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는 고양이처럼 천천히 씹더니 동그랗고 큰 눈이 순간 더 커졌다. 마치 하늘의 별처럼 반짝반짝 빛나고 감격스러워하며 말했다.“와, 아주 맛있는 케이크네요. 달이가 먹어본 케이크 중에 가장 맛있어요!”“진짜?”차설아와 원이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트라우마에 짓눌려 함부로 입을 열지 못했다.“원아, 네가 한 번... 먹어볼래?”원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엄마, 맛있는 건 엄마가 먼저 드셔야죠. 원이는 효자니까요.”차설아는 애써 웃음을 지어 보였다.“맞네, 효성이 지극한 엄마의 착한 아들이지?”차설아는 느릿느릿 케이크를 하나 집어 들고 혀로 조심스럽게 핥아보았다.기억 속의 맛처럼 ‘자극적’이지 않고 오히려... 맛있었다.차설아는 냉큼 한 개를 먹고 또 두 번째 케이크를 집었다.원이도 그 모습을 보고 하나를 집어 들어 맛보았다.“진짜 맛있네요. 공을 꽤 들인 모양이네요. 좋아요. 아주 좋아요.”원이는 먹으면서 계속 고개를 끄덕였다. 미스터 Q에 대한 호감도가 또 10점이 많아졌다.차설아는 크림을 입 주위에 가득 묻히고는 의심스러운 얼굴로 원이를 보며 물었다.“너 솔직히 말해. 네가 말하는 ‘해안의 유명한 셰프’가 도대체 누구야? 어떻게 알게 됐어? 엄마도 아는 사람이야?”“원이가 얼마 전에 사귄 친구예요.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엄마에게 소개해줄 거예요...”원이는 자신만만하게 말하고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신비롭게 말했다.“아주 훌륭한 친구인 것 같아요. 지금 당장 소개해주면 엄마가 단번에 빠져버리면 어떡해요. 아직 어떤 결점이 있는지도 모르니 좀 더 지켜봐야 해요. 엄마는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시면 돼요. 제가 엄마에게 완벽한 사람을 골라줄 테니까요!”“나를 위해 골라준다고?”“맞아요. 원이가 엄마의 남편을 찾아준다고 했잖아요. 벌써 잊었어요?”“음...”차설아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원이가 진짜 자신의 남편감을 찾고 있을 줄은 전혀 몰랐다.‘그럼 우리 원이가 찾아준 남편은 어떤 사람인지 기대해볼까? 원이 마음에 들었다면
민이 이모도 사실 속으로는 두 아이가 잘 적응하지 못할까 봐, 아버지가 없다고 놀림을 받을까 봐 걱정했지만 애써 덤덤한 척해야 했다.만약 민이 이모도 덩달아 걱정한다면, 차설아는 더욱 초조해할 것이다.“그래요, 전 이만 먼저 가볼게요. 오늘 확실히 중요한 일이 있어요.”차설아는 말을 마치고 민이 이모와 헤어졌다.그녀가 시계를 보니 성진이 말한 기자회견까지 아직 30분 남았다.30분 후, 해안은 새롭게 태어날 것이다. 아마 많은 거물이 참석할 것이니, 그녀도 당연히 이 특별한 순간을 직접 두 눈으로 보고 싶었다.호텔 밖에는 경비가 삼엄하고, 고급 차량이 줄지어 있었다. 경계선 밖에는 기자들로 붐비고, 인기 있는 인플루언서들도 많이 있었다.차설아의 붉은 색 페라리는 유독 눈에 띄었다. 그녀가 차에서 내리자 순간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았다.“저 여자 좀 봐. 아주 예쁘게 생겼어. 전에 핫했던 동영상 속 그 여자 아니야?”“성대 그룹 대표의 조강지처였잖아. 아쉽게 내연녀 때문에 집에서 쫓겨났지만.”간 큰 남자 인플루언서가 휴대폰을 들고 생방송을 하면서 차설아를 향해 쫓아갔다.“여러분들 기다리세요. 성대 그룹의 전 대표 부인과 이야기를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한때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던 차설아 씨가 왜 성대 그룹에 나타났을까요?”“여신님,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잠깐 인터뷰해도 될까요?”차설아는 얼굴을 찡그리며 손을 들고 말했다.“죄송합니다. 시간이 없어서요.”남자 인플루언서는 차설아를 가로막더니 뻔뻔하게 말을 이어갔다.“많은 시간을 빼앗지 않을 테니 팬들과 간단히 인사해 주세요!”“비켜요!”차설아는 차가운 눈빛으로 퉁명스럽게 말했다.그녀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바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온갖 짓을 하는 언론인이었으니, 당연히 좋은 태도를 보일 수 없었다.게다가 기자회견이 곧 시작되니 그녀는 확실히 시간이 촉박했다.남자 인플루언서는 일을 크게 만들수록 자신의 인기가 치솟는다는 것을 알고 즉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아이고, 대표
