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때 진정우가 내 손을 잡았다.나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따스했고 그는 강진혁을 향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이곳이 공식적으로 인수인계되기 전까지, 저는 여기서 떠나지 않을 겁니다.”그의 확고한 태도에 잠시 숨을 멈췄다.진정우는 누군가 자신에게 떠나라고 하면 더욱 그 자리에 머물고자 하는 사람이다. 내가 강진혁의 반응을 기다리는 동안, 진정우는 내 손을 더 꽉 잡으며 말했다.“이건 지원 씨와의 약속입니다.”나와의 약속 때문이라는 말이 내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다.그러나 강유형과 강진혁의 표정은 금세 어두워졌다.모두가 숨을 줌이고 있었으며 공기는 더 차갑고 어색해졌다.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한 발 앞으로 나섰다.“강 대표님, 그리고 강 실장님, 제가 지금은 이곳의 책임자가 아니고 회사를 떠난 상태이지만 회사 규칙 중에 회사의 이익이 최우선이라는 원칙이 있었죠? 그 누구도 회사의 이익을 침해하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는 거죠.”내 말은 강진혁에게 회사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점을 은근히 상기시키는 의도였다.만약 누군가를 감싸고자 한다면 그 책임을 스스로 감당해야 한다는 경고였다.나는 말을 마쳤고 강유형과 강진혁은 더 이상 반박하지 못했다.그들의 표정은 한층 더 어두워졌지만 논쟁은 일단락되는 듯 보였다.그러나 그 순간, 뜻밖의 인물이 등장했다. 바로 조나연이었다.그녀는 서둘러 달려오더니 자신의 배를 신경 쓰는 것도 잊은 채 말했다.“이번 일은 제가 배치한 작업입니다. 책임은 제가 지겠습니다.”강유형의 얼굴이 더 어두워졌고 관자놀이마저 불쑥 튀어나왔다. 화가 치밀어 오르기 직전이었다.그의 이런 반응을 보고 나는 곧 일촉즉발의 상황이 될 것임을 예감했다.조나연은 평범한 직원이 아니었다. 그녀는 강유형이 나와의 10년 관계를 끊고 가족과도 등을 돌리며 선택한 여자였다.하지만 강유형은 예상 밖의 말을 꺼냈다.“네가 책임지겠다 했으니 그럼 그래.”나는 그의 말을 듣자 눈을 휘둥그레 떴다.강유형이 그렇게 소중히
나는 진정우를 바라보다가 문득 그의 아버지가 어릴 적 내가 "왕 아저씨"라고 불렀던 분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러다 진정우가 나에게 다가온 이유가 단순한 호감 때문인지 궁금해졌다.“정우 씨, 이렇게 저를 흔드는 게 정말 저를 좋아해서 그런 건가요?” “아니면요? 장난 같아요?”그는 내 눈을 똑바로 보며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되물었다.“그럼 혹시 뭔가 숨기고 있는 건 없어요? 예를 들면... 우리,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든가요?”그의 아버지의 정체를 알게 된 이후로 내내 머릿속을 떠돌던 질문이었다.그러자 그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다.“어릴 때 제가 지원 씨를 업은 적이 있어요. 그리고... 지원씨가 저한테 뽀뽀했죠.”그의 예상치 못한 고백에 나는 순간 멍해졌다. 내가 연애 경험이 없다면 그의 말에 얼굴이 새빨개지고 말았을 것이다.“네? 제가요? 어디에다 뽀뽀했는데요?”나는 의도적으로 대담하게 물었다.그는 한발 다가와 우리 사이를 좁혔다. 원래도 가까웠지만 이제는 숨소리가 느껴질 정도로 가까워졌다. 내 심장이 미친 듯이 빨리 뛰었지만 나는 피하지 않았다.진정우는 나를 내려다보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지금 보여줄까요?”“...”내가 할 말을 잃은 채 멍해 있자, 그는 살짝 웃었다. 그는 분명 겉으론 진지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장난스러운 면모가 있는 사람임이 틀림없었다.나는 얼굴이 빨개졌고 진정우를 쳐다보지도 못하면서 말했다.“장난치지 마세요.”그 말을 남기고 나는 도망쳤다. 뒤에서 들려오는 그의 낮은 웃음소리가 내 귓가에 계속 맴돌았다.그는 분명 나를 놀리려고 저랬던 거야.갑자기 예전에 꿨던 꿈이 떠올랐다. 그 꿈에서 나는 그의 등에 엎드려 장난을 치며 "오빠"라고 불렀었다.그게 혹시... 꿈이 아니었나?어릴 적 일이긴 하지만 이제 와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분간할 수가 없었다. 부모님께 물어볼 수도 없으니 답을 알 길은 진정우뿐이었다. 하지만 그에게 물어보는 건 부끄러워 도저히 할 수 없었다.나는 일부러 빨리 걸었지만 그는
