정우의 차가운 태도에 강진혁의 표정이 굳어졌다.“이번 일은 제 관리 소홀에서 비롯된 문제입니다. 제가 책임지겠습니다.”강진혁은 자신의 권위를 드러내며 상황을 종결하려 했지만 진정우는 흔들리지 않았다.“그렇다면 손실 견적서는 강 실장님께 직접
이때 진정우가 내 손을 잡았다.나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따스했고 그는 강진혁을 향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이곳이 공식적으로 인수인계되기 전까지, 저는 여기서 떠나지 않을 겁니다.”그의 확고한 태도에 잠시 숨을 멈췄다.진정우는 누군가 자신에게 떠나라고 하면 더욱 그 자리에 머물고자 하는 사람이다. 내가 강진혁의 반응을 기다리는 동안, 진정우는 내 손을 더 꽉 잡으며 말했다.“이건 지원 씨와의 약속입니다.”나와의 약속 때문이라는 말이 내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다.그러나 강유형과 강진혁의 표정은 금세 어두워졌다.모두가 숨을 줌이고 있었으며 공기는 더 차갑고 어색해졌다.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한 발 앞으로 나섰다.“강 대표님, 그리고 강 실장님, 제가 지금은 이곳의 책임자가 아니고 회사를 떠난 상태이지만 회사 규칙 중에 회사의 이익이 최우선이라는 원칙이 있었죠? 그 누구도 회사의 이익을 침해하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는 거죠.”내 말은 강진혁에게 회사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점을 은근히 상기시키는 의도였다.만약 누군가를 감싸고자 한다면 그 책임을 스스로 감당해야 한다는 경고였다.나는 말을 마쳤고 강유형과 강진혁은 더 이상 반박하지 못했다.그들의 표정은 한층 더 어두워졌지만 논쟁은 일단락되는 듯 보였다.그러나 그 순간, 뜻밖의 인물이 등장했다. 바로 조나연이었다.그녀는 서둘러 달려오더니 자신의 배를 신경 쓰는 것도 잊은 채 말했다.“이번 일은 제가 배치한 작업입니다. 책임은 제가 지겠습니다.”강유형의 얼굴이 더 어두워졌고 관자놀이마저 불쑥 튀어나왔다. 화가 치밀어 오르기 직전이었다.그의 이런 반응을 보고 나는 곧 일촉즉발의 상황이 될 것임을 예감했다.조나연은 평범한 직원이 아니었다. 그녀는 강유형이 나와의 10년 관계를 끊고 가족과도 등을 돌리며 선택한 여자였다.하지만 강유형은 예상 밖의 말을 꺼냈다.“네가 책임지겠다 했으니 그럼 그래.”나는 그의 말을 듣자 눈을 휘둥그레 떴다.강유형이 그렇게 소중히
나는 진정우를 바라보다가 문득 그의 아버지가 어릴 적 내가 "왕 아저씨"라고 불렀던 분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러다 진정우가 나에게 다가온 이유가 단순한 호감 때문인지 궁금해졌다.“정우 씨, 이렇게 저를 흔드는 게 정말 저를 좋아해서 그런 건가요?” “아니면요? 장난 같아요?”그는 내 눈을 똑바로 보며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되물었다.“그럼 혹시 뭔가 숨기고 있는 건 없어요? 예를 들면... 우리,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든가요?”그의 아버지의 정체를 알게 된 이후로 내내 머릿속을 떠돌던 질문이었다.그러자 그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다.“어릴 때 제가 지원 씨를 업은 적이 있어요. 그리고... 지원씨가 저한테 뽀뽀했죠.”그의 예상치 못한 고백에 나는 순간 멍해졌다. 내가 연애 경험이 없다면 그의 말에 얼굴이 새빨개지고 말았을 것이다.“네? 제가요? 어디에다 뽀뽀했는데요?”나는 의도적으로 대담하게 물었다.그는 한발 다가와 우리 사이를 좁혔다. 원래도 가까웠지만 이제는 숨소리가 느껴질 정도로 가까워졌다. 내 심장이 미친 듯이 빨리 뛰었지만 나는 피하지 않았다.진정우는 나를 내려다보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지금 보여줄까요?”“...”내가 할 말을 잃은 채 멍해 있자, 그는 살짝 웃었다. 그는 분명 겉으론 진지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장난스러운 면모가 있는 사람임이 틀림없었다.나는 얼굴이 빨개졌고 진정우를 쳐다보지도 못하면서 말했다.“장난치지 마세요.”그 말을 남기고 나는 도망쳤다. 뒤에서 들려오는 그의 낮은 웃음소리가 내 귓가에 계속 맴돌았다.그는 분명 나를 놀리려고 저랬던 거야.갑자기 예전에 꿨던 꿈이 떠올랐다. 그 꿈에서 나는 그의 등에 엎드려 장난을 치며 "오빠"라고 불렀었다.그게 혹시... 꿈이 아니었나?어릴 적 일이긴 하지만 이제 와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분간할 수가 없었다. 부모님께 물어볼 수도 없으니 답을 알 길은 진정우뿐이었다. 하지만 그에게 물어보는 건 부끄러워 도저히 할 수 없었다.나는 일부러 빨리 걸었지만 그는
