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허진호에게 일부러 난처한 질문을 던졌다.그의 대답을 통해 숨겨진 ‘대표님’의 정체를 알아내고 싶었다.물론 진정우가 그 대표님일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너무 가난해 보였고 부유한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다.하지만 모든 정보가 자꾸만 그를 떠올리게 했다.오후에 별다른 일이 없었다. 회의를 마치고 휴대폰을 열어보니 새로 추가된 친구 목록에 용준호의 이름이 있었다.메시지 창에는 단순히 "친구가 되었습니다"라는 알림만 떠 있었고 그 외의 연락은 없었다.용준호는 내가 친구 요청을 수락한 것을 알았을 텐데 일부러 무시한 듯했다.아마 어젯밤 내가 그의 요청을 바로 받아들이지 않은 것에 대한 무언의 응수였을 것이다.그는 쉽게 건드릴 사람이 아니었다. 사소한 일도 기억하며 되갚아주는 성격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이래서 진정우와 강유형이 그와 거리를 두라고 경고했는지도 모르겠다.하지만 이미 얽힌 상황에서 모르는 척할 수는 없었다.그가 먼저 다음 수를 두기 전까지 나는 침착하게 기다리는 게 최선이었다.저녁 5시쯤, 나는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왔다.동네 주민들은 아직 저녁 준비를 하지 않은 채 삼삼오오 모여 아이들과 놀거나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어머, 지원아! 퇴근했네?”1층에 있다 유씨 아줌마가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네. 그런데 아직 집에 안 들어가세요?”나는 가볍게 물으며 미소를 지었다.이런 별것 아닌 대화가 사람 사이를 더 친밀하게 만들어 준다고 생각했다.“장 봐오긴 했는데 아직 요리는 못했어. 하, 난 너처럼 복도 없어서 요리 잘하는 남자 친구가 없네.”그녀는 고개를 들어 위층을 가리켰다.진정우가 이미 집에 와 있었다.나는 곧장 위층으로 올라가 그의 집 문을 두드렸다.안에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가 참으로 낮고 따뜻했다.“문 열려 있어요.”문을 살짝 열자마자 맛있는 요리 냄새가 코를 찔렀다.아침에 대충 먹었기에 지금 너무 배가 고팠다. 부엌의 후드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나는 문가에 서서 말했다.“너무 맛있는 냄새가 나서
계속 울리던 전화가 갑자기 멈췄다.순간, 공기 중에는 가스레인지 불소리와 서로의 심장 소리만이 남았다.이 가까운 거리에서 숨결이 뒤섞이고 나는 진정우의 눈 속에서 불꽃이 일렁이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뭔가 일어나겠는데?’강한 예감이 들었다.똑똑.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정우야! 우리 집 물이 잘 안 나오네. 좀 와서 봐줄 수 있어?"아래층 유씨 아줌마의 목소리가 들렸다.밀착해 있던 그의 몸이 한순간 살짝 뒤로 물러섰고 나는 그 틈을 타 재빨리 소파로 가서 털썩 앉았다.잠시 후, 진정우는 부엌에서 나와 아줌마를 따라갔다."바로 내려갈게요.""그래, 그래."아줌마는 문 너머로 나를 보고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미안, 정우를 잠깐만 빌려 갈게."‘하하... 빌려 간다니.’그 말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빌려 가시는 건 좋은데 빨리 돌려주세요. 오래 빌리시면 안 돼요."내가 장난스럽게 말하자, 아줌마는 깔깔 웃으며 답했다."알겠어, 알겠어."진정우는 아줌마를 따라 나갔다.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수박 주스를 한 모금 마시고 방으로 들어갔다.그가 다시 날 부르러 왔을 때는 약 30분이 지난 뒤였다.시간이 지나니 아까의 어색함은 이미 사라졌다."해결했어요?"나는 자연스럽게 물었다.“수도꼭지가 물때 때문에 막혔더라고요. 새 걸로 바꿨더니 괜찮아졌어요.”그 말을 듣고 이곳의 재개발 이야기가 떠올랐다."이 동네 곧 철거되는 거 아시죠?"“네.”그가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렇겠죠. 어차피 임대로 살고 있으니 떠나야 하잖아요."그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그럼 어디로 갈 건데요?""아직 생각 중이에요."나는 집을 살 계획이 있다는 사실을 굳이 말하지 않았다.그는 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그날 저녁, 그의 요리는 여전히 훌륭했고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언젠가 이 사람이 내 인생에서 사라지면, 아마 어떤 음식도 맛있게 느껴지지 않을 거야.’저녁 식사를 마친 뒤, 우리는 함
