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옆에는 동부 인공지능(AI) 개발을 총괄하는 오가미 히가시노무라 이치가 앉아 있었다.이 사람은 전자공학 분야에서 성도윤과 KCL 신임 대표에 버금가는 지위에 있었다.히가시노무라는 야망이 매우 커서 줄곧 대외적으로 확장하고 싶어 했고 그의 연구개발 방향에는 인공지능 외에 전자 칩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아쉽게도 시종 기술의 돌파를 할 수 없었기에 이에 상응하는 과학 기술 제품을 생산할 수 없었고 업계 3위에 머물렀다.그는 연속 10년째 성대 그룹과 KCL의 협력을 깨뜨리려 시도했고 성대 그룹을 대신해 KCL과 손을 잡으려 했다.그의 산하의 히가시노 그룹이 KCL과 협력할 수 있다면 히가시노 그룹이 성대 그룹을 앞지르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성 대표님, 표정이 담담한 걸 보니 KCL 그룹과 이미 손을 잡았나 보군요.”히가시노무라는 웃으며 성도윤과 고개를 끄덕여 인사하는 등 가식적인 모습을 보였다.사실 그는 KCL 신임 대표와 성도윤이 어떤 인연이 있는지 모른 채 떠본 것일 뿐이다."아직 KCL 신임 대표와는 잘 모르는 사이예요.”성도윤은 얇은 입술을 움직이며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잘 모른다고요?”히가시노무라는 성도윤의 말을 듣자마자 눈이 번쩍번쩍 빛났는데 아예 대놓고 웃음을 터뜨렸다."그렇다면 모두가 공평하게 경쟁할 수 있다는 거죠, KCL은 성대 그룹과 협력할 수도 있고 히가시노 그룹과 협력할 수도 있겠네요. 심지어 오늘 참석한 모든 그룹과 협력할 수도 있다는 거 아니겠어요?”"그럼요. 여러분이 협력하고 싶고 성의를 보이기만 한다면 기회는 얼마든지 있을 겁니다.”성도윤은 사실대로 말했다.과거 그와 성지훈의 관계로 인해 성대 그룹은 KCL의 독점 협력그룹이었지만 지금은 성지훈이 신임 회장에 의해 교체된 이상 KCL과의 합작이 성사될 수 있을지 성도윤도 자신이 없었다.전에도 KCL의 신임 회장이 누구인지 성지훈에게 알아봤지만 웃긴 것은 성지훈도 모른다는 거다.그래서 오늘 다른 사람들뿐만 아니라, 성도윤도 이 미스터리한 인물에
생방송 카메라와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서은아에게 집중되었다."네? 저한테 달렸다고요?”서은아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내심 기분이 좋았다.서가네는 비록 이번 정상회의의 최대 후원자였지만 솔직히 전자업계와 잘 어울리지 않았고 서은아가 정상회의에서의 존재감도 돈으로 만들어 낸 것이라 그녀도 큰 성취감은 없었다.정상회의의 순조로운 개최 여부가 본인의 손에 달렸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찼다."네, 서은아 씨. KCL 신임 대표님이 은아 씨를 콕 집어 말씀하셨는데요...”"제가 뭘 하면 될까요, 회장님의 말씀이라면 제가 받아들여야죠. 이 또한 제 영광 아니겠어요?”서은아는 내로라하는 KCL 신임 대표가 직접 자신을 호명하자 너무 감격한 나머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앉을 뻔했다.어찌 됐든 그녀가 KCL의 신임 회장과 친하게 지낸다면 그녀는 전자 기술 업계에서 큰 관심을 받게 될 것이고, 그 거물들은 KCL과 협력하기 위해 반드시 그녀 앞에 무릎 꿇게 될 것이었다.그렇게 되면 성도윤의 마음속에서의 그녀의 지위는 더욱 높아지게 되고 성도윤은 더욱 그녀를 필요로 하게 될 것이다!"어, 그니까 그게...”단혁은 안경을 밀면서 어색하게 말을 이었다."KCL 신임 회장이 해안을 좋아하시는데 이곳에서 양녀를 만들고 싶대요. 그래서 은아 씨가 전 세계로 방송되는 카메라 앵글을 보며 ‘아버지, 이 딸이 잘못했어요. 노여움 푸시고 회의에 참석해주세요’라고 하시라고...”이 말이 나오자 현장은 발칵 뒤집혔다.서은아의 표정은 점차 어두워졌다."회장님이 정말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너무 유머 감각이 있으신걸요...”회의실의 일곱 멤버 중, 여섯 명은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히가시노무라 카즈요시: "하하하, 이 새로운 회장 마음에 들어, 너무 개성이 있는걸. 반드시 그와 협력해야겠어!”성도윤만이 무관심한 듯하던 표정이 갑자기 진지해졌고 그는 짙은 눈썹을 잔뜩 찡그렸다.왜 이런 조작이 좀 익숙하다고 생각되는 걸까? 설마...서은아는 한바탕 생각을 하더니 인츰 표정
