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이 열리자 안에서 요란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방 한가운데 앉아 있던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그 남자... 낯이 익었다.신지태가 먼저 소개했다."같이 당구치는 준호야."나는 그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다가 이름이 떠올랐다. 용준호, 바로 용진표의 아들이자 현재 용진 그룹의 대표였다.한 번 그의 정보를 찾아본 적이 있었다. 그는 스누커를 좋아해 아마추어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한 이력이 있다. 하지만 신지태와 이런 친분이 있을 줄은, 게다가 이렇게 가까운 사이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이분이 그 유명한 지원 씨?" 용준호가 웃으며 말했다.그의 부드러운 말투와 친근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나는 등을 타고 흐르는 차가운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그의 기사가 아무리 깨끗하다 해도, 그의 아버지가 했던 일을 생각하면 그 역시 완전히 결백할 수만은 없을 것 같았다.이래서 사람은 겉모습만으로 판단할 수 없는 법이다."지원아, 앞으로 준호 오빠라고 부르면 돼. 혹시 어려운 일 있으면 말하고."신지태가 내 옆에 있는 의자를 빼주며 말했다.나는 의자에 앉으려 했지만 용준호가 갑자기 나섰다."지태야, 네가 이쪽으로 앉고 지원 씨를 우리 사이에 앉히자. 그래야 좀 더 친해질 수 있지 않겠어?"그 말에 순간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는 낯선 사람에게 쉽게 마음을 열지 않는 편이었다. 하물며 그 상대가 용준호라면 더더욱 그랬다.나는 자연스레 신지태를 바라봤다. 그는 고개를 들지도 않고 내 앞에 식기를 정성스럽게 세팅하며 말했다."이 자리에서도 충분히 얘기할 수 있어."그의 말에 안도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역시 지태 오빠, 나를 곤란하게 만들지 않네.이때 용준호는 웃으며 말했다."지태야, 네가 이렇게 누군가를 챙기는 건 처음 보네."신지태는 내 앞에 정돈한 식기를 내려놓으며 단호하게 말했다."지원이는 내 동생이야. 보통 사람과는 다르지."그의 말에는 분명한 경고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나는 그 말에 살짝 감동했다.신지태가 그렇게까지 말하자 용준호도 알아들
용준호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어딘가 의미심장한 기색이 섞여 있었다.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나는 굳이 신경 쓰지 않았다.“혹시 부담스러우시면 그냥 없던 걸로 하죠.”나는 담담히 말을 꺼냈다.“허허.”그는 건조하게 웃음을 터뜨렸다.“그게 뭐가 어려운 일이라고? 부탁이 한 가지라니, 나를 달라고 해도 흔쾌히 드릴 텐데.”그의 지나친 농담에 어색한 기운이 돌았다.그러자 옆에 있던 신지태가 가볍게 기침을 두 번 하며 분위기를 정리했다.“하하!”용준호는 일부러 더 큰 소리로 웃으며 내게 손짓했다.“그럼, 지원 씨 먼저 시작해.”그와 주고받는 말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괜히 시간을 끌고 싶지도 않았다.“그럼 시작할게요.”나는 큐를 들고 빠르게 샷을 날렸다. 상대에게 기회를 주지 않고 깔끔하게 공을 모두 처리했다.용준호는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박수를 치며 말했다.“역시 지태가 아끼는 동생답네. 실력이 대단한걸?”그는 공을 다시 세팅하면서 말했다.“이건 인정. 하지만 나도 오빠답게 한 번 멋지게 보여줘야지.”그리고는 능숙하게 공을 쳐 나갔다. 역시나 그는 스누커 대회 우승자답게 모든 공을 빠르게 처리하며 한 번의 실수도 하지 않았다.나는 박수를 치며 말했다.“역시 대표님이 더 뛰어나시네요.”그는 미소를 지으며 내게 물었다.“그런데 규칙대로라면 내가 졌네. 이제 말해봐. 원하는 게 뭐야?”나는 한숨을 고르고 천천히 말했다.“용진표 회장님을 한 번 만나 뵙고 싶어요.”용준호는 내가 왜 그런 부탁을 하는지 궁금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나는 바로 이유를 덧붙였다.“제가 가진 물건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확인받고 싶어서요.”그제야 그의 얼굴에 살짝 긴장이 풀렸다.“무슨 보물 같은 건가?”“아니요. 그런 건 아니에요.”나는 단호히 부인했지만 자세한 설명은 덧붙이지 않았다.그도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대신 잠시 생각에 잠긴 후 말했다.“좋아. 데리고 갈 수
