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설아 씨."그는 차설아의 제법 앙상하고 쓸쓸한 모습을 보며 그녀를 뒤쫓았다."또 무슨 일이지?""정말 이대로 가십니까?”"그렇지 않으면?""빨리 가서 형님을 막으세요. 그는 농담이 아닙니다. 전체 전당포, 아니 해안 전체에서 그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당신뿐입니다. 이대로 가시면 미스터 Q, 아니 성도윤 그 나쁜 놈은 정말 죽을 겁니다!”"나쁜 놈이 죽으면 온 세상이 다 기뻐하는 거 아닌가?”"말은 그렇지만 그가 죽으면 마음 아프지 않나요? 무슨 나쁜 후과가 생길까 봐 두렵지는 않아요?”장재혁은 약간 격앙된 어투로 말했다.성도윤은 줄곧 성심 전당포의 적이었고 양방이 싸울 때 그도 주력군이었는데 성가의 사람들에 의해 다리를 다쳐서 지금도 후유증이 남아 있었다.그러니 그도 당연히 성도윤을 미워했다.그러나 지난 4년 동안 그와 함께 지낸 것을 생각하면 성도윤이 그렇게 잔인한 사람이 아니고 이렇게 헛되이 죽을 정도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허허, 내가 괴로울 게 뭐 있어?”차설아는 물감옥을 등지고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바보처럼 군거에 괴로워해야 할까, 아니면 나에게 희망을 주고 다시 실망하게 한 거에 괴로워할까? 또 아니면 그가 나를 포기해서 괴로운 거야?”그녀는 원래 자존심이 매우 강하고 교만한 사람이었다. 처음 상처를 입었을 때 자기 치유로 버틸 수 있었지만 반복해서 같은 사람에게 상처를 받고도 또 마음이 약해지면 그것은 생각이 없는 바보인 거다."당신 말이 맞아요, 그는 속이지 말았어야 했어요. 하지만...어쩌면 그에게 무슨 고충이 있는 것인지도 모르잖아요.어쨌든 당신에 대한 그의 사랑은 진실이잖아요. 그렇지 않다면 그는 당신을 구하기 위해 앞이 막다른 골목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을 겁니다.”"그건 그 자신이 미련한 거야.”차설아는 이를 갈며 눈시울을 붉혔다.바보 같은 남자, 판인 줄 알면서도 달려오다니... 죽든 말든 무슨 상관이야."제가 할 말은 다 했으니 잘 생각해 봐요. 부디 지금, 이
곧이어 차성철의 방탕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하하, 성도윤, 너에게도 오늘이 있을 줄이야, 그때 내가 그렇게 나에게 살길을 달라고 부탁할 때 눈도 깜빡하지 않더니 오늘 이렇게 된 것은 바로 그 응보야!”"다들 쉬지 말고 계속 넣어, 더 많은 것을 넣으라고. 이 건방진 놈에게 죽는 것보다 못하다는 것인지 무엇인지 맛보게 할 거야!”그리고 성도윤의 고통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장재혁은 발을 동동 구르며 차설아의 차가운 뒷모습을 보며 말했다.”정말 오래 버티지는 못 할거에요. 제발 부디 후회하지 않으시길 바라요.”"아, 짜증 나!”차설아는 불평을 늘어놓고는 다시 물 감옥으로 돌아갔다.과연 이미 성도윤의 목까지 물이 차올랐고 뱀의 형태가 간간이 보였다.남자는 괴로운 표정이었고 의기양양하던 얼굴이 일그러진 걸 보니 뱀에게 적잖이 물린 모양이었다."그만해.”차설아가 소리쳤다."왜 또 왔어, 이 아름다운 모습을 너도 보고 싶은 거야?”차성철은 고개를 돌려 차설아를 보며 싱글벙글 웃었다."드디어 이 건방진 놈의 낭패한 꼴을 보았네, 나는 이날을 너무 오래 기다렸어.”"오빠, 부탁이야. 벌은 다 받았으니까 인제 그만 봐줘.”차설아는 눈시울이 붉어졌고 울먹이며 간구했다."너 왜 그래, 방금은 꽤 과단성 있지 않았어? 왜 이런 나쁜 남자 때문에 우유부단 하는 거야...”"그만해, 놔줘. 그는 오래 못 버틸 거야.”"오래 못 버티면 죽으면 되지. 애초에 봐 줄 생각 없었어.”"하지만 난 봐줄 생각이야. 그러니 오빠도 반드시 그를 놓아줘야 해.”"반드시?"차성철은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내가 널 아낀다고 이렇게 위아래가 없어도 되는 건 아니야. 너는 너무 감정적으로 일을 처리해. 내가 오늘 이렇게 하는 목적은 너로 하여금 사랑을 끊게 하기 위함이야...”"그래, 오빠가 놓아주기 싫으면 내가 직접 구해 올게!”차설아는 두말없이 뛰어내렸다.“설아야!”차성철은 차설아가 이렇게 감정적으로 행동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고 황급히 손을 들었다."빨
