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에요!”차설아는 차갑게 부정했다.“그저 제 의견을 말했을 뿐이지 그 인간이랑 전혀 상관없어요.”기자 회견은 현장 인원의 조정하에 계속 진행되었다.성대 그룹의 홍보 부서 관계자는 현재 그룹이 진행 중인 프로젝트, 그룹의 재력과 조직 구도를 언론에 소개했다.마지막으로 홍보 부서는 언론을 향해 정중하게 말했다.“성대 그룹은 곧 새롭게 태어날 것입니다. 성대 그룹 이사회와 각 대주주가 공동으로 선출한 신임 대표 성진 씨를 앞으로 모시도록 하겠습니다.”현장에는 뜨거운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이전 성도윤의 기자 회견에 절대 뒤지지 않는 분위기였다.성진은 언론을 향해 당당하게 말했다.“성대 그룹은 지금 전대미문의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성대 그룹의 미래와 해안 전체를 위해 저는 기꺼이 성대 그룹의 대표 자리를 도맡아...”이때 사도현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성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도발했다.“성대 그룹의 대표는 성도윤 아닌가요? 성도윤이 이끄는 그룹은 해가 갈수록 번창하고 있는데 당신이 무슨 근거로 인계한다는 거죠? 성도윤 대표의 의견은 물어본 적 있나요?”성진은 웃으며 말했다.“아주 중요한 부분을 캐치하셨네요. 안 그래도 여러분께 자세히 설명하려고 했습니다.”“우선, 이사회와 각 주주의 투표 결과로 저는 대표로 선발되었습니다. 6명의 이사진들 중, 찬성 3표, 기권 1표, 반대 2표로 주주 과반수가 이사회의 결정에 동의했습니다. 그러니 저는 여러분들이 선임한 대표로...”“하하, 웃기네!”사도현은 바로 말을 이었다.“내 기억이 맞는다면 성대 그룹의 가장 많은 지분을 보유한 사람은 성도윤 대표예요.그 말은 성도윤이 스스로 자신을 대표 자리에서 끌어내렸다는 건가요?”“좋아요, 아주 중요한 질문을 하셨습니다. 아마 많은 분의 큰 관심사이기도 하겠죠. 왜 도윤이 형이 자신을 대표 자리에서 끌어내렸는지 말이에요.”여기까지 말한 성진은 뜸을 들였고, 모든 사람은 숨죽여 기다렸다.엄밀히 말하면 이건 비밀이 아니라 진작 떠돌고 다니는 소문이었
모두들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쳐다보았고, 차설아도 홱 돌아보았다.성도윤은 도도한 신처럼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회의장에 들어섰다.모두의 주목을 받던 성진은 성도윤의 출현으로 갑자기 안색이 어두워졌다. 원래도 절정에 달했던 현장의 분위기는 한층 고조되었고 플래시램프가 터졌고 셔터 소리가 사람들의 귀를 찔렀다.“어떻게... 성도윤... 분명...”성진은 귀신을 본 듯 창백한 얼굴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방금까지의 의기양양함을 잃은 모습이었다.성도윤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성진을 차갑게 노려보며 말했다.“부사장의 표정을 보니 아주 실망한 모습이네?”옆에 앉아 있던 고위층과 주주들의 표정은 기쁨과 슬픔이 뒤섞여있었다.성진을 지지하던 고위층들은 하나같이 의자 등에 몸을 붙이고 식은땀을 흘리며 감히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반면 끝까지 성도윤을 지지하던 사람들은 감격하여 눈물을 글썽였다.“대표님은 절대 지지 않는 태양, 불사의 몸이라 분명 돌아오실 줄 알았어요.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너무 조급해, 대표님에게 일이 생겼다는 말을 듣자마자 바로 저 쓸모없는 인간을 지지하면서 대표 자리에 앉혔어요!”성도윤은 웃으며 말했다.“성인이라면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져야죠. 만약 틀린 선택을 했다면 그 결과를 감수해야죠. 안 그래요? 영생 아저씨?”허영생의 표정은 아주 어두웠다. 이마의 식은땀이 흰 머리카락을 타고 끊임없이 내려와 셔츠를 적셨다.성도윤이 ‘기사회생’한 순간 부터, 그는 이 바둑알을 되돌릴 수 없고 철저하게 패배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맞아요. 반드시 자기 선택에 책임을 져야죠. 저를 어떻게 처분하든 마음대로 하세요!”허영생의 표정은 이미 죽을상이었고 자포자기해서 말했다.성진은 여전히 대표 자리에 앉아서 혐오스러운 눈으로 성도윤을 죽을 듯이 노려보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역시, 성도윤이야. 기사회생해서 돌아오다니. 대단해!”성도윤은 입꼬리를 올리더니 잘생긴 얼굴에는 비아냥거림과 경멸로 가득 찼다.“네 수법은 그럭저럭 괜찮았지만, 네 뒤에 있
