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비…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5황자께서도 왕비께 적지 않은 약을 보내왔었습니다. 지금 이렇게 어려운 상황인데…”“뭘 어쩌겠느냐.” 낙청연은 눈빛이 차가워지더니 큰 발걸음으로 방문을 나섰다.그리고는 부진환의 서방으로 향했다.부진환은 일부러 부운주를 치료해 주지 않는다는 걸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이렇게 하는 건 낙청연을 협박해 천산설련을 얻으려는 것이다. 지금 남각에 가도 아마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그러니 부진환을 찾으러 갈 수밖에 없다!늠름한 몸짓의 부진환이 느긋하게 서방의 의자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손가락은 여유롭게 의자의 손잡이를 두드리고 있었고, 너무 평온하다 못해 산만해 보였다.하지만 낙청연의 눈에는 오만하기 그지없었다.낙청연을 본 부진환은 놀란 기색 하나 없었다. 심지어 의도가 무엇인지도 물어보지 않았다. 마치 모든 걸 꿰뚫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왜 5황자께 약을 써주지 않는 겁니까? 섭정왕부에서 죽으라고 그러는 겁니까?”낙청연은 날카로운 어투로 말했다.부진환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의 차가운 눈동자에는 서늘한 기운이 풍기고 있었다.“운주를 위해 직접 본왕을 찾아오다니. 두 사람, 아주 각별한 사이인가 보구나.”그 의미심장한 어투는 날카롭다 못해 베일 것 같았다.낙청연은 숨이 탁탁 막혀 더는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낙청연이 아니다. 부진환에게 죽기 살기로 매달리며 좋아하지 않는다. 비록 이 몸에 남은 원한과 억울함이 그녀를 괴롭히지만, 이런 감정은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라 생각했다. 낙청연을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를 위해서 이렇게까지 하는 건, 정말 가소로운 일이다!“그럼 말해보시죠. 조건이 무엇입니까?” 낙청연은 차가운 어투로 말했다.“천산설련.”역시, 부진환은 그 이름을 꺼냈다.둘은 서로의 목적을 뻔히 알고 있었다.정말 숨 막힐 정도로 손발이 척척 맞았다.“좋습니다. 드리겠습니다! 지금 당장 5황자를 치료해 주시죠!” 낙청연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승낙했다.낙청연이 과연 이렇게 쉽게 협
그러나 이것은 절대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낙청연은 방 안에 앉아 있었는데 눈꺼풀이 심하게 떨렸다. 초상화를 그리고 싶었는데 도저히 마음이 진정되지 않아 아예 그만뒀다.“왕비 마마, 왜 이렇게 불안해하십니까?”등 어멈이 걱정스레 물었다.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보니 별 하나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밤하늘이 보였다. 낙청연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늘 밤, 낙월영의 상처는 더욱 깊어질 것이다. 네가 보기에 왕야께서는 어떤 반응을 보일 것 같으냐?”등 어멈은 그 말에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그렇다면 왕비 마마께서는 왜 가짜를 주신 것입니까?”낙청연은 참지 못하고 자신의 가슴께에 손을 올렸다. 마치 억울함과 숨이 막힐 듯 답답한 감정을 해소하려는 듯이 말이다.“분이 풀리지 않아 화풀이를 하고 싶었다.”또 원래 낙청연의 화풀이도 해주고 싶었다.부진환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 자신이 연모하는 이를 구하려고 했다. 심지어 낙청연에게 상처를 주고 그녀를 해치면서까지 말이다.그게 너무도 억울했다.그가 그럴수록 낙청연은 낙월영이 잘 지내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낙월영과 부진환 두 사람 모두 자신을 괴롭혔으니 말이다.자신도 편히 지내지 못하는데 두 사람이 편히 지내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말이 끝나자마자 처소 밖에서 통곡하는 소리와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등 어멈은 그 소리에 순간 안색이 돌변하더니 얼른 자리를 옮겨 상황을 살펴보려 했는데 누군가 거세게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온몸에서 분노와 살기를 내뿜고 있는 사람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의 온몸을 휘감은 난폭한 기운은 그를 지옥에서 온 수라처럼 보이게 했고 사람들은 그의 모습에 겁을 먹어 감히 그의 얼굴을 직시할 수가 없었다.낙청연은 몸을 일으켜 방문 쪽으로 향했고 경악한 얼굴로 부진환의 안색을 살폈다. 그는 흉포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는데 눈에는 핏발이 섰고 이마에는 파란 핏줄이 돋아있었으며 미간 사이에는 은은하게 혈선(血線)이 보였다.부진환은 아예 다른
