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 너야말로 어리석은 거 같은데?”성주혁이 분노의 목소리로 말했다.“설아는 이미 널 좋게 생각하고 있지 않아. 그런데 이제 와서 죽는 척을 한다고.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두 사람 점점 멀어지더니 이제 와서 이 사달을 내고. 이제 어떻게 설아의 마음을 되돌릴지 지켜보겠어.”성도윤이 말했다.“제가 알아서 잘 합니다. 어차피 제가 살아 있어도 차설아는 나를 극도로 싫어했어요. 차라리 다른 신분으로 옆에서 지켜주며 마음을 얻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말만 번지르르하게 해.”성주혁은 화난 나머지 가슴팍을 움켜쥐며 다시 성도윤을 혼냈다.“네가 뭐라도 되는 줄 알아? 이미 죽은 마당에 설아가 너를 위해 과부를 자처하겠어? 네가 무슨 계획을 하고 있든 빨리 설아에게 솔직하게 말해. 아니면 일이 점점 커질수록 수습하기 어려워질 거야. 만약 설아가 너한테 완전히 마음이 식고 다른 남자한테 덜컥 시집 가버리면 어떻게 해? 그때 가서 후회해도 늦었을 거라고!”성도윤의 눈빛이 차가워지더니 단호하게 말했다.“절대 그럴 리가 없어요!”성도윤이 죽은 척 연기를 한 건 성대 그룹의 ‘암흑’ 세력들을 일망타진하기 위해서이다.모든 게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고, 이제 손을 쓸 타이밍만 기다리면 되었는데 방금 성주혁과 차설아의 말을 들으니 성도윤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급해 났다.이대로 계속하다가는 그와 차설아의 거리가 점점 멀어져 다시는 원래처럼 되돌아올 가능성이 없어질까 봐 걱정했다. 차설아는 지금 그를 형을 죽인 범인이라고도 생각하고 있었으니 말이다.하지만 성도윤은 너무 억울했다. 그때 CCTV 영상을 지운 것도 할아버지의 뜻으로 지운 거였다.“할아버지, 아직도 왜 형이 총을 맞은 영상을 지우라고 하셨는지 모르겠어요. 그때 범인도 끝까지 쫓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이걸 설아가 오해해서 저는 후계자 자리를 위해 형을 죽인 범인으로 되었다고요.”성도윤은 한숨을 푹 쉬었다.지금 그는 이미 ‘죽은’ 신분이다. 아무리 억울해도 차설아 앞에서 해명하지
“뭐라는 거야?”차설아는 신경 쓰지 않고 바로 전화를 끊었다.하지만 곧이어 배경윤도 전화를 걸어오고는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언니, 지금 어디에 있어? 얼른 보이 바로 가봐. 늦으면 언니가 마음에 들어 하던 택이가 더럽혀질 거야.”“더럽혀진다고?”“그래, 아까 바에 있던 사람이 나한테 도움을 요청하더라고. 택이가 너무 인기 많아서 이미 어떤 여자 보스의 눈에 들었대. 2억 내고 방으로 데려가려고 했는데 택이가 당당하게 거절하고 자기는 이미 주인 있는 몸이라고 했대. 설아 언니를 위해 몸을 지켜야 한다며.”“뭐? 나를 위해 몸을 지킨다고?”차설아는 어이가 없었다.차설아와 택이는 겨우 하룻밤을 같이 보냈고 술김에 키스한 것뿐이었다.‘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나를 위해 몸을 지키겠다고 하니, 설마 내 돈을 뜯어내려고 이러는 건가?’“양쪽에서 싸움이 났대. 언니도 알다시피 바에는 잘생긴 남자들이 많지만 다 사회 경험이 많지 않은 젊은 애들이라고. 그 여자 보스가 깡패들을 불러 모은 모양이야. 택이가 아닌 바에서 일하는 잘생긴 남자들을 위해서라도 당장 가봐야 하는 거 아니야?”배경윤이 흥분된 목소리로 차설아를 타일렀다.그녀는 마침 택이와 차설아를 어떻게 엮을지 고민하던 참에 이런 좋은 ‘기회’가 찾아온 것이었다. 