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우리 오빠를 사랑해 줘서 정말 고마워요. 우리 오빠를 받아줘서요!”진소영은 그렇게 말하며 두 손으로 정성스럽게 차를 따라 내게 내밀었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그 순간, 내 눈가도 뜨거워지며 코끝이 찡했다.하지만 나는 웃으며 말했다.“어머, 네 말투가 꼭 너희 오빠가 아무도 받아주지 않는 사람처럼 들리네.”진소영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나는 그녀가 건넨 차를 받아 한 모금 마셨다.입안 가득 퍼지는 맑고 청아한 꽃차 향이 정말 일품이었다. 이렇게 순수하고 깔끔한 맛은 처음이었다.역시 이슬 물로 끓인 차는 다르구나 싶었다. 정말 천상의 맛이었다.“언니, 우리 오빠는 저 때문에 여자 친구도 안 사귀었어요. 나중에 자기 부인이 날 싫어할까 봐, 날 귀찮아할까 봐요...”진소영은 말을 이어가다 멈췄다.그녀가 갑자기 말을 멈춘 이유를 나는 알 수 있었다.아마 오빠가 그녀의 병에 대해 내게 말하지 않았을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혹시 내가 그녀가 아픈 것을 알게 된다면 진정우를 싫어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듯했다.나는 담담하게 웃으며 한 모금 더 마신 후 말했다.“네가 몸이 아프다고 해서 내가 너희 오빠를 싫어할 것 같아? 내가 이렇게 예쁜 소녀를 보고도 그런 생각을 한다면 내가 얼마나 나쁜 사람이겠니?”내 말에 진소영은 다시 환하게 웃으며 긴장을 풀었다.그러고는 다시 물었다.“오빠가 제 병에 대해 말했어요?”“그럼. 아니면 내가 이렇게 먼 길을 와서 널 보러 왔겠어? 네가 궁금해서 온 거야. 그리고...”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고개를 살짝 저었다.진소영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그리고 뭐요?”나는 그녀가 오해할까 봐 다시 입을 열었다.“그리고 널 데려가려고 했지. 하지만 이곳을 보니까 내가 널 데려갈 자격이 없는 것 같아.”솔직히 내가 그녀를 데려갈 곳은 이곳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아무리 좋은 환경을 제공한다 해도 이런 자연 속에서의 자유로운 삶과는 다를 테니까.“언니가 절 데려가신다면 전
“언니, 혹시 방법이 있어요?”진소영이 반짝이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나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방법은 분명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진정우조차 시도하지 않은 일을 내가 감히 나서서 할 수 있을까?성공하면 다행이겠지만 실패한다면?진정우가 평생 나를 용서하지 않는 건 차라리 괜찮다.하지만 그가 소영이을 잃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는 건 차마 견딜 수 없을 것이다.“언니도 방법이 없는 거죠?”내 침묵을 희망이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인 진소영의 얼굴이 금세 어두워졌다.그녀는 고개를 숙이더니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오빠도 시도하지 못했어요. 너무 위험하니까요. 어떤 의사가 감히 자신 있게 도전할 수 있겠어요.”그녀는 한숨을 내쉬더니 곧 고개를 들고 맑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변화가 너무 빨라 보여도, 그건 단지 그녀가 나에게 자신의 우울함을 전하고 싶지 않아서일 것이다.“괜찮아요, 언니. 지금도 저는 충분히 행복해요. 얼마나 살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어쩌면 이렇게 오래오래 살지도 모르죠.”그녀의 이런 말이 오히려 내 마음을 더 무겁게 했다.나는 이렇게 예쁘고 순수한 아이에게 희망을 잃게 하고 싶지 않았다.그래서 위로 삼아 말했다.“사실 내 친구 중에 의사가 있어. 해외에서 공부하고 온 사람이거든. 지금은 산부인과 의사지만 그녀에게는 유능한 의사 친구들이 많아. 심장 분야의 전문가도 있어.”“진짜요?”순간 진소영의 눈빛이 빛을 발했다.그 눈빛은 마치 새로운 희망의 불빛처럼 반짝였다.“그럼. 사실 이번에 온 것도 네 상태를 알아보고 싶어서야.”나는 그녀를 달래려고 한 것도 있지만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은 것도 사실이다.물론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다.하지만 진소영의 눈빛 속에서 느껴지는 간절함은 나를 움직이게 했다.그녀에게 단순히 살아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건강한 삶을 누리고 싶은 열망이 느껴졌다.지금 그녀가 지내고 있는 이곳은 누군가에겐 꿈같은 낙원일지 몰라도, 그녀는 분명 이곳을