“아니요, 용 대표님이 더 뛰어나신 거죠. 보시다시피 저는 그냥 취미로 하는 수준이에요.”나는 겸손하게 말했다.“취미로 하는 것도 누군가의 가르침이 있었을 텐데 네 스타일은 지태한테 배운 건 아닌 것 같은데? 누가 가르쳐줬어?”용준호가 뜬금없이 물었다.내 스누커 실력은 사실 강유형과 놀면서 자연스럽게 익힌 것이다. 그가 정식으로 가르쳐준 적은 없었다.그가 공을 칠 때 옆에서 보다가, 나중에 심심할 때 혼자 따라 하곤 했다.그러다 어느 날 내가 꽤 잘 치는 걸 알게 된 강유형이 종종 나를 불러 함께 게임을 하자고 했다.“야, 준호야. 언제부터 이렇게 쓸데없는 거나 캐물었냐? 당구 치러 온 거 아니야? 말이 왜 이렇게 많아?”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뒤돌아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강유형이었다.오늘따라 정말 복잡한 하루다 싶었다.강유형이 내 옆으로 다가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존재만으로도 용준호는 상황을 파악한 듯했다.“하, 어쩐지. 당구 치는 스타일이 너랑 비슷하다 했더니만...”용준호가 말을 멈추고 나와 강유형을 번갈아 보았다.그러고는 무슨 깨달음을 얻은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지원이가 설마 네 어릴 적 약혼녀라는 그 사람 아니야?”그 말은 나에게도 오랜만에 듣는 단어였다.어렸을 때 내가 강유형과 약혼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학교 친구들은 나를 그의 '어린 신부'라며 놀리곤 했다.그러나 그런 말을 하던 친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전학을 갔고 그 후로는 아무도 그런 얘기를 하지 않았다.“그만 떠들고 당구나 치자. 오늘은 내가 같이 놀아줄게.”강유형은 그렇게 말하며 외투를 벗어 내게 던졌다.모든 행동이 마치 예전으로 돌아간 것처럼 자연스러웠다.그의 행동이 너무 빨라서 나는 그가 외투를 던지기 전에 거절할 틈도 없었다.하지만 나는 예전처럼 그의 옷을 들고 마치 하녀처럼 서 있지는 않을 생각이었다.나는 곧장 신지태 쪽으로 걸어가 그의 옆에 옷을 내려놓고 그를 밖으로 불러냈다.문밖으로 나가자마자 신지태가 먼저
“네?”진정우의 눈에 당혹스러움이 비쳤다.나는 그의 앞으로 한 걸음 더 다가갔다. 정말 가까운 거리였다.그가 샤워 후 풍기는 비누 향기가 은은히 퍼졌다. 기분 좋은 향이었다.옛날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 우리 집에서는 항상 비누를 사용했다. 손을 씻거나 목욕할 때도 비누를 썼다.요즘은 대부분 손 세정제나 샤워젤을 쓰니, 비누 향기를 맡을 일이 거의 없다.“혹시 정체를 숨기고 있는 거 아니에요?”나는 조심스럽게 떠보았다. 진정우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술을 얼마나 마셨길래, 시력이 나빠졌나요?”나는 한 잔밖에 마시지 않았지만 그가 벌써 알아차린 모양이었다.그의 말에 웃음이 터져 나는 그의 셔츠를 가볍게 잡아당기며 말했다.“정우 씨, 모른 척하지 마세요. 혹시 엄청 부자인데 일부러 숨기고 있는 거 아니에요? 아니면 회사를 뒤에서 조종하는 최종 보스 뭐 그런...”그는 턱을 굳게 다물며 말했다.“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요.”그러면서 그는 몸을 살짝 뒤로 하며 거리를 두려고 했다.“진짜 모르는 건가요?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건가요? 아니면 연기 중인가요?”나는 다시 한 걸음 다가가며 그를 약간 몰아붙였다.우리는 서로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어둡고 희미한 계단 조명 아래에서 서로의 시선이 얽히고 팽팽히 맞섰다.그러다 문득 진소영이 머물렀던 작은 집과 그녀의 병약했던 모습이 떠올랐다.처음 만났던 진정우의 모습도 함께 스쳐 갔다. 결국 내가 먼저 시선을 거두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그렇게 가난한 걸 보면, 아닐 것 같네요.”나는 그렇게 말하며 그의 셔츠를 놓고 뒤돌아 방으로 들어가려 했다. 하지만 진정우가 내 앞을 막아섰다.“운전했어요?”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대리 불렀어요.”그리고 장난스럽게 덧붙였다.“저 제 목숨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에요. 그리고 사회에도 피해 주기 싫고요.”그의 눈빛이 조금 누그러지더니 손을 들어 내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잘했네요.”그의 행동은 마치 아이를 달래는 듯했다.