차설아는 더욱 화가 치밀어 올라 인플루언서들을 향해 소리쳤다.“시간 없다고 분명히 말했는데 왜 하나같이 달라 붙어서 길을 막아? 당장 비켜! 계속 막고 있으면 나도 내가 어떻게 나올지 몰라.”회의장 밖에 가로막힌 언론과 인플루언서들은 원래 익살스럽고 무례한 집단으로, 차설아가 폭발하는 것을 보고 더욱 흥분하더니 끊임없이 여자의 인내심을 자극했다.차설아는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게 되자 주먹을 불끈 쥐고 폭발하기 직전이었다.이때 마이바흐 한 대가 천천히 다가오더니, 양복을 곱게 차려입은 잘생긴 남자가 경호원의 호위를 받으며 차에서 내렸다.“연약한 여자를 곤란하게 하는 건 무슨 경우죠? 의견이 있다면 저에게 따지시죠!”그는 바로 오늘 성대 그룹 기자회견의 주인공 성진이었다.“성진이다! 최근 비즈니스계에서 부상하고 있는 스타 성진이야!”“성대 그룹을 인수한다고 들었어. 이는 곧 성도윤을 대신해 해안의 새로운 왕이 되는 것을 암시하지!”“오늘 아마 성도윤의 사망 소식을 공식 발표하겠지. 완전 대박 뉴스! 전 세계가 지켜보고 있으니 뉴스를 가장 먼저 뺏어오면 당장 은퇴하더라도 편안한 노후를 보낼 수 있을 거야!”한 무리의 사람들은 즉시 목표를 돌려 성진을 겹겹이 에워쌌다.차설아에게 뺨을 맞은 남자 인플루언서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카메라를 향해 투덜거렸다.“연약한 여자라니요. 어떤 연약한 여자가 성인 남자를 뺨 한 대로 날려 보내요? 원더우먼이 따로 없구먼!”차설아는 드디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주변 공기가 갑자기 맑아진 느낌이었다.그녀는 긴 머리를 정리하고, 무표정하고 도도한 모습으로 호텔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형수님, 왜 그렇게 빨리 가요! 같이 가요!”성진은 눈빛으로 경호원에게 기자들과 인플루언서들을 쫓아내라고 명령하고, 자신은 당당하게 차설아의 곁에 다가갔다.“오늘 올 줄 알았어요. 하지만 여기 온 목적이 저를 위해서인지, 죽은 형을 위해서인지는 모르겠네요.”남자는 웃는 듯 마는 듯 고개를 숙인 채 여자를 바라보며 둘만이 들을
“두 사람 원래 서로 엄청나게 사랑하는 사이였는데 성도윤이 가로챘다잖아. 성진이 이번에 돌아온 것도 빼앗긴 애인을 되찾기 위해서래...”“그러고 보니 성도윤의 죽음에 저 두 사람이 관련된 건 아닐까... 쯧쯧, 역시 재벌가는 복잡해!”차설아는 멋대로 소설을 쓰는 언론과 인플루언서들을 상대하기 귀찮아 곧바로 호텔 로비로 걸어갔다.로비 전체는 고급스러운 분위기였다.발표대에는 성대 그룹의 로고가 붙어 있었고, 그 앞에는 세계 각지의 방송사 로고가 붙은 마이크가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기자들은 무대 아래 의자에, 성대 그룹 고위층들은 단상에 앉아 있었다.차설아는 성대 그룹 고위층이라고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겸손하게 맨 뒷줄에 앉았다.성진은 입장하자마자 모두의 주목을 받았고 열렬한 환호성을 자아냈다.무대 아래에는 기자 외에도 사업 파트너, 재벌가 등 손님들이 있었는데, 차설아는 그녀와 대립각을 세웠던 배성준까지 보았다.오늘 기자회견은 향후 해안의 전체 사업 구도와 관련되어 있으니 명문 높은 가문들은 모두 초대되었고, 다들 이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차설아는 기자회견이 시작되기 전에 가방에서 휴드폰을 꺼내 오늘의 뉴스를 훑어보려다가 화가 치밀어 올랐다.뺨 한 대로 남자 인플루언서를 날려 보내던 장면, 그리고 성진과 입구에서 ‘알콩달콩’하던 영상은 각종 플랫폼의 실검에 올랐다.네티즌들은 그녀와 성진이 바람을 피웠다는 소문을 퍼뜨리고, 심지어 성도윤에게 복수하기 위해 둘이 연합하여 성도윤을 살해했다고 했다.“젠장!”차설아는 너무 화가 난 나머지 피를 토할 것 같았고, 다른 계정으로 등록해 악플러들에게 반박했다.「다들 하나 같이 눈이 멀었나 봐? 시간 촉박해서 서두르는 건 안 보여? 이슈를 만들기 위해 파리 떼처럼 몰려대는 인플루언서들에게 뺨 한 대도 가벼운 거지. 나였으면 발로 차버렸어!」「그리고, 여자는 분명 성진이 귀찮아 죽을 표정을 하고 있는데 이게 알콩달콩이라고? 시력 정상 맞음?」그녀의 반격은 오히려 더 많은 공격을 끌어냈다.네티즌
