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들의 생일 뒤 세 자리 숫자를 입력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렇게 간단한 조합은 너무 쉽게 유추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강유형이 부모님께 더 사랑받는 것처럼 보였던 기억을 떠올리며 그의 생일을 앞에 두고 강진혁의 생일을 뒤에 붙였다.마지막 숫자를 입력할 때는 심장이 터질 것 같았고 손끝까지 떨렸다. 마침내 비밀 경로라는 회색 문구가 환하게 변하며 비밀번호가 맞았음을 알렸다. 화면에 뜬 “세강 요양원”이라는 네 글자를 보자 나는 가슴 깊은 곳에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세강 요양원은 내가 조사했던 세 곳 중 하나였다. 지금까지 모든 노력이 바로 이 다섯 글자를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다.결국 목표를 달성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불안이 남아 있었다. 나는 급히 검색 기록을 지우려고 손을 뻗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삼촌이 차 문을 열었다. 그의 시선이 내 손과 내비게이션 화면으로 번갈아 향했다. 내 손은 미세하게 떨렸고 등에선 땀이 흘렀다.“지원아, 뭘 하고 있는 거야?” 삼촌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나는 얼른 대답했다.“그냥 음악 좀 들으려고 했는데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어요.”삼촌은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빛을 거두지 않았다. 속이 아프다며 차를 멈춘 사람이 음악을 듣고 싶어 한다는 건 아무래도 설득력이 없었다.이 상황에서 나는 어떻게든 거짓말을 이어 나가야 했다.“속이 너무 아파서 아는 의사 친구한테 물어봤는데 가벼운 음악을 들으면 좀 나을 거라더라고요. 병원 가서 검사도 받아보래요. 급성 장염이나 맹장염일 수도 있대요.”말하면서도 스스로가 너무 한심하고 부끄러웠다. 언제부터 내가 이런 거짓말까지 해야 하는 사람이 되었을까? 하지만 지금은 이럴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의 죽음이 정말 사고였는지, 그 진실을 밝혀야 했으니까.“그랬구나.” 삼촌은 의심스러운 표정을 거두며 약봉지를 건네주었다.“그럼 빨리 병원으로 가자. 음악은 내가 틀어줄게.”“감사합니다, 삼촌.” 나는 얼른 약을 받아 입에 넣고 물도 없이 삼켰다. 약효를 기
삼촌과 아줌마는 정말 나에게 너무 잘해주셨다. 그래서인지 그분들을 의심하는 것조차 나 스스로 죄책감을 느낄 만큼 마음이 불편했다.그런데 안리영마저 그런 가능성을 염두에 두는 말을 하니 가슴속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공포감이 몰려왔다.“그래도 난 알아봐야 해!”이런 상황일수록 진실을 반드시 밝혀야 했다. 아버지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서라도, 삼촌에게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안리영은 내 생각을 읽었는지 더 이상 말리지 않았고 대신 짧게 말했다.“언제든 네 곁에 내가 있다는 걸 잊지 마.”그 말속에는 이미 무언가 답을 알고 있는 듯한 기운이 느껴졌다.나는 멈추지 않기로 했다. 진실을 찾을 때까지 결코 포기하지 않을 생각이었다.응급실을 나온 뒤 나는 곧장 택시를 잡아탔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바로 그곳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삼촌의 운전기사가 서 있었다. 그의 손에는 약봉지가 있었고 전화를 하며 걸어가고 있었다.“...네, 차량 내 내비게이션을... 음악을 듣고 싶다고...”그의 말을 듣자 등골이 서늘해졌다. 굳이 듣지 않아도 그가 누구에게 보고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그렇다면 왜 보고를 하는 걸까? 차 내 내비게이션은 그냥 흔한 장비 아닌가?머릿속은 점점 혼란스러워졌고 그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계속해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더는 지체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바로 세강 요양원으로 가야 했다.하지만 내가 도착했을 때, 요양원은 철저하게 보안 관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입구에서 보안 요원이 방문 목적과 방문자를 묻더니, 이름과 방 번호까지 요구했다.이름은 알지만 방 번호는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섣불리 용진표라는 이름을 언급했다간 그들이 본인에게 확인 전화를 넣을 가능성이 컸다. 그렇게 되면 내 의도가 전부 드러나게 될 터였다.결국 가족 상담을 위해 왔다고 둘러댔지만 보안 요원은 이곳은 예약제로 운영되며 상담이 필요하지 않다며 단호히 거절했다.고급 요양원은 역시 다르구나 싶었다. 아무나 드나들