강유형도 이곳에 와 있었다.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지만 생각해 보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오늘은 조명 테스트가 있는 날이고 그는 이 놀이공원의 대주주로서 미리 와서 확인할 자격이 충분히 있었다.시선이 마주치는 찰나, 강유형이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그 순간, 내 손이 따뜻해졌다. 진정우가 내 손을 잡은 것이다.솔직히 말하자면, 내 남자 친구 역할을 맡은 그는 이런 상황에서 꽤 노련했다. 강유형만 등장하면, 그의 태도는 마치 주권을 선언하려는 듯한 강렬함으로 즉시 변하곤 했다.강유형의 시선이 우리 손에 잠깐 머물렀다. 하지만 그의 표정에서는 특별히 불쾌한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심지어 그의 목소리도 평온했다.“언제 시작하죠?”그의 질문 의도는 명확했다. 그는 조명 테스트를 보러 온 것이다.“10분 뒤요.”진정우가 답했다.“관측 지점은 어디죠?”강유형이 다시 물었다.진정우의 손이 내 손을 살짝 더 꽉 잡았다. 나는 그를 바라봤고 그도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내 의견을 묻고 있었다.진정우가 이곳에서 이미 수없이 테스트를 봤을 텐데 관측 지점을 모를 리 없었다.하지만 그는 내 의견을 존중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구역마다 관측 지점이 다르고 표시도 되어 있어요. 전체적으로 관측하기 가장 좋은 곳은 관람차죠.”나는 공식적인 대답을 했다.강유형은 내 얼굴을 잠시 바라보더니, 다시 진정우를 향해 물었다.“두 분은 어디서 관측하실 건가요?”그 말의 뜻은 우리와 동행하겠다는 건가?그는 이 상황이 불편하지 않은 걸까?아니, 그럴 리 없다. 이미 그는 다른 사람과 연애 중이고 과거를 다 내려놓았을 텐데.“저희는 우선 전체적으로 한 바퀴 둘러보려고요. 그리고...”진정우가 잠시 멈추고 말했다.“오늘은 공식적인 테스트가 아니라 제가 개인적으로 조명 상태를 지원 씨에게 보여주려고 한 거예요.”강유형의 눈빛에 미묘한 변화가 스쳤다.그러나 그는 차분히 “그래요.” 하고 간단히 대답했다.그 ‘그래요’가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순간적으로 목이 말라왔다. 우리 셋이 같은 관람차 칸에 타자는 뜻일까?뭐라고 말하려던 찰나, 진정우는 내 손을 잡아 다른 관람차 칸으로 이끌었다.“같이 안 타나요?”뒤에서 강유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불편해서요.”진정우는 단호히 말하며 자연스럽게 나를 칸 안으로 올려주었다.그리고 그는 뒤따라 들어와 문을 닫았다.칸 안의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강유형의 얼굴은 단단히 굳어 있었다.그의 시선은 차갑고 무거웠으며 화난 게 분명했다.“일부러 그런 거죠?” 나는 진정우를 보며 물었다.“네.” 그는 담담히 대답했다.“같이 타고 싶지 않아서요.”그 말은 솔직했고 어딘가 뻔뻔하면서도 아이 같은 느낌이 들어 나는 피식 웃음이 났다.진정우는 차갑고 냉정한 모습도 있고 따뜻하고 세심한 면도 있지만 지금처럼 귀엽고 엉뚱할 때도 있다.“정우 씨.”“네?”그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눈을 마주쳤다. 관람차 안의 은은한 조명이 그의 얼굴을 부드럽게 비추고 있었다.“귀여워요.”내가 이렇게 말하는 순간, 관람차 안에서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왔다.타이밍 참 절묘하네.“뭐라고요?”그는 못 들은 건지, 아니면 내 말을 믿기 힘들었던 건지 되물었다.나는 웃음으로 넘기며 대답하지 않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관람차가 천천히 올라가면서 놀이공원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회전목마와 롤러코스터, 워터슬라이드, 그리고 점점 작아지는 놀이공원 전체의 모습이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멀리 보이는 고층 빌딩과 도시의 불빛들까지 어우러져 있었다.조명이 화려하게 바뀌자 시선이 다시 놀이공원으로 돌아갔다.놀이공원 안쪽의 따뜻한 분위기와는 달리, 밖에서 보는 놀이공원의 조명은 도시를 빛내는 상징 같았다.이곳은 단순한 놀이공원이 아니었다. 이 도시의 랜드마크 같은 존재였다.“지원아, 이 놀이공원 마음에 들어? 내가 준 선물이잖아.”갑자기 과거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강유형이 이 놀이공원의 설계도를 내게 내밀며 했던 말이었다.그 순간, 나는 그가 날 사랑한다
