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첫 날인 거야!”상우의 말에 유담이 중얼거렸다.“아직도 14일이나 남았잖아. 아직도 오래 기다려야 해…….”시무룩한 유담의 모습에 영희 이모가 아이들의 포동포동한 손을 꼭 잡았다.“할머니랑 같이 기다리면 곧 오실 거야. 엄마도 최선을 다하고 계시니까 우리도 여기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는 거야? 응?”“네!”비록 아이의 상태가 안정됐다는 소식은 전해 들었지만 하루 종일 유담이 생각 때문에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자식이 잘 지낸다 해도 항상 걱정이 끊이지 않는 게 엄마 마음인데 자식이 아프다니 그 마음이 오죽할까.엄마가 곁에 없어도 항상 씩씩한 유담이었지만 아플 때도 울지 않을 수 있을까…… 아이가 넘어지기만 해도 마음이 찢어지는데 아프기까지 하니…… 너무 걱정되네.퇴근해 집으로 돌아온 원유희는 바로 영희 이모에게 영상 통화를 걸었다.하지만 연결음이 울리기 바쁘게 화들짝 놀란 듯 바로 끊어버렸다.영상 통화를 해도 되는 걸까? 아이들 얼굴을 보고도 침착할 수 있을까? 행여나 이성을 잃고 아이들 곁으로 돌아가려다 김신걸에게 걸리진 않을까?아이들이 아픈 것도 걱정됐지만 김신걸에게 아이들을 빼앗기는 게 더 두려웠다.고통스러운 얼굴로 주저앉은 원유희가 손바닥을 붉어진 눈시울을 감싸 쥐었다.이 모든 일의 원흉인 김신걸이 죽도록 증오스러웠다.이때 다리 옆에 둔 휴대폰 알림음이 울렸다. 문자 알림이었다.휴대폰을 확인한 원유희가 미간을 찌푸렸다.김신걸이 보낸 문자의 내용은 단 두 글자, “나와”였다.나오라는 문자는 김신걸의 차가 아파트 단지 앞까지 도착한다는 걸 의미했다.감히 거역할 수 없는 명령조에 원유희는 극도의 혐오감을 느꼈다.홧김에 휴대폰을 소파에 던졌지만 쿠션에 통통 두 번 튀길 뿐이었다.화가 머리끝까지 차올라도 휴대폰 하나 차마 제대로 던지지 못하는 스스로의 모습이 한심했다.잠깐 망설이던 원유희가 다시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지금은 나가고 싶지 않아. 다음에 봐.”한편 답장을 확인한 김신걸의 표정이 차갑게 굳더니 바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이제는 이런 상황 정도는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스스로의 모습이 원유희도 놀라울 따름이었다.그녀가 말없이 조 대표 곁으로 다가가자 조 대표의 눈이 살짝 커다래졌다.‘김신걸 여자인 줄 알았는데…… 왜 나한테…….’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별말은 하지 않았다.이런 접대에 나름 익숙해진 원유희는 자연스럽게 조 대표의 잔에 술을 따랐지만 그는 바로 만류하며 술병을 받아들었다.“아니에요. 제가 직접 하죠.”자신의 잔에 술을 가득 따른 조 대표는 예상외로 원유희의 잔에는 조금도 따르지 않았다.김신걸의 손에 이끌려 이런 자리에 참석한 것도 벌써 여러 번. 하지만 조 대표처럼 젠틀한 남자는 처음이었다.그제야 고개를 들어 조 대표의 얼굴을 자세히 살핀 원유희가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어딘가 낯이 익은데…… TV에서 봤던 것 같기도 하고. 하긴 김신걸과 함께 술자리를 할 수 있는 사람들 중에 평범한 사람이 있을 리가.’조 대표는 나름 김신걸의 체면을 생각해 원유희에게 젠틀하게 대하는 듯했지만 그 모습이 원유희는 우스울 따름이었다.‘어차피 김신걸이 원하는 건 내가 수모를 당하는 모습일 텐데.’알아서 잔에 술을 따른 원유희는 조 대표와 술잔을 부딪힌 뒤 쓰디쓴 액체를 원샷했다.‘내가 만약 취하면 어디로 데리고 갈까? 어전원으로 데리고 갔으면 좋겠다. 신분증이랑 여권 좀 챙기게. 그럼 어떻게든 아이들 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야……’한참 동안 술잔이 오고 가고 조 대표가 살짝 놀란 눈으로 물었다.“술…… 잘 마시시네요?”살짝 고개를 끄덕인 원유희는 말없이 또 한 잔 술을 들이켰다. 한쪽에서 원유희를 뚫어져라 관찰하던 김신걸의 날카로운 눈동자가 송곳처럼 원유희의 몸을 꿰뚫는 듯했다.술자리가 무르익고 원유희는 아예 조 대표는 내팽개치고 혼자 자작을 하기 시작했다.어떻게든 집에 들어가 여권을 챙기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오늘 하루 정말 기분이 엉망이었던 그녀는 알코올로 정신을 마비시키고 싶었다.‘필름만 안 끊기면 돼…….