이게 하늘이 준 인연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택이는 바에서 일하는 사람이라 어디 내놓긴 부끄럽지만 그래도 성도윤을 대신해 차설아의 기분을 풀어줄 수 있다면 그만이었다.지금 차설아는 스스로를 궁지에 몰아넣었기에 그런 그녀를 ‘구하고’ 같이 ‘미친 짓’을 해줄 사람이 필요했다.하지만 안타깝게도 차설아는 흥미를 보이지 않았는지 차가운 얼굴을 하며 대답했다.“도움을 요청하려면 경찰을 찾아야지, 나를 왜 찾아? 나 바쁘니까 일단 끊어!”“당연히 언니랑 상관있는 일이니까 찾지. 택이가 언니 때문에 그 여자 보스를 건드렸다잖아. 언니만을 위한 해어화가 악독한 아줌마에게 괴롭힘당하는 꼴을 꼭 봐야겠어?”“그 여자 보스, 풍채가 있으시
여자 보스가 그 말을 듣더니 벌컥 화를 냈다.“뻔뻔스러운 것. 꼭 내가 손을 써야 정신을 차리겠어? 저 녀석 끌어내!”그녀의 말에 택이의 두 팔은 검은 옷을 입은 두 사내에게 꽉 잡혀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했다.여자 보스는 몸에 지닌 채찍을 꺼내고는 택이의 가슴팍을 향해 ‘짝’ 내리쳤다.남자의 흰 셔츠는 찢어졌고, 이내 피로 빨갛게 물들었다. 그의 잘생긴 얼굴과 차가운 분위기까지 더해져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가슴이 아프게 했다.“다시 한번 물을게. 나랑 갈래? 가지 않을래?”“그분 아니면 어디도 안 가요!”“짝짝짝!”여자 보스는 또 그를 향해 채찍을 몇 번 휘둘렀다.보이 바의 사장과 직원들은 부들부들 떤 채 그저 옆에서 지켜보고 있을 뿐,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보이 바에 여자 보스의 부하들로 꽉 찼고, 택이를 위해 나선다는 건 스스로 죽음을 자초한 거나 다름없기 때문이다.여자 보스가 다시 채찍을 택이의 몸에 내리치려 할 때, 그녀는 갑자기 팔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고개를 뒤로 돌려보니 차설아의 차가운 눈빛과 마주하게 되었다.“감히 내 사람도 건드리는 거야?”말을 마친 차설아는 채찍의 다른 끝을 꼭 잡고 힘껏 당겼다.100kg 넘은 여자 보스는 그대로 멀리 날아가 버렸다!주위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깊은숨을 들이마셨다.여리여리해 보이는 차설아에게 이 정도의 힘이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놔!”차설아가 차가운 얼굴을 보이고는 택이의 두 팔을 잡고 있는 두 건장한 사내에게 명령했다.두 사내는 당연히 그녀의 말을 듣지 않았고, 오히려 그녀에게 손을 쓰려고 했는데 차설아는 바로 두 사람을 발로 세게 걷어찼다.차설아의 싸움 실력으로 이 사람들을 상대하는 건 보잘것없는 개미를 밟아 죽이는 것과도 같이 쉬웠다.깃털 가면을 쓴 남자는 깊은 눈망울을 반짝이더니 여유롭게 말했다.“당신이 날 구하러 올 줄 알고 있었어요.”왠지 모르게 차설아는 가면을 쓴 녀석이 완전히 다르게 느껴졌다. 차갑고 도도한 분위기가 ‘그 사람’
“???”차설아는 부하들을 이끌고 바를 떠난 여자 보스를 보고는 어안이 벙벙했다.‘뭐야? 나 농락하는 거야? 싸울 것처럼 하더니 왜 갑자기 가는 거야?’바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사장과 젊은 남자들이 차설아를 둘러싸더니 그녀를 우상 보듯 숭배의 눈빛으로 바라봤다. 당장이라도 그녀를 위해 무릎도 꿇을 수 있었다.“차설아 씨, 역시 여장부시네요, 실검에 떴던 동영상에서보다도 싸움을 잘하시는데요, 너무 멋있어요!”“차설아 씨, 앞으로 우리 바를 책임져 주세요. 