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부진환의 맥을 짚어볼 기회가 없었다.그다음 날, 낙요는 서방에서 부진환과 함께 공무를 처리하고 그를 도와 밀보도 보고 읽어도 주었다.진지해진 부진환은 완전히 한 번에 두 가지 일을 거뜬히 처리할 수 있었다.한편으로는 공무를 처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낙요가 읽어주는 밀보를 들었다.비록 이렇게 하니 진도는 빨라졌지만, 책상 위의 공문은 여전히 매우 많았다.저녁 무렵, 저녁 식사 시간이 되어서야 낙요는 소유더러 음식을 가져오라고 분부했다.낙요는 서방에서 부진환과 함께 밥을 먹었다.밥을 먹은 후 계속해서 늦은 밤까지 공무를 처리했다.두 사람은 서방에서 각자 분주히 보냈지만,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서늘한 밤바람이 창문으로 불어 들어오고 촛불은 아른거렸으며 부진환의 눈동자는 반짝반짝 빛났다.낙요는 마직막 밀보를 읽고 찻잔을 들고 한 모금 들이켰다.이윽고 턱을 괴고 부진환을 쳐다보았다. “저는 다 읽었습니다. 당신은 아직 처리할 공문이 많습니까? 일찍 쉬는 건 어떻습니까?”부진환은 고개를 들고 그녀를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다.“아직 조금 남았다. 처리하고 쉬자꾸나.”낙요는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그럼, 여기서 당신을 기다리겠습니다.”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누구야?”문밖에서 잠깐 침묵을 지키더니, 심녕의 목소리가 들렸다,“왕야, 언니가 왕야께 설탕물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왕야께서 서방에서 하루 종일 바삐 보냈으니 좀 마시고 피곤을 푸십시오.”이 말을 들은 부진환은 완곡하게 거절했다. “괜찮다. 본왕은 먹고 싶지 않다.”“언니에게 수고했다고 전하거라.”심녕은 포기하지 않고 몇 마디 더 권했지만, 부진환은 대답하지 않았다.문밖의 사람은 잠깐 서 있더니, 돌아서 가버렸다.심녕은 연신 서방 쪽을 뒤돌아보며 결국 이를 갈더니 화를 내며 떠났다.왕야는 더 이상 그녀를 보고 싶지 않다는 뜻을 명백히 밝히고 있었다.그녀의 언니가 만든 물건도 쳐다보지도 않는다.비로 예전에 왕야의 태도도 매우 차가웠지만
“내일 보자.”부진환은 일어나지 못하자 아예 누워서 차가운 손가락으로 낙요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낮은 목소리 말했다.“본왕은 잠이 오지 않는데 어쩌냐?”낙요는 잠이 왔지만 애써 눈을 떠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그렇다면 조금 더 같이 봅시다.”그러나 부진환은 곧바로 낙요를 안고 몸 아래로 깐 채 낮은 목소리로 귓가에 대고 말했다.“본왕과 다른 것을 해도 좋다.”순간, 간질간질한 기분이 들어 낙요는 심장이 두근거렸다.곧바로 부드러운 입술이 낙요의 입술을 감쌌다.쌀쌀한 저녁, 갑자기 맹렬한 불길이 타올랐다.오랜 시간의 그리움이 화염으로 바뀌어 두 사람 사이를 휘감았다.…날이 밝기 전에 낙요는 그제야 힘이 들어 깊은 잠에 들었다.이른 아침, 심녕이 또 아침을 전하러 왔다,그러나 서방 밖에 있던 소서가 심녕을 막아섰다.“왕야께서 서방에 안 계십니까?”“그런데 왜 저를 막는 겁니까?”“설마 낙운도 서방에 있는 겁니까?”“들어가 보겠습니다!”소서는 단호한 어투로 말했다.“심 낭자, 조금 늦게 오십시오. 왕야께서 막 잠이 들었으니 방해하지 마십시오!”