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설아의 반응을 본 소영금은 순간 눈을 번쩍이더니 흥분해서 그녀의 손을 잡고 물었다.“혹시 뭐라도 생각난 거야? 어서 말해봐!”“역시 내 아들이 그렇게 쉽게 죽을 리 없어! 분명 너에게 단서를 남겼어!”차설아는 고개를 저으며 솔직한 표정으로 허탈해서 말했다.“저한테 아무런 단서도 남기지 않았어요. 하지만 친어머니인 사모님도 생사를 모르고 계신다면 전 더더욱 몰라요... 전 지금까지 모두 다른 사람들 입을 통해서 소식을 전해 들었을 뿐이에요. 하지만 묘지까지 정하셨잖아요, 시신을 어디에 안치해두었는지 알고 계신 거 아닌가요?”소영금은 눈시울을 붉히며 애처로운 눈빛으로 말했다.“사고가 나서 병원에서 죽었다고만 했어. 아주 처참한 모습이라 내가 보면 놀랄까 봐 도윤이 아버지가 밤에 화장을 해버렸지. 그 묘지도 나와 함께 상의해서 선택한 것이지만, 아직 난 절대 믿지 않아. 단지 다른 사람들에게 말할 수 없는 계획이 있는 것 같아서 눈 감고 같이 연기를 해줬을 뿐이야...”“하지만 지금 성대 그룹은 이미 뒤죽박죽이야. 세상에는 내 아들을 모욕하는 유언비어가 가득하고, 가장 무서운 건 내일 회사를 하찮은 잡종에게 빼앗기게 생겼어. 성대 그룹은 우리 가문이 몇 대에 걸쳐 일궈낸 회사야. 특히 도윤이는 회사를 위해 많은 것을 희생했어. 만약 살아 있다면, 진짜 소중한 물건을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있을까?”이때, 성진이 방에서 나오더니 양손을 주머니에 넣고 회전계단 중앙에 서서, 마치 천하를 내려다보는 왕의 모습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하찮은 잡종?”남자는 비꼬는 듯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이렇게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큰어머니는 역시 제 가슴을 쿡쿡 찌르는 말만 하시네요.”“성진?”소영금은 이내 비통한 감정을 추스르고 도도하고 차가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여긴 내 아들 집이야, 네가 왜 여기 있어? 너 같은 출신 없는 사생아는 여기 있을 자격 없어. 당장 나가!”옆에서 듣고 있던 차설아는 간담이 서늘해졌다.‘쯧쯧, 역시
하지만 여전히 온갖 듣기 싫은 말을 쏟아내며 성진의 인내심에 도전했다.차설아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직감하고 즉시 앞으로 나서 막았다.“성진, 그만해. 그래도 당신 큰어머니잖아. 이건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야!”“흥, 이렇게 까칠한 큰어머니를 본 적 있어요? 나를 존중해주지 않은 큰어머니에게 내가 왜 예의를 지켜야죠?”성진은 소영금을 놓아주려는 뜻이 전혀 없었다. 그의 눈빛이 점점 독해지더니 수십 년 동안 쌓인 분노로 소영금의 손을 부러뜨릴 기세였다.“큰어머니는 내가 본 가장 오만하고 안하무인인 여자예요. 자기 두 아들만 잘났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쓰레기 보듯 하죠. 날 오랫동안 모욕했지만 한 번도 따지지 않았어요. 하지만 하필 이 시점에서 내 엄마를 모욕하다니... 지금은 나의 화풀이를 하는 것이 아니라 엄마를 대신해 혼내주는 거예요!”“악, 손이 부러질 것 같아. 이 잡종 놈, 권력을 조금 얻었다고 복수하기 시작하는 거야? 나 소영금은 절대 널 가만두지 않아. 나... 아파 죽겠네!”소영금은 초딩처럼 욕을 하며 으르렁거렸다.차설아는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이 두 사람 진짜 유치하기 짝이 없다니까!’그녀는 성진의 손등에 손을 얹으며 차갑게 말했다.“성진, 당장 그 손 놔. 만약 안 놓는다면...”차설아는 눈알을 굴리며, 어떤 말로 이 미친놈을 협박할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그 손 안 놓으면 앞으로 너 상대하지 않아!”역시나 효과 있는 협박이었다.성진의 매서운 눈빛이 번쩍이더니 조금 놀란 표정으로 즉시 소영금을 놓아주었고,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그 말은 앞으로 날 상대하겠다는 뜻인가요?”차설아는 성진을 무시하고, 고개를 숙이고는 소영금의 손목을 비틀었다.“손목이 탈구된 것 같아요. 제가 지금 바로 잡아드릴게요. 아플 수 도 있으니 조금만 참으세요.”소영금은 세 살배기 어린아이처럼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희대의 보물을 보는 표정으로 차설아를 바라보았다.“우리 며느리가... 접골까지 할 줄 안다고?”