나는 계약서를 떠올리며 조심스럽게 말했다.“정우 씨 아버지의 죽음은 제 아버지가 연루된 사건 때문일 가능성이 커요. 그래서 이건 제가 직접 조사해야 진실을 알 수 있어요.”진정우는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물었다.“혹시 무슨 단서라도 찾았어요?”나는 그의 시선을 마주하며 되물었다.“그럼 정우 씨는요? 왜 용진표를 찾으려는 거예요? 대체 어떤 이유로 그를 의심하는 건가요?”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그의 넓고 듬직한 뒷모습은 마치 무슨 일이 생겨도 다 막아줄 것 같은 믿음을 주었다.나는 그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다가 컵을 내려놓고 그에게 다가갔다.“정우 씨, 당신도 이 사건에 대해 뭔가 알고 있죠? 위험한 일이라는 것도 알고 그래서 저를 끌어들이고 싶지 않은 마음도 알겠어요. 하지만 이건 제 부모님과 관련된 일이에요. 제가 이걸 외면하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잖아요.”나는 창밖의 달빛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저 그렇게 어리석지 않아요. 저 자신을 지킬 수 있어요. 그리고... 정우 씨가 제 곁에 있잖아요.”그는 옆으로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복잡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잠시 후,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어릴 때의 고집이 여전하네요.”그 말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번졌다.나는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제 정체를 이미 알고 있었죠? 그리고 저를 가까이한 것도 사실은 아버지 사건을 조사하려던 이유 때문 아니었나요?”그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고 말을 멈추더니 천천히 대답했다.“그렇게 생각하시는 거예요?”“네.”그는 고개를 약간 숙이며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약간의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그럼 제 매력은 그렇게 가치가 없는 건가요?”나는 그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해 눈을 깜빡이며 되물었다.“네?”그는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참... 너무 무심하시네요.”그 말만 남긴 채 그는 창가를 떠나 방으로 들어갔다.문을 닫기 직전, 그는 고개를 돌리지도 않은 채 말했다.“
'이 사람이 나를 친구 추가하다니, 그것도 한밤중에...'여자의 직감은 참 정확하다. 이건 분명히 이상했다.신지태가 “내 체면을 봐서 용준호가 함부로 하진 않을 거야”라고 말했지만 그래도 나는 조심해야 했다.게다가 여자가 이렇게 늦은 시간에 아무렇지도 않게 남자의 친구 추가 요청을 받아들이는 건 가벼워 보일 수 있었다.나는 그냥 못 본 척하며 안리영과의 대화를 이어갔다.“그 선배가 성공한 그 수술도 그 여자 동료랑 같이한 거더라.”안리영의 목소리에 묘한 쓸쓸함이 묻어났다.나는 연애를 해본 사람이라서 안다. 사랑에서 '같이 발맞춰갈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를.물론 지금의 안리영도 매우 훌륭한 사람이지만 국제적인 명성을 가진 선배와 비교하면 여전히 어느 정도의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운명은 참 공평하지 않다'라는 말이 실감 났다.나는 이 주제를 더 깊게 들어가지 않기로 하고 다른 이야기들로 대화를 돌렸다. 그러다 전화를 끊고 다시 용준호의 친구 추가 요청을 생각했다.이 사람, 뭔가 위험하다. 그런 기운이 느껴졌다.하지만 아버지의 죽음에 얽힌 진실을 찾기 위해서는 그 속으로 들어가야 했다.나는 심호흡을 하고 휴대폰 화면을 닫으려는 찰나, 또 다른 메시지가 왔다. 이번엔 강유형이었다.[용준호 멀리 해!]그 어투는 마치 진정우가 했던 말과 똑같았다.그가 나를 걱정해 주는 건 알지만 이제 그의 걱정은 더 이상 내게 큰 의미가 없었다.나는 그의 메시지를 무시하고 휴대폰을 잠그고 잠에 들었다.다음 날 아침어젯밤 먹은 소주 한 잔이 생각보다 후폭풍이 강했다. 진정우가 타준 꿀물도 효과가 없었는지, 피곤함에 샤워도 하지 않은 채 뻗었었다.그런데도 아침에는 꽤 일찍 깨어났다. 가볍게 요가하고 커피 한 잔을 마시면서 그제야 용준호의 친구 요청을 수락했다.이 시간엔 아직 그가 깨어있지 않을 테니 바로 메시지가 오지는 않을 것 같았다.회사에 도착했을 때, 허진호는 이미 자리에 있었다. 그는 나를 보며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