김신걸이 다행히 살인충동을 잘 참아낸 것인지 다음 날, 원유희는 무사히 눈을 뜰 수 있었다.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을 느끼며 일어난 원유희는 자신이 계단 근처의 카펫 위에서 자고 있었음을 눈치챘다.마치 버려진 쓰레기처럼 말이다…….뭐 누구 짓인지는 말을 하지 않아도 충분히 예상이 됐다.자리에서 일어선 원유희가 익숙한 인테리어를 둘러보았다.‘어전원이네. 역시…… 하늘이 날 아직 완전히 버린 건 아니야. 이렇게 좋은 기회를 주셨으니까!”욕실에서 엉망진창인 얼굴을 대충 정리한 원유희가 1층으로 내려갔다.그녀를 발견한 해림이 다가왔다.“아가씨 식사 준비 다 됐습니다.”“김신걸은요?”“대표님은 나가셨어요.”고개를 끄덕인 원유희가 주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음식물을 씹으면서도 그녀의 생각은 오직 하나뿐이었다.‘김신걸이라면 내 여권을 어디에 숨겼을까? 방? 아니면 서재? 운에 맡겨보는 수밖에.’식사를 마친 원유희는 주방에서 나온 뒤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조용히 서재로 향했다.다행히 문은 열려있는 상태였다,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스럽게 문을 연 원유희는 쏙 하고 안으로 들어간 뒤 급히 문을 닫았다.심플한 분위기의 큰 서재는 어딘가 차갑고 압박감마저 느껴졌다. 김신걸의 느낌이 그대로 남아있는 것 같은 느낌에 원유희는 숨이 턱턱 막혔다.하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멍하니 서 있을 시간은 없었다.원유희는 숨을 죽이고 조심조심 걸어가 책상 위의 파일이며 서랍을 전부 뒤졌지만 그 어디에도 여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살짝 실망하던 원유희는 책장으로 시선을 옮겼다.책들을 하나하나 뒤져보던 그때, 두터운 책 한켠에 짙은 푸른색 작은 수첩이 그녀의 시선을 끌어당겼다.‘역시…….’뭐에 홀린 듯 꺼낸 수첩의 정체는 여권이었다. 신분증까지 여권 사이에 끼어있는 걸 발견한 원유희는 기쁨의 환호를 내지르지 않기 위해 입술을 꾹 깨물었다.휴대폰은 버리고 도망치는 거야. 휴대폰 위치 추적이 없으면 아무리 김신걸이라도 날 잡을 순 없을 걸…….여
‘12살일 때는 3일…… 이번에도 3일일까? 아니, 이젠 성인이니까 더 오래 가두려나? 한 1주일 정도?’마지막 희망의 불씨까지 꺼져버리고 원유희는 발버둥 칠 힘마저 전부 잃어버리고 말았다.또다시 이렇게 비참한 처지가 된 자신의 팔자가 원통했다.지하실에는 침대는 물론, 먹을 것도 심지어 물도 없었다.기나긴 어둠을 견뎌내기 위해 잠을 청하려 해도 문이나 벽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아침을 먹어서일까 첫날은 나름 견딜만 했다.하지만 두 번째 날부터 원유희는 온몸의 수분이 전부 증발하는 듯한 고통에 휩싸였다.세 번째 날. 입술이 전부 말라비틀어진 원유희는 몸을 움직이는 것조차 힘들어 구석쪽에 웅크리고 있는 수밖에 없었다.그렇게 원유희가 감금되어 있는 동안 김명화는 미친 듯이 그녀를 찾고 있었다.아무리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으니 왠지 불안한 예감이 들어 원수정에게 전화를 걸어 집으로까지 찾아갔지만 역시나 아무도 없었다.실종이라도 된 듯 이틀째 성형외과에 출근도 안 하고 집으로 돌아오지도 않자 김명화는 무슨 일이 일어났음을 직감하고 바로 드래곤 그룹으로 달려갔다.잠시 후, 드래곤 그룹 대표 사무실.고건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대표님, 명화님께서 오셨습니다.”“하, 꽤 적극적이네. 안 볼 거니까 돌아가라고 해.”코웃음을 치던 김신걸이 말했다.“네.”한편, 한참을 기다려도 김신걸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니 마음이 조급해진 김명화는 그의 앞을 막아서는 비서들을 밀치며 무작정 안으로 달려들었다.“들어가게 해줘! 형 만나야 하니까!”경호원을 밀던 김명화가 소리쳤다.하지만 무선 이어폰을 낀 건장한 체격의 경호원은 바로 제압용 스틱을 꺼내며 소리쳤다.“대표님은 뵙고 싶다고 마음대로 봴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먼저 예약부터 하세요. 자꾸 이러시면 쫓아내는 수밖에 없습니다.”경호원까지 기고만장한 모습에 김명화는 속에서 천불이 났지만 정말 억지로 밀어붙였다가 괜히 김신걸의 화를 돋군다면 뒤처리가 귀찮아지니 꾹 참는 수밖에 없었다.‘일단은 유희부터 찾아
