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성철은 앞치마를 두르고 부엌에서 분주히 오가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잘한다고는 할 수 없지만 어릴 때부터 채소를 사서 밥을 짓고 옷을 빠는 게 일찍부터 습관이 되었어.”차설아는 벽에 기대어 정신없이 일사불란한 사내를 보며 얼마나 많은 밥을 해 먹었기에 이렇게 능숙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오빠,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말해줘도 돼?”여자가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라도 남자가 드러내고 싶지 않은 아픈 곳을 찌를까 봐.“...”차성철은 칼을 들고 채소를 썰고 있었는데 이 말에 그는 잠깐 멈추어 입술을 오므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어, 불편하면 안 알려줘도 괜찮아. 어차피 지나간 일은 지나간 거고 그렇게 중요한 것도 아닌데 뭐. 진짜 중요한 건 앞으로지!”차설아는 차성철의 기분이 가라앉은 것을 알아채고는 얼른 화제를 돌렸다."괜찮아...”차성철은 담담하게 웃으며 계속 손에 든 채소를 썰며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사람들에게 내 과거를 말한 적이 거의 없어, 하지만 넌 내 여동생이니 네가 알고 싶다면 나는 남김없이 너에게 말할 거야.”"자, 그럼 들어볼게.”차설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들을 준비를 했다.그녀는 이것이 분명 길고 곡절이 많은 이야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난 어릴 때부터 해안의 작은 어촌에서 자랐어. 양아버지와 양어머니는 얌전한 어부였고 집에는 놀고먹는 형이랑 영리하고 철이 든 여동생이 있었지. 내가 철이 들어서부터 나는 내가 양부모님이 주워온 아이라는 것을 알았어. 왜냐하면 내가 입은 옷은 영원히 누더기이었고 음식도 영원히 형과 여동생이 남긴 것만 먹어야 했으니까. 난 고등학교를 마치고 어쩔 수 없이 학교를 그만뒀어. 그때 난 현 전체에서 1등이었고 수학 선생님도 풀지 못하는 문제를 쉽게 풀 수 있었지만 말이야...”차성철이 여기까지 말하자 차설아의 날렵하고 예쁜 눈이 약간 붉어졌다.어떤 사람들의 어린 시절은 평생을 다해 치유해야 하니 말이다.그가 지금 이렇게 승부욕이 강하고 돈, 권력, 성공에 목말라
하지만 결국 차성철의 입에서 어떤 유용한 정보를 얻어내지 못했다."그래, 오빠가 나한테 말 안 하면 내가 직접 확인하는 수밖에!”차설아가 집요하게 말했다.그녀는 지금까지 차가의 몰락은 상업경쟁에서 오는 파산이고 시대와 사회가 초래하는 것이니 남을 탓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지금 보기에 오빠의 신세, 차가의 파산, 심지어 엄마 아빠의 자살도 그렇게 간단하지 않은 것 같았다."이 바보, 조사하고 싶으면 조사해...”차성철은 여유 있게 음식을 요리하면서 의미심장하게 말했다.“때로는 진실에 가까워질수록 고통스러울 때가 있어...”"아니야. 깜깜이 바보 취급을 받는 것이 정말 고통받는 일이라고. 나도 서른이 다 되어가, 이미 온실의 작은 꽃이 아니라고. 나를 그렇게 나약하게 생각하지 마...”차설아는 눈빛이 이글거렸고 눈빛이 굳어졌다. ---차성철이 준비한 만찬이 곧 시작되는데 차설아가 갑자기 신비롭게 변했다."오빠, 잠깐만 기다려. 내가 가서 우리랑 저녁 같이 먹을 사람 한 명 초대할게.”차성철은 눈살을 찌푸리며 내키지 않아 했다.”우리 남매가 처음으로 함께하는 저녁 식사인데 왜 관계없는 사람을 데리고 오려 해?”"아니, 아니, 이 사람은 관계없는 사람이 아니야. 우리 차가에게 중요한 사람이라고. 아마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말해줄 수 있을 거야.”"그렇다면 기꺼이 초대할 테니 얼른 다녀와.”성심 전당포의 식당은 중식 풍이었는데 주홍색 식탁 의자, 강남 풍의 병풍, 선반 위의 청자, 벽면의 수묵화 등은 모두 은은한 조명에 고귀한 멋이 돋보인다.원형 테이블 위에 놓인 진수성찬은 차성철의 걸작들이다.그는 주석에 앉아 이따금 손목시계를 보며 초조하게 기다렸다.무슨 일이지? 동생이 싫어서 일부러 핑계를 대고 도망간 건 아니겠지?"여봐라, 너희는 부두에 가서 내 여동생이 돌아왔는지 안 왔는지 확인해. 만약 아무도 없다면 즉시 그녀를 데려오도록 해.”차성철은 냉랭하게 아랫사람을 향해 명령했다.남자는 아이코닉한 흑백 가면을 쓰고
