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적이 감돌며 숨이 막힐 듯 답답했다.전화를 끊을 적당한 화제를 찾아야 하나 고민하던 순간, 아줌마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너희 삼촌이 이렇게 된 건 전부 그 여자 때문이야. 그래서 난 절대 그 여자를 받아들일 수 없어.”아줌마의 말투는 단호했고, 이를 악물며 내뱉는 그녀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등골이 서늘해졌다.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한동안 침묵했다.“지원아.”아줌마가 내 이름을 부르며 말했다.“시간 날 때 삼촌 좀 자주 찾아와 줘. 네가 와야 삼촌도 좀 마음이 풀리실 거야.”그 말이 내게 큰 부담으로 다가왔지만, 나는 억지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전화를 끊고 나니, 온몸에 힘이 빠져 자동차 좌석에 기대어 멍하니 앉아 있었다. 무언가에 짓눌린 것처럼 움직일 수도, 제대로 숨 쉴 수도 없었다.집에 도착한 나는 소파에 웅크려 앉아 지금까지의 일들을 천천히 되짚었다.모든 실마리들이 차례로 연결되고 있었지만, 결국 용진표로 향하는 듯했다.특히 용진표와 삼촌이 관련이 있고, 용진표가 있는 요양원 주소가 암호화되어 있다는 사실은 더욱 수상했다.만약 숨길 일이 없다면, 굳이 비밀번호까지 설정할 이유가 있을까?머릿속이 점점 복잡해졌다.답답함에 나는 소파 쿠션을 얼굴 위로 덮으며 스스로를 가뒀다.이렇게 하면 잠시나마 생각을 멈출 수 있었다. 하지만 머리가 터질 것처럼 혼란스러울 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처음에는 환청인가 싶었다.그러나 이어서 문밖에서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나는 쿠션을 내리고 문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아직 낮이라 위험할 것 같진 않았지만, 그래도 조심스레 물었다.“누구세요?”“나예요. 진정우.”그 목소리에 순간 멍해졌다. 진정우가 내 집에 찾아오다니.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문을 열자, 검정 티셔츠와 작업복 바지를 입은 진정우가 서 있었다. 여전히 단정하면서도 매력적인 모습이었다.“여긴 왜 왔어요?” 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그는 말 대신 손을 들어 내 이마에 얹었다.
“몰라요.”진정우는 짧고 간결하게 세 글자로 대답했다.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모르는데 바로 문을 두드렸어요?”그는 썰어 놓은 채소를 접시에 옮기며 태연하게 대답했다.“아래층 아줌마가 알려주셨어요. 당신이 집에 돌아왔다고요.”“...”나는 차 한 모금을 마시며, 요리하는 그의 모습을 감상했다.그런데 갑자기 진정우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뭐가 의심스러워요?”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장난스럽게 대답했다.“의심이라기보다는... 당신이 나를 미행한 거 아닐까 싶어서요.”“뭐라고요?”그는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농담이에요. 정우 씨가 그렇게 한가하지 않다는 건 알죠.”말을 마치고 나는 거실로 돌아가 소파에 앉아 차를 마셨다.차 몇 모금에 몸이 나른해졌다. 휴대폰을 보며 이것저것 확인하다 보니, 어느새 눈꺼풀이 무거워지면서 그렇게 잠에 빠졌다.꿈속에서 대머리 남자가 나를 붙잡아 끌고 갔다. 용진표는 그에게 나를 죽이라고 명령했다. 눈앞에서 번쩍이는 칼날이 내게 다가오자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지원 씨!”“지원 씨, 일어나요!”어느새 누군가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눈을 번쩍 뜨니, 진정우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손이 내 머리를 단단히 감싸고 있었다.“악몽 꿨어요?”그의 낮은 목소리가 조용히 울렸다.아직도 꿈의 공포에서 헤어나지 못한 나는 헐떡이며 말했다.“그날 당신을 둘러싼 그 대머리 남자, 용진표 맞아요. 나 그 사람 봤어요.”진정우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그걸 어떻게 알아요?”“내가 봤다니까요.”나는 그의 손을 더 꽉 잡았다가 천천히 놓았다.“이건 제 일이에요. 당신이 끼어들 필요 없어요. 알겠죠?”그의 목소리는 단호하면서도 무겁게 울렸다.나는 변명하고 싶었다. 진정우의 일이 아니라, 내 아버지의 죽음을 조사하다가 우연히 알아낸 것뿐이라고.하지만 그는 내게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말했다.“용진표는 아주 위험한 사람이에요. 절대로 끼어들지 마요. 정말이에요.”그의 진지
