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사람은 누구나 나이를 먹지만 하룻밤 사이에 이렇게 세월이 무겁게 내려앉을 줄이야... 가슴이 아팠다.삼촌은 나를 위해 홍차를 끓여주셨지만 내 입속에 남은 건 씁쓸함뿐이었다.“이 홍차 가져가렴. 집에서도 끓여 마실 수 있을 거야. 피부에도 좋고 몸에 좋아.” 삼촌은 남은 찻잎을 정성스럽게 포장해 내 손에 쥐여 주셨다.삼촌은 마치 나를 친딸처럼 챙겨주셨다. 그 속에는 미안한 마음도 담겨 있는 듯했다. 내가 그걸 거절하면 삼촌 마음이 더 상할까 봐 조용히 받아들었다.“네, 다 마시면 또 삼촌께 부탁드릴게요.” 나도 가볍게 대답하며 삼촌의 마음을 덜어드렸다.“그래, 뭐든 원하면 말해라. 지원아, 넌 내 딸이나 다름없다.” 삼촌의 진심 어린 말에 나도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말했다.“저에게도 삼촌은 친아버지나 다름없어요.”학창 시절에도 항상 부모님이 안 계시다는 외로움을 느끼지 않도록 삼촌이 늘 신경 써주셨다. 가끔은 아줌마가 가고 싶어 해도 삼촌이 “내가 가야, 교장 선생님도 한 번 더 신경 써주지 않겠어?”라고 하시며 직접 학교에 오셨다.삼촌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내 시선이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향하자 미소를 지었다. “지원아, 네 아줌마가 나 걱정 많이 하던데 이렇게 된 걸 알면 얼마나 더 속상해할까?”“삼촌, 지금도 멋지세요.” 나는 웃으며 말했다.삼촌도 머리를 손으로 매만지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래, 나도 멋지지 않니?”나는 눈물이 고이도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삼촌은 언제나 멋져요.”우리가 웃으며 이야기하고 있을 때, 갑자기 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줌마가 목소리부터 내셨다. “지원이 아니면 당신 같은 고집불통 노인은 누가 감당하겠어요!”아줌마는 문 앞까지 오더니 우리가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을 보고 말없이 놀란 표정을 지으셨다. 아줌마의 얼굴에 담긴 미소는 금세 굳어졌고 믿기지 않는다는 듯 삼촌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삼촌과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고 나는 아줌마가 충격받을까 봐 급히
내가 온갖 수를 써서라도 타고 싶었던 차에 이렇게 쉽게 탈 수 있을 줄이야. 이제 남은 건 그 주소를 알아내는 건데 아직도 갈 길이 멀다.“저기, 삼촌, 차 좀 잠깐 세워주세요. 속이 안 좋아서 토할 것 같아요.” 차가 반쯤 달렸을 때 약국이 보이자, 일부러 아픈 척하며 차를 멈춰달라고 부탁했다.“그래, 그래.” 삼촌은 백미러로 날 한 번 쓱 보더니 서둘러 차를 세웠다.차가 멈추자 삼촌은 긴장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지원아, 어디 아픈 거야? 병원에 갈까?”“아까 삼촌이 끓여주신 차를 마시고 속이 좀 찬 것 같아서 그래요.” 일부러 삼촌을 언급하면 더 신경 써 줄 것 같았다.배를 살짝 감싸안으며 말했다. “삼촌, 미안한데 오메프라졸 약 좀 사다 주실 수 있을까요? 그거 하나 먹으면 괜찮아질 거예요.”삼촌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여전히 불안한 듯했다. “그래도 병원에 가야 하는 거 아니야?”더 이상 말하지 않자, 삼촌은 내가 굳이 병원을 원하지 않는다는 걸 눈치챈 듯했다. 오랫동안 삼촌 곁에서 일한 사람답게, 내 말 한마디 한마디를 놓치지 않았다.그가 약을 사러 내려가는 걸 보면서 시간을 조금 더 끌어보려고 덧붙였다. “삼촌, 물도 한 병만 사다 주세요.”“찬물은 안 돼, 차 안에 미지근한 물 있으니까 돌아와서 줄게.” 삼촌은 약국으로 향하며 몇 번이나 뒤돌아보았다.그가 약국 쪽으로 서둘러 가는 걸 확인하자, 나는 조심스럽게 일어서서 내비게이션의 운행 기록을 검색했다. 이런 짓을 하면서도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고 마음이 바빠져 한 번도 창밖을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다행히 약국은 길을 건너야 하기에 삼촌이 돌아오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듯했다.서둘러 운행 기록을 뒤졌지만 이상하게도 내가 찾고자 하는 주소는 없었다. 한 달 전의 기록까지 다 뒤졌는데도 말이다. 설마 내가 뭔가 착각한 걸까?아직 포기하지 않고 계속 찾는 중에, 삼촌이 약을 들고 돌아오는 모습이 보였다. 심장이 다시 빠르게 뛰기 시작했고 나는 창밖을 살피