신지태는 나에게 거절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그가 이렇게 나오는 건 어떤 의미인지 나는 잘 알고 있었다.나는 휴대폰을 쥐고 진정우를 바라봤다. 그리고 몇 걸음 다가가 막 말을 꺼내려는 순간, 진정우가 먼저 말했다.“저, 모레 떠나요.”떠난다니?나는 순간 멍해졌다. “어디로요?”그는 앞을 보며 걸었다.“돌아가야죠.”돌아간다니, 청평으로?그는 분명 여기에 남겠다고 했고 집도 계약했었는데.‘집’이라는 말이 떠오르자 곧장 철거 얘기가 생각났다. 집주인 아주머니의 부탁도 아직 그에게 전하지 못했는데.나는 왜 갑자기 떠나는 건지 묻고 싶었지만 그에게서 느껴지는 거리감 때문에 입술 끝에서 망설였다. 대신 나는 이렇게 말했다.“내일 밤에 조명 조정된 거 보러 오겠습니다.”진정우는 나를 바라봤다. 그 눈빛은 마치 ‘내가 시간이 있어도 자기는 없을 수도 있다’는 뜻 같았다.나는 그가 거절할 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나를 잠시 뚫어지게 보더니 입을 열었다.“좋아요.”그는 분명 억지로 그 말을 내뱉은 거였다.분명 화가 났을 텐데도, 나를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아 참고 있었다.순간, 나는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다.그가 나를 좋아하는 걸 알면서도, 그 마음을 이용해 내가 그를 이렇게 힘들게 하고 있었다.사람이라는 건 원래 그런가 보다. 상대가 다가올수록 밀어내게 되고 밀어내는 쪽은 늘 상처받기 마련이다.나도 예전에 강유형과의 관계에서 같은 일을 겪었던 기억이 떠올랐다.‘내가 싫은 건 남에게도 하지 말아야지.’“정우 씨.” 나는 그를 불렀다.“오늘 밤에는 지태 오빠를 만나러 가야 해요. 제가 부탁한 일이 있어서 꼭 가야 하거든요.”그의 눈빛이 살짝 깊어지더니, 잠시 후 낮게 대답했다.“네.”“그 대신, 내일 밤에는 저한테 밥을 해 주시겠어요? 그리고 같이 조명 보러 가죠.” 나는 일부러 장난스러운 톤으로 그를 달랬다.그러자 그는 살짝 미소 지었다.“제가 애도 아니고 달래는 거 안 통해요.”나는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어쩔 수 없이 침착한 척 태연하게 굴며 조나연이 내 앞으로 다가오는 걸 지켜봤다. 그녀가 멈춰 서며 내 이름을 부르더니, 눈물 맺힌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지원 씨.”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기다렸다.잠시 감정을 추스르던 그녀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지원 씨, 유형 씨에게서 좀 떨어져 줄 수 없나요?”갑작스러운 말에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뭐라고요?”“이미 헤어졌잖아요. 지금 그는 저와 함께 있어요. 과거는 과거로 두고 제발 그의 앞에 나타나지 말아 주세요. 자꾸 당신이 보이면 그가 흔들려요.”그녀의 목소리는 애처로웠지만 그 속에 얄미운 뉘앙스를 감출 수 없었다.나는 헛웃음을 터트리며 대꾸했다.“설마 보상금이 부담돼서 저보고 나눠서 내자는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니겠죠?”조나연의 얼굴이 금세 하얗게 질렸다.그녀가 예전에 나에게 경제적 어려움을 털어놓았던 기억이 떠오른 듯했다.하지만 내가 비웃은 건 그녀의 돈 문제가 아니라 그녀 자신이었다.“예전에는 그랬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달라요.”그녀가 강유형과 함께 있다는 자신감을 내비치며 단호하게 말했다.그 말에 나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아, 깜빡했네요. 이제는 그 ‘임석진 씨의 인정받지 못한 미망인’이 아니시죠?”임석진의 이름이 나오자 그녀의 몸이 굳었다. 그리고 금세 눈물이 쏟아졌다.“지원 씨, 굳이 그 사람 이름을 들먹이며 저를 공격할 필요는 없잖아요. 저는 단지 당신이 유형 씨 곁에서 사라지길 바라는 게 저를 위한 게 아니에요. 당신을 위한 거예요.”나는 비웃으며 물었다.“저를 위한 거라니요? 대체 어떤 이유에서요?”조나연은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유형 씨가 지금 당신을 많이 원망하고 있어요. 당신이 너무 빨리 다른 사람을 만났다고 생각하거든요. 심지어 지난 10년 동안 당신이 그를 진심으로 사랑한 적 없다고 느끼는 것 같아요.”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강유형이 직접 그렇게 말했나요?”“아니요."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