정적이 감돌며 숨이 막힐 듯 답답했다.전화를 끊을 적당한 화제를 찾아야 하나 고민하던 순간, 아줌마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너희 삼촌이 이렇게 된 건 전부 그 여자 때문이야. 그래서 난 절대 그 여자를 받아들일 수 없어.”아줌마의 말투는 단호했고, 이를 악물며 내뱉는 그녀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등골이 서늘해졌다.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한동안 침묵했다.“지원아.”아줌마가 내 이름을 부르며 말했다.“시간 날 때 삼촌 좀 자주 찾아와 줘. 네가 와야 삼촌도 좀 마음이 풀리실 거야.”그 말이 내게 큰 부담으로 다가왔지만, 나는 억지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전화를 끊고 나니, 온몸에 힘이 빠져 자동차 좌석에 기대어 멍하니 앉아 있었다. 무언가에 짓눌린 것처럼 움직일 수도, 제대로 숨 쉴 수도 없었다.집에 도착한 나는 소파에 웅크려 앉아 지금까지의 일들을 천천히 되짚었다.모든 실마리들이 차례로 연결되고 있었지만, 결국 용진표로 향하는 듯했다.특히 용진표와 삼촌이 관련이 있고, 용진표가 있는 요양원 주소가 암호화되어 있다는 사실은 더욱 수상했다.만약 숨길 일이 없다면, 굳이 비밀번호까지 설정할 이유가 있을까?머릿속이 점점 복잡해졌다.답답함에 나는 소파 쿠션을 얼굴 위로 덮으며 스스로를 가뒀다.이렇게 하면 잠시나마 생각을 멈출 수 있었다. 하지만 머리가 터질 것처럼 혼란스러울 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처음에는 환청인가 싶었다.그러나 이어서 문밖에서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나는 쿠션을 내리고 문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아직 낮이라 위험할 것 같진 않았지만, 그래도 조심스레 물었다.“누구세요?”“나예요. 진정우.”그 목소리에 순간 멍해졌다. 진정우가 내 집에 찾아오다니.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문을 열자, 검정 티셔츠와 작업복 바지를 입은 진정우가 서 있었다. 여전히 단정하면서도 매력적인 모습이었다.“여긴 왜 왔어요?” 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그는 말 대신 손을 들어 내 이마에 얹었다.
“몰라요.”진정우는 짧고 간결하게 세 글자로 대답했다.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모르는데 바로 문을 두드렸어요?”그는 썰어 놓은 채소를 접시에 옮기며 태연하게 대답했다.“아래층 아줌마가 알려주셨어요. 당신이 집에 돌아왔다고요.”“...”나는 차 한 모금을 마시며, 요리하는 그의 모습을 감상했다.그런데 갑자기 진정우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뭐가 의심스러워요?”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장난스럽게 대답했다.“의심이라기보다는... 당신이 나를 미행한 거 아닐까 싶어서요.”“뭐라고요?”그는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농담이에요. 정우 씨가 그렇게 한가하지 않다는 건 알죠.”말을 마치고 나는 거실로 돌아가 소파에 앉아 차를 마셨다.차 몇 모금에 몸이 나른해졌다. 휴대폰을 보며 이것저것 확인하다 보니, 어느새 눈꺼풀이 무거워지면서 그렇게 잠에 빠졌다.꿈속에서 대머리 남자가 나를 붙잡아 끌고 갔다. 용진표는 그에게 나를 죽이라고 명령했다. 눈앞에서 번쩍이는 칼날이 내게 다가오자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지원 씨!”“지원 씨, 일어나요!”어느새 누군가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눈을 번쩍 뜨니, 진정우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손이 내 머리를 단단히 감싸고 있었다.“악몽 꿨어요?”그의 낮은 목소리가 조용히 울렸다.아직도 꿈의 공포에서 헤어나지 못한 나는 헐떡이며 말했다.“그날 당신을 둘러싼 그 대머리 남자, 용진표 맞아요. 나 그 사람 봤어요.”진정우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그걸 어떻게 알아요?”“내가 봤다니까요.”나는 그의 손을 더 꽉 잡았다가 천천히 놓았다.“이건 제 일이에요. 당신이 끼어들 필요 없어요. 알겠죠?”그의 목소리는 단호하면서도 무겁게 울렸다.나는 변명하고 싶었다. 진정우의 일이 아니라, 내 아버지의 죽음을 조사하다가 우연히 알아낸 것뿐이라고.하지만 그는 내게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말했다.“용진표는 아주 위험한 사람이에요. 절대로 끼어들지 마요. 정말이에요.”그의 진지