여자는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더 예뻐지고 싶어 한다고들 하지 않던가.나는 이제야 내가 진정우를 신경 쓰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다.손을 씻고 나오자마자 진정우가 다가와 나를 부축하려 했다.나는 괜히 강한 척하며 그의 손을 뿌리쳤다.“괜찮아요. 저 이제 괜찮아요.”그는 억지로 도와주려 하지 않고 내 뒤를 따라 식탁으로 걸어왔다.테이블 위에는 아까 말했던 요리뿐만 아니라 깔끔한 반찬 두 가지와 과일샐러드까지 추가되어 있었다.차려진 음식은 보기만 해도 입맛을 돋웠다.“정우 씨, 동생은 정말 행복하겠어요.”그가 이렇게 정성을 다해 요리하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감탄하며 말했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아무 대답도 없었다. 그의 동생이 심장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이 떠오르며, 갑자기 머릿속에 질문 하나가 떠올랐다.“정우 씨, 고향은 어디예요? 동생은 어디서 살아요?”그는 나를 흘깃 쳐다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나는 웃으며 장난스럽게 물었다.“왜 그래요? 내가 당신 동생한테 뭔가 해코지라도 할까 봐요?”“평진이요. 청평 아래에 있는 작은 마을이에요.”이번에는 의외로 상세히 대답했다.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태연한 척 말했다.“저 이번에 대표님 덕분에 휴가받았어요. 수고했다며 그냥 쉬라고 하시더라고요.”“그래요.”그는 여전히 담담했다.역시 군인 출신이라 그런지 보통 사람들과는 감정 표현부터 다르게 느껴졌다.대표님이 준 휴가 이야기를 하다 보니 자연스레 그 신비로운 대표님이 떠올랐다.“내가 뭘 잘했다고 대표님이 이렇게 잘해 주시는지 모르겠어요. 아직 눈에 띄는 성과도 없는데 말이에요.”그러다 문득 대표님이 강유형의 회사 계약을 거절했던 일이 떠올랐다.“사실 대표님 아니었으면 저 아마 강유형 회사랑 계약했을 거예요. 그 회사 괜찮았고 이익도 꽤 됐거든요. 그런데 대표님이 딱 잘라 거절하시더라고요.”내 말을 듣던 진정우가 슬쩍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왜요?”“글쎄요, 혹시 제가 마음에 들어서 그런 건 아닐까요?”나는 장난스럽
그날 밤, 나는 집을 떠났다. 진정우의 집은 불이 꺼져 있었다. 아무래도 집에 없는 듯했다.강진혁에게서 전화가 걸려 온 건 기차역 대기실에 앉아 있을 때였다.이번에는 비행기 대신 KTX를 선택했다.시간이 두 시간 더 걸리긴 했지만 나는 땅 위를 달리는 KTX가 하늘을 나는 비행기보다 더 안정감을 준다.“지원아, 차 고쳤어. 어디 있어? 내가 가져다줄게.”강진혁의 목소리는 늘 그랬듯 따뜻하고 차분했다.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스마트폰을 바라보는 사람들 사이에서 담담히 대답했다.“수리소에 놔두세요. 제가 직접 찾으러 갈게요.”잠시 침묵이 흘렀다. 강진혁이 다시 입을 열었다.“수리소가 어디 있는지 알아?”“네. 항상 거기서 정비하잖아요.”그는 잠시 망설이더니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정비사가 그러는데 네 차에 누가 일부러 손을 댔다고 하더라.”그 말에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사실, 내가 일부러 조작한 거였으니까.“정말요?” 나는 최대한 놀란 척 물었다.“지원아, 혹시 네 차를 다른 사람이 운전한 적 있어?”그의 질문은 순수한 걱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나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대답할 말을 고민했다. 그때 강진혁이 덧붙였다.“다행히 해를 끼치려던 건 아니었던 것 같아. 다만 조금 번거롭게 하려던 것 같아. 차라리 집에서 멈춘 게 나았지, 밖에서 멈췄으면 더 골치 아팠을 거야.”그의 말에 나는 굳이 변명하지 않기로 했다.“알겠어요. 조심할게요.”잠깐의 침묵이 이어지더니, 강진혁이 다시 물었다.“지금 밖에 있어? 주변이 좀 시끄러운데.”“네.”나는 짧게 대답했다.그는 내 짧은 대답에 더 묻지 않았다. 대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몸조심해.”전화를 끊고 나니 가슴 한구석이 답답했다.요즘 ‘불필요한 인간관계와 소셜 활동을 줄여라’는 영상들을 자주 보게 되는데 그 의미를 이제야 조금 이해할 것 같았다.사람들과의 관계는 때로는 부담스럽고 피곤하게 만들기도 한다.특히 걱정을 해주는 사람이 많을수록 마음이 더 무거워졌다.나는
이곳은 정말로 여행지나 휴양지로도 손색이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나는 주변 풍경에 취해 넋을 놓고 있다가, 갑자기 뒤에서 들려오는 낯선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언니, 누구 찾으세요?”돌아보니, 하얀 원피스를 입은 소녀가 서 있었다. 짙은 흑발을 땋아 가슴 앞으로 늘어뜨린 그녀는 맑고 깨끗한 눈을 가지고 있었다.“혹시 성이 진 씨야?”나는 대뜸 그녀에게 물었다.그러자 소녀의 눈에 놀라움이 스쳤다.“네, 맞아요. 언니는... 우리 오빠를 찾으러 오신 건가요?”그 말을 듣고 그녀가 진정우의 여동생임을 확신했다.솔직히 진정우와 전혀 닮지 않았지만 둘 다 흠잡을 데 없이 아름다웠다.진정우는 강인하고 남성적인 매력을 가지고 있다면, 이 소녀는 자연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청초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다.