낙청연은 그 말에 피식 웃었다. 그녀는 눈썹을 까딱이면서 부진환을 바라봤다.“천산설련은 이미 왕야께 드리지 않았습니까? 왕야께서 진정 필요하신 건 천산설련이 아니라 제 목숨 아닙니까?”낙청연의 냉혹한 목소리에는 조롱이 섞여 있었다.그러나 그 말투가 부진환의 화를 돋웠는지 부진환은 또 한 번 손을 들어 낙청연의 뺨을 때렸다.“내 앞에서 또 연기를 하는 것이냐! 아니면 태부부에서 너에게 가짜 천산설련을 줬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냐?”비릿한 향을 풍기는 피가 낙청연의 입가에서 뚝뚝 떨어졌다. 피로 얼룩진 그녀의 모습은 비참하기 그지없었다.하지만 낙청연은 정신이 나간 것 같은 부진환의 모습을 보고 냉소를 흘리며 대꾸했다.“왕야, 이렇게 가다가는 곧 죽을지도 모릅니다.”부진환의 눈동자는 더욱 탁해져 있었고 정서적으로도 이성을 잃고 많이 흥분한 모습을 보였다. 그가 갖고 있던 용의 기운도 더는 그를 보호할 수 없었고 상황은 그녀가 상상한 것보다 더욱 심각했다.그러나 부진환의 노여움은 점점 더 정도가 심해졌다. 그는 낙청연이 지금 같은 상황에서도 자신의 화를 돋우고 자신을 도발한다고 생각했다.그는 화가 난 상태에서 명령을 내렸다.“수색하거라!”부진환의 명령을 받은 호위들은 우르르 방 안으로 들어가 방 여기저기를 샅샅이 뒤지면서 수색을 시작했다.낙청연은 바닥에 앉은 채로 호위들의 자신의 방을 뒤지는 것을 보고만 있었다. 그들은 마치 범인의 처소를 뒤지듯 굴었고 왕비의 존엄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등 어멈과 지초는 완전히 겁에 질려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로 낙청연 대신 부진환에게 사정하고 있었다.그러나 온몸에서 살기를 내뿜는 부진환의 눈에는 울먹이고 있는 낙월영의 모습만 보일 뿐이었다.“왕야… 천산설련이 없으면 전 어떡합니까? 제 얼굴 치료할 수 있는 것입니까?”낙월영의 눈물은 멈춘 적이 없었고 그녀가 쓰고 있던 면사포는 이미 눈물로 푹 젖어있었다.부진환의 목소리가 조금은 누그러졌다.“없으면 내가 사람을 보내 다른 곳에서 구해 오게 할
낙청연은 미간이 떨렸다. 부진환의 두 눈에서는 탁한 기운이 물씬 풍겼고 심지어 살벌한 기세까지 섞여 있었다.낙청연은 돌연 은침 하나를 꺼내 들더니 몸을 일으켜 부진환의 목덜미에 침을 꽂았고 부진환은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그러자 주위에 있던 이들의 안색이 달라졌다.“왕야께 무슨 짓을 한 것입니까?”낙월영은 대경실색하면서 화를 냈고 소유는 긴장한 얼굴로 부진환을 부축했다.“무슨 짓을 하신 것입니까?”낙청연은 유유자적한 얼굴로 입가의 피를 닦아내더니 몸을 숙이고 부진환의 손목을 잡아 맥을 짚었다.“왕야께서 정서가 불안정하다는 걸 보아내지 못한 것이냐? 지금 기절시키지 않으면 기혈이 역류해 죽었을 것이다.”부진환의 맥을 낙청연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상초열이 난 것 같기도 하고 화병이 난 것 같기도 했는데 호흡이 흐트러져 있었고 광증이 생긴 것처럼 보였다.하지만 이외에 몸 자체에는 크게 문제가 없었다.광증이라고는 해도 화로 인해 발광하는 정도가 일정한 수준에 이르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여봐라, 왕야를 처소로 옮기거라!”소유가 즉각 분부했다.부진환이 사람들에게 실려 갈 때도 낙월영은 울고 있었다.“왕야…”소유는 그런 그녀를 말렸다.“둘째 아씨, 왕야께서는 많이 피곤하신 것 같으니 오늘 밤은 편히 쉬게 두시지요. 약은 제가 사람을 시켜서 찾아보게 하겠습니다. 여봐라, 둘째 아씨를 모시거라.”낙월영도 돌아간 뒤 소유가 떠나려고 할 때, 낙청연이 그를 불러세웠다.“소유, 내 너한테 할 말이 있다.”소유가 몸을 돌렸다.“왕야의 광증 증상은 아마도 낙월영과 관련이 있는 듯 보이는데, 발견했느냐?”낙청연의 질문에 소유는 놀란 얼굴이었다. 낙청연은 얼굴 전체에 피를 묻히고 있었는데 그런 상태에서도 그녀는 왕야를 걱정하고 있었다.낙씨 가문의 둘째 아씨는 울 줄만 알지, 왕야가 자신을 도와주기만을 바라는데 왕비는 그런 낙청연에 비해 훨씬 나았다.낙청연은 소유가 넋을 놓고 있자 다시 물었다.“설마 왕야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 것이냐?