나는 그들의 생일 뒤 세 자리 숫자를 입력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렇게 간단한 조합은 너무 쉽게 유추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강유형이 부모님께 더 사랑받는 것처럼 보였던 기억을 떠올리며 그의 생일을 앞에 두고 강진혁의 생일을 뒤에 붙였다.마지막 숫자를 입력할 때는 심장이 터질 것 같았고 손끝까지 떨렸다. 마침내 비밀 경로라는 회색 문구가 환하게 변하며 비밀번호가 맞았음을 알렸다. 화면에 뜬 “세강 요양원”이라는 네 글자를 보자 나는 가슴 깊은 곳에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세강 요양원은 내가 조사했던 세 곳 중 하나였다. 지금까지 모든 노력이 바로 이 다섯 글자를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다.결국 목표를 달성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불안이 남아 있었다. 나는 급히 검색 기록을 지우려고 손을 뻗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삼촌이 차 문을 열었다. 그의 시선이 내 손과 내비게이션 화면으로 번갈아 향했다. 내 손은 미세하게 떨렸고 등에선 땀이 흘렀다.“지원아, 뭘 하고 있는 거야?” 삼촌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나는 얼른 대답했다.“그냥 음악 좀 들으려고 했는데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어요.”삼촌은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빛을 거두지 않았다. 속이 아프다며 차를 멈춘 사람이 음악을 듣고 싶어 한다는 건 아무래도 설득력이 없었다.이 상황에서 나는 어떻게든 거짓말을 이어 나가야 했다.“속이 너무 아파서 아는 의사 친구한테 물어봤는데 가벼운 음악을 들으면 좀 나을 거라더라고요. 병원 가서 검사도 받아보래요. 급성 장염이나 맹장염일 수도 있대요.”말하면서도 스스로가 너무 한심하고 부끄러웠다. 언제부터 내가 이런 거짓말까지 해야 하는 사람이 되었을까? 하지만 지금은 이럴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의 죽음이 정말 사고였는지, 그 진실을 밝혀야 했으니까.“그랬구나.” 삼촌은 의심스러운 표정을 거두며 약봉지를 건네주었다.“그럼 빨리 병원으로 가자. 음악은 내가 틀어줄게.”“감사합니다, 삼촌.” 나는 얼른 약을 받아 입에 넣고 물도 없이 삼켰다. 약효를 기
삼촌과 아줌마는 정말 나에게 너무 잘해주셨다. 그래서인지 그분들을 의심하는 것조차 나 스스로 죄책감을 느낄 만큼 마음이 불편했다.그런데 안리영마저 그런 가능성을 염두에 두는 말을 하니 가슴속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공포감이 몰려왔다.“그래도 난 알아봐야 해!”이런 상황일수록 진실을 반드시 밝혀야 했다. 아버지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서라도, 삼촌에게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안리영은 내 생각을 읽었는지 더 이상 말리지 않았고 대신 짧게 말했다.“언제든 네 곁에 내가 있다는 걸 잊지 마.”그 말속에는 이미 무언가 답을 알고 있는 듯한 기운이 느껴졌다.나는 멈추지 않기로 했다. 진실을 찾을 때까지 결코 포기하지 않을 생각이었다.응급실을 나온 뒤 나는 곧장 택시를 잡아탔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바로 그곳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삼촌의 운전기사가 서 있었다. 그의 손에는 약봉지가 있었고 전화를 하며 걸어가고 있었다.“...네, 차량 내 내비게이션을... 음악을 듣고 싶다고...”그의 말을 듣자 등골이 서늘해졌다. 굳이 듣지 않아도 그가 누구에게 보고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그렇다면 왜 보고를 하는 걸까? 차 내 내비게이션은 그냥 흔한 장비 아닌가?머릿속은 점점 혼란스러워졌고 그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계속해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더는 지체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바로 세강 요양원으로 가야 했다.하지만 내가 도착했을 때, 요양원은 철저하게 보안 관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입구에서 보안 요원이 방문 목적과 방문자를 묻더니, 이름과 방 번호까지 요구했다.이름은 알지만 방 번호는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섣불리 용진표라는 이름을 언급했다간 그들이 본인에게 확인 전화를 넣을 가능성이 컸다. 그렇게 되면 내 의도가 전부 드러나게 될 터였다.결국 가족 상담을 위해 왔다고 둘러댔지만 보안 요원은 이곳은 예약제로 운영되며 상담이 필요하지 않다며 단호히 거절했다.고급 요양원은 역시 다르구나 싶었다. 아무나 드나들