차설아는 재빨리 별장을 떠났고, 성진과 소영금이 따라잡을 기회를 전혀 주지 않았다.그녀의 눈에 두 사람은 피차일반으로, 미치기 시작하면 매우 무서웠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지 않기 위해 차설아가 먼저 피하는 것이 상책이었다.차설아가 아파트로 돌아왔을 때, 두 아이는 벌써 쿨쿨 자고 있었다.민이 이모는 아직 잠들지 않았고, 두 아이를 대신해 내일 입학할 물품과 서류들을 정리하고 있었다.바삐 움직이는 민이 이모를 보고 차설아는 너무 감동했다.“이모, 시간이 늦었어요. 얼른 들어가 쉬세요. 남은 건 제가 정리할게요.”민이 이모는 고개를 돌리고, 차설아를 향해 인자하게 웃었다.“아가씨도 참. 이 정도는 일도 아니죠. 아가씨야말로 늦게까지 일하느라 바쁘니 몸조심하셔야 해요. 너무 필사적으로 일하다가 쓰러지면, 두 아이는 어떡해요...”“걱정 마세요. 제가 잘 챙기고 있어요.”요 몇 년 동안, 그녀는 확실히 필사적으로 일했다. 밤을 새우는 것도 일상이었지만, 이번 계획만 성공한다면 앞으로 푹 쉴 수 있었다.민이 이모는 두 녀석의 책가방에 물티슈, 수건, 갈아입을 옷, 마스크 등을 챙겨 넣고 있었다.차설아는 갑자기 기발한 생각이 떠올라 붓과 화반을 가져온 다음 민이 이모 손에 있는 가방을 가져갔다.“아가씨, 뭐 하려는 거예요?”민이 이모는 호기심 어린 얼굴로 물었다.“가방이 좀 밋밋한 것 같아서요. 포인트를 주려고요.”차설아는 말하면서 책가방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그녀는 그림에 소질이 없었지만, 자그마한 포인트를 주니 원래 다소 단조롭고 무미건조하던 책가방이 귀엽게 변신했다.차설아는 두 아이의 책가방에 해바라기 섬을 그렸다. 푸른 바다, 하얀 모래사장, 해바라기 꽃밭, 그리고 그들이 모래 위를 달리는 모습...“아주 따뜻한 그림이네요. 역시 아가씨다워요. 내일 아이들이 일어나서 보면 분명 좋아할 거예요.”민이 이모는 책가방에 그려진 그림을 보며 인자하게 웃더니 또 약간 슬퍼하기 시작했다.“이 그림에 양기가 부족해서 문제죠. 남자
“맞는 말이긴 하지만, 남자가 필요한 순간이 무조건 있어요. 예를 들어 방금 입학 서류를 작성하는데 안에 아버지 이름과 직업 칸이 있더라고요. 그럼 우리는 어떻게 작성해야 하죠?”민이 이모가 또 ‘잔소리’를 하는 이유는 방금 입학 서류를 작성할 때 곤란에 봉착했기 때문이다.차설아에게는 남편이, 두 아이에게는 아버지가 필요하다는 것을 깊이 느꼈다.“그냥 없다고 작성하시면 되죠. 세상에 남편을 일찍 잃은 여자들도 많은데 저희라고 그런 상황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잖아요?”차설아는 전혀 동요하지 않고 계속 붓으로 그림을 그렸다.애초에 성도윤과 이혼을 결심하고, 해안을 떠나 해바라기 섬으로 간 순간부터, 그녀는 이런 상황을 예상했기에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그건 안 되죠!”민이 이모는 약간 흥분하더니 말했다.“아가씨, 참 모든 걸 간단하게 생각하시네요. 유치원 선생님들도 모두 사람에 따라 행동하는 법이에요. 만약 달이와 원이에게 아버지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교육적인 면에서나 일상적인 생활면에서도 소홀할 거예요. 만약 반에 알려지면, 반 아이들도 비웃을 거고요. 이건 두 아이에게 큰 상처를 주는 일이에요. 그래서 이 칸은 무조건 채워야 해요. 아가씨가 싱글맘이라는 사실은 반드시 숨겨야 해요...”“일단 경수 도련님을 써넣을까요? 두 아이가 경수 도련님을 아빠라고 부르고, 도련님도 믿을만한 사람이잖아요. 만약 아가씨가 경수 도련님과 진지하게 만난다면 전 무조건 찬성이에요!”민이 이모의 마음속에 배경수는 차설아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고, 또 집안의 남자 주인 자리에 적합한 사람이었다. 두 사람이 결혼하게 되면 민이 이모도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하지만 차설아는 난처해서 말했다.“경수는 더더욱 안 되죠. 이미 저랑 인연을 끊은 사이에요. 아마 죽을 때까지 왕래하지 않을 거예요.”“그게 무슨 소리예요?”민이 이모는 놀라서 두 눈을 부릅뜨고 믿을 수 없는 표정이었다.“두 사람 혼인 신고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부부가 못되더라고 두 분은 평생 친구로 지
