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이 나를 친구 추가하다니, 그것도 한밤중에...'여자의 직감은 참 정확하다. 이건 분명히 이상했다.신지태가 “내 체면을 봐서 용준호가 함부로 하진 않을 거야”라고 말했지만 그래도 나는 조심해야 했다.게다가 여자가 이렇게 늦은 시간에 아무렇지도 않게 남자의 친구 추가 요청을 받아들이는 건 가벼워 보일 수 있었다.나는 그냥 못 본 척하며 안리영과의 대화를 이어갔다.“그 선배가 성공한 그 수술도 그 여자 동료랑 같이한 거더라.”안리영의 목소리에 묘한 쓸쓸함이 묻어났다.나는 연애를 해본 사람이라서 안다. 사랑에서 '같이 발맞춰갈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를.물론 지금의 안리영도 매우 훌륭한 사람이지만 국제적인 명성을 가진 선배와 비교하면 여전히 어느 정도의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운명은 참 공평하지 않다'라는 말이 실감 났다.나는 이 주제를 더 깊게 들어가지 않기로 하고 다른 이야기들로 대화를 돌렸다. 그러다 전화를 끊고 다시 용준호의 친구 추가 요청을 생각했다.이 사람, 뭔가 위험하다. 그런 기운이 느껴졌다.하지만 아버지의 죽음에 얽힌 진실을 찾기 위해서는 그 속으로 들어가야 했다.나는 심호흡을 하고 휴대폰 화면을 닫으려는 찰나, 또 다른 메시지가 왔다. 이번엔 강유형이었다.[용준호 멀리 해!]그 어투는 마치 진정우가 했던 말과 똑같았다.그가 나를 걱정해 주는 건 알지만 이제 그의 걱정은 더 이상 내게 큰 의미가 없었다.나는 그의 메시지를 무시하고 휴대폰을 잠그고 잠에 들었다.다음 날 아침어젯밤 먹은 소주 한 잔이 생각보다 후폭풍이 강했다. 진정우가 타준 꿀물도 효과가 없었는지, 피곤함에 샤워도 하지 않은 채 뻗었었다.그런데도 아침에는 꽤 일찍 깨어났다. 가볍게 요가하고 커피 한 잔을 마시면서 그제야 용준호의 친구 요청을 수락했다.이 시간엔 아직 그가 깨어있지 않을 테니 바로 메시지가 오지는 않을 것 같았다.회사에 도착했을 때, 허진호는 이미 자리에 있었다. 그는 나를 보며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
허진호의 말에 바로 진정우의 모습이 떠올랐다.그리고 어제 신지태가 말했던 허진호에게 거액을 투자한 성이 진 씨인 그 남자가 마침 생각났다.나는 허진호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대표님이 말씀하신 강한 남자,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이에요? 아니면 그런 친구가 있으세요?”허진호는 갑작스러운 질문에 가볍게 헛기침했다.“그게... 뭐랄까, 말로 설명하기는 좀 애매한데 그러니까... 좀 더 단단하고 남자답고 반듯하고...”그는 말하며 식당 벽에 걸린 화면을 가리켰다. 화면에는 뉴스가 나오고 있었고 국기 게양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군복을 입고 우뚝 선 병사들의 모습. 활기차고 반듯한 자세가 딱 ‘강한 남자’를 상징하는 듯했다.그 모습을 보자 진정우의 얼굴이 또렷이 떠올랐다. 그리고 허진호의 말투에서 뭔가 숨겨진 의도가 느껴졌다.‘성이 진 ]씨? 강한 남자? 군인 출신?’이 모든 단어가 진정우와 정확히 들어맞았다.나는 허진호를 살펴보며 느닷없이 물었다.“혹시 그 친구 이름이 진정우인가요?”“네? 뭐라고요?”허진호는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그가 못 들은 척하는 건지, 아니면 정말 몰라서 그러는 건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대표님 친구 중에 진정우라는 분이 있나요?”나는 한 번 더 물었다.“진정우?”그는 고개를 젓더니 능청스럽게 웃었다.“그런 사람 없어요. 그게 누군데요?”하지만 그의 눈빛은 나를 피하려고 애쓰는 듯한 느낌이 강했다. 나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런 사람이 있다면 정말 강한 남자일 텐데요.”“하하.”그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그런가요? 그런데 현실에도 그런 사람이 있긴 있나요? 그 사람하고는 어떤 관계세요? 친하세요?”나는 그의 표정에서 엿보이는 약간의 호기심을 읽고 장난스럽게 대꾸했다.“제 친구에 대해 꽤 관심 있으신가 봐요. 그럼 한 번 소개해 드릴까요?”“정말요? 하지만... 괜찮을까요?”허진호는 마지못해 받아들이는 듯한 태도로 대답했다.“괜찮지 않나요?”나는 일부러