허진호의 말에 바로 진정우의 모습이 떠올랐다.그리고 어제 신지태가 말했던 허진호에게 거액을 투자한 성이 진 씨인 그 남자가 마침 생각났다.나는 허진호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대표님이 말씀하신 강한 남자,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이에요? 아니면 그런 친구가 있으세요?”허진호는 갑작스러운 질문에 가볍게 헛기침했다.“그게... 뭐랄까, 말로 설명하기는 좀 애매한데 그러니까... 좀 더 단단하고 남자답고 반듯하고...”그는 말하며 식당 벽에 걸린 화면을 가리켰다. 화면에는 뉴스가 나오고 있었고 국기 게양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군복을 입고 우뚝 선 병사들의 모습. 활기차고 반듯한 자세가 딱 ‘강한 남자’를 상징하는 듯했다.그 모습을 보자 진정우의 얼굴이 또렷이 떠올랐다. 그리고 허진호의 말투에서 뭔가 숨겨진 의도가 느껴졌다.‘성이 진 ]씨? 강한 남자? 군인 출신?’이 모든 단어가 진정우와 정확히 들어맞았다.나는 허진호를 살펴보며 느닷없이 물었다.“혹시 그 친구 이름이 진정우인가요?”“네? 뭐라고요?”허진호는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그가 못 들은 척하는 건지, 아니면 정말 몰라서 그러는 건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대표님 친구 중에 진정우라는 분이 있나요?”나는 한 번 더 물었다.“진정우?”그는 고개를 젓더니 능청스럽게 웃었다.“그런 사람 없어요. 그게 누군데요?”하지만 그의 눈빛은 나를 피하려고 애쓰는 듯한 느낌이 강했다. 나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런 사람이 있다면 정말 강한 남자일 텐데요.”“하하.”그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그런가요? 그런데 현실에도 그런 사람이 있긴 있나요? 그 사람하고는 어떤 관계세요? 친하세요?”나는 그의 표정에서 엿보이는 약간의 호기심을 읽고 장난스럽게 대꾸했다.“제 친구에 대해 꽤 관심 있으신가 봐요. 그럼 한 번 소개해 드릴까요?”“정말요? 하지만... 괜찮을까요?”허진호는 마지못해 받아들이는 듯한 태도로 대답했다.“괜찮지 않나요?”나는 일부러
나는 허진호에게 일부러 난처한 질문을 던졌다.그의 대답을 통해 숨겨진 ‘대표님’의 정체를 알아내고 싶었다.물론 진정우가 그 대표님일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너무 가난해 보였고 부유한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다.하지만 모든 정보가 자꾸만 그를 떠올리게 했다.오후에 별다른 일이 없었다. 회의를 마치고 휴대폰을 열어보니 새로 추가된 친구 목록에 용준호의 이름이 있었다.메시지 창에는 단순히 "친구가 되었습니다"라는 알림만 떠 있었고 그 외의 연락은 없었다.용준호는 내가 친구 요청을 수락한 것을 알았을 텐데 일부러 무시한 듯했다.아마 어젯밤 내가 그의 요청을 바로 받아들이지 않은 것에 대한 무언의 응수였을 것이다.그는 쉽게 건드릴 사람이 아니었다. 사소한 일도 기억하며 되갚아주는 성격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이래서 진정우와 강유형이 그와 거리를 두라고 경고했는지도 모르겠다.하지만 이미 얽힌 상황에서 모르는 척할 수는 없었다.그가 먼저 다음 수를 두기 전까지 나는 침착하게 기다리는 게 최선이었다.저녁 5시쯤, 나는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왔다.동네 주민들은 아직 저녁 준비를 하지 않은 채 삼삼오오 모여 아이들과 놀거나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어머, 지원아! 퇴근했네?”1층에 있다 유씨 아줌마가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네. 그런데 아직 집에 안 들어가세요?”나는 가볍게 물으며 미소를 지었다.이런 별것 아닌 대화가 사람 사이를 더 친밀하게 만들어 준다고 생각했다.“장 봐오긴 했는데 아직 요리는 못했어. 하, 난 너처럼 복도 없어서 요리 잘하는 남자 친구가 없네.”그녀는 고개를 들어 위층을 가리켰다.진정우가 이미 집에 와 있었다.나는 곧장 위층으로 올라가 그의 집 문을 두드렸다.안에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가 참으로 낮고 따뜻했다.“문 열려 있어요.”문을 살짝 열자마자 맛있는 요리 냄새가 코를 찔렀다.아침에 대충 먹었기에 지금 너무 배가 고팠다. 부엌의 후드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나는 문가에 서서 말했다.“너무 맛있는 냄새가 나서