“응, 나는 네 오빠의 친구야.”나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그녀는 잠시 당황한 듯 보였지만 곧 두 손으로 내 손을 잡았다.“저는 진소영이에요.”기쁜 듯하면서도 어색해하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웃으며 말했다.“안으로 들어가도 될까?”진소영은 그제야 정신이 든 듯, 서둘러 내 손을 놓으며 집 안으로 안내했다.“오빠도 참, 아무 말도 안 하고... 제대로 정리도 못 했잖아요.”나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네 오빠도 몰라. 나 몰래 온 거거든.”그녀는 깜짝 놀라더니 한참 후에야 고개를 끄덕였다.나는 이미 그녀의 집안을 유심히 둘러보고 있었다. 이곳은 볼수록 마음에 드는 곳이었다.“언니, 여기 앉으세요. 제가 꽃차 끓여드릴게요.”진소영은 밝은 미소로 나를 맞이했다. 하지만 괜히 부담을 줄까 봐 나는 사양했다.“괜찮아, 목마르지 않아.”하지만 그녀는 안으로 들어가더 곧 주전자와 말린 꽃잎을 들고나왔다. 나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웃었다.“네 오빠가 사준 거야?”“네. 오빠는 항상 저한테 최고의 것만 주려고 해요.”진소영은 자랑스러운 얼굴로 말했다.꽃차를 끓이며 그녀가 집안을 한번 둘러보더니 말했다.“이
“언니, 우리 오빠를 사랑해 줘서 정말 고마워요. 우리 오빠를 받아줘서요!”진소영은 그렇게 말하며 두 손으로 정성스럽게 차를 따라 내게 내밀었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그 순간, 내 눈가도 뜨거워지며 코끝이 찡했다.하지만 나는 웃으며 말했다.“어머, 네 말투가 꼭 너희 오빠가 아무도 받아주지 않는 사람처럼 들리네.”진소영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나는 그녀가 건넨 차를 받아 한 모금 마셨다.입안 가득 퍼지는 맑고 청아한 꽃차 향이 정말 일품이었다. 이렇게 순수하고 깔끔한 맛은 처음이었다.역시 이슬 물로 끓인 차는 다르구나 싶었다. 정말 천상의 맛이었다.“언니, 우리 오빠는 저 때문에 여자 친구도 안 사귀었어요. 나중에 자기 부인이 날 싫어할까 봐, 날 귀찮아할까 봐요...”진소영은 말을 이어가다 멈췄다.그녀가 갑자기 말을 멈춘 이유를 나는 알 수 있었다.아마 오빠가 그녀의 병에 대해 내게 말하지 않았을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혹시 내가 그녀가 아픈 것을 알게 된다면 진정우를 싫어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듯했다.나는 담담하게 웃으며 한 모금 더 마신 후 말했다.“네가 몸이 아프다고 해서 내가 너희 오빠를 싫어할 것 같아? 내가 이렇게 예쁜 소녀를 보고도 그런 생각을 한다면 내가 얼마나 나쁜 사람이겠니?”내 말에 진소영은 다시 환하게 웃으며 긴장을 풀었다.그러고는 다시 물었다.“오빠가 제 병에 대해 말했어요?”“그럼. 아니면 내가 이렇게 먼 길을 와서 널 보러 왔겠어? 네가 궁금해서 온 거야. 그리고...”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고개를 살짝 저었다.진소영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그리고 뭐요?”나는 그녀가 오해할까 봐 다시 입을 열었다.“그리고 널 데려가려고 했지. 하지만 이곳을 보니까 내가 널 데려갈 자격이 없는 것 같아.”솔직히 내가 그녀를 데려갈 곳은 이곳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아무리 좋은 환경을 제공한다 해도 이런 자연 속에서의 자유로운 삶과는 다를 테니까.“언니가 절 데려가신다면 전
“언니, 혹시 방법이 있어요?”진소영이 반짝이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나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방법은 분명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진정우조차 시도하지 않은 일을 내가 감히 나서서 할 수 있을까?성공하면 다행이겠지만 실패한다면?진정우가 평생 나를 용서하지 않는 건 차라리 괜찮다.하지만 그가 소영이을 잃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는 건 차마 견딜 수 없을 것이다.“언니도 방법이 없는 거죠?”내 침묵을 희망이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인 진소영의 얼굴이 금세 어두워졌다.그녀는 고개를 숙이더니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오빠도 시도하지 못했어요. 너무 위험하니까요. 어떤 의사가 감히 자신 있게 도전할 수 있겠어요.”그녀는 한숨을 내쉬더니 곧 고개를 들고 맑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변화가 너무 빨라 보여도, 그건 단지 그녀가 나에게 자신의 우울함을 전하고 싶지 않아서일 것이다.“괜찮아요, 언니. 지금도 저는 충분히 행복해요. 얼마나 살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어쩌면 이렇게 오래오래 살지도 모르죠.”그녀의 이런 말이 오히려 내 마음을 더 무겁게 했다.나는 이렇게 예쁘고 순수한 아이에게 희망을 잃게 하고 싶지 않았다.그래서 위로 삼아 말했다.