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이는 입을 삐죽였다.이때 병실 문이 예고 없이 열리고 반재신이 무서운 기세로 들어섰다. 그는 무작정 한태군의 멱살을 잡고는 언성을 높였다."야, 애를 제대로 못 돌볼 거면 데리고 나가질 말던가! 이건 어쩌자는 거야!"한태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강유이는 통증을 참으며 힘겹게 말렸다."오빠, 내가 줄리안나를 만나러 가고 싶다고 졸라서 그렇게 된 거야."반재신은 마지못해 손을 놓기는 했지만 언성은 여전히 내려가지 않았다."줄리안나는 왜 만나려는 건데? 리사한테 당하고 싶어서 환장했어? 넌 어쩌면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냐!"강유이가 납치 되었을 뿐만 아니라 병원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반재신은 무슨 정신으로 이곳까지 왔는지 모른다. 걱정도 되고, 화도 나는 것이 이 복잡한 감정을 도무지 주체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줄곧 마음에 안 들었던 한태군과 나갔다가 봉변을 당했으니 말이다.강유이는 천장을 바라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그게 내 잘못은 아니잖아. 주변 사람들이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는 걸 어떡해. 내가 예지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매일 전전긍긍하면서 살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 그럴 바에는 그냥 집 안에만 있고 말지.""너 지금 나랑 해보자는 거야?""그런 게 아니라 나도 일이 이렇게 돼서 속상하다는 거지."통증을 참고 말을 길게 했더니 강유이의 안색은 점점 더 창백해졌다. 반재신이 또다시 무언가 말하려고 할 때, 한태군이 큰 소리로 말을 가로챘다."지금은 둘이 말다툼하고 있을 때가 아니야.""한태군, 넌 닥치고 있어."한태군은 어두운 눈빛으로 반재신을 바라보며 말했다."너나 닥쳐."병실 안의 분위기는 얼음장같이 차가웠다. 말 한마디라도 잘못 나온다면 곧바로 전쟁이 일어날 것처럼 말이다.의아에 앉아 있던 한태군은 몸을 일으켜 반재신과 시선을 맞췄다."유이를 제대로 돌보지 못한 건 내 탓이야. 네가 유이를 걱정한다는 것도 잘 알아. 하지만 이번 일은 유이를 나무랄 게 아니라, 유이를 그렇게 만든 사람을 나무라야 하
어쩐지 요즘 사업도 잘 안되고, 정계의 친구들도 연락이 안 된다고 했더니, 보이지 않는 힘이 정씨 집안을 억누르고 있었다. 만약 조사를 해보지 않았더라면 평생 모를 뻔했다.한 세력만 건드린 것이라면 어떻게 버텨 볼만 하겠지만 세 세력이 동시에 공격하자 정씨 집안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훌쩍 넘겨버렸다. 더구나 여씨 집안까지 합세해서 정 회장과 가까이 지내려는 정계 임원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여씨 집안은 Y국보다도 부유한 세력이었으니 말이다.정계에서 완전히 발을 빼고 재계만 신경 쓰기에도 이미 늦었다. 한씨 집안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이상 모든 뒷길이 막혔기 때문이다. 반씨 집안의 상황은 더욱 골치 아팠다. S국의 정계에 인맥이 있는 데다가 M국의 메트로폴리탄도 있어서 해외 사업은 꿈도 꿀 수 없게 되었다.레이린은 흐느끼면서 말했다."저... 저는 몰랐어요."이때 비서가 집안으로 달려들어가며 말했다."회장님, 여준우 씨가 회사에서 만나자고 하십니다."정 회장은 무서운 표정으로 레이린을 노려보며 말했다."경고하는데 지금부터는 아무 짓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 안 그러면 나도 너를 구하지 못할 것 같으니까."정 회장은 부랴부랴 회사로 돌아갔다.정 회장이 회사에 도착했을 때, 여준우는 이미 귀빈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난생 처음 비굴한 모습으로 머리를 숙이고 조용히 안으로 들어갔다."제 딸이 저지른 일에 관해서는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제가 이미 단단히 혼냈으니 반 대표님한테 잘 얘기해주시면 안 될까요? 제가 꼭 책임지고 끝까지 사과시키겠습니다."여준우는 무심한 듯 잡지를 펼쳐보다가 머리를 들며 말했다."저도 도와드리고 싶기는 하지만... 반 대표님의 성격 잘 알고 계시잖아요. 반 대표님이 결정한 일이라면 누구도 막지 못해요."정 회장은 약간 굳은 표정으로 이를 악물며 말했다."반 대표님이 무엇을 원하든 다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니 부디 얘기라도 꺼내주세요."여준우는 잡지를 내려놓고 천천히 일어났다."이번 일은 한 사람의