무대 위의 그는 눈부시게 빛나고, 타고난 리더십으로 눈을 뗄 수 없었다.유명 매체의 기자들은 처음부터 빅뉴스만 만들려고 하다가 나중에는 그의 인격적 매력에 푹 빠져 기록하는 걸 잊어버릴 정도였다.차설아는 수백 명의 하객들 사이에 앉아 냉랭한 눈빛으로 무대 위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너무 충격적이어서 손가락을 세게 잡자 손톱이 살 속으로 파고들었다.‘성도윤, 아직 죽지 않았다니!’죽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예전보다 의기양양하고 더욱 안하무인이었다.애석하게도 그동안 그녀가 흘린 눈물과 괴로움은 전혀 가치가 없었다. 그녀가 느낀 죄책감들은 더욱 가소롭기 짝이 없었다.사도현은 다리를 꼬고 진작부터 짐작한 듯 히죽히죽 웃었다.“도윤 형의 이 계획 정말 끝내주는 군. 정말 훌륭해. 성진 그놈 체면이 서지 않겠지? 아주 통쾌하네. 이렇게 오랫동안 외부에서 형에 대해 함부로 썼는데 한 번도 얼굴을 내비추지 않다니... 원수를 갚기 위해 온갖 괴로움을 견뎌 복수에 성공한 것과 비슷해.”차설아가 물었다.“도윤 씨가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고 당신뿐만 아니라 성명원도 알고 있었나요?”“당연하지. 이렇게 중요한 일을 도윤 형은 분명히 우리 형제들에게 넌지시 알려줘. 우리가 도윤 형을 걱정하거나 충동적으로 성진 그 녀석을 암살하지 않도록 말이야. 그렇지 않으면 성진 뒤에 있는 큰 물고기를 잡을 수 없으니까...”사도현이 여기까지 말하자 조금 의아했다.“설마 너 정말 그런 줄 알았던 거야? 도윤 형이 미리 알려 주지 않았어?”차설아는 실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그럴 리가 없겠는데. 이렇게 큰 일을 도윤 형이 가장 신경 쓰는 사람이 넌데, 너에게 암시를 주지 않을 이유가 없어. 이 바보가 네가 걱정하고 괴로워한다는 걸 모를리 없어.”사도현은 성도윤이 이 일에 대해 충분히 생각하지 못했고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생각했다.차설아는 자신이 오버했던 것에 대해 씁쓸하게 웃었다.“도윤 씨에게 난 아무것도 아니에요. 무슨 결정을 내리든 내가 어떻게
“차설아 씨, 최근에 배씨 가문의 배경수 씨를 대신하여 ‘천신 그룹’ 회장직을 맡았다고 들었습니다. 당신과 성 대표님은 특별한 사이이신데 앞으로 무슨 계획이 있으신가요? 두 그룹은 경쟁하는 사이가 되실 건가요 아니면 합작하여 윈윈 하는 사이가 될 건가요?”취재진은 관무재경 방송국에서 온 기자로 질문이 아주 날카로웠다.차설아의 정서는 아직 성도윤에 대한 깊은 원망 속에 머물러 있었다. 눈빛도 칼날같이 무대 위의 성도윤을 향해 매섭게 쳐다봤다.하지만 성도윤은 그녀와 다르게 무덤덤한 반응을 보였고, 그녀를 보는 눈빛은 다른 사람을 보는 것만큼이나 특별한 감정이 없었다.‘특별한 관계'는 심지어 일부 잘 아는 비즈니스 파트너와 비교도 안된다.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살상력은 백 퍼센트이며 한 사람의 자존심을 산산조각 내기에 충분했다.차설아는 손을 꽉 쥐며 냉소했다.“비즈니스에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으며 영원한 이익만 존재해요. 만약 성대표님이 저를 이끌어 돈을 벌 수만 있다면 그것이 협력이고 윈윈이에요. 만약 그렇지 않다면 경쟁하는 사이가 되는 건 시간문제예요.”이 말이 나오자, 현장은 갑자기 폭소를 터뜨렸다.옆에 있던 사도현도 그녀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설아쨩, 적당히 해. 고작 천신 그룹의 힘을 가지고 감히 성대 그룹에 도전하다니. 일부러 사람들에게 농담을 해서 분위기를 띄우려는 거야?”다른 사람들이 말을 꺼낸다면 더욱 듣기 거북하겠지만 차설아는 하늘 높은 줄 모르는 개미인 것처럼, 순진한 망상으로 성대 그룹이라는 큰 나무를 흔들려고 했다.성대 그룹의 한 고위층 령도도 웃음을 참으며 차설아를 향해 말했다.“차설아 씨, 우리 성 대표님의 전처이셔서 신분이 좀 특별하다는건 알지만, 비즈니스는 비즈니스이고 인정은 인정이에요. 성대 그룹은 아마 천신 그룹과 같은 작은 규모의 회사와 협력하는 것을 고려하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그런 작은 회사는 더더욱 성대 그룹의 상대가 될 수 없죠. 그러니 경쟁하는 사이든 합작하는 사이
차설아는 화장실에 앉아 화가 나서 발끝으로 바닥에 동그라미를 그리며 성도윤을 모질게 저주했다.“나쁜 놈, 그렇게 죽기를 바라 무덤도 지어놓다니. 에잇, 물 마시다가 사레들려 죽고, 밥 먹다가 배불러 죽고, 핸드폰 보다가 벼락 맞아 죽고, 걸어가다가 구덩이를 밟아 죽어...”그때 옆칸에서 여자들의 수다 떠는 소리가 들려왔다.“정품은 역시 정품이네,짝퉁보다 훨씬 나아.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성진에게 잠시 반했지만 성 대표님이 돌아오자마자 성진은 아무것도 아니네. 사람과 사람의 격차는 때때로 사람과 개의 격차보다 커. 성 대표님은 정말 완벽하다니까, 나 정말 성도윤 대표님한테 시집가고 싶어.”