신지태의 말에 나는 놀라고 말았다.그는 늘 나를 동생처럼 아끼며 가끔 장난을 치긴 했지만 오늘은 좀 선을 넘은 느낌이었다.허진호 역시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며 머릿속으로 무언가를 계산하는 듯했다.신지태는 내 앞으로 다가오더니 허진호에게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말했다.“들어가자.”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신지태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떠날 때, 허진호가 무언가를 말하려다 망설이는 듯 손을 내밀었다가 멈추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문득 생각이 정리되자 나는 신지태에게 물었다.“오빠, 아까 그런 말 한 거, 혹시 내 주변 사람 정리하려는 거야?”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딱 봐도 별로야. 그 사람은 아니야.”그의 단호한 평가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그가 나를 흘낏 쳐다보며 말했다.“내가 사람 보는 눈은 정확하잖아. 그러니까 앞으로 저런 사람 멀리해.”“알겠어.”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그러자 그는 한 번 더 강조했다.“진심이야. 농담 아니야.”“나도 농담 아니야. 저런 사람한테 관심 없어.” 나는 단호히 대답했다.“그럼, 네가 좋아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야?”나는 진정우의 모습이 떠올랐다.“겉은 도도해 보이는데 속은 따뜻한 사람... 그리고...”진정우가 앞치마를 두르고 부엌에서 요리하던 모습이 떠올랐다.“요리도 잘하는 사람.”강유형과 오랜 시간 함께 지내면서, 그는 라면 한 번 끓여준 적이 없었다.그에게 주어진 환경상 그럴 수도 있지만 결국 나를 위한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만약 조금이라도 진심이었다면 어떻게든 해보려고 했겠지.신지태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네 조건은 참 현실적이네.”나는 고개를 숙여 조용히 말했다.“사람이 살아가면서 결국 하루 세 끼를 먹는 게 가장 기본 아니야?”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 말도 맞아.”우리는 엘리베이터에 도착했고 그가 버튼을 누르자 문이 열렸다.엘리베이터 안 벽에 비친 내 얼굴과 신지태의 시선이 겹쳤다.“그럼, 그런 사람 찾았어?” 나는 잠시 망
문이 열리자 안에서 요란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방 한가운데 앉아 있던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그 남자... 낯이 익었다.신지태가 먼저 소개했다."같이 당구치는 준호야."나는 그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다가 이름이 떠올랐다. 용준호, 바로 용진표의 아들이자 현재 용진 그룹의 대표였다.한 번 그의 정보를 찾아본 적이 있었다. 그는 스누커를 좋아해 아마추어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한 이력이 있다. 하지만 신지태와 이런 친분이 있을 줄은, 게다가 이렇게 가까운 사이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이분이 그 유명한 지원 씨?" 용준호가 웃으며 말했다.그의 부드러운 말투와 친근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나는 등을 타고 흐르는 차가운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그의 기사가 아무리 깨끗하다 해도, 그의 아버지가 했던 일을 생각하면 그 역시 완전히 결백할 수만은 없을 것 같았다.이래서 사람은 겉모습만으로 판단할 수 없는 법이다."지원아, 앞으로 준호 오빠라고 부르면 돼. 혹시 어려운 일 있으면 말하고."신지태가 내 옆에 있는 의자를 빼주며 말했다.나는 의자에 앉으려 했지만 용준호가 갑자기 나섰다."지태야, 네가 이쪽으로 앉고 지원 씨를 우리 사이에 앉히자. 그래야 좀 더 친해질 수 있지 않겠어?"그 말에 순간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는 낯선 사람에게 쉽게 마음을 열지 않는 편이었다. 하물며 그 상대가 용준호라면 더더욱 그랬다.나는 자연스레 신지태를 바라봤다. 그는 고개를 들지도 않고 내 앞에 식기를 정성스럽게 세팅하며 말했다."이 자리에서도 충분히 얘기할 수 있어."그의 말에 안도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역시 지태 오빠, 나를 곤란하게 만들지 않네.이때 용준호는 웃으며 말했다."지태야, 네가 이렇게 누군가를 챙기는 건 처음 보네."신지태는 내 앞에 정돈한 식기를 내려놓으며 단호하게 말했다."지원이는 내 동생이야. 보통 사람과는 다르지."그의 말에는 분명한 경고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나는 그 말에 살짝 감동했다.신지태가 그렇게까지 말하자 용준호도 알아들