여자는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더 예뻐지고 싶어 한다고들 하지 않던가.나는 이제야 내가 진정우를 신경 쓰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다.손을 씻고 나오자마자 진정우가 다가와 나를 부축하려 했다.나는 괜히 강한 척하며 그의 손을 뿌리쳤다.“괜찮아요. 저 이제 괜찮아요.”그는 억지로 도와주려 하지 않고 내 뒤를 따라 식탁으로 걸어왔다.테이블 위에는 아까 말했던 요리뿐만 아니라 깔끔한 반찬 두 가지와 과일샐러드까지 추가되어 있었다.차려진 음식은 보기만 해도 입맛을 돋웠다.“정우 씨, 동생은 정말 행복하겠어요.”그가 이렇게 정성을 다해 요리하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감탄하며 말했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아무 대답도 없었다. 그의 동생이 심장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이 떠오르며, 갑자기 머릿속에 질문 하나가 떠올랐다.“정우 씨, 고향은 어디예요? 동생은 어디서 살아요?”그는 나를 흘깃 쳐다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나는 웃으며 장난스럽게 물었다.“왜 그래요? 내가 당신 동생한테 뭔가 해코지라도 할까 봐요?”“평진이요. 청평 아래에 있는 작은 마을이에요.”이번에는 의외로 상세히 대답했다.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태연한 척 말했다.“저 이번에 대표님 덕분에 휴가받았어요. 수고했다며 그냥 쉬라고 하시더라고요.”“그래요.”그는 여전히 담담했다.역시 군인 출신이라 그런지 보통 사람들과는 감정 표현부터 다르게 느껴졌다.대표님이 준 휴가 이야기를 하다 보니 자연스레 그 신비로운 대표님이 떠올랐다.“내가 뭘 잘했다고 대표님이 이렇게 잘해 주시는지 모르겠어요. 아직 눈에 띄는 성과도 없는데 말이에요.”그러다 문득 대표님이 강유형의 회사 계약을 거절했던 일이 떠올랐다.“사실 대표님 아니었으면 저 아마 강유형 회사랑 계약했을 거예요. 그 회사 괜찮았고 이익도 꽤 됐거든요. 그런데 대표님이 딱 잘라 거절하시더라고요.”내 말을 듣던 진정우가 슬쩍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왜요?”“글쎄요, 혹시 제가 마음에 들어서 그런 건 아닐까요?”나는 장난스럽
그날 밤, 나는 집을 떠났다. 진정우의 집은 불이 꺼져 있었다. 아무래도 집에 없는 듯했다.강진혁에게서 전화가 걸려 온 건 기차역 대기실에 앉아 있을 때였다.이번에는 비행기 대신 KTX를 선택했다.시간이 두 시간 더 걸리긴 했지만 나는 땅 위를 달리는 KTX가 하늘을 나는 비행기보다 더 안정감을 준다.“지원아, 차 고쳤어. 어디 있어? 내가 가져다줄게.”강진혁의 목소리는 늘 그랬듯 따뜻하고 차분했다.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스마트폰을 바라보는 사람들 사이에서 담담히 대답했다.“수리소에 놔두세요. 제가 직접 찾으러 갈게요.”잠시 침묵이 흘렀다. 강진혁이 다시 입을 열었다.“수리소가 어디 있는지 알아?”“네. 항상 거기서 정비하잖아요.”그는 잠시 망설이더니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정비사가 그러는데 네 차에 누가 일부러 손을 댔다고 하더라.”그 말에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사실, 내가 일부러 조작한 거였으니까.“정말요?” 나는 최대한 놀란 척 물었다.“지원아, 혹시 네 차를 다른 사람이 운전한 적 있어?”그의 질문은 순수한 걱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나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대답할 말을 고민했다. 그때 강진혁이 덧붙였다.“다행히 해를 끼치려던 건 아니었던 것 같아. 다만 조금 번거롭게 하려던 것 같아. 차라리 집에서 멈춘 게 나았지, 밖에서 멈췄으면 더 골치 아팠을 거야.”그의 말에 나는 굳이 변명하지 않기로 했다.“알겠어요. 조심할게요.”잠깐의 침묵이 이어지더니, 강진혁이 다시 물었다.“지금 밖에 있어? 주변이 좀 시끄러운데.”“네.”나는 짧게 대답했다.그는 내 짧은 대답에 더 묻지 않았다. 대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몸조심해.”전화를 끊고 나니 가슴 한구석이 답답했다.요즘 ‘불필요한 인간관계와 소셜 활동을 줄여라’는 영상들을 자주 보게 되는데 그 의미를 이제야 조금 이해할 것 같았다.사람들과의 관계는 때로는 부담스럽고 피곤하게 만들기도 한다.특히 걱정을 해주는 사람이 많을수록 마음이 더 무거워졌다.나는