“꿈도 꾸지 마, 성 대표님은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데 어떻게 네 차례가 오겠어, 주제넘지 마...”“사랑? 전 둘째 사모님을 말하는 거야?”“아니, 성대 그룹 대표님이 4년 동안 보호해 주신 백련 임채원말이야. 하지만 최근에 들은 소식인데, 임채원이 실종돼서 성씨 가문에서 사람을 보내 찾고 있대. 만약 이 백련이 사라지면 너에게 기회가 있을지도 몰라. 전 둘째 사모님에 대해 말하자면, 방금 성 대표님이 차설아에 대한 냉담한 태도 봤지? 죽을 만큼 싫어하고 전혀 위협적이지 않아.”“...”차설아는 듣자하니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그녀는 칸막이를 나와 바로 그 두 칸의 가림막 두 발로 걷어차고 차갑게 말했다.“너희들, 말 똑바로 해, 애초에 내가 성도윤을 원하지 않았고 내가 죽을 만큼 싫어했어. 그런데 어떻게 나를 싫어할 차례가 오겠어? 만약 그때가 온다해도 그 인간 같은 냉혈동물은 무릎을 꿇고 나를 위해 신발 시중을 들어야 해. 하지만 내가 거치적거리다고 싫어하겠지.”여자 화장실에는 다른 여자들도 있었는데, 유명한 언론인과 다른 종업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모두들 놀란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예전의 얌전하고 단정한 며느리가 성도윤을 죽도록 사랑했는데, 어찌 사석에서 이리 건방지고 오만방자한 거지?“뭘 봐, 내 말이 틀렸어? 성도윤 그 사람은 하루 종
남자 화장실 안, 변기 앞에 남자 몇 명이 소변을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한 여자가 들이닥치는 바람에 하마터면 사레들 뻔했고, 모두 두 손으로 가랑이를 막았다.“너, 너, 너...”차설아는 한창 화가 나서 매우 오만한 태도로 그 무리의 남자들을 향해 소리쳤다. “뭘 봐, 여자가 남자 화장실에 들어온 걸 처음 봐? 꺼져!”늠름한 남자들은 아마 이렇게 사나운 여자를 본 적이 없어 하나둘씩 지퍼를 올리고 뛰쳐나갔다.다만 가장 안쪽 자리의 성도윤이 꼿꼿이 서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차갑고 완벽한 조각처럼 변기 앞에 서도 기질이 우월하고 비길 데 없이 높아 보였다.남자는 아직 볼일을 보지 못한 채로 차설아를 차갑게 바라보았으며 눈빛은 날카로웠다.“무슨 일 있어?”한 마디에 차설아는 목이 메어 화가 치밀어올라 마치 터질 듯 한 복어처럼 뾰로통한 모습으로 차갑게 질문했다.“허? 무슨 일? 당신 왜 모르는 척 해, 나한테 무슨 일 있냐고 묻는다고?”“할 말이 있으면 빨리 말해. 여기 기자가 많은데 당신은 남자 화장실까지 쫓아왔으니 타당하지 않아.”성도윤은 미적지근하게 말했다.지나치게 담담한 감정이 마치 차설아의 유치함과 광기를 비웃는 듯했다.차설아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 주먹으로 앞에 있는 남자의 이목구비를 비뚤어지게 때리지 못하는 것을 한스러워했다.‘이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야박한 남자가 있을 수 있는 거지? 로봇인가? 그래서 마음이 없나?’“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야 하지 않겠어?”차설아는 성도윤에게 손을 대고 싶은 것을 참고 성도윤과 담담하게 소통을 시도했다.“나는 달리 설명할 게 없다고 생각하는데...”성도윤은 눈빛이 쌀쌀했고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담담했다.“보다시피 성대 그룹의 나쁜 성분들을 제거해야 해. 난 그저 작은 계략을 세워 그것들을 쫓았을 뿐이야. ”“그리고... 끝이야?”차설아는 남자의 냉랭한 모습을 보며 마치 낯선 사람을 보는 듯 자기를 비웃었다.“그래서 당신은 나를 구해줬어도 전혀 불행을 당하지 않
어쩔 수 없이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 여자의 앞을 가로막은 성도윤은 두 손을 차설아의 얇은 어깨를 움켜쥐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나한테 하고 싶은 말 없어?”“웃겨. 내가 무슨 할 말이 있겠어...”차설아는 어깨 위에 올려진 큰 손을 힐끗 쳐다보며 차갑게 경고했다.“놔!”“내가 당신에게 못 알려준 것은 상황이 급박해서였어. 그럼 당신은 나에게 숨긴 게 없어?”성도윤은 차설아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깊은 어조로 물었다.차설아는 잠시 불안했다.“다, 당신 무슨 뜻이야?”“당신,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잖아... 당신 눈에는 내가 그 돼지처럼 멍청한 사람이고 당신은 내가 모르는 곳에서 나를 몇 년 동안 비웃었는지 몰라. 그렇지?”성도윤은 저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손에 힘을 주었다. 원래 잘생긴 얼굴에 지금은 복잡한 감정이 드러났다. 