“어쩐지 누군가 자꾸 제 행적을 캐고 다닌다 했어요. 바이러스 같은 IP주소를 계속 차단했는데 바로 도현 씨였군요... 제 생명의 은인.”차설아는 붉은 입술을 끌어당기며 옛친구를 향해 웃었다.이렇게 큰 해안에서 자신을 계속 주시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감동했다.“생명의 은인이라면서 4년이나 피해 다녔어? 내가 얼마나 걱정한 줄 알아? 어쩜 그렇게 매정해?”사도현은 이전보다 더 매력적이고 분위기 있고 종잡을 수 없는 여자를 보며 마음이 복잡했다.한때 가슴이 뛰었던 여자이고, 목숨 걸고 구해줬던 여자이니, 두 사람 사이에 아무런 결과가 없을지라도 사도현의 마음속에 차설아는 여전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오랜 세월 동안 사도현과 성도윤이 지구 곳곳을 뒤져 차설아를 찾았다고 했지만, 사실 사도현 혼자만의 집착에 가까웠다.성도윤은 일찍이 차설아를 찾는 것을 포기했지만, 사도현은 뭔가에 쓰인 것처럼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그녀를 찾으려고 노력했다.얼마 전, 차설아가 해안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알았을 때 이미 그녀와의 만남을 기대했지만 계속 기회가 없었다.그런데 이런 자리에서 다시 만날 줄이야!“우리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죠. 성대 그룹 고위층들이 왜 성진 그 쓸모없는 미친놈을 추켜세우는지 알아요? 이건 자멸 행위나 다름없잖아요?”차설아는 곧바로 화제를 돌려 사도현의 입에서 뭔가 유효한 정보를 캐내려 했다.사도현은 나른하게 의자에 기대더니 다리를 꼬고 웃는 듯 마는 듯 무대 위 반짝이는 성진을 보며 말했다.“누가 알겠어. 전에 도윤이 형이 성대 그룹은 겉으로는 멀쩡하지만 내부는 썩기 시작했다고 했어. 여러 파벌이 서로 물고 뜯으며 싸우는데, 고대 조정의 투쟁에 버금갈 정도래. 어쩌면 성진은 그 어느 파벌의 개에 불과할지도 몰라. 도윤이 형이 실세한 틈을 타 꼭두각시를 내세운 것뿐이지. 마치 중국의 부의 황제처럼 겉으로는 빛이 나나 실제적으로는 아무런 권력도 없는 것처럼 말이지!”차설아는 즉시 중요한 정보를 포착하고 물었다.“형이 실세한 것
“연약한 여자요?”차설아는 피식 웃더니 말했다.“그 늙은이들의 뼈를 내가 다 삼킬 수 있길 기도해야죠!”“대단해! 아주 용감해. 난 무조건 설아쨩을 응원해.”사도현은 자신만만한 차설아를 보며 존경하는 마음이 마구 솟구쳐올랐다.차설아는 계속 말을 이었다.“솔직히, 해안 전체에서 제가 유일하게 꺼리는 건 성도윤 한 사람뿐이에요. 그런데 성도윤이 사라졌으니, 그 늙은이들은 결국 내 손바닥 안이죠.”아주 오만한 말이었지만, 그녀는 그럴만한 저력이 있었다.“그러고 보니 도윤이 형이 진짜 사라지기를 바라고 있는 거네? 쯧쯧... 우리 형은 설아쨩에게 진심이었는데, 설아쨩은 죽기를 바라고 있다니.”“진심이었다고요?”차설아는 코웃음을 쳤다.“그런 터무니 없는 말을 하면 양심에 찔리지도 않아요? 그것도 성도윤의 진심이라면, 차라리 도현 씨에게 양보할게요. 어때요?”“도윤이 형에게 화났다는 거 알아. 하지만 형도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어. 두 사람 사이에는 오해가 있다고. 그 오해 때문에 4년 동안 서로 떨어졌지만, 여전히 서로를 잊지 못하고 있어. 하지만...”“그만 해요!”차설아는 귀찮다는 듯 사도현의 말을 자르고 차갑게 말했다.“이미 죽은 사람이에요. 지금 이런 말을 하는 건 아무런 의미도 없어요. 다시 지나간 상처를 들출 뿐이죠...”“만약 형이 살아서 돌아온다면? 그럼 한 번 더 기회를 줄 수 있어?”사도현이 또 한 번 물었다.이 대답은 그뿐만 아니라 성도윤도 궁금할 것이다.차설아는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딱 잘라 말했다.“아니요!”애초에 성도윤과 화해한 것은 그가 이미 죽었기 때문이다.만약 그가 다시 살아 돌아온다면 바보처럼 놀아난 것이 되니 더 증오하게 될 것이다.“그래. 두 사람 사이 참 복잡해. 옆에서 아무리 애를 써도 전혀 도움이 안 돼...”사도현은 연신 한숨을 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왜 계속 저한테만 물어요? 들어보니 도현 씨도 요 몇 년 동안 사랑앓이 좀 했다면서요? 어린 여자에게 사로잡혀 도현 씨답지 않은
현장은 떠들썩해지더니, 플래시가 쉴 새 없이 터졌다. 모두가 손꼽아 기다리던 상황이 이렇게 빨리 다가올 줄은 몰랐다.차설아와 사도현도 잡담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무대 위를 응시했다.성진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입꼬리를 올리더니 허리를 굽혀 성명원을 향해 초청하는 자세를 취했다.“큰아버지 말씀이 일리가 있어요. 지금 큰아버지는 성대 그룹의 지분만 소유하고 실권은 없지만, 성씨 가문에서 할아버지를 제외하고 지위가 가장 높으신 분이니 이 자리는 제가 내어주는 게 맞죠.”성명원은 체면치레를 부릴 겨를도 없이 언론사들 앞에서 말했다.“내가 그 자리에 앉겠다고 이 난리를 피우는 줄 알아? 성대 그룹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 뒤에서 무슨 수작을 부리는 거야! 옛날 같았으면 권력 찬탈을 꾀한 죄로 바로 처형감이야!”“큰아버지 말씀이 지나치시네요. 전 단지 도윤이 형에게 일이 생겨 회사에 우두머리가 없으니 해외에서 바로 달려온 것뿐이에요. 뒤숭숭한 회사 분위기를 안정시키기 위해 이사회에서 다들 심사숙고한 끝에 내린 결정이에요. 저는 상황에 떠밀려 그 결정을 따를 수밖에 없었어요!”