이 말을 들은 심녕은 더욱 화가 났다.막 잠이 들었다는 게 무슨 소리인가?!혼자 서방에 있은 게 아닌 낙운과 함께 밤을 새운 것이다!“들어가겠습니다!”심녕은 억지로 들어가려고 했다.소서는 어두운 안색으로 심녕을 끌고 나갔다.밖의 소란에 낙요는 눈을 떴다.고개를 들어 부진환을 보니, 깨지 않고 깊이 잠든 것 같았다.하여 낙요는 조심스럽게 부진환의 손목을 잡고 맥을 짚었다.부진환의 상황이 심각하다는 게 느껴지자, 낙요는 동공이 흔들렸다.역시나 맥을 짚지 못하게 하는 건 이유가 있었다!부진환은 병이 아니고, 중독된 것도 아닌 이전 부상들의 후유증이었다.이러한 후유증은 세월 따라 하나둘씩 나타나며, 점점 더 많아지고 예측할 수도 없었다.부진환의 몸은, 이미 죽은 몸이었다.약으로 목숨을 부지하지만, 그 부상들은 하나도 치료할 수 없었다.비록 낙요는 부진환의 몸이 이렇게 될 거
두 사람은 서방에서 오후까지 잤다.소서가 정원을 지키고 있어 아무도 방해하지 못했다.그러나 정원 밖에서, 누군가는 급하다 못해 발을 동동 굴렀다.심녕은 종일 정원을 찾아왔지만, 들어가지 못하게 해 화가 잔뜩 난 채로 떠났다.결국 심녕은 심부설의 정원에 찾아갔다.“언니, 지금 차를 마시며 햇볕을 쬘 시간이 어디 있습니까?!”“왕야를 뺏기게 생겼는데!”심부설은 멈칫하더니 조심스레 정원 밖을 훑어보았다.그러고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말조심해라!”“뺏기긴 뭘 뺏기냐, 왕야는 우리의 것이 아니다.”심녕은 어찌할 방법이 없다는 눈빛으로 심부설을 보며 말했다.“정녕 하나도 신경 쓰이지 않는단 말입니까?”“낙운은 엊저녁부터 지금까지 서방에 있습니다!”“소서도 정원을 딱 지키고 있어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그러니 둘이 안에서 무엇을 하는지 뻔하지 않습니까!”“정말 하나도 신경 쓰이지 않는단 말입니까?!”심부설은 미간을 찌푸린 채 말했다.“목소리를 낮추어라.”“왕야는 왕야의 서방에 계신다. 무엇을 하는지 생각할 필요가 뭐가 있느냐.”“우리는 그저 왕야의 부하일 뿐인데, 어찌 간섭한다는 말이냐.”“이 왕부도 왕야의 것이지, 우리의 것이 아니다.”심부설은 속상한 마음에 경쟁도 해보려고 했으나, 그날 낙운의 말에 깨달음을 얻었다.잘 해낼 자신은 없지만, 노력해 보고 싶었다.인연이라면 결국에는 이어질 것이고, 인연이 아니라면 강요해도 소용이 없는 것이다.자신의 것이 아닌 건, 아무리 경쟁해도 빼앗아 올 수가 없는 것이다.그러나 심녕은 심부설의 말을 하나도 듣지 않고 오히려 불만을 표했다.“언니, 어찌 자신을 괴롭히는 겁니까?”“저는 누구보다도 언니를 잘 압니다. 그러니 언니의 생각도 알고 있습니다.”“아무도 왕야 마음속 왕비의 자리를 대신할 수 없지만, 언니는 가능합니다!”“언니는 왕야께서 직접 고르신, 왕비와 가장 닮은 사람입니다! 지금 어찌 낙운을 이렇게 대하는지 모르겠지만, 절대 연모의 감정으로 그러는 건 아닙니다.”“하
노점의 다양한 먹거리를 보자, 입맛이 돈 두 사람은 돌아다니면서 이것저것 샀다.손을 잡고 시끌벅적한 인파 속을 누비며 두 사람은 순간의 행복을 느꼈다.저녁을 다 먹고 나니 시간이 늦어 두 사람은 남은 것을 들고 예전의 그 가게로 향했다.문을 열자, 바닥의 나뭇잎을 저녁 바람에 날렸다.오랜만인지라 또 먼지가 쌓여 쓸쓸한 느낌이 들었다.“정말 오랜만이구나.”가게에 다시 오니 추억이 떠올라 부진환은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그러나 모든 게 변했다.“제가 청소하고 차를 우리겠습니다.”낙요는 급히 물건을 부진환 품에 맡기고 소매를 걷어 올린 다음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부진환은 물건을 놓고 같이 청소하기 시작했다.