저렇게 막 나가는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더 상대하기 어렵다니까요. 괴롭힘을 당했던 애들이 얼마나 많은데요!”바 사장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차설아에게 애원했다.“특히 우리 택이 말이에요. 워낙 잘생긴 얼굴로 사람들을 놀라게 했으니 개나 소나 다 넘보려고 해요. 오늘 그 여자 보스의 뒤를 봐주고 있는 세력이 대단해요. 차설아 씨가 아니었다면 우리 택이는...”차설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자신의 뒤에 서 있는 택이를 보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어때? 버틸 수 있겠어?”“캑캑.”택이는 몸을 비틀거리더니 기침을 하면서 창백한 얼굴을 보이고는 허약한 목소리로 말했다.“아직 버틸 수 있어요. 단지 오늘 그 손님의 미움을 샀으니까 나중에 반드시 저에게 복수하려 할 거예요. 오늘이야 별일 없이 여기를 떠날 수 있겠지만 내일 또 그 여자 손에 들어가게 되면 어떻게 해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모르겠네요!”남자가 말하고는 당장이라도 바닥에 쓰러질 기세였다.“조심해!”차설아는 재빠르게 그를 부축했다.택이는 차설아가 자신을 부축하자 갑자기 힘을 못 쓰더니 그대로 차설아의 어깨를 감싸고는 그녀의 몸에 찰싹 달라붙었다.옆에 서 있던 다른 잘생긴 남자들이 속삭였다.“역시 택이야. 이 와중에 꼬리 치고 있는 것 좀 봐. 정말 사람 마음을 잘 홀린다니까!”“택이가 뭘 잘못했겠어. 저렇게 예쁜 선을 가진 다리라면 나는 더 꽉 끌어안겠는걸?”바 사장도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 재
“먼저 상처부터 치료하는 게 좋겠어요.”차설아는 택이를 병원에 데려가려고 했지만 택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이 정도 상처로 병원으로 갈 것 없어요. 날 집에 데려다줘요, 며칠 누워있으면 괜찮아질 것이니.”차설아는 얼른 이 성가신 놈을 보내고 싶었다. 그러면 자기가 해야 할 일은 다 했으니 마음 놓고 떠날 수 있었다.“알겠어, 데려다줄게.”택이의 집은 바 근처에 있었는데 아파트 투룸이었다. 인테리어는 매혹적인 겉모습과는 달리 아늑하고 포근했다.“됐어, 집까지 데려다줬으니까 푹 쉬어. 시간이 늦었고, 나는 이만 갈게.”차설아는 그래도 선을 지키며 밖에 선 채 작별 인사를 건넸다.한밤중에 두 사람이 같이 있는 게 다른 사람에게 알려지면 안 좋으니 말이다.훤칠한 택이는 차설아의 부축 없이 병약한 모습을 보이며 휘청거렸다.그는 또 입꼬리를 씩 올리더니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왜요? 제가 잡아먹을까 봐 들어오지 못하는 거예요?”“그건 아니고!”차설아는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면서 남자를 샅샅이 훑어보고는 군침을 꿀꺽 삼켰다.“내가 주체하지 못하고 널 잡아먹을까 봐 겁이 나.”“...”가면에 가려진 남자의 잘생긴 얼굴은 순식간에 차가워졌고, 그의 얼굴색도 한껏 어두워졌다.그는 당연히 택이가 아닌 성질 나쁘고 소유욕이 강한 성도윤이었다.오늘 밤에 있었던 일은 모두 그의 자작극이었다.그는 택이의 신분으로 모두를 속였는데 합당한 이유로 뻔뻔스럽게 차설아의 옆을 독차지하려고 했다.바에서 일하는 남자로 차설아의 취향을 쉽게 만족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너무나도 수월하게 그녀에게 다가갈 수 있었다.‘차설아, 이렇게 원칙 없는 여자였어? 이렇게 쉽게 걸려드는 거였어?’“괜찮아요, 저는 어차피 당신 거잖아요. 좋을 대로 저를 즐겨주세요, 저는 아무 불평도 하지 않을 거예요.”성도윤은 어금니를 꽉 깨물며 말했다.“그게...”그의 말은 차설아를 난감한 상황에 부닥치게 했다.차설아는 그저 택이에게 이 세상이 얼마나 무섭고 험악한지