정적이 감돌며 숨이 막힐 듯 답답했다.전화를 끊을 적당한 화제를 찾아야 하나 고민하던 순간, 아줌마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너희 삼촌이 이렇게 된 건 전부 그 여자 때문이야. 그래서 난 절대 그 여자를 받아들일 수 없어.”아줌마의 말투는 단호했고, 이를 악물며 내뱉는 그녀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등골이 서늘해졌다.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한동안 침묵했다.“지원아.”아줌마가 내 이름을 부르며 말했다.“시간 날 때 삼촌 좀 자주 찾아와 줘. 네가 와야 삼촌도 좀 마음이 풀리실 거야.”그 말이 내게 큰 부담으로 다가왔지만, 나는 억지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전화를 끊고 나니, 온몸에 힘이 빠져 자동차 좌석에 기대어 멍하니 앉아 있었다. 무언가에 짓눌린 것처럼 움직일 수도, 제대로 숨 쉴 수도 없었다.집에 도착한 나는 소파에 웅크려 앉아 지금까지의 일들을 천천히 되짚었다.모든 실마리들이 차례로 연결되고 있었지만, 결국 용진표로 향하는 듯했다.특히 용진표와 삼촌이 관련이 있고, 용진표가 있는 요양원 주소가 암호화되어 있다는 사실은 더욱 수상했다.만약 숨길 일이 없다면, 굳이 비밀번호까지 설정할 이유가 있을까?머릿속이 점점 복잡해졌다.답답함에 나는 소파 쿠션을 얼굴 위로 덮으며 스스로를 가뒀다.이렇게 하면 잠시나마 생각을 멈출 수 있었다. 하지만 머리가 터질 것처럼 혼란스러울 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처음에는 환청인가 싶었다.그러나 이어서 문밖에서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나는 쿠션을 내리고 문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아직 낮이라 위험할 것 같진 않았지만, 그래도 조심스레 물었다.“누구세요?”“나예요. 진정우.”그 목소리에 순간 멍해졌다. 진정우가 내 집에 찾아오다니.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문을 열자, 검정 티셔츠와 작업복 바지를 입은 진정우가 서 있었다. 여전히 단정하면서도 매력적인 모습이었다.“여긴 왜 왔어요?” 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그는 말 대신 손을 들어 내 이마에 얹었다.
“몰라요.”진정우는 짧고 간결하게 세 글자로 대답했다.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모르는데 바로 문을 두드렸어요?”그는 썰어 놓은 채소를 접시에 옮기며 태연하게 대답했다.“아래층 아줌마가 알려주셨어요. 당신이 집에 돌아왔다고요.”“...”나는 차 한 모금을 마시며, 요리하는 그의 모습을 감상했다.그런데 갑자기 진정우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뭐가 의심스러워요?”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장난스럽게 대답했다.“의심이라기보다는... 당신이 나를 미행한 거 아닐까 싶어서요.”“뭐라고요?”그는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농담이에요. 정우 씨가 그렇게 한가하지 않다는 건 알죠.”말을 마치고 나는 거실로 돌아가 소파에 앉아 차를 마셨다.차 몇 모금에 몸이 나른해졌다. 휴대폰을 보며 이것저것 확인하다 보니, 어느새 눈꺼풀이 무거워지면서 그렇게 잠에 빠졌다.꿈속에서 대머리 남자가 나를 붙잡아 끌고 갔다. 용진표는 그에게 나를 죽이라고 명령했다. 눈앞에서 번쩍이는 칼날이 내게 다가오자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지원 씨!”“지원 씨, 일어나요!”어느새 누군가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눈을 번쩍 뜨니, 진정우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손이 내 머리를 단단히 감싸고 있었다.“악몽 꿨어요?”그의 낮은 목소리가 조용히 울렸다.아직도 꿈의 공포에서 헤어나지 못한 나는 헐떡이며 말했다.“그날 당신을 둘러싼 그 대머리 남자, 용진표 맞아요. 나 그 사람 봤어요.”진정우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그걸 어떻게 알아요?”“내가 봤다니까요.”나는 그의 손을 더 꽉 잡았다가 천천히 놓았다.“이건 제 일이에요. 당신이 끼어들 필요 없어요. 알겠죠?”그의 목소리는 단호하면서도 무겁게 울렸다.나는 변명하고 싶었다. 진정우의 일이 아니라, 내 아버지의 죽음을 조사하다가 우연히 알아낸 것뿐이라고.하지만 그는 내게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말했다.“용진표는 아주 위험한 사람이에요. 절대로 끼어들지 마요. 정말이에요.”그의 진지