신지태는 나에게 거절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그가 이렇게 나오는 건 어떤 의미인지 나는 잘 알고 있었다.나는 휴대폰을 쥐고 진정우를 바라봤다. 그리고 몇 걸음 다가가 막 말을 꺼내려는 순간, 진정우가 먼저 말했다.“저, 모레 떠나요.”떠난다니?나는 순간 멍해졌다. “어디로요?”그는 앞을 보며 걸었다.“돌아가야죠.”돌아간다니, 청평으로?그는 분명 여기에 남겠다고 했고 집도 계약했었는데.‘집’이라는 말이 떠오르자 곧장 철거 얘기가 생각났다. 집주인 아주머니의 부탁도 아직 그에게 전하지 못했는데.나는 왜 갑자기 떠나는 건지 묻고 싶었지만 그에게서 느껴지는 거리감 때문에 입술 끝에서 망설였다. 대신 나는 이렇게 말했다.“내일 밤에 조명 조정된 거 보러 오겠습니다.”진정우는 나를 바라봤다. 그 눈빛은 마치 ‘내가 시간이 있어도 자기는 없을 수도 있다’는 뜻 같았다.나는 그가 거절할 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나를 잠시 뚫어지게 보더니 입을 열었다.“좋아요.”그는 분명 억지로 그 말을 내뱉은 거였다.분명 화가 났을 텐데도, 나를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아 참고 있었다.순간, 나는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다.그가 나를 좋아하는 걸 알면서도, 그 마음을 이용해 내가 그를 이렇게 힘들게 하고 있었다.사람이라는 건 원래 그런가 보다. 상대가 다가올수록 밀어내게 되고 밀어내는 쪽은 늘 상처받기 마련이다.나도 예전에 강유형과의 관계에서 같은 일을 겪었던 기억이 떠올랐다.‘내가 싫은 건 남에게도 하지 말아야지.’“정우 씨.” 나는 그를 불렀다.“오늘 밤에는 지태 오빠를 만나러 가야 해요. 제가 부탁한 일이 있어서 꼭 가야 하거든요.”그의 눈빛이 살짝 깊어지더니, 잠시 후 낮게 대답했다.“네.”“그 대신, 내일 밤에는 저한테 밥을 해 주시겠어요? 그리고 같이 조명 보러 가죠.” 나는 일부러 장난스러운 톤으로 그를 달랬다.그러자 그는 살짝 미소 지었다.“제가 애도 아니고 달래는 거 안 통해요.”나는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어쩔 수 없이 침착한 척 태연하게 굴며 조나연이 내 앞으로 다가오는 걸 지켜봤다. 그녀가 멈춰 서며 내 이름을 부르더니, 눈물 맺힌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지원 씨.”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기다렸다.잠시 감정을 추스르던 그녀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지원 씨, 유형 씨에게서 좀 떨어져 줄 수 없나요?”갑작스러운 말에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뭐라고요?”“이미 헤어졌잖아요. 지금 그는 저와 함께 있어요. 과거는 과거로 두고 제발 그의 앞에 나타나지 말아 주세요. 자꾸 당신이 보이면 그가 흔들려요.”그녀의 목소리는 애처로웠지만 그 속에 얄미운 뉘앙스를 감출 수 없었다.나는 헛웃음을 터트리며 대꾸했다.“설마 보상금이 부담돼서 저보고 나눠서 내자는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니겠죠?”조나연의 얼굴이 금세 하얗게 질렸다.그녀가 예전에 나에게 경제적 어려움을 털어놓았던 기억이 떠오른 듯했다.하지만 내가 비웃은 건 그녀의 돈 문제가 아니라 그녀 자신이었다.“예전에는 그랬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달라요.”그녀가 강유형과 함께 있다는 자신감을 내비치며 단호하게 말했다.그 말에 나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아, 깜빡했네요. 이제는 그 ‘임석진 씨의 인정받지 못한 미망인’이 아니시죠?”임석진의 이름이 나오자 그녀의 몸이 굳었다. 그리고 금세 눈물이 쏟아졌다.“지원 씨, 굳이 그 사람 이름을 들먹이며 저를 공격할 필요는 없잖아요. 저는 단지 당신이 유형 씨 곁에서 사라지길 바라는 게 저를 위한 게 아니에요. 당신을 위한 거예요.”나는 비웃으며 물었다.“저를 위한 거라니요? 대체 어떤 이유에서요?”조나연은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유형 씨가 지금 당신을 많이 원망하고 있어요. 당신이 너무 빨리 다른 사람을 만났다고 생각하거든요. 심지어 지난 10년 동안 당신이 그를 진심으로 사랑한 적 없다고 느끼는 것 같아요.”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강유형이 직접 그렇게 말했나요?”“아니요."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