“현관 캐비닛에 있어요. 폐를 끼쳐드려 정말 죄송해요.”성도윤이 허약한 목소리로 말했는데 연기 대상을 받아도 될 정도로 사람의 마음을 간드러지게 하는 불쌍한 연기를 선보였다.차설아는 현관 캐비닛에서 알코올, 연고 등 여러 가지 약이 들어 있는 약상자를 발견했다. 그녀는 소파에 다시 돌아왔다.완벽에 가까운 얼굴과 보일 듯 말 듯 한 근육 라인, 그리고 차가운 분위기를 보인 남자에게 자꾸만 눈이 갔다. 아니, 눈이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먼저 옷 벗어.”차설아는 마치 경험이 많은 바람둥이처럼 남자를 내려다보며 명령했다.‘이렇게 거침없이 말한다고?’성도윤은 오히려 부끄러워 두 손으로 가슴팍을 가로막고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옷은 왜 벗어요? 지금 이런 꼴로 무슨 일을 하기는 불편할 거예요... 물론 당신이 굳이 요구한다면 저도 잘 협조할게요.”차설아는 얼굴을 붉히더니 어금니를 깨물며 말했다.“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옷을 벗으라고 한 건 너에게 약을 발라주기 위해서야. 옷을 벗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너 약 발라줘?”그의 흰 셔츠는 이미 채찍으로 찢어져 있었고, 얼룩덜룩한 붉은 핏자국은 마치 매혹적인 꽃처럼 그를 더 돋보이게 했다. 차설아는 밤새 그의 얼굴을 감상하고 싶은 지경이었다.하지만 약을 바르기 위해 옷은 벗어야 했으니.“그래요...”성도윤의 목소리에는 실망이 담겨 있었다.그는 방금 차설아의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자신을 ‘희생’할 각오를 했는데... 결국 약을 바르는 거였다니?‘하지만 괜찮아, 앞으로 시간은 많이 남았으니까. 내가 고생해서 만든 완벽한 몸이 차설아를 언젠간 홀리겠지!’성도윤은 기다란 손가락으로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기 시작했다.섹시한 쇄골부터 튼실한 가슴팍, 그리고 초콜릿 복근까지, 하나하나씩 드러났다...차설아는 마치 신이 만들어낸 완벽한 예술작품을 보듯 성도윤의 몸을 뚫어지게 살펴봤다.그러더니 갑자기 복숭아처럼 얼굴이 불그스름해졌는데 차가운 그녀의 얼굴에서 귀여움이 엿보였다.‘쯧쯧, 몸매가 대박
성도윤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제가 겉으로는 바에서 노래나 하는 바람둥이처럼 보이지만 사실 1급 자격증이 있는 심리상담사예요. 심리상담, 심리치유, 재건심리학, 그리고 최면술을 잘해요. 친구분께서 당신에게 안 좋은 일들이 일어나 기분이 우울하다고 하셨는데 제가 당신을 도와주길 바랐어요. 혹시 저를 믿는다면 제가 도와줄게요.”“1급 자격증이 있는 심리상담사라고?”차설아는 의외이기도 하면서 어색한 마음이 들었다.눈앞의 녀석이 온전히 얼굴로만 돈을 버는 줄 알았으니 말이다.“그게 무슨 표정이에요?”성도윤이 웃으면서 부드러운 손길로 그녀의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헤치며 감미롭고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저 못 믿으시는 거예요? 아니면 실망스러운 거예요? 사실 마음을 치유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당신의 몸도 치유할 수 있는데요, 필요하다면요.”