“사실 내 친구 중에 의사가 있어. 해외에서 공부하고 온 사람이거든. 지금은 산부인과 의사지만 그녀에게는 유능한 의사 친구들이 많아. 심장 분야의 전문가도 있어.”“진짜요?”순간 진소영의 눈빛이 빛을 발했다.그 눈빛은 마치 새로운 희망의 불빛처럼 반짝였다.“그럼. 사실 이번에 온 것도 네 상태를 알아보고 싶어서야.”나는 그녀를 달래려고 한 것도 있지만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은 것도 사실이다.물론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다.하지만 진소영의 눈빛 속에서 느껴지는 간절함은 나를 움직이게 했다.그녀에게 단순히 살아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건강한 삶을 누리고 싶은 열망이 느껴졌다.지금 그녀가 지내고 있는 이곳은 누군가에겐 꿈같은 낙원일지 몰라도, 그녀는 분명 이곳을
내 말을 들은 진소영은 얼굴이 새하얘지며 고개를 급히 저었다. 내 손을 꼭 잡은 그녀는 다급하게 말했다.“언니, 그런 오해 하면 안 돼요! 그 사진 속 사람... 그런 거 아니에요. 우리 오빠는 다른 여자를 좋아한 적이 없어요. 언니가 첫 번째예요.”그녀가 겁에 질려 손까지 떨고 있는 모습을 보니 더는 놀리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영이는 심장이 약했다. 작은 충격도 조심해야 했다.나는 그녀를 안심시키려 코끝을 손가락으로 살짝 건드리며 말했다.“왜 그렇게 긴장해? 나 다 알아. 네 오빠가 여자 친구 사귄 적 없다고 했어.”진소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하게 덧붙였다.“그리고 다른 여자아이를 좋아한 적도 없어요.”그 말을 듣자 웃음이 나왔다. 이 아이는 정말 순수했다. 마치 세상에 조금도 물들지 않은 채 자신만의 깨끗한 세계에 사는 것 같았다.하지만 그만큼 마음 한구석에서는 걱정도 들었다.이런 순수한 아이가 언젠가 누군가를 좋아하게 된다면, 그녀만큼 순수한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만약 사랑으로 인해 상처받는다면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나는 그런 걱정을 떨쳐내며 부드럽게 말했다.“알겠어. 네 오빠 정말 순수하다는 거 알아. 내가 잘 지켜줄게.”그러자 진소영은 다시 웃었다.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벽에 걸린 사진들을 살폈다. 겉으로는 신경 쓰지 않는 척했지만 여전히 진정우가 소녀를 업고 있는 사진이 마음에 걸렸다.그 소녀는 분명 진소영이 아니었다. 만약 소영이었다면 그녀가 그렇게 긴장하며 해명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그렇다면 사진 속 소녀는 누구일까?이웃집 아이? 아니면 친척? 지금쯤은 다 자랐겠지. 혹시 드라마처럼 갑자기 나타나 “정우 오빠!”라며 찾아오는 건 아닐까?생각이 지나치게 앞서가고 있다는 걸 깨닫고 스스로 피식 웃었다. 이렇게까지 상상하다니, 나도 참 한가하다 싶었다.다시 진정우네 가족사진으로 눈길을 돌렸다. 이번에는 그의 아버지 얼굴에 시선이 멈췄다. 묘하게 익숙했고 마치 어디선가 본 적 있는 얼굴 같았다.“아
“알았어요.”나는 짧게 하고 대답한 뒤, 누가 기다리고 있는지도 묻지 않고 바로 회의실로 향했다.“잠깐만요.” 허진호가 나를 불러 세웠다. “어제 그 남자 모델, 진짜로 정우 씨 아니에요.”“알아요.” 나는 커피잔을 들고 무심하게 대답했다. “내가 직접 그를 땅에 묻었으니까.”허진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나를 그냥 두겠다는 듯 다시 물러섰다. 나는 회의실 문을 열었고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강유형은 마치 내 감정을 읽으려는 듯 나를 뚫어지게 쳐다봤다.하지만 오늘의 나는 요즘 중에서 가장 좋은 상태였다. 게다가 화장까지 하고 나왔으니 거울 속 내 모습이 꽤 근사해 보이기까지 했다.무엇보다도, 밤새 아팠던 다리도 거짓말처럼 나아 이제 걷는 것도 전혀 문제없었다.“좀 늦었네?” 강유형이 나를 훑어보더니 가벼운 농담처럼 말했다.“응, 근데 우리 대표님이 워낙 너그럽거든. 지각했다고 월급 깎지 않더라.”내 말에 강유형의 얼굴이 잠깐 굳어졌다.예전에 내가 KS그룹에 다닐 때, 지각이나 조퇴를 하면 누구든 벌금을 내야 했다. 나는 대표님의 약혼녀라는 타이틀이 있었지만 단 한 번도 예외는 없었다.“어제 너한테 계속 전화했는데 안 받더라. 집까지 갔더니 불도 꺼져 있길래 걱정됐어.”강유형은 거침없이 걱정스러웠던 마음을 내비쳤다.나는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집에 가서 바로 잤어.”“그렇게 쉽게 잘 수 있었어?”“못 잘 이유라도 있어?” 나는 그가 나를 찾아온 이유가 배성재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 사람, 진정우 아니야. 내가 직접 조사해 봤어.”그는 핸드폰을 꺼내 뭔가를 하더니 바로 그때, 내 주머니 속 핸드폰이 가볍게 진동했다.“밤새 사람 시켜서 조사했어. 관련 자료 다 보냈으니까 확인해 봐.”그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덧붙였다.“윤지원, 진정우는 이미 죽었어. 네가 직접 봤잖아.”나는 손에 쥔 커피잔을 가만히 돌리며 대답했다.“나도 알아. 그 사람이 죽었다는 거.
