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설아가 입꼬리를 씩 끌어올렸다.‘녀석, 연기하기는, 어떻게 지어내는지 한 번 보겠어!’“친구분이 하신 말, 사실인가 보네요. 많은 감정을 마음속에 억누르고 있어 거의 감당하지 못해낼 지경이에요. 계속 이러다간 위험해요. 우울증의 증조가 보이고 있다고요...”“뭐래? 나 지금 밥 잘 먹고, 잠 잘 자는데 왜 우울증이 와?”“말로는 저를 속일 수 있지만 그림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성도윤이 미간을 구기며 말했다.“사람들이 집을 그릴 때는 보통 굴뚝을 그려요. 굴뚝이 없다고 해도 문이나 창문을 그리는데... 그것들은 출구를 상징하죠. 하지만 당신이 그린 집은 네모나요. 문도 없고 창문도 없어 완전히 밀폐된 공간이에요. 그만큼 당신이 지금 자신을 꽁꽁 싸매고 다른 사람에게 진심을 보여주고 있지 않다는 걸 말해주죠...”“...”차설아는 주먹을 꼭 쥐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래도 좀 볼 줄 아네?’차설아는 애써 털털한 척, 괜찮은 척, 즐거운 척 연기했지만 사실 많은 감정들을 마음속에 숨기고만 있고 다른 사람에게 털어놓으려고 하지 않았다.“집 옆의 나무는 곧게 서 있어요. 뿌리는 깊고요. 그만큼 당신은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다는 걸 설명해요. 그래서 가족에 대한 정도 깊고, 가족에게 보답을 하고 싶어 해요... 나무에 열매가 맺혔으니 당신은 결과를 아주 중요시하게 생각한다는 것을 알 수 있죠. 아마 어떤 것이 당신 마음속의 집착이 되었을 거예요, 그 결과를 바라고 있고요.”“...”차설아는 여전히 침묵을 지켰다.‘뭐야? 좀 하는 게 아니라 완전 고수 아니야? 내 상황을 정확하게 맞혔잖아.’성도윤이 분석을 계속했다.“문 앞에 남자, 여자, 그리고 아이를 그렸는데 강해 보이는 겉모습 아래 부드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어요. 세계를 정복하기보다는 온전하고 원만한 가족을 원하고 있어요, 하지만 그게 부끄럽게 느껴져 세 사람을 작게 그린 거예요, 당신의 마음에서 가장 갈망하는 걸 억누르려고 애쓰고 있는 것 같아요.”차설아는 한숨을 깊게 쉬
하지만 차설아는 결국 거절했다.“나중에 해, 오늘은 너무 피곤하니까 집으로 가서 휴식할래.”차설아는 택이가 1급 심리상담사인 건 믿었지만 그녀는 결국 자신의 마음을 감추기로 했다. 그녀는 마음속에 있는 것들을 묵힐지언정, 직면하려고 하지 않았다...성도윤은 그녀를 강요하지 않았지만 그런 그녀가 너무 안쓰러웠다.차설아가 자신의 ‘죽음’ 때문에 괴로워하는지는 몰랐지만, 그녀는 절대 겉으로 드러난 것처럼 털털하고 유쾌하진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사람들이 원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차설아는 양파처럼 자신을 겹겹이 쌓았다.“그동안 많이 힘들었죠?”성도윤이 무겁고도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차설아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솔직하게 말했다.“그래, 많이 힘들었지.”이곳에는 그녀와 아무 상관이 없는 택이만 있을 뿐이었다. 가족도 원수도 없었으니 그녀는 더는 연기하고 싶지 않았다.우울한 척하는 건 홀가분하고 부담이 없었지만 애써 즐거운 척하는 건... 정말 너무나도 힘들고 피곤했다.성도윤은 그녀를 안아주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괜찮아요, 한잠 푹 자면 모든 게 괜찮아질 거예요.”그는 1급 심리상담사일 뿐만 아니라 훌륭한 최면술사이기도 했다.은은한 향기와 성도윤의 부드러운 속삭임에 차설아는 부드러운 소파에 누운 채 깊은 잠에 빠졌다...이튿날 아침, 햇살과 새소리와 함께 차설아는 잠에서 깨어났다.그녀는 만족스러운 듯이 기지개를 켰는데 몸도 마음도 너무나 상쾌했다.전에 전문가로부터 최면술을 받은 후 수면의 질이 평소 열흘 동안의 수면의 질과 맞먹는다고 들었는데, 차설아는 그 말이 헛소리라고 생각했었다.하지만 지금 와서 보니 전문가의 말은 역시 정확했다.택이의 최면술 덕분에 그녀는 정신이 개운했다.소파 옆의 테이블 위에는 전처럼 해바라기꽃과 쪽지 한 장이 놓여 있었다.“좋은 아침이에요, 나의 여신님. 고난은 결국 지나갈 것입니다. 당신은 이 모든 걸 이겨내고 승승장구할 것입니다-당신의 해어화로부터.”차설아