“아니, 필요 없어. 고마워.”차설아는 얼굴이 빨개진 채 남자의 몸을 확 밀어내고는 자리에 곧게 앉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당연히 너를 믿지 못하는 거지. 네가 온밤 동안 이상한 말을 하고 있는데 심리상담사일 리가 있겠어?”1급 자격증은 심리상담사 자격증 중에서도 최고급의 자격증이었다. 탄탄한 전문지식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공감 능력과 상황판별 능력이 필요한데 겨우 얼굴로 돈을 버는 사람이 어떻게 그 자격증을 딸 수 있단 말인가?“믿지 못하시겠으면 한 번 실험을 해볼까요? 제가 거짓말을 했는지?”“무슨 실험?”“혹시 그림 심리테스트 들어봤어요?”“들어보긴 했지만... 그냥 흰 종이에 집, 나무, 사람 그리는 거 아니야?”“맞아요.”성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림을 다 그리시면 제가 분석을 시작할게요. 만약 제 분석이 맞는다면 저 믿으실 수 있겠죠?”차설아는 심리 테스트가 나름 재밌어 보여 흔쾌히 동의했다.“그래, 한 번 그려보지 뭐. 네가 심리상담사인지 아닌지도 곧 알게 될 거야.”성도윤은 색연필과 종이를 찾아내고는 차설아에게 건네면서 기대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한 번 그려보세요
차설아가 입꼬리를 씩 끌어올렸다.‘녀석, 연기하기는, 어떻게 지어내는지 한 번 보겠어!’“친구분이 하신 말, 사실인가 보네요. 많은 감정을 마음속에 억누르고 있어 거의 감당하지 못해낼 지경이에요. 계속 이러다간 위험해요. 우울증의 증조가 보이고 있다고요...”“뭐래? 나 지금 밥 잘 먹고, 잠 잘 자는데 왜 우울증이 와?”“말로는 저를 속일 수 있지만 그림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성도윤이 미간을 구기며 말했다.“사람들이 집을 그릴 때는 보통 굴뚝을 그려요. 굴뚝이 없다고 해도 문이나 창문을 그리는데... 그것들은 출구를 상징하죠. 하지만 당신이 그린 집은 네모나요. 문도 없고 창문도 없어 완전히 밀폐된 공간이에요. 그만큼 당신이 지금 자신을 꽁꽁 싸매고 다른 사람에게 진심을 보여주고 있지 않다는 걸 말해주죠...”“...”차설아는 주먹을 꼭 쥐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래도 좀 볼 줄 아네?’차설아는 애써 털털한 척, 괜찮은 척, 즐거운 척 연기했지만 사실 많은 감정들을 마음속에 숨기고만 있고 다른 사람에게 털어놓으려고 하지 않았다.“집 옆의 나무는 곧게 서 있어요. 뿌리는 깊고요. 그만큼 당신은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다는 걸 설명해요. 그래서 가족에 대한 정도 깊고, 가족에게 보답을 하고 싶어 해요... 나무에 열매가 맺혔으니 당신은 결과를 아주 중요시하게 생각한다는 것을 알 수 있죠. 아마 어떤 것이 당신 마음속의 집착이 되었을 거예요, 그 결과를 바라고 있고요.”“...”차설아는 여전히 침묵을 지켰다.‘뭐야? 좀 하는 게 아니라 완전 고수 아니야? 내 상황을 정확하게 맞혔잖아.’성도윤이 분석을 계속했다.“문 앞에 남자, 여자, 그리고 아이를 그렸는데 강해 보이는 겉모습 아래 부드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어요. 세계를 정복하기보다는 온전하고 원만한 가족을 원하고 있어요, 하지만 그게 부끄럽게 느껴져 세 사람을 작게 그린 거예요, 당신의 마음에서 가장 갈망하는 걸 억누르려고 애쓰고 있는 것 같아요.”차설아는 한숨을 깊게 쉬