"성 대표님, 공교롭게도 우리가 다시 만났군요.”차설아는 성도윤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는데 입꼬리는 올라갔고 표정에는 그녀의 한껏 흥분된 기분이 다 드러나 있었다."그래, 또 만났네. 계획한 지 오래됐겠네, 대단한걸.”역시 그녀였어!이 순간, 성도윤은 놀라움이 아니라 오히려 말할 수 없는 기쁨의 표정이 서렸다.역시 차설아야, 이렇게 큰 판을 짜다니 그도 탄복할 수밖에 없었다.여자의 대응 방식 또한 그를 더욱 안심시켰다.적어도 'KCL 회장'이라는 신분이 있으니 그녀가 괴롭힘을 당할 것이라는 염려가 없어졌고 적어도 앞으로 그녀부터 3대까지는 돈이 부족할 일은 없을 것이다."단혁, 이게 무슨 상황이야. 이 여자가 정말 KCL의 신임 회장이야?”"그러니까. KCL 그룹이 우리를 가지고 노는 거야?”라운드 테이블의 다른 멤버들은 앞다투어 강한 거부감을 드러냈다.그들은 그들이 가장 경멸하는 여자가 업계에서 이렇게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분명 무슨 오해가 있었거나 KCL 그룹이 일부러 그들을 조롱하는 것일 거다.밖에서 서은아는 회의실 안으로 들어가겠다고 야단법석을 떨었다."당장 들여보내 줘, 당장! 그렇지 않으면 서가가 가만두지 않을 거야!”그녀의 현재의 난폭함과 방금의 조신함은 강렬한 대조를 이루었다.다만, 그녀가 지금 얼마나 날뛰던 이미 서씨 집안 전체가 체면을 구겼고 전 세계에 망신을 당했다는 거다!단혁은 사람들에게 급급히 해명에 나섰다."여러분, 흥분하지 마세요, 차설아 씨는 확실히 KCL의 신임 회장이자 G6 칩의 최종 개발자입니다. 기술 지분 참여 방식으로 KCL 그룹의 최대 주주가 되었고 한 사람의 힘으로 전체 업계의 프로세스를 거의 10년이나 앞당겼습니다. 우리 업계의 영웅과도 같은 존재이니 여러분 모두 존중하고 지지해 주세요!”오직 단혁의 설명만으로는 이 늙은이들을 이해시킬 수 없었다."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이 여자는 분명 부적절한 방법으로 KCL 회장 자리에 앉은 걸 거야. KCL
모두들 일제히 성도윤을 쳐다보았는데 순간 조용해졌고 감히 소리도 내지 못했다.차설아도 성도윤을 주시했는데 그녀의 예쁜 눈망울에서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그의 '동의'는 그녀의 예상에 있었기도 예상을 벗어나기도 했는데 어쩌면 그래서 다소 의외였다."우리는 경력뿐만 아니라 능력도 봅니다. 여러분은 모두 업계 최고의 인물입니다. 차설아 씨가 도대체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 여러분은 4년 전에 이미 검증받지 않으셨습니까...”성도윤은 냉랭한 눈빛으로 정면을 바라보며 다소 무덤덤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4년 전 시험을 통과해 하이 테크협회 회장에 당선된 것만으로도 능력에 문제가 없다는 것을 증명했고 지금은 G6칩을 개발했으니 이번 회의의 8대 멤버 중 한 명으로 선출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저도 차설아 씨가 존경스럽다고 생각되는데요.”히가시노무라는 차설아한테 손을 뻗으며 90도로 절을 했는데 얼굴에는 작위적인 미소를 띠고 있었다."차설아 씨, 어서 오세요. 우리 회의는 진작에 좀 다른 풍채를 더했어야 했는데 말이에요.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아리가도!”단혁은 두 사람의 반응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다른 분들의 의견은요?”업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두 거물이 모두 환영의 뜻을 표하자 다른 사람들은 당연히 더 이상 반항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차설아를 받들기 시작했다."우리는 당연히 환영이죠. 업계는 이런 인재가 필요합니다!”"차설아 대표는 정말 젊고 재능이 뛰어납니다. 여자라고 전혀 뒤지지 않죠. 미래의 하이 테크 분야는 당신들이 선도할 것이라 믿습니다. 앞날이 창창합니다!”차설아도 이들의 말에 허위적으로 응대를 했다."천만에요. 저는 아직 어리고 운이 좋았을 뿐이에요. 아직 배워야 할 것도 많고요. 이 업계에 여러분들이 있어 정말 다행입니다...”성도윤은 옆에서 듣다가 참지 못하고 입술을 오므리고 피식 웃어버렸다.여자가 갑자기 진지한 모습을 하고 있으니 정말 웃기는군...차설아는 능구렁이들과 얘기를 하는 틈