“얘가 뭐라는 거야? 그냥 잠만 잤다고, 편안하게. 그래서 지금 엄청 개운해.”차설아가 말하고는 품에 안은 해바라기꽃을 유리병 안에 꽂았다.노란색 해바라기꽃은 햇빛 아래서 은은한 향기를 풍겼다. 화려하지도 단조롭지도 않았는데 딱 맞춤하게 아름다웠다.“택이가 겉보기와는 다르게 1급 심리상담사일 줄은 몰랐어. 그림 하나로 날 정확히 분석하더라고. 그리고 최면술도 할 줄 알았어. 택이랑 같이 있으면 마음이 평화롭고 편안해.”이때 부드러운 판다 인형을 끌어안은 원이가 침실 문을 열고는 졸린 눈으로 걸어 나왔다.“엄마, 드디어 오셨어요. 경윤 이모가 그러는데 어제 엄마가 일이 바빠 야근했다면서요. 고생하셨어요...”녀석이 차설아를 확 끌어안더니 애늙은이처럼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어젯밤에 엄마를 위한 남편감을 열심히 골랐으니 이제 곧 엄마를 돌볼 사람이 생길 거예요. 그러면 엄마도 그렇게 힘들지 않을 거예요.”진지한 모습의 녀석이 차설아는 귀엽기만 했다.그녀도 똑같이 원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고마워. 마침 엄마도 어제 원이를 위해 괜찮은 유치원을 골랐거든. 오늘 바로 가보자.”“...”원이는 말문이 막혔다.차설아는 농담 삼아 한 말이 아니었다. 그녀는 정말로 원이와 달이를 위해 유치원을 몇 군데 골랐다.마침 오늘 날씨도 좋고 주말이기도 해서 그녀는 원이를 데리고 유치원을 하나하나씩 둘러보고, 또 원이더러 마음에 드는 유치원을 선택하라고 할 계획이었다.차설아의 선택은 몬테리 유치원이었다.이 유치원은 설립된 지 몇 년 안 됐지만 교사 수준이 높고 환경이 훌륭할 뿐만 아니라 입학 수속도 간단해 이민 온 외국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유치원이었다.차설아는 원이와 달이의 국적을 북유럽의 어느 작은 나라로 만들었기에 그들도 이민한 외국인에 속했고, 이런 국제 사립 유치원에 다닐 수밖에 없었다.게다가 외국인 학생 위주인 국제 유치원에서는 지인을 만날 확률이 아주 낮았고, 자연스럽게 번거로운 일이 생길 확률도 낮았다.
차설아가 뒤돌아보니 뜻밖에도 그녀의 전 시누이, 성도윤의 사촌 여동생 소이서였다.소이서는 어려서부터 곱게 자란 재벌가 아가씨로, 차설아를 처음 봤을 때부터 눈엣가시로 여기며 늘 아니꼽게 보았었다.차설아가 이혼한 후부터는 그녀의 못된 성질을 받아주지 않고 여러 번 혼을 낸 후로 그제야 좀 잠잠해졌었다.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4년 만에 이곳에서 마주칠 줄이야!“진짜 너였어? 설마 했는데!”소이서는 화려한 옷차림이었다. 샤넬 세트에, 몇억은 호가하는 핑크색 에르메스 가방, 그리고 베이지 색 하이힐은 지방시의 한정판이었다. 마치 전 세계 사람들에게 ‘나 돈 있어.’라고 여과 없이 보여주려는 것 같았다.차설아는 그녀를 한 번 훑어보고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불과 4년 만에, 이제 겨우 20대 후반인 소이서는 이미 젊음의 생기를 잃고, 전형적인 부잣집 귀부인의 까칠하고 도도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차설아가 해안을 떠나던 해에 소이서는 해주시의 부유한 상인과 결혼했다고 한다.혼전 임신이라 시부모님들은 그녀를 반가워하지 않았고, 아이가 분만실에서 나오자마자 친자 검사를 의뢰했다고 한다.이것은 한 여자에게 큰 수치였다.요 몇 년 동안 소이서의 귀부인 생활은 겉으로 드러나는 것처럼 화려하지 않은 것이 틀림없다.소이서의 옆에는 원이와 비슷한 나이 또래의 꼬마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옷차림은 원이와 완전히 달랐다.어린 나이에, 온몸을 명품으로 치장하고, 머리카락은 번지르르하고 턱은 높이 치켜들고 있었다. 안하무인의 모습은 소이서와 똑 닮아 보였다.소이서도 원이를 훑어보며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였다.원이가 성도윤의 어린 시절과 너무 똑같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이 아이 설마...”소이서가 막 질문을 하려 하자, 명품으로 치장한 꼬마가 비웃음을 터뜨렸다.“엄마, 이 두 사람 거지처럼 옷을 입었어요. 이 꼴로 몬테리 유치원에 오다니! 원장님한테 말해서 당장 쫓아내세요!”“준혁아, 버릇없게 굴면 안 돼. 이 이모는 엄마의 오랜 친