민이 이모는 차설아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아가씨, 여기가 도대체 어디예요? 저마다 얼굴이 밉살스럽게 생겼는데 위험하지 않을까요?”노인이 차설아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조심스럽게 물었다."민이 이모, 진정하세요. 이곳은 온 해안의 범죄자들이 뒤섞여 무법천지에 속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이 사람 중 누구도 감히 우리를 해치지 못합니다.”"누가 뒤를 봐주나요?”민이 이모가 의심하고 있을 때 차설아는 식당의 두 꽃무늬 통나무 대문을 열고 싱글벙글 웃으며 들어갔다."동생, 드디어 돌아왔구나. 빨리 앉아서 밥 먹자, 음식 식겠다.”성격이 팩한 차성철의 표정은 금세 부드러워졌다.다만 차설아의 뒤를 따르던 민이 이모를 본 그는 순간 경계심을 가졌다."이 사람, 누구야?”성심 전당포는 아무나 와서 구경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곳이었다."이분은 저의 유모 민이 이모야. 우리 어머니가 차가에 시집오셨을 때부터 줄곧 어머니를 가까이에서 돌봤고 내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나를 돌봐주셨어. 나한테 민이 이모는 어머니와 같은 존재야.”차설아는 다정하게 민이 이모의 팔짱을 낀 채 마치 자신의 엄마이기라도 한듯 차성철에게 소개했다."민이 이모... 안녕하세요.”차성철은 민이 이모를 관찰하며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인사했다."너... 성철 도련님이세요?”민이 이모는 너무 놀라 멍하니 자리에 있었고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오는 길에 차설아가 이미 마음의 준비를 하게 했지만 이 순간에도 그녀는 기가 막혔다."민이 이모, 제 이름을 아신다니 그럼 제가 왜 고아가 됐는지도 아시겠죠?”차성철은 매우 격동되었다.그의 양모는 그를 쓰레기 더미에서 주웠다고 주장해 왔지만 지금으로선 그리 단순한 일이 아닐 것이다.그렇지 않으면 양어머니가 공교롭게도 그에게 원래 이름을 지어주셨을 리 없다."성철 도련님, 정말 불가사의합니다. 정말 성철 도련님이세요?”민이 이모의 눈시울이 갑자기 붉어졌고 그 안에는 눈물이 가득 고였다.그녀는 용기를 내어 차성철을 끌고 자세히 들여다보
분위기가 갑자기 굳어지며 슬픈 기운이 감돌았다.차성철은 민이 이모를 향해 말했다.“그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려주시면 안 돼요? 설사 제가 정말 차가에 의해 버림받았다 해도 진실을 알 권리가 있지 않나요.”"아녜요. 성철 도련님, 절대 회장님과 사모님을 오해하지 마세요. 그들은 도련님을 버린 적이 없어요. 그들이 도련님에 대한 마음과 설아 아가씨에 대한 사랑은 똑같습니다. 다만 당시에 확실히 사고가 있었을 뿐이에요...”민이 이모는 근심스러운 얼굴로 마음의 아픔을 참으며 28년 전의 일을 서술하고 있었다."그때 사모님이 아들딸을 임신하여 온 집안이 매우 기뻤습니다. 출산일에 가장 좋은 개인병원을 도맡아 도련님과 아가씨를 맞이했죠. 두 분은 모두 무사히 태어났지만 그날 밤 신생아실에 갑자기 흉악한 사람들이 들이닥쳐 두 사람을 빼앗았습니다. 사모님은 능력의 한계로 아가씨만 보호했고 그 사람들이 도련님을 빼앗아 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죠...”빌어먹을!"그 사람들은 너무 대담한 거 아닌가요. 내 기억으로는 그때가 차가가 가장 빛났던 때였어요. 가문의 지위는 여덟 개 가문의 으뜸이었고 가진 재산은 지금의 성가조차도 따라갈 수 없었죠. 이 사람들이 어찌 감히 그럴 수 있단 말이죠?”"그래, 우리도 알고 싶었어요. 이 사람들이 어떻게 감히!”민이 이모는 이를 갈며 온몸을 떨었다."그때 사모님은 상심이 지나쳐 큰 출혈이 생겨 하마터면 죽을 뻔했고 차가는 모든 힘을 동원하여 성철 도련님을 되찾으려고 했지만 끝내 아무런 소식이 없었습니다...”"그리고 석 달이 지났고 사모님은 도련님에 대한 걱정으로 산후우울증을 겪었고 몇 번이나 자살 시도를 하셨고 회장님은 기업을 경영할 마음이 없었죠. 차가는 그때부터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여러 가문이 불난 틈을 타서 차가의 많은 장사를 빼앗았습니다!”"그리고 전 어촌으로 떠내려가서 부모님이랑 단 한 번도 못 만났다고요?”"아니요.그때 차가는 성가와 사이가 좋았는데 성가는 유일하게 당시 차가를 밟