“네? 죽었다고요?”민이 이모는 놀란 표정을 짓더니,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멀쩡한 사람이, 그것도 한없이 도도하고 완벽하던 사람이 왜 갑자기 죽었을까?“맞아요, 죽었어요. 아마 절 구하다가 죽었을 거예요.”차설아는 무거운 표정으로 말했다.소영금은 자기 아들의 죽음이 라이벌의 소행임이 틀림없다고 생각했지만, 차설아도 피할 수 없는 책임이 있었다.만약 그녀를 구하기 위해 다리를 다쳐 목숨이 위태롭지 않았다면, 그 라이벌도 손쉽게 기회를 잡을 수 없었을 것이다.“사실이에요?”민이 이모는 차설아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성도윤은 누구보다 매정한 사람이고 차설아에게 많은 상처를 주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차설아를 구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했다니, 분명 오해가 있는 것이 틀림없다!“저도 사실인지는 정확히 몰라요. 적어도 제가 아는 정보를 종합해볼 때, 저 때문에 죽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저에게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어요. 그래서... 좀 슬퍼요.”차설아는 고개를 숙이고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중얼거렸다.그렇다. 그녀는 아주 슬펐다.지금까지 남자의 죽음에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은 듯 괜찮은 척했었다.하지만 깊은 밤 혼자 있을 때면 깊은 슬픔에 얽매이곤 했다.“죄책감에 슬픈 거예요? 아니면 아직 미련이 남아서 슬픈 거예요?”민이 이모가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저도 제가 왜 슬픈지 잘 모르겠어요. 이미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마음이 텅 비어버렸고 깊은 블랙홀이 나를 점점 삼키는 것 같았어요. 점점 나답지 않고, 비이성적으로 변하고 있어요...”차설아는 고통스럽게 몸을 웅크리고 손으로 머리를 감싸 안으며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저도 제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요.”민이 이모는 차설아를 꼭 안아주며 어린 시절처럼 부드럽게 달랬다.“괜찮아요, 아가씨. 다 지나간 일이에요. 한동안 부부로 지냈을 뿐이지 오랫동안 떨어져 지냈어요. 그 사람이 살아있든 말든 우리랑 상관없어요.”“하지만 저를 구하다가 죽었어요. 그래서 너무 괴
민이 이모의 위로를 받은 차설아는 갑자기 밝아지더니 눈물을 닦고, 더 이상 우울하지 말고 정신을 차리리라 다짐했다.그녀는 최면, 피아노와 같은 어떤 외부의 힘도 빌리지 않고 편안히 잠을 잤다.깨어났을 때는 이미 아침 7시가 넘었다.오늘 그녀는 민이 이모와 함께 원이와 달이를 몬테리 유치원에 데려가기로 했다.입학 첫날이고, 두 아이 모두 편입생이니 많은 일들을 처리해야 해서, 차설아는 일찍 가기로 했다.차설아는 곧바로 침대에서 일어났고, 두 아이도 속속 일어났다.두 아이에게 어떤 영양가 있고 맛있는 아침 식사를 만들어 줄까 고민하던 중 갑자기 초인종이 울렸다.문을 열고 보니 그날 심부름꾼이었다.“안녕하세요, 차설아 씨, 아침 식사 맛있게 하세요.”차설아가 더 묻기도 전에 심부름꾼은 바로 사라졌다.할 수 없이 그녀는 보온 통을 열고 안에 있는 아침 식사를 하나씩 꺼냈다.저번보다 아침 식사의 종류는 많이 줄었지만, 비주얼은 훨씬 정교하고 향긋한 냄새가 났다.“엄마, 아침 도착했어요?”게으름을 피우던 원이는 식탁 위의 아침을 보더니 활짝 웃었다.“도착하기는 했는데 진짜 먹을 거야? 지난번의 고통을 벌써 잊은 건 아니지?”차설아는 지난번에 먹었던 음식 맛을 생각하니 아직도 헛구역질이 나는 것 같아 다시 시도할 용기가 없었다.“엄마, 뭐가 두려운 거예요? 그래도 해안에서 유명한 셰프라고요. 가끔 실수하는 것도 정상이죠. 이번에는 분명 맛있을 거예요. 이미 맛있는 냄새가 나잖아요. 안심하고 드세요.”원이는 미스터 Q에게 매우 높은 기대감을 갖고 있었다.요 며칠 동안 요리 연습에 매진했으니 분명 크게 발전했을 것이다.“난 못 먹겠어. 원이 먼저 먹을래?”차설아는 위를 만지작거리며 지난번 맛을 떠올리자 하마터면 토할 뻔했다.“저도 못 먹겠어요...”원이는 어깨를 으쓱했다.비록 미스터 Q를 지지하지만, 마음속으로 지지하면 충분하다. 행동으로 지지할 용기는 아직 없었다.저번 미스터 Q의 솜씨 때문에 원이는 하마터면 아침 먹는 습관을 끊을
달이는 고양이처럼 천천히 씹더니 동그랗고 큰 눈이 순간 더 커졌다. 마치 하늘의 별처럼 반짝반짝 빛나고 감격스러워하며 말했다.“와, 아주 맛있는 케이크네요. 달이가 먹어본 케이크 중에 가장 맛있어요!”“진짜?”차설아와 원이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트라우마에 짓눌려 함부로 입을 열지 못했다.“원아, 네가 한 번... 먹어볼래?”원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엄마, 맛있는 건 엄마가 먼저 드셔야죠. 원이는 효자니까요.”차설아는 애써 웃음을 지어 보였다.“맞네, 효성이 지극한 엄마의 착한 아들이지?”차설아는 느릿느릿 케이크를 하나 집어 들고 혀로 조심스럽게 핥아보았다.기억 속의 맛처럼 ‘자극적’이지 않고 오히려... 맛있었다.차설아는 냉큼 한 개를 먹고 또 두 번째 케이크를 집었다.원이도 그 모습을 보고 하나를 집어 들어 맛보았다.“진짜 맛있네요. 공을 꽤 들인 모양이네요. 좋아요. 아주 좋아요.”원이는 먹으면서 계속 고개를 끄덕였다. 미스터 Q에 대한 호감도가 또 10점이 많아졌다.차설아는 크림을 입 주위에 가득 묻히고는 의심스러운 얼굴로 원이를 보며 물었다.“너 솔직히 말해. 