"그렇다면 G6 칩이 곧 시장에 출시되어 사용될 것인데 KCL 그룹은 도대체 누구와 협력할 것인지 알려줄 수 있습니까? 이 결정이 미래 10년에서 누가 이 업계의 선두가 될 것인가를 좌우지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단혁은 또 모두가 더욱 궁금해하는 질문을 했다."차 대표님, 고민하지 마시고 저희 히가시노 그룹과 협력하시죠. 저희는 이미 인공지능 분야에서 거의 70%의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고 매년 이윤 또한 셀 수 없이 많습니다. KCL 그룹이 저희와 협력할 의향이 있다면 제가 회사 20%의 지분을 나눠 드리겠습니다.”흥분한 히가시노무라는 적극적으로 히가시노 그룹을 홍보했다.그룹의 지분 20%를 내놓는다는 건 듣기에 매우 대범한 결정 같지만 만약 이 계약이 성사되기만 한다면 지분 20%가 가져오는 이윤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차 대표님, 저희 이스트소프트 그룹과 협력하시는 건 어때요? 저희 이스트소프트 그룹은 지금 수익률이 아주 좋아요. 저희와 협력하신다면 주식의 50%를 드리겠습니다...”다른 몇몇 거물들도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고 더 큰 성의를 보였다.“…”차설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성도윤의 답을 기다리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사람들도 눈치를 챘는데 두 사람의 옛 부부라는 친분이 있으니 KCL은 여전히 성대 그룹과 협력할 것이고 이렇게 되면 성대 그룹의 업계 1위의 지위는 누구도 흔들 수 없었다.이때 서은아가 기세등등하게 뛰어 들어왔고 경비원이 그 뒤를 쫓았다."서은아 씨, 죄송하지만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우리 서가 후원하는 곳이니 내가 가고 싶은 곳 어디든지 갈 수 있으니까 닥쳐!”서은아는 몇몇 경비원들을 돌아보며 으름장을 놓았다."누가 또 입을 놀리면 각오해!”경비원들은 하나같이 난감한 표정으로 더 이상 막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무사히 회의의 가장 중심 자리에 온 서은아는 노기등등하게 차설아를 가리키며 말했다. "감히 나를 이렇게 모욕하다니, 죽여버릴 거야!”말을 마치고 그녀는 미친개처럼 차설아를 향해 머리를 처
”차설아, 내가 너 죽여버릴 거야!”서은아는 얼굴을 붉히며 한 마리의 사나운 짐승 개처럼 온몸의 힘을 다해 차설아를 향해 뛰어들었다.“네가 엄청 대단하다고 생각해? 내 손에는 너의 모든 걸 망가뜨릴 물건을 가지고 있다고. 경고하는 데 나 건드리지 마. 아니면...””그만해!”성도윤이 호통을 쳐 서은아가 계속 말을 해내러 가는 것을 막았다. 그는 긴 팔로 서은아의 몸을 잡고는 냉랭한 눈빛으로 경고를 날렸다.“이미 많이 쪽팔려. 그러니까 이상한 소리 좀 그만해. 아니면 서가 전체를 팔아도 모자라니까.”남자의 말이 떨어지자 서은아는 순간 온순해졌고 한마디도 더 내뱉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하지만 차설아는 이미 두 사람 사이의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고 일부러 서은아의 화를 돋우며 말했다.“날 망가뜨릴 물건이란 게 뭐야? 우리 딸, 아빠한테 얘기해봐. 화 안 낼게. 아니면 그냥 허세 부리는 거야?””...”서은아는 성도윤의 품에 숨어서는 입을 꼭 다물고 있었는데 눈빛은 사람을 죽일 수도 있을 듯했다.“당신도 그만 해요. 원래 이런 성격이어서 그래요, 내가 대신 사과하죠.”성도윤은 가볍게 차설아를 향해 고개를 숙였는데 이렇게 예절을 차리는 모습이 두 사람 사이의 거리를 멀게 해버린 것 같았다.차설아는 순간 김빠진 공처럼 풀이 죽었고 가슴이 답답해 났다.이런 태도는 남자가 직접 그녀와 화를 내고 다투는 것보다 더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두 사람 무슨 사인데 그쪽이 대신 사과를 하는 거죠?”차설아는 냉소를 지으며 되물었다.서은아는 순간 기운이 났는지 성도윤을 툭툭 치며 의기양양해서 말했다.“도윤아, 차 대표님이 물으셨으니까 대답해야지. 마침 여러분께 우리의 사이도 밝히고.”성도윤은 서은아의 어깨를 감쌌는데 마치 일종의 무언의 방식으로 그녀를 안심시키는 것 같았다.이 장면은 차설아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는데 그녀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나랑 은아는...””잠깐!”성도윤이 막 입을 열려던 찰나, 차설아가 그의 말을 끊었다.그녀