해림의 말에 김명화의 얼굴도 차가워졌다.“그쪽도 어차피 이 집안에서 일하는 직원 아닌가? 우린 형 가족이에요. 이렇게 해도 되는 겁니까?”말문이 막힌 해림이 멈칫하는 사이 김명화가 안쪽으로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상황 보고를 위해 해림이 휴대폰을 꺼냈지만 그마저도 김영이 막아나섰다.“유희 여기 갇혀있는 거 맞습니까?”김영의 젠틀한 목소리에도 해림은 여전히 경계 가득한 시선을 보내왔다.“대표님께서 원하시는 건 그 누구도 거역할 수 없습니다. 어서 여기서 나가시는 게 좋을 겁니다.”한편, 문에 기대 정신을 잃어가던 원유희는 누군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것 같은 기분에 눈을 번쩍 떴다.‘착각인가? 명화 목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유희야! 유희야 너 어디 있어?”목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지고 김명화가 지하실 문을 두드렸다.“유희야, 안에 있어?”오랜 어둠 끝에 드디어 새벽을 맞이한 듯한 기분에 원유희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냈다.“나…… 나 여기 있어.”원유희의 미약한 목소리가 문틈 사이로 흘러나오고 김명화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유희야, 겁 먹지 마. 내가 구하러 왔으니까!”말없이 눈물을 흘리던 원유희는 인체의 신비로움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온몸에 수분이 다 말라버린 것 같은 기분이었는데 아직도 흐를 눈물이 남아있네…….“유희야, 문에서 멀리 떨어져. 내가 차서 열 거니까.”“응.”짧은 대답과 함께 원유희는 힘겹게 몸을 움직였다.잠시 후, 김명화가 있는 힘껏 문을 걷어차고 문이 열리는 순간, 무기력한 얼굴로 벽에 웅크려있는 원유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그녀를 향해 다가가는 발걸음이 살짝 떨려왔다.“유희야?”사흘내내 캄캄하기만 했던 지하실에 드디어 빛이 들어오고 원유희가 허약한 목소리로 물었다.“네가…… 여긴 어떻게 왔어…….”“너랑 연락이 안 돼서. 병원에도 안 왔다고 하고…… 집에도 안 들어오고 무슨 일 생겼다 싶어서.”원유희를 번쩍 들어올린 김명화가 말했다.“여기서 나가자.”하지만, 거실로 나간 그는
사흘 내내 물 한 모금 못 마신 원유희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아 침대에 살짝 몸을 기댔다.‘그래. 내가 팔자가 사나워서 그래…… 내가 운이 나빠서…… 그게 아니라면 김신걸한테 이렇게까지 괴롭힘 받을 이유가 없으니까…….’“행여라도 데리고 나갈 생각 같은 건 하지 마. 이 총에 맞아 죽어서 영혼으로라도 남고 싶다면 마음대로 하든가.”말을 마친 김신걸은 자신의 말이 농담이 아니라는 듯 권총으로 멀리 있는 꽃병을 향해 총을 한 발 발사했다.총알이 정확히 화병을 명중하고 방금 전까지 멀쩡하던 화병이 산산조각나고 말았다.“으악!”처음 듣는 총소리에 깜짝 놀란 원유희는 비명과 함께 눈을 질끈 감았다.잠시 후, 조심스레 고개를 돌려 김영과 김명화의 상태를 확인한 그녀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다친 데는 없는 것 같으니까 다행이야…….’“들어와!”김신걸의 차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경호원으로 보이는 장정 여러 명이 우르르 들어오더니 김영과 김명화를 노려보았다.“지금 바로 움직일까요?”순식간에 불리해진 상황에 김영은 몰래 주먹에 힘을 주었다.딱 봐도 이쪽이 불리하니 대놓고 맞설 수도 없는데다 부자끼리 서로 싸운다는 패륜이 일어나는 건 눈 뜨고 볼 수 없었다.한편 김명화도 입술을 꽉 깨물었다.이대로 원유희를 두고 가면 평생 죄책감에 시달릴 것만 같았으니까.하지만 고개를 돌린 순간, 원유희의 눈동자는 그를 향해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너라도 얼른 가…….’김명화가 여전히 망설이자 원유희가 허약한 목소리로 말했다.“날 죽게 내버려두지는 않을 거야…… 걱정하지 마…….”말없이 한참을 고민하던 김명화는 결국 치미는 분노를 억누르며 집을 나가버렸다.김영은 이제 정말 악마처럼 변해버린 아들을 향해 한 발 다가갔다.가족들 사이에 있었던 일이니 대화로 풀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신걸아, 다 내 잘못이야. 그러니까 그 죗값은 내가 갚을게.”아버지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김신걸은 마치 악귀에 빙의라도 된 듯 기괴한 미소를 지었다.“아버지, 너
본능적인 두려움에 원유희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총 쏠 줄은 알면서 빼앗은 거야? 내가 가르쳐줄까?”그리고 다음 순간, 김신걸이 그녀의 이마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탕!”“으악!”깜짝 놀란 원유희가 머리를 끌어안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뭐지?’하지만 한참이 지나도 몸에서는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애초에 그녀를 향해 쏜 게 아니었으니까.“이번에는 정말 널 겨낭 할 거야. 그러니까 당장 꺼져.”김신걸이 차가운 목소리에 바로 반응한 그녀가 미친 듯이 거실을 뛰어나갔다.애초에 풀어주기로 마음을 먹은 건지 밖에는 차가 대기하고 있었다.잠시 후, 차는 한참을 달려 집과 꽤 멀어졌음에도 그녀의 몸은 떨림을 멈추지 않았다.‘괜찮아. 괜찮아. 이제 괜찮아…….’잠시 후, 아파트로 돌아온 그녀는 문을 닫은 뒤 소리를 지르고 의자를 부수며 참고 참았던 분노를 분출해냈다.“김신걸, 이 미친 놈! 