성진은 두 손을 내 흔들며 어쩔 수 없는 상황인 것처럼 말했다.거의 폭발 직전이었던 성명원은 그의 말을 듣고 제대로 폭발해버렸다.“교활한 놈. 자기가 저지른 일에 대해 인정할 용기는 없나 보지? 그럼 어디 한번 말해봐. 대체 어떤 사람들의 결정이야? 사람들을 매수하기 위해 대체 얼마나 많은 돈을 퍼부은 거야?”성명원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더니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성대 그룹의 몇몇 이사진들을 바라보았다.그중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은 허영생이었다.허영생의 아버지는 당시 차설아의 할아버지와 함께 전쟁에서 싸우던 전우였고, 할아버지를 보좌하여 성대 그룹을 설립했다. 허영생도 함께 성대 그룹에 들어와 이사회의 6대 구성원 중 한 명이 되었고, 늘 성도윤에게 충성하고 지위가 가장 높은 사람이었다.하지만 오늘 그는 평소와 다른 모습이었다.“자네는 이미 물러났으니 성대 그룹이 어떻게 발전하든
“아니에요!”차설아는 차갑게 부정했다.“그저 제 의견을 말했을 뿐이지 그 인간이랑 전혀 상관없어요.”기자 회견은 현장 인원의 조정하에 계속 진행되었다.성대 그룹의 홍보 부서 관계자는 현재 그룹이 진행 중인 프로젝트, 그룹의 재력과 조직 구도를 언론에 소개했다.마지막으로 홍보 부서는 언론을 향해 정중하게 말했다.“성대 그룹은 곧 새롭게 태어날 것입니다. 성대 그룹 이사회와 각 대주주가 공동으로 선출한 신임 대표 성진 씨를 앞으로 모시도록 하겠습니다.”현장에는 뜨거운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이전 성도윤의 기자 회견에 절대 뒤지지 않는 분위기였다.성진은 언론을 향해 당당하게 말했다.“성대 그룹은 지금 전대미문의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성대 그룹의 미래와 해안 전체를 위해 저는 기꺼이 성대 그룹의 대표 자리를 도맡아...”이때 사도현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성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도발했다.“성대 그룹의 대표는 성도윤 아닌가요? 성도윤이 이끄는 그룹은 해가 갈수록 번창하고 있는데 당신이 무슨 근거로 인계한다는 거죠? 성도윤 대표의 의견은 물어본 적 있나요?”성진은 웃으며 말했다.“아주 중요한 부분을 캐치하셨네요. 안 그래도 여러분께 자세히 설명하려고 했습니다.”“우선, 이사회와 각 주주의 투표 결과로 저는 대표로 선발되었습니다. 6명의 이사진들 중, 찬성 3표, 기권 1표, 반대 2표로 주주 과반수가 이사회의 결정에 동의했습니다. 그러니 저는 여러분들이 선임한 대표로...”“하하, 웃기네!”사도현은 바로 말을 이었다.“내 기억이 맞는다면 성대 그룹의 가장 많은 지분을 보유한 사람은 성도윤 대표예요.그 말은 성도윤이 스스로 자신을 대표 자리에서 끌어내렸다는 건가요?”“좋아요, 아주 중요한 질문을 하셨습니다. 아마 많은 분의 큰 관심사이기도 하겠죠. 왜 도윤이 형이 자신을 대표 자리에서 끌어내렸는지 말이에요.”여기까지 말한 성진은 뜸을 들였고, 모든 사람은 숨죽여 기다렸다.엄밀히 말하면 이건 비밀이 아니라 진작 떠돌고 다니는 소문이었
예상치 못한 성도윤의 반응에 박성훈은 진지하게 물었다.“이런 일이 있었다는 걸 몰랐던 건 아니지?”성도윤은 입을 꾹 다문 채 굳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종업원이 다른 술잔을 가지고 달려오더니 술잔에 술을 따라주었다.“정말 모르고 있었던 거야?”박성훈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말했다.“그럴 리 없었을 텐데... 너랑 차설아 씨는 특별한 사이잖아. 차설아 씨의 오빠한테 그런 일이 생겼으면 제일 먼저 너한테 전화해야 하는 거 아니야?”“특별한 사이 아닌데요.”성도윤은 술을 한 모금 마시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뭘 또 부정하고 그래! 누가 봐도 두 사람은 서로 미칠 듯이 사랑하는데 티 내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 같았어.”박성훈은 한 도시에 정착하지 않고 여행 다녀서 해안시의 상황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성도윤과 차설아가 원래 부부였다는 것을 모른 채 지켜보아도 성도윤과 차설아 사이의 기류가 미묘하다는 것쯤은 눈치챌 수 있었다.“예전에 머리를 다치는 바람에 차설아와 어떤 사이였고 어떤 일이 벌어졌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아요. 주변 사람들은 차설아가 나를 해치려고 했다고 말했고 차설아도 인정하는 눈치였어요. 차설아는 내가 하마터면 차설아의 손에 죽을 뻔했고 그 일로 인해 머리를 다쳤다고 했지만 나는...”성도윤은 격동된 어조로 말하더니 미간을 찌푸린 채 술만 들이켰다. 