차성철은 표정이 무거웠는데 다시 한번 교묘하게 이 화제를 피했다.“...”차설아도 이제는 캐묻지 않았다.그녀는 차성철을 핍박하고 싶지 않았는데 차성철의 스트레스가 이미 충분하다고 느꼈다.그리고 모든 진실에 대해서는 그녀가 수단을 취해서 밝혀낼 것이다.차가의 원수는 반드시 갚아야 한다!저녁은 아주 따뜻한 식사였다.차설아는 가슴이 벅차고 따뜻해서 몇 번이고 감동하여 울 뻔했다."오빠가 생겼어요! 나 오빠 생겼어!”가족이 생겼다는 기분은 정말 좋은 것 같았다. 바다 위에 홀로 떠 있는 무인도처럼 더는 홀로 서지 않아도 되었다."차가 저택이 너무 허물어져서 다시 지으려고 해. 그때쯤이면 우리 식구들과 원이 달이 다 함께 살자.”차설아는 차성철 향하여 잔을 들고 말했다."오빠, 집에 돌아온 것을 환영해!”"그래, 드디어 집에 돌아왔네. 미래의 해안은 우리 차가 꺼야!”민이 이모는 진작에 눈물을 글썽였고 줄곧 휴지로 눈물을 닦고 있었다."회장님, 사모님 보셨어요? 성철 도련님이 아직 살아계시다니... 차가의 미래는 밝습니다. 이제 편히 쉬셔도 될 거 같네요...”저녁 식사가 끝날 무렵, 장재혁은 식당 입구에 서서 말을 잇지 못하며 주춤거리는 모습을 보였다.차성철은 일찌감치 그의 그림자를 발견하고는 차갑게 말했다."몰래 밖에 서서 뭐 하는 거야, 무슨 상황이 있으면 빨리 보고하지 않고!”장재혁은 고개를 숙이고 식당으로 들어가 손가락을 떨며 주먹을 쥐었다. "죄송합니다, 형님. 그 짝퉁은 매우 똑똑하고 전혀 속지 않기 때문에 제가 약속을 잡는 건 불가능할 것 같아요...”"쓸데없는 것, 내가 보기에 너는 눈에만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머리도 버려야겠는걸!”차성철은 손에 든 술잔을 들어 장재혁의 머리를 세게 내리치며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예전의 장재혁은 번개같이 날쌔고 살벌하고 단호했는데 이렇게 우물쭈물할 수가 어디 있겠는가?보아하니 그 짝퉁은 정말 아무런 능력도 없는 듯하다. 승냥이 한 마리를 애완견으로 교화시켰으니..."저는 죄
"역시, 이놈은 배신자야. 설아 너는 그것도 모르고 이 자식을 위해 사정하다니!”차성철은 격노하여 책상을 내리치며 문밖의 부하들을 향해 명령하였다."여봐라, 이놈을 끌고 나가 바다에 버려. 내 눈에 보이지 않으면 싫증이라도 나지 않지.”"오빠, 진정해. 왜 또 때려죽이라고 하는 거야?”차설아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상냥하고 점잖은 오빠의 포악하고 잔인한 모습이 낯설지만 어릴 적부터 겪었던 그의 경험을 생각하면 오빠에게 화를 낼 수도 없고 오히려 마음이 더 아파졌다.이럴 때 여동생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이를 포용하고 적절한 시기에 진정제가 되어 통제 불능의 그를 진정시키는 것이다."사실 나는 장재혁이 짝퉁을 만나기를 꺼리는 것이 그의 성품을 더욱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해. 그가 명령에 복종할 줄만 아는 무정한 기계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거지. 그러니 이런 인재는 우리가 잘 활용해야 해.”차설아는 말을 하면서 장재혁 곁으로 다가왔다."안심해요. 내가 장담하죠, 우리가 그 짝퉁을 잡는다고 하더라도 그를 죽이지 않을 거예요. 우리는 그저 그를 찾고 싶을 뿐이에요...”"?”장재혁은 차설아를 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그래요, 이 사람은 전당포뿐만 아니라 나도 속였어요. 그가 도대체 누구이고, 왜 내 감정을 속였는지. 왜 나와 혼인신고를 할 때 또 사라졌는지 알아야겠어요.”이것은 줄곧 차설아의 응어리로 풀지 않으면 평생 그녀를 괴롭힐 것이다."다른 건 확신할 수 없지만, 단 한 가지 확실한 건 가짜 미스터 Q가 당신에 대한 감정은 진짜라는 겁니다. 그는 정말 교만한 사람이고 번거로운 걸 싫어하는 사람이지만 당신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 요리 솜씨를 오랫동안 보완했습니다. 확고한 사랑이 없었다면 버틸 수 없었을 겁니다.”장재혁은 진심으로 말했다.지난 4년 동안 그는 가짜 미스터 Q와 가장 많이 접촉했는데 그 남자는 평소 행방이 묘연했고 보통 휴대전화로만 명령을 내렸는데 때로는 1년에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그런