네가 말하는 ‘해안의 유명한 셰프’가 도대체 누구야? 어떻게 알게 됐어? 엄마도 아는 사람이야?”“원이가 얼마 전에 사귄 친구예요.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엄마에게 소개해줄 거예요...”원이는 자신만만하게 말하고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신비롭게 말했다.“아주 훌륭한 친구인 것 같아요. 지금 당장 소개해주면 엄마가 단번에 빠져버리면 어떡해요. 아직 어떤 결점이 있는지도 모르니 좀 더 지켜봐야 해요. 엄마는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시면 돼요. 제가 엄마에게 완벽한 사람을 골라줄 테니까요!”“나를 위해 골라준다고?”“맞아요. 원이가 엄마의 남편을 찾아준다고 했잖아요. 벌써 잊었어요?”“음...”차설아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원이가 진짜 자신의 남편감을 찾고 있을 줄은 전혀 몰랐다.‘그럼 우리 원이가 찾아준 남편은 어떤 사람인지 기대해볼까? 원이 마음에 들었다면
민이 이모도 사실 속으로는 두 아이가 잘 적응하지 못할까 봐, 아버지가 없다고 놀림을 받을까 봐 걱정했지만 애써 덤덤한 척해야 했다.만약 민이 이모도 덩달아 걱정한다면, 차설아는 더욱 초조해할 것이다.“그래요, 전 이만 먼저 가볼게요. 오늘 확실히 중요한 일이 있어요.”차설아는 말을 마치고 민이 이모와 헤어졌다.그녀가 시계를 보니 성진이 말한 기자회견까지 아직 30분 남았다.30분 후, 해안은 새롭게 태어날 것이다. 아마 많은 거물이 참석할 것이니, 그녀도 당연히 이 특별한 순간을 직접 두 눈으로 보고 싶었다.호텔 밖에는 경비가 삼엄하고, 고급 차량이 줄지어 있었다. 경계선 밖에는 기자들로 붐비고, 인기 있는 인플루언서들도 많이 있었다.차설아의 붉은 색 페라리는 유독 눈에 띄었다. 그녀가 차에서 내리자 순간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았다.“저 여자 좀 봐. 아주 예쁘게 생겼어. 전에 핫했던 동영상 속 그 여자 아니야?”“성대 그룹 대표의 조강지처였잖아. 아쉽게 내연녀 때문에 집에서 쫓겨났지만.”간 큰 남자 인플루언서가 휴대폰을 들고 생방송을 하면서 차설아를 향해 쫓아갔다.“여러분들 기다리세요. 성대 그룹의 전 대표 부인과 이야기를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한때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던 차설아 씨가 왜 성대 그룹에 나타났을까요?”“여신님,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잠깐 인터뷰해도 될까요?”차설아는 얼굴을 찡그리며 손을 들고 말했다.“죄송합니다. 시간이 없어서요.”남자 인플루언서는 차설아를 가로막더니 뻔뻔하게 말을 이어갔다.“많은 시간을 빼앗지 않을 테니 팬들과 간단히 인사해 주세요!”“비켜요!”차설아는 차가운 눈빛으로 퉁명스럽게 말했다.그녀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바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온갖 짓을 하는 언론인이었으니, 당연히 좋은 태도를 보일 수 없었다.게다가 기자회견이 곧 시작되니 그녀는 확실히 시간이 촉박했다.남자 인플루언서는 일을 크게 만들수록 자신의 인기가 치솟는다는 것을 알고 즉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아이고, 대표
“그게...”차설아는 잠시 말을 잃었다. 거짓말을 잘하지 못하는 그녀는 특히 자신이 아끼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그랬다.“임신 테스트기도 다 믿으면 안 돼요. 이게 호르몬과 관련이 있는데 때로는 남자의 에스트로겐 수치가 너무 높으면 임신 반응이 나올 때도 있거든요.”박성훈이 차설아를 대신해 설명했다.비록 이 설명이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성도윤 같은 남자에게는 충분히 먹힐 만했다.역시나 성도윤은 그 말을 믿었고 얼굴에 실망한 감정이 가득했다.“정말 그럴 수도 있나요?”“그래. 혈액 수치가 가장 정확한 증거야. 혈액 검사 결과, 차설아 씨는 정말로 임신하지 않았어.”박성훈이 성도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위로했다.“괜찮아, 두 사람 아직 젊으니 앞으로 가능성이 많을 거야.”“미안해요, 도윤 씨. 나도 사실 두 줄이 나와서 임신한 줄 알았어요. 괜히 실망하게 해서 미안해요.”차설아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성도윤에게 사과했다.그의 마음은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실망한 기분도 잠시, 그는 차설아를 서둘러 달랬다.“바보야, 내가 미안해. 다 내가 부족해서야. 약속할게 이제부터 매일 밤 더 열심히 할 거야.”“엣헴!”박성훈이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이 두 사람 또 닭살 돋게 하네. 매일 밤 열심히 한다고? 뭘? 이러다 어떻게 열심히 하는지까지 말할 기세군.’“형, 목이 마르면 거실에 나가서 커피나 좀 마시세요. 이제 검사도 필요 없는 것 같은데.”성도윤이 직설적으로 내뱉었다.“설아 씨가 임신 안 됐다고 하자마자 바로 나를 쫓아내려고 하네? 아침에 그 애타게 부탁하던 모습 성도윤은 어디 갔지? 이제 다시 나를 모셔 오기 힘들 텐데.”박성훈이 팔짱을 끼고 웃으며 말했다.‘팔불출에는 정말 약이 없군.’“그럼 형은 그냥 여기 있어요. 내 능력으로 한 달 안에 아린이가 반드시 아기를 가질 수 있을 것 같으니까.”성도윤이 조금 유치하게 말했다. 아무리 도도하고 성숙한 남자라도 사랑 앞에서는 마치 어린아이 같았다.차설아가 남자의 팔을 잡고 말렸다.