나는 허진호에게 일부러 난처한 질문을 던졌다.그의 대답을 통해 숨겨진 ‘대표님’의 정체를 알아내고 싶었다.물론 진정우가 그 대표님일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너무 가난해 보였고 부유한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다.하지만 모든 정보가 자꾸만 그를 떠올리게 했다.오후에 별다른 일이 없었다. 회의를 마치고 휴대폰을 열어보니 새로 추가된 친구 목록에 용준호의 이름이 있었다.메시지 창에는 단순히 "친구가 되었습니다"라는 알림만 떠 있었고 그 외의 연락은 없었다.용준호는 내가 친구 요청을 수락한 것을 알았을 텐데 일부러 무시한 듯했다.아마 어젯밤 내가 그의 요청을 바로 받아들이지 않은 것에 대한 무언의 응수였을 것이다.그는 쉽게 건드릴 사람이 아니었다. 사소한 일도 기억하며 되갚아주는 성격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이래서 진정우와 강유형이 그와 거리를 두라고 경고했는지도 모르겠다.하지만 이미 얽힌 상황에서 모르는 척할 수는 없었다.그가 먼저 다음 수를 두기 전까지 나는 침착하게 기다리는 게 최선이었다.저녁 5시쯤, 나는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왔다.동네 주민들은 아직 저녁 준비를 하지 않은 채 삼삼오오 모여 아이들과 놀거나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어머, 지원아! 퇴근했네?”1층에 있다 유씨 아줌마가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네. 그런데 아직 집에 안 들어가세요?”나는 가볍게 물으며 미소를 지었다.이런 별것 아닌 대화가 사람 사이를 더 친밀하게 만들어 준다고 생각했다.“장 봐오긴 했는데 아직 요리는 못했어. 하, 난 너처럼 복도 없어서 요리 잘하는 남자 친구가 없네.”그녀는 고개를 들어 위층을 가리켰다.진정우가 이미 집에 와 있었다.나는 곧장 위층으로 올라가 그의 집 문을 두드렸다.안에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가 참으로 낮고 따뜻했다.“문 열려 있어요.”문을 살짝 열자마자 맛있는 요리 냄새가 코를 찔렀다.아침에 대충 먹었기에 지금 너무 배가 고팠다. 부엌의 후드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나는 문가에 서서 말했다.“너무 맛있는 냄새가 나서
계속 울리던 전화가 갑자기 멈췄다.순간, 공기 중에는 가스레인지 불소리와 서로의 심장 소리만이 남았다.이 가까운 거리에서 숨결이 뒤섞이고 나는 진정우의 눈 속에서 불꽃이 일렁이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뭔가 일어나겠는데?’강한 예감이 들었다.똑똑.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정우야! 우리 집 물이 잘 안 나오네. 좀 와서 봐줄 수 있어?"아래층 유씨 아줌마의 목소리가 들렸다.밀착해 있던 그의 몸이 한순간 살짝 뒤로 물러섰고 나는 그 틈을 타 재빨리 소파로 가서 털썩 앉았다.잠시 후, 진정우는 부엌에서 나와 아줌마를 따라갔다."바로 내려갈게요.""그래, 그래."아줌마는 문 너머로 나를 보고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미안, 정우를 잠깐만 빌려 갈게."‘하하... 빌려 간다니.’그 말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빌려 가시는 건 좋은데 빨리 돌려주세요. 오래 빌리시면 안 돼요."내가 장난스럽게 말하자, 아줌마는 깔깔 웃으며 답했다."알겠어, 알겠어."진정우는 아줌마를 따라 나갔다.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수박 주스를 한 모금 마시고 방으로 들어갔다.그가 다시 날 부르러 왔을 때는 약 30분이 지난 뒤였다.시간이 지나니 아까의 어색함은 이미 사라졌다."해결했어요?"나는 자연스럽게 물었다.“수도꼭지가 물때 때문에 막혔더라고요. 새 걸로 바꿨더니 괜찮아졌어요.”그 말을 듣고 이곳의 재개발 이야기가 떠올랐다."이 동네 곧 철거되는 거 아시죠?"“네.”그가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렇겠죠. 어차피 임대로 살고 있으니 떠나야 하잖아요."그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그럼 어디로 갈 건데요?""아직 생각 중이에요."나는 집을 살 계획이 있다는 사실을 굳이 말하지 않았다.그는 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그날 저녁, 그의 요리는 여전히 훌륭했고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언젠가 이 사람이 내 인생에서 사라지면, 아마 어떤 음식도 맛있게 느껴지지 않을 거야.’저녁 식사를 마친 뒤, 우리는 함