여자는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더 예뻐지고 싶어 한다고들 하지 않던가.나는 이제야 내가 진정우를 신경 쓰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다.손을 씻고 나오자마자 진정우가 다가와 나를 부축하려 했다.나는 괜히 강한 척하며 그의 손을 뿌리쳤다.“괜찮아요. 저 이제 괜찮아요.”그는 억지로 도와주려 하지 않고 내 뒤를 따라 식탁으로 걸어왔다.테이블 위에는 아까 말했던 요리뿐만 아니라 깔끔한 반찬 두 가지와 과일샐러드까지 추가되어 있었다.차려진 음식은 보기만 해도 입맛을 돋웠다.“정우 씨, 동생은 정말 행복하겠어요.”그가 이렇게 정성을 다해 요리하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감탄하며 말했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아무 대답도 없었다. 그의 동생이 심장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이 떠오르며, 갑자기 머릿속에 질문 하나가 떠올랐다.“정우 씨, 고향은 어디예요? 동생은 어디서 살아요?”그는 나를 흘깃 쳐다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나는 웃으며 장난스럽게 물었다.“왜 그래요? 내가 당신 동생한테 뭔가 해코지라도 할까 봐요?”“평진이요. 청평 아래에 있는 작은 마을이에요.”이번에는 의외로 상세히 대답했다.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태연한 척 말했다.“저 이번에 대표님 덕분에 휴가받았어요. 수고했다며 그냥 쉬라고 하시더라고요.”“그래요.”그는 여전히 담담했다.역시 군인 출신이라 그런지 보통 사람들과는 감정 표현부터 다르게 느껴졌다.대표님이 준 휴가 이야기를 하다 보니 자연스레 그 신비로운 대표님이 떠올랐다.“내가 뭘 잘했다고 대표님이 이렇게 잘해 주시는지 모르겠어요. 아직 눈에 띄는 성과도 없는데 말이에요.”그러다 문득 대표님이 강유형의 회사 계약을 거절했던 일이 떠올랐다.“사실 대표님 아니었으면 저 아마 강유형 회사랑 계약했을 거예요. 그 회사 괜찮았고 이익도 꽤 됐거든요. 그런데 대표님이 딱 잘라 거절하시더라고요.”내 말을 듣던 진정우가 슬쩍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왜요?”“글쎄요, 혹시 제가 마음에 들어서 그런 건 아닐까요?”나는 장난스럽
그날 밤, 나는 집을 떠났다. 진정우의 집은 불이 꺼져 있었다. 아무래도 집에 없는 듯했다.강진혁에게서 전화가 걸려 온 건 기차역 대기실에 앉아 있을 때였다.이번에는 비행기 대신 KTX를 선택했다.시간이 두 시간 더 걸리긴 했지만 나는 땅 위를 달리는 KTX가 하늘을 나는 비행기보다 더 안정감을 준다.“지원아, 차 고쳤어. 어디 있어? 내가 가져다줄게.”강진혁의 목소리는 늘 그랬듯 따뜻하고 차분했다.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스마트폰을 바라보는 사람들 사이에서 담담히 대답했다.“수리소에 놔두세요. 제가 직접 찾으러 갈게요.”잠시 침묵이 흘렀다. 강진혁이 다시 입을 열었다.“수리소가 어디 있는지 알아?”“네. 항상 거기서 정비하잖아요.”그는 잠시 망설이더니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정비사가 그러는데 네 차에 누가 일부러 손을 댔다고 하더라.”그 말에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사실, 내가 일부러 조작한 거였으니까.“정말요?” 나는 최대한 놀란 척 물었다.“지원아, 혹시 네 차를 다른 사람이 운전한 적 있어?”그의 질문은 순수한 걱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나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대답할 말을 고민했다. 그때 강진혁이 덧붙였다.“다행히 해를 끼치려던 건 아니었던 것 같아. 다만 조금 번거롭게 하려던 것 같아. 차라리 집에서 멈춘 게 나았지, 밖에서 멈췄으면 더 골치 아팠을 거야.”그의 말에 나는 굳이 변명하지 않기로 했다.“알겠어요. 조심할게요.”잠깐의 침묵이 이어지더니, 강진혁이 다시 물었다.“지금 밖에 있어? 주변이 좀 시끄러운데.”“네.”나는 짧게 대답했다.그는 내 짧은 대답에 더 묻지 않았다. 대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몸조심해.”전화를 끊고 나니 가슴 한구석이 답답했다.요즘 ‘불필요한 인간관계와 소셜 활동을 줄여라’는 영상들을 자주 보게 되는데 그 의미를 이제야 조금 이해할 것 같았다.사람들과의 관계는 때로는 부담스럽고 피곤하게 만들기도 한다.특히 걱정을 해주는 사람이 많을수록 마음이 더 무거워졌다.나는