강성연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왜? 엄마랑 말하기 난감한 얘기야?"강유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우리 유이도 다 컸으니, 누구를 만난다고 해서 반대하지는 않을 거야. 재신이랑 태군이가 함께 있어서 엄마랑 아빠는 얼마나 마음이 놓이는지 몰라."강성연은 잠깐 침묵하다가 계속해서 말했다."하지만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지윤 언니한테서 힘들게 배운 호신술을 헛수고로 만들면 안 되잖아."이때 강유이가 머리를 들며 물었다."엄마, 진짜 반대 안 해요?""뭘?"강성연은 강유이의 말뜻을 다 알면서 일부러 모르는 척 물었다. 그러자 강유이는 다시 머리를 숙였다. 얼굴은 어느샌가 발그레하게 달아올랐다."제가 태군이랑 만나는 거요...""네가 좋다는데, 엄마가 반대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어?"강성연은 자기 딸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애초부터 반대할 마음이 없었다.하필이면 이런 얘기를 하고 있을 때, 한태군이 꽃다발을 들고 병실 문을 열었다. 그가 찾아올 줄 몰랐던 강유이는 눈에 띄게 멈칫했다.강성연은 덤덤하게 머리를 돌리더니 한태군을 향해 싱긋 미소를 지었다."태군이 왔어?""네, 아주머니."한태군은 침대 머리에 있는 꽃병에 생화를 꽂아 넣었다. 그리고 강유이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물었다."이제 좀 괜찮아?"강유이는 머리를 더 푹 숙였다. 귀는 마치 불에 타오를 것처럼 빨개졌다."응."'엄마가 곁에 있는데 왜 이러는 거야...'강성연은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둘이 얘기하고 있어. 나는 네 아빠를 만나러 가야겠다."강성연은 병실 밖으로 나갔다. 때마침 걸어오는 반지훈을 발견하고는 아무 말도 하지 말라며 손짓했다. 그러자 반지훈은 눈살을 찌푸리며 병실 유리를 통해 안을 들여다보았다.한태군이 침대 자락에 앉자마자, 강유이가 그의 품에 파고들었다. 그는 약간 멈칫하며 머리를 숙였다."왜 그래?""엄마가 우리 만나는 거 반대 안 하신대."강유이는 원래 자신이 한태군과 만나고 있다는 얘기를 죽어
"참, 그리고 줄리안나가 학교로 돌아왔어."강유이는 우뚝 멈춰서서 진예은을 바라보며 물었다."줄리안나가?""응, 어제부터 다시 등교하는 모양이야. 리사한테 배신당한 충격이 큰지 어디에서나 머리를 숙이고 다니더라고."비록 줄리안나가 암시장에서 험한 일을 당했다는 소문이 가짜라고 판명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수군거리는 사람이 있는 건 어쩔 수 없었다.Y국의 암시장은 아주 유명했다. 암시장의 여자는 전부 국가적 블랙 리스트 혹은 불법 체류자였다. 또 나라에서 크게 관여하지 않는 관계로 돈 있는 남자가 자주 드나드는 것쯤은 드문 일도 아니었다.진예은은 강유이와 함께 점심시간을 보내고 병원을 나섰다. 병원 대문에는 한 남자가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편한 대로 풀어헤친 정장 재킷은 정중함과 자유로움을 동시에 담고 있었다."여기는 어떻게 왔어?"진예은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러자 진찬이 담뱃재를 툭툭 털며 머리를 들었다."연서는 잘 지내?""오빠한테 딸이 있다는 걸 그래도 잊지는 않은 모양이네. 한참 언급 안 해서 당연히 잊은 줄 알았어."진찬은 담배를 바닥에 버리고 발로 밟더니 어두운 안색으로 말했다."나는 너랑 싸우러 온 게 아니야.""정씨 집안 상황이 좋지 않아 유이한테 대신 사정해 달라고 찾아온 거지? 정씨 집안을 아직도 포기 못 했어?""그건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야."진찬은 자신의 차에 올라타며 말했다."주말에 집으로 돌아와."차는 빠르게 멀어져 갔다.진예은은 말없이 머리를 숙였다. 집으로 돌아오라는 것은 분명 부모님의 뜻일 것이다. 그녀의 어머니는 진씨 집안과의 혼사를 아주 중요하게 여겼다. 황실의 사생아인 자신이 누리지 못했던 것을 진찬이 누리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정씨 집안이 망해버린 이상 가장 실망했을 사람은 어쩌면 그녀의 어머니였다.반재신은 강유이가 퇴원하는 날 직접 데리러 갔다. 그녀가 입원하는 날에 감정을 조절 못 하고 화낸 게 마음에 걸렸는지 사과의 선물까지 들고 갔다.예쁘게 포장된 선물 상자는 1.2m