“잘됐네요. 마침 딱 배고팠는데!”차설아는 피곤하고 정신이 흐릿했지만 기대에 가득 찬 목소리로 성도윤을 반겼다.성도윤이 사 온 케이크는 차설아가 가장 좋아하는 케이크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가게 주인은 분점을 열 계획도 없고 배달도 하지 않으며 매일 일정 수량만 판매했다.그래서 정말 오래 기다려야 하고 운이 좋아야만 살 수 있었다.가게 주인의 기분도 들쑥날쑥해서 기분이 좋을 때는 많이 팔지만 기분이 나쁘면 그날은 일찍 가게 문을 닫기 일쑤였다.단순히 줄을 서서 맛있는 케이크를 먹는 것도 있지만 케이크를 사기 위해 기다린 사람들의 수고와 정성도 들어 있었다.차설아는 숟가락으로 케이크 한 조각을 떠서 입에 넣었다. 그 부드럽고 차가운 질감에 그녀는 감동해서 눈물이 날 뻔했다.“맛없어?”차설아의 표정을 보고 성도윤이 이마를 찌푸리며 걱정스레 물었다.“아니요. 너무 맛있어서... 이제 다시 이런 케이크를 못 먹으면 너무 슬플 것 같아서요.”“바보, 그런 말을 왜 해? 앞으로 당신이 원하면 매일 사다 줄게.”성도윤이 차설아의 손을 잡고 진지하게 약속했다.“좋아요, 그럼 매일 먹고 싶어요. 당신이 매일 사다줘요...”차설아는 입술에 크림을 묻힌 채 남자에게 물었다.“그런데 매일 줄 서서 사 오느라 면 당신이 힘들지 않을까요?”“걱정 붙들어 매, 당신이 질리지만 않는다면 매일 가서 사 올 수 있어. 정 안 되면 내가 그 가게 주인을 찾아서 배워서 매일 내가 직접 만들어서 줄게...”성도윤은 차설아의 입가를 닦아주며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혹시 나한테 뭔가 숨기고 있는 거 아니야?”“어, 뭐가요?”차설아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그녀는 그의 관찰력이 이렇게 예리할 줄 몰랐다.“분명히 뭔가 있어.”성도윤이 단호하게 말했다.그는 돌아오자마자 분위기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지만 참으면서 기다렸다.그러다 차설아가 케이크를 먹으며 그런 말을 하자 분명히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있었던 걸 확신했다.“역시 당신 눈을 피할 수는 없네요. 사실,
박성훈은 비관적인 차설아를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몇 달 전만 해도 그녀는 자신감 넘치고 자유롭고 시원시원한 여자였다.그런데 지금은 눈을 잃고 독에 중독되어 마치 시들어버린 꽃처럼 처량해 보였다.“설아 씨, 제가 살아있는 허준 선생처럼 신통한 의사는 아니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약속할 수 있습니다. 반드시 최선을 다해 당신을 치료할 것이고 당신의 눈도 적합한 이식자가 나타나기만 하면 다시 원래대로 회복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너무 절망하지 마세요. 살아있는 한, 희망은 있는 법입니다.”그는 진중한 목소리로 차설아를 위로했다.물론 중금속 중독을 완전히 해독하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다.지금까지 성공 사례가 많지 않지만 의학 역사 속에서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과거에도 성공한 사례가 있는 만큼 자신도 연구를 거듭하면 반드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고마워요, 박 선생님. 그 말 한마디가 저한테 용기를 주네요.”차설아는 힘겹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박성훈이 있는 방향을 향해 말했다.“해독을 할 수 있든 없든, 그리고 제 눈이 다시 보이든 아니든, 한 가지만 부탁드리고 싶어요. 이 사실을 도윤 씨한테는 절대 알리지 말아 주세요. 도윤 씨가 지금 너무 지쳐 있어요. 더 이상 그이가 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아요.”“걱정 마세요. 저는 그런 말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박성훈은 차설아의 성도윤을 향한 깊은 감정에 감탄했다.이토록 힘든 상황에서도 자신보다 사랑하는 남자를 먼저 걱정하는 차설아를 보면서그녀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느껴졌다.“제 아이도 지킬 수 없겠죠?”차설아가 한참을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박성훈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맞아요. 아이는 지킬 수 없습니다.”그가 힘겹게 이어 말했다.“설아 씨가 현재 중금속 중독 상태고 해독을 위해 강한 약을 복용해야 합니다. 이 약들은 태아의 성장에 심각한 영향을 미쳐요. 제 의견으로는 아직 초기일 때 아이를 포기하는 것이 낫습니다.”“그럴 줄 알았어