”쓰읍.”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은 누구 하나 놀라지 않은 사람이 없었는데 모두들 성도윤에게 부러움의 눈길을 보내왔다.특히 오가미 히가시노무라 이치는 무의식적으로 작은 거울을 꺼내 들고는 자신의 외모를 다잡으며 서은아와 차설아를 바라보았다.“지금 성형하러 가도 괜찮을까요?”하늘 아래 그 어떤 남자가 돈 많은 여자의 눈에 들어 놀고먹는 상상을 해보지 않았던가? 심지어 차설아와 서은아와 같은 절세미인 부자라니...성도윤 정말 너무 행운다운 거 아닌가? 이미 능력에 외모에 다 갖추었는데 외모만으로 두 미녀가 집안 사업을 포기하고 오직 그를 위해 싸우다니... 이런 인생이 어디 있겠는가?모두들 성도윤의 대답만을 기다리고 있었다.하지만 성도윤의 잘생긴 얼굴에는 큰 변화가 없었고 냉담하게 말했다.“내 선택은 항상 같았어, 나랑 은아는 어릴 때부터 아는 사이였고 그래서 오늘 여러분들 앞에서 밝히려고요. 저와 은아는 연인 사이입니다.”서은아의 마음속의 큰 돌이 끝내 내려가는 것 같았다. “들었지? 이게 바로 도윤이의 선택이야. 네가 나보다 돈이 더 많다고 하더라도 도윤이는 나를 선택할 거라고. 이게 바로 진정한 사랑이야.”“진정한 사랑? 하하하, 웃기고 있네.”차설아는 성도윤의 그런 말을 믿지 않았다.그녀가 성도윤에 대한 요해로 볼 때 이렇게 딱딱하고 진정성 없는 선고는 이미 전에 짜놓은 연기가 아니라면 손에 장을 지질 거다.다만 왜 이런 일을 꾸몄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뿐이었다.“성도윤, 납치당했다면 눈 두 번 깜빡여, 그런 어정쩡한 연기를 내가 믿을 것 같아?”차설아는 심지어 성도윤의 약점이 서은아 손에 잡혔다는 상상까지 했다.“혹시 벌거벗은 사진이 서은아 손에 있는 거야? 그거로 협박해? 몸도 좋은 사람이 뭐 어때, 인터넷에 올리라고 해. 이럴 필요 없잖아.”성도윤은 별다른 말 없이 서은아의 손을 잡고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회의가 끝났으니 저와 여자친구는 먼저 가보겠습니다.”그리고 두 사람은 차설아를 넘어 회의실을 나섰다.차설아는
성진은 두 팔을 몸 앞에 감고는 나른하게 회의실 문 앞에 기대 차설아가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회장님, 잘 숨겼네? 또 한 번 놀랬잖아.”그는 저 멀리서 걸어오는 차설아를 보며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본과랑 대학원에서도 계속 이 부분을 전공했어. 다만 네가 나에 대한 요해가 부족한 것뿐이야.”차설아는 한 손에는 문건을, 다른 한 손으로는 머리를 정리했는데 그 모습이 은근 지적이고 멋있었다.그녀는 전형적인 미모와 지성을 다 갖춘 여인이었다. 다만 평소에 평범한 여인의 탈을 쓰고 살뿐, 이 탈을 벗는다면 항상 세인들을 놀래켰다.“그래, 내가 아직 잘 모르지. 성도윤도 마찬가지야, 남편이라면서 하나도 모르잖아. 쌤통이야 아주.”성진은 방금 회의실 밖에서 라이브를 보고 있었는데 다시 한번 차설아의 매력에 푹 빠지고 말았다.성도윤이 아무것도 못 하고 당하는 모습을 보니 더욱 속이 후련했다. 마치 본인도 그 싸움에 참여한 듯 말이다.“그만해, 내가... 더 쪽팔렸는걸...”차설아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처음으로 자신이 이렇게 큰 실패를 겪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4년 전, 성도윤의 배신을 당했을 때보다 더 굴욕적이다.4년 전의 그녀는 내세울 것 없는 아가씨였으니 그가 자신을 갖고 싶어 하지 않는 것도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의 손에 쥐고 있는 게 얼마인데 심지어 그를 구해줄 능력도 있는데 그는 여전히 그녀의 손을 잡지 않는다니 너무 자존심이 상했다.“성진, 솔직하게 말해. 내가 그렇게 별로야? 왜 계속 내 손을 놓는 거지?”그녀는 고개를 들어 물었다. 그녀의 목은 메었고 단 한 순간도 지금처럼 자신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성진의 표정은 잠시 흔들렸는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당신이 별로인 게 아니라 성도윤이 보는 눈이 없는 거야. 부정하지 마.”“그럴 리가... 아무리 보는 눈이 없다고 해도 돈을 마다 할 리 없잖아?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KCL 그룹을 선택할 건데... 아니야?”“그럼 눈도 없고 멍청하
“꼬마야, 이곳은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야. 부모님은 어디에 계셔? 당장 돌아가.”키가 훤칠한 보디가드는 무기를 들고 인상을 찌푸린 채 원이를 노려보았다. 소영금은 병실과 엘리베이터 앞, 병원 내부 곳곳에 보디가드를 배정해 두었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많은 인력을 투입한 것이다. 원이는 순리롭게 병원 내부로 들어갔지만 엘리베이터 입구에서 멈춰 섰다.“성도윤이 저의 보호자예요. 얼른 만나게 해주세요. 믿지 못하겠으면 저를 데리고 가주세요.”원이는 덩치가 몇십 배 더 큰 보디가드 앞에서 주눅이 들지 않고 침착하게 말했다.“네 장난에 내가 속을 줄 알아? 감히 성대 그룹의 성도윤 대표님을 만나려고 해? 