두 사람은 서재에서 가짜 미스터 Q를 꾀 낼 방법을 상의했다.“말 편하게 해도 괜찮겠지...?”차설아가 조심스레 물었다.“그럼요, 저희 형님 동생 분이신데 당연히 그렇게 하시는 게 맞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형님과는 성격이 매우 다릅니다. 당신은 천성이 착합니다. 그래서 제가 가짜 미스터 Q를 당신 손에 넘기더라도 적어도 그가 너무 심하게 시달리지는 않을 거라고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장재혁이 말했다."무슨 소리야? 마치 우리 오빠가 맹수이고 그 가짜가 무슨 정의의 천사라도 되는 것처럼 그놈이 그렇게 당신이 조심스럽게 지켜줄 가치가 있는 사람이야?”"그럴 만합니다."장재혁은 정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당포의 모든 직원이 나와 같은 선택을 할 것이라고 믿습니다.”"이런... 집단 배반 하는 거야? 그럼 우리 오빠는 어떡해, 전당포는 오빠가 혼자서 일궈낸 것인데 이렇게 쉽게 대체된 거야?”"걱정하지 마세요, 형님은 대체되지 않을 겁니다. 곧 전당포는 예전 모습으로 돌아갈 거예요. 다만 다들 4년 동안의 편안함을 그리워하겠죠.”"그렇게 과장하지 마, 우리 오빠는 당분간 전당포는 예전 사업에 손대지 않을 거라고 약속했어, 지금의 경영방침에 따라 계속 운영할 거야.”"그건 차설아 씨가 아직 형님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셨기 때문이죠...”장재혁은 웃으며 말을 돌린 뒤 휴대전화를 꺼내며 말했다.“제가 이미 가짜 미스터 Q에게 사인을 보냈습니다. 모든 것이 정상이라면 곧 전당포에 올 테니 제발 그의 목숨만은 살려 주세요.”"암호만 보내면 되는 거야? 그렇게 똑똑한데 속지 않는 거 아니야?”"이 암호는 일반 암호가 아니라 긴급 상황일 때만 보내지는 것인데 예전에는 약속대로 나타났기에 형님의 복귀 소식이 전해지지 않는 한 가짜 미스터 Q는 반드시 올 것입니다.”장재혁은 가슴을 치며 자신만만했다.30분 후."저기, 어...”장재혁은 답장을 보고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무슨 일이 있어도 나타나지 않을 거라고 하는데요... 그리고 전당
차설아는 장재혁의 뺨을 세게 때렸다. 인내심이 거의 바닥이 난 그녀는 재촉하며 말했다. "무슨 생각이 있으면 얼른 말해, 우물쭈물하지 말고!”장재혁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가짜 미스터 Q는 정말 신중한 사람입니다. 그는 매번 저와 문자로만 연락하고 번호도 정확한 주소를 추적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가 나타나지 않으면 그를 찾을 수 없습니다. 현재로선 그를 나타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차설아 씨뿐입니다.”"그렇게 대단한 능력은 없을 것 같은데...”차설아는 풀이 죽어 말을 이었다."그때 자리에 나오지 않은 후로 연락이 끊겼는데, 만약 그가 나를 그렇게 신경 썼다면 제대로 된 작별인사도 하지 안 진 않았을 거 아닌가.”"저는 가짜 미스터 Q가 어쩔 수 없는 고충이 있다고 믿습니다...”"그래서, 도대체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거지?”"간단합니다, 저를 따라오세요.”밤의 장막 드리운 후 두 사람은 크고 신비한 성심 전당포를 누비며 굽이굽이 한참을 헤매다가 마침내 가장 외진 마당에서 멈추었다.이 정원은 수백 년 동안 아무도 발을 들여놓지 않은 것으로 추정되며 문 앞에는 거미줄이 처져 있어 부패하고 죄악스러운 냄새가 났다."장재혁, 너... 뭐 하는 거야?”차설아는 입을 삐죽거리며 무의식적으로 뒤로 물러섰다."겁먹지 마세요...”장재혁은 두루마기의 먼지를 털며 담담하게 말했다."이곳은 성심 전당포의 10대 고문 중 하나인 물고문을 하던 곳인데 이미 4년 넘게 아무도 처벌받지 않아 허름해 보이는 것뿐입니다. 예전엔 사람들이 많이 다녀서 시끌벅적했는걸요.”"허허, 10대 고문이라... 시끌벅적했다?”차설아는 너무 의아해서 자신의 침에 숨이 막힐 뻔했다."무슨 영화를 찍는 것도 아니고. 10대 고문은 무슨 10대 고문이야...”"이곳의 고문은 비교적 반인도적이기 때문에 여기에서 일일이 소개하지 않을 겁니다. 이 물고문에 대해 말해 볼 텐데....”장재혁은 감칠맛 나게 설명했다."물고문은 10대 고문 중 가장 가벼운 유
“꼬마야, 이곳은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야. 부모님은 어디에 계셔? 당장 돌아가.”키가 훤칠한 보디가드는 무기를 들고 인상을 찌푸린 채 원이를 노려보았다. 소영금은 병실과 엘리베이터 앞, 병원 내부 곳곳에 보디가드를 배정해 두었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많은 인력을 투입한 것이다. 원이는 순리롭게 병원 내부로 들어갔지만 엘리베이터 입구에서 멈춰 섰다.“성도윤이 저의 보호자예요. 얼른 만나게 해주세요. 믿지 못하겠으면 저를 데리고 가주세요.”원이는 덩치가 몇십 배 더 큰 보디가드 앞에서 주눅이 들지 않고 침착하게 말했다.“네 장난에 내가 속을 줄 알아? 감히 성대 그룹의 성도윤 대표님을 만나려고 해? 꼬마야, 장난칠 거면 집으로 돌아가.”보디가드는 원이를 위아래로 훑어보면서 경계하더니 말을 이었다.“이제는 어린아이까지 동원해서 대표님을 해치려고 하는구나. 솔직하게 말하는 게 좋을 거야. 누구의 지시를 받고 여기까지 온 거지? 