용준호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어딘가 의미심장한 기색이 섞여 있었다.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나는 굳이 신경 쓰지 않았다.“혹시 부담스러우시면 그냥 없던 걸로 하죠.”나는 담담히 말을 꺼냈다.“허허.”그는 건조하게 웃음을 터뜨렸다.“그게 뭐가 어려운 일이라고? 부탁이 한 가지라니, 나를 달라고 해도 흔쾌히 드릴 텐데.”그의 지나친 농담에 어색한 기운이 돌았다.그러자 옆에 있던 신지태가 가볍게 기침을 두 번 하며 분위기를 정리했다.“하하!”용준호는 일부러 더 큰 소리로 웃으며 내게 손짓했다.“그럼, 지원 씨 먼저 시작해.”그와 주고받는 말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괜히 시간을 끌고 싶지도 않았다.“그럼 시작할게요.”나는 큐를 들고 빠르게 샷을 날렸다. 상대에게 기회를 주지 않고 깔끔하게 공을 모두 처리했다.용준호는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박수를 치며 말했다.“역시 지태가 아끼는 동생답네. 실력이 대단한걸?”그는 공을 다시 세팅하면서 말했다.“이건 인정. 하지만 나도 오빠답게 한 번 멋지게 보여줘야지.”그리고는 능숙하게 공을 쳐 나갔다. 역시나 그는 스누커 대회 우승자답게 모든 공을 빠르게 처리하며 한 번의 실수도 하지 않았다.나는 박수를 치며 말했다.“역시 대표님이 더 뛰어나시네요.”그는 미소를 지으며 내게 물었다.“그런데 규칙대로라면 내가 졌네. 이제 말해봐. 원하는 게 뭐야?”나는 한숨을 고르고 천천히 말했다.“용진표 회장님을 한 번 만나 뵙고 싶어요.”용준호는 내가 왜 그런 부탁을 하는지 궁금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나는 바로 이유를 덧붙였다.“제가 가진 물건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확인받고 싶어서요.”그제야 그의 얼굴에 살짝 긴장이 풀렸다.“무슨 보물 같은 건가?”“아니요. 그런 건 아니에요.”나는 단호히 부인했지만 자세한 설명은 덧붙이지 않았다.그도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대신 잠시 생각에 잠긴 후 말했다.“좋아. 데리고 갈 수
“아니요, 용 대표님이 더 뛰어나신 거죠. 보시다시피 저는 그냥 취미로 하는 수준이에요.”나는 겸손하게 말했다.“취미로 하는 것도 누군가의 가르침이 있었을 텐데 네 스타일은 지태한테 배운 건 아닌 것 같은데? 누가 가르쳐줬어?”용준호가 뜬금없이 물었다.내 스누커 실력은 사실 강유형과 놀면서 자연스럽게 익힌 것이다. 그가 정식으로 가르쳐준 적은 없었다.그가 공을 칠 때 옆에서 보다가, 나중에 심심할 때 혼자 따라 하곤 했다.그러다 어느 날 내가 꽤 잘 치는 걸 알게 된 강유형이 종종 나를 불러 함께 게임을 하자고 했다.“야, 준호야. 언제부터 이렇게 쓸데없는 거나 캐물었냐? 당구 치러 온 거 아니야? 말이 왜 이렇게 많아?”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뒤돌아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강유형이었다.오늘따라 정말 복잡한 하루다 싶었다.강유형이 내 옆으로 다가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존재만으로도 용준호는 상황을 파악한 듯했다.“하, 어쩐지. 당구 치는 스타일이 너랑 비슷하다 했더니만...”용준호가 말을 멈추고 나와 강유형을 번갈아 보았다.그러고는 무슨 깨달음을 얻은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지원이가 설마 네 어릴 적 약혼녀라는 그 사람 아니야?”그 말은 나에게도 오랜만에 듣는 단어였다.어렸을 때 내가 강유형과 약혼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학교 친구들은 나를 그의 '어린 신부'라며 놀리곤 했다.그러나 그런 말을 하던 친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전학을 갔고 그 후로는 아무도 그런 얘기를 하지 않았다.“그만 떠들고 당구나 치자. 오늘은 내가 같이 놀아줄게.”강유형은 그렇게 말하며 외투를 벗어 내게 던졌다.모든 행동이 마치 예전으로 돌아간 것처럼 자연스러웠다.그의 행동이 너무 빨라서 나는 그가 외투를 던지기 전에 거절할 틈도 없었다.하지만 나는 예전처럼 그의 옷을 들고 마치 하녀처럼 서 있지는 않을 생각이었다.나는 곧장 신지태 쪽으로 걸어가 그의 옆에 옷을 내려놓고 그를 밖으로 불러냈다.문밖으로 나가자마자 신지태가 먼저