"쓸데없는 소리 말고 버텨.”차설아는 그렇게 말하고는 자신도 체력이 다해 쓰러졌다.차성철은 결국 마음이 약해져 사람을 보내 차설아와 성도윤을 구해내 기술이 뛰어난 의사를 불러와 전력으로 응급처치를 하였다...이튿날.차설아는 고통 속에서 정신을 차리렷다."드디어 깼구나. 오빠 급해 죽을 뻔했어!”차성철은 차설아의 손을 덥석 움켜쥐고 격동하여 두 눈이 빨개졌다."너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나는 오빠로서 살아있을 필요가 없어...”차설아는 입술이 창백하고 힘이 하나도 없었지만 그 와중에 성도윤 걱정부터였다.“성도윤은 어때?”"성도윤은...”차성철은 눈빛을 반짝이며 화제를 돌렸다. "너는 지금 어때, 두통도 없고 눈도 안 침침해? 잘 볼 수 있겠어?”"난 괜찮아, 그냥 머리가 좀 아플 뿐이야. 말해 봐... 성도윤은 어떻게 됐어?”차설아는 다급한 표정으로 물었다.오빠의 반응을 보면 성도윤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그 사람, 그 사람이 어떤지 나도 잘 몰라.”차성철은 한참을 우물쭈물했지만 여전히 대답이 모호했다.차설아는 더욱 급해졌다. 남자의 손을 꼭 잡았는데 순간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잘 모르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살아있어?”"살기는 살았는데...”"근데?”"아직 혼수상태이고 킹코브라 독에 중독됐는데 안구에 독이 옮은 것 같아... 어쩌면 실명할 수도 있어.”차성철은 말할수록 조심스러워졌다.예전의 성격에 따르면 그는 자신이 과하게 행동했다고 전혀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고 상대가 성도윤이라면 시체가 조각조각 나더라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을 거다.하지만 여동생이 이놈에게 이렇게 신경을 쓰고 심지어 죽음을 무릅쓰고 이놈을 구할 수도 있다는 결심을 보니 만약 성도윤에게 정말 뜻밖의 일이 생긴다면 그는 그가 모처럼 바라던 남매의 정이 끝장나리라 생각했다."뭐, 실명?”차설아은 머리가 윙 했고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성도윤처럼 교만한 사람이 실명한다면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울 수 있다."다 내 탓이야... 내가 왜
성도윤은 전당포 객실에 누워 눈을 질끈 감은 채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다."얼마나 오랫동안 혼수상태에 빠졌어?”차설아는 허약한 몸을 가누고 재빨리 남자의 침대로 다가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성도윤을 보는 순간 눈시울이 붉어졌다.그녀는 아무나 손가락을 조금만 움직여도 죽일 수 있을 만큼 나약한 모습의 그를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너희들은 함께 구조되었으니 사흘은 될 거야.”차성철은 뒤에 서서 양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솔직하게 대답했다."왜 병원에 보내진 않았어? 이런 경우 전문 병원이어야 방법이 있지 않겠어?”"왜 안 보냈냐고?”"내가 처음에는 사람을 보내서 너희들을 병원으로 보냈는데 그 의사들도 어쩔 수 없이 위독하다는 통지를 내렸어. 그리고 내가 큰돈을 들여 전문 의사를 찾아 너희들의 생명을 구한 거야. 그렇지만 말이야...성도윤이 생명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는 그의 운명에 달려 있지.”"허허, 그 말은 나와 그가 당신 생명의 은혜에 감사해야 된다는 뜻인가?”차설아는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녀와 성도윤이 이렇게 되었는데 차성철을 완전히 원망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하지만 이 사람은 자신의 혈육이니 정말 미워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그래서 그녀는 갈등했고 머릿속에 많은 생각이 그녀를 괴롭혔고 고통스러워 죽을 지경이었다.차성철도 바보가 아니니 차설아의 복잡한 감정을 눈치채지 못할 리가 있겠는가? 그의 잘생긴 얼굴도 덩달아 진지해졌다."설아야, 이놈이 도대체 너에게 무슨 짓을 했길래 너는 그에게 이렇게 목을 매는 거야?내가 기억하기론 너를 배신했잖아? 쓰레기 같은 남자를 위해서 네가 오빠와의 관계를 어색하게 만드는 것을 선택할 정도로 정말 가치가 있는 사람이야?”"나는 그에게 목을 매지 않았고 너와의 관계를 어색하게 만들지도 않을 거야. 나는 단지 그가 목숨을 바쳐야 할 정도로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오빠의 방법은 너무 극단적이고 냉혈한 괴물 같아!”큰 눈망울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인 차설아는 참다못해 고개를 들