신지태의 말에 나는 놀라고 말았다.그는 늘 나를 동생처럼 아끼며 가끔 장난을 치긴 했지만 오늘은 좀 선을 넘은 느낌이었다.허진호 역시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며 머릿속으로 무언가를 계산하는 듯했다.신지태는 내 앞으로 다가오더니 허진호에게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말했다.“들어가자.”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신지태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떠날 때, 허진호가 무언가를 말하려다 망설이는 듯 손을 내밀었다가 멈추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문득 생각이 정리되자 나는 신지태에게 물었다.“오빠, 아까 그런 말 한 거, 혹시 내 주변 사람 정리하려는 거야?”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딱 봐도 별로야. 그 사람은 아니야.”그의 단호한 평가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그가 나를 흘낏 쳐다보며 말했다.“내가 사람 보는 눈은 정확하잖아. 그러니까 앞으로 저런 사람 멀리해.”“알겠어.”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그러자 그는 한 번 더 강조했다.“진심이야. 농담 아니야.”“나도 농담 아니야. 저런 사람한테 관심 없어.” 나는 단호히 대답했다.“그럼, 네가 좋아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야?”나는 진정우의 모습이 떠올랐다.“겉은 도도해 보이는데 속은 따뜻한 사람... 그리고...”진정우가 앞치마를 두르고 부엌에서 요리하던 모습이 떠올랐다.“요리도 잘하는 사람.”강유형과 오랜 시간 함께 지내면서, 그는 라면 한 번 끓여준 적이 없었다.그에게 주어진 환경상 그럴 수도 있지만 결국 나를 위한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만약 조금이라도 진심이었다면 어떻게든 해보려고 했겠지.신지태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네 조건은 참 현실적이네.”나는 고개를 숙여 조용히 말했다.“사람이 살아가면서 결국 하루 세 끼를 먹는 게 가장 기본 아니야?”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 말도 맞아.”우리는 엘리베이터에 도착했고 그가 버튼을 누르자 문이 열렸다.엘리베이터 안 벽에 비친 내 얼굴과 신지태의 시선이 겹쳤다.“그럼, 그런 사람 찾았어?” 나는 잠시 망
문이 열리자 안에서 요란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방 한가운데 앉아 있던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그 남자... 낯이 익었다.신지태가 먼저 소개했다."같이 당구치는 준호야."나는 그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다가 이름이 떠올랐다. 용준호, 바로 용진표의 아들이자 현재 용진 그룹의 대표였다.한 번 그의 정보를 찾아본 적이 있었다. 그는 스누커를 좋아해 아마추어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한 이력이 있다. 하지만 신지태와 이런 친분이 있을 줄은, 게다가 이렇게 가까운 사이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이분이 그 유명한 지원 씨?" 용준호가 웃으며 말했다.그의 부드러운 말투와 친근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나는 등을 타고 흐르는 차가운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그의 기사가 아무리 깨끗하다 해도, 그의 아버지가 했던 일을 생각하면 그 역시 완전히 결백할 수만은 없을 것 같았다.이래서 사람은 겉모습만으로 판단할 수 없는 법이다."지원아, 앞으로 준호 오빠라고 부르면 돼. 