강유형도 이곳에 와 있었다.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지만 생각해 보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오늘은 조명 테스트가 있는 날이고 그는 이 놀이공원의 대주주로서 미리 와서 확인할 자격이 충분히 있었다.시선이 마주치는 찰나, 강유형이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그 순간, 내 손이 따뜻해졌다. 진정우가 내 손을 잡은 것이다.솔직히 말하자면, 내 남자 친구 역할을 맡은 그는 이런 상황에서 꽤 노련했다. 강유형만 등장하면, 그의 태도는 마치 주권을 선언하려는 듯한 강렬함으로 즉시 변하곤 했다.강유형의 시선이 우리 손에 잠깐 머물렀다. 하지만 그의 표정에서는 특별히 불쾌한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심지어 그의 목소리도 평온했다.“언제 시작하죠?”그의 질문 의도는 명확했다. 그는 조명 테스트를 보러 온 것이다.“10분 뒤요.”진정우가 답했다.“관측 지점은 어디죠?”강유형이 다시 물었다.진정우의 손이 내 손을 살짝 더 꽉 잡았다. 나는 그를 바라봤고 그도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내 의견을 묻고 있었다.진정우가 이곳에서 이미 수없이 테스트를 봤을 텐데 관측 지점을 모를 리 없었다.하지만 그는 내 의견을 존중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구역마다 관측 지점이 다르고 표시도 되어 있어요. 전체적으로 관측하기 가장 좋은 곳은 관람차죠.”나는 공식적인 대답을 했다.강유형은 내 얼굴을 잠시 바라보더니, 다시 진정우를 향해 물었다.“두 분은 어디서 관측하실 건가요?”그 말의 뜻은 우리와 동행하겠다는 건가?그는 이 상황이 불편하지 않은 걸까?아니, 그럴 리 없다. 이미 그는 다른 사람과 연애 중이고 과거를 다 내려놓았을 텐데.“저희는 우선 전체적으로 한 바퀴 둘러보려고요. 그리고...”진정우가 잠시 멈추고 말했다.“오늘은 공식적인 테스트가 아니라 제가 개인적으로 조명 상태를 지원 씨에게 보여주려고 한 거예요.”강유형의 눈빛에 미묘한 변화가 스쳤다.그러나 그는 차분히 “그래요.” 하고 간단히 대답했다.그 ‘그래요’가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순간적으로 목이 말라왔다. 우리 셋이 같은 관람차 칸에 타자는 뜻일까?뭐라고 말하려던 찰나, 진정우는 내 손을 잡아 다른 관람차 칸으로 이끌었다.“같이 안 타나요?”뒤에서 강유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불편해서요.”진정우는 단호히 말하며 자연스럽게 나를 칸 안으로 올려주었다.그리고 그는 뒤따라 들어와 문을 닫았다.칸 안의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강유형의 얼굴은 단단히 굳어 있었다.그의 시선은 차갑고 무거웠으며 화난 게 분명했다.“일부러 그런 거죠?” 나는 진정우를 보며 물었다.“네.” 그는 담담히 대답했다.“같이 타고 싶지 않아서요.”그 말은 솔직했고 어딘가 뻔뻔하면서도 아이 같은 느낌이 들어 나는 피식 웃음이 났다.진정우는 차갑고 냉정한 모습도 있고 따뜻하고 세심한 면도 있지만 지금처럼 귀엽고 엉뚱할 때도 있다.“정우 씨.”“네?”그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눈을 마주쳤다. 관람차 안의 은은한 조명이 그의 얼굴을 부드럽게 비추고 있었다.“귀여워요.”내가 이렇게 말하는 순간, 관람차 안에서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왔다.타이밍 참 절묘하네.“뭐라고요?”그는 못 들은 건지, 아니면 내 말을 믿기 힘들었던 건지 되물었다.나는 웃음으로 넘기며 대답하지 않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관람차가 천천히 올라가면서 놀이공원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회전목마와 롤러코스터, 워터슬라이드, 그리고 점점 작아지는 놀이공원 전체의 모습이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멀리 보이는 고층 빌딩과 도시의 불빛들까지 어우러져 있었다.조명이 화려하게 바뀌자 시선이 다시 놀이공원으로 돌아갔다.놀이공원 안쪽의 따뜻한 분위기와는 달리, 밖에서 보는 놀이공원의 조명은 도시를 빛내는 상징 같았다.이곳은 단순한 놀이공원이 아니었다. 이 도시의 랜드마크 같은 존재였다.“지원아, 이 놀이공원 마음에 들어? 내가 준 선물이잖아.”갑자기 과거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강유형이 이 놀이공원의 설계도를 내게 내밀며 했던 말이었다.그 순간, 나는 그가 날 사랑한다