"앞으로 두 아이가 나를 미워할 것 같은데... 내가 아버지를 죽였다고.”"걱정하지 마, 내가 찾는 의사는 아주 용해. 제때 깨면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했어, 이 녀석은 분명 괜찮을 거야.”차성철은 원래 성도윤을 가만두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그놈이 조카의 친아버지라니 목숨을 살려줄 수밖에 없었다."그러길 바라야지...”차설아는 한숨을 쉬었다.“나 머리가 복잡해서 그러는 데 이 사람이랑 단둘이 있고 싶어.”"그래!"차성철은 고개를 끄덕이며 차설아의 어깨를 툭툭 치며 미안한 말투로 말했다."걱정하지 마, 이 일은 오빠가 잘못했어. 내가 어떻게든 만회할게.”차성철이 방을 나간 후 차설아는 더 이상 이성적이거나 냉담한 척하지 않았다.그녀는 남자의 침대 앞에 쪼그려 앉아 손을 뻗어 남자의 손을 잡았다. 미간에는 걱정이 가득했다."성도윤, 충분히 잤으니까 이제 깨어나야지. 나랑 아이들 모두 네가 깨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어, 그러니 내 말 듣고 깨어나, 응?”“...”성도윤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비록 당신이 매우 냉혈하고 무자비하고 매번 나를 바보로 취급하니 나는 당신을 영원히 미워해야 맞지만 내가 마음이 넓으니 당신이 깨어나기만 하면 우리의 모든 원한을 깨끗이 청산할 기회를 줄게.”“...”성도윤은 여전히 아무 반응 없이 평온하게 누워 있었다.차설아은 절망적이었고 곧 무너질 것 같았다."성도윤, 그만해. 어떻게 하면 깨어날 수 있겠어? 내가 영원히 너를 떠나야 깨어날 거야?”차설아는 눈물을 흘리며 울먹였다. "그래, 약속할게. 너만 깨어나면 다시는 매달리지 않을게. 다시는 네 삶에 나타나지 않을게.”“...”신기하게도 차설아가 그렇게 말하고 나니 성도윤의 굳게 감은 눈꺼풀이 약간 움직이며 반응을 보이는 듯했다.차설아는 깜짝 놀라 멍하니 남자를 바라보았는데 씁쓸하기 짝이 없었다.이게 정녕 하늘의 지시란 말인가.그 둘은 함께 할 수 없는 운명이고 만약 진짜 함께라면 생명의 대가를 치르게 될 거란 말인
차설아가 방에서 나왔을 때 줄곧 밖에서 기다리던 차성철이 보였다."왜 그래? 저놈이 깼어?”"손가락이 움직이는 걸 보니 깨어날 것 같아...“차설아는 애써 감정을 추스르고는 굳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한 가지만 약속해 줄래?”"물론이지, 네가 뭘 요구하든 오빠가 다 들어줄게!”차성철은 하나뿐인 여동생이 그를 미워할까 봐 비굴한 태도로 말했다."성도윤을 잘 치료하고 그를 해치지 말아줘.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원이 달이를 위해서라도 그에게 살길을 열어줘.”차성철을 바라보는 차설아의 눈빛은 강인하고 조금의 양보도 없었다.이런 일련의 일을 겪으면서 그녀는 그녀가 차성철에 대해 아직 충분히 알지 못한다고 느꼈고 오랫동안 헤어진 오빠의 수단이 어떤지도 몰랐다.그래서 아무리 그들이 쌍둥이라고 해도 그녀는 감히 그를 완전히 믿지 못할 것이다."그건...”역시, 차성철은 눈빛을 번쩍이며 망설이는 것 같았다.아마도 그는 처음부터 성도윤을 놓아줄 생각이 없었고 신의를 찾아 치료하려 했다는 것도 단지 차설아를 달래는 계략일 뿐이었을 거다."성도윤의 목숨은 바로 오빠와 나의 남매의 정이야. 그가 죽으면 우리도 관계를 끊는 거야.”차설아는 모질게 말했다.차성철은 눈살을 찌푸리며 격렬한 신경전을 벌인 뒤 차갑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성도윤의 개 목숨보다 남매의 정이 더 중요했다.“고마워.”차설아도 차성철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그럼 부탁할게, 나 먼저 갈게.”"가?"차성철은 여자의 앞을 가로막고 곤혹스러워했다. "이 상황에 어딜 가? 그렇게 그를 신경 쓰면 그가 위험에서 벗어날 때까지 그의 곁을 지켜야 하는 것 아니야?”"아니."차설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나와 그는 공존할 수 없어, 내가 지금 떠나는 게 내가 그를 위해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일이야.”"그럼 어디 가는 거야? 나랑 같이 가는 게 어때, 우린 이제 막 만났어. 난 너랑 헤어지고 싶지 않아...”"걱정하지 마, 오래 떠나지 않을 거야. 우린 아직 할 일이 많