이 미친 자식아!!”12살 때까지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그때는 적어도 총은 없었으니까.그런데 칼도 아니고 총이라니…….‘그딴 건 왜 가지고 있는 거지? 왜? 사람이라도 죽이려고? 하긴…… 김신걸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거야. 마음만 먹으면 경찰에서 눈치 못 채게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버리겠지. 아니…… 경찰에서 안다 해도 누가 감히 김신걸을 조사하겠어…….’뭔가 떠오른 원유희는 집에 두고 갔던 휴대폰을 꺼내들었다.3일 사이 이미 배터리가 다 나간 상태였다.휴대폰에 충전을 하고 켜보니 통화기록은 고모와 김명화가 걸어온 부재중 전화로 가득 차 있었다.아마 연락이 안 되니 미친 듯이 전화를 한 거겠지.날짜를 확인한 원유희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임시 주민등록증도 지금쯤 다 됐을 테고…… 일단 그것부터 발급받고 바로 여권 새로 받는 거야. 속전속결로 움직이는 거야…… 사흘내내 갇혀있다가 나와서 바로 이런 짓을 저지를 거라곤 김신걸도 에상하지 못할 거야. 오늘 마침 출근도 안 하겠다. 오늘이 최적의 기회야.’생각을 마친 원유희는 아파트
다음 날, 원유희는 고모와 김명화에게 무사하다는 내용의 문자를 전했다. 그녀가 실종되었을 때 가장 걱정해 준 사람들이었으니까.사실 집으로 돌아온 뒤로 원유희는 더 이상 성형외과로 출근을 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보름 뒤면 이곳을 떠날 테고 제대로 된 사직 절차를 밟을 것도 아니니 이번 달 월급도 못 받을 테니까 말이다.하지만 바로 병원을 그만두면 바로 김신걸의 의심을 사게 될 터…….무거운 마음으로 출근한 그녀의 곁으로 장인영이 다가왔다.“하, 드디어 출근했네요. 생리는 다 끝났어요?”“네.”장인영의 비아냥거림에도 원유희는 덤덤한 말투로 대답했다.“하여간 연약한 척은. 앞으로 한 달에 한 번씩 이렇게 며칠씩 잠적할 셈이에요? 도대체 왜 원유희 씨를 안 자르는 지 이해가 안 되네요. 원유희 씨 때문에 팀장님은…… 재수없게.”말을 마친 장인영이 그녀를 흘겨보더니 자리를 떴다.혼자 남은 원유희가 눈살을 찌푸렸다.‘하, 아예 대놓고 시비를 거네.’하지만 장인영의 마음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한 사람이라도 휴가를 내면 다른 누군가가 해야 할 일이 더 많아지기 마련. 정말 장인영 말대로 다들 생리통 때문에 매달 3-4일간 휴가를 낸다면 그 회사가 제대로 굴러갈 리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모두에게 상황을 설명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억울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저녁, 퇴근 후.원유희의 아파트 앞에 도착한 김명화가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나 지금 집 앞이야. 보고 싶어.”“여기가 어디라고 와. 아파트 단지 곳곳에 전부 CCTV야. 김신걸한테 들킬 수도 있다고.”원유희의 목소리가 두려움으로 떨려왔다.‘명화는 왜 여기까지 온 거야. 김신걸이 무섭지도 않나…….’“네가 너무 걱정돼서 그래. 유희야, 얼굴 좀 보자. 잠깐이면 돼.”진심어린 그의 목소리에 망설이던 원유희가 대답했다.“그래. 그럼 아파트 뒤쪽으로 와. 그쪽엔 CCTV 없으니까. 지금 바로 내려갈게.”“그래.”잠시 후, 복도에서 나온 원유희의 눈에 익숙한 포르쉐와 차문에
육성현은 흠칫 놀랐다. 그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내가 누구를 죽였다고 그래? 혜정아, 다 오해야. 나 지금 다 고쳤어. 진짜야, 어서 내려와. 물만두가 식겠다.”“오지 마!”엄혜정은 감정이 격해져서 소리쳤다.“다가오면 뛰어내릴 거라고 얘기했어!”“그래, 안 갈게.”육성현은 감히 다가가지 못했다.“혜정아, 진짜야. 난 사람을 죽이지 않았어. 우선 먼저 내려와. 내려오면 내가 다 설명해 줄게. 다 오해야.”“사실 처음부터 수상하다고 생각했어. 그냥 유희의 말이 날 깨닫게 했을 뿐이야.”엄혜정은 눈물이 그렁그렁했지만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다. 그녀는 육성현을 바라보면서 얘기했다.“근데 나 지금 다 알게 됐어. 증거는 없지만 넌 김하준이잖아. 난 적어도 아이를 위해서 네가 달라질 거라 기대했어. 근데, 넌 어떻게 네 아이의 외할머니랑 외할아버지를 죽일 수 있어? 김하준, 넌 도대체 정체가 뭐야? 세상에 어떻게 너 같은 괴물이 다 존재해?”“혜정아, 내려와서 천천히 얘기하자, 응? 거긴 너무 위험해.”“제일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 죽은 기분을 모르지? 너도 한번 느껴봐야 해.”엄혜정은 떨어지는 눈물과 함께 베란다에서 뛰어내렸다.“안돼!”육성현은 고함을 지르며 달려갔다. 하지만 엄혜정의 옷자락도 미처 잡지 못했다.그는 엄혜정이 바닥에 떨어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고, 그녀의 몸에서 피가 흘러나오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밑에 서 있던 하인 중 그 누구도 엄혜정을 받아내지 못했다.“다 죽일 거야!”육성현은 미친 듯이 달려갔고, 눈에 거슬리는 하인들을 모조리 걷어차 버렸다. 그는 엄혜정 옆으로 기어가 부드럽게 그녀를 품에 안았다.“혜정아, 혜정아. 병원에 데려다줄게. 아무 일도 없을 거야!”엄혜정은 눈을 떴다. 그녀의 머리는 피투성이가 되었고, 초점이 점차 사라지는 눈으로 육성현을 바라보았다.“김하준, 다음 생이 있다면, 난 다시는 널 만나지 않을 거야…….”이렇게 한마디만 남기고 엄혜정은 숨을 끊게 되었다.“그래, 만나지 마,