내 말을 들은 진소영은 얼굴이 새하얘지며 고개를 급히 저었다. 내 손을 꼭 잡은 그녀는 다급하게 말했다.“언니, 그런 오해 하면 안 돼요! 그 사진 속 사람... 그런 거 아니에요. 우리 오빠는 다른 여자를 좋아한 적이 없어요. 언니가 첫 번째예요.”그녀가 겁에 질려 손까지 떨고 있는 모습을 보니 더는 놀리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영이는 심장이 약했다. 작은 충격도 조심해야 했다.나는 그녀를 안심시키려 코끝을 손가락으로 살짝 건드리며 말했다.“왜 그렇게 긴장해? 나 다 알아. 네 오빠가 여자 친구 사귄 적 없다고 했어.”진소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하게 덧붙였다.“그리고 다른 여자아이를 좋아한 적도 없어요.”그 말을 듣자 웃음이 나왔다. 이 아이는 정말 순수했다. 마치 세상에 조금도 물들지 않은 채 자신만의 깨끗한 세계에 사는 것 같았다.하지만 그만큼 마음 한구석에서는 걱정도 들었다.이런 순수한 아이가 언젠가 누군가를 좋아하게 된다면, 그녀만큼 순수한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만약 사랑으로 인해 상처받는다면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나는 그런 걱정을 떨쳐내며 부드럽게 말했다.“알겠어. 네 오빠 정말 순수하다는 거 알아. 내가 잘 지켜줄게.”그러자 진소영은 다시 웃었다.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벽에 걸린 사진들을 살폈다. 겉으로는 신경 쓰지 않는 척했지만 여전히 진정우가 소녀를 업고 있는 사진이 마음에 걸렸다.그 소녀는 분명 진소영이 아니었다. 만약 소영이었다면 그녀가 그렇게 긴장하며 해명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그렇다면 사진 속 소녀는 누구일까?이웃집 아이? 아니면 친척? 지금쯤은 다 자랐겠지. 혹시 드라마처럼 갑자기 나타나 “정우 오빠!”라며 찾아오는 건 아닐까?생각이 지나치게 앞서가고 있다는 걸 깨닫고 스스로 피식 웃었다. 이렇게까지 상상하다니, 나도 참 한가하다 싶었다.다시 진정우네 가족사진으로 눈길을 돌렸다. 이번에는 그의 아버지 얼굴에 시선이 멈췄다. 묘하게 익숙했고 마치 어디선가 본 적 있는 얼굴 같았다.“아
진소영은 단순한 동생이 아니었다. 진정우가 마치 딸처럼 키운 존재였다.그런 애틋한 마음이 있었기에, 강철 같은 그도 이렇게 조심스럽고 신중한 사람이 되었겠지.소영이는 진정우와의 추억을 하나둘 들려주었다.이 작은 집은 진정우가 직접 벽돌 하나하나 쌓아 올려 지은 곳이라고 했다.집에 있을 때는 물고기를 잡아 구워주곤 했고 그의 요리는 모두 소영이를 위해 연습한 결과라고 했다.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진정우를 조금 더 이해하게 되었다.책임감과 외로움 속에서 그의 특별함이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니 마음이 아려왔다.소영이는 이야기를 하다가 어느새 잠이 들었다.그 평온한 얼굴을 바라보며 문득 진정우에게 전화를 걸고 싶었다."앞으로는 내가 당신을 더 아껴줄게. 혼자 감당하지 않게."하지만 그 충동은 잠깐 스쳤을 뿐, 행동으로 옮기진 않았다.그런 말은 말로 하는 게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줘야 하는 거니까.하지만 대신 안리영에게 전화를 걸었다.“너 어디야?”피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딘가 상태가 좋지 않은 듯했다.“너 왜 이래? 수술 끝난 거야? 피곤해 보여.”“아니, 아파서 그래.”그 말에 순간 놀랐다. 안리영이 아프다는 말은 좀처럼 듣기 힘들었으니까.“무슨 일이야? 약은 먹었어?”“응. 별일 아니야. 과로 때문이야.”안리영는 담담하게 대답했다.“근데 너 어디야? 무슨 일 생겨서 도망친 거 아니지?”그 말에 나는 웃음이 나왔다.“내가 그런 사람으로 보여?”“아니, 넌 그런 사람 아니지.” 그녀는 나를 잘 알고 있었다.“사실 부탁 하나 하려고.”나는 진소영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런데 그녀가 한참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왜? 네 쪽에 아는 사람 없어?”잠시 정적이 흐른 후에 안리영이 입을 열었다.“...있어. 네 말로 보면 가능할 것 같긴 해.”“정말? 고마워.”그녀의 목소리에 담긴 묘한 분위기를 눈치채지 못한 채 나는 고마움을 전했다.하지만 그녀는 곧 뜻밖의 말을 꺼냈다.“근데 그 사람한테 연락하기 싫어.