하인은 문밖에 서서 감히 들어가지 못했다."아직 뜨거울 때 약 먼저 드세요. 몸에 뱀의 여독이 남아 있어서 제때 약을 드시지 않으면 독이 재발할지도 모릅니다. 그때가 되면 위험해질 것입니다...”수염이 희끗희끗한 의사도 방문 밖에 서서 간곡히 타일렀다.그는 평생 많은 권세 있는 사람들을 치료해 오며 골치 아픈 환자를 많이 보았지만 성도윤처럼 어려운 환자는 처음이었다.구사일생으로 겨우 목숨을 건졌는데 조금도 협조하지 않고 약도 마시지 않으니 스스로 죽음을 자초한 것이 아닌가!"차설아 어디 있어? 나는 차설아를 만나야 해. 다른 사람들은 모두 꺼져!”성도윤은 닥치는 대로 또 골동품 꽃병을 집어 들고 문 쪽을 향해 세게 내리쳤다.꽃병이 땅에 떨어지려 할 때 차성철이 재빨리 잡으며 차갑게 말했다."미친 것처럼 나댈 거면 당신 성가에 가서 하는 게 좋을 거야. 이 골동품 꽃병은 내가 특별히 사람을 찾아서 구하느라고 돈을 얼마나 썼는데... 부서지면 배상할 거야?”"죽이겠으면 얼른 죽여, 이렇게 모욕하지 말고!”성도윤은 고통스러운 표정이었다."내가 널 모욕한다니? 내가 너를 위해 먹을 것을 제공하고 최고의 의사를 찾아 치료까지 해줬는데 고마워하기는커녕 이런 태도라니...”차성철은 손이 가는 대로 골동품 꽃병을 조심스럽게 놓고 하인이 가지고 있는 탕약을 받아 들고는 손을 흔들어 의사와 하인을 먼저 방에서 나가게 한 다음 천천히 성도윤에게 다가가 손을 들어 남자의 눈앞에서 흔들었다.역시 아무 반응이 없어!"아휴, 일단 약부터 마시고 목숨을 부지하고 보자.”착잡한 심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은 뒤 두 눈에 빛이 없는 성도윤에게 약을 건넸다."꺼져!”짙은 약 냄새를 맡은 성도윤은 팔을 휘둘러 약을 엎을 뻔했다.”차설아는, 만나야 해!”차성철은 민첩하게 피해 겨우 탕약을 지켰다.그도 참다못해 약 그릇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화가 치밀어 성도윤의 목을 움켜쥐었다."뻔뻔하게 굴지 마, 넌 지금 눈이 멀었어. 난 개미 한 마리 잡아 죽이는 것보다 널 목
성도윤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고개를 젖히고 약을 마셨다."이제 왜 아직도 나를 붙잡고 있는지 말해줘.”"차설아가 당신에게 무슨 말을 해서 당신들이 어떤 거래를 한 거 아니야? 도대체 무슨 사이야?”물 감옥에 있을 때 성도윤은 차설아가 이 남자를 오빠라고 부르는 소리를 어렴풋이 들었다.그런데 차설아는 외동이잖아, 왜 갑자기 오빠가 튀어나온 거지?그는 너무 많은 의문을 해결해야 했다. 설령 정말 죽는다고 하더라도 다 알고 죽어야 할 것 같았다."우리가 어떤 관계인지 너에게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너를 살려두고 있는 이유는 내가 너그럽고 관대하기 때문이야. 전당포에 피를 보게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지...”“웃기시네.”"자정 살인마라는 이름이 괜히 붙었겠어? 너는 천성적으로 악마인 사람이고 사람의 목숨을 초개로 여겼잖아. 네 손에 얼마나 많은 목숨이 있는지 너 스스로 잘 알고 있잖아. 그 당시 내가 너희들을 제거한 건 사람들을 위해 해를 제거한 거야. 지금도 그대로일 것이니 절대로 나를 놓아주지 마!”“???”차성철은 화가 나서 언어 조직 능력을 잃었다.그와 성도윤은 몇 년 동안 암투를 벌였지만 지금처럼 그의 머리를 비틀고 싶어 했던 적은 없었다.하지만 동생을 위해서, 어린 조카를 위해서 참아야 했다!"걱정하지 마, 내가 마음이 너른 사람이라고 했잖아, 어떻게 눈먼 사람을 괴롭힐 수 있겠니?”차성철은 억지웃음을 지어냈다. "눈먼 시각장애인아, 오늘 햇빛이 좋은데 내가 너를 데리고 나가서 햇볕을 쬐게 해줄까? 매일 움츠리고 가만히 있으면 네 몸에 곰팡이가 낄까 봐 걱정되는데.”"...”"걱정 마, 내가 잠시 지팡이가 되어줄게.”"...”그리고 기괴한 광경이 펼쳐졌다.한때 해안에서 죽고 못 사는 두 원수가 나란히 옥상에 나타나 삼국 경계로 되는 강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편안한 의자에 누워 유유히 햇볕을 쬐었다.물론 평온함은 차성철만이었고 성도윤은 분노만 있을 뿐이다."도대체 무슨 속셈이야? 얼른 말해!”남자는 주먹을
“그, 그래. 그러는 게 두 사람한테 좋은 거겠지...”소영금은 머뭇거리다가 결국 진무열의 말을 따랐다. 원이는 혼자 큰 병실에 들어갔고 침대에 누워 창밖을 바라보는 성도윤을 발견했다.성도윤은 머리에 붕대를 감고 있었고 얼굴이 창백했다. 살짝 밀어놓으면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상태가 좋지 않았고 몸이 허약해 보였다.성도윤의 두 눈은 초점 없이 허공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카리스마 있고 범접할 수 없는 기운을 내뿜던 눈은 영혼이 빠져나가기라도 한 듯 빛을 잃었다.성도윤을 탐탁지 않아 하던 원이마저 그 모습을 보고 마음 아파했다.‘이 찌질한 아빠를 어쩌면 좋아? 너무 불쌍해 보이잖아. 이러면 뭐라고 할 수도 없어.’혀를 끌끌 차면서 성도윤을 혼내고 싶었지만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원이는 우물쭈물하더니 조심스럽게 성도윤을 불렀다.“저기요.”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던 성도윤은 원이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고개를 돌렸고 눈에 생기가 돌았다.