다채로운 세상이 그의 손바닥 아래 감춰지자 내 시야는 순식간에 칠흑 같은 어둠에 휩싸였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두렵지 않았다.그가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의 따뜻한 체온이 어떤 빛보다도 큰 안도감을 주었다.“소원을 빌어봐요. 앞으로 제가 지원 씨 곁에 있을 테니 바라는 건 뭐든 이뤄질 거예요.”진정우의 낮고 깊은 목소리가 귀를 간질이며 속삭였다. 마치 첼로 선율처럼 부드럽고 따뜻했다.관람차 안에서는 잔잔한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긴장으로 경직됐던 마음이 그의 말 한마디에 점차 풀려갔다.소원...무슨 소원을 빌어야 할까?부모님이 떠나신 후, 나는 더 이상 무언가를 바라는 게 무의미하다고 느꼈다.강유형과 함께할 때도 마음 한구석에는 우리가 오래도록 함께하기를 바랐다.하지만 그건 마음속에 품었던 작은 바람일 뿐, 진지하게 소원을 빌어본 적은 없었다.지금이라도 소원을 빌어야 한다면...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는 정말로 무엇을 원하는 걸까?머릿속이 복잡해졌고 결국 부모님 생각이 났다. 그들의 죽음과 남겨진 진실.“우리 부모님의 사고 진실을 알고 싶어.”나는 조용히 말했다.“그건 제가 밝혀낼게요.”진정우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나는 피식 웃으며 그의 손을 뿌리쳤다.“그럼 굳이 소원을 빌 필요도 없겠네. 그냥 말하면 해결해 줄 테니까.”진정우는 내 머리를 가볍게 두드렸다.“그래서 좋은 기회를 놓친 셈이죠.”내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원래 이런 거 잘 안 믿어요.”나는 다시 놀이공원의 찬란한 조명으로 시선을 돌렸다.“부모님이 돌아가신 뒤로, 더 이상 하느님 같은 건 믿지 않아요.”그는 이번엔 다정하게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앞으로는 저를 믿어주세요.”그 말은 마치 내 삶의 수호자가 되어 주겠다는 약속 같았다.하지만 그는 알지 못했다. 나는 오직 나 자신만을 믿으며 살아간다는 걸.다시 조명이 빛을 발했다. 여기 조명들은 매 순간 변화해 같은 빛을 두 번 보는 일이 없었다.이 놀이공원의 조명 설계 비용은 전체 투자
파란 바다 위를 달리는 소녀의 모습은 마치 동화 속 '인어공주'를 떠올리게 했다.그녀는 물결 위에서 뛰놀며 가끔씩 빙글빙글 돌기도 했다.너무 아름답고 생동감 넘치는 모습에 마치 현실에서 살아 있는 소녀가 물결 위를 달리고 있는 듯했다.나는 숨조차 멈추며 그 장면에 몰입했다. 눈을 깜박이는 순간이라도 놓치고 싶지 않아서였다.그러다 갑자기 큰 파도가 일면서 새로운 그림자가 나타났다.한 소년이었다.키가 훤칠한 소년은 소녀를 바라보고 있었다.소녀도 그를 바라보다가 몇 초 뒤 그의 품으로 뛰어들었다.“오빠, 난 다윤이라고 해. 오빠 이름은 뭐야?”그 말에 내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물결 위에서 뛰놀던 그 소녀가 바로 나라는 걸 깨달았다.“오빠, 도망가지 마!”“오빠, 나 좀 기다려줘!”...소년은 결국 걸음을 멈추고 소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둘은 손을 맞잡고 함께 달리기 시작했다.“오빠, 나 힘들어. 업어줘.”“오빠, 좀 더 빨리 뛰어봐!”소녀는 소년의 등에 업혀 둘이 물결 위를 함께 뛰었다.나는 눈물이 차오르는 걸 느꼈다.이건 단순한 조명이 아니었다.진정우가 나를 위해 어린 시절의 꿈을 조명으로 재현해 준 것이다.그리고 나는 알게 되었다. 그게 단순한 꿈이 아니었고 실제로 내가 겪었던 일이라는 걸.“오빠, 다윤이는 커서 오빠랑 결혼할 거야.”“꼭 기다려줘야 해. 절대 잊으면 안 돼!”장면이 계속 바뀌면서 나는 모든 퍼즐이 맞춰졌다.진정우가 내 삶에 등장한 건 우연도 아니었고 의도도 아니었다.그건 그가 지켜온 오래된 약속 때문이었다.조명의 아름다움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환상적이었다.마치 동화 속에 들어온 듯했고 동시에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조명의 마지막에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등장했다.그들은 내 기억 속 그대로의 모습으로 서로를 끌어안고 나를 따뜻하게 바라보며 말했다.“다윤아, 행복해야 해.”눈물이 언제 흘러내렸는지조차 몰랐다.단지 조명이 꺼질 때쯤에는 이미 목 놓아 울고 있었다.이때 진정우
진정우와 나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진소영이 마당의 흔들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을 봤다. 바람에 치맛자락이 살짝 날리며 그 장면이 마치 꿈처럼 비현실적이었다.진소영은 책에 몰입해 있었고 우리가 내린 것도 몰랐다. 이때 도성운이 크게 외쳤다.“소영아, 누가 왔는지 봐봐!”“성운 오빠, 엔진 소리가 어찌 크던지 단번에 오빠인 줄 알았어요.”진소영이 웃으며 말했고 그 말에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도성운은 조금 어색해하며 머리를 긁었다.“나만 온 거 아닌데. 다른 사람도 있어.”진소영은 책을 계속 읽으며 아예 신경을 쓰지 않았다. 도성운이 다시 입을 열려고 하자 나는 가볍게 그를 막으며 사뿐사뿐 진소영에게 다가갔다.“이 책 저번에 같이 읽었잖아?”지난번에 봤던 오래된 연애 소설 책이었다. 진소영은 놀란 듯 고개를 돌렸고 나를 보며 눈을 반짝였다.“언니!”