말하지 않으면 내가 직접 죽여줄게.”보디가드는 어느 가문에서 성씨 가문에 복수하기 위해 어린아이를 보낸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러고는 원이의 어깨를 꽉 붙잡고 허공에 들어 올렸다.“어떤 무기를 갖고 왔는지 당장 말해! 내놓으란 말이야! 이번에는 독약인가?”“이것 좀 놓으세요. 나를 괴롭힌 걸 엄마가 알게 되면 당신들은 무사하지 못할 거예요! 이 손 놓으라고요.”원이는 허공에서 발버둥 치면서 소리를 질렀다. 무슨 일이 생겨도 늘 침착하던 원이는 일을 크게 벌이기 위해 일부러 소란을 피웠다.성도윤이 원이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만날 수 있을 것이다.“조용히 하지 못해? 이 자리에서 당장 죽여줄 수도 있어. 그 입 당장 다물어! 어린놈이 목소리는 왜 이렇게 큰 거야?”보디가드는 다른 환자들의 심기를 건드릴까 봐 원이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이마에서 식은땀이 뚝뚝 떨어졌고 심장이 벌렁거렸다.‘보디가드 경력만 10년이 넘는데 꼬맹이 때문에 벌벌 떠는 꼴이라니... 우스운 모습을 보였어. 이러면 내 체면이 뭐가
하지만 이미 늦가을로 접어든 시기라 쌀쌀해진 날씨와 빨리 지는 해 때문에 이 시간에는 산책로에 사람도 거의 없었다.그런 길을 원이를 데리고 걷던 서은아는 자연스레 발걸음을 늦추며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꼬맹이, 넌 왜 혼자 온 거야? 엄마는? 너 혼자 나가는 데 걱정도 안 해?”“엄마가 사라져서 엄마 좀 찾아달라고 유전학적 아빠 찾아온 거예요.”성도윤이 병원에 입원해있다는 것도 차설아가 성진의 별장에 있다는 걸 알아낸 원이는 어린아이의 몸으로 그 먼 산까지 가서 엄마를 데려오는 건 비현실적일 것 같아 자신의 지원군을 얻기 위해 성도윤이 입원해있는 병원으로 온 것이다.“그런데 네 엄마 아빠는 이미 헤어진 사이잖아. 네 아빠가 엄마를 찾아줄 이유는 없는데 자꾸 이런 일로 아빠 귀찮게 하면...”“당신이 뭔데 의무가 있다 없다 에요, 우리 아빠도 아니면서. 그쪽이랑은 상관없는 사람이잖아요?”“내가 네 아빠랑 무슨 사인지 너도 잘 알잖아.”희미한 가로등 불빛 아래 서서 원이를 내려다보던 서은아의 눈빛이 점점 더 차가워져 갔다.“난 네 아빠랑 곧 결혼할 사람이야. 네 아빠는 네 엄마를 버리고 나랑 결혼하기로 했다고. 그런데도 내가 상관없는 사람이야?”“내연녀라는 말을 뭐 그렇게 거창하게 해요? 아줌마 입으로도 직접 말했잖아요, 곧 결혼할 사이라고. 그럼 아직은 상관없는 사람 맞네요.”어른들보다 더 분명한 사리로 서은아를 상대한 원이는 여전히 표정을 굳히고 있었다.물론 원이도 제 엄마를 버린 아빠를 뼛속 깊이 원망하고 있지만 그래도 내연녀 앞에서만은 밀릴 수가 없었다.아빠가 다른 사람과 결혼하지 않은 이상, 엄마에 관한 일을 책임질 사람은 여전히 아빠였다.“넌 이렇게 똑똑하고 용감한데... 네 엄마는 너무 바보 같아. 이 사회가 얼마나 무서운지도 모르고 이렇게 널 혼자 내보냈으니 말이야. 가장 복잡한 게 인간의 마음인데, 오늘 날 만난 걸 다행으로 여겨. 내가 친절히 가르쳐줄게.”말을 마친 서은아는 순간 눈을 번뜩이더니 원이의 어깨를 잡고 그를
잘생긴 원이의 얼굴을 한참 뜯어보던 간호사는 성도윤과 묘하게 닮은듯한 이목구비에 가십거리를 알아낸 듯 익살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아, 너 대표님 아들이지?! 엄청 똑같게 생겼다!”성도윤의 아들이라는 말을 아주 싫어했던 원이는 미간을 찌푸린 채로 애어른 같은 말투로 말했다.“저는 그분 아들이 아니에요. 그분도 제 아빠가 아니시고요. 그냥 유전자로 엮여있는 것뿐이에요. 자기 아들도 못 알아보는 아빠는 세상에 없잖아요?”“어...”원이의 말에 간호사가 어쩔 줄 몰라 할 때 서씨 집안에서 보내온 영양제를 잔뜩 챙겨 들고 성도윤을 보러 온 서은아가 병원 안으로 들어섰다.성도윤이 깨어났다는 소식만 들었지 그가 차설아를 기억해냈는지에 대해서는 들은 게 전혀 없었기에 서은아는 당장이라도 병실로 달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소영금이 앞뒤로 경호원만 열댓 명을 붙여놓은 탓에 어떻게 들어가야 할지 몰라 답답해하고 있던 와중에 간호사와 얘기 중이던 원이가 그녀의 눈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그제야 방법이 떠오른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아이에게로 다가가 물었다.“꼬마야, 너 나 알아?”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서은아를 힐끗 본 원이는 표정을 찌푸리며 말했다.“알죠, 내 유전학적 아빠한테 들러붙는 여우 아줌마잖아요!”