진소영은 내가 떠나는 게 아쉬운 듯, 어떻게든 붙잡고 싶어 했다. 그녀의 세상은 너무나도 외로웠으니까.나는 단 이틀의 휴가만 받았지만 그녀와 더 시간을 보내기 위해 허진호에게 연락해 이틀을 더 연장했다. 하지만 결국 떠나야 할 시간은 찾아왔다.소영이는 내가 떠나는 길에 마시라고 작은 병에 담은 이슬 꽃차를 건넸다.“언니, 이거 꼭 가져가세요.”게다가 꽃가루와 꽃잎으로 만든 음식을 정성껏 포장해 주며 마치 그녀가 가진 모든 것을 나눠주려는 것 같았다.그녀의 마음이 너무나도 고마워 가슴 한편이 저렸다.“언니, 나중에 꼭 다시 와주세요.”소영이는 내 얼굴을 보지 않고 말했다.그녀의 눈에 맺힌 눈물을 들키지 않으려는 것이 분명했다.나 역시 코끝이 찡해져 목소리를 내기가 어려웠다.“응, 꼭 올게.”나는 짧게 대답하며 마음을 다잡았다.이별은 늘 아픈 법이다.나는 소영이를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내 친구가 좋은 의사를 알아봐 주고 있어. 연락되면 네 오빠랑 같이 데리러 올게.”“정말요? 기다릴게요.”그녀의 반짝이는 눈빛을 보며 나는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았다.갈 때는 기차를 탔지만 돌아올 때는 비행기를 선택했다. 피곤했던 나는 비행기에서 깊이 잠들었다. 안리영에게 연락하니 공항에 도착하면 바로 병원으로 오라고 했다.꿈속에서는 며칠 동안 소영이와 함께했던 시간들이 떠올랐다.함께 꽃을 다듬고 강물에서 빨래하고 밤새 이야기를 나누었던 순간들. 그 따뜻한 기억들이 나를 가득 채웠다.착륙 후 곧장 택시를 타고 수리센터로 향했다.가는 길에 휴대폰이 울려서 봤더니 발신인은 강유형이었다.그가 조나연과의 관계를 공개한 후 나를 거의 찾지 않았기에 이번 전화는 의외였다.“지원아, 우리 아버지가 정말 하룻밤 만에 머리가 하얗게 셌다는 게 사실이야?”그 말에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며칠이 지난 지금에서야 이런 사실을 알게 된 것도 기가 막혔고 나에게 이런 질문을 한다는 것조차 어이가 없었다.“직접 가서 보면 되잖아.”나는 냉정하게 말했다.내가
나는 강유형이 무슨 부탁을 하려는지 짐작할 수 없었지만 일부러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는 이어서 말했다.“우리 부모님은 지금 도저히 조나연을 받아들일 수 없어. 특히 엄마가 더 심하셔. 그래서 네가 엄마한테 좀 나연이 좋게 말해 줄 수 없을까?”나는 정말 기가 막혔다.나에게 조나연을 위해 좋은 말을 해 달라니. 제정신으로 하는 말인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아니면 나를 너무 만만하게 보고 있는 걸까?“강 대표님, 만약 저한테 그 부탁을 하실 거라면 미리 말씀드리지만 기대하지 마세요.”나는 굳이 착한 척할 필요가 없었다.“지원아...”“강유형! 내가 천사도 아니고 나랑 조나연은 아무 상관도 없는데 내가 왜 좋은 말을 해줘야 해?”나는 단호하게 되물었다.잠시 침묵이 흐른 뒤, 그는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너 혹시... 질투하는 거야?”“질투?”나는 비웃듯 웃으며 말했다.“아, 날 질투심 많은 사람으로 몰아가고 싶었던 거야? 그렇다면 실망할 텐데. 나 질투 안 해. 오히려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네 본모습을 빨리 알게 됐으니까.”그는 한숨을 쉬었다.“지원아, 그냥 겉보기에 그럴 뿐이야. 내가 빚진 게 있어서 그래. 사실 우리 사이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어...”나는 그의 말을 듣기도 싫어 차갑게 끊어버렸다.“그건 네 일이야. 나랑은 아무 상관 없잖아.”“하지만 너 말고는 내가 얘기할 사람이 없어.”그의 목소리는 낮고 답답해 보였다. 평소 당당하던 그에게서 보기 힘든 모습이었다.그러나 이제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우리는 성인이었고 각자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한다.“미안하지만 난 바빠.”나는 말을 마치고 전화를 끊었다.수리점에 도착해 차를 찾은 뒤, 나는 바로 안리영을 만나러 갔다.이 며칠 동안 진정우는 연락이 없었다. 아마 내가 진소영과 함께 있다는 걸 알고 배려한 듯했다.이소희는 며칠 전 나에게 문자를 보냈다. 조명 조정 작업이 거의 끝났고 진정우는 밤을 새워 조명을 테스트하고 있다고 했다.전에 여유를 부리
