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밖에는 바람이 불지 않았다.다들 안색이 변했고 경계하며 방 밖을 바라보았다.적막 속에서 낙현책은 숨을 죽인 채 집중하여 듣고 있었다. 그는 갑자기 눈살을 찌푸리고 굳은 표정을 지었다.“누군가 포위하고 있습니다.”“적어도 백 명은 됩니다.”발소리는 없었지만, 나뭇가지와 나뭇잎을 스쳐 지나는 경공의 소리는 분명했다.서월은 걱정스러운 기색을 보였다.“아마도 파살문일 것이다.”“줄곧 우리를 노리고 있었다. 우리가 졌다는 것을 알고 어부지리를 누리려는 것이다.”그 말을 듣고 낙현책은 식골검을 들고 바로 적을 맞이하려 했다.심면이 다급히 그를 붙잡았다.“가지 마십시오!”엽순과의 싸움으로 낙현책은 이미 기진맥진했다. 다시 밖에 있는 사람들을 상대하면 분명 질 것이다.밖에서 사람들이 포위하는 소리를 들었지만 바로 공격하지 않은 것을 보고 심면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그녀는 이내 서월을 바라보았다.“엽순의 목숨을 지키고 싶으면 낙현책을 청주까지 호송하거라.”서월은 깜짝 놀랐다. 그녀는 심면의 뜻을 바로 알아차리지 못했다.낙현책도 이해를 못 한 듯 심면의 손을 덥석 잡았다.“무슨 뜻입니까? 홀로 어쩌려는 것입니까?”심면은 오히려 그의 손을 잡았다.“목숨을 걸고 나를 구해줘서 고맙습니다.”“하지만 적은 너무 많고 우린 상처까지 입었습니다. 더 이상 당신의 짐이 될 수 없습니다.”“정말 파살문이라면 그렇게 빨리 나를 죽이지 않을 것입니다. 꼭 방법을 생각하여 시간을 끌 테니 청주로 돌아가 도움을 청하십시오.”“그리고 다시 구해주십시오.”하지만 낙현책은 여전히 단호하게 말했다.“그들과 함께 가려는 것이면 나도 함께 갈 것이오!”말을 마치고 낙현책은 고개를 돌려 서월을 바라보았다.“엽순은 보통 사람일 뿐이다. 그는 몸속의 악귀를 통제할 수 없다. 정신을 차리면 계속 발작을 일으킬 것이다.”“엽순을 살리고 싶으면 청주로 가서 부 태사를 찾거라.”“만약 내가 죽더라도 부 태사는 엽순을 구할 방법을 생각해 낼 것이다.”심면이 다급
심면의 말을 듣고 흉터가 있는 남자는 안색이 바뀌었고 못내 속으로 고민이 많아졌다.여제의 의자가 된 것으로 보아 실력은 절대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실력은 둘째치고 신분만 보아도 미움을 살 수 있을지 그들이 고민하게 했다.흉터가 있는 남자가 냉소를 지었다.“지금 겁을 주는 것이냐?”“네가 그렇게 말하면 믿을 것이라 생각하느냐?”심면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믿거나 말거나 네 선택이다. 못 믿으면 어디 시도라도 해보거라.”심면의 당당한 모습에 흉터가 있는 남자는 쉽게 손을 쓸 수 없었다.백여 명의 사람들이 그들을 포위하고 있는데, 두 사람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보아하니 믿는 구석이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다들 이곳에서 죽으면, 명성을 얻긴커녕 더 이상 파살문을 찾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그 말을 듣고 흉터가 있는 남자는 미간을 더욱 찌푸렸다.심면은 계속 말을 이었다.“나와 나의 부모님을 죽이려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려준다면 당신들의 장사를 위하여 죽을 것이다.”상대의 눈빛이 반짝였다.그는 의아하게 심면을 보며 의심스러운 말투로 물었다.“정녕 죽으려는 것이냐?”심면의 눈빛은 차갑고 살기를 띠고 있었다.“부모님이 그자의 명을 받은 자객의 손에 죽었다는 것을 방금 알게 되었다.”“나는 죽을 수 있다. 하지만 죽기 전 반드시 고용주가 누구인지, 내 원수가 누구인지 알아야 한다.”