박성훈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이런 상황이라면 차라리 빨리 죽는 게 낫다고 할 수도 없고...’하지만 그는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했다.혈액 검사 보고서에 따르면 차설아의 여러 혈액 수치에서 이상이 발견되었고 그녀의 지금 상태로 본 결과, 박성훈은 차설아가 중금속 중독에 걸렸다고 판단했다.중금속 중독은 쉽게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지는 않지만 서서히 신체의 각 기관을 쇠약하게 만들고 신경을 마비시키는 증상이었다.초기에는 극심한 피로와 졸음을 유발하며 무기력하게 만들지만 후기로 갈수록 신경과 장기가 손상되며 극심한 통증을 수반하게 되고 이러한 증상은 그야말로 생지옥과도 같았으며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정도의 고통이었다.박성훈은 어떻게 입을 열어야 할지 고민하다 결국 우선 잔인한 진실을 감추기로 결정했다.“어쨌든 걱정 마세요. 저희가 반드시 치료해 드릴 겁니다.”그렇게 말은 했지만, 사실 중금속 중독을 완전히 치료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게다가 투여된 독의 종류를 정확히 파악해야만 적절한 치료법을 적용할 수 있었고 그러려면 독을 투여한 사람이 어떤 중금속 원소를 사용했는지 솔직하게 밝혀야 한다.“지금부터 최근 식사 내용을 정확히 말해 주세요. 혹시 식사 외에도 평소 드시지 않던 걸 섭취한 적 있나요?”박성훈이 진지한 눈빛으로 물었다.“저 중독된 거죠?”차설아는 질문에 답하지 않고 되레 되물었다.“어떤 독에 중독됐는지 알 수 있어요?”“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초기 판단으로는 중금속 중독일 가능성이 큽니다.”박성훈은 차설아가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다는 사실에 순간 당황했지만 곧바로 숨김없이 사실을 털어놓았다.이런 경우, 환자와 의사가 완전히 솔직하게 소통해야만 치료에 도움이 되기에 아무리 잔인한 현실일지라도 그녀가 사실을 알아야 했다.“중금속 중독...”차설아는 그 단어를 듣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몸이 서서히 차가워지며 절망감이 엄습했다.그녀는 예전에 비슷한 뉴스를 본 적이 있었다.한 명문대 여학생이 룸메이트의 질투로
“무슨 일인데요?”박성훈이 갑자기 진지해지며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차설아를 바라보았다.“뭘 알아내든 상관없어요. 도윤 씨한테는 좋은 얘기만 해주세요. 안 좋은 결과는 절대 말하지 마시고요.”차설아가 간결하게 자신이 원하는 걸 얘기했다.그녀는 방금 전에 애써 성도윤을 떨어뜨려 놓으려 했던 이유가, 그가 걱정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 거짓말을 유지하려면 박성훈의 협조가 필요했다.“하... 역시 그럴 줄 알았어요.”박성훈은 차설아가 이런 부탁을 할 것이라는 걸 예상했지만 그녀를 보며 여전히 마음이 아팠다.그런 상태에서 차설아는 여전히 성도윤을 걱정하며 그가 조금이라도 슬퍼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두 사람 서로를 진짜로 사랑하나 보네...’“걱정 말아요. 내가 분위기 못 읽고 아무 말이나 하는 사람도 아니고 어떤 걸 얘기할지 잘 알고 있어요.”박성훈이 차설아를 안심시키듯 말했다.“그리고 설아 씨도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요. 내가 신의 손을 가진 명의는 아니지만 그래도 의술은 좀 하는 편이니까 저희 말대로만 따르면 큰 문제는 없을 거예요. 게다가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니잖아요. 어쩌면 단순히 임신 초기에 너무 피곤해서 그런 걸 수도 있어요.”“정말 그런 거였으면 좋겠네요.”차설아는 힘없이 미소를 지으며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하지만 검사 결과가 결코 좋을 리 없다는 것을 그녀는 이미 직감하고 있었다. 상대는 처음부터 그녀를 해칠 작정이었고 가볍게 봐줄 리가 없었다.만약 배경윤이 조금만 늦게 알아차렸더라면 지금쯤 그녀는 이미 손쓸 수 없는 상태였을지도 모른다.지금 당장은 그 정도까지는 아닐지라도 분명 좋은 상태는 아닐 것이다.얼마 지나지 않아 혈액 검사 결과가 나왔다.검사 결과를 살피던 그의 표정은 한층 무거워졌고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검사 결과는 너무 처참했다.“어때요, 박 선생님?”차설아는 몽롱한 상태에서 거의 잠들 뻔했지만 억지로 정신을 붙잡고는 줄곧 침묵하고 있는 박성훈에게 물었다.“뭐라고 말해야