다채로운 세상이 그의 손바닥 아래 감춰지자 내 시야는 순식간에 칠흑 같은 어둠에 휩싸였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두렵지 않았다.그가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의 따뜻한 체온이 어떤 빛보다도 큰 안도감을 주었다.“소원을 빌어봐요. 앞으로 제가 지원 씨 곁에 있을 테니 바라는 건 뭐든 이뤄질 거예요.”진정우의 낮고 깊은 목소리가 귀를 간질이며 속삭였다. 마치 첼로 선율처럼 부드럽고 따뜻했다.관람차 안에서는 잔잔한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긴장으로 경직됐던 마음이 그의 말 한마디에 점차 풀려갔다.소원...무슨 소원을 빌어야 할까?부모님이 떠나신 후, 나는 더 이상 무언가를 바라는 게 무의미하다고 느꼈다.강유형과 함께할 때도 마음 한구석에는 우리가 오래도록 함께하기를 바랐다.하지만 그건 마음속에 품었던 작은 바람일 뿐, 진지하게 소원을 빌어본 적은 없었다.지금이라도 소원을 빌어야 한다면...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는 정말로 무엇을 원하는 걸까?머릿속이 복잡해졌고 결국 부모님 생각이 났다. 그들의 죽음과 남겨진 진실.“우리 부모님의 사고 진실을 알고 싶어.”나는 조용히 말했다.“그건 제가 밝혀낼게요.”진정우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나는 피식 웃으며 그의 손을 뿌리쳤다.“그럼 굳이 소원을 빌 필요도 없겠네. 그냥 말하면 해결해 줄 테니까.”진정우는 내 머리를 가볍게 두드렸다.“그래서 좋은 기회를 놓친 셈이죠.”내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원래 이런 거 잘 안 믿어요.”나는 다시 놀이공원의 찬란한 조명으로 시선을 돌렸다.“부모님이 돌아가신 뒤로, 더 이상 하느님 같은 건 믿지 않아요.”그는 이번엔 다정하게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앞으로는 저를 믿어주세요.”그 말은 마치 내 삶의 수호자가 되어 주겠다는 약속 같았다.하지만 그는 알지 못했다. 나는 오직 나 자신만을 믿으며 살아간다는 걸.다시 조명이 빛을 발했다. 여기 조명들은 매 순간 변화해 같은 빛을 두 번 보는 일이 없었다.이 놀이공원의 조명 설계 비용은 전체 투자
파란 바다 위를 달리는 소녀의 모습은 마치 동화 속 '인어공주'를 떠올리게 했다.그녀는 물결 위에서 뛰놀며 가끔씩 빙글빙글 돌기도 했다.너무 아름답고 생동감 넘치는 모습에 마치 현실에서 살아 있는 소녀가 물결 위를 달리고 있는 듯했다.나는 숨조차 멈추며 그 장면에 몰입했다. 눈을 깜박이는 순간이라도 놓치고 싶지 않아서였다.그러다 갑자기 큰 파도가 일면서 새로운 그림자가 나타났다.한 소년이었다.키가 훤칠한 소년은 소녀를 바라보고 있었다.소녀도 그를 바라보다가 몇 초 뒤 그의 품으로 뛰어들었다.“오빠, 난 다윤이라고 해. 오빠 이름은 뭐야?”그 말에 내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물결 위에서 뛰놀던 그 소녀가 바로 나라는 걸 깨달았다.“오빠, 도망가지 마!”“오빠, 나 좀 기다려줘!”...소년은 결국 걸음을 멈추고 소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둘은 손을 맞잡고 함께 달리기 시작했다.“오빠, 나 힘들어. 업어줘.”“오빠, 좀 더 빨리 뛰어봐!”소녀는 소년의 등에 업혀 둘이 물결 위를 함께 뛰었다.나는 눈물이 차오르는 걸 느꼈다.이건 단순한 조명이 아니었다.진정우가 나를 위해 어린 시절의 꿈을 조명으로 재현해 준 것이다.그리고 나는 알게 되었다. 그게 단순한 꿈이 아니었고 실제로 내가 겪었던 일이라는 걸.“오빠, 다윤이는 커서 오빠랑 결혼할 거야.”“꼭 기다려줘야 해. 절대 잊으면 안 돼!”장면이 계속 바뀌면서 나는 모든 퍼즐이 맞춰졌다.진정우가 내 삶에 등장한 건 우연도 아니었고 의도도 아니었다.그건 그가 지켜온 오래된 약속 때문이었다.조명의 아름다움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환상적이었다.마치 동화 속에 들어온 듯했고 동시에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조명의 마지막에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등장했다.그들은 내 기억 속 그대로의 모습으로 서로를 끌어안고 나를 따뜻하게 바라보며 말했다.“다윤아, 행복해야 해.”눈물이 언제 흘러내렸는지조차 몰랐다.단지 조명이 꺼질 때쯤에는 이미 목 놓아 울고 있었다.이때 진정우
“정말 비열하군.”강유형이 낮게 으르렁대며 진정우의 옷깃을 거칠게 움켜쥐었다.나는 신경이 곤두섰다. 마음 아파할 겨를도 없이 급히 다가가려는 순간, 진정우가 차분히 입을 열었다.“강 대표가 말하는 비열함이란 당신이 지원이에게 이렇게까지 정성을 다한 적이 없어서겠죠.”강유형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진정우, 네가 이런 유치한 쇼로 지원이를 속일 수 있을 것 같아? 지원이는 이런 환상 따위 좋아하지 않아. 알겠어?”내가 이런 걸 좋아하지 않는다고?맞다, 한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우리가 막 연인이 되었던 첫 밸런타인데이에 그는 나에게 어떤 선물도, 심지어 저녁 한 끼도 준비하지 않았다.다음 날 신지태,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한 자리에서 신지태가 우리 첫 밸런타인데이를 어떻게 보냈냐고 장난스럽게 물었을 때 나는 정말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당황스러웠다.