“원수가 누구인지 알려주면 내 목숨을 너희에게 줄 것이다.”말을 마치고 심면은 고개를 돌려 낙현책을 바라보았다.“내가 죽으면 이 소년이 나를 대신하여 부모님의 원수를 갚을 것이다.”그녀의 단호한 눈빛을 보고 낙현책은 괜히 마음을 졸였다.그는 심면이 정말 그럴 셈일까 봐 걱정되었다.상대는 그녀의 말을 듣고 반신반의했다. 심면 부모님의 목숨을 앗으려는 것도 같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들을 죽인 것은 기산쌍살이다.고용주의 신분을 알리는 것도 그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상대가 망설이자, 낙현책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손끝에 부적
두 사람은 아주 태연자약했다.상대도 그 모습에 두려움을 느껴 손을 쓰지 않았고 일단 파살문으로 데리고 가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했다.숲에는 많은 말이 묶여 있었다. 하지만 흉터가 있는 남자는 두 사람이 도망갈까 봐 특별히 사람을 시켜 마차 한 대를 마련했다.심면과 낙현책은 함께 마차에 올랐다.파살문 사람은 말에 올라 마차를 앞뒤로 에워싸고 파살문으로 향했다.마차에 오르자, 심면은 힘에 부쳐 낙현책의 어깨에 쓰러졌다.낙현책은 다급히 그녀를 부축하고 걱정스럽게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아주었다.“괜찮소?”심면은 고개를 끄덕였다.“괜찮습니다. 조금 자고 싶습니다.”“자시오. 내가 지키고 있겠소.”방금 애써 버티면서 파살문을 상대하다 보니 그녀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상처의 통증으로 그녀의 안색은 창백했다.파살문이 물러선 후 서월은 굳은 표정으로 천천히 방 밖으로 나가 주위를 둘러보았다.그리고 몸을 돌려 침대 옆으로 다가와 말했다.“우리도 가야 하오!”엽순의 몸에는 때때로 검은 안개가 뿜어져 나와 그녀의 마음을 불안하게 했다.지금 상황에 될수록 빨리 청주로 가서 부 태사를 찾아 심면을 구해야 엽순을 구할 수 있다.어느새 날이 밝았다.심면은 낙현책의 품에 안겨 한참 잠들어 있었다. 그렇게 자고 깨어난 후 몸 상태도 많이 나아졌다.흉터가 있는 남자는 음식과 물을 갖고 와 입을 열었다.“길을 재촉해야 하니 객사에 묵지 않겠다. 가능한 한 신선한 음식을 구할 테니 일단 때우거라.”파살문으로 돌아가는 도중 많은 마을을 거쳐야 하므로 상대는 심면과 낙현책이 길에서 소란을 일으켜 일을 망칠까 봐 걱정했다. 그러므로 두 사람을 대하는 상대의 태도는 좋은 편이었다.며칠 동안 앞으로 나아가 드디어 파살문에 도착하였다.파살문에 도착한 심면은 깜짝 놀랐다. 파살문은 심면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규모가 크고 부하들도 많았다.돈이 아닌 명성을 추구하는 자객 문파가 어떻게 이렇게 큰 규모로 발전했는지 의아할 따름이었다.이렇게 큰 문파는 많은 돈이
섭정왕부(攝政王府).동상방(東廂房) 내 꽃무늬가 새겨진 침상 주위에 옷들이 널브러져 있었다.낙청연(洛清淵)은 몸을 일으켜 앉더니 침상 위의 난잡한 흔적을 확인하고는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햇빛이 빨간색의 흔적을 또렷이 비추고 있었다. 어젯밤 신방(新房)에 대여섯 명의 남자들이 쳐들어왔던 기억을 떠올리니 다시 한번 수치심과 모욕감이 울컥 치밀어올라 돌연 그녀를 견딜 수 없었고 굴욕으로 인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왜 우는 것이냐? 드디어 네 바람대로 섭정왕부에 시집왔으니 기뻐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서늘하고 낮은 목소리가 들려오자 낙청연은 등골이 오싹했다. 