성도윤은 자책감에 사로잡혀 당장이라도 할복이라도 할 기세였고 박성훈은 그런 그를 진정시키려 일부러 괜찮을 거라고 말한 것이었다.하지만 사실, 차설아의 심장 박동은 이상했고 거의 보름 동안 지속된 무기력함과 과도한 졸음까지 고려했을 때, 그녀의 몸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게 분명했다.그리고 그 원인은 단순히 임신 때문이 아니라는 것도 박성훈은 어렴풋이 감이 왔다.하지만 지금 당장 혈액 검사 결과도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성급하게 결론을 내릴 수는 없었다.괜히 성도윤에게 불안감을 주면 그가 차설아에 대한 과보호 수준을 고려할 때 당장이라도 미쳐버릴 게 뻔했기 때문이다.“정상이면 다행이야.”성도윤은 박성훈의 말을 듣자마자 한숨을 내쉬며 마치 온 세상의 짐이 내려간 듯 안도했다.“들었지, 당신 괜찮대. 그냥 임신해서 피곤한 것뿐이래. 내가 괜히 겁먹고 난리 친 거야. 미안해. 내가 이런 경험이 없다 보니까 괜히 걱정했네.”성도윤은 기뻐하며 차설아를 꼭 끌어안았다.그리고 그녀의 배를 손으로 가볍게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야, 꼬맹이. 엄마 너무 힘들게 하지 마라? 너 때문에 엄마가 얼마나 피곤해하는지 봤지? 만약 엄마를 더 힘들게 하면, 네가 세상에 나오는 순간, 아빠가 먼저 너 혼쭐낼 거야!”차설아는 그의 유치한 농담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그만 해요. 진짜 왜 이렇게 점잖지 못해요?”“하아, 두 사람 오늘 너무 닭살 커플인 거 아니야?”옆에서 이 모든 걸 보고 있던 박성훈이 질색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 정도면 거의 ‘고문 수준’의 애정 행각이었다.그때, 차설아가 성도윤을 바라보며 갑자기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도윤 씨, 나 갑자기 케이크가 먹고 싶어졌어요. 지금 가서 사 올 수 있어요?”“지금?”성도윤은 순간 당황했다.그는 케이크를 사 오는 게 싫은 게 아니었다. 하지만 혈액 검사 결과가 아직 나오지 않은 상태라 결과를 확인한 후에 움직이고 싶었다.“네. 지금 당장이요. 지금 먹고 싶다고요.”차설아가 일부러 짓궂게 물었다.“
박성훈은 처음엔 가벼운 농담을 던지며 분위기를 풀어주고 있었지만 곧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잠깐만!”그는 이마를 찌푸리며 성도윤을 바라보더니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왼쪽 아래로 2~3cm 정도 더 옮겨 봐.”성도윤도 덩달아 긴장해졌다.그는 박성훈의 지시대로 청진기를 차설아의 심장 왼쪽 아래 3cm 지점으로 옮기며 조심스럽게 물었다.“뭔가 이상한 점 있나요?”“...”박성훈은 대답하지 않고 그저 얼굴을 굳힌 채 조용히 청진기에 집중했다.한참 후에야 그는 청진기를 내려놓으며 말했다.“지금은 확실하게 들리는 건 없어. 혈액 검사 결과까지 봐야 정확하게 알 거야.”차설아는 처음부터 차분하게 검사를 받으며 잘 협조하고 있었지만 무언가를 깨달은 듯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그리고 박성훈을 향해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늘 검사는 여기까지만 할까요? 박 선생님도 도착하자마자 이것저것 살펴보셔서 피곤할 테고 저도 피를 너무 많이 뽑아서 그런지 좀 지치네요. 나머지는 내일 하는 게 어때요?”사실 그녀는 자신의 몸에 뭔가 이상이 있다는 걸 감지하고 있었다.하지만 그게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확신할 수 없었고 괜히 성도윤이나 다른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게다가 현이를 통해 누군가 자신을 해치려 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아냈다.그 사람의 정체만 밝혀지면 직접 해결할 생각이었다.“온 지 얼마 안 돼서 피곤하지는 않은데요? 게다가 그냥 검사 결과만 보면 되는 거라 괜찮아요.”박성훈이 어깨를 으쓱하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저택에 온 지 이제 겨우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았고 그동안 한 거라곤 심장 소리 한 번 들은 게 전부인데 대체 뭐가 그렇게 피곤하다는 건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제가 피곤해서 그래요. 그리고 오늘 꼭 검사를 다 마쳐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차설아의 목소리는 차분하면서도 단호했고 명확한 거절의 의미였다.더 이상 검사에 협조할 생각이 없는 듯한 그녀를 보면서 박성훈은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그리고 잠시 고