꼬마야, 장난칠 거면 집으로 돌아가.”보디가드는 원이를 위아래로 훑어보면서 경계하더니 말을 이었다.“이제는 어린아이까지 동원해서 대표님을 해치려고 하는구나. 솔직하게 말하는 게 좋을 거야. 누구의 지시를 받고 여기까지 온 거지? 말하지 않으면 내가 직접 죽여줄게.”보디가드는 어느 가문에서 성씨 가문에 복수하기 위해 어린아이를 보낸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러고는 원이의 어깨를 꽉 붙잡고 허공에 들어 올렸다.“어떤 무기를 갖고 왔는지 당장 말해! 내놓으란 말이야! 이번에는 독약인가?”“이것 좀 놓으세요. 나를 괴롭힌 걸 엄마가 알게 되면 당신들은 무사하지 못할 거예요! 이 손 놓으라고요.”원이는 허공에서 발버둥 치면서 소리를 질렀다. 무슨 일이 생겨도 늘 침착하던 원이는 일을 크게 벌이기 위해 일부러 소란을 피웠다.성도윤이 원이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만날 수 있을 것이다.“조용히 하지 못해? 이 자리에서 당장 죽여줄 수도 있어. 그 입 당장 다물어! 어린놈이 목소리는 왜 이렇게 큰 거야?”보디가드는 다른 환자들의 심기를 건드릴까 봐 원이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이마에서 식은땀이 뚝뚝 떨어졌고 심장이 벌렁거렸다.‘보디가드 경력만 10년이 넘는데 꼬맹이 때문에 벌벌 떠는 꼴이라니... 우스운 모습을 보였어. 이러면 내 체면이 뭐가
하지만 이미 늦가을로 접어든 시기라 쌀쌀해진 날씨와 빨리 지는 해 때문에 이 시간에는 산책로에 사람도 거의 없었다.그런 길을 원이를 데리고 걷던 서은아는 자연스레 발걸음을 늦추며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꼬맹이, 넌 왜 혼자 온 거야? 엄마는? 너 혼자 나가는 데 걱정도 안 해?”“엄마가 사라져서 엄마 좀 찾아달라고 유전학적 아빠 찾아온 거예요.”성도윤이 병원에 입원해있다는 것도 차설아가 성진의 별장에 있다는 걸 알아낸 원이는 어린아이의 몸으로 그 먼 산까지 가서 엄마를 데려오는 건 비현실적일 것 같아 자신의 지원군을 얻기 위해 성도윤이 입원해있는 병원으로 온 것이다.“그런데 네 엄마 아빠는 이미 헤어진 사이잖아. 네 아빠가 엄마를 찾아줄 이유는 없는데 자꾸 이런 일로 아빠 귀찮게 하면...”“당신이 뭔데 의무가 있다 없다 에요, 우리 아빠도 아니면서. 그쪽이랑은 상관없는 사람이잖아요?”“내가 네 아빠랑 무슨 사인지 너도 잘 알잖아.”희미한 가로등 불빛 아래 서서 원이를 내려다보던 서은아의 눈빛이 점점 더 차가워져 갔다.“난 네 아빠랑 곧 결혼할 사람이야. 네 아빠는 네 엄마를 버리고 나랑 결혼하기로 했다고. 그런데도 내가 상관없는 사람이야?”“내연녀라는 말을 뭐 그렇게 거창하게 해요? 아줌마 입으로도 직접 말했잖아요, 곧 결혼할 사이라고. 그럼 아직은 상관없는 사람 맞네요.”어른들보다 더 분명한 사리로 서은아를 상대한 원이는 여전히 표정을 굳히고 있었다.물론 원이도 제 엄마를 버린 아빠를 뼛속 깊이 원망하고 있지만 그래도 내연녀 앞에서만은 밀릴 수가 없었다.아빠가 다른 사람과 결혼하지 않은 이상, 엄마에 관한 일을 책임질 사람은 여전히 아빠였다.“넌 이렇게 똑똑하고 용감한데... 네 엄마는 너무 바보 같아. 이 사회가 얼마나 무서운지도 모르고 이렇게 널 혼자 내보냈으니 말이야. 가장 복잡한 게 인간의 마음인데, 오늘 날 만난 걸 다행으로 여겨. 내가 친절히 가르쳐줄게.”말을 마친 서은아는 순간 눈을 번뜩이더니 원이의 어깨를 잡고 그를
잘생긴 원이의 얼굴을 한참 뜯어보던 간호사는 성도윤과 묘하게 닮은듯한 이목구비에 가십거리를 알아낸 듯 익살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아, 너 대표님 아들이지?! 엄청 똑같게 생겼다!”성도윤의 아들이라는 말을 아주 싫어했던 원이는 미간을 찌푸린 채로 애어른 같은 말투로 말했다.“저는 그분 아들이 아니에요. 그분도 제 아빠가 아니시고요. 그냥 유전자로 엮여있는 것뿐이에요. 자기 아들도 못 알아보는 아빠는 세상에 없잖아요?”“어...”원이의 말에 간호사가 어쩔 줄 몰라 할 때 서씨 집안에서 보내온 영양제를 잔뜩 챙겨 들고 성도윤을 보러 온 서은아가 병원 안으로 들어섰다.성도윤이 깨어났다는 소식만 들었지 그가 차설아를 기억해냈는지에 대해서는 들은 게 전혀 없었기에 서은아는 당장이라도 병실로 달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소영금이 앞뒤로 경호원만 열댓 명을 붙여놓은 탓에 어떻게 들어가야 할지 몰라 답답해하고 있던 와중에 간호사와 얘기 중이던 원이가 그녀의 눈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그제야 방법이 떠오른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아이에게로 다가가 물었다.“꼬마야, 너 나 알아?”