낙요가 지난번에 와서 청소한 덕분에 먼지와 낙엽을 청소하니 다시 깨끗해졌다.어두컴컴한 정원에 달빛이 비쳤다.낙요는 등불 두 개를 켠 다음 지붕에 걸려고 의자에 올라갔으나, 까치발을 들어도 닿지 않았다.“내가 하마.”부진환은 앞으로 다가가 낙요를 안고 내렸왔다.등롱을 건네받은 부진환은 의자에 올라가 가볍게 등롱을 걸었다.밝고 따뜻한 빛이 순간 퍼졌다.정원의 나뭇가지에 돋은 잎사귀에도 순간 색이 입혀진 것 같았다.등롱을 모두 건 후, 방에 촛불을 밝히자 어둡고 쓸쓸한 정원이 곧바로 따뜻해졌다.정원의 나무 아래에서 물을 끓여 차를 우리자, 차의 향기까지 발산되니 매우 아늑했다.두 사람은 마주 보고 앉아 차를 마시며 바둑을 뒀다.차와 함께 떡을 먹고 쌀쌀한 저녁 바람을 맞았으나 따뜻함이 느껴졌다.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매우 즐거웠다.낮에 온종일 잤던 탓에 두 사람은 자시가 넘어서까지 정원에 누워 손을 잡고 달을 구경했다.미풍에 나뭇가지가 흔들리고, 바닥에 그림자가 비쳤다.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달이 구름 사이로 숨어버렸다.낙요는 차를 한입 마시고 탄식했다.“비가 오네요.”“돌아가는 게 어떻습니까?”부진환은 실눈을 뜨고 밤하늘을 보며 말했다.“종일 같이 있어 준다고 하지 않았냐. 아직 하루가
“내가 고치러 가마.”부진환은 곧바로 방문을 열고 폭우 속으로 뛰어들었다.광풍이 불어 굉음과 함께 정원의 등불이 흔들렸고, 큰비가 내려 앞을 밝혀주지 못했다.낙요는 급하고 세게 오는 비를 보며 불안을 느꼈다.그러고는 다시 정신을 차리고 우산을 찾아 방문을 나섰다.부진환은 사다리와 옥상을 메꾸는 재료를 가져왔다.낙요는 우산을 들고 사다리를 붙잡아줬다.“조심하세요!”낙요는 크게 외쳤지만, 빗물에 목소리조차 묻히고 말았다.부진환은 옥상으로 올라갔다. 큰비에 온몸이 젖었고 앞조차 보이지 않았으며 등불 하나 없이 어두컴컴했다.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듯 비가 퍼부었지만, 부진환은 곧바로 비가 새는 곳을 찾아 고쳤다.그렇게 온몸이 푹 젖어 방으로 돌아가 지붕을 보니, 더 이상 비가 새지 않았다.“제가 뜨거운 물을 끓일 테니 몸 좀 녹이세요. 감기에 들면 안 됩니다.”낙요는 급히 주방으로 향했다.바로 그때, 후원 문밖에서, 우산을 쓴 그림자가 조용히 빗속에 서 있었다.심녕은 정원에 들어가지 않았지만, 불이 켜져 있는 게 보였다.번개가 칠 때, 지붕 위의 익숙한 그림자도 보았다.심녕은 우산을 꽉 잡고 증오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온 저녁 찾은 왕야가 여기에 있었다니!역시 왕야와 낙운은 전부터 알고 있었다!아니면 어떻게 이곳에서 밀회를 하겠는가!심녕은 자신이 소홀했다고 생각했다.그때 낙운을 처음 만났을 때 죽였어야 했다!-낙요는 뜨거운 물을 끓이고 목욕통에 넣었다.부진환은 연신 재채기를 했고, 낙요는 어서 몸을 녹이라고 재촉했다.낙요는 이 틈을 타 방의 누수를 깨끗하게 청소했다.그러고는 숯불을 피웠다.비와 함께 차가운 기운이 풍겼고, 숯불이 타오르자 방안은 곧바로 따뜻해졌다.얼마 지나지 않아 부진환은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그러고는 머리카락을 넘기며 고개를 숙여 몸에 맞지 않은 옷을 바라보았다.“누구 옷이냐? 작아 보이는구나.”낙요는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했다.“작지만 우선 입으세요.”“진소한의 옷입니다.”그때 진소한