내 말에 용진표는 미소를 지었다.“똑똑한 여자네. 다음 생에선 좋은 집안에 태어나기를...”그는 말을 끝내자마자 일어섰고 나는 몸이 갑자기 앞으로 기울며 그가 신발을 신고 있는 곳으로 거의 쓰러질 뻔했다.용진표의 경호원이 바로 다가와 나를 붙잡으려 했지만 그는 이를 막았고 대신 나를 매섭게 쳐다보며 말했다.“이제 사실을 다 알았으니 뭘 더 하고 싶어? 내가 널 풀어줄까?”나는 그가 날 풀어주길 원했고 나는 아직 죽을 수 없었다. 이렇게 죽으면 너무 억울할 것 같았다.“대표님이 말한 내용이 믿기지 않아요. 내가 원하는 건 대표님이랑 저랑 삼촌과 셋이서 마주하게 해주세요. 아니면 삼촌에게 전화라도 해서 제가 듣고 싶은 말을 하게 해주세요”이 말은 진심이었고 또한 나는 사실 시간을 끌고 싶었다. 시간을 끌어서 누군가가 나를 구하러 오게 하고 싶었다.하지만 누가 나를 구하러 올까?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용진표를 계속해서 바라보며 그를 붙잡고 있었다.하지만 이번에는 그가 나를 무시하고 경호원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 순간 나는 끌려 나갔다.용진표가 떠난 뒤 나는 다시 손발이 묶인 채로 갇혔고 그의 말이 계속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내가 그동안 삼촌과 아줌마한테 받은 친절이 정말 진심이 아니었던 걸까? 그들이 나를 잘 대해준 이유는 부모님에 대한 죄책감 때문일 뿐이었을까? 아니면 그저 내가 강유형을 살릴 수 있는 피가 있어서?’나는 그렇게 믿고 싶지 않았다. 그들은 내게 십 년 동안 변함없이 잘해줬고 그게 가짜라고 생각하기엔 너무 긴 시간이었다.그러니 아마 용진표가 나를 속이고 있을지도 몰랐다.‘그런데 왜 나를 속여야 하는 걸까? 내가 삼촌과 아줌마를 미워하도록 만들기 위해서?’하지만 용진표는 지금 날 죽이겠다고 했으니 내가 그들을 아무리 미워한다고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그렇게 나는 앉아서 고민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밖의 빛이 점점 어두워지는 게 느껴졌다. 심지어 나를 지키는 사람도 없어진 것 같았다.‘용진표가 나를 굶겨 죽일
몸을 앞으로 기울여 내 얼굴을 응시하던 용진표는 미소를 지었다.그가 왜 웃는지 알 수 없었지만 나는 그를 계속해서 쳐다봤다. 마치 그가 나한테 대답하지 않으면 절대로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이 말이다.그가 웃음을 멈추고 나서 말했다.“그러면 너한테 사실을 제대로 알려 주고 죽일게. 왜냐하면 네 부모님이 다른 사람의 돈길을 막았으니까.”그 말에 나는 바로 그와 계약하려던 그 계약서를 떠올렸다.“다른 사람의 돈길을 막았다고요? 그게 왜 제 부모님과 상관이 있나요?”나는 다시 의문을 제기했고 용진표는 웃으며 말했다.“아가씨,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어떻게 돈을 벌었는지 잊었어?”그 말에 나는 깨달았다. 그도 다른 사람한테서 돈을 받았다는 뜻이었다.“그 사람이 누구죠?”나는 급히 물었지만 용진표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나에게 되물었다.“네 생각에는 누구일 것 같아?”내 부모님의 죽음은 결국 그 계약 때문이었고 그 계약은 결국 삼촌에게 넘어갔으니... 바로 그 사람일 것이다.전에도 한 번 의심은 했었지만 용진표는 그 의심을 지워버렸고 심지어 삼촌이 그 계약으로 번 돈을 나에게 따로 저금해 두었다고까지 했다.지금 그가 이렇게 암시하자 나는 정말 혼란스러웠다.“용 대표님, 나이가 드셔서 기억이 잘 안 나세요? 예전에 대표님은 저에게...“내 말투는 점점 자신감이 없어 보였고 그는 줄곧 웃고 있었다. 용진표가 방금 말한 것처럼 그는 다른 사람의 돈을 가지고 대신 일을 처리해 준다고 했으니 그의 말이 전부 사실일 수는 없었다.나는 그런 생각을 하기도 싫었지만 용진표가 계속해서 그런 걸 암시하니 믿을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지금 여기 있는 것도 남의 돈 받고 일을 하시는 거 맞죠?”내가 다시 묻자 용진표는 가볍게 웃었다.“내 생각이 맞았어. 네가 이렇게 똑똑한데...”그의 말에 나는 혼란스러워졌고 몸을 살짝 흔들며 대답했다. “믿을 수 없어요. 대표님이 저를 속이고 있는 거겠죠.”“내가 너를 부모님에게 보내 주려고 하는데 왜 굳이 널 속이겠어
나는 그녀를 보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그녀가 점점 흐려지기 시작했다. 나는 머리를 흔들며 무언가 말하려고 했지만 그때 함소은이 말했다. “용진표의 아내가 꿈을 꾼 게 아니라 용진표가 지원 씨를 만나고 싶다고 했죠.”“뭐라고요?”내가 말을 끝내기 전에 갑자기 나는 함소은이 완전히 보이지 않았다. 그 뒤로 나는 몸이 뜨는 느낌이 들었고 귀에 함소은의 목소리가 들렸다.“잠깐만 자고 있어요.”나는 왜 자야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입을 열지 못했다. 내 몸이 들어 올려지는 걸 느꼈지만 나는 눈은 뜨지 못했고 말도 할 수 없었다.어디론가 데려가졌고 그곳에서 물을 먹은 후 나는 눈을 떴다.눈에 들어온 것은 낯선 큰 남자였고 그가 바로 용진표의 경호원이었다.의식이 흐릿해지기 전에 함소은이 말한 내용을 떠올렸고 나는 이제 모든 걸 알았다. 