혹시 어려운 일 있으면 말하고."신지태가 내 옆에 있는 의자를 빼주며 말했다.나는 의자에 앉으려 했지만 용준호가 갑자기 나섰다."지태야, 네가 이쪽으로 앉고 지원 씨를 우리 사이에 앉히자. 그래야 좀 더 친해질 수 있지 않겠어?"그 말에 순간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는 낯선 사람에게 쉽게 마음을 열지 않는 편이었다. 하물며 그 상대가 용준호라면 더더욱 그랬다.나는 자연스레 신지태를 바라봤다. 그는 고개를 들지도 않고 내 앞에 식기를 정성스럽게 세팅하며 말했다."이 자리에서도 충분히 얘기할 수 있어."그의 말에 안도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역시 지태 오빠, 나를 곤란하게 만들지 않네.이때 용준호는 웃으며 말했다."지태야, 네가 이렇게 누군가를 챙기는 건 처음 보네."신지태는 내 앞에 정돈한 식기를 내려놓으며 단호하게 말했다."지원이는 내 동생이야. 보통 사람과는 다르지."그의 말에는 분명한 경고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나는 그 말에 살짝 감동했다.신지태가 그렇게까지 말하자 용준호도 알아들
강진혁은 차가운 표정으로 걸어와 부모님과 마주했다. 그러자 삼촌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강진혁, 정말 끝까지 이럴 거냐?”강진혁은 부모님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제가 기억하는 한, 유형이가 태어난 이후로 내 모든 것이 달라졌어요. 아버지는 유형이를 감싸고 사랑했지만 저는 점점 배제됐죠. 그가 아기일 때부터 부모님은 항상 유형이와 함께 잤어요. 그때 나는 방에서 이불을 뒤집어쓴 채 홀로 두려움에 떨었죠. 늘 그렇게 말하셨잖아요.‘유형이는 아직 어리니까.’하지만 저는요? 저도 그보다 겨우 몇 살 많았을 뿐이에요. 저도 사랑받고 싶었던 어린아이였다고요. 유형이는 부모님의 사랑만 빼앗아 간 게 아니었어요. 제 장난감, 제 옷, 제 모든 것이 하나씩 그에게 넘어갔죠. 심지어 제 물건을 빼앗길 때마다, 아버지는 ‘넌 형이니까 양보해야지’라며 저를 설득했어요. 그렇게 두 분은 늘 ‘형이니까 참아야 한다’고 저를 세뇌했어요. 그렇게 시간이 흐르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제가 원하는 것을 포기하는 게 익숙해졌어요. 정말 간절히 원하는 것도, 늘 유형이가 먼저 선택할 기회를 가졌죠. 그리고 그가 가져가 버리면 저는 밤마다 이불 속에서 몰래 울 수밖에 없었어요.”그의 말이 이어질수록, 아줌마와 삼촌의 얼굴은 점점 창백해졌다. 나는 강진혁의 눈동자 속 깊숙이 숨어 있던 억울함과 분노를 보았다.그가 품고 있던 상처는 20년이 넘도록 아무도 들어주지 않은 채, 그를 갉아먹고 있었던 것이다.“그러다가 지원이가 우리 집에 왔어요. 나는 지원이를 처음 본 순간부터 좋아했어요. 하지만 두 분은 ‘지원이는 유형이의 미래 아내’라고 못 박아버렸죠. 나는 또다시 숨을 수밖에 없었어요. 좋아하면서도 티 내지도 못하고 조용히 그 감정을 숨겨야 했어요.”강진혁은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의 사랑이 비록 뒤틀렸을지언정, 그것이 얼마나 오랫동안 간직된 감정이었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그리고 나중에 부모님은 유형이에게 회사를 맡겼죠. 그러면서 저에게는 온갖 이유를 대며 칭찬
“아줌마, 한 번 배신한 사람은 두 번도 배신해요. 강유형은 이미 저한테 신뢰를 잃었어요. 설령 제가 진혁 오빠를 선택하지 않는다 해도, 유형이를 다시 선택하는 일은 절대 없을 거예요.”나는 단호하게 말했다.강유형의 부모님이 아직도 나와 강유형의 관계를 다시 잇고 싶어 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 기대를 확실히 끊어놓을 필요가 있었다.“진혁이도 안 돼.”그동안 가만히 듣고만 있던 삼촌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그 말에 나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아줌마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할 때부터 이미 부부가 함께 논의한 결과라는 걸 알고 있었다.“삼촌, 요즘 세상에 연애는 자유로운 거예요. 그리고 아줌마랑 삼촌이 이런 이야기를 진혁 오빠한테도 했어요?”나는 가벼운 미소를 띠며 물었다. 그러자 삼촌의 표정이 단단하게 굳어졌다.“지원아, 우리 관계가 예전 같지 않다는 거 알아. 네가 우리를 용서한다고 했지만 마음속 깊이 우리를 원망하는 거 아니야? 