분노, 고통, 그리고 약간의 무기력함까지... 눈앞의 여자를 어찌할 도리가 없는 무기력함이었다.차설아도 자신이 없었다. 이 녀석이 뭘 발견했는지 몰랐다.‘아이의 일은 절대 도윤 씨에게 들켜서는 안 돼, 그렇지 않으면 큰일이야.’그래서 그녀는 굳은 표정으로 얼굴색 하나 바뀌지 않고 말했다.“도윤 씨, 적반하장으로 나오지 마. 내가 당신과 혼인기간 온순하고 아내로서의 본분을 다하며 당신에게 숨긴 일이 하나도 없었어. 당신이 나가 바람피워 모두를 난처하게 했으면서 지금 당신이 오히려 피해자코스프레로 나를 비난하고 있다니. 당신 양심이 아프지도 않아?”“허허, 당신 정말 나한테 숨기는 게 없는 게 확실해?”성도윤의 차가운 눈빛은 차설아를 삼키려 들었다.“내가 까발릴 때까지 기다릴 거야? 내가 까발리면 어떻게 할 건데?”“다, 당신 겁주지 마. 난 지금까지 행실을 똑바로 했고 양심에 부끄럽지도 않아. 당신이 까발리고 싶으면 까발려.”차설아는 겉으로 침착한 듯 보였지만, 속으로는 성도윤 몰래 성도윤의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을까 봐 당황했다.“당신...”성도윤은 말을 잇지 못하고 막 입을 열려고
켕기는 게 있는 차설아는 초조한 얼굴로 주먹을 날리며 계속 경고했다.“성진, 감히 함부로 말하지 마!”성도윤은 쌀쌀맞게 말했다.“신경 쓰지 말고 네가 아는 걸 다 말해.”입꼬리를 말아 올린 성진은 얍삽하게 웃으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성도윤, 내 기억이 맞다면 넌 전 형수와의 결혼을 4년이나 유지했어. 이건 지금 이 사회를 놓고 말하면 짧은 시간이 아닌데 넌 형수를 충분히 이해한다고 생각해? 넌 전 형수의 진정한 인격이 어떤지 알아?”성도윤은 안색이 좋지 않았고 냉랭한 목소리로 섬뜩하게 말을 이었다. “도대체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자꾸 빙빙 돌리지 마, 난 너랑 잡담할 시간이 많지 않아.”“그냥 내 질문에 대답해. 넌 차설아를 잘 알아? 네 눈에 비친 차설아는 어떤 사람인데? 만약 네가 협조해서 모두 대답한다면, 전 형수가 숨기고 있는 놀라운 비밀이 무엇인지 알려줄게...”성진의 말에 성도윤과 차설아 두 사람은 매우 급했다.하지만 성도윤은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참으며 협조했다.“객관적으로 아내로서 합격이야. 단아하고 온화하며 그 어떤 스캔들도 일으키지 않았고, 설아 씨가 필요한 모든 활동에 참석하며 성씨 가문의 발목을 잡지 않았어.”그의 평가는 정말 이성적이고 객관적이며 심지어 칭찬이라고 할 수 있었다.하지만 이 칭찬들은 차설아에게 모욕과 같았다.성도윤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아내’는 그에게 있어 냉장고, 에어컨, 소파처럼 도구로서의 기능적인 역할이 더 컸기 때문이다.여자에게 도구처럼 사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가...그녀는 다시금 자신이 성도윤과 이혼한 것이 얼마나 현명한 선택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전 형수가 마음에 들었나 봐. 아쉽네... 너희들이 4년 동안 같은 침대에서 자고 가난과 부귀를 막론하고 서로를 떠나지 않겠다고 맹세했어도 넌 남편으로서 여전히 형수를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고 그녀의 기본적인 성격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니.”성진의 눈빛에 성도윤에 대한 불만과 조롱이 가득했다.성도윤은 냉혹하기 짝이 없
예상치 못한 성도윤의 반응에 박성훈은 진지하게 물었다.“이런 일이 있었다는 걸 몰랐던 건 아니지?”성도윤은 입을 꾹 다문 채 굳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종업원이 다른 술잔을 가지고 달려오더니 술잔에 술을 따라주었다.“정말 모르고 있었던 거야?”박성훈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말했다.“그럴 리 없었을 텐데... 너랑 차설아 씨는 특별한 사이잖아. 차설아 씨의 오빠한테 그런 일이 생겼으면 제일 먼저 너한테 전화해야 하는 거 아니야?”“특별한 사이 아닌데요.”성도윤은 술을 한 모금 마시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뭘 또 부정하고 그래! 누가 봐도 두 사람은 서로 미칠 듯이 사랑하는데 티 내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 같았어.”박성훈은 한 도시에 정착하지 않고 여행 다녀서 해안시의 상황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성도윤과 차설아가 원래 부부였다는 것을 모른 채 지켜보아도 성도윤과 차설아 사이의 기류가 미묘하다는 것쯤은 눈치챌 수 있었다.“예전에 머리를 다치는 바람에 차설아와 어떤 사이였고 어떤 일이 벌어졌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아요. 