내 말에 용진표는 미소를 지었다.“똑똑한 여자네. 다음 생에선 좋은 집안에 태어나기를...”그는 말을 끝내자마자 일어섰고 나는 몸이 갑자기 앞으로 기울며 그가 신발을 신고 있는 곳으로 거의 쓰러질 뻔했다.용진표의 경호원이 바로 다가와 나를 붙잡으려 했지만 그는 이를 막았고 대신 나를 매섭게 쳐다보며 말했다.“이제 사실을 다 알았으니 뭘 더 하고 싶어? 내가 널 풀어줄까?”나는 그가 날 풀어주길 원했고 나는 아직 죽을 수 없었다. 이렇게 죽으면 너무 억울할 것 같았다.“대표님이 말한 내용이 믿기지 않아요. 내가 원하는 건 대표님이랑 저랑 삼촌과 셋이서 마주하게 해주세요. 아니면 삼촌에게 전화라도 해서 제가 듣고 싶은 말을 하게 해주세요”이 말은 진심이었고 또한 나는 사실 시간을 끌고 싶었다. 시간을 끌어서 누군가가 나를 구하러 오게 하고 싶었다.하지만 누가 나를 구하러 올까?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용진표를 계속해서 바라보며 그를 붙잡고 있었다.하지만 이번에는 그가 나를 무시하고 경호원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 순간 나는 끌려 나갔다.용진표가 떠난 뒤 나는 다시 손발이 묶인 채로 갇혔고 그의 말이 계속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내가 그동안 삼촌과 아줌마한테 받은 친절이 정말 진심이 아니었던 걸까? 그들이 나를 잘 대해준 이유는 부모님에 대한 죄책감 때문일 뿐이었을까? 아니면 그저 내가 강유형을 살릴 수 있는 피가 있어서?’나는 그렇게 믿고 싶지 않았다. 그들은 내게 십 년 동안 변함없이 잘해줬고 그게 가짜라고 생각하기엔 너무 긴 시간이었다.그러니 아마 용진표가 나를 속이고 있을지도 몰랐다.‘그런데 왜 나를 속여야 하는 걸까? 내가 삼촌과 아줌마를 미워하도록 만들기 위해서?’하지만 용진표는 지금 날 죽이겠다고 했으니 내가 그들을 아무리 미워한다고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그렇게 나는 앉아서 고민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밖의 빛이 점점 어두워지는 게 느껴졌다. 심지어 나를 지키는 사람도 없어진 것 같았다.‘용진표가 나를 굶겨 죽일
몸을 앞으로 기울여 내 얼굴을 응시하던 용진표는 미소를 지었다.그가 왜 웃는지 알 수 없었지만 나는 그를 계속해서 쳐다봤다. 마치 그가 나한테 대답하지 않으면 절대로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이 말이다.그가 웃음을 멈추고 나서 말했다.“그러면 너한테 사실을 제대로 알려 주고 죽일게. 왜냐하면 네 부모님이 다른 사람의 돈길을 막았으니까.”그 말에 나는 바로 그와 계약하려던 그 계약서를 떠올렸다.“다른 사람의 돈길을 막았다고요? 그게 왜 제 부모님과 상관이 있나요?”나는 다시 의문을 제기했고 용진표는 웃으며 말했다.“아가씨,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어떻게 돈을 벌었는지 잊었어?”그 말에 나는 깨달았다. 그도 다른 사람한테서 돈을 받았다는 뜻이었다.“그 사람이 누구죠?”나는 급히 물었지만 용진표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나에게 되물었다.“네 생각에는 누구일 것 같아?”내 부모님의 죽음은 결국 그 계약 때문이었고 그 계약은 결국 삼촌에게 넘어갔으니... 바로 그 사람일 것이다.전에도 한 번 의심은 했었지만 용진표는 그 의심을 지워버렸고 심지어 삼촌이 그 계약으로 번 돈을 나에게 따로 저금해 두었다고까지 했다.지금 그가 이렇게 암시하자 나는 정말 혼란스러웠다.“용 대표님, 나이가 드셔서 기억이 잘 안 나세요? 예전에 대표님은 저에게...“내 말투는 점점 자신감이 없어 보였고 그는 줄곧 웃고 있었다. 용진표가 방금 말한 것처럼 그는 다른 사람의 돈을 가지고 대신 일을 처리해 준다고 했으니 그의 말이 전부 사실일 수는 없었다.나는 그런 생각을 하기도 싫었지만 용진표가 계속해서 그런 걸 암시하니 믿을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지금 여기 있는 것도 남의 돈 받고 일을 하시는 거 맞죠?”내가 다시 묻자 용진표는 가볍게 웃었다.“내 생각이 맞았어. 네가 이렇게 똑똑한데...”그의 말에 나는 혼란스러워졌고 몸을 살짝 흔들며 대답했다. “믿을 수 없어요. 대표님이 저를 속이고 있는 거겠죠.”“내가 너를 부모님에게 보내 주려고 하는데 왜 굳이 널 속이겠어
나는 그녀를 보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그녀가 점점 흐려지기 시작했다. 나는 머리를 흔들며 무언가 말하려고 했지만 그때 함소은이 말했다. “용진표의 아내가 꿈을 꾼 게 아니라 용진표가 지원 씨를 만나고 싶다고 했죠.”“뭐라고요?”내가 말을 끝내기 전에 갑자기 나는 함소은이 완전히 보이지 않았다. 그 뒤로 나는 몸이 뜨는 느낌이 들었고 귀에 함소은의 목소리가 들렸다.“잠깐만 자고 있어요.”나는 왜 자야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입을 열지 못했다. 내 몸이 들어 올려지는 걸 느꼈지만 나는 눈은 뜨지 못했고 말도 할 수 없었다.어디론가 데려가졌고 그곳에서 물을 먹은 후 나는 눈을 떴다.