안리영은 늘 상황을 명확히 파악하는 사람이었지만 시도조차 하지 않고 결과를 단정 짓는 경우가 있었다.이 점에서 나와는 성격이 달랐다. 하지만 사람마다 성격과 생각이 다른 법이고 내가 그녀의 인생에 간섭할 수는 없었다.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각자의 선택은 존중해야 한다.나는 안리영의 집에서 하루를 묵은 뒤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진정우는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아래층 아주머니는 나를 보자마자 물었다.“남자 친구랑 여행이라도 갔니? 며칠 동안 둘 다 안 보이더라.”그제야 진정우가 집에 한 번도 돌아오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이소희는 진정우가 바쁘다고 말하긴 했지만 나 때문에 여기에 거주하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내가 집에 있으면 매일 돌아오고 내가 없으면 집에 올 이유를 찾지 못하는 거겠지.그가 오지 않는다면 내가 가면 되는 일이었다.놀이공원에 도착하자 이소희가 나를 보며 달려왔다.그녀는 아무 말 없이 나를 안더니, 내 어깨를 두 번 세게 툭툭 쳤다.“언니, 진짜 너무해요. 이렇게 오랜만에 오다니!”그녀의 ‘가벼운 터치’는 꽤 아팠다. 그리고 마치 내가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사람처럼 굴었다.“그래서 지금이라도 왔잖아요.”나는 웃으며 그녀의 등을 토닥거렸지만 시선은 이미 진정우를 향해 있었다.진정우는 안전모를 쓰고 안전벨트에 매달린 채 높은 곳에서 점검 중이었다.그런데 그는 이미 나를 보고 있었다.나는 손을 흔들며 인사했고 그는 옆의 버튼을 눌러 천천히 내려왔다.나는 웃으며 이소희에게 물었다.“왜 그래요? 또 정우 씨한테 또 혼났어요? 표정이 왜 그래요?”“아니에요. 요즘 저 사람 많이 좋아졌어요.”이소희는 나를 빤히 보더니 말했다.“언니, 진짜 변했어요. 예전 같지 않아요.”그 말에 나는 조금 놀라 물었다.“제가요? 어떻게요? 못생겨졌어요? 아니면 더 탔나요?”최근 며칠 동안 진소영과 지내면서 자연 속에서 마음껏 놀았다. 해를 쬐고 바람을 맞으며, 강물에서 첨벙거리다 보니 피부가 살짝 탔을지도 몰랐다.“아니요, 그런
진소영은 분명 내가 다녀간 후 모든 걸 진정우에게 털어놨을 것이다.“그곳이 마음에 든다면 나중에...”진정우가 말을 멈췄다. 그러자 나는 미소를 띠며 물었다.“나중에 뭐요?”그의 목젖이 한 번 움직였다. 그리고 천천히 말을 이었다.“나중에... 그곳에서 여생을 보낼 수도 있겠죠.”“저 혼자요?”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었다.“제가 같이 있을게요. 당신이 원한다면.”그는 여전히 솔직했다.그 순간, 나는 슬쩍 뒤로 물러섰다.‘나중’이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는 생각보다 크다. 특히 ‘여생’ 같은 먼 미래라면 더욱 그렇다.“소영이를 위해 전문의를 찾아봤어요. 그녀의 진단 기록을 제게 주세요.”나는 화제를 바꿔 말했다.어젯밤 안리영은 늘 현실을 회피한다고 속으로 비난했지만 사실 나 역시 다르지 않았다.나 또한 현실에서 도망치려는 경향이 있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진정우를 붙잡아두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예전에 안리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사람은 원래 너무 쉽게 얻은 건 소중히 여기지 않아.”그 말이 떠오르자 괜히 마음이 복잡했다.진정우는 잠시 말이 없었다.그의 침묵은 소영이에 대한 걱정에서 비롯된 것이 분명했다.“우선 소영이의 상태를 확인한 뒤 수술 위험성을 알아볼게요. 최종 선택은 정우 씨가 하세요.”결국 나는 선택의 권한을 그에게 넘겼다.“이미 알아봤어요. 그녀의 수술은 일반적인 심장 수술보다 훨씬 위험해요. 혈액형이 특이한 데다...”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조용히 덧붙였다.“몸에 다른 문제도 있어요.”나는 깜짝 놀라 되물었다.“다른 문제라뇨?”정확히 알아야 의료진에게 제대로 전달할 수 있었다.그는 옆으로 두 걸음 물러나더니 난간을 붙잡았다.나는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그의 무거운 표정을 보니 가슴이 저릿했다.“정우 씨... 무슨 문제죠?”“소영이는 선천적으로 뇌에 종양이 있어요. 수술도 불가능한 상태입니다.”의학 지식은 부족했지만 뇌에 종양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위험한지는 알았다.“언제부터 그런 건가요? 아