놀란 얼굴로 고개를 돌려보니 의자 위에 정좌로 앉은 남자가 보였다. 그는 위엄 있으면서도 싸늘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그의 차가우면서도 냉담한 시선이 그녀에게 닿았을 때 낙청연은 그의 시선이 칼이 되어 살을 에이는 것 같았고 온몸이 피 칠갑이 된 것 같았다.낙청연은 순간 머릿속에서 무언가 폭발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이내 가슴 부근이 꽉 막힌 것처럼 숨을 쉴 수가 없었다.“왕야(王爺)… 줄곧 여기 계셨습니까?”남자는 덤덤한 어투로 말했다.“너와 내가 혼인을 올린 날인데 본왕이 여기 있지 않으면 어디에 있어야 하느냐?”그 순간, 낙청연은 마치 벼락을 맞은 것 같았고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어젯밤 신방에 쳐들어왔던 남자들과 도처에 남겨진 어지러운 흔적들에 그녀는 수치스러웠고 분했는데 그녀와 함께 첫날밤을 보내야 했던 남자는 그 방 안에서 밤사이 그 남자들이 어떻게 그녀의 옷을 찢어발겼는지를 보고 있었다는 것이다.“왜입니까? 제가 그렇게나 미우십니까?”정신이 완전히 무너져버린 낙청연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분통을 터뜨렸다.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남자는 첫날밤 하인들더러 그녀의 순결을 빼앗게 했고 그녀의 몸과 마음을 더럽혔다.낙청연은 심장이 갈가리 찢기는 고통 때문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그녀는 어릴 때부터 그를 경모했었고 당시 태황태후(太皇太后)는 두 사람이 금동옥
촤악.차가운 물이 얼굴을 향해 날아왔고 낙청연은 힘겹게 눈꺼풀을 들었다. ‘난 죽었는데? 왜 아픔이 느껴지는 것이지?’어멈처럼 보이는 하인이 대야를 바닥에 내동댕이치면서 화가 난 얼굴로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울고불고 소란 피울 생각은 마시옵소서. 왕야께서는 그런 수작에 넘어가시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이 제 주제를 알아야지, 감히 동생을 대신해서 혼인을 치르러 하다니요? 섭정왕부는 그렇게 호락호락한 곳이 아닙니다!”등 어멈(邓嬤嬤)은 얼굴에는 노여움이 가득했다. 그녀는 원래 집으로 돌아가 늙은 어미를 모시려 했으나 염치를 모르는 왕비가 자결 시도를 하는 바람에 다시 돌아와 그녀의 시중을 들게 되었다.“승상부의 아씨로서 살 것이지 이런 추접한 일이나 벌리다니, 차라리 죽어버리지.”머리 위로 욕설과 불평이 끊임없이 쏟아졌고 낙청연은 이 모든 게 낯설었다. 그녀의 것이 아닌 기억들이 밀물처럼 밀려왔다.어젯밤은 섭정왕과 낙월영의 혼인날이었다. 그러나 낙청원은 사랑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신부로 위장하고는 방 안에 미정향(迷情香)을 피워놓고 섭정왕의 아이를 가질 생각이었다.그런데 부진환이 결정적인 시각에 정신을 되찾았고 화가 나서 사람들을 대여섯 명 불러들였으며 낙청연은 깨어난 뒤 굴욕을 참지 못하고 절망스러운 마음으로 벽에 머리를 찧어 죽으려 했다.몸의 원래 주인은 그를 미치도록 사랑했었고 그녀의 몸에서 그녀의 괴로움과 마지못한 심정을 느낄 수 있었다.여국(黎國)의 대제사장(大祭司)으로서 그녀는 죽을 운명이었지만 영혼이 흩어지지 않았고 천궐국(天闕國) 승상의 딸의 몸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렇게 고민에 빠져 있는데 난폭한 하인이 그녀를 바닥으로 밀어서 넘어뜨렸고 그 바람에 그녀는 침대 가장자리에 머리를 찧게 되었다. 뒤이어 극심한 고통이 느껴지자 낙청연은 저도 모르게 헛숨을 들이키면서 손을 뻗어 머리를 만져봤고 피가 흥건했다.“돼지처럼 무거운데 누가 아씨를 옮기겠습니까? 눈치 좀 챙기세요. 섭정왕부로 시집왔다고 해서 정말 안주인이라도 된 줄 아