나는 몸을 조금 움직이며 그에게 물었다.“용진표는 어디 있어?”그 사람은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돌아서서 나갔다.나는 손과 발이 묶여 움직일 수 없었고 눈앞에 보이는 곳은 폐차장이었고 주변에 낡은 타이어들이 쌓여 있었다.그 모든 상황을 파악한 나는 용진표가 나를 잡아둔 이유를 곰곰이 생각했다.그는 아마 내가 그가 한 일을 알게 되는 걸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게다가 내 몸까지 묶었으니 나한테 별로 좋은 일이 벌어질 것 같지 않았다.막심한 공포가 밀려왔지만 나는 스스로를 진정시키려고 애썼다.밖에는 용진표의 경호원이 서 있었고 내가 물을 마시고 깨어났으니 이제 아마 용진표가 올 것 같았다.얼마 지나지 않아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렸고 경호원이 형님이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갇혀 있는 문이 열리자 용진표가 들어왔다. 그는 오늘 마치 무술 도복 같은 흰색 옷을 입고 있었다.“아가씨, 또 만났네.”용진표가 웃으며 말하자 나는 겁먹지 않고 대답했다.“용 대표님, 이런 식으로 만나는 건 영 마음에 들지 않아요.”“마음에 들지 않으면 왜 날 자꾸 자극한 거야?”그가 내 앞에 서자 경호원은 의자
“진정우 씨.” 나는 평범한 동료처럼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인사를 했지만 진정우는 아무 말 없이 나를 쳐다보았고 우리는 그냥 스쳐 지나갔다.하지만 그 순간 내 얼굴에 있는 미소가 조금 씁쓸하게 느껴졌다. 나는 회사 차를 몰고 함소은이 말한 곳으로 갔다.내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 함소은은 아직 오지 않았다. 나는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냈고 그녀는 먼저 자리를 찾아 앉아 기다리라고 했다. 그녀를 기다리면서 나는 다시 휴대폰을 열었고 그때 진소영이 보낸 메시지를 받았다.스크롤을 위로 올려보니 진소영이 보낸 메시지는 거의 다 자책과 내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진정우를 변호하는 내용도 있었지만 나는 딱 한 번만 답을 보냈고 그 후에는 다시 답하지 않았다.[언니, 보면 답장해 줘. 오빠가 나를 방에 가두고 나가지 못하게 해요.]진소영의 메시지를 보고 한참 생각한 후에야 나는 그녀에게 답을 보냈다.[소영아, 나는 괜찮고 이젠 정상적으로 출근하고 있어. 그리고 나랑 네 오빠 사이에 대해선 더 이상 얘기하지 않아도 돼.]그러자 그녀는 바로 답을 보냈다. [언니, 오빠는 언니를 정말 사랑해요. 정말이에요. 맹세해요.]나는 답하지 않았고 그때 다시 메시지가 왔다.[오빠가 언니에게 죽을 끓여줄 때 정신이 없어서 팔까지 데었어요.]그 메시지를 보자 나는 그가 버린 죽을 떠올리며 여전히 답하지 않았다. [오빠가 언니한테 죽을 가져가고 돌아와서 잠도 자지 않고 창문 앞에 서 있었어요. 담배도 피웠고요.] [언니, 나는 언니와 오빠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요. 하지만 언니, 오빠한테 다시 기회를 주면 안 돼요?][언니와 오빠가 이렇게 지내는 걸 보면 마음이 아파요. 난 평생 혼자 살아도 괜찮으니 그냥 언니 오빠가 행복하게 살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그 메시지를 보고 나는 웃음을 지었고 동시에 진소영이 소지훈에 대한 짝사랑을 떠올렸다.나는 또 한 번 메시지를 보냈다. [소지훈이 너한테 연락했어?][아니요!]진소영은 눈물 나는 이모티콘을 덧붙
나는 숨이 잠시 멈췄고 그의 눈빛과 마주쳤고 그는 나를 바라보며 조금도 피하지 않았다.그는 언제나 정직하고 대범하게 대했지만 나는 항상 마음이 불안했다. 마치 헤어진 게 딱 내 잘못인 것처럼 말이다.“호랑이도 자기 말하면 온다더니... 정우 씨, 방금 윤 부장님과 정우 씨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어요.”허진호는 능글맞게 말을 이어갔지만 진정우는 그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네.”“정우 씨에 대해 뭐라고 했는지 궁금하지 않아요?”허진호는 정말 끝내주는 재치로 우리를 괴롭혔다. 진정우는 아무런 말도 없이 고개를 숙였고 허진호는 코를 문지르면서 다시 말을 이어갔다.“정우 씨가 살이 빠졌다고 말했어요. 그리고 또 뭐라고 했던가...”허진호는 말을 잠시 멈추더니 나에게 눈을 찡긋했다.“윤 부장님, 정우 씨에게 알려주지 말자고요.”“하하.”나는 속으로 찐웃음이 터져 나와서 입꼬리가 조금 올라갔고 진정우가 딱 그 순간 나를 바라봤지만 나는 시선을 돌렸다.그가 나를 원하지 않았기에 나도 진정우 없이 잘 살 수 있는 모습을 증명하고 싶었다.점심때, 나는 항상 전화를 걸지 말지 고민했던 함소은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는 그녀가 용진표랑 함께 있어서 불편할까 봐 전화하지 않았다.