이곳은 정말로 여행지나 휴양지로도 손색이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나는 주변 풍경에 취해 넋을 놓고 있다가, 갑자기 뒤에서 들려오는 낯선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언니, 누구 찾으세요?”돌아보니, 하얀 원피스를 입은 소녀가 서 있었다. 짙은 흑발을 땋아 가슴 앞으로 늘어뜨린 그녀는 맑고 깨끗한 눈을 가지고 있었다.“혹시 성이 진 씨야?”나는 대뜸 그녀에게 물었다.그러자 소녀의 눈에 놀라움이 스쳤다.“네, 맞아요. 언니는... 우리 오빠를 찾으러 오신 건가요?”그 말을 듣고 그녀가 진정우의 여동생임을 확신했다.솔직히 진정우와 전혀 닮지 않았지만 둘 다 흠잡을 데 없이 아름다웠다.진정우는 강인하고 남성적인 매력을 가지고 있다면, 이 소녀는 자연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청초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다.“응, 나는 네 오빠의 친구야.”나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그녀는 잠시 당황한 듯 보였지만 곧 두 손으로 내 손을 잡았다.“저는 진소영이에요.”기쁜 듯하면서도 어색해하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웃으며 말했다.“안으로 들어가도 될까?”진소영은 그제야 정신이 든 듯, 서둘러 내 손을 놓으며 집 안으로 안내했다.“오빠도 참, 아무 말도 안 하고... 제대로 정리도 못 했잖아요.”나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네 오빠도 몰라. 나 몰래 온 거거든.”그녀는 깜짝 놀라더니 한참 후에야 고개를 끄덕였다.나는 이미 그녀의 집안을 유심히 둘러보고 있었다. 이곳은 볼수록 마음에 드는 곳이었다.“언니, 여기 앉으세요. 제가 꽃차 끓여드릴게요.”진소영은 밝은 미소로 나를 맞이했다. 하지만 괜히 부담을 줄까 봐 나는 사양했다.“괜찮아, 목마르지 않아.”하지만 그녀는 안으로 들어가더 곧 주전자와 말린 꽃잎을 들고나왔다. 나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웃었다.“네 오빠가 사준 거야?”“네. 오빠는 항상 저한테 최고의 것만 주려고 해요.”진소영은 자랑스러운 얼굴로 말했다.꽃차를 끓이며 그녀가 집안을 한번 둘러보더니 말했다.“이
“언니, 우리 오빠를 사랑해 줘서 정말 고마워요. 우리 오빠를 받아줘서요!”진소영은 그렇게 말하며 두 손으로 정성스럽게 차를 따라 내게 내밀었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그 순간, 내 눈가도 뜨거워지며 코끝이 찡했다.하지만 나는 웃으며 말했다.“어머, 네 말투가 꼭 너희 오빠가 아무도 받아주지 않는 사람처럼 들리네.”진소영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나는 그녀가 건넨 차를 받아 한 모금 마셨다.입안 가득 퍼지는 맑고 청아한 꽃차 향이 정말 일품이었다. 이렇게 순수하고 깔끔한 맛은 처음이었다.역시 이슬 물로 끓인 차는 다르구나 싶었다. 정말 천상의 맛이었다.“언니, 우리 오빠는 저 때문에 여자 친구도 안 사귀었어요. 나중에 자기 부인이 날 싫어할까 봐, 날 귀찮아할까 봐요...”진소영은 말을 이어가다 멈췄다.그녀가 갑자기 말을 멈춘 이유를 나는 알 수 있었다.아마 오빠가 그녀의 병에 대해 내게 말하지 않았을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혹시 내가 그녀가 아픈 것을 알게 된다면 진정우를 싫어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듯했다.나는 담담하게 웃으며 한 모금 더 마신 후 말했다.“네가 몸이 아프다고 해서 내가 너희 오빠를 싫어할 것 같아? 내가 이렇게 예쁜 소녀를 보고도 그런 생각을 한다면 내가 얼마나 나쁜 사람이겠니?”내 말에 진소영은 다시 환하게 웃으며 긴장을 풀었다.그러고는 다시 물었다.“오빠가 제 병에 대해 말했어요?”“그럼. 아니면 내가 이렇게 먼 길을 와서 널 보러 왔겠어? 네가 궁금해서 온 거야. 그리고...”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고개를 살짝 저었다.진소영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그리고 뭐요?”나는 그녀가 오해할까 봐 다시 입을 열었다.“그리고 널 데려가려고 했지. 하지만 이곳을 보니까 내가 널 데려갈 자격이 없는 것 같아.”솔직히 내가 그녀를 데려갈 곳은 이곳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아무리 좋은 환경을 제공한다 해도 이런 자연 속에서의 자유로운 삶과는 다를 테니까.“언니가 절 데려가신다면 전
“고객이 전화를 받지 않아 삐 소리 이후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됩니다.”법운사로 향하는 길에 나는 강유형에게 전화를 몇 번이나 걸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기나긴 연결음 끝의 자동응답뿐이었다.가슴이 점점 무겁게 내려앉았다. 요즘 그가 법운사에 머물고 있었기에 더더욱 불안했다. 연락도 되지 않으니 머릿속은 온통 나쁜 상상으로 가득 찼다.그에게 전화를 건 건 단순히 걱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부상자나 사망자가 있는지 그의 입을 통해 직접 듣고 싶었다.하지만 그에게 건 전화는 끝내 연결되지 못했다.나는 액셀을 밟으며 용준호에게 전화를 걸었다.그의 어머니가 바로 그 절에 계셨으니 무슨 일이 생겼다면 그 역시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고객이 전화를 받을 수 없어...”