그 후, 강유형이 내게 사과하며 그저 깜빡 잊었다고 말했고 나는 억지로 “난 이런 거 안 좋아해”라며 넘어갔다.하지만 세상에 꽃과 로맨스를 좋아하지 않는 여자가 어디 있을까?그는 그저 주지 않았을 뿐이다.“지금도 지원이가 그런 걸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진정우의 낮고 단호한 물음에 강유형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내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그는 분명히 봤을 것이다.그리고 그 눈물이 무엇 때문인지도 알 것이다.진정우가 AI로 부모님을 재현해 낸 감동, 그로 인해 솟구친 추억과 그리움, 그리고 그를 향한 감동의 눈물이었다.진정우의 사랑은 사소한 것들 속에서 빛났다.정성스러운 한 끼의 식사, 묵묵히 나를 지켜주는 것, 나만을 위해 준비한 조명 쇼까지...강유형은 한참 동안 나를 바라보다가 마침내 시선을 돌리고 진정우를 차갑게 노려보며 말했다.“지원이가 사랑하는 사람은 나야. 우린 10년을 함께했고 지원이는 나를 위해 목숨까지 걸었어.”진정우는 말없이 그를 쳐다봤다. 그러자 강유형은 코웃음을 치며 덧붙였다.“믿기 어렵겠지? 지원이 왼손 중지에 있는 작은 흉터를 봤어? 그게 증거야
진정우의 반응에 나는 순간 혼란스러워졌다.“왜 그래? 혹시 싫어진 거야? 아니면...”내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그의 입술이 다가왔다. 깊고 강렬한 키스는 아니었지만 내 입술을 살포시 누르며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아니야. 좋아.”그의 대답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번졌고 얼굴이 뜨거워졌다.그 역시 마찬가지였다.피부가 까만 편이라 그의 얼굴에서는 티가 덜 났지만 귀 끝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우리는 말없이 서로를 안고 서 있었다. 어색하면서도 이상하게 떨어질 수 없었다.그저 이렇게 붙어 있고 싶은 마음이었다.달콤하면서도 묘하게 부끄러운 순간.조금 더 다가가고 싶으면서도, 망설여지는 마음.‘이러다 밤새도록 이렇게 서 있는 거 아닐까?’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다리가 저리고 허리가 뻐근해지면서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저기...”“그럼...”우리는 동시에 말을 꺼냈다.서로를 보며 어색하게 웃었고 그 순간 또다시 말문이 막혔다.마침내 무슨 말을 하려던 찰나, 내 휴대폰이 울렸다.그는 나를 살짝 놓아주었고 나는 급히 휴대폰을 꺼내 확인했다.화면에는 안리영의 이름이 떠 있었다.‘이런 타이밍에 전화를 다 하다니, 정말 대단하다.’“저기, 나 전화 좀 받을게.”나는 그에게 말하며 손짓으로 내 방을 가리켰다.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래. 잘 자.”“응, 잘 자.”나는 방으로 들어가며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이미 첫사랑은 아니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처음 연애를 하는 소녀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가 안리영의 전화를 받았다.“왜 이렇게 늦게 받아? 설마 무슨 나쁜 짓이라도 하고 있었던 거야?”안리영은 늘 내 상황을 정확히 짚어내곤 했다.나는 잠시 머뭇거리다 웃으며 말했다.“좋은 소식이 있어. 듣고 싶어?”“좋은 소식? 내가 맞춰볼까?”안리영의 목소리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나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그녀가 말했다.“설마, 너랑 진정우, 드디어 사귀기로 한
남자가 다가와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죄송합니다. 아이가 폐를 끼쳤네요.”“네? 하윤이가 이렇게 귀여운데...”하윤이는 아빠의 말을 듣자마자 입을 삐죽 내밀며 말했고 나는 그녀의 천진난만한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하윤이는 정말 사랑스러워요. 저도 하윤이가 좋아요.”“하윤도 언니 좋아해요.”하윤이의 발음이 약간 어눌했지만 귀여웠다. 나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빠를 향해 말했다.“솔직히 부모님 두 분 다 외국분인 줄 알았어요.”남자의 눈빛이 잠시 흐려졌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나는 그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 내가 실례를 했다는 것을 깨닫고 급히 사과했다.“아, 죄송합니다...”그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딸에게 손을 내밀었다.