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서은아를 힐끗 본 원이는 표정을 찌푸리며 말했다.“알죠, 내 유전학적 아빠한테 들러붙는 여우 아줌마잖아요!”그 말에 화가 치밀어올랐지만 차마 화를 낼 수는 없었던 서은아는 주먹만 꼭 쥐며 말했다.“날 안다니 다행이네, 그럼 잘됐다. 너 아빠 보러 가고 싶은 거지? 아줌마랑 같이 가자.”“싫어요.”똑똑한 원이는 서은아가 이상한 일을 꾸미고 있다는 걸 바로 눈치채고는 단칼에 그녀의 제안을 거절했다.“여우 아줌마는 나 갖다 팔 수도 있는 사람이잖아요. 나한테서 떨어져요!”그 말에 서은아는 당장이라도 아이의 뺨을 때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공공장소라 안간힘을 쓰며 참아냈다.“간호사 누나, 나 빨리 유전학적 아빠한테 데려다주세요.”서은아에게 한마디 하고 난 원이는 기분이 좋아졌는지 고개를 들고 간호사를 보며 말했다.“그래, 나 따라와 아가야.”그런데
드디어 한시름 놓은 차설아가 묻자 달이는 천진한 표정으로 답했다.“그야 오빠가 괜히 어른들 걱정시킨다고 말하지 말라고 했으니까요.”“걱정할 걸 알았으면 혼자 나가질 말았어야지.”차설아는 화낼 새도 없이 김정민을 향해 말했다.“이모, 얼른 원이한테 연락해서 어딨는지 물어봐 줘요.”“전화하고 있는데... 안 받아요.”“위치추적은 돼요?”“워치가 꺼져있어서 그것도 안 돼요.”“괜찮아요, 저한테 방법이 있으니까 노트북 좀 줘보세요.”달이랑 원이를 잃어버렸을 때를 대비해 차설아는 전에 아이들의 워치에 위치추적 어플을 깔아둔 적이 있었다. 그건 핸드폰이 꺼졌거나 배터리가 없을 때도 위치를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어플이었기에 차설아는 빠르게 키보드를 두드리며 마지막 로딩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화면에 원이 위치가 뜰 텐데, 보여요?”“내, 보여요!”눈을 감고도 키보드를 치는 차설아에 놀란 것도 잠시,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는 그녀에 김정민은 다급히 화면으로 시선을 돌리며 답했다.“지금... 재원 병원에 있다고 나오는데요?”“병원이요?”원이의 코딩기술 정도라면 자신의 위치를 알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기에 지금쯤 성진의 별장에 있을 거라 예상했던 차설아는 뜬금없는 위치에 미간을 찌푸렸다.어쩌다가... 재원 병원까지 간 거지?---한편 재원 병원 앞에 서서 몇 번이나 병원 이름을 읽어보던 원이는 틀림없다는 걸 확인한 후에야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작지만 당찬 아이가 씩씩하게 걸어들어오는 모습은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고 지나치던 간호사 하나가 참지 못하고 아이에게 말을 걸어왔다.“아가야, 너 혼자 온 거야? 부모님은 어디 계셔?”“사람 좀 찾으러 왔는데요.”원이는 어른스러운 표정으로 간호사를 보며 말했다.“예쁜 누나, 혹시 성도윤이라는 환자분 어느 병실에 입원해있는지 아세요?”“성 대표님 찾아온 거야?”간호사는 아이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웃으며 알려주었다.“그럼 사람 잘 찾았네. 대표님 며칠 전에 뇌수술 마치고 입원해계신 데 내가 담당
“오빠는 볼일 있다고 나갔는데 민이 이모가 오빠 걱정된다고 아까 찾으러 나갔어요.”제 오빠가 집 밖을 나가는 건 자주 있는 일이라 달이는 차분하게 엄마의 질문에 답했다.달이한테 오빠는 자신이 원하는 곳은 어디든 갈 수 있는 천재였기에 그녀는 오빠가 매일 같이 나가도 한 번도 걱정한 적이 없었다.“뭐? 또 어디 간 거야?”하지만 엄마인 차설아는 잠깐이라도 한눈만 팔면 그 틈을 타 밖으로 나가버리는 원이 때문에 근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하지만 제 몸 하나 가누지 못하는 이 상황에 나가서 아이를 찾을 수도 없었기에 초조해하고 있는데 그때 김정민이 집으로 들어왔다.“아가씨, 오셨어요? 원이 도련님이 또 집을 나가셨어요! 어떡해요? 동네를 한 바퀴 다 돌았는데 어딨는지도 모르겠고...”밥을 하는 사이에 나가버린 원이 때문에 김정민은 아직도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원이가 나가기 전에 무슨 이상한 말을 했다거나 요즘 이상한 행동을 했다거나 한 적은 없었어요?”“별말은 하지 않고 그냥 몰래 나간 것 같아요. 그런데 요즘 아가씨가 영상통화 안 해준다고 아가씨한테 무슨 일이 난 것 같다면서 구하러 가겠다는 말을 한 적은 있어요. 저는 그냥 애니메이션 보고하는 말인 줄 알고 별로 신경을 안 썼었고요.”미간을 찌푸리며 묻는 차설아 김정민은 한숨을 앞세우며 답했다.“다 제 불찰이에요. 