정신이 몽롱한 와중에 낙청연은 한 번 깨어나서 피를 토했다.다행히도 낙용 고고가 준 약초가 있었기에 그날 밤 상처가 심해지는 것을 제때 막을 수 있었다.다음 날 낙청연이 깨어났을 때 부진환은 아직도 혼미한 상태였다.낙청연은 탁자 옆에 앉아 탕약을 마시고 있었고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양쪽 다 손해인데 그럴 필요가 있겠느냐.”어젯밤 부진환이 그녀를 때렸다고는 하나 그 역시도 자신의 화 때문에 몸이 많이 상한 상태였고 상황이 더욱 심각했으면 목숨을 잃었을지도 몰랐다.부진환은 어젯밤 목숨을 건진 셈이었다.“왕비 마마, 왕야의 병증이 아주 심각한 것 같사온데 왕야께 문안을 가시는 것 어떻습니까?”등 어멈은 낙청연이 공로를 세운다면 부진환이 그녀를 좋게 볼 거라고 생각했다.그러나 낙청연은 그녀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내가 가서 무엇하겠느냐? 왕야는 내가 왕야를 해칠 거라고 생각하고 계신다. 설사 내가 왕야를 구할 것이라는 걸 믿는다고 해도 왕야께서 내가 원하는 걸 준다고 확신할 수도 없지.”그녀는 부진환과 거래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그러나 어머니의 유물을 낙청연은 지금껏 구경조차 하지 못했고 그래서 괜한 짓을 하고 싶지 않았다.약을 마신 뒤 낙청연은 화지를 펴고 붓을 들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등 어멈은 그녀의 곁에서 먹을 갈았다.왕비가 그린 초상화를 봤을 때 등 어멈은 깜짝 놀라면서 말했다.“왕비 마마, 낙태부께서는 이런 초상화를 많이 받으셨습니다. 설마 낙태부의 돌아가신 아드님의 얼굴을 아시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낙태부의 시선을 끌 생각이십니까?”낙청연은 의미심장하게 웃어 보이더니 붓을 내려놓으며 말했다.“이렇게 하면 낙태부의 관심을 끌 수 있지 않겠느냐?”등 어멈은 이목구비가 그려지지 않은 초상화를 보니 곤혹스럽기도 했고 놀랍기도 했다.그녀는 왕비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그 뒤로 낙청연은 몸이 조금 나아지자 자주 밖에 나갔고 일부러 낙월영과 부진환을 피해 다녔다.그녀는 저택의 계
왕야의 병세는 워낙 심각했기에 왕야께서 현저히 나아지기 전까지 소유는 낙월영이 왕야를 만나지 않았으면 했다.왕비의 말이 사실이라는 확실한 증거는 없으나 낙월영을 경계한다고 해서 나쁠 것도 없었다.연일 부진환의 소식이 들려오지 않자 낙청연은 부진환이 병세가 심각해 밖에 피난을 갔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했다.또한 낙청연은 낙월영을 최대한 피하고자 아침 일찍 나가서 저녁 늦게 돌아왔다.넓은 왕부에서 낙월영 혼자 온종일 울고불고 난리를 쳤지만 그녀를 신경 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부진환은 거의 한 달 동안 요양했고 낙태부의 생신 하루 전에 돌아왔다.그날 밤 낙월영은 감히 울지 못했다. 바로 다음 날 낙태부의 생신을 위해 태부부에 가야 했기 때문이다.그러나 낙월영의 얼굴은 아직 낫지 않았기에 어쩔 수 없이 면사포를 쓰고 연회에 가야 했다.오늘 외출할 때 낙청연은 부진환과 낙월영이 출발한 뒤 혼자 출발했다.—태부부에 거의 도착해서 보니 거리 전체가 평소와 달리 떠들썩했고 빈객들이 타고 온 마차들이 거리가 꽉 찰 정도로 가지런히 멈춰 세워져 있었다.낙청연도 미리 마차에서 내려 태부부의 대문을 향해 걸어갔다.얼마 걷지 않았는데 낙해평이 낙월영과 함께 동료 집안의 도령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는 게 보였다.“낙씨 가문의 둘째 아씨께서는 재능과 외모 모두 출중하시다고 들었는데 오늘 보니 과연 명불허전이군요.”사람들은 낙월영을 칭찬하는데 인색하지 않았고 낙해평은 체면이 서는 기분에 얼굴 가득 미소를 띠고 있었다.그러나 낙청연이 그들에게 다가갔을 때, 낙해평의 미소가 돌연 굳었다.낙청연이 여기에 왜 있는 거지? 분명 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왜? 날 망신 당하게 할 생각인가? 불효녀 같으니라고.낙해평은 빠른 걸음으로 낙청연에게 다가가서 목소리를 낮추며 그녀를 힐문했다.“네가 여기는 웬일이냐? 내가 얘기했었잖느냐? 오지 말라고. 얼른 돌아가거라. 오늘이 어떤 자리인지 너도 알고 있겠지. 괜히 사람 창피하게 만들지 말고 돌아가.”낙해평은 목소리를 낮추