“가자, 아빠랑 탑승하러 가야지.”“언니, 우리랑 같이 가요. 안 돼요?”하윤이는 내 손을 꼭 잡으며 놓으려 하지 않았다. 나는 우리가 같은 비행기가 아니라는 말을 하려던 찰나, 강진혁이 다가왔다. 그는 손에 탑승권을 쥐고 강진혁은 부녀를 바라보며 아빠에게 손을 내밀었다.“안녕하세요.”“언니, 우리 같이 가요!”하윤이는 어른들의 대화에는 관심이 없다는 듯 내 손을 다시 끌어당겼다.“하윤아, 언니는 우리랑 같은 비행기가 아니야.”아빠가 강진혁과 악수를 나눈 뒤, 대신 대답을 해주었다.“그럼 언니가 비행기 바꾸면 되잖아요!”하윤이는 비행기를 자주 타본 듯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녀의 검은 눈동자와 서양식 이목구비를 보며, 나는 그녀가 혼혈이라는 것을 깨달았다.“하윤아, 이제 그만하자.”아빠가 부드럽게 말렸지만 하윤은 기죽지 않은 눈빛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하윤이는 언니랑 같이 비행기 타고 싶어요.”그녀의 간절한 눈빛에 나는 거절할 말을 찾지 못했고 아빠는 하윤을 안아 들며 다시 사과했다.“아이가 고집이 세서 죄송합니다.”그는 내게 고개를 숙이고 하윤을 안은 채 떠났고 하윤은 아빠 품에서 고개를 돌려 나를 보며 말했다.“언니, 언니... 하윤이는 언니가 보고 싶을 거예요.”나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때 강유형이 한 발 더 다가오며 말했다.“지원아...”“강유형, 지금 이 상황에서 그런 말이 나와? 너무 뻔뻔하지 않아?”나의 차가운 태도에 강유형은 내 얼굴을 바라보며 얼굴이 붉어졌고 그 표정에는 당혹감과 자책이 뒤섞여 있었다.“그래. 나도 알아. 내가 한심하다는 거.”그는 고개를 숙이며 힘없이 말을 이어갔다.“순간적인 감정에 휩싸여 내 친구에게 상처를 줬고 이제는 네가 날 구하기 위해 진정우랑 다투기까지 했지. 그런데도 내가 뻔뻔하게 이런 말을 하다니… 정말 사람이 아닌 것 같아.”그는 고개를 저으며 덧붙였다.“나는 그럴 자격도 없어.”그는 그렇게 마지막 말을 남기고 병실을 나섰다. 나와 강진혁과 함께 병실을 나설 때, 강유형은 배웅하지 않았다.공항에 도착해서 강진혁이 수속을 밟으러 간 동안, 나는 그저 멍하니 자리에 앉아 있었다.몸은 여기 있지만 영혼은 어디론가 떠다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내가 어디로 가야 할지, 뭘 해야 할지조차 알 수 없었다.“언니, 혼자 여행 가는 거예요?”이때 맑은 목소리가 들렸고 고개를 돌리니 작은 금발 소녀가 내 옆에 앉아 해맑게 물었다.그녀는 금발과 뽀얀 피부를 가진 외국 아이였지만 동양인의 짙은 눈동자를 갖고 있었다. 무엇보다, 또박또박한 한국어를 구사했다.아이들은 정말 사람의 마음을 치유한다는 말이 맞는 것 같았다. 그저 나를 바라보는 이 작은 아이의 눈빛이 내 떠다니던 영혼을 단번에 붙잡아 주었다. 나는 미소를 띠며 말했다.“언니는 여행이 아니라 집에 가는 거야.”“집에 가서 엄마, 아빠 찾는 거예요?”아이의 질문은 끝없는 궁금증으로 가득했다.나는 부모님을 찾고 싶었지만 그분들은 이미 세상에 계시지 않았다.이런 슬픈 이야기를 어린아이에게 들려주고 싶지 않아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언니, 남자 친구 있어요?”소녀는 방긋 웃으며 귀엽게 얼굴을 붉혔다.“왜 웃어?”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내가 비밀 하나 알려줄게요.”소녀는 신비로운
이 병실을 제대로 살펴본 건 깨어난 후 두 번뿐이었다. 처음은 진정우를 찾기 위해서였고 이번은 짐을 찾기 위해서였다.이때 강진혁이 내 앞에 다가와 가볍게 무릎을 꿇고 앉았다.“지원아, 지금은 좀 어때? 어디 불편한 데는 없고?”고개를 저으려던 찰나, 병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고 이어서 의사와 강유형이 들어왔다.“의사 선생님 한 번 더 만나고 가. 혹시라도 몸 상태가 안 좋으면 비행기에서 처리하기 어렵잖아.”강유형이 설명하면서 시선을 강진혁에게로 돌렸다. 나는 그가 살짝 찌푸린 눈썹을 똑똑히 보았다.의사가 다가오자 강진혁은 조용히 일어나 자리를 비켜줬고 자연스럽게 한쪽으로 물러났다. 심장 소리를 듣고 혈압을 재는 등 몇 가지 검사를 받은 후, 의사가 말했다.“회복 상태가 좋습니다. 특별한 이상은 없습니다.”“감사합니다.”강유형이 정중히 인사했고 의사를 배웅하며 말했다.“내가 배웅할게. 가는 김에 짐도 챙겨야 하니, 너는 여기서 지원이랑 잠시 이야기라도 나눠.”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들리며 병실에는 나와 강유형만 남았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시간을 보냈다. 나는 멍하니 생각에 잠겼고 강유형은 묵묵히 나를 바라보았다. 오랜 침묵 끝에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미안해.”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지금 내 눈빛이 얼마나 공허하고 흐릿한지 느낄 수 있었다.강유형은 내 옆에 앉으면서 말했다.“내가 아니었으면 네가 휴링턴에 오지도 않았을 테고 위험에 빠지지도 않았을 거야. 