그 말에 화가 치밀어올랐지만 차마 화를 낼 수는 없었던 서은아는 주먹만 꼭 쥐며 말했다.“날 안다니 다행이네, 그럼 잘됐다. 너 아빠 보러 가고 싶은 거지? 아줌마랑 같이 가자.”“싫어요.”똑똑한 원이는 서은아가 이상한 일을 꾸미고 있다는 걸 바로 눈치채고는 단칼에 그녀의 제안을 거절했다.“여우 아줌마는 나 갖다 팔 수도 있는 사람이잖아요. 나한테서 떨어져요!”그 말에 서은아는 당장이라도 아이의 뺨을 때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공공장소라 안간힘을 쓰며 참아냈다.“간호사 누나, 나 빨리 유전학적 아빠한테 데려다주세요.”서은아에게 한마디 하고 난 원이는 기분이 좋아졌는지 고개를 들고 간호사를 보며 말했다.“그래, 나 따라와 아가야.”그런데
드디어 한시름 놓은 차설아가 묻자 달이는 천진한 표정으로 답했다.“그야 오빠가 괜히 어른들 걱정시킨다고 말하지 말라고 했으니까요.”“걱정할 걸 알았으면 혼자 나가질 말았어야지.”차설아는 화낼 새도 없이 김정민을 향해 말했다.“이모, 얼른 원이한테 연락해서 어딨는지 물어봐 줘요.”“전화하고 있는데... 안 받아요.”“위치추적은 돼요?”“워치가 꺼져있어서 그것도 안 돼요.”“괜찮아요, 저한테 방법이 있으니까 노트북 좀 줘보세요.”달이랑 원이를 잃어버렸을 때를 대비해 차설아는 전에 아이들의 워치에 위치추적 어플을 깔아둔 적이 있었다. 그건 핸드폰이 꺼졌거나 배터리가 없을 때도 위치를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어플이었기에 차설아는 빠르게 키보드를 두드리며 마지막 로딩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화면에 원이 위치가 뜰 텐데, 보여요?”“내, 보여요!”눈을 감고도 키보드를 치는 차설아에 놀란 것도 잠시,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는 그녀에 김정민은 다급히 화면으로 시선을 돌리며 답했다.“지금... 재원 병원에 있다고 나오는데요?”“병원이요?”원이의 코딩기술 정도라면 자신의 위치를 알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기에 지금쯤 성진의 별장에 있을 거라 예상했던 차설아는 뜬금없는 위치에 미간을 찌푸렸다.어쩌다가... 재원 병원까지 간 거지?---한편 재원 병원 앞에 서서 몇 번이나 병원 이름을 읽어보던 원이는 틀림없다는 걸 확인한 후에야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작지만 당찬 아이가 씩씩하게 걸어들어오는 모습은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고 지나치던 간호사 하나가 참지 못하고 아이에게 말을 걸어왔다.“아가야, 너 혼자 온 거야? 부모님은 어디 계셔?”“사람 좀 찾으러 왔는데요.”원이는 어른스러운 표정으로 간호사를 보며 말했다.“예쁜 누나, 혹시 성도윤이라는 환자분 어느 병실에 입원해있는지 아세요?”“성 대표님 찾아온 거야?”간호사는 아이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웃으며 알려주었다.“그럼 사람 잘 찾았네. 대표님 며칠 전에 뇌수술 마치고 입원해계신 데 내가 담당
“오빠는 볼일 있다고 나갔는데 민이 이모가 오빠 걱정된다고 아까 찾으러 나갔어요.”제 오빠가 집 밖을 나가는 건 자주 있는 일이라 달이는 차분하게 엄마의 질문에 답했다.달이한테 오빠는 자신이 원하는 곳은 어디든 갈 수 있는 천재였기에 그녀는 오빠가 매일 같이 나가도 한 번도 걱정한 적이 없었다.“뭐? 또 어디 간 거야?”하지만 엄마인 차설아는 잠깐이라도 한눈만 팔면 그 틈을 타 밖으로 나가버리는 원이 때문에 근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하지만 제 몸 하나 가누지 못하는 이 상황에 나가서 아이를 찾을 수도 없었기에 초조해하고 있는데 그때 김정민이 집으로 들어왔다.“아가씨, 오셨어요? 원이 도련님이 또 집을 나가셨어요! 어떡해요? 동네를 한 바퀴 다 돌았는데 어딨는지도 모르겠고...”밥을 하는 사이에 나가버린 원이 때문에 김정민은 아직도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원이가 나가기 전에 무슨 이상한 말을 했다거나 요즘 이상한 행동을 했다거나 한 적은 없었어요?”“별말은 하지 않고 그냥 몰래 나간 것 같아요. 그런데 요즘 아가씨가 영상통화 안 해준다고 아가씨한테 무슨 일이 난 것 같다면서 구하러 가겠다는 말을 한 적은 있어요. 저는 그냥 애니메이션 보고하는 말인 줄 알고 별로 신경을 안 썼었고요.”미간을 찌푸리며 묻는 차설아 김정민은 한숨을 앞세우며 답했다.“다 제 불찰이에요. 원이 도련님은 지능이 남달라서 보통 아이처럼 대하면 안 됐던 건데... 구하러 간다는 말이 장난이 아니었던 것 같아요. 아마 그때부터 계획하고 있었을지도 몰라요...”손을 휘적이며 김정민에게로 다가간 차설아는 그녀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이모 잘못 아니니까 자책하지 마세요. 따지면 제 잘못이죠. 제가 제대로 설명을 안 해서 모두를 걱정시켰어요.”차설아의 반응이 자신의 예상과 달라 이상하다고 느낀 김정민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자세히 보며 물었다.“아가씨, 이 밤에... 왜 선글라스를 끼고 계세요?”“그냥 산 타다가 눈을 좀 다쳐서 시력이 안 좋아졌어요. 병원 가봤는데