강유이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돈을 언제 그렇게 많이 모았어?""전부 내가 정당한 방법으로 번 돈이니까 걱정하지 마."반재신과 강유이가 탄 차는 신턴 웨스트 빌라 앞에 멈춰 섰다. 신턴 웨스트 빌라는 빅토리아대학교와 지하철 한 정거장 거리에 있어서 등교하기가 아주 편했다.강유이는 선물 상자를 소중히 안고 차에서 내리더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여기는 왜 왔어?"반재신은 커다란 선물 상자를 대신 들어주며 말했다."아빠가 기숙사에서 지내는 게 불편할 거라고 이제는 여기서 지내래.""여기서 지내는 게 더 불편하거든? 혹시 내가 걱정되어서..."강유이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마당에서 기다리고 있던 보디가드들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인사했다."안녕하십니까!"강유이는 놀란 듯 입을 크게 벌렸다."... 이건 너무 하지 않아?"'설마 앞으로 보디가드를 달고 등교해야 하는 거야?'강유이는 반재신을 따라 빌라 안으로 들어섰다. 북유럽 스타일로 인테리어 한 빌라 내부는 아주 예뻤고 햇빛도 잘 들어왔다. 독립적인 베란다와 정원은 물론이고, 강유이가 사용하기에 적합한 피아노 방과 발레 방도 있었다. 반지훈이 오랜 시간 동안 고민해서 고른 티가 났다.반재신은 선물 상자를 소파에 내려놓으며 말했다."도우미는 오후에 올 거야. 필요한 게 있으면 도우미한테 말해.""오빠, 솔직하게 말해줘."강유이는 머리를 돌려 반재신을 바라보며 물었다."갑자기 기숙사에서 나오라고 하는 데는 따로 이유가 있지?""..."반재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유라면 당연히 있었다. 첫째는 한태군과 떨어뜨리기 위해서이고, 둘째는 진예은과 떨어뜨리기 위해서였다.반재신은 진예은을 조사해 본 적 있었다. 한태군의 어머니는 황실의 공주인 반면, 진예은의 어머니는 황실의 사생아였다. 두 사람은 같은 아버지를 둔 자매였지만 친하게 지내는 듯한 흔적은 없었다.진예은의 오빠는 레이린의 약혼자로 정씨 집안을 위해 많은 일을 했다. 게다가 그는 Y국에서 사람을 가리지
"다른 뜻은 없어요, 오빠가 어디에서 그런 소문을 들었는지 궁금해서요. 저는 반 씨 집안 아가씨랑 친구라고 말하고 다닌 적이 없거든요."부정하는 그녀의 말을 들은 진찬이 웃음을 터뜨렸다."친구도 아닌데 그 아가씨가 너를 그렇게 싸고돈다고?"진찬은 진예은이 저번에 강유이를 찾아간 일을 말하고 있는 듯했지만 진예은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 모습을 본 진예은의 어머니가 그녀를 비꼬며 말했다."예은아, 너는 내 딸이기도 하지만 네 오빠 친동생이기도 하잖니. 가족 일에는 그렇게 무관심하면서 한 씨 집안 일에는 관심이 많아 보이네, 네가 한태군이랑 연락하고 다니는 거 다 알아, 하지만 그 사람은 결국 한 씨 집안사람이잖니. 그 사람이 너를 도와줬다고 해서 가족을 잊어서야 되겠어?"그 말을 들은 진예은이 입술을 물고 있다 한참이 지나서야 말했다."그럼 이모는 어머니 가족이 아닌가요?""이게 어디서 버릇없이!"진예은의 말을 들은 그녀의 어머니가 테이블 위에 있던 찻잔을 집어던지자 찻잔이 힘없이 진예은의 발치에서 산산조각났다."어디 버릇없이 엄마한테 그런 말을 해!"진예은의 어머니가 날이 선 얼굴로 말했다."어머니, 화내지 마세요, 제가 예은이랑 얘기해 볼게요."진찬이 슈트를 정리하며 일어섰다.그 말을 들은 진예은의 어머니가 관자놀이를 짚더니 눈을 감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진찬이 진예은에게 위층으로 올라가라는 듯 눈짓을 했다."두 사람을 위해서 사정하라고 집으로 불러들인 거였어? 정씨 집안을 타락하게 만든 건 오빠 약혼녀야."두 사람은 서재로 올라왔고 진예은도 더 이상 말을 돌려 하지 않았다.진예은의 말을 들은 진찬이 테이블을 지나쳐 가죽 소파 위에 앉더니 담배에 불을 붙였다."그 집안이 어떻든 나는 이제 관심 없어.""그게 무슨 말이야?""네가 들은 그대로야, 정씨 집안이 타락하는 걸 막을 수 없다면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거지."진예은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진찬을 바라봤다. 그녀는 이 상황이 웃기기도 했다."오빠가 일
"정말 그런 거야? 네가 걔랑 친구를 안 하려고 하는 건 아니고?"진찬이 진예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한태군이 너를 걔 옆에 둔 거 자기 대신 강유이를 지켜봐달라고 한 거잖아, 내가 모를 거라는 생각하지 마. 그날 네가 한태군한테 레스토랑으로 오라고 한 거잖아."진예은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진찬은 그런 진예은을 보며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더니 다시 말했다."두 가지 선택을 줄게, 반 씨 집안이랑 엮이든지 아니면 내가 너 결혼시켜 주는 거. 렌지 집안 대표님도 재혼할 시기가 된 걸로 아는데."진찬은 놀란 얼굴의 진예은을 무시한 채 말을 이었다."렌지 집안이 정 씨 집안보다 못하지만 적어도 할아버지가 남작이잖아, 잘 생각해 봐."진찬은 말을 마치자마자 분노한 표정을 한 진예은을 두고 서재를 나섰다.진예은은 이 집이 낯설게만 느껴져 무서웠다. 그래서 늘 도망치려 애썼다.-신턴 웨스트 빌라아침, 아주머니께서는 일찍이 아침을 준비해 뒀다.강유이는 아침을 먹으며 아주머니와 얘기도 나눴다. 화교인 아주머니는 근처에서 살고 계시고 남편은 영국 사람이며 집안일만 도맡아 했었다고 한다. 아이의 등하교를 함께 하는 것 외에는 시간이 많이 남아 우연의 기회로 잠깐 일을 하게 됐다.