들려오는 소리에 사람들은 그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곳에는 단정한 차림새를 한 낙용이 기세 좋게 유유히 걸어오고 있었다.낙용은 대문 쪽으로 걸어와서는 싸늘한 눈빛으로 낙해평을 바라보며 말했다.“승상 대감, 이분은 제가 모신 귀한 손님이십니다.”낙용은 낙청연을 바라볼 때 친절하고 온화한 미소를 띠면서 낙청연의 손을 맞잡았고, 낙청연 또한 자연스럽게 낙용의 팔에 팔짱을 끼면서 다정하게 그녀를 불렀다.“고고.”낙용은 웃는 얼굴로 그녀의 손등을 토닥이며 말했다.“내가 얘기했잖느냐. 넌 오늘 연회에 마음껏 참석할 수 있다고. 누구도 널 막을 수는 없단다.”낙해평은 경악한 얼굴로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그들을 바라봤다.주위의 다른 빈객들도 놀란 얼굴이었다. 그들은 낙태부가 낙 승상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아 한다는 걸 알고 있었고, 기세 넘치고 가차 없는 성정의 낙용이 낙 승상을 고까워하지 않아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그런데 낙 승상의 딸이 낙용을 고고라고 부른 것이다.고고라고 부르는 낙청연의 목소리는 더없이 맑았고, 그녀의 부름에 낙용은 웃음꽃이 피었다.낙해평은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영문을 몰랐다. 왜 이렇게 된 건지, 순간 기뻐해야 할지 화를 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했다.낙용이 자신의 딸을 받아줬다는 것에 기뻤지만 낙청연이 자신 몰래 낙용의 인정을 받았다는 것이 언짢았다.이렇게 큰일을 그한테 알리지 않았다니!낙월영은 안색이 창백하게 질려있었지만 면사포를 쓰고 있었기에 그녀의 표정변화는 뚜렷하지 않았다.낙월영은 곧이어 웃는 얼굴로 낙용에게 다가가 그녀의 팔에 팔짱을 끼려 했다.“고고…”낙청연도 그녀를 고고라고 부를 수 있으니 자신 또한 가능할 것이라 여긴 것이다.그러나 낙용은 안색 하나 바뀌지 않고 자신의 붙잡힌 팔을 거두어들이며 말했다.“다들 넋 놓지 말고 안으로 드시지요.”낙용은 낙월영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비록 팔을 빼내는 동작은 그리 크지 않았으나 태도는 명확했다.낙월영은 체면을 구겼다는 생각에 당장 쥐구멍에라도
낙태부는 그런 것들에 관심이 없었지만 그래도 참을성 있게 그들의 얘기를 들으며 고맙다는 인사를 전했다.비록 겉으로는 아주 만족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나 다들 낙태부가 선물에 크게 관심이 없다는 것을 보아낼 수 있었다.게다가 선물은 대부분 초상화였다. 열어보면 그 내용이 다양했으나 대부분은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 아이를 데리고 있는 모습이었다.그네를 타는 것도 있었고 장난을 치는 것도 있었으며 나무 그늘 밑에 앉아 쉬는 것도 있었다. 초상화들은 전부 훌륭했으나 오래 보고 있으면 평범해 보였다.게다가 낙태부의 방 안에는 이미 백여 개가 넘는 초상화들이 걸려있었다.낙청연도 그 기회를 틈타 누가 준 초상화에 문제가 있는지를 관찰했다.몰랐다면 그냥 지나쳤겠지만 제대로 살펴보니 엉망진창이었다.거의 모든 초상화들에 문제가 있었다.화폭을 여는 순간 두 모자가 불길 속에서 몸부림치면서 미친 듯이 울부짖으며 살려달라고 애원하고 있었다. 비록 작은 소리였지만 귀가 따가웠다.옆에 있던 낙용은 낙청연의 안색이 좋지 않자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무엇을 보아냈느냐?”낙청연은 목소리를 낮춘 채로 낙용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이 초상화를 준 사람들을 전부 기록해두세요. 그리고 조금 이따 어떤 화가가 그렸는지 사람을 시켜 알아보십시오.”낙용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바로 사람을 시켜 기록하기 시작했다.낙청연의 주의력은 줄곧 초상화와 낙태부에게 올려지는 선물들에 있었고 누가 그 선물을 건네는지는 전혀 신경 쓰고 있지 않았다.또 하나의 초상화가 펼쳐지는 순간, 낙청연은 살짝 놀랐다.초상화에는 그 어떤 사악한 기운도 없었고 그저 평범한 초상화 같아 보였다. 한 사람의 얼굴이 그려진 그 초상화는, 지금껏 모자 둘이 유희하는 초상화들보다는 다소 초라해 보여도 그것들 중 가장 사람의 이목을 끌었다.낙청연은 잠깐 놀랐다가 그 초상화를 바친 이가 부진환이라는 것을 깨달았다.“제가 재능이 없어 간단히 아이의 얼굴만 그렸고 사모(師母)님의 얼굴은 그리지 못했습니다.”부진환은 정중
“나는 더 이상 당신의 상대가 안 되오.”낙요는 고개를 돌려 바둑판을 보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당신을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과 함께 바둑을 두며 답답함을 풀기 위해서요.”부진환은 바둑알을 하나하나 거두었다.낙요는 실눈을 뜨고 하늘을 바라보며 손을 뻗었다. 햇빛이 손가락 사이로 새어 나왔다.“그러고 보니, 나의 답답함을 풀 사람은 당신뿐이오.”“심시몽은 어의원의 심사를 통과하고 정식으로 어의원에 들어가게 되었소. 그리고 강소풍의 집안에서도 그들의 혼사를 승낙하여 두 사람은 곧 혼사를 올릴 것이오.”“갑자기 심면과 낙현책도 혼사를 올려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들었소.”부진환이 웃으며 말했다.“일찍이 혼인할 나이가 되었지만, 아이들도 조급해하지 않는데 왜 그렇게 걱정하오?”낙요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여유롭게 말했다.“걱정하지 않소. 대소사를 모두 당신이 걱정하고 있지 않소? 