“나를 혼내 줄 능력은 있고? 앞으로 다시 한번 까불면 절대 이 정도로 안 넘어가!”차설아는 위에서 차갑고 독한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간담이 서늘해지는 모습에 소이서는 금세 꼬리를 내렸고, 낭패하게 땅바닥에 엎드려 잠자코 있었다.‘4년 만에 만났는데, 차설아는 왜 더 오만하고 독해졌어? 절대 만만한 상대가 아니야. 아니면 외도를 저지른 남자가 엄청난 사람인가?’“나쁜 여자, 감히 우리 엄마를 괴롭히다니! 물어 죽여버리겠어!”소이서의 아들은 차설아의 팔을 움켜잡고 입을 벌려 물었다.“우리 엄마 내려놔! 이 미친개야!”원이도 당연히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정색하더니 흑기사처럼 나서서 소이서의 아들을 땅바닥에 밀어버리고는 여세를 몰아 그의 몸 위에 올라탔다.“감히 우리 엄마를 물어? 내가 그 이빨을 다 뽑아버리겠어!”“흑흑흑, 엄마, 엄마 살려주세요!”소이서의 아들은 놀라서 엉엉 울며 도움을 요청했다.하지만, 지금 소이서는 차설아의 발에 의해 밟혀있는 상태라 감히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지켜보던 학부모와 학생은 점점 많아졌고 너도나도 한마디씩 했다.“쯧쯧. 어쩜 이런 사나운 모자가 다 있어?”“이런 학생과 학부모는 절대 몬테리에 올 수 없어! 우리 아이가 괴롭힘을 당할지도 몰라!”이때 면접실의 원장은 바깥의 인기척을 듣고 차가운 얼굴로 나왔다.“무슨 일이죠?”원장은 중년 여성으로, 아주 엄격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딱 보아도 보통 여자가 아니었다.차설아는 침착하게 용모를 다듬고, 한쪽에 있는 원이를 향해 말했다.“원아, 원장님께 인사드려야지?”원이는 그제야 소이서의 아들을 놓아주고, 입꼬리를 씩 올리더니 해바라기처럼 귀엽고 찬란한 웃음을 지었다.“원장님, 안녕하세요.”‘너무 예쁘고 귀여워!’원장은 원이를 보자마자 속으로 참지 못하고 감탄했다.10년 넘게 유치원을 운영하면서 예쁘고 귀여운 아이를 많이 만나보았지만, 지금 눈앞의 아이는 단연코 최고였다.흑진주 같은 동글한 눈, 곧게 뻗은 오똑한 콧날, 어렴풋하게 보이는 입체적
원이는 겉으로는 원장에게 옳고 그름을 묻고 있지만 실제로는 원장을 자기편으로 만들려는 속셈이었다.사랑하는 어머니의 손이 물렸으니 절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반드시 잘잘못을 따져 상응한 대가를 치르게 만들어야 했다.원장은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목청을 가다듬고 진지하게 자신의 태도를 밝혔다.“원아, 어찌 된 일인지 원장님이 알았어. 엄마를 보호하려는 건 당연히 맞고, 용감한 행동이야. 하지만 보호하는 방식이 너무 충동적이고 폭력적이었어. 원장님 생각에는 너무 감정적이었다고 봐. 어쨌든 준혁이와 똑같은 잘못을 저지른 거야. 안 그래?”“원장님 말씀이 맞아요. 원이가 잘못했어요.”원이는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고, 소이서의 아들을 향해 말했다.“동생아, 미안해. 형이 방금 너를 미는 게 아니었어. 형이 사과할게.”잘못을 제때 깨우칠 줄 알고 사과도 할 줄 아는 원이의 모습에 원장은 아주 만족스러웠다. 주변 학부모들도 방금까지의 편견을 버리고 혀를 내둘렀다.하지만 소이서의 아들은 눈물 콧물 범벅으로,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고 손에 든 가방을 원이에게 던지며 억지를 부렸다.“감히 날 괴롭혀? 아빠한테 말해서 널 때려죽이라고 할 거야! 우리 아빠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데! 널 반으로 찢어버리고도 남을 사람이야!”“원아, 조심해.”손 빠른 차설아가 원이를 자신의 뒤로 끌어당겼기에 원이는 날아오는 책가방을 피할 수 있었다.지켜보던 학부모들도 놀라서 자신의 아이들을 뒤로 끌어당겨 보호했다.“저 아이 정신이 이상한 거 아니야? 어유, 놀라라!”“아주 말을 안 듣는 아이네. 애 엄마가 아이를 어떻게 가르쳤기에 저렇게 교양이 없어?”소이서는 자신의 아들이 좀 창피하게 느껴졌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준혁아, 조용히 해.”차설아는 여세를 몰아 먼저 자세를 낮추더니 소이서를 향해 말했다.“방금 우리 서로 잘한 건 없어. 원이가 사과했으니 나도 너와 네 아이에게 정중하게 사과할게. 앞으로 두 아이는 같은 반 친구로 지내야 할 텐데 우리 사이의
“당신...”체면이 제대로 구겨진 소이서는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내가 못할 것 같아? 남편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나랑 아들이 밖에서 이런 대우를 받은 걸 알면,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차설아는 차갑게 입을 열었다.“그렇게 사랑받고 있다면, 어디 한번 오라고 해봐.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기에 네가 미쳐 날뛰는지 내 눈으로 봐야겠어.”“흥, 후회하지 마. 기다려!”일이 이렇게 된 이상, 소이서는 어쩔 수 없이 남편 장시혁에게 전화를 걸어 애교를 떨며 말했다.“여보, 누가 나랑 준혁이를 괴롭히고 있어요. 빨리 와줘요!”바람둥이 남편 장시혁은 늘 소이서를 안중에 두지 않았다. 