나는 강유형이 정말 용준호를 한 대 칠지 모르겠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가장 난처한 사람은 나였다. 더 이상 머물러 있을 이유가 없어 나는 휠체어도 버리고 돌아서서 밖으로 걸어 나갔다.“진짜 하나같이...” 안리영이 주변 사람들을 싸잡아 욕하면서 내 쪽으로 다가와 조용히 내 팔을 잡아 부축했다.그녀는 나를 데리고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까지 가서야 멈춰 섰다. “지원아, 아까 그 사람 목에 정말 점이 없었어? 혹시 일부러 없앤 거 아닐까? 흉터 같은 건 안 만져졌어?”그녀가 이렇게까지 묻는 건 여전히 배성재가 진정우일지도 모른다는 미련을 떨치지 못해서였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나도 처음에는 믿을 수 없어 그의 목을 여러 번 확인했다. 혹시나 해서 손끝으로 몇 번이나 훑어봤지만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내 반응을 본 안리영은 헷갈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나를 의자에 앉히며 다시 물었다. “그럼 넌 어떻게 생각해? 그 사람이 정말 진정우 같아?”때때로 느낌이란 것이 보이는 것보다 더 정확한 법이다. 처음에는 분명 신분을 바꾼 채 나를 일부러 외면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방금 전, 경찰에 신고하겠다는 그의 냉정한 태도와 차갑기 그지없는 눈빛을 보면서 확신이 흔들리기 시작했다.진정우는 나를 사랑했다. 그는 나를 위해 직접 방울 팔찌를 만들었고 반지를 주문해 줬다. 나는 아직도 그걸 손에 끼고 있었고 만약 정말 진정우였다면 못 봤을 리가 없고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나를 밀어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지원아, 그냥 그 사람은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게 나을 수도 있어.” 안리영은 더 이상 나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은 듯 조심스럽게 말했다.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안리영이 한숨을 쉬었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니야. DNA 검사를 하면 확실해질 거야. 그 사람, 분명 진씨 가문 사람이잖아? 진정우의 여동생이나, 아니면 진씨 가문 사람 중 누구랑 비교해 보면 되잖아.”“하지만 진영이랑은 친남매가 아니야.”그
“그건 네가 제일 잘 알잖아. 아니면 제대로 못 봐서 가까이서 다시 한번 봐야겠어?”용준호가 말하며 손짓을 하자, 배성재는 조금 더 다가갔다. 그가 강진혁과 강유형 앞에 거의 얼굴을 맞댈 정도로 가까이 서자, 이제 그들은 그의 모공까지도 볼 수 있었다.물론 나도 그 장면을 똑똑히 봤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무조건 진정우가 맞다고 확신했다.“용준호, 정말 대단해. 이런 사람을 어디서 구해왔어?” 강유형이 낮게 비웃었다. 그러자 용준호는 차분하게 미소 지었다. “운명 같은 거지.”그리고 나를 보며 물었다. “그렇죠, 지원아?”나는 진정우가 맞는지 확인하려고 뚫어지게 배성재를 바라보았다.“성재야, 지원 씨가 네가 좋다며 너를 데려가고 싶대. 괜찮겠어?” 용준호가 조금 귀찮은 듯 말하며 본격적으로 질문을 던졌다.“도련님, 제 원칙 알잖아요. 저는 몸을 팔지 않아요.” 배성재는 자신의 입장을 확실히 했다. 그 말에 강진혁과 강유형의 표정이 다시 굳어졌다.용준호가 나를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봐봐. 내가 말했지? 절대 동의 안 한다고.”“다른 일 없으면 전 돌아갈게요.” 배성재가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서려 했다. 그때 내 어깨가 살짝 무거워지더니 안리영이 내 팔을 짚으며 손끝으로 내게 신호를 보냈다.“잠깐만요.” 나는 배성재를 불렀고 일어나서 두 걸음 걸어 그에게 다가갔다. 나는 팔로 그의 목을 감싸며 발끝을 들고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윤지원, 너 뭐 하는 거야?” 강진혁이 화가 잔뜩 난 목소리로 외쳤고 안리영도 얼른 덧붙였다. “지원이가 지금 사람을 홀리고 있어요.”그 틈에 나는 손을 배성재의 목덜미에 가져갔지만 그곳은 부드럽고 매끄러워, 아무것도 없었다.나는 실망감에 빠져서 다시 한번 그곳을 더듬어 보았다. 뒷머리까지 만져보았지만 아무런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진정우에게 있던 그 점, 손끝으로도 느낄 수 있을 만큼 분명했던 그 자국은 여기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그가 진정우가 아님을 깨달았다.팔을 풀고 물러