초경의 수위가 있으니, 몇 년이 지나도록 용모가 변하지 않았소. ”“나 같으면 그렇게 걱정을 많이 했으니, 일찌감치 늙었을 것이오.”몇 년 동안 부진환은 그녀를 도와 적지 않은 조정의 일을 분담했다.그녀도 부진환의 동반에 습관이 되었다.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낙요는 자리에서 일어나 부진환을 바라보며 손바닥에 턱을 괴고 물었다.“이 나이가 되니, 아이를 낳지 않은 것을 후회하오?”“걸을 수 없을 정도로 늙었을 때, 다른 사람의 자식들이 단란히 모여있는 것을 부러워할 것이오? ”부진환은 손에 든 물건을 내려놓고 진지하게 그녀를 보며 대답했다.“후회하지 않소.”“사람은 너무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되오.”“게다가 당신은 여제요. 당신이 늙었다고 해도 누가 감히 푸대접하겠소?”“당신이 조용히 지내는 것이 좋다고 하면 난 당신과 함께 있을 것이오. 초경의 수위로 늦게 늙는다고 하지 않았소? 앞으로 당신이 늙으면 내가 당신을 부축하고 업고 다닐 것이오.”낙요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참 좋소.”이듬해 가을.심시몽은 강소풍과 혼사를 올렸고 어의원 5품
강소풍은 고개를 끄덕이다 다급히 고개를 저으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아니오. 그런 뜻이 아니오. 어머니께서는 마음에 들어 하셨소.”설명할수록 강소풍은 상황이 복잡해지는 것 같았다.심시몽은 어두운 표정을 지었지만, 여전히 그를 위로했다.“자네의 뜻을 알고 있소. 설명할 필요 없소.”“시몽... 미안하오! 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오. 방법을 강구하여 어머니에게 자네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줄 것이오. 분명 어머니도 자네를 받아들일 것이오. ”그 말에 심시몽은 살짝 놀라 의아한 듯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나와 헤어지려는 것이 아니었소?”심시몽은 강소풍이 특별히 그녀를 찾아와 이 일을 설명하는 것을 보고, 그녀와 연을 끊으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아니요. 그럴 리가 있소.”“나는 단지 이전의 약속을 지킬 수 없을 뿐이오. 이번 달 안에 혼담을 꺼낼 수 없을 텐데, 나를 기다려줄 수 있소?”“말재주가 좋지 않아 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소. 어머니께서는 자네가 연약하고 힘없다고 생각하시오. 앞으로 내가 출정하면 자네가 홀로 집안을 지킬 텐데, 우리에게 좋지 않은 선택이라 생각하시오. ”이 말을 듣고 심시몽은 대충 뜻을 알아차렸다.“어머니께서는 문무를 겸비한 며느리를 원하고, 자네와 함께 전쟁터에 나가서 떨어져 있지 않아도 되기를 원하시오.”“나는 비록 무공을 할 줄 모르지만, 그래도 해낼 수 있소.”고개를 들어 올린 심시몽의 눈빛은 밝았다..강소풍은 놀라기도 했고 기쁘기도 했다.“정말이오? 여전히 나와 함께 있고 싶소? 포기하지 않을 것이오?”심시몽은 고개를 끄덕였다.“나를 위해 그렇게 많은 일을 했는데, 어찌 쉽게 포기할 수 있소? 자네가 포기하더라도 나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오.”“강가는 장군 집안이라 분명 우리 언니와 같은 여인을 좋아할 것이오. 난 비록 언니와 비길 수 없지만 그래도 노력할 것이오.”“여제께서 나에게 약옥을 주었소. 만약 순 의원과 의술을 배울 수 있다면 어의원에 들어갈 기회가 있소.”“성공
이 말을 듣고 심시몽은 약간 의아해했다.“공주는 저를 탓하지 않습니까...”“그분은 공주시다. 천하를 품고 있는데, 어찌 네가 범한 작은 잘못을 추궁할 리 있냐?”“지금 너의 변화를 보면 공주도 더 이상 너를 탓하지 않을 것이다.”“하지만 차려야 할 예의는 없어서는 안 된다. 시간이 나면 공주에게 감사하다고 인사를 전하거라.”심시몽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예. 내일 가겠습니다.”“저는 먼저 약옥을 넣고 의관에 가겠습니다.”심시몽은 기쁜 마음에 빠른 걸음으로 달려갔고, 의기양양한 분위기를 풍겼다. 조금도 방금의 의기소침함이 없었다.심면도 기뻤다.모두가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은 것 같다.하지만 그와 동시에, 강소풍이 집에서 어머니와 싸우고 있었다.“안 된다고 하면 안 되는 것이다! 너를 현학서원에 보내 양성하는 것도 앞으로 네가 큰 성과를 거둘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러니 너도 마땅히 너와 어울릴 만한 부인을 얻어야 한다. 너와 전장을 누비며 적을 죽이는 그런 사람 말이다.”“힘없이 연약하게 집안에서 서방이 돌아오기를 손꼽아 기다리는 그런 평범한 아가씨는 안 된다.”“이전에 그 심시몽을 위해 집안의 빙천영지를 훔쳤고, 심지어 벌을 받고도 물건이 어디로 갔는지 말하려 하지 않았다. 난 그때부터 심시몽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그런데 지금 그 아이와 혼사를 올리려는 것이냐?”