너한테 잘못한 건 우리니까, 화가 나면 나한테 직접 풀어. 하지만 우리 아들들까지 싸우게 만들지는 마.”나는 잠시 침묵했다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삼촌, 너무 과대 해석하시는 거 아니에요? 저는 누구의 사이도 이간질할 생각 없어요. 그저 제 자리에서 행복하게 살고 싶을 뿐이에요.”나는 자신도 서글퍼질 만큼 씁쓸하게 웃었다.“저는 그저 저를 사랑해 주는 사람과 함께, 제가 온전히 쉴 수 있는 집을 갖고 싶어요. 제게도 그런 가족이 있으면 좋겠어요.”“지원아, 만약 네가 정말 누군가의 사랑을 받고 싶다면 아줌마가 더 좋은 사람을 소개해 줄게.”아줌마는 다급한 듯이 말했지만 나는 미소를 지으며 반문했다.“그럼 진혁 오빠는 어떻게 하시려고요? 오빠는 절 원하고 있어요. 제 마음속에 아직 진정우가 남아 있다는 것까지도 받아들일 수 있다고 했어요.”그 말이 끝나자 거실이 순간 얼어붙었다.아줌마와 삼촌의 얼굴이 굳어졌고 서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한참 후, 아줌마는 마치 울고 싶은 듯한 얼굴로 조용히 입을
강진혁과 함께 차에서 내려 집으로 들어서자, 강유형이 거실에 앉아 있었다.그는 우리를 보자마자 얼굴이 굳었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지원아!”아줌마는 여전히 예전처럼 다정했다. 오랜만에 나를 보자 그녀는 감격한 듯 눈물을 훔쳤다.“이제야 다시 보게 되네.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삼촌은 소파 옆 흔들의자에 앉아 있었지만 몸 상태가 예전보다 더 나빠 보였고 기운도 없어 보였다.그는 내 시선을 피하며 어딘가 불편한 기색을 보였다.이미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었기 때문일까?우리 사이의 벽은 이제 더 이상 예전처럼 되돌릴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지만 나는 여느 때처럼 예의를 갖춰 인사했다.“삼촌, 오랜만이에요.”나는 이미 이들과의 감정을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과거의 원한을 묻기로 했으니, 그들에게‘빚을 갚으라’는 듯한 태도를 보일 생각은 없었다.삼촌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그때, 강유형이 자리에서 일어나 강진혁을 노려보며 말했다.“잠깐 나와봐.”어릴 때부터 감정을 숨기지 않는 강유형의 성격을 알기에, 그는 지금 당장이라도 강진혁과 크게 한바탕 할 기세였다.아줌마는 불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입을 열려다 이내 망설였다.나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았지만 굳이 먼저 묻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결국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말을 꺼냈다.“지원아, 너랑 진혁이 요즘 많이 가까워졌니?”나는 피하지 않고 솔직하게 답했다.“오빠가 저를 좋아한다고 고백했어요.”아줌마와 삼촌은 동시에 굳어버렸다. 아줌마는 입술을 몇 번 달싹였지만 이내 굳은 얼굴로 물었다.“그럼... 너도 그 마음을 받아들일 생각이야?”그녀의 반응은 예상한 대로였다. 예전에는 강유형과 내가 헤어졌을 때조차‘같은 집안사람인데 인연을 이어보면 어떻겠냐’는 식으로 말하더니, 지금은 확실히 태도가 달라져 있었다.아마도 이제는 단순한 집안 문제를 넘어, 그동안 감춰졌던 진실이 드러났기 때문이겠지.“아직은 아니에요. 하지만 오빠가
나는 힘없이 웃었다. 허진호가 굳이 전화를 걸어 단순한 안부를 물을 리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그는 분명 내가 제대로 살아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을 것이다. 나는 손목을 들어 올려 작은 방울을 입술에 살짝 대고 조용히 중얼거렸다.“정우야, 네 친구가 널 대신해서 내 안부를 챙겨주고 있어.”해가 질 무렵, 나는 회사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강진혁을 발견했다.붉게 물든 석양 아래 그의 실루엣이 마치 빛을 두른 것처럼 선명했다.그가 서 있는 모습은 단정하고 부드러웠지만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젊은 여자 직원들이 연신 뒤돌아보며 속삭였고 어떤 용기 있는 이는 대놓고 감탄하며 말했다.“오빠, 진짜 잘생겼어요!”