나는 환하게 웃었고 진소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내 뒤에 있는 진정우를 보고 급히 책을 던져두고 그에게 달려갔다.“오빠!”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진정우가 진소영을 얼마나 아끼는지 알게 되었다.그는 평소에도 진소영을 많이 챙겼다. 나는 그들 대화를 방해하지 않고 진소영이 읽던 책을 집어 들었다. 「링」이라는 제목의 책이었다. 책이 많이 갈라지고 색이 바래 있었기에 분명 여러 번 읽은 책일 거다.내용이 궁금해져서 책을 넘기다 진소영이 다가와서 책을 빼앗으려 했다.“안 돼요. 보지 마세요.”그녀는 책을 빼앗으며 말했다.“왜? 이 책에 비밀이라도 있어?”진소영은 얼굴이 빨개져서 말했다.“그럴 리가요. 언니는 오빠랑 연애 중인데 이런 소설을 보면 안 되죠.”그녀의 얼굴이 빨개지자, 나는 웃으며 말했다.“아, 그럼 연애 초보인 너에게 딱 맞는 교과서겠네.”“언니!”진소영은 얼굴을 붉히며 나를 쏘아봤다.나는 더 이상 괴롭히지 않고 책을 그녀에게 돌려줬다. 그때 진정우가 내 손을 잡았다.“들어와 물 좀 마셔.”나는 그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진정우가 물을 꺼내
비행기가 착륙할 때쯤, 이미 해 질 무렵이었다.저녁노을이 빨갛게 물든 광경이 너무 아름다워서 가슴이 떨렸다.“이건 내가 본 것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을이야!” 내가 감탄하며 말했다.“나도 그래.” 그러자 진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항상 이렇게 말하지만 나는 이제 별로 감동이 없었다.그런데 차에 앉아 그의 SNS를 보니 조금 전에 본 노을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글귀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네가 옆에 있어서.]한눈에 보면 사진과 글이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지만 비행기 안에서 우리가 나눈 대화를 떠올리니 그 의미가 확 와닿았다. [이건 내가 본 가장 아름다운 노을이야, 네가 옆에 있어서.]진정우는 이렇게 사랑을 표현하는 데 아주 능숙하다.“형, 이번에 결혼식 하려고 돌아온 거야?” 차를 운전하던 남자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그는 진정우의 친구였다. 우리가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그는 우리를 데리러 왔다.“아니. 이번은 아니야.” 진정우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 말은 다음에 한다는 뜻인가?“형수님 미인이시네.” 그 남자가 나를 몇 번이나 슬쩍 바라보며 말했다.“그럼.”진정우는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그 말을 들으니 나도 어쩐지 부끄러워졌다.“형수님 나는 도성운이라고 해요“ 그 남자가 친근하게 자기를 소개했고 나도 웃으며 말했다. “저는 윤지원이라고 합니다.”“알아요. 알아요.” 도성운은 두어 번 반복하며 말했다. “소영이가 매일 말하더라고요. 우리 마을 사람들은 다 알죠. 형수님 이름이 윤지원이란걸.”나는 그제야 부끄러움을 좀 떨쳐내고 있었는데 도성운은 또 다른 말을 덧붙였다.“그래요? 그럼 앞으로 아마 자기 소개할 일 없겠네요.”“그러묭. 이렇게 예쁜 분이 오면 다들 한 번에 이름을 기억할 수밖에 없어요.” 계속되는 칭찬을 들으니 더 이상 말하지 않는 게 현명할 것 같았다.그런데 진정우가 내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보니까, 네가 먼저 분위기 잡은 것 같네.”도성운은 진정우를 많이 존경하고 따라 배우고 싶
그가 진지하게 내게 농담하는 건가?하지만 그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잖아!그래서 나는 그가 진지한 사람이라는 걸 알았고 오히려 순수하지 않은 생각을 하는 사람은 내가 아닌가 싶었다.“안 믿으면 한번 해봐?”진정우의 뜨거운 시선에 내 얼굴이 또다시 붉어졌다.나는 그를 한 번 꼬집으며, 일부러 화난 척했다.“너 계속 듣고 싶어? 안 듣고 싶으면 말 안 할 거야.”“듣을거야!”나는 창밖을 보며, 강진혁이 그때 나에게 했던 말을 진정우에게 전했다.그는 내 마음을 아주 잘 이해한 듯 물었다.“너 걱정되는 거야?”“응, 하지만 나는 강유형이 걱정돼서 그런 게 아니야. 회사가 걱정이야.”내가 그렇게 바로잡자, 진정우는 내 머리를 살짝 쓰다듬으며 말했다.“알아, 너는 이 일이 생각보다 훨씬 복잡할 거라고 느끼는 거지?”진정우는 정말 나를 너무 잘 안다.“너의 걱정이 틀린 건 아닐 거야. 혹시 강진혁이 돌아오는 것도 이미 다 계산된 일일 수도 있어.”진정우의 말에 나는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그럴 수도 있어?”내가 의심하고 있었던 부분을 진정우가 이렇게 직설적으로 말하니, 조금 충격을 받았다. 