“눈이 다 나았다고 하길래 특별히 축하해주러 왔지.”서은아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성진에게 선물을 툭 던져주었다.“이렇게 신경 써주니 참 고맙네.”성진은 선물을 받으며 냉랭하게 말했다.“형이랑 결혼이라도 할 건가?”“성진아, 너 지금 나 가지고 노는 거야? 밖에서 떠도는 소문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는 건 아닐 거고.”서은아는 말하다가 화가 나서 소파를 두 번이나 세게 걷어찼다.“성도윤 그 배은망덕한 놈! 양심이 있으면 그러지 말았어야지... 내가 서씨 가문의 미래까지 걸고 도왔는데! 그땐 내가 눈이 멀었어.”“그렇게 화낼 것까지야... 나도 한때 그랬었어. 너도 그때 나랑 마찬가지인 거고. 이젠 헛된 꿈에서 깨어나 제대로 앞을 봐야 할 때인 거지.”성진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그래. 진작에 정신을 차렸어야 했는데...”“근데 나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감이 안 와. 너도 전에 그랬었다며. 조언이라도 해줄 수 있어?”서은아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며 성진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욕심이 가득했지만 말이다. 사실 그녀가 성진을 찾아온 건 이미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다만 성진이 어떤 조건을 제시할지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그럼 네가 뭘 해줄 수 있는지 말해봐. 원하는 게 뭔데?”“서씨 가문의 모든 걸 이용해서 널 도울 수 있어. 대신 내가 원하는 건 성도윤이 완전히 무너져서 빈털터리가 되는 거야.”“진짜 그렇게 하겠다고? 네가 가장 사랑했던 남자 아니었어?”“내가 독하게 굴지 않으면 성도윤이 깨닫긴 하겠어? 누가 진짜로 그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인지 알게 하려면 이렇게 하는 수밖에 없어.”서은아는 싸늘한 말투로 말을 이어 나갔다.“모든 걸 잃어 봐야만 내가 도윤이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게 될 거야.”“재밌는 생각이네...”성진은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고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솔직히 말해서 만약 차설아가 없었더라면 그는 서은아 같은 여자를 꽤 높이 평가했을 것이다. 그녀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미워하는 것에 거침
민이 이모의 말을 들은 성도윤은 계속해서 물었다.“왜 따라 배우면 안 되는 거예요? 저는 설아의 부모님이 금슬이 좋다고 들어서 무척 부러웠거든요. 저도 설아랑 알콩달콩 지내고 싶어요.”그러자 민이 이모는 미소를 지으면서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금슬이 좋은 부부로 알려진 건 맞지만 두 분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아무도 몰라요. 부부마다 서로를 대하는 방식이 다르기에 굳이 따라 배울 필요 없다고 한 거고요. 설아 아가씨랑 지금처럼만 지내시면 돼요.”“그러면 설아 아버지는 예전에 어떤...”“도련님, 죄송하지만 예전의 일에 대해서는 드릴 말씀이 없어요. 나이를 먹다 보니 기억력도 나빠졌거든요.”민이 이모는 성도윤의 말을 잘랐다.“저는 이만 가볼게요. 도련님도 일찍 쉬세요.”