그리고 나를 구하려고 그렇게 많은 피를 헌혈하지도 않았을 텐데…… 게다가 진정우에게까지 오해를 사게 됐잖아.”나는 눈을 깜빡이며 시선을 떨어뜨려 그의 셔츠 두 번째 단추를 바라봤다.“미안해할 거 없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고 그로 인해 생기는 결과도 있는 법이니까.”이건 아마도 운명이었을 것이다.“지원아.”강유형은 나를 부드럽게 불렀다.“왜 그랬어? 목숨 걸고 날 구하려고 한 이유가 뭐야?”나는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나는 강진혁을 계속 바라봤고 그의 짧은 반응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답을 알 수 있었다.“지원아.” 강진혁이 나를 조용히 불렀다.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응?’솔직히, 애초에 그렇게까지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강진혁이 그렇게 말하니, 오히려 더 많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삼촌과 아줌마도 알고 있었죠?”내 질문은 물음이라기보다 확신에 가까웠다. 그들이 날 이렇게 오래 키웠는데 내 혈액형을 몰랐을 리가 없었다.“지원아. 우리 부모님이 널 데려와 키우기로 했으니, 네 혈액형 같은 건 알아야 책임질 수 있었어. 그게 이상한 건 아니야.” 강진혁은 부드럽게 말했다. 그래, 그들이 내 혈액형을 알고 있었다는 건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사실을 한 번도 말한 적 없다는 게 이상했다.“왜 말이 없어? 오해하지 마. 우리 부모님은 널 친딸처럼 여겼어. 절대 다른 의도는 없었어.”강진혁은 다급한 듯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얼굴에는 걱정과 진심이 엿보였지만 나는 그가 뭔가 숨기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사람이란 원래 숨기려 할수록 더 드러나기 마련이고 나는 이제 어린애가 아니다.“오빠, 사실 오빠가 이런 말을 꺼내기 전까지는 전혀 다른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오빠가 깊이 생각하지 말라고 하니 오히려....”내가 솔직하게 말하자 강진혁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지원아...”“오빠, 짐이나 챙겨줘요.”나는 그의 말을 더 듣지 않고 짐 챙기기를 부탁했다. 강진혁을 의도적으로 오해하려는 건 아니었지만 그의 말이 내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다.사람이란 한 번 의심이 시작되면 그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법이다.강진혁이 짐을 챙기는 동안, 나는 자리에 앉아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문득 나와 강유형의 혼약이 떠올랐다.우리 부모님이 사고를 당하기 전, 그들은 내게 물었다.“네가 아직 어릴 때 약혼을 정해놓으면 어떻겠니?”그때 나는 단호히 대답했다.“싫어요! 저는 엄마랑 아빠만 있으면 돼요.”그리고
“그럼 돌아가. 하지만 지금 네 상태로는 혼자 갈 수 없어.”강유형이 단호하게 말했고 잠시 침묵하다가 강진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형, 지원이랑 같이 가줘.”강진혁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알았어.”나는 거절하고 싶었지만 지금 내 상태로는 아무리 거절해도 그들이 날 혼자 두고 갈 리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럼 너는?”나는 강유형의 머리에 감긴 붕대를 바라보며 물었다.“난 여기 남아서 신지태 나오면 같이 갈 거야.”강유형의 목소리는 단호했다.신지태가 낯선 곳에서 그런 일을 겪고 나왔는데 아무도 기다려주는 사람이 없다면 얼마나 허전할까. 하지만 강유형의 지금 상태로 남아 있는 것도 신지태에게는 더 큰 부담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네가 이 상태로 있으면 신지태가 더 죄책감 느낄 텐데.”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괜찮아. 사고 얘기는 꺼내지 않을 거니까.”강유형은 단호히 답했다. 더는 설득해 봤자 소용없을 것 같아서 나는 화제를 돌렸다.“지태 오빠, 경기 다시 뛸 수 있을까?”이번에는 강진혁이 대답했다.“아직 몰라. 구단 쪽 반응도 봐야 하고 Q클럽의 태도에 따라 다를 거야.”문득 진정우가 떠올랐다. 이 상황에서 가장 적합한 해결책을 줄 사람은 진정우일 텐데 지금은 그에게 도움을 청할 수 없다는 사실이 답답했다.나는 한숨을 쉬며 휴대폰을 꺼내 귀국 비행기표를 예약하기 시작했다.“내 것도 같이 예약해 줘.”강진혁이 말하기 전까지는 그의 표까지 예약해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지만 그렇게 말하니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그럼 여권 정보 줘.”강진혁은 여권을 건네는 대신 휴대폰을 꺼내 들고 말했다.“이미 예약했어. 두 장.”그의 말에 잠시 놀랐지만 그는 이어 말했다.“짐 챙겨. 한 시간 뒤에 공항으로 가자.”나는 무슨 말을 하려다 멈췄고 강진혁이 먼저 강유형을 향해 말했다.“머리 다친 건 별일 아니지만 이제 몸 관리를 더 철저히 해야 해. 네 몸 상태가 예전보다 훨씬 더 중요해졌다는 걸 잊지 마.”그의 말