눈에 들어온 것은 낯선 큰 남자였고 그가 바로 용진표의 경호원이었다.의식이 흐릿해지기 전에 함소은이 말한 내용을 떠올렸고 나는 이제 모든 걸 알았다. 나는 몸을 조금 움직이며 그에게 물었다.“용진표는 어디 있어?”그 사람은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돌아서서 나갔다.나는 손과 발이 묶여 움직일 수 없었고 눈앞에 보이는 곳은 폐차장이었고 주변에 낡은 타이어들이 쌓여 있었다.그 모든 상황을 파악한 나는 용진표가 나를 잡아둔 이유를 곰곰이 생각했다.그는 아마 내가 그가 한 일을 알게 되는 걸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게다가 내 몸까지 묶었으니 나한테 별로 좋은 일이 벌어질 것 같지 않았다.막심한 공포가 밀려왔지만 나는 스스로를 진정시키려고 애썼다.밖에는 용진표의 경호원이 서 있었고 내가 물을 마시고 깨어났으니 이제 아마 용진표가 올 것 같았다.얼마 지나지 않아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렸고 경호원이 형님이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갇혀 있는 문이 열리자 용진표가 들어왔다. 그는 오늘 마치 무술 도복 같은 흰색 옷을 입고 있었다.“아가씨, 또 만났네.”용진표가 웃으며 말하자 나는 겁먹지 않고 대답했다.“용 대표님, 이런 식으로 만나는 건 영 마음에 들지 않아요.”“마음에 들지 않으면 왜 날 자꾸 자극한 거야?”그가 내 앞에 서자 경호원은 의자
“진정우 씨.” 나는 평범한 동료처럼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인사를 했지만 진정우는 아무 말 없이 나를 쳐다보았고 우리는 그냥 스쳐 지나갔다.하지만 그 순간 내 얼굴에 있는 미소가 조금 씁쓸하게 느껴졌다. 나는 회사 차를 몰고 함소은이 말한 곳으로 갔다.내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 함소은은 아직 오지 않았다. 나는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냈고 그녀는 먼저 자리를 찾아 앉아 기다리라고 했다. 그녀를 기다리면서 나는 다시 휴대폰을 열었고 그때 진소영이 보낸 메시지를 받았다.스크롤을 위로 올려보니 진소영이 보낸 메시지는 거의 다 자책과 내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진정우를 변호하는 내용도 있었지만 나는 딱 한 번만 답을 보냈고 그 후에는 다시 답하지 않았다.[언니, 보면 답장해 줘. 오빠가 나를 방에 가두고 나가지 못하게 해요.]진소영의 메시지를 보고 한참 생각한 후에야 나는 그녀에게 답을 보냈다.[소영아, 나는 괜찮고 이젠 정상적으로 출근하고 있어. 그리고 나랑 네 오빠 사이에 대해선 더 이상 얘기하지 않아도 돼.]그러자 그녀는 바로 답을 보냈다. [언니, 오빠는 언니를 정말 사랑해요. 정말이에요. 맹세해요.]나는 답하지 않았고 그때 다시 메시지가 왔다.[오빠가 언니에게 죽을 끓여줄 때 정신이 없어서 팔까지 데었어요.]그 메시지를 보자 나는 그가 버린 죽을 떠올리며 여전히 답하지 않았다. [오빠가 언니한테 죽을 가져가고 돌아와서 잠도 자지 않고 창문 앞에 서 있었어요. 담배도 피웠고요.] [언니, 나는 언니와 오빠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요. 하지만 언니, 오빠한테 다시 기회를 주면 안 돼요?][언니와 오빠가 이렇게 지내는 걸 보면 마음이 아파요. 난 평생 혼자 살아도 괜찮으니 그냥 언니 오빠가 행복하게 살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그 메시지를 보고 나는 웃음을 지었고 동시에 진소영이 소지훈에 대한 짝사랑을 떠올렸다.나는 또 한 번 메시지를 보냈다. [소지훈이 너한테 연락했어?][아니요!]진소영은 눈물 나는 이모티콘을 덧붙
나는 숨이 잠시 멈췄고 그의 눈빛과 마주쳤고 그는 나를 바라보며 조금도 피하지 않았다.그는 언제나 정직하고 대범하게 대했지만 나는 항상 마음이 불안했다. 마치 헤어진 게 딱 내 잘못인 것처럼 말이다.“호랑이도 자기 말하면 온다더니... 정우 씨, 방금 윤 부장님과 정우 씨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어요.”허진호는 능글맞게 말을 이어갔지만 진정우는 그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네.”“정우 씨에 대해 뭐라고 했는지 궁금하지 않아요?”허진호는 정말 끝내주는 재치로 우리를 괴롭혔다. 진정우는 아무런 말도 없이 고개를 숙였고 허진호는 코를 문지르면서 다시 말을 이어갔다.“정우 씨가 살이 빠졌다고 말했어요. 그리고 또 뭐라고 했던가...”허진호는 말을 잠시 멈추더니 나에게 눈을 찡긋했다.“윤 부장님, 정우 씨에게 알려주지 말자고요.”“하하.”나는 속으로 찐웃음이 터져 나와서 입꼬리가 조금 올라갔고 진정우가 딱 그 순간 나를 바라봤지만 나는 시선을 돌렸다.그가 나를 원하지 않았기에 나도 진정우 없이 잘 살 수 있는 모습을 증명하고 싶었다.