주변 사람들은 차설아가 나를 해치려고 했다고 말했고 차설아도 인정하는 눈치였어요. 차설아는 내가 하마터면 차설아의 손에 죽을 뻔했고 그 일로 인해 머리를 다쳤다고 했지만 나는...”성도윤은 격동된 어조로 말하더니 미간을 찌푸린 채 술만 들이켰다. 박성훈은 반짝이는 두 눈을 하고서 성도윤을 지그시 바라보았고 계속해서 물었다.“다쳤다고 했지만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데?”“아무것도 아니에요.”성도윤은 술을 연거푸 마시면서 대답하려고 하지 않았다.“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말해 봐. 내가 너한테 도움이 될지 누가 알아? 나 이래봬도 신경외과 의사야. 네가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아줄 수도 있어.”“정말이에요?”성도윤은 고개를 쳐들고는 활짝 웃었다. 여태껏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던 성도윤이 처음으로 마음을 연 순간이었다.“기억을 되찾게 해줄 수 있다고요?”사실 성도윤은 지난번 수술 뒤로 실력 있는 의사를 찾아 다시 치료하고 싶은 마음이
차설아는 고개를 푹 숙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성도윤이 맞나보네. 스파크, 내 말이 맞지?”바람은 지난 일을 떠올리더니 차설아가 걱정하는 것이 무언인지 단번에 알아챘다. 하지만 유독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만약 성도윤이 성철 형을 죽이려고 했다면 박성훈을 굳이 찾아가지 않아도 되잖아. 성도윤이 벌인 짓이라기에는 미심쩍은 부분이 많아.”“글쎄, 박성훈을 데려오면 내가 의심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어. 그리고 더 잔인한 방법으로 오빠를 죽이려고 했을 거야. 오빠만 죽인다면 차씨 가문과 영흥 부둣가에 배치한 세력은 성도윤이 손쉽게 처리할 수 있으니까...”차설아는 주먹을 꽉 쥔 채 말했다. 차설아는 사람을 쉽게 믿었었지만 극악무도한 사람한테 여러 번 배신당했었다. 그래서 지금도 성도윤이 나쁜 사람처럼 느껴진 것이다.“네 말도 일리가 있지만 물어보지 않고 섣불리 판단하는 건 좀 아닌 것 같아. 성도윤은 솔직한 사람이라 거짓말하지는 않을 거야. 직접 만나서 물어봐.”차설아는 바람을 지그시 쳐다보더니 피식 웃었다.“너 오늘 좀 이상한 거 알아?”“진심으로 한 말인데 뭐가 이상하다는 거야?”“진심으로 하는 말인 것 같아서 이상하다는 거지.”차설아는 날이 갈수록 바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계산적인 사람인 것 같았지만 바람은 의외로 단순하고 착한 사람이었다.“선우 가문과 성씨 가문은 늘 사이가 좋지 않았어. 이 기회에 나랑 성도윤을 완전히 갈라놓을 수도 있었는데 오해일 수도 있다면서 직접 물어보라고 부추겼잖아. 오해라는 것이 밝혀지면 더더욱 갈라놓을 수 없을 거야.”“난 이간질하는 사람이 아니야. 비열한 수법으로 두 사람을 갈라놓는다고 해도 속이 시원하지 않을 거라고...”바람은 반짝이는 두 눈을 하고서 차설아를 바라보았다.“난 네가 지금처럼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어. 복수할 용기도 없고 이번 일을 없던 일로 할 수도 없어서 매일 마음 아파하고 있었잖아. 공원에서 6시간 동안 앉아 있을 바에는 직접 찾아가서 물
바람은 얇은 셔츠를 입고 서 있었고 어깨를 으쓱하면서 말했다.“네가 여기에 앉았을 때부터 뒤에 숨어있었어.”“너 바보야? 6시간 동안 가만히 앉아 있는다는 게 얼마나 힘든지 몰라?”차설아는 투덜거리면서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바람은 차설아의 곁에 앉으면서 미소를 지었다.“힘든 줄 모르니까 이 시간까지 앉아 있었던 거겠지.”“난 생각할 것이 있어서 시간 가는 줄도 몰랐어.”“나도 똑같아. 네 얼굴을 보고만 있어도 재밌어서 계속 쳐다보고 싶었어. 6시간이나 지난 줄 몰랐거든.”“그런 장난도 지긋지긋하다.”차설아는 바람을 주먹으로 때리고는 긴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오후에 있었던 일은 정말 미안하게 생각해. 오빠 생각에 미쳐서 주변 사람들을 전부 의심했던 것 같아. 네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어도 그랬을 거야. 그러니까 마음에 두지 말았으면 좋겠어...”차설아의 말에 바람이 피식 웃더니 입을 열었다.“사과하지 않아도 돼. 난 신비한 컨셉이라 의심받은 적이 셀 수 없을 만큼 많거든. 그러니까 자책하지 마. 네가 속상해하면 마음이 너무 아프거든...”바람은 차설아가 죄책감 때문에 자신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사실 바람은 누구한테 의심받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바람의 유일한 목표는 차설아와 결혼해서 선우 가문을 빛내려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나쁜 짓을 하든 암암리에 손을 쓰든 중요하지 않았다. 