이번엔 아예 거절당했다. 불안은 더 깊어졌다.‘혹시 김지영까지 무슨 일이 생긴 걸까?’그간 수많은 일을 겪어왔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너무도 혼란스러웠다. 강유형과 김지영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 다치거나 희생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길 바랐다.복잡한 심경 속에서 차를 운전하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멀쩡하던 절에 왜 불이 난 걸까? 단순한 사고였을까, 아니면 누군가가 의도한 일이었을까? 혹시 나를 노린 불은 아니었을까?’만약 안리영이 나를 데리고 조경태의 생신 잔치에 가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쯤 그 절에 있었을 것이다. 죽었을 수도, 심하게 다쳤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내 손에 누군가가 갖고 싶어 하는 물건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걸 얻지 못하면 나를 없애버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정말 그들이 저지른 일이라면 그건 너무 비인간적이었다. 죄 없는 사람들까지 희생시켜서는 안 됐다.이런저런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사이 나는 어느덧 산기슭에 도착했다. 들이마시는 공기 속엔 타버린 재 냄새가 가득했고 멀리 보이는 산 위엔 아직도 연기가 자욱했다.산을 절반쯤 오르자 경찰이 차량을 막아섰다. 나는 차에서 내리며 이
난처한 상황이었다. 도무지 어찌할지 몰라 법까지 들먹이고 말았다.“법이 어떤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서른이 넘도록 연애도 안 하고 결혼도 안 하는 건 정상이 아니야. 어느 날 갑자기 남자 며느리라도 데려오면 내가 무슨 낯으로 사람들을 보겠냐?”조경태는 누가 뭐라 해도 듣지 않겠다는 태도였다.“그럼 제가 하나 약속드릴게요. 절대 남자를 며느리로 데려오는 일은 없을 거예요.”조시언은 능청스럽게 받아쳤다.조경태는 씩씩 대며 화를 냈다. 그러자 안리영이 급히 나서며 말했다.“할아버지, 삼촌 좀 그만 괴롭히세요. 안 좋아하는데 억지로 떠민다고 행복해지겠어요?”“이 계집애는 왜 또 얘 편을 드는 거야?”할아버지는 안리영을 흘겨보았다.내가 얼른 말을 이었다.“오늘 온 아가씨들, 저랑 리영이 다 지켜봤어요. 삼촌이랑 어울릴 만한 사람은 한 명도 없더라고요.”지금 이 순간 나도 안리영을 따라 조시언을 삼촌이라 부르고 있었다.“난 못 믿겠는걸.”조경태는 콧방귀를 뀌었다.안리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정말이에요, 할아버지. 그 여자들, 남 얘기하길 좋아해서 뒤에서 험담이나 하는 사람들이에요. 아까도 삼촌 뒷담 까고 있었어요.”조시언은 그녀를 바라보았고 조경태도 흥미를 보이며 물었다.“그래? 뭐라고 험담하던?”“삼촌이 나이가 꽤 됐는데도 아직 결혼 안 한 걸 말한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삼촌을 차지해서 조씨 가문 며느리가 될 수 있을까, 그런 수작 부릴 생각들만 하고 있었어요.”안리영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오늘 그 여자들이 조시언을 노리고 온 건 분명했으니 말이다.“그건 좋은 일이잖니.”조경태는 오히려 기뻐하며 말했다.“할아버지는 수작 부리는 여자가 좋으세요?”안리영은 조경태가 싫어하는 걸 정확히 알고 있었다.조경태는 말이 없었다. 속이 시커먼 여자한테 크게 당할 뻔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안리영은 나를 향해 눈짓을 보냈고 나는 재빨리 입을 열었다.“할아버지, 삼촌 짝 찾는 일은 저랑 리영이에게 맡겨주세요.”내 말에 안리영이 눈
문이 완전히 닫히지 않아 안리영과 나는 방 안의 두 사람을 볼 수 있었다.서로 마주 본 채 각자의 소파에 앉은 모습이었다. 한 사람은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이고 다른 한 사람은 젊고 준수한 청년이었다. 두 사람 사이의 나이 차가 너무나 뚜렷해 그들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분명 할아버지와 손자 사이일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부자 관계였다.안리영은 조시언이 입양된 아들이라고 내게 말해준 적이 있다. 하지만 나는 그 얘기를 들었을 때 의아했다. 당시 나이로 치면 조경태는 조시언을 손자처럼 키워도 이상할 게 없었을 텐데 왜 굳이 아들로 삼은 건지 궁금했다.“시언아, 너 이제 나이도 어린 게 아니잖니. 결혼 안 하겠다는 건 그렇다 쳐도 여자 친구조차 없다니. 밖에서 사람들이 너를 두고 뭐라고 수군대는지 너도 알지?”조경태는 수군대다 같은 말도 자연스럽게 썼다.하지만 조시언은 묵묵히 앉아 있을 뿐 아무 말이 없었다. 머리 위에서 내려오는 조명이 그의 얼굴과 콧대를 선명하게 나누듯 비췄다. 