“어릴 때부터 지내던 곳이라 이곳 구조는 이미 몸에 익었어요. 눈 감고도 갈 수 있는 길이니까 걱정 마요.”자신이 정말 갈 수 있는 길이기도 했고 또 현이를 걱정시키고 싶지도 않았기에 차설아는 웃으며 말했다.“그, 그럼 조심하세요.”“네, 이제 그만 가봐요.”현이를 향해 손을 저어주던 차설아는 그녀가 떠났음을 확인하고서야 난간을 더듬으며 현관문을 찾아 비밀번호를 입력했다.전부터 감지력과 관찰력이 뛰어났던 차설아는 현이에게 한 말대로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집안으로 정확히 걸어가 문을 열고 오랜만에 익숙한 아이들의 이름을 소리높이 외쳐봤다.“원아, 달아!”“엄마!”차설아의 부름에 2층에 있던 달이는 서둘러 1층으로 뛰어가 그녀의 품에 폭 안겼다.“엄마! 왜 이제야 왔어요! 너무 보고 싶었다고요.”자신에게 애교를 부려오는 예쁜 딸의 머리를 쓰다듬던 차설아는 웃으며 물었다.“엄마 없을 때 떼 안 쓰고 잘 있었어?”“당연하죠. 나 이제 은하수 어떻게 그리는지도 아는데, 얼른 가요! 내가 보여줄게요!”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인 달이는 엄마의 이상함도 눈치채지 못하고 신나서 방방 뛰며 차설아의 팔을 잡고 계단을 올랐다.차설아는 몇 번이나 턱에 걸려 넘어질 뻔했지만서도 달이를 놀래키지 않으려 힘겹게 아이의 방까지 걸어갔다.발 빠르게 며칠 전에 그렸던 그림들을 꺼내온 달이는 칭찬을 바라는듯한 얼굴로 환히 웃어 보였다.“엄마, 이거 내가 그린 은하수예요. 반고흐 할아버지 거랑 비슷하죠? 오빠는 내가 그린 게 더 예쁘다고도 했어요!”“예쁘지, 너무 예쁘다. 우리 달이는 진짜 그림 천잰가 봐.”아무것도 볼 수 없던 차설아는 선글라스를 낀 채로 맞장구를 쳐주고 있었지만 앞으로는 이렇게 환하게 웃는 아이들의 모습도, 아이들이 그린 거, 만든 거 그 어느 것 하나도 볼 수 없다는 생각에 가슴이 점차 저릿해졌다.“엄마는 저녁에 왜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요? 내가 여기에 색깔도 여러 개 섞어놨는데, 선글라스 끼고 있으면 잘 안 보이지 않아요?”천진난만
박서영의 말에 별 의심 없이 약을 받아 마신 성진은 눈이 아픔에도 박서영이 전화를 거는 모습을 보려고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그렇게 점차 의식이 흐려져 가던 성진이 쓰러질 때, 박서영은 수화기 너머의 현이를 향해 다급하게 외쳤다.“현아, 빨리 차설아 씨 모셔와!”의사가 처방해준 약은 눈을 푹 쉬게 하라는 의미에서 수면제의 효과도 같이 내는 약이었는데 그래서 잠시 기절한 것뿐이었다.떠나기 전 성진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싶다던 차설아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박서영이 때마침 성진에게 약을 건넨 것이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현이와 함께 방으로 들어온 차설아가 박서영을 향해 물었다.“어때요? 시력은 회복한 거예요? 배척반응은 없고요?”상처가 아직 다 아물지 않아 선글라스를 낀 탓인지 차설아는 전보다도 더 도도해 보여 전혀 실명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하지만 그녀가 강인해 보이려고 애쓸수록 현이와 박서영은 점점 더 마음이 아팠고 그들의 죄책감도 깊어져 갔다.“회복은 잘 됐는데 오랜만에 눈을 뜨는 거라 눈이 아플 수는 있대요...”침대에 기절한 채 누워있는 성진을 보던 박서영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문제가 하나 생기긴 했는데... 도련님이 워낙 똑똑하셔서 눈만 보고도 차설아 씨 눈이란 걸 알아차리신 것 같아요. 저한테 당장 대학생 찾아오라고 하셔서 급한 대로 일단 약부터 먹인 거예요. 이 약 아니었으면 오늘 진짜 경을 쳤을 거예요.”“그건 내가 미리 대처하라고 했었잖아요. 나랑 눈 비슷한 대학생 찾아두라고. 아직 못 찾은 거예요?”“아니요, 찾긴 찾았는데... 그러면 또 수많은 거짓말을 해야 하니까... 그럴 거면 아예...”박서영은 자신이 내뱉는 말이 터무니없다는 걸 알면서도 입술을 깨물며 나지막하게 말했다.“도련님한테 사실대로 말씀드리고 앞으로 도련님더러 차설아 씨를 보살피게 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절대 안 돼요!”차설아는 역시나 그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진이 성격은 서영 씨가 나보다도 더 잘 알잖아요. 내가 눈을 준 걸 알게 되