그러나 그는 그 모든 시선을 철저히 차단한 채 오직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나는 그에게 다가가 장난스럽게 말했다.“진혁 오빠, 인기 여전하네요?”그는 살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너까지 장난치지 마.”나는 가벼운 농담을 접고 본론으로 넘어갔다.“소희 소식은요? 아직도 못 찾았어요?”“아직이야. 하지만 그녀의 남자 친구에 대해 조사해 봤는데...”그는 말을 잠시 끊었다. 나는 이상한 기운을 감지하고 조용히 물었다.“뭐가 문제예요?”“그 사람, 빚이 많더라. 사채와 온라인 대출까지 뒤얽혀 있었고 동시에 여러 여자와 교제하고 있었어.”그 말에 나는 한숨을 삼켰다. 결국, 그녀가 힘들어했던 이유는 사랑이 아니라 배신이었을지도 몰랐다.“지금 그 사람은 어디 있어요?”“체포됐어.”나는 순간 놀랐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면회 가능한가요?”“가능하지. 내가 알아볼게.”그는 그렇게 말하며 차 문을 열어 주었다.차 안에 오르자 내 자리에는 꽃다발이 놓여 있었다. 화려한 장미가 아닌, 연보랏빛 라벤더와 안개꽃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꽃다발이었다.나는 꽃을 조심스럽게 집어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이건...?”그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별을 따다 줄 순 없어서 대신 이걸 준비했어.”그의 말은 부드럽고 낭만적이었
“지원아!”강진혁의 목소리는 예전처럼 부드럽고 듣기 좋은 톤이었다. 하지만 내게는 그 다정함이 오히려 날카로운 가시처럼 느껴졌고 가슴을 찌르는 듯한 통증을 남겼다.겉으로 보기에는 한없이 온화하고 배려심 많은 사람이었지만 그의 내면은 너무나 어두웠다.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 심지어 타인을 짓밟는 일조차 서슴지 않는 사람이었다.나는 감정을 억누르고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오빠, 부탁 하나만 들어줄 수 있을까요?”“말해 봐.”그의 말투는 예전과 미묘하게 달라져 있었다.현재 그는 강유형 대신 KS 그룹을 이끌고 있었고 그 때문인지 목소리에는 자연스럽게 권위가 묻어났다. 역시 사람이 앉는 자리가 그 사람의 말투와 행동까지도 바꿔놓는 법이다.“우리 회사에 있던 직원, 이소희라고 아세요? 제 친구인데 얼마 전에 퇴사하고 연락이 끊겼어요. 혹시 오빠 인맥을 통해 그녀를 찾아줄 수 있을까요?”“이소희?”그는 내 말을 한 번 되뇌더니, 잠시 생각하는 듯한 기색을 보였다.“알았어. 찾아볼게.”“고마워요, 오빠.”나는 여느 때처럼 예의 바르게 감사를 전했다. 그러자 그가 부드럽게 내 이름을 불렀다.“지원아.”“네?”“우리, 만날 수 있을까?”나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좋아요. 언제요?”“네가 편한 시간에 맞출게.”그는 언제나 내 의견을 먼저 물었고 내 뜻을 존중해 주었다. 그는 한 번도 나에게 자신의 기준을 강요한 적이 없었다.그의 마음은 오래전부터 이런 식으로 나를 향해 있었고 나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그의 배려를 받아들이면서도 그 감정을 알아채지 못했다.“그럼 내일 저녁에 봬요. 저를 데리러 와 주세요. 오랜만에 삼촌이랑 아줌마도 뵙고 싶네요.”내 말에 강진혁이 순간 멈칫했다.“...알겠어. 부모님께도 전해 놓을게.”전화를 끊고 나는 손목의 방울을 살짝 흔들었다. 그 맑고 청아한 소리를 들으며 속삭였다.‘정우야, 네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 강씨 집안과 엮이지 말라는 건 대체 무슨 의미였
용설아뿐만 아니라 허진호 역시 진정우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적어도, 그가 겪었던 위험과 고비에 대해서는 나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이제 나는 더 이상 그의 과거를 깊이 파고들 용기가 없었다.그가 어떤 고통을 겪었는지 알면 알수록 더 마음이 아플 테고 그리움만 깊어질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저는 믿을 수 없어요.”허진호가 다시 한번 단호하게 말했다.나 역시도 가슴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진정우가 어딘가에 살아 있을 것만 같았다. 다만 내가 도달할 수 없는 먼 곳으로 떠나버린 것뿐이라고.