차설아의 마음을 얻을 수만 있다면 바람은 무슨 짓이든 할 것이다.“누가 자책했다고 그래. 넌 여우처럼 교활하니까 당연히 의심받지. 아무도 너의 속내를 꿰뚫어 보지 못하잖아.”차설아는 바람의 이마를 툭 치면서 말을 이었다.“우리 둘이 그저 해커였다면 얼마나 좋을까? 시합에 참가해서 상금을 타고 돈이나 벌었으면 복잡한 가문의 일을 해결하지 않아도 되잖아. 복수할 것도 없으니 해커 활동이나 하면서 편안하게 지냈으면 되었을 텐데 말이야.”“생각해 보면 너랑 같이 시합에 참가해서 겨루던 날들이 제일 재밌었어.”바람은 잔잔한 호수를 바라보
병실을 나선 배경윤은 차설아를 데리고 비상계단 쪽으로 향했다.“그 반지... 성도윤이 끼고 있던 거지?”“맞아.”차설아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나한테 숨기는 거 있어? 저번부터 표정이 안 좋더라.”“그, 그러니까...”배경윤은 더 이상 숨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모든 것을 털어놓기로 마음먹었다.“성철 오빠가 수술을 받고 의식을 잃은 뒤에 누군가가 일부러 손을 쓴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성형 병원으로 다시 찾아갔고 간호사한테서 단서를 찾은 거야.”“단서라니?”차설아가 인상을 찌푸리고는 잔뜩 긴장한 채 물었다.“간호사의 말에 의하면 성철 오빠가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에 의사가 윤설이랑 통화했다는 거야. 깔끔하게 처리하라고 했대. 그래서 나는 윤설이 촬영하는 곳까지 찾아가서 따졌고 윤설은 성도윤의 지시를 받은 것이라고 말하더라고...”배경윤은 긴 한숨을 내쉬더니 말을 이었다.“윤설이 일부러 거짓 정보를 흘렸을까 봐 증거를 더 모은 뒤에 너한테 알려주려고 했어. 그런데 갑자기 성도윤의 반지를 발견했으니 숨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어.”“경윤아, 고마워. 사실 네가 알려주기 전부터 나는 줄곧 의심하고 있었어. 하지만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너무 힘들었어. 그래서 성도윤이 그 정도로 나쁜 사람은 아닐 거라고 나 자신을 속이고 있었던 거야.”“설아야, 너랑 성도윤은 아무 잘못도 없어. 성도윤은 너를 완전히 잊었으니 나처럼 그저 아는 사람일 뿐인 거야. 성도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하는 사람이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해.”배경윤은 차설아의 어깨를 토닥이면서 위로해 주었다.“나, 나도 알아... 성도윤은 진작에 날 잊었지만 난 희망의 끈을 놓지 못하고 나를 기억해 주길 바랐어. 전부 내 탓이야!”차설아는 심호흡하면서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눈물을 삼켰다.“그럼 이제는 어떻게 할 생각이야? 성도윤과 맞서려고?”배경윤의 말에 차설아는 벽에 기대 한숨을 내쉬고는 차갑게 웃었다.“나도 잘 모르겠어. 오
“설아야...”차성철이 천천히 손을 뻗더니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설아야, 그동안 나 때문에 힘들었지? 정말 고생했어. 미안해...”“오빠, 그런 말 하지 마. 오빠가 깨어날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어!”차설아는 차성철이 누워있는 병실 침대맡에 꿇어앉아 눈물을 흘렸다.“사실 의식을 잃었다는 걸 알고 있었어. 작은 상자에 갇힌 채로 꼼짝도 하지 못했던 거야. 상자를 열지 못해서 이 안에서 죽는 줄 알았거든. 그런데 자꾸 네 생각이 나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어. 난 하느님께 정말 감사해. 나에게 기회를 주어서 널 다시 만나게 되었으니 말이야.”차성철이 울먹이면서 말했다. 이번 사고로 인해 차성철은 많이 변했다. 예전처럼 날카롭고 예민하게 굴지 않았고 한결 부드러워졌고 말투도 다정해졌다.“뭘 자꾸 그런 말을 해! 오빠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면서 우리 달이랑 원이가 커서 결혼하는 모습을 봐야지. 손주도 봐야 하는데 불길한 말은 하지 마. 오빠는 그냥 오래 잠들어 있다가 깨어난 거야. 하느님의 힘을 빌릴 정도까지는 아니었어. 다시 깨어나 줘서 정말 고마워... 오빠가 너무 보고 싶었어.”차설아는 눈물을 닦으면서 차성철을 와락 안았다.“그래. 너랑 달이, 원이를 위해서라도 건강하게 지내야지. 앞으로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가자. 우리 가족 모두 모여서 재밌게 지내자. 네가 하고 싶었던 걸 같이 하고 가족 여행도 가자.”