“원, 원이야?”성도윤의 머릿속에 세 식구가 해바라기섬의 바닷가에서 뛰어놀던 화면이 번뜩 떠올랐다.“이제는 제가 누군지 아시나 봐요?”원이는 무뚝뚝하게 대답하려고 했지만 자신을 알아봐 준 성도윤한테 그러고 싶지 않았다.“당연하지. 너는 내 아들이잖아. 원이야, 이리 와.”성도윤은 감격스러운 어조로 말하면서 침대에서 내려오려고 했다. 원이를 안아주고 싶은 마음과 달리,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성도윤은 밀려오는 통증에 상처 자국을 움켜쥐고 인상을 찌푸렸다. 원이는 재빨리 침대맡으로 다가가서 말했다.“수술받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침대에서 내려와요? 얼른 누우세요. 일단 하고 싶은 말만 하시고요.”어린 원이는 어른처럼 사뭇 진지하고 엄숙한 어투로 당부했다. 그러고는 작은 손으로 성도윤의 손등을 살며시 어루만졌다.“그래. 먼저 너랑 얘기를 나누는 게 좋겠어.”성도윤은 원이의 말대로 자리에 누우면서 미소를 지었다. 원이의 작은 손이 성도윤의 손등에 닿을 때, 따뜻한 기운이 스며들면서 성도윤에게 살아갈 희망을 주
소영금은 보디가드를 뒤로하고 원이와 함께 성도윤이 있는 병실로 향했다. 병실의 문을 열려던 소영금은 다시 손을 거두었다.“할머니, 왜 그러세요? 어서 들어가요.”원이는 큰 눈을 깜빡이면서 소영금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네 아빠가 수술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어. 의식이 돌아오긴 했지만 아직도 회복 중이야. 도윤이가 너를 보고 더 충격받으면 안 되는데...”소영금은 성도윤이 늘 걱정되었다.뇌수술이 순리롭게 끝났지만 의식을 되찾은 성도윤은 슬픔에 잠겨 창밖을 종종 내다보곤 했다. 작은 곳에 자신을 가두어 놓고 외부와 접촉하려고 하지 않았다.그래서 소영금은 성도윤이 과거에 있었던 일들을 다시 기억해 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원이와 만나게 했다가 자칫 상태가 악화하면 자극받은 성도윤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할머니는 아들을 그렇게 못 믿으세요? 생각보다 강한 사람일 거예요. 그리고 제가 괴물도 아닌데 왜 저를 보고 충격을 받겠어요? 만약 이번 만남으로 인해 충격받고 쓰러질 나약한 사람이었다면 이렇게 도움을 청하러 찾아오지도 않았을 거예요.”원이는 어린아이답지 않게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성도윤이 나쁜 남자인 건 맞지만 능력 있는 든든한 어른이었다.그렇지 않으면 차설아의 마음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엄마를 사랑한다면서 엄마를 지키지 못한다면... 남자로서 실패한 인생이라고 해야겠지.’“네 말을 들어보니 또 그런 것 같구나.”소영금은 원이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성대 그룹의 대표가 나약한 인간이었다면 진작에 회사를 날렸을 것이다. 소영금이 머뭇거릴 때, 병실 안에서 성도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밖에 누구 있어요?”“보스, 제가 나가볼게요.”병실의 문을 열고 나온 진무열은 소영금과 원이를 보고 환하게 웃었다.“누가 왔나 했더니, 원이 도련님이셨군요! 두 분이 같이 오신 건가요?”“아니. 이 어린아이가 글쎄 여기까지 혼자 왔다지 뭐야? 원이는 너무 똑똑해.”소영금은 말하면서 병실 안쪽을 들여다보더니 말을 이었다.“
“꼬마야, 이곳은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야. 부모님은 어디에 계셔? 당장 돌아가.”키가 훤칠한 보디가드는 무기를 들고 인상을 찌푸린 채 원이를 노려보았다. 소영금은 병실과 엘리베이터 앞, 병원 내부 곳곳에 보디가드를 배정해 두었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많은 인력을 투입한 것이다. 원이는 순리롭게 병원 내부로 들어갔지만 엘리베이터 입구에서 멈춰 섰다.“성도윤이 저의 보호자예요. 얼른 만나게 해주세요. 믿지 못하겠으면 저를 데리고 가주세요.”원이는 덩치가 몇십 배 더 큰 보디가드 앞에서 주눅이 들지 않고 침착하게 말했다.“네 장난에 내가 속을 줄 알아? 감히 성대 그룹의 성도윤 대표님을 만나려고 해? 꼬마야, 장난칠 거면 집으로 돌아가.”보디가드는 원이를 위아래로 훑어보면서 경계하더니 말을 이었다.“이제는 어린아이까지 동원해서 대표님을 해치려고 하는구나. 솔직하게 말하는 게 좋을 거야. 누구의 지시를 받고 여기까지 온 거지? 말하지 않으면 내가 직접 죽여줄게.”보디가드는 어느 가문에서 성씨 가문에 복수하기 위해 어린아이를 보낸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러고는 원이의 어깨를 꽉 붙잡고 허공에 들어 올렸다.