원이 도련님은 지능이 남달라서 보통 아이처럼 대하면 안 됐던 건데... 구하러 간다는 말이 장난이 아니었던 것 같아요. 아마 그때부터 계획하고 있었을지도 몰라요...”손을 휘적이며 김정민에게로 다가간 차설아는 그녀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이모 잘못 아니니까 자책하지 마세요. 따지면 제 잘못이죠. 제가 제대로 설명을 안 해서 모두를 걱정시켰어요.”차설아의 반응이 자신의 예상과 달라 이상하다고 느낀 김정민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자세히 보며 물었다.“아가씨, 이 밤에... 왜 선글라스를 끼고 계세요?”“그냥 산 타다가 눈을 좀 다쳐서 시력이 안 좋아졌어요. 병원 가봤는데
“어릴 때부터 지내던 곳이라 이곳 구조는 이미 몸에 익었어요. 눈 감고도 갈 수 있는 길이니까 걱정 마요.”자신이 정말 갈 수 있는 길이기도 했고 또 현이를 걱정시키고 싶지도 않았기에 차설아는 웃으며 말했다.“그, 그럼 조심하세요.”“네, 이제 그만 가봐요.”현이를 향해 손을 저어주던 차설아는 그녀가 떠났음을 확인하고서야 난간을 더듬으며 현관문을 찾아 비밀번호를 입력했다.전부터 감지력과 관찰력이 뛰어났던 차설아는 현이에게 한 말대로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집안으로 정확히 걸어가 문을 열고 오랜만에 익숙한 아이들의 이름을 소리높이 외쳐봤다.“원아, 달아!”“엄마!”차설아의 부름에 2층에 있던 달이는 서둘러 1층으로 뛰어가 그녀의 품에 폭 안겼다.“엄마! 왜 이제야 왔어요! 너무 보고 싶었다고요.”자신에게 애교를 부려오는 예쁜 딸의 머리를 쓰다듬던 차설아는 웃으며 물었다.“엄마 없을 때 떼 안 쓰고 잘 있었어?”“당연하죠. 나 이제 은하수 어떻게 그리는지도 아는데, 얼른 가요! 내가 보여줄게요!”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인 달이는 엄마의 이상함도 눈치채지 못하고 신나서 방방 뛰며 차설아의 팔을 잡고 계단을 올랐다.차설아는 몇 번이나 턱에 걸려 넘어질 뻔했지만서도 달이를 놀래키지 않으려 힘겹게 아이의 방까지 걸어갔다.발 빠르게 며칠 전에 그렸던 그림들을 꺼내온 달이는 칭찬을 바라는듯한 얼굴로 환히 웃어 보였다.“엄마, 이거 내가 그린 은하수예요. 반고흐 할아버지 거랑 비슷하죠? 오빠는 내가 그린 게 더 예쁘다고도 했어요!”“예쁘지, 너무 예쁘다. 우리 달이는 진짜 그림 천잰가 봐.”아무것도 볼 수 없던 차설아는 선글라스를 낀 채로 맞장구를 쳐주고 있었지만 앞으로는 이렇게 환하게 웃는 아이들의 모습도, 아이들이 그린 거, 만든 거 그 어느 것 하나도 볼 수 없다는 생각에 가슴이 점차 저릿해졌다.“엄마는 저녁에 왜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요? 내가 여기에 색깔도 여러 개 섞어놨는데, 선글라스 끼고 있으면 잘 안 보이지 않아요?”천진난만
박서영의 말에 별 의심 없이 약을 받아 마신 성진은 눈이 아픔에도 박서영이 전화를 거는 모습을 보려고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그렇게 점차 의식이 흐려져 가던 성진이 쓰러질 때, 박서영은 수화기 너머의 현이를 향해 다급하게 외쳤다.“현아, 빨리 차설아 씨 모셔와!”의사가 처방해준 약은 눈을 푹 쉬게 하라는 의미에서 수면제의 효과도 같이 내는 약이었는데 그래서 잠시 기절한 것뿐이었다.떠나기 전 성진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싶다던 차설아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박서영이 때마침 성진에게 약을 건넨 것이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현이와 함께 방으로 들어온 차설아가 박서영을 향해 물었다.“어때요? 시력은 회복한 거예요? 배척반응은 없고요?”상처가 아직 다 아물지 않아 선글라스를 낀 탓인지 차설아는 전보다도 더 도도해 보여 전혀 실명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하지만 그녀가 강인해 보이려고 애쓸수록 현이와 박서영은 점점 더 마음이 아팠고 그들의 죄책감도 깊어져 갔다.“회복은 잘 됐는데 오랜만에 눈을 뜨는 거라 눈이 아플 수는 있대요...”침대에 기절한 채 누워있는 성진을 보던 박서영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문제가 하나 생기긴 했는데... 도련님이 워낙 똑똑하셔서 눈만 보고도 차설아 씨 눈이란 걸 알아차리신 것 같아요. 저한테 당장 대학생 찾아오라고 하셔서 급한 대로 일단 약부터 먹인 거예요. 이 약 아니었으면 오늘 진짜 경을 쳤을 거예요.”“그건 내가 미리 대처하라고 했었잖아요. 나랑 눈 비슷한 대학생 찾아두라고. 아직 못 찾은 거예요?”“아니요, 찾긴 찾았는데... 그러면 또 수많은 거짓말을 해야 하니까... 그럴 거면 아예...”박서영은 자신이 내뱉는 말이 터무니없다는 걸 알면서도 입술을 깨물며 나지막하게 말했다.“도련님한테 사실대로 말씀드리고 앞으로 도련님더러 차설아 씨를 보살피게 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절대 안 돼요!”차설아는 역시나 그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진이 성격은 서영 씨가 나보다도 더 잘 알잖아요. 내가 눈을 준 걸 알게 되