“네가 끝났다고 해서 끝난 게 아니지. 강유형은 널 잊지 못한 것 같은데. 너밖에 신경 안 쓰이는 것 같아.” 안리영이 시원하게 한마디 했다.조시언이 자리에 앉으면서 드디어 조명이 켜지고 공연이 시작됐다. 50분이 넘는 공연 동안 조명이 하나도 반복되지 않았고 특히 마지막에 나온 남성 모델들의 몸을 이용한 조명 쇼는 관객들에게 우리 회사의 창의력과 연구 개발 능력을 제대로 보여줬다.쇼가 끝날 때, 우리 회사 로고가 크게 빛을 내며 등장했고 관객들은 뜨겁게 박수를 보냈다.“정말 창의적이고 신선하네요, 특히 마지막 조명 쇼가 인상 깊었어요.” 고객인 조시언은 매우 높이 평가했다.“이건 저희 마케팅 부서 윤지원 부장님의 기획이에요.” 허진호는 나에게 공을 돌리며 칭찬했다.모두가 나를 향해 박수를 쳤고 용준호는 농담처럼 한마디 했다. “윤지원 부장님의 기획도 좋지만 우리 남자 모델들도 중요한 역할을 했죠.”“맞아요, 그래서 준호 씨의 지원에 감사해요.” 나는 고마움을 표현했다.“윤지원 부장님을 돕게 되어 영광이죠.” 용준호는 그렇게 말하며 강진혁과 강유형을 쳐다봤다.“두 분, 맞죠?”용준호는 언제나 그런 식으로 사건을 키우는 걸 좋아했다. 나는 그가 강진혁과 강유형을 자극하려는 의도임을 잘 알았다.그들이 지금 이 순간에 이 사람과 협력한 걸 후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나는 그런 생각을 하느라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지금은 그저 배성재가 진정우인지 아닌지를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배성재는 용준호 사람이라, 용준호를 빼고는 그를 빼낼 방법이 없었다.“준호 씨, 그 배성재 모델 제가 데리고 있어도 될까요?”용준호가 웃으며 말했다. “마음에 들어?”“네!”나는 당당하게 대답했지만 내 한마디에 강유형과 강진혁의 표정은 확실히 어두워졌다.용준호는 그들을 보고 잠시 웃더니 다시 말했다. “안돼. 우리 클럽의 남자 모델들은 모두 규칙을 지키며 일요. 고객을 위한 서비스는 제공하지만 그 이상의 서비스는 제공하지 않아.”
“안리영, 너 왜 이렇게 네 삼촌을 무서워해? 혹시 그 사람한테 뭔가 잘못한 거 있냐?”내가 휠체어를 타고 천천히 가는 동안 참지 못하고 물어봤다.안리영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나는 그녀를 올려다보며 다시 물었다.“정말 뭐가 있긴 한 거지?”“우리 그 얘기 그만하자.”안리영의 말을 듣자 나는 뭔가 비밀이 있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나는 손으로 안리영을 톡톡 쳤다.“내가 한번 맞춰볼까? 혹시 네가 그 사람 잘생긴 얼굴에 홀려서 뭔가 더 과한 짓을 한 거 아니야?”“무슨 말이야, 내 삼촌이라고.” 안리영이 내 머리를 가볍게 쳤다.“그럼 왜 그를 보면 그렇게 떨고 겁을 먹고 있어?”나는 정말 궁금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천하의 안리영이 이렇게 떨고 있으니 말이다. “사실 별거 아니야, 그냥 내가 한 번 우연히 삼촌이 샤워하는 걸 봤거든.” 안리영의 말에 나는 놀라서 멈췄다.“뭐라고? 어디서 봤어? 다 봤어?”안리영이 눈을 감았다. “그만 말해.”“왜?”그 말에 안리영은 한숨을 내쉬고 결국 솔직히 말했다.“욕실에서... 다 봤어.”“뭐야! 대박!”나는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혹시 술 취해서 실수로 들어간 거 아니야?”“아니야.” 안리영이 고개를 저었다. “그날 내가 외할머니 집에 갔었고 그 집엔 아무도 없었어. 나는 땀을 흘려서 씻고 싶어서 위층에 올라갔고 그 방에 들어갔어. 그리고 욕실로 가서...”그 뒤 이야기는 말하지 않아도 나는 다 짐작이 갔다.“그 욕실에서 물소리 안 들렸어?”안리영이 한숨을 쉬었다. “그때 내가 이어폰 끼고 음악 듣고 있었어. 옷을 벗고 욕실에 들어갔지.”“잠깐만!” 내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 “너 옷 벗고 욕실에 들어갔다고? 그러면... 너도 그 사람처럼 전부 다 보여준 거네?”안리영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하하.” 나는 웃음을 터뜨렸고 화가 난 안리영은 내 머리를 쳤다. “그럼 너도 이제 신경 쓸 필요 없겠네, 다 봤으니 서로 부끄러울 것도 없잖아?”“나야말로 부