퇴원한 후, 엄혜정은 방에 혼자 남았을 때 원유희에게 연락했다.“유희야, 괜찮아? 김명화가 널 납치했다고 들었는데, 구출됐다고?”“응, 괜찮아. 지금은 집에 도착했어.”“다행이다.”원유희는 그녀의 정서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채고 물었다.“왜 그래? 기분이 안 좋아?”“부모님이 돌아가신 일 말이야. 나 다 알게 됐어.”원유희는 순간 멈칫했다.‘다 알았다고?’“미안해 혜정아, 숨기는 게 아니었는데.”“괜찮아, 나랑 아이를 생각해서 숨긴 거잖아.”엄혜정은 잠시 멈췄다가 다시 물었다.“네가 김명화를 죽였어?”“아니. 그날에 크루즈에서 김명화가 도망쳤거든. 우리가 김명화를 찾았을 땐 이미 주검으로 됐어. 그 주검도 바다에서 건져낸 거야.”“육성현도 있었지?”“응, 얘기해줬어?”엄혜정은 덤덤하게 물었다.“육성현을 의심해 보지 않았어?”원유희는 흠칫했고 아무런 얘기도 할 수가 없었다.“김명화를 죽인 사람, 그리고 우리 부모님을 죽인 사람 말이야…….”“그럴 리가?”원유희는 당황했다. 그녀는 엄혜정이 왜 육성현을 의심하게 됐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무슨 단서라도 발견한 거야? 아니면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유희야, 저 사람 진짜 육성현이 아니잖아. 김하준이라고. 나 그 사람 잘 알아.”엄혜정은 목이 메였지만 울먹이면서 끝까지 말했다.“난 그 사람 고칠 줄 알았어, 적어도 아이를 위해서…….”“혜정아, 아직 조사하고 있어.”“그럼 너희들도 육성현을 의심하고 있다는 얘기잖아, 맞지?”“오해일 수도 있어.”“오해일 리가 없어.”엄혜정은 말을 마치고 바로 전화를 끊었다. 원유희가 다시 전화를 걸어오자 그녀는 아예 핸드폰을 꺼버렸다.그리고 시체처럼 무기력하게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엄혜정은 서재에서 나온 육성현을 보면서 얘기했다.“나 물만두 먹고 싶은데, 사다 줄래? 예전에 빈민가에서 자주 사주던 물만두 말이야.”“그래.”육성현은 엄혜정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말했다.“먼저 우유 좀 마시고 있어. 금방 갔다 올게.”
육성현은 엄혜정을 끌어안았다.“김명화가 죽었대. 복수한 셈이나 마찬가지야. 그러니까 네가 무사히 지내야 장인어른 장모님이 안심하시지 않겠어? 침착해.”엄혜정은 울면서 그의 품에 쓰러졌다.그러고는 배가 간간이 쑤시자, 엄혜정의 얼굴은 하얗게 질렀다.육성현은 그녀의 상황을 바로 눈치채고 기사에게 소리쳤다.“얼른 병원으로 가!”“얼른!”염민우도 재촉했다. 그는 얼른 엄혜정의 손을 잡았는데, 그녀의 손이 얼음처럼 차갑다는 것을 발견했다.“누나, 아직 나도 있잖아. 그러니까 아무 일도 생기면 안 돼. 누나, 꼭 버텨줘.”엄혜정은 눈에 눈물을 머금고 그를 보고 있었다.그녀는 마음이 몹시 괴로웠고,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다.‘난 부모님을 가질 자격이 없는 걸까……?’엄혜정이 깨어났을 때 그녀는 이미 병원에 있었다. 깨어나자마자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배를 만졌다.육성현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지금 안정을 취해야 한대.”엄혜정은 주위를 둘러보았다.“민우는?”“밖에 있어. 너무 걱정되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어.”엄혜정은 육성현의 손에서 자기 손을 뺐다.“두 사람 너무해. 이렇게 큰일을 어떻게 나한테 숨길 수가 있어? 평생 숨길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 육성현, 우리 부모님의 목소리를 합성해서 나랑 통화하게 했어? 네 아이디어지? 넌 아이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다 할 수 있잖아!”“혜정아, 어차피 일은 벌어졌고, 너한테 알려준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어. 네 옆에는 나랑 아이가 있고, 민우에게 남은 가족이라곤 너밖에 없어. 너한테도 무슨 일이 생기면, 민우는 더 고통스러워질 거야.”엄혜정은 말을 하지 않았고, 눈물이 그렁그렁했다.엄혜정도 염민우가 더 고통스러워질 것을 잘 알고 있었다.그때 엄혜정은 염민우가 갑자기 엄청나게 말라갔던 것이 생각이났다. 엄혜정은 염민우의 일이 바쁜 줄로만 생각했는데, 이제야 그때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염민우는 모든 것을 혼자 감당하고 있었다.“울지 마. 의사가 지금은 안정을 찾아야 한다고 했어.”