빛과 그림자가 교차하면서 그의 이목구비는 더욱 또렷하게 도드라졌다. 깊은 눈썹뼈는 날카로운 선을 연출해 냈다.“사람들이 네가 남자를 좋아한다고 하더라!”조경태는 말을 끝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이런 이상한 소문이 퍼지는 건 우리 조씨 가문의 체면을 망치는 일이다. 우린 그런 망신 못 당한다!”조시언은 그 말에도 여전히 동요하지 않았다. 그의 평온한 표정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고요했다.“남의 입은 막을 수 없습니다. 그들이 떠들어대는 건 그들 사정일 뿐, 우린 신경 쓰지 않으면 됩니다.”“넌 신경 안 쓴다지만, 이 늙은이는 창피해서 못 살겠다! 네가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다. 지금 당장 사람 하나 데리고 오든가, 아니면 내가 직접 찾아줄 거다. 결혼 안 해도 좋다. 그냥 네 옆에 여자 하나 세워놔라. 사람들이 널 정상으로 보게 말이다!”그 말에 안리영과 나는 동시에 서로의 팔을 꼬집었다. 안 그러면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이 노
“넌 안 그럴 거야, 맞지?”안리영은 계속 나를 놀리면서도 언제나 내 편이었다.우리는 함께 연회장으로 들어섰다.조경태는 자줏빛과 금색이 어우러진 긴 도포를 입고 활짝 웃으며 손님들의 축하 선물을 받고 있었다.그는 내가 가져온 선물을 보곤 눈을 반짝였다.“특별한 선물이구나. 아주 마음에 들어.”그 말에 나는 괜히 민망해졌다.강유형의 어머니도 비슷한 걸 선물했는데 어째서 내 것을 특별하다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역시 세상을 오래 산 사람은 달랐다. 누구보다도 말솜씨가 뛰어났다. 받는 사람도 기쁘고 주는 사람도 흐뭇하게 만드는 한마디였다.“리영아, 구 교수는 어디 갔니? 오늘은 왜 같이 안 왔어?”조경태가 슬며시 물었다.안리영은 내 옆구리를 몰래 콕 찔렀다.“그냥 따로 말 안 했어요. 오늘은 그냥 제가 단순히 할아버지가 보고 싶어서 온 거거든요.”그러나 이 정도 지긋한 나이가 되면 이미 눈치챘을 것이다. 오늘 같은 잔칫날에 인원 제한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고 왔다 해서 구안석이 못 오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그는 안리영을 힐끔 바라보다 두어 번 웃고는 더 묻지 않았다.“할아버지, 그럼 선물마저 받으시고요. 저는 지원이랑 가서 뭐 좀 먹고 올게요.”안리영은 핑계를 대며 빠져나가려 했다. 또 무슨 질문이 나올까 봐 걱정된 눈치였다.“그래, 다녀오거라. 다만 너무 멀리 가지는 마. 좀 있다 너희 둘 도움 좀 받아야겠구나.”그 말에 우리 둘은 눈빛을 주고받았다.“혹시 케이크 자르실 때 저희한테 맡기시려는 거 아니에요?”안리영이 농담처럼 물었다.조경태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이마를 콕 찔렀다.“이놈의 계집애, 지금 누굴 놀리는 거냐. 케이크 칼 정도는 들 수 있다고! 그게 아니고, 너희 둘한테 자문 좀 구하고 싶어서 그래.”“자문이요? 혹시 애인이라도 골라달라는 거예요?”안리영은 정말 무서울 정도로 겁 없이 농을 던졌다. 외할머니가 들으면 바로 이마 한 대는 맞았을 거다.“점점 대담해지는구나.”조경태가 다시 한번 그녀를 가리키며
안리영과 조시언 사이에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하지만 성준수는 그 분위기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 안리영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했다.“하긴 이렇게나 예쁜데 조시언이 마음 줄 만도 하지... 아야, 아파! 조시언, 너 왜 그래?!”성준수는 조시언에게 뒷덜미를 잡힌 채 끌려 나갔고 안리영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정신 나갔네.”“조시언네 리영이?”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장난스럽게 되물었다.안리영은 내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너까지 말썽이야, 얼른 가자. 외할아버지께 선물 드려야지.”그녀는 내 손을 잡고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빨갛게 물든 귓바퀴가 그녀의 부끄러움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아까 조시언과의 어색한 분위기를 떠올리다 나도 모르게 장난을 쳤다.“리영아, 너랑 외삼촌 피가 섞인 것도 아니잖아. 내가 보기엔 한번 고려해 볼 만도 해. 잘생겼지, 돈 많지, 만약 네가 저 사람 잡으면 적어도 밖으로 새는 물은 없을 거 아니야.”안리영은 눈을 부릅떴다.“윤지원, 너 또 그런 소리 하면 진짜 절교할 거야.”“어머, 발끈하네?”나는 계속해서 놀렸다.“그만하라고 했지!”안리영은 나를 쫓아와 때리려 했다.나는 그녀를 피해 도망치다가 무언가에 부딪혔다. 뒤를 돌아보기도 전에 익숙한 향이 먼저 스며들었다.고개를 들자 강유형이 서 있었다.요즘 그와 자주 마주쳤다. 절에서도 마주쳤고 조씨 가문에서도 마주쳤으니 말이다.“강 대표님, 이제 가시려고요?”안리영의 말투엔 노골적으로 쫓아내는 기색이 담겨 있었다.나는 이미 다 털어냈다 하더라도 안리영은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네.”강유형은 나를 살짝 놓아주며 내 발을 내려다봤다. 다친 데가 있는지 확인하려는 듯했다.“조경태 씨 생신 축하하러 왔어요.”그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우리는 볼 거 다 보고 별일 다 겪은 사이였다. 나는 담담하게 물었다.“저녁 식사는 안 하고 가?”“응, 그게...”그는 말을 잠시 멈추었다.“집에 가봐야 해서.”그 말에 문득 김희연이 내게 건넨 말과