“어떤 무기를 갖고 왔는지 당장 말해! 내놓으란 말이야! 이번에는 독약인가?”“이것 좀 놓으세요. 나를 괴롭힌 걸 엄마가 알게 되면 당신들은 무사하지 못할 거예요! 이 손 놓으라고요.”원이는 허공에서 발버둥 치면서 소리를 질렀다. 무슨 일이 생겨도 늘 침착하던 원이는 일을 크게 벌이기 위해 일부러 소란을 피웠다.성도윤이 원이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만날 수 있을 것이다.“조용히 하지 못해? 이 자리에서 당장 죽여줄 수도 있어. 그 입 당장 다물어! 어린놈이 목소리는 왜 이렇게 큰 거야?”보디가드는 다른 환자들의 심기를 건드릴까 봐 원이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이마에서 식은땀이 뚝뚝 떨어졌고 심장이 벌렁거렸다.‘보디가드 경력만 10년이 넘는데 꼬맹이 때문에 벌벌 떠는 꼴이라니... 우스운 모습을 보였어. 이러면 내 체면이 뭐가
하지만 이미 늦가을로 접어든 시기라 쌀쌀해진 날씨와 빨리 지는 해 때문에 이 시간에는 산책로에 사람도 거의 없었다.그런 길을 원이를 데리고 걷던 서은아는 자연스레 발걸음을 늦추며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꼬맹이, 넌 왜 혼자 온 거야? 엄마는? 너 혼자 나가는 데 걱정도 안 해?”“엄마가 사라져서 엄마 좀 찾아달라고 유전학적 아빠 찾아온 거예요.”성도윤이 병원에 입원해있다는 것도 차설아가 성진의 별장에 있다는 걸 알아낸 원이는 어린아이의 몸으로 그 먼 산까지 가서 엄마를 데려오는 건 비현실적일 것 같아 자신의 지원군을 얻기 위해 성도윤이 입원해있는 병원으로 온 것이다.“그런데 네 엄마 아빠는 이미 헤어진 사이잖아. 네 아빠가 엄마를 찾아줄 이유는 없는데 자꾸 이런 일로 아빠 귀찮게 하면...”“당신이 뭔데 의무가 있다 없다 에요, 우리 아빠도 아니면서. 그쪽이랑은 상관없는 사람이잖아요?”“내가 네 아빠랑 무슨 사인지 너도 잘 알잖아.”희미한 가로등 불빛 아래 서서 원이를 내려다보던 서은아의 눈빛이 점점 더 차가워져 갔다.“난 네 아빠랑 곧 결혼할 사람이야. 네 아빠는 네 엄마를 버리고 나랑 결혼하기로 했다고. 그런데도 내가 상관없는 사람이야?”“내연녀라는 말을 뭐 그렇게 거창하게 해요? 아줌마 입으로도 직접 말했잖아요, 곧 결혼할 사이라고. 그럼 아직은 상관없는 사람 맞네요.”어른들보다 더 분명한 사리로 서은아를 상대한 원이는 여전히 표정을 굳히고 있었다.물론 원이도 제 엄마를 버린 아빠를 뼛속 깊이 원망하고 있지만 그래도 내연녀 앞에서만은 밀릴 수가 없었다.아빠가 다른 사람과 결혼하지 않은 이상, 엄마에 관한 일을 책임질 사람은 여전히 아빠였다.“넌 이렇게 똑똑하고 용감한데... 네 엄마는 너무 바보 같아. 이 사회가 얼마나 무서운지도 모르고 이렇게 널 혼자 내보냈으니 말이야. 가장 복잡한 게 인간의 마음인데, 오늘 날 만난 걸 다행으로 여겨. 내가 친절히 가르쳐줄게.”말을 마친 서은아는 순간 눈을 번뜩이더니 원이의 어깨를 잡고 그를
잘생긴 원이의 얼굴을 한참 뜯어보던 간호사는 성도윤과 묘하게 닮은듯한 이목구비에 가십거리를 알아낸 듯 익살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아, 너 대표님 아들이지?! 엄청 똑같게 생겼다!”성도윤의 아들이라는 말을 아주 싫어했던 원이는 미간을 찌푸린 채로 애어른 같은 말투로 말했다.“저는 그분 아들이 아니에요. 그분도 제 아빠가 아니시고요. 그냥 유전자로 엮여있는 것뿐이에요. 자기 아들도 못 알아보는 아빠는 세상에 없잖아요?”“어...”원이의 말에 간호사가 어쩔 줄 몰라 할 때 서씨 집안에서 보내온 영양제를 잔뜩 챙겨 들고 성도윤을 보러 온 서은아가 병원 안으로 들어섰다.성도윤이 깨어났다는 소식만 들었지 그가 차설아를 기억해냈는지에 대해서는 들은 게 전혀 없었기에 서은아는 당장이라도 병실로 달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소영금이 앞뒤로 경호원만 열댓 명을 붙여놓은 탓에 어떻게 들어가야 할지 몰라 답답해하고 있던 와중에 간호사와 얘기 중이던 원이가 그녀의 눈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그제야 방법이 떠오른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아이에게로 다가가 물었다.“꼬마야, 너 나 알아?”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서은아를 힐끗 본 원이는 표정을 찌푸리며 말했다.“알죠, 내 유전학적 아빠한테 들러붙는 여우 아줌마잖아요!”그 말에 화가 치밀어올랐지만 차마 화를 낼 수는 없었던 서은아는 주먹만 꼭 쥐며 말했다.“날 안다니 다행이네, 그럼 잘됐다. 너 아빠 보러 가고 싶은 거지? 아줌마랑 같이 가자.”“싫어요.”똑똑한 원이는 서은아가 이상한 일을 꾸미고 있다는 걸 바로 눈치채고는 단칼에 그녀의 제안을 거절했다.“여우 아줌마는 나 갖다 팔 수도 있는 사람이잖아요. 나한테서 떨어져요!”그 말에 서은아는 당장이라도 아이의 뺨을 때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공공장소라 안간힘을 쓰며 참아냈다.“간호사 누나, 나 빨리 유전학적 아빠한테 데려다주세요.”서은아에게 한마디 하고 난 원이는 기분이 좋아졌는지 고개를 들고 간호사를 보며 말했다.“그래, 나 따라와 아가야.”그런데