내 말에 용진표는 미소를 지었다.“똑똑한 여자네. 다음 생에선 좋은 집안에 태어나기를...”그는 말을 끝내자마자 일어섰고 나는 몸이 갑자기 앞으로 기울며 그가 신발을 신고 있는 곳으로 거의 쓰러질 뻔했다.용진표의 경호원이 바로 다가와 나를 붙잡으려 했지만 그는 이를 막았고 대신 나를 매섭게 쳐다보며 말했다.“이제 사실을 다 알았으니 뭘 더 하고 싶어? 내가 널 풀어줄까?”나는 그가 날 풀어주길 원했고 나는 아직 죽을 수 없었다. 이렇게 죽으면 너무 억울할 것 같았다.“대표님이 말한 내용이 믿기지 않아요. 내가 원하는 건 대표님이랑 저랑 삼촌과 셋이서 마주하게 해주세요. 아니면 삼촌에게 전화라도 해서 제가 듣고 싶은 말을 하게 해주세요”이 말은 진심이었고 또한 나는 사실 시간을 끌고 싶었다. 시간을 끌어서 누군가가 나를 구하러 오게 하고 싶었다.하지만 누가 나를 구하러 올까?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용진표를 계속해서 바라보며 그를 붙잡고 있었다.하지만 이번에는 그가 나를 무시하고 경호원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 순간 나는 끌려 나갔다.용진표가 떠난 뒤 나는 다시 손발이 묶인 채로 갇혔고 그의 말이 계속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내가 그동안 삼촌과 아줌마한테 받은 친절이 정말 진심이 아니었던 걸까? 그들이 나를 잘 대해준 이유는 부모님에 대한 죄책감 때문일 뿐이었을까? 아니면 그저 내가 강유형을 살릴 수 있는 피가 있어서?’나는 그렇게 믿고 싶지 않았다. 그들은 내게 십 년 동안 변함없이 잘해줬고 그게 가짜라고 생각하기엔 너무 긴 시간이었다.그러니 아마 용진표가 나를 속이고 있을지도 몰랐다.‘그런데 왜 나를 속여야 하는 걸까? 내가 삼촌과 아줌마를 미워하도록 만들기 위해서?’하지만 용진표는 지금 날 죽이겠다고 했으니 내가 그들을 아무리 미워한다고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그렇게 나는 앉아서 고민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밖의 빛이 점점 어두워지는 게 느껴졌다. 심지어 나를 지키는 사람도 없어진 것 같았다.‘용진표가 나를 굶겨 죽일
몸을 앞으로 기울여 내 얼굴을 응시하던 용진표는 미소를 지었다.그가 왜 웃는지 알 수 없었지만 나는 그를 계속해서 쳐다봤다. 마치 그가 나한테 대답하지 않으면 절대로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이 말이다.그가 웃음을 멈추고 나서 말했다.“그러면 너한테 사실을 제대로 알려 주고 죽일게. 왜냐하면 네 부모님이 다른 사람의 돈길을 막았으니까.”그 말에 나는 바로 그와 계약하려던 그 계약서를 떠올렸다.“다른 사람의 돈길을 막았다고요? 그게 왜 제 부모님과 상관이 있나요?”나는 다시 의문을 제기했고 용진표는 웃으며 말했다.“아가씨,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어떻게 돈을 벌었는지 잊었어?”그 말에 나는 깨달았다. 그도 다른 사람한테서 돈을 받았다는 뜻이었다.“그 사람이 누구죠?”나는 급히 물었지만 용진표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나에게 되물었다.“네 생각에는 누구일 것 같아?”내 부모님의 죽음은 결국 그 계약 때문이었고 그 계약은 결국 삼촌에게 넘어갔으니... 바로 그 사람일 것이다.전에도 한 번 의심은 했었지만 용진표는 그 의심을 지워버렸고 심지어 삼촌이 그 계약으로 번 돈을 나에게 따로 저금해 두었다고까지 했다.지금 그가 이렇게 암시하자 나는 정말 혼란스러웠다.“용 대표님, 나이가 드셔서 기억이 잘 안 나세요? 예전에 대표님은 저에게...“내 말투는 점점 자신감이 없어 보였고 그는 줄곧 웃고 있었다. 용진표가 방금 말한 것처럼 그는 다른 사람의 돈을 가지고 대신 일을 처리해 준다고 했으니 그의 말이 전부 사실일 수는 없었다.나는 그런 생각을 하기도 싫었지만 용진표가 계속해서 그런 걸 암시하니 믿을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지금 여기 있는 것도 남의 돈 받고 일을 하시는 거 맞죠?”내가 다시 묻자 용진표는 가볍게 웃었다.“내 생각이 맞았어. 네가 이렇게 똑똑한데...”그의 말에 나는 혼란스러워졌고 몸을 살짝 흔들며 대답했다. “믿을 수 없어요. 대표님이 저를 속이고 있는 거겠죠.”“내가 너를 부모님에게 보내 주려고 하는데 왜 굳이 널 속이겠어
나는 그녀를 보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그녀가 점점 흐려지기 시작했다. 나는 머리를 흔들며 무언가 말하려고 했지만 그때 함소은이 말했다. “용진표의 아내가 꿈을 꾼 게 아니라 용진표가 지원 씨를 만나고 싶다고 했죠.”“뭐라고요?”내가 말을 끝내기 전에 갑자기 나는 함소은이 완전히 보이지 않았다. 그 뒤로 나는 몸이 뜨는 느낌이 들었고 귀에 함소은의 목소리가 들렸다.“잠깐만 자고 있어요.”나는 왜 자야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입을 열지 못했다. 내 몸이 들어 올려지는 걸 느꼈지만 나는 눈은 뜨지 못했고 말도 할 수 없었다.어디론가 데려가졌고 그곳에서 물을 먹은 후 나는 눈을 떴다.눈에 들어온 것은 낯선 큰 남자였고 그가 바로 용진표의 경호원이었다.의식이 흐릿해지기 전에 함소은이 말한 내용을 떠올렸고 나는 이제 모든 걸 알았다. 나는 몸을 조금 움직이며 그에게 물었다.“용진표는 어디 있어?”그 사람은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돌아서서 나갔다.