“그럼 정우가 아주 먼 여행을 떠난 거라고 생각합시다.”나는 손목에 걸린 방울을 살짝 흔들었다. 맑고 청아한 울림이 공간을 가득 채웠고 그 소리에 마치 진정우가 여전히 내 곁에 있는 것처럼 마음 한구석이 조금이나마 따뜻해지는 기분이 들었다.‘다행이야.’그가 남긴 이 작은 방울이, 나를 붙잡아 줄 마지막 선물 같았다. 그때, 허진호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조금만 시간을 줘요. 지원 씨에게 전해줄 물건이 있어요.”“뭐죠?”“직접 보면 알 거예요.”그는 그 말을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나는 그를 붙잡으려 했지만 한 번도 진지한 표정을 지은 적 없던 그가 마치 온 세상을 잃은 듯한 모습으로 걸어가는 걸 보고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그에게도 진정우는 그만큼 소중한 사람이었다. 내게는 사랑하는 사람이었고 허진호에게는 그 누구보다도 신뢰하는 친구였다.그가 느낄 상실감 또한 나와 다르지 않을 터였다.허진호가 떠난 후, 나는 사무실에 앉아 한동안 멍하니 손목의 방울을 흔들었다.그저 작은 움직임이었지만 그 소리는 나를 위로하는 듯했다.점심시간이 되자, 나는 회사를 나와 이소희의 집으로 향했다.전날 그녀에게 연락했지만 휴대전화는 꺼져 있었고 메시지에도 답이 없었다.회사에 알아보니 이미 사직서를 제출한 상태였다. 결국, 직접 그녀의 집으로 찾아가는 수밖에 없었다.“누구세요?”소희의 어머님인 박수미가 나를 경계하는 눈빛으로 바라
남자는 쉽게 눈물을 보이지 않는다. 특히, 여자 앞에서는 더더욱.하지만 지금, 나는 허진호가 내 앞에서 눈가가 붉어지더니 결국 참지 못하고 눈물을 쏟아내는 모습을 똑똑히 보고 있었다.그가 그렇게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먹먹했다.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조용히 그의 사무실을 나와, 그가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충분히 진정우를 기릴 수 있도록 공간을 내어주었다.이 회사가 진정우의 것이라고 했지만 공식적인 사장은 허진호였다.그만큼 두 사람 사이의 신뢰가 깊었고 진정우는 그를 믿고 자신의 모든 것을 맡겼다.그런데 이제, 진정우가 사라졌다. 그를 기다리던 허진호는 이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의 슬픔도, 나 못지않을 것이다.나는 조용히 발걸음을 옮겨, 진정우의 연구실로 향했다. 그는 연구개발을 했기에 직접 실험을 진행하는 일이 많았고 책상 위에는 각종 실험 도구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하지만 그 많은 장비에도 불구하고 연구실은 전혀 어수선하지 않았다.나는 천천히 다가가 책상 위에 놓인 실험 기록 노트를 집어 들었다. 빼곡하게 적힌 숫자들, 그리고 그가 직접 쓴 강직한 글씨들. 손끝으로 글자를 따라가다가, 다시 가슴이 아려왔다.모든 것이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그는 더 이상 여기에 없었다.그가 남긴 것들은 내 손에 닿지만 정작 그는 닿을 수 없는 곳으로 가버렸다. 그가 있었던 흔적이 이렇게나 선명한데 그를 다시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나는 자리로 앉아 그의 책상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에는 평소 그가 쓰던 펜, USB, 블루투스 이어폰, 그리고 기록 노트가 있었다.그리고 눈에 띄는 투명한 상자 하나가 있어 나는 조심스럽게 상자를 꺼내 열어보았더니 안에는 묘하게 낯선 질감을 가진 가느다란 팔찌가 들어 있었다.시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금속이나 은이 아니라,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재질이었고 잠금장치가 없었다. 혹시 빠진 걸까 싶어 상자 안을 뒤적이다가 몇 개의 미완성 부품과 함께 접혀 있는