박성훈은 반짝이는 두 눈을 하고서 성도윤을 지그시 바라보았고 계속해서 물었다.“다쳤다고 했지만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데?”“아무것도 아니에요.”성도윤은 술을 연거푸 마시면서 대답하려고 하지 않았다.“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말해 봐. 내가 너한테 도움이 될지 누가 알아? 나 이래봬도 신경외과 의사야. 네가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아줄 수도 있어.”“정말이에요?”성도윤은 고개를 쳐들고는 활짝 웃었다. 여태껏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던 성도윤이 처음으로 마음을 연 순간이었다.“기억을 되찾게 해줄 수 있다고요?”사실 성도윤은 지난번 수술 뒤로 실력 있는 의사를 찾아 다시 치료하고 싶은 마음이
차설아는 고개를 푹 숙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성도윤이 맞나보네. 스파크, 내 말이 맞지?”바람은 지난 일을 떠올리더니 차설아가 걱정하는 것이 무언인지 단번에 알아챘다. 하지만 유독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만약 성도윤이 성철 형을 죽이려고 했다면 박성훈을 굳이 찾아가지 않아도 되잖아. 성도윤이 벌인 짓이라기에는 미심쩍은 부분이 많아.”“글쎄, 박성훈을 데려오면 내가 의심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어. 그리고 더 잔인한 방법으로 오빠를 죽이려고 했을 거야. 오빠만 죽인다면 차씨 가문과 영흥 부둣가에 배치한 세력은 성도윤이 손쉽게 처리할 수 있으니까...”차설아는 주먹을 꽉 쥔 채 말했다. 차설아는 사람을 쉽게 믿었었지만 극악무도한 사람한테 여러 번 배신당했었다. 그래서 지금도 성도윤이 나쁜 사람처럼 느껴진 것이다.“네 말도 일리가 있지만 물어보지 않고 섣불리 판단하는 건 좀 아닌 것 같아. 성도윤은 솔직한 사람이라 거짓말하지는 않을 거야. 직접 만나서 물어봐.”차설아는 바람을 지그시 쳐다보더니 피식 웃었다.“너 오늘 좀 이상한 거 알아?”“진심으로 한 말인데 뭐가 이상하다는 거야?”“진심으로 하는 말인 것 같아서 이상하다는 거지.”차설아는 날이 갈수록 바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계산적인 사람인 것 같았지만 바람은 의외로 단순하고 착한 사람이었다.“선우 가문과 성씨 가문은 늘 사이가 좋지 않았어. 이 기회에 나랑 성도윤을 완전히 갈라놓을 수도 있었는데 오해일 수도 있다면서 직접 물어보라고 부추겼잖아. 오해라는 것이 밝혀지면 더더욱 갈라놓을 수 없을 거야.”“난 이간질하는 사람이 아니야. 비열한 수법으로 두 사람을 갈라놓는다고 해도 속이 시원하지 않을 거라고...”바람은 반짝이는 두 눈을 하고서 차설아를 바라보았다.“난 네가 지금처럼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어. 복수할 용기도 없고 이번 일을 없던 일로 할 수도 없어서 매일 마음 아파하고 있었잖아. 공원에서 6시간 동안 앉아 있을 바에는 직접 찾아가서 물
바람은 얇은 셔츠를 입고 서 있었고 어깨를 으쓱하면서 말했다.“네가 여기에 앉았을 때부터 뒤에 숨어있었어.”“너 바보야? 6시간 동안 가만히 앉아 있는다는 게 얼마나 힘든지 몰라?”차설아는 투덜거리면서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바람은 차설아의 곁에 앉으면서 미소를 지었다.“힘든 줄 모르니까 이 시간까지 앉아 있었던 거겠지.”“난 생각할 것이 있어서 시간 가는 줄도 몰랐어.”“나도 똑같아. 네 얼굴을 보고만 있어도 재밌어서 계속 쳐다보고 싶었어. 6시간이나 지난 줄 몰랐거든.”“그런 장난도 지긋지긋하다.”차설아는 바람을 주먹으로 때리고는 긴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오후에 있었던 일은 정말 미안하게 생각해. 오빠 생각에 미쳐서 주변 사람들을 전부 의심했던 것 같아. 네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어도 그랬을 거야. 그러니까 마음에 두지 말았으면 좋겠어...”차설아의 말에 바람이 피식 웃더니 입을 열었다.“사과하지 않아도 돼. 난 신비한 컨셉이라 의심받은 적이 셀 수 없을 만큼 많거든. 그러니까 자책하지 마. 네가 속상해하면 마음이 너무 아프거든...”바람은 차설아가 죄책감 때문에 자신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사실 바람은 누구한테 의심받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바람의 유일한 목표는 차설아와 결혼해서 선우 가문을 빛내려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나쁜 짓을 하든 암암리에 손을 쓰든 중요하지 않았다. 차설아의 마음을 얻을 수만 있다면 바람은 무슨 짓이든 할 것이다.“누가 자책했다고 그래. 넌 여우처럼 교활하니까 당연히 의심받지. 아무도 너의 속내를 꿰뚫어 보지 못하잖아.”차설아는 바람의 이마를 툭 치면서 말을 이었다.“우리 둘이 그저 해커였다면 얼마나 좋을까? 시합에 참가해서 상금을 타고 돈이나 벌었으면 복잡한 가문의 일을 해결하지 않아도 되잖아. 복수할 것도 없으니 해커 활동이나 하면서 편안하게 지냈으면 되었을 텐데 말이야.”“생각해 보면 너랑 같이 시합에 참가해서 겨루던 날들이 제일 재밌었어.”바람은 잔잔한 호수를 바라보