강유이가 아침을 다 먹자 아주머니께서는 주방을 정리하곤 집으로 돌아갔다.강유이도 가방을 메고 집을 나섰고 두 명의 경호원은 이미 차 앞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머지않아 차는 빅토리아 대학교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고 강유이는 나른한 얼굴로 차창에 기대어 물었다."저녁에도 두 분이 저를 데리러 오시는 건가요?"강유이의 말을 들은 경호원이 고개를 끄덕였다.긍정의 답을 얻은 강유이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곧 차는 학교 앞에 도착했고 강유이가 차에서 내리자마자 지나가던 학생들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며 수군거렸다.정 씨 집안이 강유이 때문에 처참한 결과를 맞이했다는 소문이 퍼져 강유이는 덕분에 학교의 ‘인싸’가 되어버렸다. 귀족 하나를 타락하게 할 수 있는 인물
레이린 정은 진찬을 보자마자 그를 와락 안았다."찬아, 너는 나를 이렇게 버리지 않을 거라는 거 알았어. 그날은 내가 잘못했어, 내가 너한테 화를 내면 안 되는 거였는데. 나 이제 너 말곤 아무것도 없어."진찬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레이린 정의 말을 들으며 밖으로 드러난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네가 제일 좋아하는 백합꽃을 들고 왔어.""역시 너밖에 없어, 내가 좋아하는 거 너 다 기억하고 있구나."레이린 정이 감동한 얼굴로 말했다.하지만 진찬의 얼굴에 웃음기라곤 찾아볼 수도 없었다."정 씨 집안의 사위였던 사람인데 네 일에 당연히 신경 써야지."진찬의 뜻을 알아차린 듯 레이린 정이 모든 동작을 멈췄다."네가 그때 내 말만 들었어도 지금처럼 되지는 않았을 거야."진찬이 레이린 정의 턱을 잡고 말했다.그 말을 들은 레이린 정이 바들바들 떨며 진찬의 손목을 잡았다."내가 잘못했어, 찬아, 나 좀 도와줘."그녀는 마치 동아줄이라도 잡은 듯 애걸했다."네가 도와주기만 하면 우리가 결혼한 뒤에 네가 원하는 거 우리 아빠가 다 줄 거야."하지만 진찬은 레이린 정의 손을 잡더니 그녀를 품에서 밀어냈다."정 씨 집안은 이제 나에게 그 어떠한 이익도 가져다줄 수 없어.""뭐?"레이린 정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진찬을 보며 물었다."내가 말을 너무 돌려서 했나? 내가 좋아한 건 네가 아니라 정 씨 집안이 나한테 가져다주는 이익이었어. 하지만 지금 정 씨 집안이 예전이랑은 많아 달라졌잖아, 내가 왜 너 같이 얼굴을 망친 여자랑 결혼해서 내 인생을 망치려고 하겠어?"뻔뻔한 진찬의 말에 레이린 정은 순간 화가 나서 소리쳤다."진찬 너!"하지만 진찬은 담담하게 웃더니 몸을 숙여 무표정한 얼굴로 레이린 정에게 말했다."내가 미리 수를 써서 네 얼굴을 망친 걸 고마워해야지, 한태군이 나섰다면 고작 이런 걸로 끝나지 않았을 거야."그 말을 들은 레이린 정은 놀라서 흠칫 몸을 떨었다. 진찬이 떠난 뒤, 레이린 정은 멍하게 침대 위에 앉아있을
”유이야.”조민과 소찬이 술잔을 들고 다가왔다.“오늘 너무 예쁘다!”강유이가 웃으며 말했다.“고마워요.”조민이 술잔을 들며 말했다.“이건 나와 소찬 씨가 축하의 의미로 권하는 거야. 너와 한태군이 오랫동안 행복하게 잘 살기를 바래.”강유이가 그녀의 잔에 자신의 잔을 부딪혔다.“저도 선배와 소찬 씨의 앞날에 행복할 일만 가득하길 바랄게요.”곧이어 남우와 반재언이 다가왔다. 두 사람의 뒤에는 진예은과 반재신 그리고 강성연과 반지훈까지 있었다.강성연이 유이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오늘 우리 유이 너무 잘했어!”그녀가 미소 지었다.“진짜요?”반지훈이 말했다.“우리 딸 정말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어. 넌 우리의 자랑이야.”강유이가 한 떨기 꽃처럼 어여쁘게 미소를 지었다.한태군이 그들 쪽으로 다가와 감사 인사를 전했다.“아버님, 어머니, 두 분께서 유이를 제가 주신 것에 감사드리는 마음으로 이 잔 올리겠습니다.”반지훈이 콧방귀를 뀌었다.“네놈 운 좋은 줄 알아!”그가 술잔을 들고 한태군이 내민 잔에 부딪혔다.“앞으로 내 딸한테 정말 잘해줘야 해.”한태군이 강유이를 바라보았다.“걱정 마세요. 제 생에 여자는 오직 유이 한 사람뿐입니다.”강성연도 미소 지었다.여준우와 진예은의 아버지도 인사를 건네러 다가왔다. 그들과 함께 정연 여왕과 한희운도 다가왔다. 여준우가 말했다.“아직 의식 하나 남았지?”강유이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남은 의식이 또 있어요?”그가 말했다.“베란다에서 하는 세기말 키스가 남았잖니. 너희 아직 그거 못했어.”한희운이 웃으며 말했다.“여준우 경, 어째 가족들보다 경이 더 조급해 하는 것 같습니다.”여준우가 들뜬 표정으로 말했다.“전설 속의 세기말 키스. 우리 모두 한 번도 본 적이 없지 않습니까! 그 장면을 오늘에서야 보게 되었군요.”그의 말에 다른 사람들도 웃음을 터뜨렸다.남우가 의문스러운 듯이 물었다.“세기말 키스가 뭐야?”반재언이 그녀에게 설명해 주었다.“오래전 첫 번째