점심때, 나는 항상 전화를 걸지 말지 고민했던 함소은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는 그녀가 용진표랑 함께 있어서 불편할까 봐 전화하지 않았다.“어떻게 됐어요? 괜찮아요?”전화를 받자마자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오늘은 잘 피했어요.”함소은이 가볍게 말했다.그녀가 어떻게 피했는지 묻지 않았다. 이 여자는 용진표의 곁에서 몇 년이나 보내면서도 여전히 복수를 품고 살아왔다. 그리고 그에게 아이까지 낳은 여인이라면 그만큼 능수능란한 사람이기 때문이다.처음 그녀를 봤을 때 나는 그녀가 단지 외모를 과시하는 여인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했던 내 자신이 정말 부끄러웠다.“그럼 다른 이유로 저한테 전화한 거예요?”“지원 씨가 찾으라고 한 사람을 찾았어요. 그래서 직접 만나보고 싶은지 물어보려고 전화했어요.”나는 예상보다 일이 빨리 진행되고 있다는 말에 조금 놀랐고 이내 흥분해서 대답했다.“가능하다면 직접 만나고 싶어요
“쫓아갈 거야?”나는 쫓아가서 꼭 물어보고 싶었다.하지만 쓰레기통에 버려진 도시락을 보니 더 이상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다.그가 버린 것은 도시락도 음식도 아닌 나에 대한 마음이었다.그렇다면 내가 쫓아가서 물어본다고 해도 결국 스스로 굴욕을 찾는 일이었다.나는 마음을 되돌리고 도시락을 다시 내려놓고 내 병상으로 돌아갔으나 이제는 젓가락을 다시 들고 음식을 먹을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무거웠다.도시락을 주운 사람은 그 변화를 눈치챘는지 조심스럽게 도시락을 다시 내 앞에 놓았다.“가져가세요.”“아, 아니에요...”그 사람은 손을 움켜잡으며 물러섰다.“당신이 주운 거니까 그냥 가져가세요. 게다가 시름 놓고 드시면 돼요. 맛은 있을 거예요.”나는 한숨을 쉬며 음식을 다시 집어 들었다. 분명히 화가 나 있었지만 그런데도 다시 먹기 시작했다.강유형은 옆에서 음식을 먹으려는 내 손을 살짝 눌렀다.“내 음식한테 화내지 마.”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진정우는 아마 내가 여기에 있는 걸 보고 떠난 거 같아.”그 말에 나는 잠시 멈췄다. 방금 강유형이 내 입술 옆을 닦아준 걸 생각하니 마음이아팠다.‘아, 이거 정말... 오해는 점점 더 깊어만 지는구나.’내가 잠시 멍하니 있을 때 강유형은 내가 먹던 음식을 쥐고 아무 말 없이 그것을 치웠다. 그리고 도시락을 손에 쥐고 나가려 했다.그가 어디로 가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그런데 그때 아줌마에게서 전화가 왔다.“지원아, 유형이 너한테 음식을 가져왔을 때 별문제 없었지?”나는 순간적으로 멍해졌다.“아, 아줌마, 무슨 일이에요?”“유형의 입가에 상처가 있더라고. 싸운 거 같아서...”아줌마의 말에 나는 깜짝 놀랐고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설마 강유형이 나가서 진정우랑 싸운 거 아니야?’하지만 난 결국에 이 말을 내뱉지 않았고 아줌마는 또 몇 마디 했고 마지막으로 만두랑 음식이 맛이 어떤지 물었다.전화가 끊기자 나는 병원을 떠났다.다음 날 나는 회사에 갔고 마침 약속이
“잠깐만.”내 말을 들은 강유형은 재빠르게 일어섰다.지금의 그는 내게 무언가를 부탁할 때마다 언제든지 응해주고 내가 부탁하지 않아도 먼저 다가오는 그런 사람으로 변해버렸다.만약 예전에도 이렇게 했다면 아마 난 강유형과 그렇게 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세상에 만일이라는 건 없었고 나는 이미 지나간 일에 대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그를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며 우연히 그의 휴대폰을 봤다. 화면이 멈춰 있었는데 그 영상 속에는 아마 3년 전의 내 모습이었다.나는 그때 내가 뭘 했는지 왜 그런 영상을 찍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휴대폰을 빼앗아 보고 싶었지만 또 그럴 수는 없어서 고민하던 그 순간 강유형이 물을 가지고 돌아왔다.그는 내가 휴대폰을 보고 있다는 걸 알았고 얼굴에 당황한 기색 없이 자연스럽게 웃으며 말했다.“네가 잠드는 동안 예전 사진과 영상을 좀 봤는데 지금 넌 예전보다 훨씬 더 예뻐졌더라.”나는 물을 마시며 그가 한 말에 이어서 대답했다.“그러면 예전엔 내가 안 예뻤다는 거네? 그래서 네가...”“그만해.”그가 내 말을 끊었다.“그 사람은 더 이상 언급하지 마.”물 몇 모금 마시자 나는 목이 좀 편해졌다.“조나연 그 일은 이제 다 정리한 거야?”나는 젓가락으로 목이버섯을 집어 입에 넣으면서 물었고 그 상큼하고 새콤한 맛에 기분이 좋아졌다.강유형은 휴대폰을 다시 들고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그저 그 화면을 보고 있었고 나도 그저 맛있는 음식을 즐기고 있었다.좀 더 먹으려던 찰나 강유형이 입을 열었다.“완전히 깨끗하게 끝냈어.”그 말에 나는 조금 더 생각했다. 그때 그 여자가 남긴 독한 말들을 떠올리며 이 일은 그렇게 간단히 끝날 일이 아닐 거라는 걸 알았다. 그러나 강유형이 이렇게 말하니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고 다시 음식을 먹을 준비를 했다.“알겠어.”“잠시만.”그때 강유형이 나를 막아 나서면서 손으로 내 입술 옆에 묻은 기름을 닦아 주었다.“기름이 묻어서.”나는 입술