하지만 성진은 차분하고도 사연 있어 보이는 이 두 눈이 자신의 평소 성격과는 너무나도 달라 적응이 되지 않은 건지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다.“너 아빠가 말하는데 대답도 안 하고 뭐 하니? 귀까지 이식해줘야겠어?”“금방 깨어난 애한테 그만 좀 해요. 애가 죽을 때까지 몰아붙이기만 할 거예요?”그때 아들이라면 끔찍이 아끼던 단사란이 성진을 나무라는 성주원을 말리며 아들의 상태를 살폈다.갓 깨어난 아들과 몇 마디 나누던 그녀는 성진이 쉴 수 있게 사람들을 데리고 이내 밖으로 나가 버렸다.마침내 조용해진 주위에 박서영은 조심스레 성진에게로 다가가 말했다.“도련님, 괜찮으세요? 눈은 안 아프세요? 힘드시면 얼른 누워서 쉬세요.”“거울 줘.”“네?”“거울 달라고.”한층 어두워진 표정에 무거운 말투까지 더해지자 박서영은 잔뜩 긴장한 채로 큰 거울 하나를 성진에게 건넸다.거울을 받아든 성진은 빠르게 자신의 눈동자를 바라봤는데 그걸 보자마자 심장이 멎는 것만 같았다.“이 눈...”자신이 출구도 찾지 못하고 빠져서 허우적대던 너무나도 익숙한 그녀의 눈이 제 얼굴에 박혀있는 모습은 너무나도 이질적이었다.“도련님, 무슨 문제라도 있으세요? 오랜만에 본인 모습을 보는 거라 익숙하지 않으실 수도 있지만 선생님이 그건 다 정상적인 반응이라고...”한숨을 쉬던 성진은 박서영의 말을 자르며 차갑게 물었다.“나한테 눈 기증해줬다던 그 여대생 어딨어, 내가 지금 봐야겠어.”자신이 차지하고 있는 두 눈이 그녀의 눈과 너무나도 닮아있어서 성진은 제 생각인지 사실인지 아니면 그저 착각일 뿐인지 당장 확인해보고 싶었다.성진의 말이 끝나자마자 박서영은 시선을 피하며 답했다.“도련님, 그 여대생은 이미 해안시를 떠나서 지금 찾는 건 좀 힘들 것 같아요...”“뭐가 힘든데.”“지금 어딨는지만 알아내. 여기까지 오는 게 힘들다면 내가 가면 되니까. 바로 차 준비하라고 이르고.”“그... 그게...”강압적인 성진의 태도에 박서영은 어찌할 줄 몰라 식은땀만 흘리고 있었
이튿날, 성진이 다시 눈을 뜨는 역사적인 순간을 보기 위해 그의 부모님과 박서영을 비롯한 성대 그룹의 이사진들이 그의 방안에 빼곡히 둘러서 있었다.“이제 붕대 풀 건데 준비되셨어요?”“네.”하얀 가운을 걸친 의사가 진지하게 묻자 침대 끝에 걸터앉은 성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으로는 주먹을 말아쥐었다.그에게 있어서 눈을 뜬다는 건 다시 태어나는 것과 같았기에 지금 그는 이 자리에 선 그 누구보다도 더 흥분하고 있었다.성진의 동의를 구하고 붕대를 풀던 의사는 마지막으로 당부의 말을 덧붙었다.“오랜만에 빛을 보는 거라 처음에는 눈이 아프고 시야도 모호할 수 있어요. 하지만 이건 다 정상적인 현상이니까 너무 당황하지는 마세요. 강한 빛은 막아주는 안경을 따로 맞춰뒀으니까 계속 끼고 계시면 도움 될 거에요.”의사가 말을 마침과 동시에 마지막 한 겹 남았던 붕대가 아래로 흘러내렸고 마침내 성진은 제 부모님과 다른 사람들의 인영을 볼 수 있게 되었다.“진아, 어때? 우리 보여?”“네, 엄마. 엄마가 보여요 이제.”눈물을 흘리는 엄마를 봐서 그런가, 그쪽으로 시선을 옮기던 성진은 자신이 전보다 더 부드럽고 온화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오만방자한 게 디폴트 값이었는데 이상하게 지금은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제 아들의 변화를 눈치챈 성주원은 의사를 보며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내 아들이 눈을 뜬 것뿐인데 왜 성격도 바뀐 것 같죠? 다 큰 성인이 엄마를 보고 울리기나 하고, 전혀 남자답지 않잖아요 지금은!”“이것도 정상입니다...”미간을 찌푸리며 말하는 성주원에 의사는 난처한 기색을 드러내며 공손한 태도로 설명을 해주었다.“도련님이 기증받으신 게 여성분의 눈이라서 여성 특유의 세포나 DNA가 묻어있어요. 그래서 쉽게 공감하시는 걸 겁니다.”“어쩐지 저 눈은 우리 아들 눈빛이 아닌 것 같더라니까요! 이럴 줄 알았으면 기증자를 좀 더 골라볼 걸, 성도윤 그 자식이랑 경영권 싸움을 해야 하는 사내자식 눈이 저래서 어떡해. 웃음거리나 되지 않으면 다행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