하지만 성진은 차분하고도 사연 있어 보이는 이 두 눈이 자신의 평소 성격과는 너무나도 달라 적응이 되지 않은 건지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다.“너 아빠가 말하는데 대답도 안 하고 뭐 하니? 귀까지 이식해줘야겠어?”“금방 깨어난 애한테 그만 좀 해요. 애가 죽을 때까지 몰아붙이기만 할 거예요?”그때 아들이라면 끔찍이 아끼던 단사란이 성진을 나무라는 성주원을 말리며 아들의 상태를 살폈다.갓 깨어난 아들과 몇 마디 나누던 그녀는 성진이 쉴 수 있게 사람들을 데리고 이내 밖으로 나가 버렸다.마침내 조용해진 주위에 박서영은 조심스레 성진에게로 다가가 말했다.“도련님, 괜찮으세요? 눈은 안 아프세요? 힘드시면 얼른 누워서 쉬세요.”“거울 줘.”“네?”“거울 달라고.”한층 어두워진 표정에 무거운 말투까지 더해지자 박서영은 잔뜩 긴장한 채로 큰 거울 하나를 성진에게 건넸다.거울을 받아든 성진은 빠르게 자신의 눈동자를 바라봤는데 그걸 보자마자 심장이 멎는 것만 같았다.“이 눈...”자신이 출구도 찾지 못하고 빠져서 허우적대던 너무나도 익숙한 그녀의 눈이 제 얼굴에 박혀있는 모습은 너무나도 이질적이었다.“도련님, 무슨 문제라도 있으세요? 오랜만에 본인 모습을 보는 거라 익숙하지 않으실 수도 있지만 선생님이 그건 다 정상적인 반응이라고...”한숨을 쉬던 성진은 박서영의 말을 자르며 차갑게 물었다.“나한테 눈 기증해줬다던 그 여대생 어딨어, 내가 지금 봐야겠어.”자신이 차지하고 있는 두 눈이 그녀의 눈과 너무나도 닮아있어서 성진은 제 생각인지 사실인지 아니면 그저 착각일 뿐인지 당장 확인해보고 싶었다.성진의 말이 끝나자마자 박서영은 시선을 피하며 답했다.“도련님, 그 여대생은 이미 해안시를 떠나서 지금 찾는 건 좀 힘들 것 같아요...”“뭐가 힘든데.”“지금 어딨는지만 알아내. 여기까지 오는 게 힘들다면 내가 가면 되니까. 바로 차 준비하라고 이르고.”“그... 그게...”강압적인 성진의 태도에 박서영은 어찌할 줄 몰라 식은땀만 흘리고 있었
이튿날, 성진이 다시 눈을 뜨는 역사적인 순간을 보기 위해 그의 부모님과 박서영을 비롯한 성대 그룹의 이사진들이 그의 방안에 빼곡히 둘러서 있었다.“이제 붕대 풀 건데 준비되셨어요?”“네.”하얀 가운을 걸친 의사가 진지하게 묻자 침대 끝에 걸터앉은 성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으로는 주먹을 말아쥐었다.그에게 있어서 눈을 뜬다는 건 다시 태어나는 것과 같았기에 지금 그는 이 자리에 선 그 누구보다도 더 흥분하고 있었다.성진의 동의를 구하고 붕대를 풀던 의사는 마지막으로 당부의 말을 덧붙었다.“오랜만에 빛을 보는 거라 처음에는 눈이 아프고 시야도 모호할 수 있어요. 하지만 이건 다 정상적인 현상이니까 너무 당황하지는 마세요. 강한 빛은 막아주는 안경을 따로 맞춰뒀으니까 계속 끼고 계시면 도움 될 거에요.”의사가 말을 마침과 동시에 마지막 한 겹 남았던 붕대가 아래로 흘러내렸고 마침내 성진은 제 부모님과 다른 사람들의 인영을 볼 수 있게 되었다.“진아, 어때? 우리 보여?”“네, 엄마. 엄마가 보여요 이제.”눈물을 흘리는 엄마를 봐서 그런가, 그쪽으로 시선을 옮기던 성진은 자신이 전보다 더 부드럽고 온화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오만방자한 게 디폴트 값이었는데 이상하게 지금은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제 아들의 변화를 눈치챈 성주원은 의사를 보며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내 아들이 눈을 뜬 것뿐인데 왜 성격도 바뀐 것 같죠? 다 큰 성인이 엄마를 보고 울리기나 하고, 전혀 남자답지 않잖아요 지금은!”“이것도 정상입니다...”미간을 찌푸리며 말하는 성주원에 의사는 난처한 기색을 드러내며 공손한 태도로 설명을 해주었다.“도련님이 기증받으신 게 여성분의 눈이라서 여성 특유의 세포나 DNA가 묻어있어요. 그래서 쉽게 공감하시는 걸 겁니다.”“어쩐지 저 눈은 우리 아들 눈빛이 아닌 것 같더라니까요! 이럴 줄 알았으면 기증자를 좀 더 골라볼 걸, 성도윤 그 자식이랑 경영권 싸움을 해야 하는 사내자식 눈이 저래서 어떡해. 웃음거리나 되지 않으면 다행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