신입 사원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씩씩하게 대답했다.“그럼요! 윤 부장님, 밥 사주세요.”그 직설적인 대답에 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좋아, 그럼 오늘 저녁에 다 같이 ‘성해 반점’에서 모이자. 내가 쏠게.”“정말이죠?”“당연하지.”“와! 윤 부장님 최고!”신입 사원은 신나서 뛰어나갔고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별것 아닌 대화였지만 회사 분위기가 한결 밝아진 것 같았다.가방을 내려놓고 주변을 둘러본 후, 나는 허진호가 있는 사무실로 향했다.“들어오세요!”문을 열고 들어서자, 그는 책상 가득 쌓인 서류에 파묻혀 있었다. 누가 들어왔는지도 모른 채 바쁘게 사인을 하고 있었다.나는 그의 책상을 흘끗 바라봤다. 거기에는 내가 맡았던 부서의 서류들도 섞여 있었다.‘역시, 내가 아무 걱정 없이 지낼 수 있었던 건 이 사람이 뒤에서 버텨주고 있었기 때문이구나.'내가 없는 동안, 모든 업무를 그가 대신 처리했을 것이다.“허 대표님, 이렇게 혼자서 모든 걸 떠안고 일할 거면 차라리 사람을 더 뽑는 게 낫지 않아요?”내 말을 들은 허진호는 순간 펜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그는 나를 보자마자 깜짝 놀라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세상에, 윤 부장님! 드디어 돌아오셨네요! 저 정말...”그는 말을 멈췄지만 나는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그는 내가 회사로 돌아오지 않을까 걱정했던 것이다.하지만 만약 내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면 왜 새로운 직원을 뽑지 않았던 걸까? 혹시 내 퇴사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 아닐까?“허 대표님, 저 복직할 수 있는 거죠?” 나는 직설적으로 물었다.“당연하죠! 무조건! 그런데 복직 안 하면 설마 퇴사라도 하겠다는 거예요? 절대 안 돼요. 회사 규정상 최소 1년은 근무해야 사직이 가능하다고요!”그의 말에 나는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계약서에 그런 조항이 있었어? 나 왜 몰랐지?’“이건 말도 안 되는 규정이에요.”나는 장난을 치며 말했다.“서명했으면 끝난 거예요. 이제 와서 불평하
나는 자연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강유형을 바라봤다.“네가 말하지 않아도 상관없어. 난 이미 알고 있으니까.”강현우의 눈빛이 깊어졌다.“누구라고 생각하는데?”내가 대답하지 않자 그는 몸을 일으키며 침대에서 내려오려 했다.“지원아, 설마 형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네가 형이랑 만나려는 것도 결국 진정우의 복수를 위해서야?”오랫동안 나를 사랑했던 사람답게, 내 속마음을 읽는 데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진혁 오빠 아니야? 그렇다면 진짜 배후가 누구인지 알려줘.”내 질문에 그는 잠시 말을 삼켰다가 조용히 대답했다.“지원아, 형은 아니야. 사실 나도 정확한 배후가 누군지는 몰라. 그때 네게 말했던 건 그저 추측이었어.”나는 조급해하지도, 당황하지도 않았다.“아니라면 더 좋지. 그렇다면 내가 진혁 오빠를 받아들이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겠네.”강현우의 표정이 굳어졌다.“지원아…“나는 깊은숨을 내쉬며 담담하게 말했다.“우린 10년을 알고 지냈고 4년 동안 사랑했어. 그리고 나는 진정우를 사랑하게 됐지. 나는 여러 가지 사랑을 경험했어. 짝사랑이 이루어지는 설렘도, 운명처럼 빠져드는 감정도. 하지만 결국 사랑이란 건 너무 피곤한 감정이더라. 이제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을 선택하고 싶어.”“좋아, 네가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는 건 이해하지만 형은 절대 안 돼.”강현우는 강하게 반대했고 나는 미소 지으며 되물었다.“왜 안 되는데? 이유를 말해봐.”그는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지원아, 이유 모를 리 없잖아. 꼭 내가 말해야 해? 내 형이잖아. 너는 한때 내 약혼녀였고. 둘이 같이 있으면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볼 것 같아? 우리 가족은 또 어떻게 보겠어? 나더러 어떻게 널 마주하라는 거야?”나는 잠시 침묵했지만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그럼 네 체면과 감정을 위해, 난 내 행복을 포기해야 한다는 거야?”그는 내 말을 듣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나는 차분한 목소리로 덧붙였다.“마음의 준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