안리영이 살짝 웃으며 말했다。“이렇게 잘생긴 남자가 왜 이렇게 소심해. 손 한 번 만지는 것도 안 되나요?”배성재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예의 바르게 말했다.“죄송합니다. 저는 몸은 팔지 않아요. 부담스럽네요.”그렇게 똑 부러지면서도 예의 바른 남자를 마주하자 안리영은 더 이상 그 선을 넘지 않기로 했다. 그녀는 손을 빼며 다시 질문을 이어갔다. “올해 몇 살이에요?”“스물아홉입니다.”안리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얼굴을 잠시 올려다보며 물었다.“키는요?”“183.7cm예요.”안리영은 또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대학교는 다녔나요?”“네, 청수대 인공지능 전공입니다.”“음, 요즘 그 전공 많이 인기 있죠.” 그 말은, 이렇게 좋은 전공을 하고도 남자 모델을 한다는 게 아깝다는 뜻이었다.“이건 제 알바예요.”배성재가 덧붙였다.안리영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요즘 사람들은 이렇게 바쁘게 살고 있나? 제대로 된 본업도 있으면서 왜 알바를 할까?’그와 같은 열정적인 사람과 비교하니 나는 내 자신이 정말 게으른 사람 같았다.“정말 열심히 사는 사람이네요.”안리영이 감탄하며 말했다. 배성재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고 나는 이제 그만해야겠다고 생각해 안리영에게 말했다.“가자, 공연 곧 시작해.”안리영은 배성재의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다. “부모님이 아이를 잃어본 적 있어요?”“저는 외동이에요.”안리영은 가벼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부모님 유전자 정말 좋네요.”그녀는 나를 밀며 조용히 속삭였다.“아까 말한 것 중에 진정우랑 겹치는 부분이 있어?”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의 얼굴 외에는 진정우와 일치하는 점이 전혀 없었다.“그 사람이 진정우가 아니라고 하는데 얼굴은 진짜 똑같고 목소리도 아니고 정보도 다르고... 진짜 진정우인지 모르겠어.” 안리영도 한숨을 쉬며 말했다.나는 아무 말 없이 침묵하며 생각에 잠겼다. 그 남자를 어떻게 더 시험해 볼지 고민하고 있었다. 진정우가 아니라고 한다면 정말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윤지원, 왜 휠체어에 앉아 있어?”강유형의 목소리가 옆에서 들리자 고개를 돌리니 그와 조시언이 다가오고 있었다.두 사람은 각각 흰색 셔츠와 검은 셔츠를 입고 흑백 조합이 시선을 사로잡았다.“오늘 정말 시끌시끌하네, 하나같이 다 왔네.”안리영이 작게 투덜거렸다. 이렇게 작은 조명 쇼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릴 줄은 전혀 예상 못 했다.안리영이 그런 말을 하는 건 조시언이 오기 싫어서였겠지만 그는 고객이었고 이번 쇼를 보러 온 사람 중 하나였다.강유형이 내 쪽으로 걸어오며 내 다리를 쳐다봤다. “어디 다친 거야?”“무릎을 살짝 긁혔어. 별일 아니야.” 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지만 강유형은 믿지 않았다. “별일 아니라는 사람은 휠체어에 앉지 않아.”“정말 괜찮아요. 강진혁 씨가 너무 걱정해서 휠체어를 가져온 거예요. 지원이도 안 타려고 했는데 결국 이렇게 된 거죠.” 안리영이 대신 설명했다. 안리영 덕분에 강유형은 그만 입을 다물었다. 물론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지만 그럴 만도 했다.안리영은 강유형의 반응을 무시하고 내게 덧붙였다. “하지만 이 휠체어는 꽤 괜찮아. 이렇게 밀고 다니면 다리가 좀 더 편하겠네. 널 세심하게 챙기고 다니는 건 확실히 강유형보다 나아.”그러자 강유형이 턱을 굳게 다물었 그 옆에서 조시언이 미소를 지으며 분위기를 풀어줬다.“너희 어디 가는 거야?”“멋진 남자들 보러 가요.”안리영이 대답했다. 그 말에 강유형은 한숨을 쉬었지만 우리는 그저 그쪽을 향해 가고 있었다.백스테이지에 들어서자 마자 대기 중인 남자 모델들이 보였다. 모두 이미 의상을 갈아입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한눈에 봐도, 다들 비슷한 체형에 못지않게 잘생긴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와, 이 몸매들 정말 장난 아니네!” 안리영은 역시 중요한 포인트를 잘 찝었다.“몸매보다는 얼굴이 중요하지.” 나는 살짝 눈치를 주며 말했다.“그거야 알지만 자세히 볼 수 있으면 좋겠네.” 안리영은 발끝으로 서서 그들을 뚫어지게 쳐다봤다.그때, 무대 감