“말도 안 된다!”강부인은 단호한 태도로 조금도 말을 바꾸려 하지 않았다.강소풍은 내키지 않는 듯 반박했다.“심시몽이 평범하다니요? 어떻게 평범하다는 말입니까? 심시몽은 그저 무공이 부족할 뿐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무예를 익혀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하물며 그녀의 언니는 이미 태자로 봉해졌습니다. 그러니 심시몽도 좋은 아가씨라는 것을 설명할 수 있지 않습니까?”강부인은 콧방귀를 뀌었다.“언니는 언니이고, 심시몽은 심시몽이다. 어찌 동일하게 논할 수 있겠냐?”“강가는 권세에 빌붙지 않고, 심시몽의 언니가 태자라는 것을 봐서 그녀를 맞이하려
“나중에 자네가 신의가 될지도 모르오.”심시몽이 웃으며 말했다.“자네의 좋은 말대로 되길 바라오.”모두 술을 마시며 음식을 먹고 있었다. 심면이 임계천에게 물었다.“자네는? 어디로 가고 싶소?”“나라에 보답할 수 있다면 어디든 좋소.”임계천이 담담하게 웃었다. 그는 특별히 가고 싶은 곳이 없었기에 그저 궁의 안배를 기다리고 있었다.다들 기분이 좋았고 투지가 넘치고 미래에 대한 동경으로 가득 차 있었다.술을 너무 늦은 시각까지 마셔서 그들은 심가에서 묵었다.오전이 되자, 각 집안의 하인들이 부랴부랴 사람을 찾아왔다. 몇 사람은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되었지만, 여전히 집으로 끌려갔다.궁에서 명을 받았기 때문이다.강소풍은 금군 기사영 통령으로 봉해져 도성과 황궁의 안위를 지키게 되었다.임계천은 형부로 전근되었다.소우청과 봉함선은 수주의 군영 부장군으로 명을 받았다.소우청의 행처는 그의 아버지 소진오가 좋은 경험을 하기를 바라며 부탁한 것이다.낙요는 봉함선이 여인이기에 그녀를 그렇게 멀고 험한 곳으로 보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주동적으로 수주에 갈 것을 청구했다.봉함선이 말했다.“여국은 역대로 여 장군이 없었습니다. 저는 첫 번째 여장군이 되고 싶습니다.”“만약 힘들고 험한 곳이 아니라면 어찌 제가 포부를 발휘할 수 있겠습니까?”낙요는 그녀의 담력과 야심을 높이 사고 그녀의 청을 승낙했다.“나는 네가 여국의 첫 번째 여장군이 되기를 기대한다.”이들 외에 현학서원의 다른 학생들도 그들로 하여금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새로운 행선지를 얻었다.유독 심시몽에 대해, 낙요는 따로 안배를 해주지 않았다.백서가 걱정했다.“어찌 유독 심시몽만 얘기가 없으십니까? 심시몽이 알면 마음이 편치 않을 것입니다.”낙요가 웃었다.“아니다. 이미 심면을 시켜 심시몽에게 한가지 물건을 보냈다.”백서는 살짝 놀랐다.“일찍이 계획이 있으셨군요.”이때의 심시몽은 홀로 넋을 잃고 연못가에 앉아있었다. 그녀의 마음은 마치 흩날리는 낙엽처럼 어수
유생이 드디어 알아차렸다.“그랬구나. 내가 어찌 이걸 잊은 것이냐.”“난 정말 운이 좋은 것 같구나. 이렇게 운 좋게 제사장 자리를 주울 수 있으니.”심면이 답했다.“아닙니다. 전에 제가 청주 전쟁에서 조난했을 때, 제자들을 통솔해 적과 싸우지 않았습니까? 현책보다 능력이 훨씬 뛰어났습니다.”“사저가 소제사장이 되는 것이 가장 적합합니다.”이렇게 칭찬하는 것을 듣고 유생은 쑥스러워하며 낙현책을 힐긋 쳐다보았다.“네가 이렇게 말하면 낙현책이 기뻐하지 않을 것이다.”낙현책이 웃으며 답했다.“그녀가 말한 것은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너는 나보다 대제사장이 더 잘 어울린다.”“나는 무학에서 너보다 좀 나을 뿐이다. 정말 대제사장이 되려면 너보다 잘할지 모를 일이다.”“다만 제사장 일족의 심사에는 이런 것이 없었다.”“하물며 나도 대제사장이 될 생각을 한 적이 없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단지 여제가 기뻐하기를 바랄 뿐이다.”이 말을 듣고 유생은 마음이 놓였다.“불쾌하지 않았다면 다행이구나. 권력과 지위 앞에서 네가 이런 결정을 내릴 수 있다니, 정말 대단하구나!”“한 잔 권하마!”유생이 술잔을 들었다.바로 이때, 갑자기 대문이 열렸고, 사람이 도착하기도 전에 먼저 목소리가 들렸다.“사람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는데, 왜 벌써 마시는 것이오?”“우리를 기다리지 않는다니, 의리가 없소!”몇 사람이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강소풍과 임계천이 술병을 들고 오는 것이 보였다.“오늘 밤 다들 왔구나!”“자, 심면과 유생을 위해 한 잔 하세!”모두 자리에 앉아서 잔을 들어 함께 마셨다.그렇게 한참 마시다 보니 술에 취한 강소풍이 흥분한 듯 입을 열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심가에 겹경사가 닥칠 것이오.”모두 멍해졌다.강소풍은 낙현책과 심면을 바라보았다.“여제가 두 사람의 일을 인정했으니, 언제 혼사를 치르는 것이오?”심면은 갑자기 얼굴을 붉어지며 황급히 강소풍에게 술을 따라주었다.“술을 마셔도 자네의 입을 막지 못한 것이오?”