“말한 대로 해야 해. 지금 약속하자. 앞으로 오빠가 또 다치면 다시는 나 못 볼 줄 알아! 그때는 오빠를 용서하지 않을 거야.”남매는 새끼손가락을 걸고 눈물의 약속을 했다. 보는 사람마저 눈물이 나는 광경이었다. 배경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물만 흘렸다. 배경윤은 배경수가 생각났던 것이다.차설아의 말에 의하면 배경수는 아주 멀리 떨어진 마을에서 처음 보는 여자와 결혼했다. 배경윤은 배경수가 걱정되었다. 차설아는 울다가 차성철이 베고 있는 베개의 아래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은반지였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값이 꽤 되는
바람이 멈칫하더니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뭐, 뭐라고?”“네가 스파이지? 네가 사주받고 우리 오빠를 죽이려고 한 거잖아! 그렇지 않으면 왜 우리가 식당에 간 사이에 오빠한테 이런 일이 벌어진 거냐고!”차설아는 붉어진 두 눈을 하고서 물었다. 그동안 차성철의 상태에 대해 아는 사람은 바람과 차설아 두 사람뿐이었다.‘아무리 바람이 날 보살펴 주고 내 곁을 지켰다고 해도 누군가가 바람한테 지시해서 나를 감시하는 것일 수도 있잖아. 내가 방심한 틈을 타서... 그래. 바람은 선우 가문 사람이니까 가문의 이익을 위해서 오빠를 죽이려고 했을 수도 있어. 그러면 차씨 가문의 자리를 빼앗을 수도 있으니까!’배경윤이 차설아를 뜯어말렸다.“설아야, 말이 좀 심하다? 바람 씨가 어떻게 사주를 받고 그랬을 수가 있어. 네 말이 사실이라면 바람 씨가 너한테 온갖 심혈을 쏟아부을 리가 없잖아. 성철 오빠를 죽일 생각이었다면 진작에 움직였겠지. 바람 씨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차설아는 고개를 돌려 배경윤을 쳐다보며 물었다.“넌 알고 있었지?”“그, 그게...”배경윤은 주먹을 꽉 쥔 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이때 의사와 간호사들이 병실에서 걸어 나왔다.“의사 선생님, 오빠 어떻게 되었어요?”차설아는 사건의 배후에 대한 생각을 뒤로 하고 의사한테 다가가 물었다.“제때 발견한 덕분에 환자의 목숨을 살릴 수 있었어요. 호흡도 정상적으로 돌아왔으니 걱정하지 마세요.”“다행이에요. 정말 감사해요...”차설아는 식은땀을 흘리면서 고개 숙여 인사했다. 최근 차설아는 감정 기복이 심해서 울었다 웃기를 반복했다. 몸에 무리가 가면서 차설아도 점점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들어가 봐도 돼요. 박 선생님의 말씀대로 곧 깨어날 것 같거든요.”의사의 말에 차설아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감사해요!”차설아는 병실로 들어가 차성철을 바라보았다. 배경윤도 그 뒤를 따라갔지만 바람은 굳은 표정을 하고서 밖에 서 있었다.“바람 씨, 거기서 뭐 해?”배경윤이 고개를 돌려
검은 그림자는 다름 아닌 서씨 가문 서은아였다. 서은아는 그동안 차설아를 감시하고 있었다. 차설아가 식당에 밥 먹으러 간 사이에 차성철이 있는 병실을 책임지는 간호사에게 돈을 쥐여주었고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수술을 마친 뒤, 침대에 누워 간신히 숨을 쉬고 있는 차성철은 살짝 다쳐도 부서질 것처럼 나약해 보였다. 서은아는 병실 침대 앞에 서서 한참을 쳐다보다가 작은 물건을 차성철 베개 옆에 올려놓고는 산소마스크를 벗겼다.“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지만 미안해. 당신이 식물인간이 되면 당신 여동생도 기가 죽어서 나대지 못할 거라고 믿었어. 그런데 박성훈이 와서 당신을 살렸지 뭐야? 성도윤이 박성훈한테 부탁한 거라면서? 정말 어이가 없더라. 보나 마나 차설아가 성도윤한테 부탁한 거겠지. 뻔뻔스러운 년이...”서은아의 눈에 살기가 돌았다.“날 탓하지 마. 탓하려면 그 못난 여동생을 탓해. 차설아는 내가 성도윤과 약혼한 사이란 것을 알고 있으면서 성도윤한테 달라붙으면서 날 괴롭혔어. 동생이 저지른 잘못은 오빠인 당신이 책임져야지. 안 그래?”서은아는 말을 마친 뒤, 감시 카메라를 피해 조용히 병원을 나섰다. 식당에 앉아 있던 차설아는 바람이 포장한 음식을 보면서도 어쩐지 불안해서 먹고 싶지 않았다.“설아야, 네가 제일 좋아하는 탕수육이야. 다른 식당에서 하는 건 눅눅해서 맛없지만 이 식당에서 하는 건 바삭하잖아. 바람 씨가 널 위해서 사 온 건데, 한 입이라도 먹어 봐.”배경윤은 불안해하는 차설아와 맞은편에 앉아 있는 바람을 번갈아 보면서 말했다.“이 식당에 줄을 서려고 아침 일찍 깨어났어. 하지만 스파크가 좋아하는 거라면 눈이 오든 비가 내리든 사러 가야지.”바람이 머리를 긁적이더니 피식 웃었다. 그동안 차설아에게 밥을 먹이기 위해 온갖 시도를 해보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쯧쯧. 바람 씨한테 설아를 맡겼다가는 뚱보가 되겠어. 한 달 안에 10킬로 찐다는 것에 내 머리카락을 걸겠어.”“스파크는 살이 쪄도 예뻐서 괜찮아. 지금처럼 귀여울 거