“그가 이 일을 시작한 지 2년이나 됐다고요?” 나는 놀라움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더 큰 실망감을 느꼈다.진정우가 사고를 당한 지 몇달 밖에 안 되었으니 무대 위에 서 있는 사람은 분명히 진정우가 아니다.그런데 왜 이 사람은 진정우랑 이렇게 똑같이 생긴 걸까?혹시 이 사람과 진정우의 관계는, 내가 유희연과 같은 관계처럼 비슷한 건가?나는 그 사람을 유심히 쳐다보며 머릿속이 엉망이 되어 버렸다. 심지어 강진혁이 내 이름을 부를 때까지 그가 왔다는 것도 몰랐다. “너, 얼굴이 안 좋다. 어디 아파?” 강진혁은 나의 상태를 바로 알아챘다.“다쳤어.” 용준호가 그 말을 대신했다.하지만 그가 말한‘다쳤다’는 내 몸의 상처뿐 아니라, 내 마음의 상처도 포함된 말이었다. 용준호가 이렇게 진정우랑 닮은 사람을 일부러 데려다 놓은 건, 분명히 나를 괴롭히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무릎을 다쳤어요.” 이번엔 허진호가 또 내 말을 대신해 주었다. 정말 고마운 두 남자 덕분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되겠다.강진혁은 살짝 찡그리며 내 바지를 올리려고 했다. 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피했지만 강진혁의 손은 매우 빠르고 금세 내 발목을 잡았다. 그가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움직이지 마, 잠깐만 볼게.”그가 내 바지를 살짝 올리자 상처가 드러났다. 강진혁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언제 다친 거야? 이렇게 심각한데 왜 말 안 했어?”그 모습이 마치 걱정스러워하면서도 나에게 화가 난, 그런 전형적인 남자 친구의 모습 같았다. 만약 내가 그가 의도가 나쁘지 않다는 걸 알지 못했다면 사실 그의 행동에 감동했을지도 모르겠다.“이미 안리영한테 확인을 받았어요. 별일 없었어요.” 나는 다리를 흔들며 말했다.그의 얼굴은 굳어졌고 다시 내 상처를 살펴본 후, 몇 초 후에야 바지를 내려놓고 일어섰다.“이렇게 다정한 모습은 지원이 앞에서만 볼 수 있네. 강진혁.” 용준호가 놀리듯 말했지만 강진혁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오히려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진정우였다!지난번 골목에서 봤던 그 모습과 똑같았다.그때 내가 넘어져서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이번에는 확실히 보겠다고 결심하고 한 걸음 내디뎠다. 그러나 또다시 내 상처를 잊고 움직이자 그대로 넘어졌다.“어이, 이 여자 일부러 이러는 거 아니야? 날 안고 싶으면 그냥 말해.”용준호는 장난스럽게 나를 일으켜 세웠다.나는 진정우를 바라보며 소리쳤다.“불 켜!”내 말에 연습 중이던 사람들이 모두 멈췄지만 여전히 무대 뒤쪽의 불은 꺼져 있었다.“불 켜!” 내가 다시 소리쳤다. 밖에서 들어온 허진호가 내 소리에 놀라며 말했다.“뭐야? 불 켜, 빨리 켜!”허진호의 말에 모두가 움직여, 뒤쪽의 조명이 켜지자 눈이 부셔서 모두 눈을 찡그렸다.나는 무대 위의 모델들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하나씩 얼굴을 살피다가, 결국 가장 중앙에 있는 얼굴에 시선이 멈췄다.그 얼굴은 내가 매일 밤 꿈에서 그리워했던 얼굴, 진정우의 얼굴이었다.그가 드디어 살아 돌아와 내 앞에 서 있었지만 그의 눈빛은 너무 낯설고 심지어 어쩐지 혼란스럽고 불안한 기색까지 감돌았다.그 순간,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았다. 다리의 고통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는 무대 앞으로 빠르게 걸어갔다.“너 뭐 하는 거야?” 용준호가 물었다. 허진호는 무대 위 사람을 가리키며 혼란스러워했다. “정우 씨, 정... 정우 씨가 여기 어떻게...”허진호 역시 충격을 받아 말을 잇지 못했다. 그때 나는 비틀거리며 무대 앞에 다가가 그 얼굴을 더 뚫어지게 바라보았다.정말 진정우의 얼굴이 맞다고 나는 확신했다.“진정우.” 나는 그토록 많이 부른 이름을 낮게 불렀다. 하지만 무대 위의 남자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 나를 부축하던 용준호가 웃으며 말했다.“지원아, 이 남자는 진정우가 아니야. 배성재야. 여기서 제일 유명한 모델이야.”용준호는 그렇게 말하며 손짓을 하자 배성재는 곧장 다가왔다. “준호 도련님.”“윤지원 씨야, 인사해.” 용준호가 말했다.배성재는 순순히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