진정우와 나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진소영이 마당의 흔들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을 봤다. 바람에 치맛자락이 살짝 날리며 그 장면이 마치 꿈처럼 비현실적이었다.진소영은 책에 몰입해 있었고 우리가 내린 것도 몰랐다. 이때 도성운이 크게 외쳤다.“소영아, 누가 왔는지 봐봐!”“성운 오빠, 엔진 소리가 어찌 크던지 단번에 오빠인 줄 알았어요.”진소영이 웃으며 말했고 그 말에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도성운은 조금 어색해하며 머리를 긁었다.“나만 온 거 아닌데. 다른 사람도 있어.”진소영은 책을 계속 읽으며 아예 신경을 쓰지 않았다. 도성운이 다시 입을 열려고 하자 나는 가볍게 그를 막으며 사뿐사뿐 진소영에게 다가갔다.“이 책 저번에 같이 읽었잖아?”지난번에 봤던 오래된 연애 소설 책이었다. 진소영은 놀란 듯 고개를 돌렸고 나를 보며 눈을 반짝였다.“언니!”나는 환하게 웃었고 진소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내 뒤에 있는 진정우를 보고 급히 책을 던져두고 그에게 달려갔다.“오빠!”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진정우가 진소영을 얼마나 아끼는지 알게 되었다.그는 평소에도 진소영을 많이 챙겼다. 나는 그들 대화를 방해하지 않고 진소영이 읽던 책을 집어 들었다. 「링」이라는 제목의 책이었다. 책이 많이 갈라지고 색이 바래 있었기에 분명 여러 번 읽은 책일 거다.내용이 궁금해져서 책을 넘기다 진소영이 다가와서 책을 빼앗으려 했다.“안 돼요. 보지 마세요.”그녀는 책을 빼앗으며 말했다.“왜? 이 책에 비밀이라도 있어?”진소영은 얼굴이 빨개져서 말했다.“그럴 리가요. 언니는 오빠랑 연애 중인데 이런 소설을 보면 안 되죠.”그녀의 얼굴이 빨개지자, 나는 웃으며 말했다.“아, 그럼 연애 초보인 너에게 딱 맞는 교과서겠네.”“언니!”진소영은 얼굴을 붉히며 나를 쏘아봤다.나는 더 이상 괴롭히지 않고 책을 그녀에게 돌려줬다. 그때 진정우가 내 손을 잡았다.“들어와 물 좀 마셔.”나는 그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진정우가 물을 꺼내
비행기가 착륙할 때쯤, 이미 해 질 무렵이었다.저녁노을이 빨갛게 물든 광경이 너무 아름다워서 가슴이 떨렸다.“이건 내가 본 것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을이야!” 내가 감탄하며 말했다.“나도 그래.” 그러자 진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항상 이렇게 말하지만 나는 이제 별로 감동이 없었다.그런데 차에 앉아 그의 SNS를 보니 조금 전에 본 노을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글귀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네가 옆에 있어서.]한눈에 보면 사진과 글이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지만 비행기 안에서 우리가 나눈 대화를 떠올리니 그 의미가 확 와닿았다. [이건 내가 본 가장 아름다운 노을이야, 네가 옆에 있어서.]진정우는 이렇게 사랑을 표현하는 데 아주 능숙하다.“형, 이번에 결혼식 하려고 돌아온 거야?” 차를 운전하던 남자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그는 진정우의 친구였다. 우리가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그는 우리를 데리러 왔다.“아니. 이번은 아니야.” 진정우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 말은 다음에 한다는 뜻인가?“형수님 미인이시네.” 그 남자가 나를 몇 번이나 슬쩍 바라보며 말했다.“그럼.”진정우는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그 말을 들으니 나도 어쩐지 부끄러워졌다.“형수님 나는 도성운이라고 해요“ 그 남자가 친근하게 자기를 소개했고 나도 웃으며 말했다. “저는 윤지원이라고 합니다.”“알아요. 알아요.” 도성운은 두어 번 반복하며 말했다. “소영이가 매일 말하더라고요. 우리 마을 사람들은 다 알죠. 형수님 이름이 윤지원이란걸.”나는 그제야 부끄러움을 좀 떨쳐내고 있었는데 도성운은 또 다른 말을 덧붙였다.“그래요? 그럼 앞으로 아마 자기 소개할 일 없겠네요.”“그러묭. 이렇게 예쁜 분이 오면 다들 한 번에 이름을 기억할 수밖에 없어요.” 계속되는 칭찬을 들으니 더 이상 말하지 않는 게 현명할 것 같았다.그런데 진정우가 내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보니까, 네가 먼저 분위기 잡은 것 같네.”도성운은 진정우를 많이 존경하고 따라 배우고 싶
그가 진지하게 내게 농담하는 건가?하지만 그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잖아!그래서 나는 그가 진지한 사람이라는 걸 알았고 오히려 순수하지 않은 생각을 하는 사람은 내가 아닌가 싶었다.“안 믿으면 한번 해봐?”진정우의 뜨거운 시선에 내 얼굴이 또다시 붉어졌다.나는 그를 한 번 꼬집으며, 일부러 화난 척했다.“너 계속 듣고 싶어? 안 듣고 싶으면 말 안 할 거야.”“듣을거야!”나는 창밖을 보며, 강진혁이 그때 나에게 했던 말을 진정우에게 전했다.그는 내 마음을 아주 잘 이해한 듯 물었다.“너 걱정되는 거야?”“응, 하지만 나는 강유형이 걱정돼서 그런 게 아니야. 회사가 걱정이야.”내가 그렇게 바로잡자, 진정우는 내 머리를 살짝 쓰다듬으며 말했다.“알아, 너는 이 일이 생각보다 훨씬 복잡할 거라고 느끼는 거지?”