드디어 한시름 놓은 차설아가 묻자 달이는 천진한 표정으로 답했다.“그야 오빠가 괜히 어른들 걱정시킨다고 말하지 말라고 했으니까요.”“걱정할 걸 알았으면 혼자 나가질 말았어야지.”차설아는 화낼 새도 없이 김정민을 향해 말했다.“이모, 얼른 원이한테 연락해서 어딨는지 물어봐 줘요.”“전화하고 있는데... 안 받아요.”“위치추적은 돼요?”“워치가 꺼져있어서 그것도 안 돼요.”“괜찮아요, 저한테 방법이 있으니까 노트북 좀 줘보세요.”달이랑 원이를 잃어버렸을 때를 대비해 차설아는 전에 아이들의 워치에 위치추적 어플을 깔아둔 적이 있었다. 그건 핸드폰이 꺼졌거나 배터리가 없을 때도 위치를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어플이었기에 차설아는 빠르게 키보드를 두드리며 마지막 로딩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화면에 원이 위치가 뜰 텐데, 보여요?”“내, 보여요!”눈을 감고도 키보드를 치는 차설아에 놀란 것도 잠시,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는 그녀에 김정민은 다급히 화면으로 시선을 돌리며 답했다.“지금... 재원 병원에 있다고 나오는데요?”“병원이요?”원이의 코딩기술 정도라면 자신의 위치를 알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기에 지금쯤 성진의 별장에 있을 거라 예상했던 차설아는 뜬금없는 위치에 미간을 찌푸렸다.어쩌다가... 재원 병원까지 간 거지?---한편 재원 병원 앞에 서서 몇 번이나 병원 이름을 읽어보던 원이는 틀림없다는 걸 확인한 후에야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작지만 당찬 아이가 씩씩하게 걸어들어오는 모습은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고 지나치던 간호사 하나가 참지 못하고 아이에게 말을 걸어왔다.“아가야, 너 혼자 온 거야? 부모님은 어디 계셔?”“사람 좀 찾으러 왔는데요.”원이는 어른스러운 표정으로 간호사를 보며 말했다.“예쁜 누나, 혹시 성도윤이라는 환자분 어느 병실에 입원해있는지 아세요?”“성 대표님 찾아온 거야?”간호사는 아이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웃으며 알려주었다.“그럼 사람 잘 찾았네. 대표님 며칠 전에 뇌수술 마치고 입원해계신 데 내가 담당
“오빠는 볼일 있다고 나갔는데 민이 이모가 오빠 걱정된다고 아까 찾으러 나갔어요.”제 오빠가 집 밖을 나가는 건 자주 있는 일이라 달이는 차분하게 엄마의 질문에 답했다.달이한테 오빠는 자신이 원하는 곳은 어디든 갈 수 있는 천재였기에 그녀는 오빠가 매일 같이 나가도 한 번도 걱정한 적이 없었다.“뭐? 또 어디 간 거야?”하지만 엄마인 차설아는 잠깐이라도 한눈만 팔면 그 틈을 타 밖으로 나가버리는 원이 때문에 근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하지만 제 몸 하나 가누지 못하는 이 상황에 나가서 아이를 찾을 수도 없었기에 초조해하고 있는데 그때 김정민이 집으로 들어왔다.“아가씨, 오셨어요? 원이 도련님이 또 집을 나가셨어요! 어떡해요? 동네를 한 바퀴 다 돌았는데 어딨는지도 모르겠고...”밥을 하는 사이에 나가버린 원이 때문에 김정민은 아직도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원이가 나가기 전에 무슨 이상한 말을 했다거나 요즘 이상한 행동을 했다거나 한 적은 없었어요?”“별말은 하지 않고 그냥 몰래 나간 것 같아요. 그런데 요즘 아가씨가 영상통화 안 해준다고 아가씨한테 무슨 일이 난 것 같다면서 구하러 가겠다는 말을 한 적은 있어요. 저는 그냥 애니메이션 보고하는 말인 줄 알고 별로 신경을 안 썼었고요.”미간을 찌푸리며 묻는 차설아 김정민은 한숨을 앞세우며 답했다.“다 제 불찰이에요. 원이 도련님은 지능이 남달라서 보통 아이처럼 대하면 안 됐던 건데... 구하러 간다는 말이 장난이 아니었던 것 같아요. 아마 그때부터 계획하고 있었을지도 몰라요...”손을 휘적이며 김정민에게로 다가간 차설아는 그녀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이모 잘못 아니니까 자책하지 마세요. 따지면 제 잘못이죠. 제가 제대로 설명을 안 해서 모두를 걱정시켰어요.”차설아의 반응이 자신의 예상과 달라 이상하다고 느낀 김정민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자세히 보며 물었다.“아가씨, 이 밤에... 왜 선글라스를 끼고 계세요?”“그냥 산 타다가 눈을 좀 다쳐서 시력이 안 좋아졌어요. 병원 가봤는데