“알았어요…….”염민우는 고개를 들었다. 그러다가 입구에 서 있는 엄혜정을 보고 깜짝 놀랐다.“누…… 누나. 여긴 어쩐 일이야?”엄혜정은 멍하니 거기에 서서 염민우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방금 얘기하고 있던 사람을 봤다.“하늘나라라뇨? 저희 부모님이 왜 하늘나라에 계셔요?”“아니야, 다른 사람의 얘기를 하고 있었어.”엄혜정은 두 사람의 얼굴에서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것을 발견했다.그녀는 똑똑히 들었다. 엄혜정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고, 다급하게 핸드폰을 찾았다.핸드폰을 못 찾자 바로 차로 뛰어갔다.“누나!”염민우는 엄혜정을 쫓아갔다.“뭐 하려고 그래?”“엄마 아빠한테 전화할 거야.”“지금 여행 중이시니까, 방해하지 않는 게 좋지 않을까?”엄혜정은 그를 보면서 물었다.“사실대로 얘기해줘. 엄마 아빠 왜 아직도 돌아오시지 않은 거야? 거짓말하지 마! 사실 줄곧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내가 임신했는데 엄마랑 아빠가 계속 안 오시는 게 말이 안 되잖아! 두 분 무슨 일이 생긴 거 맞지? 정말로…… 무슨 일이 생긴 거야?”염민우는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꾹 참고 말했다.“더 이상 묻지 마…….”“염민우! 계속 우물쭈물 얘기 안 하면, 나 이젠 널 안 봐!”염민우는 더 이상 숨길 수 없다는 것을 직감했다. ‘집에 오는 게 아니었어, 그나저나 아저씨는 왜 또 그런 허튼소리를 해서 참…….’“맞아, 누나 임신 3개월쯤 되었을 때, 누군가에 의해 살해당하셨어.”엄혜정은 몸이 휘청거렸다. 염민우는 바로 그녀를 부축했다.“침착해요! 엄마랑 아빠는 누나가 무사하기를 원하셨을 거야. 난 누나가 못 받아들일 것 같아서 장례식 때 일부러 알려주지 않았어.”엄혜정의 눈에서 눈물이 주룩주룩 흘러내렸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염민우를 바라보았다.“너 이러고도 내 친동생이 맞아? 어떻게 안 알려줄 수가 있어! 아기만 중요하고 부모님은 안 중요할 것 같아? 너…….”너무 충격 받은 엄혜정은 눈앞이 점점 캄캄해지더니 기절을 하고 말았다.“누나!”
육성현이 다가와 물었다.“유희야, 괜찮아?”원유희는 고개를 저었다.“너 안색이 안 좋은데, 왜 그래?”“김명화가 죽었어요.”김신걸이 얘기했다.“해독제는 찾았어요?”원유희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아쉽네. 그럼 감염된 사람들은 우선 좀 참아야겠어.”원유희는 갑자기 뭐가 생각나 바로 김신걸을 밀쳤다.“날 만지지 마!”육성현은 그제야 원유희의 볼 아래의 병변 부위를 발견했다.“유희야, 김명화가 너한테도 독을 썼어?”김신걸은 미간을 찌푸렸다.“상관없어.”“안돼. 우리 둘다 아이들하고 접촉하지 않으려 한다면 애들이 걱정할 거야.”원유희는 거절했다.김신걸은 줄곧 원유희와 스킨쉽이 있었다. 원유희는 그도 감염되지 않을까 걱정했다.“방금도 널 안았는데, 감염되면 진작에 감염됐어.”김신걸이 말했다.원유희는 그래도 싫었다.“아니, 그래도 만지지 마.”해독제도 못 가진 상황에 김명화는 의문스럽게 죽었다. ‘여기 김명화를 죽이려고 한 사람이 있었단 말이지?’김신걸은 김명화를 죽이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시체를 바다에 던질 일은 더더욱 없었다.그럼 분명 다른 사람이 한 짓이었다.‘무슨 목적으로? 김신걸도 감염되면 배후의 사람을 어떻게 잡아내지?’‘다른 조직의 사람도 이곳에 숨어 있을지도 몰라.’원유희는 말을 하지 않았다.“내려가자.”김신걸은 원유희의 말대로 몸에 손을 대지 않았다. 원유희가 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신을 떠날까 봐서 걱정이었다. 김신걸은 더 이상 그런 고통을 견딜 수 없었다.원유희는 김신걸을 따라 떠났다.육성현은 먼 곳에 있는 김명화의 시체를 봤다. 그리고 그가 죽은 것을 확인하고 떠났다.이제 아무도 김명화를 죽인 사람이 육성현이라는 것을 모를 것이다.엄혜정은 이미 임신 5개월 차에 접어들었다. 지금 어떠한 사고도 있어서는 안 되었다.육성현은 잠깐 해독제가 없더라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아이를 낳은 후 다시 생각하려 했다.엄혜정은 소파에 앉아 과일을 먹고 있었다.배는 이미 많이 나