나는 손과 발이 묶여 움직일 수 없었고 눈앞에 보이는 곳은 폐차장이었고 주변에 낡은 타이어들이 쌓여 있었다.그 모든 상황을 파악한 나는 용진표가 나를 잡아둔 이유를 곰곰이 생각했다.그는 아마 내가 그가 한 일을 알게 되는 걸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게다가 내 몸까지 묶었으니 나한테 별로 좋은 일이 벌어질 것 같지 않았다.막심한 공포가 밀려왔지만 나는 스스로를 진정시키려고 애썼다.밖에는 용진표의 경호원이 서 있었고 내가 물을 마시고 깨어났으니 이제 아마 용진표가 올 것 같았다.얼마 지나지 않아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렸고 경호원이 형님이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갇혀 있는 문이 열리자 용진표가 들어왔다. 그는 오늘 마치 무술 도복 같은 흰색 옷을 입고 있었다.“아가씨, 또 만났네.”용진표가 웃으며 말하자 나는 겁먹지 않고 대답했다.“용 대표님, 이런 식으로 만나는 건 영 마음에 들지 않아요.”“마음에 들지 않으면 왜 날 자꾸 자극한 거야?”그가 내 앞에 서자 경호원은 의자
“진정우 씨.” 나는 평범한 동료처럼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인사를 했지만 진정우는 아무 말 없이 나를 쳐다보았고 우리는 그냥 스쳐 지나갔다.하지만 그 순간 내 얼굴에 있는 미소가 조금 씁쓸하게 느껴졌다. 나는 회사 차를 몰고 함소은이 말한 곳으로 갔다.내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 함소은은 아직 오지 않았다. 나는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냈고 그녀는 먼저 자리를 찾아 앉아 기다리라고 했다. 그녀를 기다리면서 나는 다시 휴대폰을 열었고 그때 진소영이 보낸 메시지를 받았다.스크롤을 위로 올려보니 진소영이 보낸 메시지는 거의 다 자책과 내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진정우를 변호하는 내용도 있었지만 나는 딱 한 번만 답을 보냈고 그 후에는 다시 답하지 않았다.[언니, 보면 답장해 줘. 오빠가 나를 방에 가두고 나가지 못하게 해요.]진소영의 메시지를 보고 한참 생각한 후에야 나는 그녀에게 답을 보냈다.[소영아, 나는 괜찮고 이젠 정상적으로 출근하고 있어. 그리고 나랑 네 오빠 사이에 대해선 더 이상 얘기하지 않아도 돼.]그러자 그녀는 바로 답을 보냈다. [언니, 오빠는 언니를 정말 사랑해요. 정말이에요. 맹세해요.]나는 답하지 않았고 그때 다시 메시지가 왔다.[오빠가 언니에게 죽을 끓여줄 때 정신이 없어서 팔까지 데었어요.]그 메시지를 보자 나는 그가 버린 죽을 떠올리며 여전히 답하지 않았다. [오빠가 언니한테 죽을 가져가고 돌아와서 잠도 자지 않고 창문 앞에 서 있었어요. 담배도 피웠고요.] [언니, 나는 언니와 오빠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요. 하지만 언니, 오빠한테 다시 기회를 주면 안 돼요?][언니와 오빠가 이렇게 지내는 걸 보면 마음이 아파요. 난 평생 혼자 살아도 괜찮으니 그냥 언니 오빠가 행복하게 살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그 메시지를 보고 나는 웃음을 지었고 동시에 진소영이 소지훈에 대한 짝사랑을 떠올렸다.나는 또 한 번 메시지를 보냈다. [소지훈이 너한테 연락했어?][아니요!]진소영은 눈물 나는 이모티콘을 덧붙
나는 숨이 잠시 멈췄고 그의 눈빛과 마주쳤고 그는 나를 바라보며 조금도 피하지 않았다.그는 언제나 정직하고 대범하게 대했지만 나는 항상 마음이 불안했다. 마치 헤어진 게 딱 내 잘못인 것처럼 말이다.“호랑이도 자기 말하면 온다더니... 정우 씨, 방금 윤 부장님과 정우 씨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어요.”허진호는 능글맞게 말을 이어갔지만 진정우는 그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네.”“정우 씨에 대해 뭐라고 했는지 궁금하지 않아요?”허진호는 정말 끝내주는 재치로 우리를 괴롭혔다. 진정우는 아무런 말도 없이 고개를 숙였고 허진호는 코를 문지르면서 다시 말을 이어갔다.“정우 씨가 살이 빠졌다고 말했어요. 그리고 또 뭐라고 했던가...”허진호는 말을 잠시 멈추더니 나에게 눈을 찡긋했다.“윤 부장님, 정우 씨에게 알려주지 말자고요.”“하하.”나는 속으로 찐웃음이 터져 나와서 입꼬리가 조금 올라갔고 진정우가 딱 그 순간 나를 바라봤지만 나는 시선을 돌렸다.그가 나를 원하지 않았기에 나도 진정우 없이 잘 살 수 있는 모습을 증명하고 싶었다.점심때, 나는 항상 전화를 걸지 말지 고민했던 함소은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는 그녀가 용진표랑 함께 있어서 불편할까 봐 전화하지 않았다.“어떻게 됐어요? 