낙요는 방문 앞으로 다가가 밖을 보며 말했다.“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 것 같습니다.”“나가보고 오겠습니다.”말을 마친 후, 낙요는 우산을 들고 다시 방문을 나서 빠른 걸음으로 후원에 달려갔다.후원 문을 연 순간, 바닥에 무릎을 꿇은 심녕과 쓰러진 심부설이 보였다.두 사람은 비를 무릅쓰고 있었다.심부설은 비를 너무 맞아 간신히 숨을 내쉬고 있었다.낙요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어떻게 여기까지 찾아온 걸까?하지만 그런 생각을 할 틈도 없이 심부설을 구하는 게 우선이었다.낙요는 앞으로 다가가 심부설을 업고 정원에 들어와 다른 방에 데려갔다.심녕은 뒤를 따랐다.부진환은 방에서 소리를 듣고 의문스러웠으나 옷을 입지 않아 나가지 않았다.심부설을 침상에 눕힌 후, 낙요는 맥을 짚어주며 미간을 찌푸렸다.“이게 뭐 하는 짓이오? 언니의 몸 상태를 모르는 것이오? 어찌 데리고 나와 비를 맞는단 말이오?”낙요는 참지 못하고 심녕을 꾸짖었다.심녕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언니가 왕야를 찾겠다고 해서 나왔소.”“왕야께서 여기에 계신 거, 맞소?”낙요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심녕의 매서운 눈빛으로 보니, 이것도 심녕의 계략이었다.그러나 심녕이 이렇게까지 지켜볼 줄은 몰랐다. 부진환은 하룻밤 부에서 나온 것뿐인데, 여기까지 찾아오다니.“있으면 어떻고, 없으면 또 어떻소? 무슨 상관이오?”“지금 왕야가 어디에 있는지 궁금하단 말이오? 언니 목숨이 위태로운데.”심녕은 매서운 눈빛으로 낙요를 흘겨보았다.“왕야는 절대 이유 없이 사라지지 않소. 당신이 왕야를 데려간 게 분명하오!”“왕야는 쭉 건강이 좋지 않았으니,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절대 가만두지 않겠소!”낙요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당신이 뭔데 이런 말을 하는 거요?”“왕야께서 정녕 무슨 일이 생긴다면, 당신이 간섭할 틈도 없을 것이오.”말을 마친 후, 낙요는 손수건으로 심부설 얼굴의 물을 닦아주었다.“당신!”심녕은 화가 났다.“어서 심 낭자 옷을 갈아입히시오! 꾸
약재를 가진 후, 낙요는 방을 나서고 조심스레 문을 닫았다.그러고는 주방에 약을 달이러 갔다.약을 달이고 방에 들어가자, 심녕이 이미 심부설의 옷을 갈아입혔다.그러나 심부설은 비를 맞아 온몸이 차가웠다.낙요는 또다시 방에 숯불을 피웠다.심녕이 다시 추궁했다.“왕야께서 여기에 계신 게 맞소?!”낙요는 짜증 섞인 듯한 눈빛으로 심녕을 흘겨본 후 말했다.“언니의 생사보다 왕야가 더 중요하단 말이오?”“심녕, 친언니까지 이용하는 것이오?!”심녕은 순간 안색이 어두워졌다.“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오!”낙요는 차가운 눈빛으로 심녕을 보며 말했다.“무슨 말인지는 당신이 제일 잘 알 거요!”심녕은 화가 잔뜩 난 채 문을 박차고 나갔다.낙요는 심녕이 부진환을 찾으러 간 걸 알았지만, 막을 수 없었다.심녕이 심부설을 데리고 이곳에 왔다는 건, 이미 부진환이 여기에 있다는 걸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숯불을 피운 후, 낙요는 침상 옆에 앉아 심부설에게 이불 한 채를 더 덮어주고 손수건으로 젖은 머리카락을 닦아주었다.그렇게 심부설도 서서히 눈을 떴다.