배경윤은 박성훈을 노려보면서 말했다. 박성훈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성도윤이 데려온 의사라는 말에 성도윤처럼 나쁜 사람인 줄 알고 경계했다.“경윤아, 그러지 마. 박 선생님은 며칠 동안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오빠를 위해서 최선을 다해준 분이야. 오빠가 깨어날 수만 있다면 차씨 가문의 은인이 될 분이거든.”차설아는 다시 일어나더니 박성훈한테 허리를 숙여 공손히 인사했다.“박 선생님, 죄송해요. 경윤이는 늘 저를 아껴주고 보호해 주는 사람이라 이런 일에서는 예민하게 굴거든요. 나쁜 뜻으로 하는 말은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괜찮아요. 병원에서는 예민할 수밖에 없죠. 만나본 보호자 중에서 제일 정상적인 반응이거든요. 저는 이해해요.”박성훈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저 말고 성 대표님께 고맙다고 해야죠. 저는 수술할 생각이 없었는데 성 대표님이 간절하게 부탁했고 제가 좋아하는 바다낚시까지 같이 해주셔서 거절할 수가 없었어요. 게다가 바다낚시 내기에서도 졌으니 성 대표님 말대로 수술해야 했어요.”“성도윤이 어렵게 모신 분인 건 알고 있었어요. 나중에 오빠가 깨어나면 인사하려고요.”“잘 생각했어요.”박성훈이 차설아의 어깨를 토닥이더니 말을 이었다.“생각이 많으면 마음이 힘들 거예요. 사실 생각처럼 최악의 상황까지 가는 일은 없으니 마음 편안하게 먹고 환자분이 깨어나길 기다리세요.”말을 마친 박성훈은 사무실로 돌아가서 옷을 갈아입었다. 지금 오후 4시라서 박성훈이 말한 시간까지는 아직도 4시간이나 남아있었다. 배경윤은 차설아가 또 쓰러질까 봐 걱정되었다.“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밥부터 먹자.”“괜찮아. 난 배고프지 않아. 오빠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고 싶어. 오빠가 일어나야 내 마음도 편해질 것 같아.”차설아는 병실 밖에 서서 침대에 누워있는 차성철을 바라보며 말했다.“너 이러다가 또 쓰러지면 어쩌려고 그래? 오빠도 네가 이러는 걸 원하지 않을 거야.”차설아는 고개를 돌려 배경윤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배경윤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설마 네가 말한 사람이 그 나쁜 놈은 아니겠지? 아니라고 말해.”차설아가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그 사람 말고 또 누가 있겠어. 그래도 도움받았잖아.”“아...”배경윤은 주먹을 꽉 쥔 채 머뭇거렸다. 차설아한테 사실대로 말해야 할지 고민되는 순간이었다. 이 사고는 목적, 증언, 사건 발생 시간으로 보았을 때 성도윤이 배후일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하지만 확실한 증거 없이 성도윤을 범인으로 몰아갈 수 없었다. 만약 이 말을 꺼냈다가 차설아와 성도윤이 싸우게 된다면 손해 보는 건 차설아일 것이다. 하지만 사실대로 솔직하게 말하지 않으면 성도윤이 또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일이었다.“설아야, 그저 네가 걱정되어서 하는 말인데 성도윤을 너무 믿지 마. 성도윤이 어떤 사람인지 네가 제일 잘 알잖아. 진심을 드러내지 말고 계속 지켜보는 게 좋을 것 같아. 알겠지?”배경윤은 머뭇거리다가 결국 직설적으로 말하지 못했다.“나도 알아. 지금까지 성도윤을 용서한 적 단 한 번도 없어. 오빠 얼굴에 남은 흉터를 볼 때마다 성도윤이 떠올라서 화가 솟구쳐 오르거든... 성도윤이랑 잘 해볼 생각이 아니라 그저 좋은 의사를 데려와 주어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을 뿐이야. 네가 걱정하는 일은 없을 거야.”차설아는 수술실을 바라보면서 말했고 눈시울이 점점 붉어졌다. 눈에 핏줄이 가득 서렸지만 차성철이 나올 때까지 쉴 수 없었다. 성도윤에 관한 생각을 하면 할수록 차설아의 마음이 아팠기에 더는 신경 쓰지 않았고 애매모호한 선을 넘지 않았다. 지금처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더 마주치지 않는 것이 두 사람을 위한 일이었다.“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야. 더 이상 그 사람과 엮이고 싶어 하지 않는 건 알지만 항상 경계해야 해. 그 사람이 얼마나...”“알겠어. 곧 수술이 끝날 테니 다른 건 생각하지 말고 오빠가 무사히 나오기를 바라면서 기다리자.”차설아는 배경윤의 말을 끊었다.“그래. 같이 기다려보자.”배경윤은 슬픔이 가득 서려 있는 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