박성훈은 말을 마치고 청진기를 꺼냈다. 그러더니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차설아의 옷 안으로 넣으려 했다.“잠깐!”성도윤이 그 장면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재빠르게 박성훈의 손을 붙잡고 제지했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청진하고 있지 그럼 내가 뭐 하는 걸로 보여?”박성훈이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내가 해요.”성도윤이 단호하게 청진기를 낚아채더니, 정색하며 말했다.“내 아내는 부끄러움을 많이 타요. 이런 건 내가 직접 할 테니까, 형은 듣기만 해요.”박성훈이 말없이 그를 보고 있자 성도윤이 되물었다.“왜, 문제 있어요?”“문제라기보단... 좀 오버 아니야?”“어디가 오버에요? 형이 직접 하는 게 더 이상한 거지.”‘누가 알아? 검사하는 동안 실수로 엉뚱한 곳이라도 건드릴지.’보통 때는 몰라도 지금처럼 바로 눈앞에서 보고 있는 상황에선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하아... 역시 소설에서만 보던 ‘집착광공’이 실존하는구나.”박성훈이 이마를 짚으며 감탄했다.자신이 가끔 보던 ‘재벌 남주’ 소설들이 그냥 창작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었다.현실이 오히려 소설보다 더 과장되어 있었다.“헛소리 말고 어디에 대야 하는지만 알려 줘요.”성도윤이 청진기를 들고 박성훈을 노려보았다.“음... 왼쪽 쇄골 중앙선과 다섯 번째 갈비뼈 사이 경계에 대면 돼.”성도윤의 태도가 워낙 단호해서 박성훈은 그냥 순순히 위치를 알려 주었다.“잠시만요.”성도윤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청진기를 차설아의 잠옷 안으로 밀어 넣었다.그러더니 여기저기 더듬으며 위치를 찾기 시작했다.“쯧쯧.”박성훈은 청진기를 끼고 있었기에 성도윤이 어떻게 검사하고 있는지 소리로 다 들을 수 있었다.하지만 감히 뭐라고 할 수도 없었고 결국은 그냥 내버려두기로 했다.‘어휴, 성도윤이니까 참는 거지.’그가 속으로 체념하는 사이, 성도윤이 한참 동안 위치를 못 찾자 결국 한마디 내뱉었다.“이 정도도 못 견디면 나중에 내진 검사할 때는 난리 나겠네?”“뭐요?”
차설아는 앞이 보이지 않는 대신 촉각과 후각이 무척 예민했다.방에 들어서는 순간, 그녀는 공간이 달라졌다는 걸 바로 알아차렸다.예전엔 책 냄새가 가득하던 방이 이제는 소독약 냄새로 가득 차 있었고 조명도 더 밝고 뜨거워진 느낌이었다.이제 차설아는 자신의 모든 걸 성도윤에게 맡긴 상태였다.그가 정말로 해부라도 하겠다고 나선다면 그저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당신 상상력 정말 대단한데? 우리 애도 나중에 소설가 체질이었으면 좋겠다.”성도윤은 차설아의 넘치는 상상력에 웃음이 터졌고 그녀의 손을 잡고 안쪽으로 이끌었다.“차설아 씨, 지금 혈액 검사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전반적인 건강 상태를 확인해야 하거든요.”간호사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설명했다.“네, 하세요. 어차피 지금 나는 도마 위 생선이라 목숨은 이미 여러분들 손에 있으니까요.”차설아는 자조적인 농담을 하며 팔을 내밀었다.곧이어, 조용한 방 안에 사각사각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바늘이 그녀의 정맥을 찔렀다.“살살 좀 해 주세요.”성도윤은 차설아의 살짝 찡그린 얼굴과 연달아 뽑혀 나오는 혈액을 보며 속이 상해 간호사에게 신신당부했다.그때, 앞쪽에서 장난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성 대표님의 아내 사랑이 참 넘치시네요. 난 조용히 보조만 하려고 온 건데 이렇게까지 과한 애정 행각을 볼 줄은 몰랐어요. 좀 자제하세요.”그 말투를 보아하니 성도윤이 말했던 ‘대단한 의사’가 틀림없었다.차설아는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그리고 순간 놀란 듯 말했다.“이 목소리... 어쩐지 익숙한데요?”“당연하지. 우리랑 꽤 인연이 깊은 사람이거든.”성도윤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설마... 이분...”차설아는 머릿속에서 기억을 더듬었다.그리고 순간적으로 깨닫고 외쳤다.“박 선생님?”“하하하. 나를 이렇게 빨리 기억해 주다니, 영광인데요? 이걸로 승부는 끝났네요.”“도윤아, 나중에 밥 한 끼 사.”박성훈은 호탕하게 웃으며 차설아가 자신을 단번에 알아본 것이 무척이나 자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