웨딩카가 지나가야 했기에 궁에서부터 대성당까지 가는 길에 기타 차량은 통행을 금지 시켰다.강유이가 창밖을 바라보았는데 길에는 혼란스러울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있었다. 그들 모두가 이 성대하고 엄청난 장면을 구경하러 몰려든 것이였다.그녀의 곁에 앉아있는 한태군은 네이비 더블 버튼 군복을 입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도 늠름해 보였다. 어깨에는 성 패트릭 훈장과 로열 빅토리아 훈장 등 여러 훈장이 달려있었다.그가 강유이의 손을 잡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손에서 땀이 나는데?”강유이가 그를 돌아보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나 긴장돼.”그가 그녀의 손을 잡아당기더니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내가 있잖아. 긴장할 것 없어. 마음을 편하게 가져.”강유이의 시선이 그가 입은 제복으로 향했다.“이 옷 오빠한테 너무 잘 어울린다!”한태군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내 신부도 오늘 너무 아름다워.”성당에 도착하자 한태군은 강유이와 떨어지게 되었다. 그는 아버지 한희운과 함께 여준우, 진예은의 아버지 등 황실 성원들 그리고 내각 대신들까지 함께 성당 서쪽 문으로 걸어갔다. 문 앞에 있는 광장에는 이미 수천 명의 초대 관객들이 몰려있었는데 그 장면이 너무나도 웅장했다.여준우가 웃으며 말했다.“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고, 결혼식도 전부 라이브로 방송되겠는데 유이 그 계집애 아마 지금쯤 우리보다 더 긴장하고 있겠죠?”진예은의 아버지가 그를 바라보았다.“하하. 내 눈에는 네가 더 긴장한 것 같은데?”그가 웃으며 말했다.“황실 결혼식은 처음이라서요.”열한 시 반이 되자 정연 여왕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신랑 한태군 일행이 도착할 때까지 대표로 성당에서 각 귀빈들과 인사를 나눴다.남우가 반재언 곁으로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저분이 바로 여왕 폐하셔? 엄청 예쁘시다. 나 실제로 처음 봐.”반재언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나도 처음 뵙는 거야.”“뭐?”남우가 깜짝 놀랐다.“그전에 한 번도 만난 적 없어?”“재신이
”참 형수님은?”소찬이 묻자 반재언이 대답했다.“지금 아버님 모시고 돌아다니고 있어. 나도 이제 가야겠네. 두 사람 편히 쉬고 있어요.”반재언이 자리에서 일어나 자리를 떠났다.소찬이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와이프가 생기더니 변했어!”“하하. 당신은 뭐 재언 씨와 다른 것처럼 말하네요.”조민도 자리에서 일어났다.소찬도 얼른 잔을 놓고 그녀의 뒤를 따랐다.“잠깐만요. 왜 나 버리고 혼자 가요! 같이 가요.”강성연과 지윤이 룸에서 나와 걸어가다 마침 복도에서 반지훈과 희승과 마주쳤다. 희승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오랜만이에요, 사모님.”강성연이 반지훈 앞에 멈춰 서자 반지훈이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오랜만에 만났는데 얘기는 잘 했어?”“그럼요. 근데 당신 오후에 아버님과 여씨 가문에 간다고 하지 않았나요?”반지훈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당신 기다리고 있었지. 가서 밥 먹자.”희승이 지윤의 곁에 나란히 서며 그들을 바라보았다.“회장님 사모님, 그럼 저희들은 먼저 아버님한테 가볼게요.”반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는 강성연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그녀와 나란히 복도를 걸어갔다. 포근한 햇살이 통유리로 된 창문으로 들어와 바닥에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두 사람의 그림자가 한데 꼭 붙어 좀처럼 떨어질 줄 모르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이틀 후, 드디어 모든 사람들이 기대했던 세기말 황실 결혼식 날이 다가왔다. 식은 아홉 시에 시작될 예정이었지만 아침 일곱 시부터 메이크업 아티스트들이 궁에 도착해 있었다. 강유이는 커다란 메이크업 룸을 혼자 썼다. 네다섯 명의 탑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그녀를 위해 화장을 해주고 머리를 만져주었다.여덟 시가 되어서야 강유이는 드레스를 입을 수 있었다. 순백의 새하얀 드레스는 과한 보석과 레이스가 아닌 천연 실크 소재로 우아함을 극대화했다. 오프숄더 형 넥 라인으로 간단하지만 파격적인 미를 추가했고 소매는 칠부 정도 되었다.면사포 길이만 16피트 정도 되었는데 변두리가 레이스로 수놓아져 있었다.