뉴스?무슨 뉴스?순간 머릿속이 멍해졌다.내가 깨어난 이후로 아무도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나는 망설임 없이 문을 열었고 문 앞에 있던 강유형과 강진혁이 동시에 나를 바라봤다.“무슨 뉴스야?”내가 직설적으로 묻자 두 사람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아마도 나한테 뭔가를 숨기려는 듯했다.하지만 나는 그들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다 들었으니까 숨기지 말고 제대로 말해줘.”강진혁은 짧게 한숨을 쉬고 핸드폰을 꺼냈다.강유형이 말리려는 듯 보였지만 내가 강한 눈빛으로 제지하자 그도 말없이 물러섰다.“이미 알게 된 이상 차라리 직접 확인하고 진정우랑 제대로 얘기하는 게 나을 거야.”강진혁이 말하며 핸드폰을 건넸다.핸드폰 화면에는 웹 기사 캡처가 떠 있었다.[희귀한 황금 혈액형 연인, 여자 친구가 800cc의 피로 남자 친구를 구해줌. 이제 내 피가 당신의 몸속에 흐르고 있어요.]로맨틱한 제목과 함께 내가 강유형의 손가락을 잡고 응원하던 사진이 실려 있었다.그저 힘내라는 뜻에서 손을 잡았던 순간이었지만 제목과 사진이 더해지니 마치 우리가 생사를 함께하는 연인처럼 보였다.“이 뉴스 언제 올라온 거야?”나는 강진혁을 보며 물었다.“3일 전이야. 네가 수혈을 끝내고 바로 올라왔어. 내가 병원에 도착했을 때 이미 실시간 검색어에 올라와 있었고 진정우도 이미 와 있던 상태였어. 진정우가 아마 이걸 봤던 게 분명해.”그 순간 나는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강진혁은 내 표정이 안 좋아지는 걸 눈치채고 조용히 덧붙였다.“바로 사람을 시켜 이 뉴스는 삭제했어. 지금은 인터넷에서 찾아볼 수 없어.”그게 무슨 소용일까.진정우는 이미 이 기사를 봤을 텐데 말이다.나는 다른 사람들이 오해하는 건 상관없었지만 진정우만큼은 아니었다.그가 아무리 나를 믿고 있더라도 이 사진과 제목은 충분히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했다.“이 일은... 내가 진정우한테 직접 설명할게.”강유형이 말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이런 일은 설명할수록 더 복잡
나는 휴대폰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그래.]그 단어 하나가 머릿속을 텅 비게 만들었다.잠시 후, 나는 내가 보낸 메시지를 다시 확인했다. 이때 강유형이 욕설을 내뱉으며 말했다.“저 자식, 도대체 뭘 하겠다는 거야?”그는 다시 진정우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이번에는 전원이 꺼져 있었다.나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휴대폰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리고 빠르게 창가로 걸어가 밖을 내다보았다. 어둠이 내려앉은 밤공기가 마음을 더 무겁게 만들었다.내 뒤에서 발소리가 들리자 나는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잠시만 혼자 있고 싶어요.”강유형과 강진혁은 내 마음을 이해했는지 더는 말없이 문을 닫고 나갔다.그 순간, 참았던 눈물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내가 왜 울고 있는 걸까? 그가 그렇게 쉽게 헤어지자고 한 말 때문일까?아니면 내가 이렇게 기다렸음에도 나를 보러 오지 않은 것에 대한 서운함 때문일까?나는 진정우를 기다렸고 그는 왔지만 나는 결국 얼굴조차 보지 못했다.그저 긴 잠에 빠졌을 뿐인데 겨우 사흘 동안 못 봤다고 나를 이렇게 대할 수 있는 걸까?분명히 뭔가 이유가 있을 것이다. 혹시 나를 구하는 과정에서 크게 다쳐서 나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은 걸까?아니면 그가 말하지 못할 사정이 있는 걸까? 아니면 그의 가족, 특히 그 유명한 진씨 가문이 나 같은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는 걸까?머릿속은 온갖 상상으로 뒤엉켰지만 나는 스스로를 억누르며 생각을 멈췄다.이럴 때일수록 직접 확인하는 게 나을 테니까.하지만 그가 전화를 꺼둔 탓에 다른 방법을 생각해야 했다.그 순간, 문득 진소영이 떠올랐다. 나는 그녀와 시차가 있다는 사실조차 잊고 전화를 걸었다.“언니!”진소영의 잠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자고 있었던 모양이다.나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잠시 머뭇거렸다.“언니?”그녀가 다시 불렀다.“잘못 걸었어. 미안해, 자는데 깨웠지?”내 목소리에 감정을 숨기려 애썼다.내가 지금 처한 상황을 그녀가 알게 된다면 분명히 걱정할 것이다.“아니에요