진정우는 정말 나를 너무 잘 안다.“너의 걱정이 틀린 건 아닐 거야. 혹시 강진혁이 돌아오는 것도 이미 다 계산된 일일 수도 있어.”진정우의 말에 나는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그럴 수도 있어?”내가 의심하고 있었던 부분을 진정우가 이렇게 직설적으로 말하니, 조금 충격을 받았다. 강진혁이 어떤 사람인지 나는 잘 안다. 그는 늘 나와 강유형을 위해 양보하며, 언제나 성실하고 착한 사람이었으니까.게다가 강진혁은 4년 전에 회사를 떠나고 얼마 전에 돌아왔다. 그렇게 회사를 걱정한다면 굳이 4년 전에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예전에는 몰라도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을 거야.”진정우가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지원아, 사실 너는 남자들에 대해 잘 몰라.”나는 그것에 대해 부정하지 않았다.“그럼 남자의 입장에서 말해봐.”“강진혁이 너 좋아하지?”진정우는 직설적으로 말했다.“응, 나도 이제야 알았어. 예전엔 몰랐고 이번에 돌아와서야 알게 된 거야.”나는 사실대로 말했다.“그는 너를 오래전부터 좋아했어. 강유형이랑 비슷한 시기에 좋아했을 거고 그 감정은 강유형보다 더 강했을 수도 있어.”진정우는 아주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나
그걸 물어볼 필요도 없잖아?누구나 속고 사는 걸 좋아하진 않으니까.나는 그를 바라보며 민감하게 물었다.“혹시, 앞으로 나를 속이려고 하거나 이미 나한테 뭔가 숨긴 거 있어?”진정우는 잠시 침묵했다.“...아니.”그 두 마디가 진실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나는 확실히 내 입장을 밝혔다.“너무 싫어.”그러자 그의 목젖이 조금 움직였다.“알겠어.”만약 그가 나를 속인다면 내가 어떻게 나올지 명확하게 말하고 싶었다.그때 공항 대기실에 비행기 탑승 안내가 나왔고 해외행 비행기였다.나는 본능적으로 강유형을 떠올렸다. 그가 짐을 끌고 보안 검색대로 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해외에 무엇을 하러 가는 걸까?사업 얘기라도 하러? 아니면... “우리 이제 보안 검색대 쪽으로 가자.” 진정우가 내 생각을 끊으며 말했다.“어!” 나는 대답하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 순간, 나는 잠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강유형에게 신경 쓰고 있다는 걸 진정우가 알면 안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진정우의 표정에서는 아무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그럴수록 내 마음은 더 불안하고 조금 죄책감도 들었다. 그래서 나는 먼저 그의 손을 잡았다.“가자.”우리는 보안검색을 무사히 통과하고 비행기도 무사히 탑승했다. 비행기 모드로 전환하기 전, 내 휴대폰에 한 통의 미처 읽지 못한 메시지가 도착했다.강유형이었다.[안전 비행.]그 문자를 보며, 예전에 그가 출장을 갈 때마다 내가 보냈던 메시지가 떠올랐다.그때마다 나는 항상 그렇게 보내곤 했다.어느 날, 강유형은 나를 비웃으며 말했다.“너 그런 말 너무 촌스럽잖아. 다음엔 다른 말로 보내봐. 새로 배운 거 있으면 알려줘.”그 이후로 나는 그 말을 더 이상 보내지 않았다.[안전 비행.]그 문구는 평범하고 진부하지만 내겐 그 무엇보다 중요한 말이었다.부모님이 사고를 당한 이후로, 나는 가까운 사람과 헤어질 때마다 늘 그 말을 떠올린다.다시 볼 수 있을지라는 두려움이 함께 밀려오기 때문이다.하지만 강유형은 내 마음을
“여긴 공항이야, 사람들이 많고 아이들도 있는데.” 진정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알고 있어.”“그런데도...” 내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그러자 진정우는 짧고 단호하게 말했다.“하고 싶어.”그의 단호한 대답을 듣고 나는 본능적으로 그가 강유형을 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질투하는 거겠지.진정우는 강유형을 포기하게 만들려고 그런 걸까?그 생각이 들자 나는 결심하고 눈을 감았다. 심장은 요동치며 공항 대기실에서 진정우의 입맞춤을 기대했다.하지만 그의 입술이 다가오는 대신 내 손에 무게감이 느껴졌다.눈을 뜨고 보니 내 손에 작은 가방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이게 뭐야?” 내가 궁금해서 물었다.진정우는 입술을 살짝 내밀며 내가 열어보라고 손짓했다.내가 의아한 마음으로 가방을 열자 그 안에는 두 장의 카드와 하나의 증명서가 들어 있었다.그 카드와 증명서는 그가 전해주고 싶었던 것들이었다.“이게 무슨 의미야?” 나는 다시 물었다.진정우는 녹색의 책자 하나를 꺼내 들었다.“이건 내가 군 복무를 마친 증명서야. 그리고 이건 내 열정이 담긴 헌혈 증서야. 이 카드들은 내 전 재산이야.”