“아이참, 엄마!”안리영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오늘은 외할아버지 생신 잔치잖아, 내 맞선 자리가 아니고.”“뭐 어때?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셈이잖니. 좀 있다가 잘 둘러보렴. 우리 딸처럼 예쁘고 똑똑한 애가 남자 친구 하나 못 찾겠어? 눈만 마주치면 끝이지.”조민영은 시원시원한 성격이었다.안리영은 체념한 듯 말했다.“알겠어. 엄마는 먼저 가서 볼일 봐. 난 지원이 찾으러 갈게. 외할아버지께 드릴 선물도 걔가 챙겨왔거든.”안리영은 그렇게 핑계를 대고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난 그녀와 어머니의 대화를 이미 들은 터라 입가에 옅은 미소를 그리고 그녀에게 말했다.“아주머니 꽤 개방적이시네. 근데 나도 그 말 일리 있다고 봐. 예전에 네가 나한테 그랬잖아. 사람은 사람으로 잊는 거라고.”“좋아. 마음에 드는 사람 있으면 바로 들이댈게.”그 순간 나는 조시언을 발견했다.그는 어두운 톤의 정장에 검은 셔츠를 받쳐 입고 있었다. 셔츠 단추는 몇 개 풀려있었고 그로 인해 허연 목덜미가 살짝 드러나 있었다. 그 하얀 피부와 검은 셔츠가 만들어내는 대비는 그를 더욱 차가워 보이게 만들었다. 어쩐지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도 자아냈다.“네 외삼촌, 진짜 잘생겼다.”나는 감탄했다.안리영도 내 시선을 따라가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여자들한테 인기 많았어. 예전에 내가 저 사람한테 온 러브레터를 얼마나 많이 대신 받아줬는지 몰라.”하긴 조시언 같은 사람이 인기가 없을 리가 없었다.“그럼 연애는 해봤대?”안리영은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아니, 못 해봤을걸.”“그렇다면 마음에 담아둔 사람이 있다는 말이겠지.”내 말에 안리영이은 의외라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내 가슴을 콕 찌르는 말을 꺼냈다.“아, 맞네. 너 연애 경험 많았지.”“나 약 올리는 거야? 그렇게 나오면 나도 너 도와줄 마음 싹 사라지는데?”우리가 대화를 나눌 동안 조시언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안리영은 어느새 자세를 바짝 고쳐
안리영은 그 전화를 받지 않았다. 몇 초 후 그냥 끊어버렸다.그토록 단호하고 주저 없는 태도는 예상하지 못했다. 아마 정말로 마음을 굳힌 모양이다.이런 부분에선 그녀가 나보다 훨씬 강했다. 질질 끌지도 않았고 미련도 없었다.사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강유형과 헤어진 건 헤어진 거고 가끔 연락을 하긴 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을 때뿐이었다.안리영과 구안석이 여기까지 온 게 아쉽긴 해도 딱히 뭐라고 말할 순 없었다.감정의 온도는 결국 그 당사자만이 아는 법이니 말이다.우리가 함께 차를 마시며 점원의 포장 작업을 기다리는 동안 안리영의 휴대폰 화면이 다시 한번 반짝였다.새 메시지가 도착했다는 알림이 떴다.구안석에게서 온 메시지였다.‘리영아, 나 이제 갈게.’나는 슬쩍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내가 무슨 말을 꺼내기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이따가 차단할 거야.”“직접 못 하겠으면 내가 대신 해줄까?”내가 농담처럼 말했다.안리영은 나에게 절친만이 보낼 수 있는 눈빛을 건넸다. 점원이 포장해 준 작품을 들고 매장을 나설 때까지 그녀는 끝내 구안석에게 답장하지 않았다.돌아오는 길에 그녀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나는 그녀의 손가락이 구안석의 메신저 대화창에서 멈춘 걸 발견했다. 그녀는 그들이 나눈 대화를 처음부터 다시 훑어보고 있었다. 그러다 그녀는 피식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나는 의아해 물었다.“왜 웃어?”안리영은 내게 휴대폰을 내밀며 말했다.“선배님이랑 나눈 대화 좀 봐봐. 처음부터 끝까지 다 합쳐도 겨우 몇십 개밖에 안 돼. 우리 과 단톡방에서 일주일에 올라오는 공지보다도 적어.”나는 보지도 않고 다시 그녀에게 휴대폰을 돌려주었다.“이미 헤어지기로 한 거잖아. 그런 거 봐서 뭐 하려고.”“지원아, 나 진짜로 연애한 게 맞긴 한 걸까?”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구안석을 차단했다.“공적인 일 있으면 어떡하려고 그래, 그럴 때도 연락 안 하게?”나는 애써 분위기를 풀어보려 장난을 던졌다.“그 사람은 흉부외과고 나는 산부인과야. 서로