“지원아!”강유형이 손을 뻗어 나를 붙잡았다.나는 그의 머리에 감긴 붕대를 잠시 바라보다가, 그와 함께 들어온 강진혁을 향해 말했다.“정우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아요.”그러자 강진혁은 미간을 찌푸렸다.“무슨 일이야? 어떻게 알아?”“확실한 건 아닌데 그냥 느낌이 그래요.”나는 힘없이 대답했다.“전화했더니 바쁘다면서 나중에 연락하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지금까지 아무 소식도 없어요.”나는 이유를 설명했다.“그럼 다시 전화해 봤어?”강유형이 물었다. 사실 다시 걸어보진 않았다.진정우가 나중에 연락하겠다고 했으니, 나는 그냥 기다리고만 있었다.“내가 걸어볼게.”강유형이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한참 후, 진정우의 목소리가 들렸다.“강 대표님.”바로 내 앞에서 전화했기에 대화가 또렷하게 들렸다.“정우 씨, 지금 어디예요?”강유형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비행기 안이에요.”진정우의 대답에 내 숨이 멎는 것 같았다. 강유형이 나를 힐끗 보며 다시 물었다.“비행기? 어디로 가는 중이죠?”“귀국 중입니다.”이 짧은 두 글자에 내 심장은 쥐어짜이는 듯했다. 나는 강유형의 휴대폰을 낚아채며 말했다.“정우야, 무슨 일 생긴 거야?”아무 대답이 없자 내 손은 떨리기 시작했다.“말 좀 해봐. 무슨 일 있는 거야? 지금 어디에 있어? 지금 거짓말하고 있는 거지.”그가 깨어난 나를 보러 오지 않은 이유가 이해되지 않았다. 아무리 바빠도 이런 일에는 반드시 와야 하지 않나?“아니야. 거짓말 안 했어.”진정우가 차분하게 답지만 나는 그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못 믿어. 전에 나 속인 적 있잖아.”그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그래, 나는 거짓말쟁이야. 하지만 이번엔 아니야. 못 믿겠으면 사진 보내줄게.”전화가 끊기고 곧 내 휴대폰에 메시지가 도착했다.그는 비행기 좌석에 앉은 자신의 사진과 함께 비행기표 사진을 보내왔다.그가 진짜 귀국 중이라는 사실이 확인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단 한 번도 나를 보러 오지
강진혁이 내가 사흘 동안 의식 없이 누워 있었다고 말했다. 강진혁이 사흘 동안 이곳에 있었다면, 전화로 곧 오겠다고 했던 진정우도 이미 왔었을 것이다. “물 좀 마셔.”강진혁이 컵을 건네며 말했다. 나는 그의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진정우는 어디 있어요?”그의 표정이 잠시 굳어졌다.“일단 물부터 마셔.”그 말에 불길한 예감이 들었고 목이 점점 더 아파졌다. “아직 안 왔나요?”“아니.”그는 침대 옆에 앉으며 대답했다.“왔었어.”“그럼 지금은 어디 있어요?”내가 의식이 없던 동안 그는 당연히 내 곁에 있어야 하지 않았을까? 아니면 내가 벌이라며 그를 보지 않겠다고 한 말을 그대로 받아들인 걸까?“떠났어. 아마 널 다치게 한 사람들을 처리하러 간 것 같아.”그가 말하며 미소를 지었다.“정말 진정우밖에 없네. 깨어나자마자 걔부터 찾고.”그의 농담에 약간 안도했지만 떠오르는 위험한 상황들이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혼자 갔나요? 언제 떠났는데요?”“정확히는 모르겠어. 하지만 걱정하지 마. 널 구할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이라면 그 문제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을 거야.”강진혁의 말에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그는 진정우의 능력을 신뢰하는 것 같았다.내가 알던 진정우는 평범한 회사원이었을 뿐인데 그의 진짜 정체를 알고 난 후로는 모든 것이 달라졌다. 심지어 해외에서도 이렇게 영향력을 발휘하다니. 문득 강유형이 내게 했던 질문이 떠올랐다.“너 정말 진정우에 대해 다 알아?”지금 생각해 보니 나는 정말 그를 잘 알지 못했던 것 같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더 잘 아는 듯했다.나는 강진혁이 건넨 물을 몇 모금 마시며 물었다.“오빠도 진정우의 정체를 알고 있었어요?”그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너보다 조금 더 일찍 알았어.”“근데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어요?”그렇게 묻고 나니 스스로가 우스웠다. 내 남자 친구의 진짜 정체를 왜 다른 사람이 나에게 말해줘야 한다고 생각했을까?“지원아, 이유가 있을 거야. 직접 만나서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