그녀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그럼 나 결혼식 당일에 이 티아라 쓸래. 그러면 엄마의 디자인을 홍보해 줄 수도 있잖아.”한태군이 등 뒤에서 그녀를 껴안았다.“네가 원하는 대로 다 해도 돼.”…반씨 가문 사람들은 결혼식 이틀 전에 영국에 도착했다. 그들은 한태군이 안배한 호텔에 머물게 되었다. 황실에서는 호텔을 통으로 빌려 결혼식 때문에 일부러 해외에서 온 귀빈들을 위한 장소로 마련했다.구씨 집안사람들과 육씨 집안사람들도 왔고, 남강훈도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연예계에서 강유이와 친분을 유지했던 윤수아, 우영, 주계진, 임석진도 초대되었다. 조민과 소찬은 당연히 초청자 명단에 속해 있었다.강성연이 레스토랑에 들어서자 웨이터가 그녀를 룸으로 안내했다. 룸 안에 앉아있는 남자를 발견한 그녀가 활짝 웃으며 다가갔다.“삼촌.”헨리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못 본 지 몇 년이나 되었지만 그는 아직도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다만 예전보다 살이 많이 빠진 것 같았다.강성연이 다가가 그와 포옹했다.“오셨어요.”헨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예전에 내가 네 결혼식도 참석 못 하고, 또 네 두 아들의 결혼식도 참석 못 했었잖니. 아쉬웠는데 이번에는 마침 영국에 출장 올 일이 있어서 이렇게 너를 만나러 왔단다.”그녀가 시선을 내려뜨리며 말했다.“와주셔서 너무 감사드려요. 몸은 좀 어떠세요?”그가 미소 지었다.“많이 괜찮아졌다. 지윤이와 희승이가 돌봐주고 있어서 조금 더 버틸 수 있을 것 같아.”그때 지윤이 문을 열고 룸으로 들어왔다.강성연이 고개를 돌려 지윤을 확인했다. 처음에는 놀라던 그녀가 다음 순간 눈물을 글썽였다.“두 사람도 와줬네요.”지윤이 그녀한테 다가갔다.“유이가 영국에서 결혼식을 올린다는 소식을 듣고 저와 희승 씨도 아버지 따라왔어요. 희승 씨는 지금 반 회장님과 같이 있어요.”헨리가 경호원에게 선물을 갖고 오라고 지시한 후 강성연에게 선물을 건넸다.“리비어가 올 수 없어서 참 안타까워했단다. 이건 걔가 너
한태군의 말에 나머지 사람들도 함께 웃었다.어느덧 밤이 깊어졌다. 온 도시가 화려한 네온사인에 둘러싸여 빛을 밝히고 있었다. 강유이와 한태군은 저녁을 먹은 후 진원으로 돌아갔다.이제 막 샤워를 마친 탓에 강유이의 머리카락은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그러자 한태군이 그녀의 손에서 타월을 가져가더니 대신 머리를 닦아주었다.그녀는 화장대 거울 앞에 앉아 거울 속 남자를 바라보고 미소를 지었다.“태군 오빠, 나 결혼식이 너무 기대가 돼.”“그래?”한태군이 부드러운 그녀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쓸어내리며 말했다.“나 역시 기대돼!”“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성스러운 결혼식장에 들어서다니!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인 것 같아.”그가 소리 내어 웃더니 허리를 숙이며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그거 알아? 난 한평생 내가 꿈꿨던 모든 소원들을 이미 다 이뤘어.”강유이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무슨 소원인데?”한태군이 여전히 그의 귓가에서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너를 아내로 맞이하고, 너와 결혼식장에 들어가고, 우리 두 사람의 아이까지 만나게 된 거.”그녀가 멈칫거렸다. 따듯한 조명 아래 그녀의 볼이 붉게 피어올랐다.“설마 처음부터 다 꿍꿍이가 있었던 거야?”그가 대답했다.“어쩌면 네가 내 눈앞에 나타난 순간부터 난 너를 아내로 맞이할 줄 알았던 것 같아.”강유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끌어안았다.“나도 이번 생에는 오빠가 아닌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될 거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한태군이 천천히 고개를 숙이며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의 따듯한 마음이 뼛속까지 전해지는 것만 같았다.“정말 영광이야.”…이틀 후, 한태군과 강유이는 영국으로 돌아갔고, 황실은 결혼식 준비로 한창이었다. 화제의 결혼식이다 보니 모든 언론이 그들을 주목하고 있었다.패션 계와 주얼리 계의 최상급 디자이너가 디자인한 작품들이 줄지어 강유이한테 전해졌다. 명품 맞춤 드레스와 결혼식 때 사용할 각종 보석들이 발 디딜 곳 없게 전시된 채 그녀가 고