오늘 마침 근처에서 미팅이 있었고, 아들이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는 소리에 죽일 듯이 달려왔다.얼마 지나지 않아, 벤츠 한 대가 학교에 들어섰고, 덩치가 큰 남자가 내렸다. 이 사람이 바로 해주에서 손꼽히는 부유한 상인 장시혁이었다.“누가 내 아들을 괴롭혀! 죽으려고 환장했지! 어느 놈이야, 당장 나와!”장시혁은 사납게 소리쳤다.구경하던 학부모와 학생들은 자신들에게 불똥이 튈까 봐 연신 뒷걸음질 쳤다.장시혁의 가문은 확실히 재력이 탄탄하고, 사업을 하는 방식도 거칠어서 누구도 감히 밉보일 용기가 없었다.장시혁의 아들 장준혁은 자신의 든든한 백이 오자 금세 턱을 쳐들고 뛰어가 교활하게 말했다.“아빠, 드디어 오셨어요? 나랑 엄마가 나쁜 사람에게 괴롭힘을 당했어요. 반드시 우리 대신 저 두 사람을 혼내줘요. 때려죽이라고요!”소이서도 훌쩍이며 말했다.“여보, 방금 저 꼬마가 우리 준혁이 위에 올라타서 준혁이를 때렸어요. 얼마나 불쌍했다고요... 오늘 저 두 사람을 단단히 혼내지 않으면 장씨 가문의 체면이 서겠어요?”“저 꼬맹이가?”장시혁은 원이를 가리키며 거만하게 말했다.“너 어느 댁 아들이야? 아버지가 누구야? 간이 배 밖으로 나왔나, 감히 장시혁의 아들을 건드려!”담력이 뛰어난 원이는 조금도 겁내지 않고 또박또박 말했다.“맞아요
모두들 멍해졌다. 특히 소이서는 눈치 없이 장시혁을 끌어당기며 소리쳤다.“여보, 대체 뭐 하는 거예요? 저랑 준혁이를 위해 복수를 해야지 무릎을 꿇고 있으면 어떡해요? 차설아는 그저 몰락한 가문의 딸이고 도윤이 오빠를 배신해서 집에서 쫓겨났어요. 이렇게 부도덕한 인간에게 무릎을 꿇다니! 사람들 보기 창피하지도 않아요?”“창피라니!”장시혁은 화가 치밀어 올라 소이서의 뺨을 후려쳤다.“당신이 뭘 알아? 애초에 성이란 선생님의 도움이 없었다면, 우리 가문은 진작에 멸망했을 거야... 당신이랑 준혁이가 먹고 입는 것, 당신 손에 들려있는 그 명품 가방, 준혁이가 신고 있는 신발들 모두 성씨 가문 덕분에 누릴 수 있는 거야. 감히 우리 가문의 은인에게 무례하게 굴면, 절대 용서하지 않아!”소이서는 맞아서 빨갛게 부어오른 뺨을 감싸 쥐고 억울해하며 반박했다.“말도 안 돼요. 해주시의 성씨 가문은 진작 몰락했어요. 가문 전체가 몰살당해서 목숨을 부지하기도 어려운데 어떻게 장씨 가문을 도와요? 장씨 가문이 지금의 성과를 거둘 수 있는 건 전부 가문의 노력으로 얻은 것이지 성씨 가문이랑 뭔 상관이에요? 그리고 그분의 손녀딸이면 또 뭐요? 무릎까지 꿇을 필요 있어요?”소이서는 장시혁과 결혼한 이후로 성격을 많이 굽히고 살았었다. 부유한 장씨 가문에서 재벌가 사모님 생활을 하며 남편의 말을 곧잘 들었고 반항하지 않았다.하지만 지금 차설아에게 무릎을 꿇고 있는 장시혁을 보자 그녀는 체면이 구겨졌고, 처음으로 남편과 맞서 싸우고 있었다.“미련한 년! 감히 내 은인에게 무례하게 굴어? 당장 무릎 꿇어!”장시혁은 소이서에게 명령했다.“싫어요!”소이서는 주먹을 불끈 쥐고 이를 악물었다.“차설아에게 무릎을 꿇으라니, 차라리 날 죽여요!”“그래? 그럼 당장 이혼해!”장시혁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고, 눈을 붉히며 소리쳤다.“당신...”소이서는 눈물을 왈칵 쏟았다.그녀는 당연히 이혼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이혼하지 않으려면 차설아에게 무릎을
“두세 시간 뒤에요.”진찬영이 대답했다. “의사 선생님께서 모든 독소를 제거하려면 세 시간 후에 전신 마취를 해야 한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이제 더 이상 물을 마시면 안 돼요.”“아직 시간이 많네요...”배경윤이 주위를 둘러보면서 말했다.“제 핸드폰은 어디 있어요? 설아에게 안부를 전해야 하거든요.”사도현이 배경윤을 다시 침대에 눕히면서 진지하게 말했다.“지금이 어떤 때인데, 너나 잘 챙겨. 설아를 챙기는 사람은 많고도 많아.”“누군데? 설마 너의 그 쓰레기 같은 친구 성도윤은 아니지?”배경윤이 무례하게 반박했다.“난 그 자식이 방해할까 봐 걱정돼서 설아랑 계속 연락하려고 하는 거야.”사도현은 무심코 한숨을 내쉬었다.“우리 도윤이 형이 대체 너한테 뭘 잘못했다고 그래? 왜 그렇게 싫어하는 거야. 그 두 사람은 딱봐도 재능과 미모를 갖춘 천생연분인데, 그냥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었을 뿐이잖아. 우리 도윤이 형을 바람둥이라고 단정 짓지는 말지?”“그 사람이 바람둥이 아니면 누가 바람둥이인데!”배경윤은 격렬하게 반응하면서 침대에서 일어나 사도현과 따지려고 했다.“혼인 중에 바람을 피우고, 다른 여자를 임신시키고, 겨우 설아 마음을 되돌리더니 또 다른 재벌 딸과 약혼하고. 이게 바람둥이가 아니면 뭔데?”“설아도 너의 오빠랑 그렇고 그런 사이였잖아. 요즘에는 선우 가문 도련님과도 뜨겁게 보내더니. 그리고 도윤이 형은 왜 이렇게 되었는데! 어떻게 실명하고 기억을 잃게 되었는지 설아는 아무런 책임도 없다는 거야?”“그건 그냥 사고일 뿐인데 설아랑 무슨 관계가 있다고 그러는 거야. 원망할 거면 하느님을 원망해. 누가 그런 악행을 많이 저지르라고 했어. 하느님도 노해서 가만두지 않은 거지.”“배경윤,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나한테 막말은 해도 도윤이 형한테는 그러면 안 되지.”“내가 뭘 어쨌다고? 너도 방금 우리 설아한테 뭐라고 했잖아!”두 사람은 마치 싸움닭처럼 감정적으로 싸우기 시작했다.이것은 두 사람이 계속 다투게 되는 주제라