나는 그 말을 듣고 문득 소설 속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에게 전 재산을 보여주는 장면이 떠올랐다.진정우는 내게 재산을 넘기려는 것뿐만 아니라 그의 신념까지도 함께 전하려고 하는 것이다.특히 빨간 헌혈 증서를 보자 갑자기 코끝이 찡해졌다.“이걸 왜 준비한 거야?” 나는 조금 울컥하며 물었다.“너에게 주는 믿음이야. 이게 사랑 보험보다 더 실용적이야.”진정우는 그렇게 말하며 내가 강유형과 사랑 보험에 가입했던 사실을 안 것 같았다.하지만 그게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그가 내게 주는 것이 모든 것 같았다.“이 두 개는 내가 가질게. 하지만 카드는 네가 갖고 있어.”나는 그가 준 돈을 받을 생각이 없었고 돈에 욕심이 없다. 만약 돈에 눈이 먼 여자라면 나는 강유형과 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진정우는 카드를 받지 않고 조금 난처한 듯 말했
“네, 누구세요?”전화를 받으면서 나는 무심코 강유형을 쳐다보았다.그는 나를 보지 않고 혼자서 멀리 있는 의자 쪽으로 걸어갔다.“저는 하트시그널 보험사의 A8338번 직원입니다. 4년 전, 윤지원 씨와 강유형 씨가 저희 회사 사랑 보험에 가입하셨고 이제 보험 만기일이 다가와 관련 정보를 확인하려고 연락드렸습니다.”이 말을 듣고 순간 머리가 띵해졌다. 본능적으로 진정우를 보았다.그는 내 옆에서 자리를 피하고 내가 전화를 받을 때는 멀리 떨어져 앉았다.그는 내게 충분한 개인 공간을 주고 있었다.진정우는 정말 세심하다. 나에게 필요한 안전감도, 여유도 모두 제공해 주고 있었다.“실례지만 두 분 지금 연애 중인가요, 아니면 결혼하셨나요?” 상대방이 조심스레 물었다.그 말에 나는 다시 강유형을 쳐다보았다. 그는 전화를 받고 있었고 표정은 매우 심각해 보였다.“지원 씨?” 상대방이 내 대답을 기다리며 다시 물었다.나는 침을 삼키는 동작을 하며 대답했다. “네, 듣고 있어요. 저희... “‘이미 헤어졌어요’라는 말을 하려는 순간, 강유형이 갑자기 나를 바라봤다.그 순간, 나는 피할 틈도 없이 그의 시선과 마주쳤다.우리는 그렇게 눈을 마주치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 말이 나오지 않았다. “지원 씨?” 상대방이 또 나를 부르며 물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물어봤다. “왜 남자 쪽은 묻지 않나요?”“묻긴 했습니다. 다른 동료가 강유형 씨와 연락 중입니다.” 그의 대답을 들으니 강유형 역시 이 전화를 받고 있다는 걸 알았다. 세상엔 정말 재밌는 일이 많다.나는 입술이 바짝바짝 말라왔다.“우리는 헤어졌어요.”“확실한가요?” 상대방의 말투가 불쾌하게 들렸다.나는 강유형을 바라보던 시선을 돌려, 가까운 곳에 앉아 있는 진정우를 쳐다보며 손에 낀 반지를 살펴보았다.“저는 이미 결혼했어요.”상대방은 잠시 침묵을 지킨 후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지원 씨. 만약 강유형 씨도 같은 답을 하셨다면, 이 사랑 보험 계약은 보험 규정에 따라
내가 그런 말을 했지만 이건 사적인 일이 아닌가?진정우는 내가 이해하지 못한 걸 알아차린 듯 바로 설명해 줬다. “내가 그 사람한테 말한 거야.”“아, 그렇구나.” 나는 대답하고 계속 죽을 먹었다. 그런데 두어 숟갈 먹고 나서 뭔가 이상한 걸 느꼈다. “너 허 대표님하고 그렇게 친해? 내가 대신 휴가를 부탁했더니 대표님이 그냥 허락하고, 오히려 공손하게 나한테 말까지 했잖아?”진정우는 천천히 음식을 먹으며 말했다. “그렇게 친한 건 아니야.”“친하지 않다고? 내가 보기엔 마치 네가 그 사람의... 대표님 같아.”진정우가 한마디만 하면 허진호는 절대 거절할 리가 없어 보였다.“비슷한 거지.” 진정우가 의외로 그렇게 대답했다. “허 대표님이 나한테 새 제품을 개발해달라고 부탁하고, 내가 돈을 벌어줘야 하니까내가 말하면 거절할 수 없어.”대단하네!나는 마음속으로 존경을 표하며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실력이 있는 사람은 역시 자신감 넘치게 말한다. 이게 바로 진짜 실력이지.“우리 늦지 않았어?” 나는 밥을 다 먹고 물어봤다.“괜찮아. 늦으면 그냥 항공편 변경하면 돼.” 진정우는 정말 나를 방임하는 것 같았다. 나는 여전히 이해가 안 돼서 물었다. “왜 그렇게 급하지 않아? 나 좀 재촉해줘도 될 텐데.”“네 마음대로 하게 하고 싶어.” 진정우가 또 닭살이 돋는 멘트를 하자 나는 당황해서 얼른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래도 불만을 털어놨다. “어제 미리 말이라도 해줬으면 내가 준비했을 텐데.”“어제... 내가 말할 기회가 없었잖아.” 진정우의 말에 나도 순간 뜨끔하면서 얼굴이 빨개졌다.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고, 진정우는 살짝 웃으며 내가 당황한 모습을 보며 평온하게 말했다. “너무 서두르지 마. 천천히 해. 부족한 것 있으면 가서 사면 돼.”“일찍 말했으면 내가 준비 안 했을 텐데.” 내가 그에게 짜증을 내며 말했다.진정우는 화내지 않고 또 한마디 했다. “근데 나는 네가 물건 정리하는 모습 보는 게 좋아.”“