김명화의 말이 끝나자마자 뒤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진선우는 킬러들과 격투하고 있었고, 매번 그들의 치명적인 곳을 공격했다.진선우가 실력이 없었다면, 킬러들은 진작에 그를 해결했을 것이다.김명화는 무엇을 깨닫고 손을 돌려 원유희를 잡으려 했다.원유희는 후퇴하는 동시에 다른 힘에 의해 품에 안겼다.“이거 놔!”원유희는 낯선 남자인 줄 알고 발버둥 치려 했다.“유희야.”원유희는 멍하니 고개를 돌렸고, 익숙한 얼굴을 보자 아주 기뻤다.“김신걸?”“나야.”김명화는 서로 애틋한 두 사람을 보자 화가 더 났다.“원유희, 역시 김신걸에게 단서를 남긴 사람, 너였어.”김명화는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그쪽이 너무 방심한 탓이죠.”‘내가 예전에 김신걸의 곁에서 도망치려고 했던 일이 김명화에게 착각을 준 거야?’“왜, 날 죽이려고? 네까짓 게?”김명화는 말을 마치고 몸을 돌려 다른 출구로 달려갔다.하지만 경호원들은 이미 그곳에 서서 그를 막았다.김명화는 총을 꺼내 쏘자, 한 경호원은 바닥에 쓰러졌고, 다른 경호원은 얼른 옆으로 비켜 숨었다.일반인들은 그 출구를 포기했을 것이다. 김신걸의 사람들이 숨어있었기에, 그 출구는 아주 위험했다.하지만 김명화는 기어코 사격을 하면서 길을 텄다.안에 숨어 있던 경호원들은 피하면서 반격할 수밖에 없었다.경호원들의 반격에 김명화는 하마터면 맞을 뻔했다. 그러다가 몇발 더 쏘고는 바로 달렸다.김명화는 크루즈에 오래 있었다. 하여 갓 크루즈에 올라온 김신걸의 사람들보다 이곳을 훨씬 더 잘 알았다.몇 개의 모퉁이를 돌면 은폐하기 적합한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김명화는 다시 부하들에게 연락했지만 전화를 받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그제야 김명화는 김신걸의 사람들이 진작에 올라왔고, 자기 쪽 부하들은 아마 얼마 남지 않은 것을 깨닫게 되었다.도망치지 못한다면 김신걸에게 잡힐 것이 뻔했다.김명화는 죽어도 김신걸에게 잡히고 싶지 않았다.그러다가 갑자기 한 사람의 인기척이 났다. 김명화는 본능적으로 총을 들었다
원유희는 지금 약 때문에 힘을 쓸 수 없는 상황이었고, 크루즈 곳곳에는 CCTV가 있었다. 방에 들어올 때, 그 윗부분에 CCTV가 하나 있었다. 그래서 한밤중에 몰래 뭔가를 찾아보는 건 아예 불가능했다.김명화는 일찌감치 그녀가 아무것도 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원유희는 떠나기 전에 김신걸에게 단서를 남겨주었기에 그가 곧 이곳을 찾아올 거라 믿었다.다만 김신걸의 속도가 이렇게 빠를 거라 예상하지 못했다.날이 밝는 무렵, 원유희는 헬리콥터 소리를 들었다.이어 문이 펑 하고 열렸고, 원유희는 반응하기도 전에 멱살이 잡혔다.“연락을 어떻게 한 거야?”말을 마치고 원유희의 몸을 수색하려 했다.“아! 미쳤어요? 나 핸드폰 없어요!”“김신걸이 왔다고 널 데려갈 수 있다고 생각해? 죽어서 지옥에 내려가더라도 널 끌고 갈 거야. 가자!”“아니…….”원유희는 힘 없이 밖으로 끌려 나갔다.김명화는 원유희를 다른 방으로 보냈다.“우린 여기서 김신걸이 올 때까지 기다리면 돼.”원유희는 고개를 들어봤다. 입구에는 많은 폭탄이 놓여있었다.그걸로 부족한지 김명화는 원유희의 몸에 폭탄을 묶었다.“미쳤어요?”김명화는 원유희의 얼굴을 꽉 쥐었다.“김신걸이 널 어떻게 구할지 구경이나 하려고 그런다.”원유희는 마음이 매우 불안했다.‘김신걸이 왜 이렇게 왔을까? 너무 눈에 띄잖아.’다시 들어보니 이미 헬리콥터 소리가 나지 않았고, 밖에는 다른 인기척도 없었다.한 남자가 와서 말했다.“헬리콥터가 지나갔어요. 그냥 순찰하다가 지난 것 같아요.”김명화는 멍하니 서 있었다.원유희는 그를 비웃었다.“저 소리에 이렇게까지 놀랐단 말이에요?”“닥쳐!”김명화의 표정은 엄청나게 나빴다.“난 신걸이랑 아이들이 감염되는 거 보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연락하지 않을 거고요. 배고픈데 이 폭탄들이나 좀 뜯어줄래요?”김명화가 경각심을 낮추었을 때, 크루즈 밑에서 잠수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튀어나왔다. 10명 좌우로 보이는 사람들은 갈고리를 가드레일에 던지고 밧