진찬영은 사도현이 지금까지 만난 가장 자아도취적이고 오만한 남자라고 생각했다. “경윤 씨한테 물어봤어요? 당신과 저 사이에 도대체 누가 외부인인지.”사도현은 말을 끝내자마자 진찬영의 품에서 배경윤을 뺏어오려고 했다.이때 이미 힘이 풀린 배경윤이 입술이 약간 창백해져서 말했다.“싸우지 않으면 안 돼요? 계속 싸웠다간 제가 죽을지도 몰라요. 빨리... 저 좀 병원에 데려다줘요!”배경윤은 눈앞이 어두워지면서 의식을 잃고 말았다.다시 깨어났을 때는 이미 근처 병원의 환자 침대에 누워있었다.병상 앞에는 사도현과 진찬영이 앉아있었고, 분위기는 쓰러지기 전과 같았다.하지만 다행히도, 아직은 죽은 목숨이 아니었다.“경윤아, 깼어? 목말라? 물 따라줄까?”배경윤이 눈을 뜨자, 진찬영은 두 눈이 반짝거렸다.“이틀 동안 혼수상태였는데, 목마르냐고 묻는 시간에 이미 다 마셨겠어요.”사도현이 이 말을 할 때, 진찬영은 이미 따뜻한 물을 배경윤한테 건넸다.배경윤은 본능적으로 손을 내밀고 싶었지만, 오른손에 아무런 감각도 없어 전혀 힘을 쓸 수가 없었다.“내... 내 손...”그녀는 침을 삼키면서 두려움이 가득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머릿속에 수만 가지 생각이 들었다. ‘손을 절단해야 하는 건가? 이제는 아무런 쓸모도 없는 걸까?’“걱정 안 해도 돼요. 괜찮아요. 독이 아직 완전히 풀리지 않아서 마비된 느낌이 들 거예요.”진찬영은 부드럽게 그녀의 마음을 안심시켰다.“아... 깜짝 놀랐잖아요.”배경윤은 절단할 필요가 없다는 말에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사도현은 배경윤에게 직접 물을 먹여주면서 대뜸 말했다.“24시간 이내에 독을 깨끗이 배출하지 못하면 신경이 마비되어 절단해야 할수도 있어.”“푸!”배경윤은 물을 다 마시기도 전에 뿜어내고 말았다.“뭐라고?”긴장한 채로 사도현을 쳐다보던 배경윤은 죽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만약 손을 정말 절단해야 한다면,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아직도 이해 못 했어? 독이 말끔히 없어지기 전까진
야맹주를 확인한 배경윤은 신속히 잠수했다.“천천히 가!”사도현은 그녀가 걱정되어 조심하라고 말했다.정말 화려하고 아름다운 산호바다였지만 단면이 너무 높아 일부 산호는 쉽게 만졌다가 위험할 정도로 날카로웠다.하지만 이때, 동심의 세계로 들어간 배경윤은 마치 큰 장난감을 발견한 것처럼 흥분하면서 야맹주 위에 덮여 있던 산호초를 맨손으로 제거했다.그녀는 차설아가 평안 무사할수 있도록 이 야맹주를 선물하고 싶었다.“아!”배경윤이 야맹주에 손을 대려는 순간, 갑자기 산호초 틈새에서 은색 원형 물체가 튀어나와 그녀의 손등을 덥석 물었다.“바다뱀이야!”바다뱀이 배경윤을 물고 옆을 쓱 스쳐 자나가자 머릿속이 하얘진 사도현은 급히 잠수하여 그녀의 손을 잡았다.“봐봐...야맹주!”아직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한 배경윤은 그저 벌레에게 물렸다고 생각하면서 순진하게 사도현에게 야맹주를 자랑했다.“입 다물어!”사도현은 눈앞의 이 덜렁거리는 여자를 보고 있자니 너무 화가 나고 안타까웠다. 그녀는 과연 이런 바다뱀이 독성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걸까?진찬영은 그렇게 많은 것을 신경 쓸 겨를도 없이 긴 팔로 배경윤의 허리를 감싸고, 긴 다리를 쭉 뻗어 빠르게 수면으로 올라갔다.진찬영과 하늘도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차례로 수면으로 떠올라 잠수 마스크를 벗었다.“여기 도와주세요! 보트를 준비해 주세요. 병원으로 가야겠어요!”사도현의 잘생긴 얼굴은 하얗게 질려버렸고, 잠긴 목소리로 육지에 있는 안전요원에게 외쳤다.“무슨 일이에요?”진찬영이 신속히 배경윤 곁으로 다가가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아, 별거 아니에요. 그냥 벌레에게 물렸을 뿐이에요...”배경윤은 뱀에게 물린 손등을 들면서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보였고, 오히려 사도현이 너무 예민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일반적으로 뱀에게 물리면 독이 체내에 바로 퍼지지 않아 아직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그녀는 다시 야맹주를 들어 올리며, 사람들에게 자랑스럽게 말했다.“다들 이것 좀 보세요, 제가