“왜 안 받아?” 내가 무심코 물었다.“받을 거야.” 진정우가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그러니까 너는 자지 말고 일어나서 씻고 아침 먹어.”나는 깜짝 놀랐다.“아침 벌써 준비했어?”나는 그가 내 옆에서 자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진정우는 이미 아침을 다 준비하고 내가 일어나지 않자 다시 침대에 돌아와서 나와 함께 공부한 거였다. 역시 뛰어난 사람은 항상 뒤에서 묵묵히 노력하는구나.“응, 내가 계란 죽을 끓였어. 일어나서 좀 먹어.” 진정우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렇게 사랑받는 느낌은 정말 좋다. 마치 내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처럼 느껴진다.진정우는 전화를 받으러 나갔고 나는 손을 이불에서 빼내며 내 손가락에 낀 반지를 보고 사진을 찍어서 SNS에 올리면서 한정판이라고 묘사했다.그리고 다시 SNS를 놀다가 잠시 후에야 일어났다. 그런데 진정우의 전화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나는 별 신경 쓰지 않고 화장실로 향했다.하지만 화장실에 들어가서야 나는 안리영이 준 약이 반 통밖에 남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그 전에 약을 4분의 1만 썼던 것 같은데 그럼 진정우가 사용한 건가? 언제였지?혹시 내가 자고 있을 때? 순간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왜 아직도 안 씻었어?” 진정우의 목소리가 문밖에서 들려왔다.어색하지 않게 하려면 그냥 모른 척하고 넘어가는 게 제일이다. 그래서 나는 그대로 말이 나와버렸다. “너 기다리느라 그래.”진정우가 잠깐 멈칫하다가, 목젖이 살짝 움직였다. 분명, 내 말이 그에게 어떤 자극을 준 거였다. 나는 더 이상 아침에 뭔가 일이 일어나지 않길 바라며, 일부러 신경 쓰지 않는 척하면서 서둘러 씻고 그에게 말했다. “빨리 죽 끓여 놓고 나오는 대로 밥 차려줘.”“안 늦었어.” “지금 몇 시인데 아직도 안 늦었다고 해?” 내가 그를 비꼬며 말했다.“10시 비행기야, 시간 충분해.” 진정우의 말에 나는 동작을 멈추었다. 나는 원래 거울 속에서 그를 보고 있었는데 깜짝 놀라서 고개를 돌려 그
“알았어.” 진정우는 여전히 짧고 간결하게 대답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웃음이 터졌다.“이제야 네가 왜 서른이 넘도록 연애를 안 했는지 알겠어. 네가 너무 재미없잖아.”“너도 내가 재미없다고 생각해?”그는 가볍게 내게 물었다. 연애라는 부분에서 그는 약간 둔한 면이 있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웃으며 말했다.“내 말은 네가 여자 마음을 잘 달래주는 방법을 모른다는 뜻이야.”그는 몇 초 동안 조용히 생각하더니 대답했다.“내 생각엔 달래는 건 속인다는 뜻이야.”그의 참신한 대답에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그럼 내가 널 달래줘야겠어?”진정우가 다시 물었다. 어떤 여자라도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다정함은 좋아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거짓이 아니라 진정한 애정에서 비롯된 것이어야 한다. 나는 과거 강유형이 나를 대했던 방식을 떠올리며 말했다.“아니, 지금처럼 해. 난 너의 방식이 좋아. 너는 정말 특별하니까.”그의 품에 더 깊숙이 기대며 덧붙였다.“내가 프러포즈하면 받아줄 거야?”진정우가 갑자기 화제를 바꾸며 물었다. 나는 그 질문을 들어본 적이 없었기에 당황스러워서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말했다.“안 하면서 뭘 물어?”그 순간, 진정우가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이불 안에서 내 손을 꺼내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만지며 말했다.“윤지원, 나와 결혼해 줄래?”순간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이게 네 프러포즈이야?”“아니, 완전한 건 아니지만 맞기도 해.”그의 애매한 대답에 나는 그를 살짝 때리고 싶었다. 솔직히 내가 처음으로 프러포즈를 받을 거라고 상상했던 장면은 이런 게 아니었다. 한때 나는 내 인생 첫 프러포즈는 강유형이 할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지금 내 앞에 있는 건 진정우였다.그 말을 들으니 얼마 전 강유형이 나를 위해 준비한 놀이공원 프러포즈 이벤트가 떠올랐다.나는 가지 않았지만 이후 몇몇 네티즌이 사진을 찍어 온라인에 올렸다. 그들은 그걸 단순히 오픈 이벤트의 리허설로 생각했겠지만 나는 그것이 나를 위한 것임을 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