강진혁이 어떤 사람인지 나는 잘 안다. 그는 늘 나와 강유형을 위해 양보하며, 언제나 성실하고 착한 사람이었으니까.게다가 강진혁은 4년 전에 회사를 떠나고 얼마 전에 돌아왔다. 그렇게 회사를 걱정한다면 굳이 4년 전에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예전에는 몰라도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을 거야.”진정우가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지원아, 사실 너는 남자들에 대해 잘 몰라.”나는 그것에 대해 부정하지 않았다.“그럼 남자의 입장에서 말해봐.”“강진혁이 너 좋아하지?”진정우는 직설적으로 말했다.“응, 나도 이제야 알았어. 예전엔 몰랐고 이번에 돌아와서야 알게 된 거야.”나는 사실대로 말했다.“그는 너를 오래전부터 좋아했어. 강유형이랑 비슷한 시기에 좋아했을 거고 그 감정은 강유형보다 더 강했을 수도 있어.”진정우는 아주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나
그걸 물어볼 필요도 없잖아?누구나 속고 사는 걸 좋아하진 않으니까.나는 그를 바라보며 민감하게 물었다.“혹시, 앞으로 나를 속이려고 하거나 이미 나한테 뭔가 숨긴 거 있어?”진정우는 잠시 침묵했다.“...아니.”그 두 마디가 진실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나는 확실히 내 입장을 밝혔다.“너무 싫어.”그러자 그의 목젖이 조금 움직였다.“알겠어.”만약 그가 나를 속인다면 내가 어떻게 나올지 명확하게 말하고 싶었다.그때 공항 대기실에 비행기 탑승 안내가 나왔고 해외행 비행기였다.나는 본능적으로 강유형을 떠올렸다. 그가 짐을 끌고 보안 검색대로 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해외에 무엇을 하러 가는 걸까?사업 얘기라도 하러? 아니면... “우리 이제 보안 검색대 쪽으로 가자.” 진정우가 내 생각을 끊으며 말했다.“어!” 나는 대답하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 순간, 나는 잠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강유형에게 신경 쓰고 있다는 걸 진정우가 알면 안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진정우의 표정에서는 아무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그럴수록 내 마음은 더 불안하고 조금 죄책감도 들었다. 그래서 나는 먼저 그의 손을 잡았다.“가자.”우리는 보안검색을 무사히 통과하고 비행기도 무사히 탑승했다. 비행기 모드로 전환하기 전, 내 휴대폰에 한 통의 미처 읽지 못한 메시지가 도착했다.강유형이었다.[안전 비행.]그 문자를 보며, 예전에 그가 출장을 갈 때마다 내가 보냈던 메시지가 떠올랐다.그때마다 나는 항상 그렇게 보내곤 했다.어느 날, 강유형은 나를 비웃으며 말했다.“너 그런 말 너무 촌스럽잖아. 다음엔 다른 말로 보내봐. 새로 배운 거 있으면 알려줘.”그 이후로 나는 그 말을 더 이상 보내지 않았다.[안전 비행.]그 문구는 평범하고 진부하지만 내겐 그 무엇보다 중요한 말이었다.부모님이 사고를 당한 이후로, 나는 가까운 사람과 헤어질 때마다 늘 그 말을 떠올린다.다시 볼 수 있을지라는 두려움이 함께 밀려오기 때문이다.하지만 강유형은 내 마음을
“여긴 공항이야, 사람들이 많고 아이들도 있는데.” 진정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알고 있어.”“그런데도...” 내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그러자 진정우는 짧고 단호하게 말했다.“하고 싶어.”그의 단호한 대답을 듣고 나는 본능적으로 그가 강유형을 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질투하는 거겠지.진정우는 강유형을 포기하게 만들려고 그런 걸까?그 생각이 들자 나는 결심하고 눈을 감았다. 심장은 요동치며 공항 대기실에서 진정우의 입맞춤을 기대했다.하지만 그의 입술이 다가오는 대신 내 손에 무게감이 느껴졌다.눈을 뜨고 보니 내 손에 작은 가방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이게 뭐야?” 내가 궁금해서 물었다.진정우는 입술을 살짝 내밀며 내가 열어보라고 손짓했다.내가 의아한 마음으로 가방을 열자 그 안에는 두 장의 카드와 하나의 증명서가 들어 있었다.그 카드와 증명서는 그가 전해주고 싶었던 것들이었다.“이게 무슨 의미야?” 나는 다시 물었다.진정우는 녹색의 책자 하나를 꺼내 들었다.“이건 내가 군 복무를 마친 증명서야. 그리고 이건 내 열정이 담긴 헌혈 증서야. 이 카드들은 내 전 재산이야.”나는 그 말을 듣고 문득 소설 속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에게 전 재산을 보여주는 장면이 떠올랐다.진정우는 내게 재산을 넘기려는 것뿐만 아니라 그의 신념까지도 함께 전하려고 하는 것이다.