“어떻게 됐어요? 괜찮아요?”전화를 받자마자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오늘은 잘 피했어요.”함소은이 가볍게 말했다.그녀가 어떻게 피했는지 묻지 않았다. 이 여자는 용진표의 곁에서 몇 년이나 보내면서도 여전히 복수를 품고 살아왔다. 그리고 그에게 아이까지 낳은 여인이라면 그만큼 능수능란한 사람이기 때문이다.처음 그녀를 봤을 때 나는 그녀가 단지 외모를 과시하는 여인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했던 내 자신이 정말 부끄러웠다.“그럼 다른 이유로 저한테 전화한 거예요?”“지원 씨가 찾으라고 한 사람을 찾았어요. 그래서 직접 만나보고 싶은지 물어보려고 전화했어요.”나는 예상보다 일이 빨리 진행되고 있다는 말에 조금 놀랐고 이내 흥분해서 대답했다.“가능하다면 직접 만나고 싶어요
“쫓아갈 거야?”나는 쫓아가서 꼭 물어보고 싶었다.하지만 쓰레기통에 버려진 도시락을 보니 더 이상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다.그가 버린 것은 도시락도 음식도 아닌 나에 대한 마음이었다.그렇다면 내가 쫓아가서 물어본다고 해도 결국 스스로 굴욕을 찾는 일이었다.나는 마음을 되돌리고 도시락을 다시 내려놓고 내 병상으로 돌아갔으나 이제는 젓가락을 다시 들고 음식을 먹을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무거웠다.도시락을 주운 사람은 그 변화를 눈치챘는지 조심스럽게 도시락을 다시 내 앞에 놓았다.“가져가세요.”“아, 아니에요...”그 사람은 손을 움켜잡으며 물러섰다.“당신이 주운 거니까 그냥 가져가세요. 게다가 시름 놓고 드시면 돼요. 맛은 있을 거예요.”나는 한숨을 쉬며 음식을 다시 집어 들었다. 분명히 화가 나 있었지만 그런데도 다시 먹기 시작했다.강유형은 옆에서 음식을 먹으려는 내 손을 살짝 눌렀다.“내 음식한테 화내지 마.”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진정우는 아마 내가 여기에 있는 걸 보고 떠난 거 같아.”그 말에 나는 잠시 멈췄다. 방금 강유형이 내 입술 옆을 닦아준 걸 생각하니 마음이아팠다.‘아, 이거 정말... 오해는 점점 더 깊어만 지는구나.’내가 잠시 멍하니 있을 때 강유형은 내가 먹던 음식을 쥐고 아무 말 없이 그것을 치웠다. 그리고 도시락을 손에 쥐고 나가려 했다.그가 어디로 가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그런데 그때 아줌마에게서 전화가 왔다.“지원아, 유형이 너한테 음식을 가져왔을 때 별문제 없었지?”나는 순간적으로 멍해졌다.“아, 아줌마, 무슨 일이에요?”“유형의 입가에 상처가 있더라고. 싸운 거 같아서...”아줌마의 말에 나는 깜짝 놀랐고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설마 강유형이 나가서 진정우랑 싸운 거 아니야?’하지만 난 결국에 이 말을 내뱉지 않았고 아줌마는 또 몇 마디 했고 마지막으로 만두랑 음식이 맛이 어떤지 물었다.전화가 끊기자 나는 병원을 떠났다.다음 날 나는 회사에 갔고 마침 약속이
“잠깐만.”내 말을 들은 강유형은 재빠르게 일어섰다.지금의 그는 내게 무언가를 부탁할 때마다 언제든지 응해주고 내가 부탁하지 않아도 먼저 다가오는 그런 사람으로 변해버렸다.만약 예전에도 이렇게 했다면 아마 난 강유형과 그렇게 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세상에 만일이라는 건 없었고 나는 이미 지나간 일에 대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그를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며 우연히 그의 휴대폰을 봤다. 화면이 멈춰 있었는데 그 영상 속에는 아마 3년 전의 내 모습이었다.나는 그때 내가 뭘 했는지 왜 그런 영상을 찍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휴대폰을 빼앗아 보고 싶었지만 또 그럴 수는 없어서 고민하던 그 순간 강유형이 물을 가지고 돌아왔다.그는 내가 휴대폰을 보고 있다는 걸 알았고 얼굴에 당황한 기색 없이 자연스럽게 웃으며 말했다.“네가 잠드는 동안 예전 사진과 영상을 좀 봤는데 지금 넌 예전보다 훨씬 더 예뻐졌더라.”나는 물을 마시며 그가 한 말에 이어서 대답했다.“그러면 예전엔 내가 안 예뻤다는 거네? 그래서 네가...”“그만해.”그가 내 말을 끊었다.“그 사람은 더 이상 언급하지 마.”물 몇 모금 마시자 나는 목이 좀 편해졌다.“조나연 그 일은 이제 다 정리한 거야?”나는 젓가락으로 목이버섯을 집어 입에 넣으면서 물었고 그 상큼하고 새콤한 맛에 기분이 좋아졌다.강유형은 휴대폰을 다시 들고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그저 그 화면을 보고 있었고 나도 그저 맛있는 음식을 즐기고 있었다.좀 더 먹으려던 찰나 강유형이 입을 열었다.“완전히 깨끗하게 끝냈어.”그 말에 나는 조금 더 생각했다. 그때 그 여자가 남긴 독한 말들을 떠올리며 이 일은 그렇게 간단히 끝날 일이 아닐 거라는 걸 알았다. 그러나 강유형이 이렇게 말하니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고 다시 음식을 먹을 준비를 했다.“알겠어.”“잠시만.”그때 강유형이 나를 막아 나서면서 손으로 내 입술 옆에 묻은 기름을 닦아 주었다.“기름이 묻어서.”나는 입술