괜찮아요?”전화를 받자마자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오늘은 잘 피했어요.”함소은이 가볍게 말했다.그녀가 어떻게 피했는지 묻지 않았다. 이 여자는 용진표의 곁에서 몇 년이나 보내면서도 여전히 복수를 품고 살아왔다. 그리고 그에게 아이까지 낳은 여인이라면 그만큼 능수능란한 사람이기 때문이다.처음 그녀를 봤을 때 나는 그녀가 단지 외모를 과시하는 여인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했던 내 자신이 정말 부끄러웠다.“그럼 다른 이유로 저한테 전화한 거예요?”“지원 씨가 찾으라고 한 사람을 찾았어요. 그래서 직접 만나보고 싶은지 물어보려고 전화했어요.”나는 예상보다 일이 빨리 진행되고 있다는 말에 조금 놀랐고 이내 흥분해서 대답했다.“가능하다면 직접 만나고 싶어요
“쫓아갈 거야?”나는 쫓아가서 꼭 물어보고 싶었다.하지만 쓰레기통에 버려진 도시락을 보니 더 이상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다.그가 버린 것은 도시락도 음식도 아닌 나에 대한 마음이었다.그렇다면 내가 쫓아가서 물어본다고 해도 결국 스스로 굴욕을 찾는 일이었다.나는 마음을 되돌리고 도시락을 다시 내려놓고 내 병상으로 돌아갔으나 이제는 젓가락을 다시 들고 음식을 먹을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무거웠다.도시락을 주운 사람은 그 변화를 눈치챘는지 조심스럽게 도시락을 다시 내 앞에 놓았다.“가져가세요.”“아, 아니에요...”그 사람은 손을 움켜잡으며 물러섰다.“당신이 주운 거니까 그냥 가져가세요. 게다가 시름 놓고 드시면 돼요. 맛은 있을 거예요.”나는 한숨을 쉬며 음식을 다시 집어 들었다. 분명히 화가 나 있었지만 그런데도 다시 먹기 시작했다.강유형은 옆에서 음식을 먹으려는 내 손을 살짝 눌렀다.“내 음식한테 화내지 마.”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진정우는 아마 내가 여기에 있는 걸 보고 떠난 거 같아.”그 말에 나는 잠시 멈췄다. 방금 강유형이 내 입술 옆을 닦아준 걸 생각하니 마음이아팠다.‘아, 이거 정말... 오해는 점점 더 깊어만 지는구나.’내가 잠시 멍하니 있을 때 강유형은 내가 먹던 음식을 쥐고 아무 말 없이 그것을 치웠다. 그리고 도시락을 손에 쥐고 나가려 했다.그가 어디로 가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그런데 그때 아줌마에게서 전화가 왔다.“지원아, 유형이 너한테 음식을 가져왔을 때 별문제 없었지?”나는 순간적으로 멍해졌다.“아, 아줌마, 무슨 일이에요?”“유형의 입가에 상처가 있더라고. 싸운 거 같아서...”아줌마의 말에 나는 깜짝 놀랐고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설마 강유형이 나가서 진정우랑 싸운 거 아니야?’하지만 난 결국에 이 말을 내뱉지 않았고 아줌마는 또 몇 마디 했고 마지막으로 만두랑 음식이 맛이 어떤지 물었다.전화가 끊기자 나는 병원을 떠났다.다음 날 나는 회사에 갔고 마침 약속이
“잠깐만.”내 말을 들은 강유형은 재빠르게 일어섰다.지금의 그는 내게 무언가를 부탁할 때마다 언제든지 응해주고 내가 부탁하지 않아도 먼저 다가오는 그런 사람으로 변해버렸다.만약 예전에도 이렇게 했다면 아마 난 강유형과 그렇게 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세상에 만일이라는 건 없었고 나는 이미 지나간 일에 대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그를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며 우연히 그의 휴대폰을 봤다. 화면이 멈춰 있었는데 그 영상 속에는 아마 3년 전의 내 모습이었다.나는 그때 내가 뭘 했는지 왜 그런 영상을 찍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휴대폰을 빼앗아 보고 싶었지만 또 그럴 수는 없어서 고민하던 그 순간 강유형이 물을 가지고 돌아왔다.그는 내가 휴대폰을 보고 있다는 걸 알았고 얼굴에 당황한 기색 없이 자연스럽게 웃으며 말했다.“네가 잠드는 동안 예전 사진과 영상을 좀 봤는데 지금 넌 예전보다 훨씬 더 예뻐졌더라.”나는 물을 마시며 그가 한 말에 이어서 대답했다.“그러면 예전엔 내가 안 예뻤다는 거네? 그래서 네가...”“그만해.”그가 내 말을 끊었다.“그 사람은 더 이상 언급하지 마.”물 몇 모금 마시자 나는 목이 좀 편해졌다.“조나연 그 일은 이제 다 정리한 거야?”나는 젓가락으로 목이버섯을 집어 입에 넣으면서 물었고 그 상큼하고 새콤한 맛에 기분이 좋아졌다.강유형은 휴대폰을 다시 들고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그저 그 화면을 보고 있었고 나도 그저 맛있는 음식을 즐기고 있었다.좀 더 먹으려던 찰나 강유형이 입을 열었다.“완전히 깨끗하게 끝냈어.”그 말에 나는 조금 더 생각했다. 그때 그 여자가 남긴 독한 말들을 떠올리며 이 일은 그렇게 간단히 끝날 일이 아닐 거라는 걸 알았다. 그러나 강유형이 이렇게 말하니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고 다시 음식을 먹을 준비를 했다.“알겠어.”“잠시만.”그때 강유형이 나를 막아 나서면서 손으로 내 입술 옆에 묻은 기름을 닦아 주었다.“기름이 묻어서.”나는 입술