“낙 낭자…”심부설은 허약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일어났습니까? 마침 약도 달여졌으니 약부터 드세요.”낙요는 앞으로 다가가 심부설을 부축해 앉혔다.그러고는 약을 먹여주기 시작했다.“뜨거우니 조심하세요.”심부설은 멈칫하더니 약을 먹으며 문밖의 비를 바라보았다.그러면서 무거운 어투로 입을 열었다.“왕야를 찾으러 왔습니다.”“여기에 있는 게 맞습니까?”“비가 세게 오는데 무사합니까?”“왕야도 몸이 좋지 않아 양 의관이 종종 진귀한 약재를 찾아 달여서 먹이곤 합니다.”이 말을 들은 낙요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무사합니다.”“우선 심 낭자 걱정부터 하세요.”“어찌 저녁에 나와 왕야를 찾는 겁니까?”이 말을 들은 심부설은 한시름 놓은 듯하더니 난감한 안색으로 밖을 바라보았다.그러나 심녕은 보이지 않았다.심부설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심녕이 왕야께서 실종되었다고 무슨 일이 생긴
심녕은 저도 모르게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왕야, 어찌하여 이리도 냉정하십니까? 저희는 왕야를 위해 고생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큰 공은 못 세웠더라도 저희가 고생한 건 사실이지 않습니까….”부진환은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그만하거라. 무례를 범하고도 감히 이 나를 협박하는 것이냐?”빗줄기가 가녀린 심녕의 몸을 내리치고 차가운 밤바람이 피부에 스며들었다. 하지만 몸이 시린 것에 비해 시린 마음이 더 아팠다.그녀는 그렇게 한참을 서 있다가 뒤돌아섰다.심녕은 방으로 돌아가지 않고 뒷문을 통해 저택을 나갔다.그리고 비를 맞으며 어둠 속으로 유유히 사라졌다.낙요는 그녀가 떠난 것을 확인하고는 문을 잠그고 방으로 돌아갔다.“심녕이 떠났습니다. 아마 충격이 큰가 봅니다.”낙요가 말했다.부진환은 무표정한 얼굴로 양반다리를 하고 침상에 앉아 있었다. 다만 몸에 맞지 않는 의복차림을 하고 있어서 보고 있자니 웃음이 나왔다.“사람을 그렇게 귀찮게 할 줄 알았으면 애초에 그들 자매를 찾지도 않았을 거다.”낙요는 천천히 그의 앞으로 다가가서 앉았다.“좀 귀찮긴 하네요. 조용히 지내려고 했는데 말이죠.”부진환은 안쓰러운 얼굴로 그녀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속상하게 해서 미안하구나. 오늘은 너랑만 시간을 보내려고 했는데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완벽했던 계획이 일그러진 탓에 부진환의 기분도 좋지 않았다.“가고 싶은 곳이 있느냐? 아무도 우리를 찾을 수 없는 곳으로 가자꾸나.”부진환은 지금 당장 낙요를 데리고 멀리 떠나고 싶은 충동이 일었으나, 그럴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만족의 영토에 가보고 싶습니다. 그곳 경치가 그렇게 좋다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너무 멀어요. 지금 떠나도 아마 몇 달이 걸릴 거라고 하더군요.”“그럼 일정을 조정해서 시간 날 때 한번 가보자꾸나.”“예.”날이 밝기 시작하면서 비가 그치고 화창한 날씨가 도래했다.낙요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을 때는 밤새 내린 비가 다 마른 뒤였다.그녀는 눈을 감고 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