강유형은 결국 강진혁의 불편한 기색을 눈치챘다.나는 물을 한 모금 마시며 대답했다.“그건 직접 물어봐야 할 거야. 그리고... 나는 지금 아무에게도 마음이 없어.”그러자 강유형은 무표정하게 말했다.“너무 자주 말하지 않아도 돼.”“사실을 말한 것뿐이야.”나는 말을 마친 후 기침을 두 번 했고 그러자 강유형은 내 등을 두드려 주었다.“진정우는 네가 사고를 당한 걸 몰랐어?”강진혁의 말은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컵 안에 있는 뜨거운 물의 온기가 몸의 차가움을 녹여주었지만 마음속의 차가운 느낌은 사라지지 않았다.“왔었어. 그리고 다시 갔어.”강유형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고 나는 물컵을 그에게 건네며 말했다.“나 좀 자고 싶어.”내가 눕자 강유형은 그 자리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나는 열이 나서 눈꺼풀이 무겁고 잠에 빠져들기 직전에 강유형의 목소리가 들렸다.“나와 헤어질 때는 네가 이렇게 아프지 않았던 것 같은데.”‘뭐라고 하는 거야?’사실 맞는 말이었다. 강유형과 헤어질 때 지금처럼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은 없었다.“아마 너는 천천히 칼날로 내 마음을 줄곧 찔렀기 때문에 난 아픔에 익숙해졌겠지.”내가 목소리를 낮춰 말하며 뒤로 돌아누웠고 결국 깊은 잠에 빠졌다.나는 밥 냄새에 잠이 깼다. 눈을 떴을 때 강유형이 침대 옆 의자에 앉아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본 내용에 몰입한 듯 내가 깬 줄도 모르고 있었다.하지만 나는 정말 배가 고팠다. 침대 옆 식탁에 놓인 음식을 보며 일어나 보려고 했지만 몸의 상처가 아파서 움직이지 못하고 냉큼 숨을 쉬었다.강유형은 그 소리를 듣고 급히 휴대폰을 내려놓고 다가와 나를 부축했다.“깨어났어? 나한테 말하지.”“배가 고파.”나는 불필요한 말을 하지 않고 간단히 말했고 그는 웃으며 말했다.“알겠어. 네가 배고플 줄 알았어. 예전처럼 감기나 열이 나면 깨자마자 먹는 게 첫 번째잖아.”듣고 보니 난 확실히 그랬었다. 다른 사람들은 병에 걸리면 입맛이 없다고 하지만 나는 배가 고팠다.
옆에 있던 강진혁은 눈빛이 어두워졌다. 방금 그가 내가 머리를 만져준다고 했을 때 난 바로 피했고 강유형이 나를 만졌을 땐 나는 거부하지 않았기에 그는 불편함을 느꼈을 것이다. 나라고 해도 그 상황이면 서운했을 것이다.하지만 우리가 그동안 얘기를 나누었고 강진혁은 별다른 표정을 지어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내가 그를 볼 때 그는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농담을 던졌다.“넌 아직도 강유형의 친밀한 행동에 익숙한 거 같아.”“......”“그건 당연한 소리지. 지원이는 거의 내 아내가 될 뻔했으니까.”“......”“맞아. 거의였지.”강유형은 강진혁을 바라보며 미소를 띠었고 그의 얼굴에는 장난기 어린 표정이 가득했다.“아무래도 이마가 좀 뜨거운 것 같아.”강유형은 말을 끝내며 지나가는 간호사를 불렀다.“체온계 좀 줘봐요.”“괜찮아. 아마도...”내가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강유형이 끊었다.“괜찮은 건지는 그건 네가 스스로 판단할 일이 아니야.”강유형의 말에 간호사는 바로 체온계를 가져와 내 이마에 대었다.“37.7도입니다.”그러자 강유형은 간호사에게 말했다.“의사에게 상황을 좀 전해주세요. 그리고 혈액 검사 결과가 나왔나요? 감염인지 아니면 그냥 물에 젖어서 감기가 온 건지 확인해 주세요.”강유형은 정말 전문가처럼 말을 이어갔다.‘모르는 사람이 보면 의사인 줄 알겠네.’간호사는 대답하고는 떠났고 강진혁은 나에게 따뜻한 물을 부어줬다.“따뜻한 물이라도 마셔. 아마 그냥 몸이 얼어서 그런 거 같아.”두 형제가 이렇게 나를 챙겨주는 모습이 정말 감동적이지만 그만큼 부담도 컸다.나는 그들이 그만 가줬으면 하는 마음이었지만 강유형은 이미 먼저 말했다.“형, 아니면 먼저 돌아가. 내일 선보러 간다고 했잖아? 너무 늦게까지 있으면 피부에 안 좋아.”“오빠, 선보는 거예요? 방금 왜 말을 안 했어요?”나는 조금 놀랐고 강진혁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말할 새도 없이 강유형이 와서 방해했으니까.”이 말의 의미는 강유형이 우리 둘 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