“어릴 때부터 지내던 곳이라 이곳 구조는 이미 몸에 익었어요. 눈 감고도 갈 수 있는 길이니까 걱정 마요.”자신이 정말 갈 수 있는 길이기도 했고 또 현이를 걱정시키고 싶지도 않았기에 차설아는 웃으며 말했다.“그, 그럼 조심하세요.”“네, 이제 그만 가봐요.”현이를 향해 손을 저어주던 차설아는 그녀가 떠났음을 확인하고서야 난간을 더듬으며 현관문을 찾아 비밀번호를 입력했다.전부터 감지력과 관찰력이 뛰어났던 차설아는 현이에게 한 말대로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집안으로 정확히 걸어가 문을 열고 오랜만에 익숙한 아이들의 이름을 소리높이 외쳐봤다.“원아, 달아!”“엄마!”차설아의 부름에 2층에 있던 달이는 서둘러 1층으로 뛰어가 그녀의 품에 폭 안겼다.“엄마! 왜 이제야 왔어요! 너무 보고 싶었다고요.”자신에게 애교를 부려오는 예쁜 딸의 머리를 쓰다듬던 차설아는 웃으며 물었다.“엄마 없을 때 떼 안 쓰고 잘 있었어?”“당연하죠. 나 이제 은하수 어떻게 그리는지도 아는데, 얼른 가요! 내가 보여줄게요!”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인 달이는 엄마의 이상함도 눈치채지 못하고 신나서 방방 뛰며 차설아의 팔을 잡고 계단을 올랐다.차설아는 몇 번이나 턱에 걸려 넘어질 뻔했지만서도 달이를 놀래키지 않으려 힘겹게 아이의 방까지 걸어갔다.발 빠르게 며칠 전에 그렸던 그림들을 꺼내온 달이는 칭찬을 바라는듯한 얼굴로 환히 웃어 보였다.“엄마, 이거 내가 그린 은하수예요. 반고흐 할아버지 거랑 비슷하죠? 오빠는 내가 그린 게 더 예쁘다고도 했어요!”“예쁘지, 너무 예쁘다. 우리 달이는 진짜 그림 천잰가 봐.”아무것도 볼 수 없던 차설아는 선글라스를 낀 채로 맞장구를 쳐주고 있었지만 앞으로는 이렇게 환하게 웃는 아이들의 모습도, 아이들이 그린 거, 만든 거 그 어느 것 하나도 볼 수 없다는 생각에 가슴이 점차 저릿해졌다.“엄마는 저녁에 왜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요? 내가 여기에 색깔도 여러 개 섞어놨는데, 선글라스 끼고 있으면 잘 안 보이지 않아요?”천진난만
박서영의 말에 별 의심 없이 약을 받아 마신 성진은 눈이 아픔에도 박서영이 전화를 거는 모습을 보려고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그렇게 점차 의식이 흐려져 가던 성진이 쓰러질 때, 박서영은 수화기 너머의 현이를 향해 다급하게 외쳤다.“현아, 빨리 차설아 씨 모셔와!”의사가 처방해준 약은 눈을 푹 쉬게 하라는 의미에서 수면제의 효과도 같이 내는 약이었는데 그래서 잠시 기절한 것뿐이었다.떠나기 전 성진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싶다던 차설아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박서영이 때마침 성진에게 약을 건넨 것이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현이와 함께 방으로 들어온 차설아가 박서영을 향해 물었다.“어때요? 시력은 회복한 거예요? 배척반응은 없고요?”상처가 아직 다 아물지 않아 선글라스를 낀 탓인지 차설아는 전보다도 더 도도해 보여 전혀 실명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하지만 그녀가 강인해 보이려고 애쓸수록 현이와 박서영은 점점 더 마음이 아팠고 그들의 죄책감도 깊어져 갔다.“회복은 잘 됐는데 오랜만에 눈을 뜨는 거라 눈이 아플 수는 있대요...”침대에 기절한 채 누워있는 성진을 보던 박서영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문제가 하나 생기긴 했는데... 도련님이 워낙 똑똑하셔서 눈만 보고도 차설아 씨 눈이란 걸 알아차리신 것 같아요. 저한테 당장 대학생 찾아오라고 하셔서 급한 대로 일단 약부터 먹인 거예요. 이 약 아니었으면 오늘 진짜 경을 쳤을 거예요.”“그건 내가 미리 대처하라고 했었잖아요. 나랑 눈 비슷한 대학생 찾아두라고. 아직 못 찾은 거예요?”“아니요, 찾긴 찾았는데... 그러면 또 수많은 거짓말을 해야 하니까... 그럴 거면 아예...”박서영은 자신이 내뱉는 말이 터무니없다는 걸 알면서도 입술을 깨물며 나지막하게 말했다.“도련님한테 사실대로 말씀드리고 앞으로 도련님더러 차설아 씨를 보살피게 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절대 안 돼요!”차설아는 역시나 그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진이 성격은 서영 씨가 나보다도 더 잘 알잖아요. 내가 눈을 준 걸 알게 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