“저희가 어찌 가족입니까?”“50냥의 이득을 본 걸 후회한다면서요?”이 말이 나오자 다들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그들은 그제야 유생이 그날 밤 그들의 대화를 모두 들었다는 것을 깨달았다.어쩐지 상자를 도둑맞았더라니.유룽은 체면을 깎으며 사과했다.“유생아, 우리는 한 가족이니 티격태격하는 것도 정상이다. 그러나 다들 나쁜 생각은 없다.”“이전의 일은 모두 나의 잘못이다. 이렇게 너희들에게 사과하마!”“오늘 저녁 집으로 돌아가자. 너를 위해 잘 경축해야지 않겠느냐!”둘째아버지와 셋째 아버지도 모두 따라서 사과했다.집안 재산을 나누겠다고 얘기한 그날 그들이 각박한 만큼 지금 아주 자상했다.“유생아, 집으로 가자. 지나간 일은 잊고, 우리 가족 다시 시작하는 게 어떠냐?”“그래. 가족이 함께 지내면 얼마나 시끌벅적하냐? 따로 이곳에서 지내면 쓸쓸하지 않으냐?”“우리 집에 좋은 술도 두 병 간직하고 있는데, 유생을 축하하러 오늘 꺼내마!”유생은 표정을 바꾸지 않고 차분하고 차갑게 말했다.“다들 시간 낭비하지 마십시오.”“집안 재산을 나누고 연을 끊었는데, 어찌 번복할 사람이 있겠습니까?”“잘살든 못살든 더 이상 유가와 관계가 없습니다.”“다들 가시지요. 굳이 우리 집 앞에서 매달리려 한다면, 관아에 신고할 것입니다.”말을 마치고 유생은 방안으로 돌아와 차갑게 문을 닫았다.문밖의 사람들은 후회에 휩싸였다.게다가 둘째는 첫째를 원망하기 시작했다.“형님 탓입니다. 제사장 자리가 발표되기도 전에 넷째네를 쫓아내더니, 지금은 어떻게 하려는 것입니까?”셋째도 불평했다.“유생은 앞으로 대제사장이 될 것이오. 앞으로 유생 덕을 보긴커녕 이렇게 소란을 피웠으니, 앞으로 우리를 난처하게 할 수도 있소...”유롱은 짜증을 참지 못하고 말했다.“어찌 또 내 잘못이 되었냐?”“애초에 심사 결과가 나오자, 다들 하나하나 달려와서 유생네가 끝났다고, 그들 일가를 헛되이 잘해줬다고 하지 않았냐? 너희들이 모두 동의했기 때문에 넷째 일가를 쫓아낸 것이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매우 놀랐다.유가 사촌들은 냉기를 한 모금 들이마셨다.유생도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왜 제가...”왜 낙현책이 아닌가?장 총관이 웃으며 말했다.“어서 명을 받으시지요. 소제사장”유생은 정신을 차리고 마음속으로 미친 듯이 기뻐하며 얼른 명을 받고 고마움을 전했다.장 총관은 자리에 있던 병사들을 힐긋 보고 유생에게 친절하게 물었다.“소제사장,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제가 처리할 필요가 있습니까?”유생은 웃으며 말했다.“필요 없습니다. 고맙습니다!”“어찌 사양하십니까? 제가 필요한 곳이 없다면, 이만 궁으로 돌아가 명을 전해야 합니다.”“예. 바래다 드리겠습니다.”유생은 장 총관을 골목 밖까지 배웅했다. 장 총관이 의미심장하게 일깨워주었다.“아가씨는 아직 소제사장의 권력을 모르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도성에서 제사장의 권력은 여제와 대제사장에 버금갑니다.”“태자와 동등한 권력입니다.”“이런 사소한 일은 직접 처리할 필요도 없으니, 제게 한마디만 분부하면 됩니다.”유생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일깨워 줘서 고맙습니다.”“오늘 여제께서 태자도 정하셨습니까? 심면입니까?”장 총관은 고개를 끄덕였다.“예. 심가에 뜻을 전하고 왔습니다.”장 총관을 떠나보내고 유생은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는 선택받을 줄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분명히 낙현책한테 졌기 때문이다.심면도 태자로 봉해져서 참 좋았다.오늘 밤 심면을 찾아 축하하려면, 이 문제를 빨리 해결해야 한다.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문밖으로 돌아갔다.병사들은 즉시 공손한 태도를 바꾸어 그녀에게 예를 올렸다.“소제사장, 오늘 분명 오해일 것입니다. 저희는 먼저 떠나겠습니다.”유생이 차가운 소리로 호통을 쳤다.“멈추거라!”그들은 뻣뻣하게 자리에 서서 고개를 숙이고 땀을 뻘뻘 흘렸다.제사장의 말 한마디에 그들은 직무를 잃을 수도 있다.“수사를 더 해야 하는 거 아니오? 안 하시오?”“저희가 감히 소제사장의 집을 수색할 용기가 어디 있겠습니까? 오