진찬영은 이런 중요한 기회를 사도현을 놓칠 수가 없었다.“저는 저의 파트너로 하늘 씨를 선택하고 싶어요.”진찬영이 사도현을 쳐다보지도 않고 안전요원에게 이렇게 말하자 사도현과 배경윤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이 자식 뭐하는 거야. 포기라도 하는 거야?”사도현은 믿기지 않는지 진찬영을 째려보면서 말했다.“어떻게 하늘 씨를 선택할 수 있어요? 어쩌다 정면으로 승부를 겨룰 기회가 생겼는데 왜 포기하는 거예요?”진찬영이 사도현을 냉랭하게 쳐다보면서 말했다.“지금은 잠깐 경윤 씨를 도현 씨한테 맡길게요. 꼭 잘 지켜주셔야 해요.”사도현은 의문이 가득한 표정으로 잠수복을 입고 하늘과 함께 바다로 뛰어드는 진찬영을 쳐다보았다.“왜 저래?”제대로 한판 붙어볼 줄 알았는데 도전장을 내민 사람은 자기뿐이라 갑자기 김이 새는 느낌에 불쾌하기만 했다.“갑시다. 파트너님.”사도현은 더는 생각하기도 싫어 멍한 표정의 배경윤한테 터벅터벅 걸어갔다.“내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너랑 짝이 된 거야.”배경윤은 싫증난 표정을 하고있었다.진찬영과 손잡고 바다 경치를 즐길 줄 알았는데 말이다.그런데 아무리 봐도 믿음직스럽지 못한 사도현한테 자기 운명을 맡겨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아까 등산할 때까지만 해도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는데 이 타이밍에 진찬영이 뒤로 물러설 줄 몰랐다.“난 다이빙 챔피언까지 땄던 사람이야. 기다려 봐. 오늘 야맹주를 꼭 찾아줄게.”사도현의 오늘 주요 목적은 야맹주를 찾는 것이었다.비록 전설일 뿐이었지만 만약 정말 찾아서 배경윤한테 준다면 이보다 더 의미 있고 로맨틱한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사람들은 하나둘씩 바다에 뛰어들었다.하트섬은 물고기 떼, 가지각색의 산호초가 훤히 보일 정도로 수질이 좋았다. 더 깊이 내려가면 잭피시가 보이기도 했다.배경윤은 산소 호흡기를 꽉 깨물고 천천히 밑으로 향했다.파트너인 사도현은 그녀에게 무슨 사고라도 일어날까 봐 옆에 꼭 붙어있었다.진찬영은 몇 미터 밖에서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다.중이염을
이들은 어제저녁 약속한 대로 섬 근처에 있는 청정지역에서 스토클링하기로 했다.이때 감독 최빈이 말했다.“이 섬은 모양이 하트로 되어있어 하트섬이라고 불리는데 물이 맑아 산호초와 열대 물고기를 많이 볼 수 있을 거예요. 다들 오늘 운이 좋으면 하트섬 특유의 야맹주를 발견할 수 있을 거예요. 소설이나 드라마에서 보던 밤이면 빛이 나는 그런 야맹주요.”“정말 야맹주가 있는 거예요?”배경윤이 이번 스노클링이 점점 더 기대되었다.사실 그녀는 일찍 하트섬에 대해 들은 적이 있었다. 섬 중앙에는 고가의 진주가 들어있는 천연 조개가 많다고 했다. 최빈이 언급한 야맹주는 그저 전설일 뿐이었다.전설 속에서는 야맹주를 찾은 사람이 평생 행복할 거라고 했다.신난 배경윤은 야맹주를 찾아서 차설아한테 선물하고 싶었다. 하지만 정말 존재하는지, 아니면 호객행위인지 몰랐다.“당연히 있죠. 수년 전에 섬에서 살던 분들이 발견했대요. 찾을 확률은 낮지만, 없는건 아니에요.”최빈이 가슴에 손을 얹고 맹세했다.“그럼 뭘 기다려요. 저희 얼른 가요...”조급해 난 배경윤이 이때 대담하게 제의했다.“저희 스노클링하지 말고 아예 다이빙하는 거 어때요? 6미터 가까이 되는 그런 다이빙을 하면 야맹주를 찾을 수 있는 확율이 더욱 높지 않을까요?”“좋아요.”사도현이 손을 들면서 말했다.“스노클링을 해 봤자 아무런 의미도 없어요. 다이빙해야 얻고 싶은 걸 얻을 수 있죠.”“저도 좋아요. 저는 폐활량이 좋아서 물속에서 산소통이 없어도 몇 분씩이나 있을 수 있다고요.”하늘도 찬성의 의미도 손을 들었다.올림픽 금메달 수영선수로서 물을 전혀 무서워하지도 않았다.오직 진찬영은 미간을 찌푸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찬영 씨는 스노클링하실 거예요? 아니면 다이빙하실 거예요?”최빈이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진찬영에게 물었다.“저는 경윤 씨랑 같은 걸 할게요.”진찬영의 표정이 안 좋았던 것은 전에 중이염 수술을 받은 적 있어 수압을 견디지 못해 너무 깊게는 내려가지 못했다. 5미터