강유형은 결국 강진혁의 불편한 기색을 눈치챘다.나는 물을 한 모금 마시며 대답했다.“그건 직접 물어봐야 할 거야. 그리고... 나는 지금 아무에게도 마음이 없어.”그러자 강유형은 무표정하게 말했다.“너무 자주 말하지 않아도 돼.”“사실을 말한 것뿐이야.”나는 말을 마친 후 기침을 두 번 했고 그러자 강유형은 내 등을 두드려 주었다.“진정우는 네가 사고를 당한 걸 몰랐어?”강진혁의 말은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컵 안에 있는 뜨거운 물의 온기가 몸의 차가움을 녹여주었지만 마음속의 차가운 느낌은 사라지지 않았다.“왔었어. 그리고 다시 갔어.”강유형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고 나는 물컵을 그에게 건네며 말했다.“나 좀 자고 싶어.”내가 눕자 강유형은 그 자리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나는 열이 나서 눈꺼풀이 무겁고 잠에 빠져들기 직전에 강유형의 목소리가 들렸다.“나와 헤어질 때는 네가 이렇게 아프지 않았던 것 같은데.”‘뭐라고 하는 거야?’사실 맞는 말이었다. 강유형과 헤어질 때 지금처럼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은 없었다.“아마 너는 천천히 칼날로 내 마음을 줄곧 찔렀기 때문에 난 아픔에 익숙해졌겠지.”내가 목소리를 낮춰 말하며 뒤로 돌아누웠고 결국 깊은 잠에 빠졌다.나는 밥 냄새에 잠이 깼다. 눈을 떴을 때 강유형이 침대 옆 의자에 앉아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본 내용에 몰입한 듯 내가 깬 줄도 모르고 있었다.하지만 나는 정말 배가 고팠다. 침대 옆 식탁에 놓인 음식을 보며 일어나 보려고 했지만 몸의 상처가 아파서 움직이지 못하고 냉큼 숨을 쉬었다.강유형은 그 소리를 듣고 급히 휴대폰을 내려놓고 다가와 나를 부축했다.“깨어났어? 나한테 말하지.”“배가 고파.”나는 불필요한 말을 하지 않고 간단히 말했고 그는 웃으며 말했다.“알겠어. 네가 배고플 줄 알았어. 예전처럼 감기나 열이 나면 깨자마자 먹는 게 첫 번째잖아.”듣고 보니 난 확실히 그랬었다. 다른 사람들은 병에 걸리면 입맛이 없다고 하지만 나는 배가 고팠다.
옆에 있던 강진혁은 눈빛이 어두워졌다. 방금 그가 내가 머리를 만져준다고 했을 때 난 바로 피했고 강유형이 나를 만졌을 땐 나는 거부하지 않았기에 그는 불편함을 느꼈을 것이다. 나라고 해도 그 상황이면 서운했을 것이다.하지만 우리가 그동안 얘기를 나누었고 강진혁은 별다른 표정을 지어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내가 그를 볼 때 그는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농담을 던졌다.“넌 아직도 강유형의 친밀한 행동에 익숙한 거 같아.”“......”“그건 당연한 소리지. 지원이는 거의 내 아내가 될 뻔했으니까.”“......”“맞아. 거의였지.”강유형은 강진혁을 바라보며 미소를 띠었고 그의 얼굴에는 장난기 어린 표정이 가득했다.“아무래도 이마가 좀 뜨거운 것 같아.”강유형은 말을 끝내며 지나가는 간호사를 불렀다.“체온계 좀 줘봐요.”“괜찮아. 아마도...”내가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강유형이 끊었다.“괜찮은 건지는 그건 네가 스스로 판단할 일이 아니야.”강유형의 말에 간호사는 바로 체온계를 가져와 내 이마에 대었다.“37.7도입니다.”그러자 강유형은 간호사에게 말했다.“의사에게 상황을 좀 전해주세요. 그리고 혈액 검사 결과가 나왔나요? 감염인지 아니면 그냥 물에 젖어서 감기가 온 건지 확인해 주세요.”강유형은 정말 전문가처럼 말을 이어갔다.‘모르는 사람이 보면 의사인 줄 알겠네.’간호사는 대답하고는 떠났고 강진혁은 나에게 따뜻한 물을 부어줬다.“따뜻한 물이라도 마셔. 아마 그냥 몸이 얼어서 그런 거 같아.”두 형제가 이렇게 나를 챙겨주는 모습이 정말 감동적이지만 그만큼 부담도 컸다.나는 그들이 그만 가줬으면 하는 마음이었지만 강유형은 이미 먼저 말했다.“형, 아니면 먼저 돌아가. 내일 선보러 간다고 했잖아? 너무 늦게까지 있으면 피부에 안 좋아.”“오빠, 선보는 거예요? 방금 왜 말을 안 했어요?”나는 조금 놀랐고 강진혁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말할 새도 없이 강유형이 와서 방해했으니까.”이 말의 의미는 강유형이 우리 둘 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