병실을 나선 배경윤은 차설아를 데리고 비상계단 쪽으로 향했다.“그 반지... 성도윤이 끼고 있던 거지?”“맞아.”차설아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나한테 숨기는 거 있어? 저번부터 표정이 안 좋더라.”“그, 그러니까...”배경윤은 더 이상 숨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모든 것을 털어놓기로 마음먹었다.“성철 오빠가 수술을 받고 의식을 잃은 뒤에 누군가가 일부러 손을 쓴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성형 병원으로 다시 찾아갔고 간호사한테서 단서를 찾은 거야.”“단서라니?”차설아가 인상을 찌푸리고는 잔뜩 긴장한 채 물었다.“간호사의 말에 의하면 성철 오빠가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에 의사가 윤설이랑 통화했다는 거야. 깔끔하게 처리하라고 했대. 그래서 나는 윤설이 촬영하는 곳까지 찾아가서 따졌고 윤설은 성도윤의 지시를 받은 것이라고 말하더라고...”배경윤은 긴 한숨을 내쉬더니 말을 이었다.“윤설이 일부러 거짓 정보를 흘렸을까 봐 증거를 더 모은 뒤에 너한테 알려주려고 했어. 그런데 갑자기 성도윤의 반지를 발견했으니 숨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어.”“경윤아, 고마워. 사실 네가 알려주기 전부터 나는 줄곧 의심하고 있었어. 하지만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너무 힘들었어. 그래서 성도윤이 그 정도로 나쁜 사람은 아닐 거라고 나 자신을 속이고 있었던 거야.”“설아야, 너랑 성도윤은 아무 잘못도 없어. 성도윤은 너를 완전히 잊었으니 나처럼 그저 아는 사람일 뿐인 거야. 성도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하는 사람이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해.”배경윤은 차설아의 어깨를 토닥이면서 위로해 주었다.“나, 나도 알아... 성도윤은 진작에 날 잊었지만 난 희망의 끈을 놓지 못하고 나를 기억해 주길 바랐어. 전부 내 탓이야!”차설아는 심호흡하면서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눈물을 삼켰다.“그럼 이제는 어떻게 할 생각이야? 성도윤과 맞서려고?”배경윤의 말에 차설아는 벽에 기대 한숨을 내쉬고는 차갑게 웃었다.“나도 잘 모르겠어. 오
“설아야...”차성철이 천천히 손을 뻗더니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설아야, 그동안 나 때문에 힘들었지? 정말 고생했어. 미안해...”“오빠, 그런 말 하지 마. 오빠가 깨어날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어!”차설아는 차성철이 누워있는 병실 침대맡에 꿇어앉아 눈물을 흘렸다.“사실 의식을 잃었다는 걸 알고 있었어. 작은 상자에 갇힌 채로 꼼짝도 하지 못했던 거야. 상자를 열지 못해서 이 안에서 죽는 줄 알았거든. 그런데 자꾸 네 생각이 나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어. 난 하느님께 정말 감사해. 나에게 기회를 주어서 널 다시 만나게 되었으니 말이야.”차성철이 울먹이면서 말했다. 이번 사고로 인해 차성철은 많이 변했다. 예전처럼 날카롭고 예민하게 굴지 않았고 한결 부드러워졌고 말투도 다정해졌다.“뭘 자꾸 그런 말을 해! 오빠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면서 우리 달이랑 원이가 커서 결혼하는 모습을 봐야지. 손주도 봐야 하는데 불길한 말은 하지 마. 오빠는 그냥 오래 잠들어 있다가 깨어난 거야. 하느님의 힘을 빌릴 정도까지는 아니었어. 다시 깨어나 줘서 정말 고마워... 오빠가 너무 보고 싶었어.”차설아는 눈물을 닦으면서 차성철을 와락 안았다.“그래. 너랑 달이, 원이를 위해서라도 건강하게 지내야지. 앞으로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가자. 우리 가족 모두 모여서 재밌게 지내자. 네가 하고 싶었던 걸 같이 하고 가족 여행도 가자.”“말한 대로 해야 해. 지금 약속하자. 앞으로 오빠가 또 다치면 다시는 나 못 볼 줄 알아! 그때는 오빠를 용서하지 않을 거야.”남매는 새끼손가락을 걸고 눈물의 약속을 했다. 보는 사람마저 눈물이 나는 광경이었다. 배경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물만 흘렸다. 배경윤은 배경수가 생각났던 것이다.차설아의 말에 의하면 배경수는 아주 멀리 떨어진 마을에서 처음 보는 여자와 결혼했다. 배경윤은 배경수가 걱정되었다. 차설아는 울다가 차성철이 베고 있는 베개의 아래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은반지였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값이 꽤 되는