특히 빨간 헌혈 증서를 보자 갑자기 코끝이 찡해졌다.“이걸 왜 준비한 거야?” 나는 조금 울컥하며 물었다.“너에게 주는 믿음이야. 이게 사랑 보험보다 더 실용적이야.”진정우는 그렇게 말하며 내가 강유형과 사랑 보험에 가입했던 사실을 안 것 같았다.하지만 그게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그가 내게 주는 것이 모든 것 같았다.“이 두 개는 내가 가질게. 하지만 카드는 네가 갖고 있어.”나는 그가 준 돈을 받을 생각이 없었고 돈에 욕심이 없다. 만약 돈에 눈이 먼 여자라면 나는 강유형과 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진정우는 카드를 받지 않고 조금 난처한 듯 말했
“네, 누구세요?”전화를 받으면서 나는 무심코 강유형을 쳐다보았다.그는 나를 보지 않고 혼자서 멀리 있는 의자 쪽으로 걸어갔다.“저는 하트시그널 보험사의 A8338번 직원입니다. 4년 전, 윤지원 씨와 강유형 씨가 저희 회사 사랑 보험에 가입하셨고 이제 보험 만기일이 다가와 관련 정보를 확인하려고 연락드렸습니다.”이 말을 듣고 순간 머리가 띵해졌다. 본능적으로 진정우를 보았다.그는 내 옆에서 자리를 피하고 내가 전화를 받을 때는 멀리 떨어져 앉았다.그는 내게 충분한 개인 공간을 주고 있었다.진정우는 정말 세심하다. 나에게 필요한 안전감도, 여유도 모두 제공해 주고 있었다.“실례지만 두 분 지금 연애 중인가요, 아니면 결혼하셨나요?” 상대방이 조심스레 물었다.그 말에 나는 다시 강유형을 쳐다보았다. 그는 전화를 받고 있었고 표정은 매우 심각해 보였다.“지원 씨?” 상대방이 내 대답을 기다리며 다시 물었다.나는 침을 삼키는 동작을 하며 대답했다. “네, 듣고 있어요. 저희... “‘이미 헤어졌어요’라는 말을 하려는 순간, 강유형이 갑자기 나를 바라봤다.그 순간, 나는 피할 틈도 없이 그의 시선과 마주쳤다.우리는 그렇게 눈을 마주치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 말이 나오지 않았다. “지원 씨?” 상대방이 또 나를 부르며 물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물어봤다. “왜 남자 쪽은 묻지 않나요?”“묻긴 했습니다. 다른 동료가 강유형 씨와 연락 중입니다.” 그의 대답을 들으니 강유형 역시 이 전화를 받고 있다는 걸 알았다. 세상엔 정말 재밌는 일이 많다.나는 입술이 바짝바짝 말라왔다.“우리는 헤어졌어요.”“확실한가요?” 상대방의 말투가 불쾌하게 들렸다.나는 강유형을 바라보던 시선을 돌려, 가까운 곳에 앉아 있는 진정우를 쳐다보며 손에 낀 반지를 살펴보았다.“저는 이미 결혼했어요.”상대방은 잠시 침묵을 지킨 후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지원 씨. 만약 강유형 씨도 같은 답을 하셨다면, 이 사랑 보험 계약은 보험 규정에 따라
내가 그런 말을 했지만 이건 사적인 일이 아닌가?진정우는 내가 이해하지 못한 걸 알아차린 듯 바로 설명해 줬다. “내가 그 사람한테 말한 거야.”“아, 그렇구나.” 나는 대답하고 계속 죽을 먹었다. 그런데 두어 숟갈 먹고 나서 뭔가 이상한 걸 느꼈다. “너 허 대표님하고 그렇게 친해? 내가 대신 휴가를 부탁했더니 대표님이 그냥 허락하고, 오히려 공손하게 나한테 말까지 했잖아?”진정우는 천천히 음식을 먹으며 말했다. “그렇게 친한 건 아니야.”“친하지 않다고? 내가 보기엔 마치 네가 그 사람의... 대표님 같아.”진정우가 한마디만 하면 허진호는 절대 거절할 리가 없어 보였다.“비슷한 거지.” 진정우가 의외로 그렇게 대답했다. “허 대표님이 나한테 새 제품을 개발해달라고 부탁하고, 내가 돈을 벌어줘야 하니까내가 말하면 거절할 수 없어.”대단하네!나는 마음속으로 존경을 표하며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실력이 있는 사람은 역시 자신감 넘치게 말한다. 이게 바로 진짜 실력이지.“우리 늦지 않았어?” 나는 밥을 다 먹고 물어봤다.“괜찮아. 늦으면 그냥 항공편 변경하면 돼.” 진정우는 정말 나를 방임하는 것 같았다. 나는 여전히 이해가 안 돼서 물었다. “왜 그렇게 급하지 않아? 나 좀 재촉해줘도 될 텐데.”“네 마음대로 하게 하고 싶어.” 진정우가 또 닭살이 돋는 멘트를 하자 나는 당황해서 얼른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래도 불만을 털어놨다. “어제 미리 말이라도 해줬으면 내가 준비했을 텐데.”“어제... 내가 말할 기회가 없었잖아.” 진정우의 말에 나도 순간 뜨끔하면서 얼굴이 빨개졌다.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고, 진정우는 살짝 웃으며 내가 당황한 모습을 보며 평온하게 말했다. “너무 서두르지 마. 천천히 해. 부족한 것 있으면 가서 사면 돼.”“일찍 말했으면 내가 준비 안 했을 텐데.” 내가 그에게 짜증을 내며 말했다.진정우는 화내지 않고 또 한마디 했다. “근데 나는 네가 물건 정리하는 모습 보는 게 좋아.”“