“이거 포장해 주세요. 선물할 거니까 선물 상자에 담아 주세요.”김희연은 점원에게 부탁을 마치고 돌아서다 나를 발견했다.“지원아!”그녀가 놀라움과 반가움이 섞인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아줌마.”나는 그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김희연은 나를 바라보며 눈가를 붉혔고 눈동자까지 촉촉하게 물들였다.“지원아...”그녀는 내 이름만을 부를 뿐 다른 말은 쉽사리 꺼내지 못했다. 마음속에 수많은 말들이 맴돌고 있을 게 분명했지만 끝내 꺼낼 용기가 나지 않는 듯했다.나도 그녀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몇 달 만에 마주한 모습이었다. 흰머리가 부쩍 늘었고 수척해진 인상이 눈에 띄었다. 무엇보다 눈빛에서 생기가 보이지 않았다.그녀가 요즘 어떤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강두식은 병상에 계시고 두 아들 사이엔 균열이 생겨 서로 등을 돌린 상태다.말 그대로 집안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모든 시작은 나와 강유형이 끝을 맺으면서부터였던 것 같다.가정이 화목하면 모든 일들이 잘 풀린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잘 지내니?”그녀가 한참 만에 힘들게 물었다.“네, 아주 잘 지내고 있어요.”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거면 됐다. 그거면 좋아.”나는 그녀에게 별다른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어떤 시간을 견뎌냈는지 이미 보아냈으니 말이다.“너도 혹시 작품 보러 왔니? 선물하려고?”그녀는 어색함을 덜기 위해 다시 말을 건넸다.“오늘 저희 외할아버지 생신이라서요. 지원이가 저희 외할아버지 드리려고 보고 있었어요.”안리영이 대신 대답했다.“지원이도 조씨 댁에 가는구나. 잘 됐다, 그분도 지원이를 참 좋아하시잖니. 예전에도 자주 얘기하셨지.”그녀는 말을 잇다가 목이 메인 듯 얼굴을 살짝 돌렸다.나는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랐다. 그녀가 그렇게 슬픔을 억누르는 모습이 안쓰러워 조용히 입을 열었다.“아줌마, 저 먼저 고르러 가볼게요.”“지원아.”그녀가 다시 나를 불러 세웠다. 입술을 몇 번 달싹이다 어렵게 말을 이었다.
“네가 헤어지자고 했는데 구안석이 아무 말도 안 했다고?”안리영의 말을 듣고 나도 좀 놀랐다.안리영은 살짝 웃었다.“아마 그 사람도 지쳤겠지. 차라리 혼자일 때가 더 편했을 거야. 뭘 하든 마음대로 할 수 있고 간섭받을 일도 없고 신경 쓸 일도 없으니까.”딱 봐도 감정 섞인 말이었다.“너, 혹시 이별하자는 말도 일부러 한 거 아니야? 화나서?”내가 조심스레 물었다.안리영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난 정말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야.”내가 코웃음을 쳤다. 안리영이 웃으며 말했다.“진짜라니까. 지난번에 내가 선배한테 귀국할 수 없냐고 물었을 때부터 쭉 고민해 왔어.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뭘까, 생각하게 되더라고.”“사실 사랑이든 결혼이든 여자들이 바라는 건 결국 하나잖아. 안정감, 그리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 근데 그 사람이 그걸 못 준다면 나 혼자서도 충분한데 굳이 그런 사랑을 붙잡을 필요가 있을까?”안리영은 낮게 물었다.나는 장난스럽게 말해봤다.“그럼 생리적 욕구 해결은?”안리영은 다시 웃었다.“남자를 그 이유 하나로만 찾는 거면 얼마나 쉬워. 돈만 있으면 다 해결되잖아. 게다가 종류도 다양하고 취향 바꾸는 것도 가능하고.”“하하하.”나는 그 말에 웃음이 터졌다.“리영이, 네 취향 은근히 세네?”장난처럼 말했지만 사실 그녀 말에 어느 정도 동의했다.“리영아, 네가 어떤 결정을 해도 난 응원할 거야. 하지만 말이지... 이별이라는 건, 특히 진심이었을 때는 헤어지는 순간도 진짜 아프잖아. 힘들면 꼭 나한테 말해. 같이 술이라도 마셔주지.”“응, 필요하면 연락할게.”안리영은 내 이마에 자기 이마를 살짝 맞댔다.“그보다 지금 당장 네가 좀 도와줘야 하는 일이 하나 있어.”“뭔데?”“오늘 우리 외할아버지 생신이야. 이번엔 도저히 빠질 수가 없어.”안리영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그녀의 부모님도 몇 번이나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가 보고 싶어 하신다고 했는데 그녀는 그때마다 핑계를 대고 빠졌단다. 이번까지 거절하면 그녀의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