바람이 멈칫하더니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뭐, 뭐라고?”“네가 스파이지? 네가 사주받고 우리 오빠를 죽이려고 한 거잖아! 그렇지 않으면 왜 우리가 식당에 간 사이에 오빠한테 이런 일이 벌어진 거냐고!”차설아는 붉어진 두 눈을 하고서 물었다. 그동안 차성철의 상태에 대해 아는 사람은 바람과 차설아 두 사람뿐이었다.‘아무리 바람이 날 보살펴 주고 내 곁을 지켰다고 해도 누군가가 바람한테 지시해서 나를 감시하는 것일 수도 있잖아. 내가 방심한 틈을 타서... 그래. 바람은 선우 가문 사람이니까 가문의 이익을 위해서 오빠를 죽이려고 했을 수도 있어. 그러면 차씨 가문의 자리를 빼앗을 수도 있으니까!’배경윤이 차설아를 뜯어말렸다.“설아야, 말이 좀 심하다? 바람 씨가 어떻게 사주를 받고 그랬을 수가 있어. 네 말이 사실이라면 바람 씨가 너한테 온갖 심혈을 쏟아부을 리가 없잖아. 성철 오빠를 죽일 생각이었다면 진작에 움직였겠지. 바람 씨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차설아는 고개를 돌려 배경윤을 쳐다보며 물었다.“넌 알고 있었지?”“그, 그게...”배경윤은 주먹을 꽉 쥔 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이때 의사와 간호사들이 병실에서 걸어 나왔다.“의사 선생님, 오빠 어떻게 되었어요?”차설아는 사건의 배후에 대한 생각을 뒤로 하고 의사한테 다가가 물었다.“제때 발견한 덕분에 환자의 목숨을 살릴 수 있었어요. 호흡도 정상적으로 돌아왔으니 걱정하지 마세요.”“다행이에요. 정말 감사해요...”차설아는 식은땀을 흘리면서 고개 숙여 인사했다. 최근 차설아는 감정 기복이 심해서 울었다 웃기를 반복했다. 몸에 무리가 가면서 차설아도 점점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들어가 봐도 돼요. 박 선생님의 말씀대로 곧 깨어날 것 같거든요.”의사의 말에 차설아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감사해요!”차설아는 병실로 들어가 차성철을 바라보았다. 배경윤도 그 뒤를 따라갔지만 바람은 굳은 표정을 하고서 밖에 서 있었다.“바람 씨, 거기서 뭐 해?”배경윤이 고개를 돌려
검은 그림자는 다름 아닌 서씨 가문 서은아였다. 서은아는 그동안 차설아를 감시하고 있었다. 차설아가 식당에 밥 먹으러 간 사이에 차성철이 있는 병실을 책임지는 간호사에게 돈을 쥐여주었고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수술을 마친 뒤, 침대에 누워 간신히 숨을 쉬고 있는 차성철은 살짝 다쳐도 부서질 것처럼 나약해 보였다. 서은아는 병실 침대 앞에 서서 한참을 쳐다보다가 작은 물건을 차성철 베개 옆에 올려놓고는 산소마스크를 벗겼다.“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지만 미안해. 당신이 식물인간이 되면 당신 여동생도 기가 죽어서 나대지 못할 거라고 믿었어. 그런데 박성훈이 와서 당신을 살렸지 뭐야? 성도윤이 박성훈한테 부탁한 거라면서? 정말 어이가 없더라. 보나 마나 차설아가 성도윤한테 부탁한 거겠지. 뻔뻔스러운 년이...”서은아의 눈에 살기가 돌았다.“날 탓하지 마. 탓하려면 그 못난 여동생을 탓해. 차설아는 내가 성도윤과 약혼한 사이란 것을 알고 있으면서 성도윤한테 달라붙으면서 날 괴롭혔어. 동생이 저지른 잘못은 오빠인 당신이 책임져야지. 안 그래?”서은아는 말을 마친 뒤, 감시 카메라를 피해 조용히 병원을 나섰다. 식당에 앉아 있던 차설아는 바람이 포장한 음식을 보면서도 어쩐지 불안해서 먹고 싶지 않았다.“설아야, 네가 제일 좋아하는 탕수육이야. 다른 식당에서 하는 건 눅눅해서 맛없지만 이 식당에서 하는 건 바삭하잖아. 바람 씨가 널 위해서 사 온 건데, 한 입이라도 먹어 봐.”배경윤은 불안해하는 차설아와 맞은편에 앉아 있는 바람을 번갈아 보면서 말했다.“이 식당에 줄을 서려고 아침 일찍 깨어났어. 하지만 스파크가 좋아하는 거라면 눈이 오든 비가 내리든 사러 가야지.”바람이 머리를 긁적이더니 피식 웃었다. 그동안 차설아에게 밥을 먹이기 위해 온갖 시도를 해보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쯧쯧. 바람 씨한테 설아를 맡겼다가는 뚱보가 되겠어. 한 달 안에 10킬로 찐다는 것에 내 머리카락을 걸겠어.”“스파크는 살이 쪄도 예뻐서 괜찮아. 지금처럼 귀여울 거