강유형은 결국 강진혁의 불편한 기색을 눈치챘다.나는 물을 한 모금 마시며 대답했다.“그건 직접 물어봐야 할 거야. 그리고... 나는 지금 아무에게도 마음이 없어.”그러자 강유형은 무표정하게 말했다.“너무 자주 말하지 않아도 돼.”“사실을 말한 것뿐이야.”나는 말을 마친 후 기침을 두 번 했고 그러자 강유형은 내 등을 두드려 주었다.“진정우는 네가 사고를 당한 걸 몰랐어?”강진혁의 말은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컵 안에 있는 뜨거운 물의 온기가 몸의 차가움을 녹여주었지만 마음속의 차가운 느낌은 사라지지 않았다.“왔었어. 그리고 다시 갔어.”강유형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고 나는 물컵을 그에게 건네며 말했다.“나 좀 자고 싶어.”내가 눕자 강유형은 그 자리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나는 열이 나서 눈꺼풀이 무겁고 잠에 빠져들기 직전에 강유형의 목소리가 들렸다.“나와 헤어질 때는 네가 이렇게 아프지 않았던 것 같은데.”‘뭐라고 하는 거야?’사실 맞는 말이었다. 강유형과 헤어질 때 지금처럼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은 없었다.“아마 너는 천천히 칼날로 내 마음을 줄곧 찔렀기 때문에 난 아픔에 익숙해졌겠지.”내가 목소리를 낮춰 말하며 뒤로 돌아누웠고 결국 깊은 잠에 빠졌다.나는 밥 냄새에 잠이 깼다. 눈을 떴을 때 강유형이 침대 옆 의자에 앉아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본 내용에 몰입한 듯 내가 깬 줄도 모르고 있었다.하지만 나는 정말 배가 고팠다. 침대 옆 식탁에 놓인 음식을 보며 일어나 보려고 했지만 몸의 상처가 아파서 움직이지 못하고 냉큼 숨을 쉬었다.강유형은 그 소리를 듣고 급히 휴대폰을 내려놓고 다가와 나를 부축했다.“깨어났어? 나한테 말하지.”“배가 고파.”나는 불필요한 말을 하지 않고 간단히 말했고 그는 웃으며 말했다.“알겠어. 네가 배고플 줄 알았어. 예전처럼 감기나 열이 나면 깨자마자 먹는 게 첫 번째잖아.”듣고 보니 난 확실히 그랬었다. 다른 사람들은 병에 걸리면 입맛이 없다고 하지만 나는 배가 고팠다.
옆에 있던 강진혁은 눈빛이 어두워졌다. 방금 그가 내가 머리를 만져준다고 했을 때 난 바로 피했고 강유형이 나를 만졌을 땐 나는 거부하지 않았기에 그는 불편함을 느꼈을 것이다. 나라고 해도 그 상황이면 서운했을 것이다.하지만 우리가 그동안 얘기를 나누었고 강진혁은 별다른 표정을 지어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내가 그를 볼 때 그는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농담을 던졌다.“넌 아직도 강유형의 친밀한 행동에 익숙한 거 같아.”“......”“그건 당연한 소리지. 지원이는 거의 내 아내가 될 뻔했으니까.”“......”“맞아. 거의였지.”강유형은 강진혁을 바라보며 미소를 띠었고 그의 얼굴에는 장난기 어린 표정이 가득했다.“아무래도 이마가 좀 뜨거운 것 같아.”강유형은 말을 끝내며 지나가는 간호사를 불렀다.“체온계 좀 줘봐요.”“괜찮아. 아마도...”내가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강유형이 끊었다.“괜찮은 건지는 그건 네가 스스로 판단할 일이 아니야.”강유형의 말에 간호사는 바로 체온계를 가져와 내 이마에 대었다.“37.7도입니다.”그러자 강유형은 간호사에게 말했다.“의사에게 상황을 좀 전해주세요. 그리고 혈액 검사 결과가 나왔나요? 감염인지 아니면 그냥 물에 젖어서 감기가 온 건지 확인해 주세요.”강유형은 정말 전문가처럼 말을 이어갔다.‘모르는 사람이 보면 의사인 줄 알겠네.’간호사는 대답하고는 떠났고 강진혁은 나에게 따뜻한 물을 부어줬다.“따뜻한 물이라도 마셔. 아마 그냥 몸이 얼어서 그런 거 같아.”두 형제가 이렇게 나를 챙겨주는 모습이 정말 감동적이지만 그만큼 부담도 컸다.나는 그들이 그만 가줬으면 하는 마음이었지만 강유형은 이미 먼저 말했다.“형, 아니면 먼저 돌아가. 내일 선보러 간다고 했잖아? 너무 늦게까지 있으면 피부에 안 좋아.”“오빠, 선보는 거예요? 방금 왜 말을 안 했어요?”나는 조금 놀랐고 강진혁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말할 새도 없이 강유형이 와서 방해했으니까.”이 말의 의미는 강유형이 우리 둘 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