등 어멈은 화들짝 놀라면서 말했다.“아이고, 둘째 아씨 손이!”그러면서 등 어멈은 얼른 낙월영을 부축하면서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정말 악독하기 그지없군요. 둘째 아씨의 혼사를 빼앗은 것으로도 모자라 둘째 아씨가 약을 먹여주는데 밀어서 넘어뜨리다니요!”바로 다음 순간, 한 인영이 빠른 걸음으로 방 안으로 들어오더니 잔뜩 긴장한 얼굴로 낙월영의 옆에 섰다.“월영아!”낙월영은 미간을 좁히더니 피로 얼룩진 손바닥을 들어 보았는데 그 모습은 못내 애처로워 보였다.부진환은 낙월영의 손에서 흐르는 피를 보더니 살기 어린 눈빛으로 낙청연을 쏘아보았고 낙청연은 곧바로 입을 열려고 했다.“전…”그러나 해명을 하기도 전에 그녀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우면서 부진환이 억센 힘으로 그녀를 침상 위에서 끌어 내렸다. 바닥에 쓰러져서 몸의 중심을 잡기도 전에 부진환이 매섭게 따귀를 때렸다.그 순간 귓가에서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뺨이 덴 것처럼 뜨거웠고 아렸다.낙청연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낙월영은 부진환의 옷소매를 잡으면서 간청했다.“왕야, 제가 부주의해서 넘어진 것입니다. 언니 잘못이 아닙니다.”등 어멈이 섭정왕에게 고자질했다.“왕야, 제가 똑똑히 보았습니다. 둘째 아씨께서 좋은 마음으로 약을 먹이는데 그 마음을 헤아리지는 못할망정 둘째 아씨를 밀쳤습니다. 둘째 아씨께서 선량하셔서 그냥 넘어가 주려고 하는 것이지,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괴롭힘을 당해서야 되겠습니까?”“둘째 아씨를 데리고 가서 약을 발라주거라.”부진환이 차가운 목소리로 명령했다.“예.”등 어멈은 낙월영을 부축하면서 떠났다.방 안에는 낙청연과 부진환 두 사람만이 남았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눈에는 살기가 가득했다. 그는 자신의 서늘한 손가락으로 그녀의 턱을 힘주어 잡았다. 만약 그가 잡은 것이 낙청연의 목이었다면 그녀는 아마도 숨이 끊어졌을 것이다.“진짜 네가 왕비라도 된 것 같으냐? 월영이가 부탁하지만 않았다면 난 널 죽였을 것이다. 또 한 번
낙요는 눈가가 빨갰지만 눈빛만은 의연하고 차가웠다.방문을 닫은 뒤 그녀는 아직도 쑤시듯 아픈 가슴을 부여잡고 침상으로 돌아와 휴식을 취했다.이 몸으로 환생해서인지 무력을 전혀 쓸 수가 없었다.그녀가 여국에서 모두가 우러러보는 대제사장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풍수와 관상을 보고 점을 치는 능력이 출중한 것도 있지만 혼자서 백여 명을 상대할 수 있을 정도의 대단한 무공 실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었다.거기까지 생각하니 그녀는 자기 몸이 못내 그리워졌다. 어릴 때부터 무공을 배워서 경맥이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강인했으니 다른 사람들이 그녀를 괴롭힐 수 있을 리가 없었다.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의 몸은 이미 좌골양회(挫骨揚灰: 원한이 깊거나 중죄를 저지른 사람이 죽은 후 그 뼈를 갈아서 뿌리는 것)를 당했다.서방(書房)으로 돌아온 부진환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고 마음도 심란했다.