배경윤은 박성훈을 노려보면서 말했다. 박성훈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성도윤이 데려온 의사라는 말에 성도윤처럼 나쁜 사람인 줄 알고 경계했다.“경윤아, 그러지 마. 박 선생님은 며칠 동안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오빠를 위해서 최선을 다해준 분이야. 오빠가 깨어날 수만 있다면 차씨 가문의 은인이 될 분이거든.”차설아는 다시 일어나더니 박성훈한테 허리를 숙여 공손히 인사했다.“박 선생님, 죄송해요. 경윤이는 늘 저를 아껴주고 보호해 주는 사람이라 이런 일에서는 예민하게 굴거든요. 나쁜 뜻으로 하는 말은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괜찮아요. 병원에서는 예민할 수밖에 없죠. 만나본 보호자 중에서 제일 정상적인 반응이거든요. 저는 이해해요.”박성훈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저 말고 성 대표님께 고맙다고 해야죠. 저는 수술할 생각이 없었는데 성 대표님이 간절하게 부탁했고 제가 좋아하는 바다낚시까지 같이 해주셔서 거절할 수가 없었어요. 게다가 바다낚시 내기에서도 졌으니 성 대표님 말대로 수술해야 했어요.”“성도윤이 어렵게 모신 분인 건 알고 있었어요. 나중에 오빠가 깨어나면 인사하려고요.”“잘 생각했어요.”박성훈이 차설아의 어깨를 토닥이더니 말을 이었다.“생각이 많으면 마음이 힘들 거예요. 사실 생각처럼 최악의 상황까지 가는 일은 없으니 마음 편안하게 먹고 환자분이 깨어나길 기다리세요.”말을 마친 박성훈은 사무실로 돌아가서 옷을 갈아입었다. 지금 오후 4시라서 박성훈이 말한 시간까지는 아직도 4시간이나 남아있었다. 배경윤은 차설아가 또 쓰러질까 봐 걱정되었다.“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밥부터 먹자.”“괜찮아. 난 배고프지 않아. 오빠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고 싶어. 오빠가 일어나야 내 마음도 편해질 것 같아.”차설아는 병실 밖에 서서 침대에 누워있는 차성철을 바라보며 말했다.“너 이러다가 또 쓰러지면 어쩌려고 그래? 오빠도 네가 이러는 걸 원하지 않을 거야.”차설아는 고개를 돌려 배경윤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배경윤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설마 네가 말한 사람이 그 나쁜 놈은 아니겠지? 아니라고 말해.”차설아가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그 사람 말고 또 누가 있겠어. 그래도 도움받았잖아.”“아...”배경윤은 주먹을 꽉 쥔 채 머뭇거렸다. 차설아한테 사실대로 말해야 할지 고민되는 순간이었다. 이 사고는 목적, 증언, 사건 발생 시간으로 보았을 때 성도윤이 배후일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하지만 확실한 증거 없이 성도윤을 범인으로 몰아갈 수 없었다. 만약 이 말을 꺼냈다가 차설아와 성도윤이 싸우게 된다면 손해 보는 건 차설아일 것이다. 하지만 사실대로 솔직하게 말하지 않으면 성도윤이 또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일이었다.“설아야, 그저 네가 걱정되어서 하는 말인데 성도윤을 너무 믿지 마. 성도윤이 어떤 사람인지 네가 제일 잘 알잖아. 진심을 드러내지 말고 계속 지켜보는 게 좋을 것 같아. 알겠지?”배경윤은 머뭇거리다가 결국 직설적으로 말하지 못했다.“나도 알아. 지금까지 성도윤을 용서한 적 단 한 번도 없어. 오빠 얼굴에 남은 흉터를 볼 때마다 성도윤이 떠올라서 화가 솟구쳐 오르거든... 성도윤이랑 잘 해볼 생각이 아니라 그저 좋은 의사를 데려와 주어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을 뿐이야. 네가 걱정하는 일은 없을 거야.”차설아는 수술실을 바라보면서 말했고 눈시울이 점점 붉어졌다. 눈에 핏줄이 가득 서렸지만 차성철이 나올 때까지 쉴 수 없었다. 성도윤에 관한 생각을 하면 할수록 차설아의 마음이 아팠기에 더는 신경 쓰지 않았고 애매모호한 선을 넘지 않았다. 지금처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더 마주치지 않는 것이 두 사람을 위한 일이었다.“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야. 더 이상 그 사람과 엮이고 싶어 하지 않는 건 알지만 항상 경계해야 해. 그 사람이 얼마나...”“알겠어. 곧 수술이 끝날 테니 다른 건 생각하지 말고 오빠가 무사히 나오기를 바라면서 기다리자.”차설아는 배경윤의 말을 끊었다.“그래. 같이 기다려보자.”배경윤은 슬픔이 가득 서려 있는 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