배경윤은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머리를 긁적거렸다.“급할 필요 없어요. 아직 시간은 많아요. 어제저녁 하늘 씨를 선택한 것은 저랑 사도현 씨의 모순을 와해시키려고 그랬다는 거 알아요. 그런데 오늘 저녁은 경윤 씨 마음에 따라 선택하고 싶은 사람을 선택했으면 좋겠어요.”진찬영은 배경윤한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지만 두 사람 사이의 관계가 계속 지금처럼 애매모호하지 말았으면 했다.이런 명분 없는 사이가 싫기도 했고, 사도현의 맹렬한 공격하에 배경윤이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자신이 없기도 했다.그래서 하루빨리 결정짓고 싶었다.“알았어요.”배경윤이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오늘 저녁은 제 마음에 따라 더는 흔들리지 않을 거예요.”오늘 아침 진찬영과 함께 잠깐 아침햇살을 만끽하면서 롤러코스터처럼 기복이 심한 생활이 아니라 평온한 생활을 기대했다.배경윤과 진찬영이 함께 하산할 때, 사도현도 마침 기상했다.사도현은 지금까지 스코어가 가장 높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배경윤과 방을 바꾸기로 하고 짐을 배경윤의 바다뷰 별장으로 옮기기로 했다.복식 별장에는 방이 네 개나 있었고, 모두 바다를 향하고 있었다. 속으로는 배경윤이 상냥하게 대해준다면 기꺼이 방을 하나 내어주겠다고 했다. 두 사람이 같은 지붕 아래에 있는 모습만 상상해도 기분이 좋았다.입이 귀에 걸려있을 때, 배경윤과 진찬영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웃으면서 걸어오는 것이다.“어디 갔었어요?”사도현의 안색은 갑자기 어두워지면서 냉랭한 목소리로 물었다.“제가 어딜 갔든 보고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요?”배경윤이 미간을 찌푸린 채 냉랭하게 말했다.“그러다 저를 놓칠 수도 있어요. 지금 경윤 씨한테 방을 하나 내어줄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말이죠...”사도현이 턱을 만지면서 진지하게 말했다.지금, 이 상황에서 할수 있는 가장 진지한 말이었다.배경윤은 어이가 없었다.“유치하긴. 어차피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어디서 지내든 상관없어요. 도현 씨한테는 천장에 별이 가득 붙어있는 저 방이 어울릴 것 같
다음날.아침햇살이 비추는 섬은 몽롱하고 매력적이었다.아침 조깅하는 습관 있는 배경윤은 다들 자고 있을 때 이미 일어나 뛰고 있었다.산 주위를 따라 2킬로 정도 뛰면서 땀에 흠뻑 젖은 그녀는 개운한 느낌이었다.산 중턱에 있는 전망대에 서서 파란 바닷가를 보고 있자니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이었다.“좋은 아침이에요.”배경윤이 기지개를 켜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 뒤돌아보았더니 진찬영이었다.“이런 우연이. 찬영 오빠도 조깅하러 오셨어요?”진찬영을 향해 손을 흔드는 그녀의 얼굴은 자기도 모르게 발그레해졌다.어제저녁 진찬영이 대놓고 고백하는 바람에 두 사람 사이의 장벽이 무너져 이제는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몰랐다.“우연이 아니라...”진찬영은 오늘 흰 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살짝 가르마를 탄 머리 스타일을 하고 있어 청춘 로코물에 나오는 여주인공이 잊지 못하는 킹카처럼 보였다.그는 난간을 잡고 옆모습으로 의미심장하게 배경윤을 쳐다보았다.“저번에 경윤 씨가 조깅하는 습관이 있다고 들어서... 일부러 만나려고 온 거예요.”배경윤과 이곳에서 만나려고 그녀보다 한 시간이나 더 일찍 일어난 것이다.그때는 아직 날도 밝지 않았던 때였다. 그는 혼자서 산 중턱에 있는 전망대로 올라와 하늘이 서서히 물들어지는 것을 보면서 세상이 참 아름답다는 느낌이 들었다. 속으론 배경윤과 함께 이 경치를 보면 얼마나 좋았겠냐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배경윤이 흔들린 표정으로 말했다.“그런데 제가 이 코스를 달릴지 어떻게 알았어요? 그러다 못 만나면요?”“만나지 못해도 아쉬운 대로 아름다운 경치를 봤잖아요.”진찬영은 고개돌려 전방에 있는 아름다운 경치를 보면서 부드럽게 말했다.“저는 어떤 일이든 결과를 바라지 않아요. 과정만 아름다우면 된 거예요. 그리고 결국엔 경윤 씨를 만났잖아요.”배경윤은 잘생긴 그의 옆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따뜻해지는 느낌에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그렇다. 결과보다는 과정만 아름다우면 되었다.이 부분에서는 진찬영과 생각이 똑