원유희는 그를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김명화가 갑자기 뒤에서 무슨 짓을 할까 봐, 원유희는 그를 등지고 누울 수가 없었다.“너 기억나? 어릴 때 김신걸이 널 괴롭히면 넌 우리 집에 달려와서 내 침대에서 잤잖아.”“기억 안 나요.”“기억하는 거 다 알아. 난 그때 정말 널 도와주고 싶었어.”원유희는 그가 한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반박하지 않았다.그녀는 천장을 쳐다보며 말했다.“이전의 김명화는 이미 죽었다고 생각해요.”김명화의 표정은 어두워졌다.“우리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거야?”“내가 제일 아끼는 사람을 죽이고,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죠? 죽어서 사죄해도 모자랄 판에!”원유희는 지금의 김명화를 조금도 동정하지 않았다.“아무리 유년 시절이 불행해도, 다른 사람의 고통을 낙으로 삼으면 안 되죠!”“정말 고상한 척하네. 김신걸은 사람은 죽인 적이 없대? 육성현은 없대? 왜 걔네들이 사람을 죽인건 용서하면서, 난 용서하지 못하는 건데? 그 사람은 네 남편이고 네 가족이니까? 비겁하고 이기적인 건 너도 마찬가지야.”“참, 너도 사람을 죽였잖아. 네가 죽인 사람도 누군가의 아버지고, 누군가의 아들이야.”원유희는 기분이 착잡해졌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김명화는 원유희의 반응을 보고 가볍게 웃었다.“그러니까 너무 많이 생각하지 마. 그냥 쉽게 쉽게, 편하게 살자.”“이렇게 예전의 저질렀던 일을 합리화하려는 거예요? 그리고 그 명분으로 더 많은 사람을 죽이려고요?”원유희는 김명화를 바라보면서 물었다.“당신을 용서하기 싫은 거 아니에요. 근데 지금까지 자기의 잘못도 모르는 사람을 어떻게 용서해요? 차라리 해독제를 그냥 줘요. 시장에 유통하지 말고요. 그러면 예전에 있었던 일은 없던 거로 할게요.”“정말?”김명화는 원유희를 보면서 물었다.“물론이죠.”원유희는 김명화의 말처럼 깊이 생각하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대답을 했다.미래의 일은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다.“그래. 해독제를 줄 수 있어. 근데 대신 넌 나랑 평생 같이
“밥 안 먹으면 너만 손해야.”김명화는 그녀가 꼼짝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말했다.‘맞네, 아무 것도 먹지 않으면 무슨 힘으로 김명화를 상대하겠어?’잠시 후, 납득이 간 원유희는 젓가락을 들고 생선을 먹기 시작했다.김명화는 그녀가 고기를 입에 넣는 것을 보고 물었다.“어때?”“설마 그쪽이 한 거예요?”원유희는 귀찮다는 듯이 그를 한번 힐끗 쳐다봤다.“맞아, 내가 직접 했어.”‘이게 뭐 자랑할 일인가?’“수고했네요, 이런 일까지 해야 한다니.”“내가 힘들 것 같으면 같이 할까?”“할 줄 모르는데요.”“정말 상전 팔자구먼.”김명화는 원유희를 사랑스럽다는 듯이 바라봤다.원유희는 김명화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원유희는 김명화가 자신을 괴롭히고, 김신걸에게 모욕을 주기 위해 이곳에 데려온 줄로 알았다.근데 직접 밥도 해줄 거라는 것은 생각하지 못했다.“설마 요리에 무슨 수작을 부린 거 아니죠?”원유희는 젓가락을 멈추었다.김명화는 손에 있는 젓가락을 흔들었다.“나도 먹고 있잖아.”“먼저 해독제를 먹었겠죠.”“그런 거 아니야.”“그럼 내가 묻힌 진물은? 그건 어떻게 해결한 거죠?”원유희가 물었다.“해독제가 있으니까 괜찮은 거잖아요.”“해독제 가지고 싶어?”“줄 생각은 있고요?”“착하면 줄게.”원유희는 의심스러웠지만 말하지 않았다.어차피 금방 왔으니 당장 해독제를 받을 수는 없었다. 하여 원유희는 일단 참고 해독제를 발견하면 김명화를 바로 제압하는 것을 선택했다.밥을 다 먹고 나머지는 부하가 다 치웠다.“같이 샤워할까?”김명화가 물었다.원유희는 그를 차갑게 보며 말했다.“아니요. 먼저 씻어요.”원유희는 말을 마치고 몸을 돌려 욕실로 들어갔다.원유희는 자신의 감정을 가라앉히고 침착하자고 했다. ‘근데 자는 건 어떡하지? 정말로 같이 자야 해?’원유희는 침대를 봤다. 두 사람이 자고도 넉넉한 침대였고, 중간에 뭘 놓을 수도 있었다.김명화가 만약 자기 몸에 손을 대면 원유희는 같이 죽을 각오도 했다.10여 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