“왜 안 받아?” 내가 무심코 물었다.“받을 거야.” 진정우가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그러니까 너는 자지 말고 일어나서 씻고 아침 먹어.”나는 깜짝 놀랐다.“아침 벌써 준비했어?”나는 그가 내 옆에서 자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진정우는 이미 아침을 다 준비하고 내가 일어나지 않자 다시 침대에 돌아와서 나와 함께 공부한 거였다. 역시 뛰어난 사람은 항상 뒤에서 묵묵히 노력하는구나.“응, 내가 계란 죽을 끓였어. 일어나서 좀 먹어.” 진정우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렇게 사랑받는 느낌은 정말 좋다. 마치 내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처럼 느껴진다.진정우는 전화를 받으러 나갔고 나는 손을 이불에서 빼내며 내 손가락에 낀 반지를 보고 사진을 찍어서 SNS에 올리면서 한정판이라고 묘사했다.그리고 다시 SNS를 놀다가 잠시 후에야 일어났다. 그런데 진정우의 전화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나는 별 신경 쓰지 않고 화장실로 향했다.하지만 화장실에 들어가서야 나는 안리영이 준 약이 반 통밖에 남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그 전에 약을 4분의 1만 썼던 것 같은데 그럼 진정우가 사용한 건가? 언제였지?혹시 내가 자고 있을 때? 순간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왜 아직도 안 씻었어?” 진정우의 목소리가 문밖에서 들려왔다.어색하지 않게 하려면 그냥 모른 척하고 넘어가는 게 제일이다. 그래서 나는 그대로 말이 나와버렸다. “너 기다리느라 그래.”진정우가 잠깐 멈칫하다가, 목젖이 살짝 움직였다. 분명, 내 말이 그에게 어떤 자극을 준 거였다. 나는 더 이상 아침에 뭔가 일이 일어나지 않길 바라며, 일부러 신경 쓰지 않는 척하면서 서둘러 씻고 그에게 말했다. “빨리 죽 끓여 놓고 나오는 대로 밥 차려줘.”“안 늦었어.” “지금 몇 시인데 아직도 안 늦었다고 해?” 내가 그를 비꼬며 말했다.“10시 비행기야, 시간 충분해.” 진정우의 말에 나는 동작을 멈추었다. 나는 원래 거울 속에서 그를 보고 있었는데 깜짝 놀라서 고개를 돌려 그
“알았어.” 진정우는 여전히 짧고 간결하게 대답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웃음이 터졌다.“이제야 네가 왜 서른이 넘도록 연애를 안 했는지 알겠어. 네가 너무 재미없잖아.”“너도 내가 재미없다고 생각해?”그는 가볍게 내게 물었다. 연애라는 부분에서 그는 약간 둔한 면이 있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웃으며 말했다.“내 말은 네가 여자 마음을 잘 달래주는 방법을 모른다는 뜻이야.”그는 몇 초 동안 조용히 생각하더니 대답했다.“내 생각엔 달래는 건 속인다는 뜻이야.”그의 참신한 대답에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그럼 내가 널 달래줘야겠어?”진정우가 다시 물었다. 어떤 여자라도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다정함은 좋아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거짓이 아니라 진정한 애정에서 비롯된 것이어야 한다. 나는 과거 강유형이 나를 대했던 방식을 떠올리며 말했다.“아니, 지금처럼 해. 난 너의 방식이 좋아. 너는 정말 특별하니까.”그의 품에 더 깊숙이 기대며 덧붙였다.“내가 프러포즈하면 받아줄 거야?”진정우가 갑자기 화제를 바꾸며 물었다. 나는 그 질문을 들어본 적이 없었기에 당황스러워서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말했다.“안 하면서 뭘 물어?”그 순간, 진정우가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이불 안에서 내 손을 꺼내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만지며 말했다.“윤지원, 나와 결혼해 줄래?”순간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이게 네 프러포즈이야?”“아니, 완전한 건 아니지만 맞기도 해.”그의 애매한 대답에 나는 그를 살짝 때리고 싶었다. 솔직히 내가 처음으로 프러포즈를 받을 거라고 상상했던 장면은 이런 게 아니었다. 한때 나는 내 인생 첫 프러포즈는 강유형이 할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지금 내 앞에 있는 건 진정우였다.그 말을 들으니 얼마 전 강유형이 나를 위해 준비한 놀이공원 프러포즈 이벤트가 떠올랐다.나는 가지 않았지만 이후 몇몇 네티즌이 사진을 찍어 온라인에 올렸다. 그들은 그걸 단순히 오픈 이벤트의 리허설로 생각했겠지만 나는 그것이 나를 위한 것임을 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