“에헴!”하늘을 신경 쓰지도 않던 사도현은 두 사람이 신나게 이야기하고 있길래 질투심을 느꼈다.하늘도 그제야 선을 넘었다는 것을 눈치채고 바로 입을 닫으면서 자세를 고쳐잡았다.“죄송해요. 경윤 씨, 저는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어요. 다른 사람을 선택해 보세요.”“그게 뭐 어때서요? 어차피 저희 서로 선택하는 과정이잖아요. 하늘 씨가 마음에 들어 하는 분과 셋이 함께 스노클링하면 되잖아요. 둘이든 셋이든 저는 상관없어요.”배경윤이 웃으면서 말했다.그녀는 하늘이 컨트롤하기 쉬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거기다 제일 안전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진찬영에게 폐를 끼치지도 않고 사도현도 어쩔 수가 없었다.“그래요? 경윤 씨는 정말 내일 아침 제가 마음에 들어 하는 사람과 함께 스노클링할 수 있는 거예요?”하늘은 억울한 강아지처럼 순진한 표정으로 배경윤을 쳐다보고 있었다.“그럼요. 저는 마음이 넓은 사람이에요. 3각 구도는 제일 안정적이니까요.”배경윤이 익살스럽게 말했다.이렇게 말하면 안 된다는 걸 알지만 입이 자기 말을 듣지 않았다.“그래요. 그러면 내일 경윤 씨, 저, 그리고 제가 마음에 들어 하는 분, 세 명이 함께 스노클링하는 거예요. 마음이 변하면 안 돼요.”“걱정하지 마세요. 절대 빠지는 일이 없을 거예요. 제가 빠지면 평생 짝을 찾지 못할 거예요.”배경윤은 하늘에 대고 진지하게 맹세했다.이때 하늘이 진지하게 말했다.“사실 제가 마음에 들어 하는 사람은 사도현 씨에요. 그리고 오늘 모든 사람 앞에서 사실대로 말했고요.”사도현이 눈썹을 움찔하더니 웃을 듯 말 듯 한 표정으로 배경윤을 쳐다보았다.“저희 내일 봐요.”‘왜 이렇게 된 거지?’배경윤은 흐뭇한 표정의 사도현을 보면서 그가 일부러 함정을 파놓았다고 의심하기 시작했다.바로 이때, 진찬영이 입을 열었다.“3각 구도가 안정적이긴 하지만 재미가 없잖아요. 저도 끼워주시면 안 돼요?”진찬영은 사도현을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사도현을 쳐다보았다.“제가 마음에 들어 하는 분은 배경윤
“처음 그대를 만났을 때 다부진 몸매에 끌려 그대를 쭉 지켜보게 되었어요. 텔레비전에 나오는 그대의 모습을 보면서 심장이 떨려왔어요. 자신감이 넘치는 그대가 유독 빛나 보였거든요. 그대는 정말 멋진 사람이에요.”하늘은 배경윤이 쓴 편지를 천천히 읽으면서 진찬영을 힐끗 쳐다보았다. 남성 참가자 중에서 진찬영이 텔레비전에 가장 많이 나왔기 때문이다.진찬영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앉아 있었다. 사도현은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고 당장이라도 한 대 때릴 것 같은 모습이었다.“첫인상 1위가 누구냐고 물으면 그대라고 하고 싶어요. 하늘 씨, 앞으로 우리 잘 지내봐요. 하늘 씨랑 좋은 인연을 이어가고 싶어요. 하늘 씨의 마음도 궁금해요. 단둘이 얘기 나누고 싶어요.”편지를 다 읽은 하늘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하늘은 부끄러워하면서 머리를 긁적였고 배경윤을 쳐다보면서 물었다.“경윤 씨, 언제부터 저한테 호감이 생긴 거예요?”하늘을 포함한 게스트들은 전부 두 눈을 크게 뜨고 배경윤을 쳐다보았다. 많은 일이 일어났지만 배경윤은 사도현, 진찬영이 아닌 뜬금없는 하늘한테 고백했던 것이다.[지금 사람 마음 갖고 장난하는 거야? 거짓말하지 마. 누구한테 마음이 있는지 다 보이는데 왜 저러는 거야?][이거 대본 맞지? 대본의 냄새를 맡았어. 제작진한테 너무 실망이야.][대본이든 말든 나는 사도현과 배경윤이 이어지길 기도할 거야. 두 사람 진짜 잘 어울리잖아. 이러다가 진짜 이어져서 결혼할 수도 있어.][결혼이라니, 너무 앞서간 거 아니야? 사도현이 혼자 짝사랑하는 것 같아. 배경윤은 진찬영을 더 좋아한다고!]네티즌은 댓글 수백 개씩 달면서 열렬하게 토론했다. 진찬영의 평온한 얼굴에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사도현도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사도현은 하늘을 쳐다보면서 피식 웃더니 입을 열었다.“내가 열렬하게 구애했는데도 하늘 씨한테 졌어요. 정말 아쉬워요.”“사도현 씨, 제 말 좀 들어봐요. 경윤 씨가 장난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그래요. 저는 오늘 경윤 씨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