그러자 민서율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여행 좀 다녀오니까 마음이 많이 차분해졌어요.”안예지가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네가 원하는 일이 다 잘 되길 바랄게.”그는 그저 미소만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눈 깜짝할 사이에 월말이 되었다. 강유이 일행들의 여행도 어느새 끝이 나고 서울로 돌아오게 되었다.강성연과 반지훈은 정원 밖에 나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곧이어 도착한 아이들이 차례대로 차에서 내렸다. 강유이가 두 사람을 향해 달려갔다.“아빠, 엄마!”그녀가 두 사람을 동시에 끌어안았다.반지훈이 못 말린다는 듯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이렇게 안겨?”강유이가 눈초리를 휘며 대답했다.“엄마 아빠한테 저는 영원한 어린애죠.”강성연이 미소를 지으며 이쪽으로 다가오는 나머지 아이들을 바라보았다.“재밌게 놀았으면 됐어. 이제 안으로 들어가야지. 오늘 저녁은 다 같이 모여 떠들썩하게 밥을 먹을 수 있겠구나.”진예은과 남우는 집안으로 들어간 후 곧바로 위층으로 올라가 아이들을 살폈다. 희망이는 두 남동생과 함께 있었다. 세 아이는 깊은 잠에 빠져있었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도 따뜻하게 느껴졌다.아래층에서는 반재신 반재언 형제가 외출을 하고, 한태군이 거실에서 반지훈가 바둑을 두고 있었다.“아버님 이번 판은 제게 양보해 주십시오!”반지훈이 흰색 바둑알을 들고 판을 들여다보다 결심한 듯이 바둑알을 내려놓았다.“쓸데없는 소리 하지말게.”한태군이 웃으며 말했다.“다음번에는 제가 양보해 드리겠습니다.”반지훈이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허튼수작 부리지 말거라. 난 네 양보 따위 필요 없다.”주방에서 과일을 깎고 있던 강성연이 거실에 있는 두 사람을 힐끗 바라본 후 다시 커피를 타고 있는 강유이를 바라보았다.“이제 곧 결혼식을 올리겠구나. 엄마가 너를 위해 서프라이즈 선물을 준비했어.”강유이가 멈칫거리더니 강성연을 돌아보았다.“어떤 서프라이즈 선물이요?”“아직은 안 가르쳐 줄 건데?”강유이가 조금
한태군이 두 사람을 보며 말했다.“두 사람을 여기에서 만날 줄은 몰랐네.”조민이 대답했다.“나랑 소찬 씨는 이곳에 온 지 좀 됐어. 유이가 인스타에 사진을 올려서 알았어. 너희들도 여기 왔다는걸.”강유이가 조민의 팔을 잡아당기며 자리에 앉혔다.“그럼 우리랑 며칠 더 같이 놀아요.”소찬까지 자리에 착석한 후 반재언은 그에게 진예은과 강유이를 소개했다.“여기는 우리 제수씨인 진예은씨고, 이쪽은 내 동생 유이야.”“형 결혼식 때 봤었어.”소찬은 당연히 기억하고 있었다.“형 동생이 내 와이프랑 같은 학교 출신이라면서? 와이프한테서 얘기 들었어.”조민이 그를 보며 말했다.“누구보고 와이프래요? 나중에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장담 못 하거든요?!”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약혼까지 다 했는데 다른 남자한테 시집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두 사람의 티격태격한 모습에 다른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유독 강유이만 멍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지금 무슨 소리들 하는 거예요! 약혼이라니. 선배 약혼했어요?”조민이 작게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응, 너한테 말하는 걸 깜빡했어.”“너무해요. 어떻게 그렇게 중요한 일을 나한테 말하지 않을 수 있어요.”강유이가 입을 삐쭉 내밀었다. 그녀는 조민이 약혼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조민이 그녀의 손을 감싸며 말했다.“너한테 서프라이즈를 해주려고 그랬지.”그녀가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돌렸다.“저 이제 선배랑 안 놀거예요.”조민이 울지도 웃지도 못한 채 옆에 앉아있는 한태군을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빨리 네 와이프 좀 달래 봐.”한태군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강유이도 그저 장난으로 그런 말을 했을 뿐이었다. 그녀는 조민의 약혼 소식을 듣고 진심으로 기뻤다.적어도 이제 그녀는 자기만의 행복을 찾았다.…..한편, 서울 병원.민서율은 복도에서 의사와 이야기를 나눈 후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침대 머리에 기대앉아있는 어머니는 많이 초췌해진 상태였다.“어머니, 몸은 좀 어떠