낙현책은 고개를 끄덕였다.“나도 궁을 나가려던 참이다. 함께 가자.”유생은 단번에 알아차렸다.“심면을 찾으러 가는 것이냐?”“심사 결과가 나온 후, 심면을 만나지 못했구나.”“심면도 무슨 일이 생긴 것이냐?”낙현책은 생각에 잠긴 듯 말했다.“그런가 보구나.”“내가 도울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얘기하거라.”“그래.”두 사람이 함께 궁으로 나온 후 유생은 바로 집으로 돌아갔고 낙현책은 심면의 집으로 향했다.유가의 골목에 도착하자마자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관아의 사람들이 유생의 집 앞을 막고 그녀의 부모님을 잡고 그들을 관아에 데리고 가려 했다.옆에는 그녀의 사촌들이 있었다.안색이 바뀐 유생은 다급히 달려갔다.“그만하시오!”“뭐 하는 것이오?”유생은 바로 부모님을 뒤에 감쌌다.유롱은 화가 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뭐 하냐니? 집안 재산을 나누었으니, 유가와 이젠 연이 없는 것이다. 집안 재산도 주지 않겠다고 했는데, 어찌 유가의 물건을 훔치는 것이냐? 그 상자에는 족히 수십만 냥이 있다!”“감히 너희랑 아무 연관도 없다고 할 수 있느냐?”유생은 그들이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 몰랐고, 관리에게 고소할 줄도 몰랐다.“우리가 훔쳤다는 증거라도 있습니까?”“증거도 없이 저희를 잡다니, 법을 따르셔야죠.”유롱이 노발대발하며 말했다.“유가 사람들이 네가 돌아온 것을 봤다!”“변명하지 말거라. 할 말이 있으면 감옥에 가서 변명하거라!”물건을 잃어버리고 그들이 유일하게 의심하는 사람은 유생이다.대가를 치르더라도 그들은 그 돈을 되찾으려 했다.“내가 돌아갔다고 돈을 훔쳤다는 것입니까? 농이 심하십니다!”“관청에 따라서 갈 수 있지만, 저희 부모님과는 연관이 없습니다. 증거가 없으면 함부로 사람을 잡을 수 없습니다!”유롱이 화를 냈다.“네 아버지와 어머니도 한패다! 당연히 관아로 데려가야 한다!”“나으리, 그들은 수십만 냥을 훔쳤습니다.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닙니다. 나리께서 반드시 돈을 되찾아 주시기를 간청합니다!”
조영궁.심사 결과가 나온 후 오랫동안 기다리던 낙요는 드디어 낙현책이 오는 것을 기다렸다.“여제.”낙현책은 고개를 숙이고 여제를 마주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심사 결과가 나온 지 오래됐는데, 어찌 이제야 나를 찾아온 것이냐? 잘 고려한 것이냐?”낙현책은 고개를 끄덕이며 무릎을 꿇고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여제를 실망하게 했습니다!”이 말을 듣고 낙요는 그의 결정을 알아차렸다.“일단 일어나서 얘기하거라.”낙현책은 무릎을 꿇고 일어나지 않았다.“여제의 가르침을 저버렸습니다. 저는 대제사장 자리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낙요는 다소 실망했지만 그래도 의외는 아니었다.“잘 생각했느냐? 이 일은 번복한 기회가 없다.”낙현책이 세게 고개를 끄덕였다.“오랫동안 심사숙고한 후 내린 결정입니다.”“제가 여제를 실망하게 했습니다.”지금까지 이렇게 노력했고 최종 심사에서 1등까지 하였는데, 여제를 실망하게 했다.낙요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일으켜 세웠다.“실망하지 않았다.”“네 실력은 모두가 다 알고 있다. 어찌 실망했겠느냐? 네가 후회하지 않으면 된다.”“이미 결정을 내린 이상 더 이상 그렇게 많은 생각을 하지 말거라. 마음을 놓고 네 목표를 향해 가거라.”“나는 네 결정을 존중한다!”여제가 화를 내지 않자, 낙현책은 그제야 한숨 돌렸다. 그는 감동에 겨웠다.“고맙습니다.”낙요는 그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그동안 심면을 만나지 않았겠구나? 어서 네 결정을 알리러 가거라.”낙현책은 고개를 끄덕이고 궁을 나갈 준비를 했다.그동안 심면도 고민하고 있었을 것이다. 두 사람에게 있어 정말 어려운 문제였다.누군가는 무언가를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낙현책이 궁을 나서려는데 제사장족 제자가 그를 가로막았다.“유생이 궁에서 자네를 기다리고 있소. 급한 일이 있는 것 같소.”“급한 일? 알겠소.”유생은 그동안 궁에 있지 않았다. 갑자기 궁으로 찾아온 것을 보아, 중요한 일이 있는 듯했다.먼저 그녀를 만나고 궁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