소유(蘇游)가 그의 방으로 찾아와 문을 두드렸다.“왕야, 오늘 밤도 그 사람들을 불러 큰아씨께 겁을 줄까요?”그의 말에 부진환의 미간이 더욱 좁혀졌다.“아니, 오늘은 됐다.”어젯밤 그녀를 단단히 혼냈으니 다시 한번 그런 일을 겪는다면 또 자결하겠다고 난리를 칠 게 뻔했고, 혹시라도 진짜 죽기라도 한다면 승상부 쪽에 얘기하기가 껄끄러워진다.소유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알겠습니다.”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렸고 희미한 광선이 방 안으로 쏟아졌다. 어느덧 해가 저물어 있었다.젊고 예쁘장한 계집종이 방 안으로 들어오면서 오만한 태도로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왕비 마마께서는 신선이라도 되려고 그러십니까?”책상다리를 하고 앉은 낙청연이 눈을 떴다. 그녀의 눈빛은 싸늘하고 날카로웠고 그 눈빛에 맹금우(孟錦雨)는 순간 겁을 먹었다.그녀는 손을 휘저으며 밖에 있는 사람을 불러들이더니 일부러 거드름을 피우면서 느긋하게 얘기했다.“왕비 마마께서 온종일 음식을 드시지 않았으니 배가 많이 고플 것이라 하여 왕야께서 자비를 베풀어 이것들을 하사해주셨습니다.”계집종들이
“구했으면 구한 거지 이유가 필요하더냐?”낙청연은 담담하게 대꾸하고는 몸을 돌려 떠나려 했다.그녀가 저 멀리 걸어가자 등 어멈은 오늘 오전에 있었던 일이 떠올라 죄책감이 들었고, 결국 참지 못하고 낙청연을 불러 세웠다.“왕비 마마!”낙청연이 발걸음을 멈추자 등 어멈은 재빨리 그녀에게 다가갔다.“오늘 아침 일은 정말 죄송합니다. 왕비 마마의 시중을 드는 일만 아니었다면 전 이미 저택에서 나갔을 것입니다. 그래서 왕비 마마를 원망하고 분풀이하였습니다.”등 어멈은 고개를 숙인 채로 미안한 듯 얘기했다.그녀는 왕비가 자신을 도와줄 줄 몰랐다. 그녀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자신은 아마도 맹금우에게 맞아 죽었을지도 모른다.게다가 낙청연은 그녀의 빠진 팔을 치료해주었고 소문처럼 그렇게 독살스러운 사람이 아니었다.등 어멈의 말에 낙청연은 그제야 연유를 깨달았고 등 어멈은 그녀에게 충고를 해주었다.“왕비 마마, 이 섭정왕부에서 계속 지내고 싶으시다면 맹금우와는 척을 지지 마셔야 합니다. 맹금우는 저택의 일등 계집종입니다. 내원 관사(內院管事)의 친딸이거든요.”“이미 척을 지지 않았더냐.”이제 와서 얘기해봤자 소용없는 일이었다.등 어멈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낙청연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가서는 목소리를 낮추며 얘기했다.“제가 무심코 들은 얘기가 있는데, 둘째 아씨께서 맹금우에게 한 가지 약속을 했다고 합니다. 둘째 아씨께서 왕비 마마가 되면 건강이 좋지 않아 왕야의 시중을 들 수 없으니 맹금우를 통방으로 삼아 그녀더러 왕야의 시중을 들게 할 것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둘째 아씨와 왕야의 혼례가 성사되지 않았으니 왕비 마마께서 맹금우를 구슬리시려면 맹금우더러 왕야의 시중을 들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왕비 마마께 그렇게 적대적이지는 않겠지요.”등 어멈은 낙청연의 도움에 감사했고 그래서 자신도 그녀를 도와주고 싶었기에 그녀 대신에 방도를 생각했다.등 어멈의 말에 낙청연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녀의 말대로라면 낙월영은 맹금우와 통방을 조건으로 거래를 한 것이었고, 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