투호 판을 벌인 사장이 말했다.“오천 원에 세 번 던질 수 있어요.”“그렇게나 비싸요? 오천 원에 세 번밖에 던지지 못하다니!”진예은은 어쩐지 손해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투호 판 사장이 고개를 들고 말했다.“저희가 여기서 제일 쌉니다. 다른 집에서는 만 원에 세 번 던지게 하는걸요.”강유이가 진예은을 잡아끌며 말했다.“오천 원에 하자. 사장님도 장사하는 게 어려우실 거 아니야. 우리 재미로 한 번 해보자.”결국 그녀는 사장에게 만 원을 건넸다.“기회는 총 여섯 번입니다.”사장이 화살 여섯 개를 그녀에게 건넸다. 가지런히 놓인 여러 개의 항아리 옆에는 명중했을 때 가질 수 있는 선물이 놓여있었다. 강유이는 그중 팔찌가 갖고 싶었다. 비록 가짜겠지만 디자인이 예뻤다.그녀가 고심 끝에 화살을 던졌다. 하지만 화살은 항아리를 빗나가고 말았다.그 뒤로 연속 두 번 더 던졌으나 모두 다 실패했다.이제 화살은 세 개 밖에 남지 않았다.강유이의 자신 없는 모습을 본 남우가 그녀의 손에서 화살을 가져가며 말했다.“내가 할게요.”그녀가 팔찌 옆에 놓인 항아리로 화살을 던졌고, 화살은 단번에 항아리 안으로 들어갔다.성공이다!흥분한 강유이가 폴짝폴짝 뛰며 말했다.“새언니 정말 대단해요!”“훗. 이 정도쯤이야.”남우가 눈을 찡긋해 보이며 물었다.“또 어떤 게 갖고 싶어요?”강유이가 진예은에게 물었다.“예은아, 어떤 게 마음에 들어?”진예은이 선물을 살피다가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머리핀이요. 저게 제일 예쁜 것 같애요.”남우가 다시 머리핀 옆에 있는 항아리를 향해 화살을 던졌다. 그리고 정말로 그 머리핀을 명중했다.강유이가 그녀의 손을 꼭 붙잡고 잔뜩 흥분하며 말했다.“진짜 백발백중이네요. 새언니, 이제는 새언니 마음에 드는 걸로 골라요.”남우가 턱을 쓰담으며 말했다.“그러면 저는…”그녀의 시선에 백옥 청자가 들어왔다.“저걸로 하죠.”그녀가 들고 있던 화살을 슝 던지자 쨍그랑하는 소리와 함께 항아리 안으로 빨려
늦은 밤의 산속은 무척이나 고요했다. 평안한 야영장에는 오직 풀벌레 소리만 잔잔하게 들려왔다.텐트 밖 잔디 위에는 랜트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빛을 밝히고 있었다. 평온하고도 아늑한 분위기였다.강유이는 몸을 뒤척거리며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때 한태군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며 품에 안았다.“잠이 안 와?”“응.”그녀가 그의 품에 가만히 기댔다.“태군 오빠, 나 화장실 가고 싶은데 무서워서 못 가겠어.”한태군이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그럼 내가 같이 가줄게.”두 사람이 텐트 밖으로 나왔다. 한태군이 손전등을 들고 그녀와 함께 한참을 걸었다. 두 사람은 우거진 숲 앞에 도착했다. 강유이가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여기서 기다리고 있어.”한태군이 고개를 끄덕였다.“무슨 일 있으면 불러.”그녀는 숲 안으로 들어갔지만 무서워서 멀리 가지는 못했다.볼일을 본 후 강유이가 서둘러 달려와 그의 팔짱을 꼈다.“됐어.”한태군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텐트로 돌아가던 중 그녀가 고개를 들고 밤 하늘을 바라보며 손으로 가리켰다.“저게 북두칠성인가?”한태군도 고개를 들었다.“응, 맞아.”강유이가 배시시 웃었다.“역시 산속이니까 별이 엄청 잘 보이는 것 같아.”“두 사람 밤늦게 자지도 않고 별구경 하는 거예요?”남우가 텐트 안에서 나오며 묻자 강유이가 그녀를 바라보았다.“새언니도 아직 안 잤어요?”“네. 아까 귀신 이야기한 것 때문에 무서워 잠을 못 자겠잖아요…!”남우가 생수 한 병을 따서 마셨다.강유이와 한태군이 서로를 마주 보더니 웃음을 터뜨렸다.“새언니 설마 그런 이야기에 무서워해요?”남우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말했다.“여기는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산골짜기라고요! 보통 때와는 다르잖아요.”강유이가 포도 한 송이를 들며 말했다.“걱정 마요. 우리 큰오빠가 새언니를 지켜줄 거예요.”그녀는 그 말을 끝으로 한태군과 함께 텐트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고개를 돌린 남우는 그제야 두 사람이 들어가 버린 것을 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