문을 열고 나가려던 민이 이모는 뒤돌아서서 성도윤을 향해 말했다.“혹시 알게 된 것이 있다고 해도 밝히지 마세요. 궁금한 게 있더라도 계속 조사하지 마시고요. 판도라의 상자를 열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몰라요. 그럴 바에는 평온한 일상을 보내는 게 낫지 않을까요?”민이 이모가 나간 뒤, 성도윤은 생각에 잠겼다.‘이모님의 말을 들어보니 일리가 있어. 비밀에 부친 일을 굳이 조사해 봤자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을 거야. 설아한테 더 이상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몇 분 후, 성도윤은 진무열한테 전화를 걸었다.“저번에 내가 부탁한 건 잠시 멈춰. 아직은 때가 아니야.”한편, 성진의 별장.어두운 불빛과 가라앉은 분위기는 성진의 기분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정말 네가 나한테 두 눈을 기증한 거라고?”성진은 책상 앞에 앉아서 기증자의 자료를 천천히 훑어보았다. 현청아라는 여자와 사진 속의 여자를 번갈아 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도련님께 기증할 수 있어서 영광이에요.”현청아는 선글라스를 끼고 대답했다. 두 눈은 움푹 파였고 성진이 기억하던 그 여자의 목소리와 똑같았다.하지만 성진은 현청아가 수술 전에 얘기를 나누었던 여자와 같은 사람이 아닐 거라
성도윤은 차가워진 밤공기보다 소영금이 숨긴 사실이 더 궁금했다. 민이 이모는 젊었을 때부터 차씨 가문에서 일했기에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도 있었다.“조금 쌀쌀해지긴 했어요. 마침 추웠는데 가져다주셔서 감사해요.”성도윤은 문을 열면서 미소를 지었다.“도련님한테 괜히 제가 더 미안해져요. 설아 아가씨는 어릴 적부터 고집이 세고 뒤끝이 길거든요. 아직도 도련님한테 화가 났는지 계속 오두막에서 지내게 하네요. 이 이불을 덮으면 따뜻할 거예요.”민이 이모는 침대 위에 이불을 펴주면서 부드럽게 말했다.“이모님, 차씨 가문에서 일한 지 몇 년 되셨어요?”민이 이모는 멈칫하더니 어색하게 웃으면서 물었다.“갑자기 그런 건 왜 물으시는 거예요? 도련님이 궁금해할 줄은 몰랐어요.”“이모님처럼 한 가문에서 평생 일하시는 분은 드물잖아요. 게다가 진심으로 차씨 가문 사람들을 생각해 주고 보살펴주는 게 대단해서요.”“저는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에요. 회장님과 사모님이 저한테 아주 잘해주셨어요. 그래서 할 수 있을 때까지 일하는 거고요.”“설아한테서 들었는데 이모님은 대대로 의학을 전공했다면서요? 이모님 아버지는 이름을 날린 의사였고 이모님 실력도 훌륭하다고 들었어요. 사용인이 아니라 의학의 길을 걸으셨다면 더 큰 재부를 누리셨을 텐데, 미래를 포기하고 차씨 가문에 평생을 바쳤다는 게 정말 대단하고 멋져요.”“설아 아가씨가 과장해서 설명한 것 같아요. 저의 실력은 어디 내놓을 만큼 대단한 수준이 아니거든요. 긴급상황이 벌어지면 머리가 하얘져요. 그리고 누군가를 보살피는 게 더 적성에 맞고요. 설아 아가씨는 저를 가족의 일원으로 인정해 주셨어요. 설아 아가씨와 원이 도련님, 달이 아가씨를 보살피는 것만으로도 정말 행복해요.”민이 이모는 성도윤이 무언가를 물어보려고 한다는 것을 눈치채고는 말을 이었다.“도련님, 궁금한 것이 있으면 편하게 말씀하세요. 알고 있는 건 전부 알려드릴게요.”“역시 이모님은 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알고 계시네요.”성도윤은 어색하게
“무슨 사이냐고?”소영금은 성도윤이 이런 질문을 던질 줄 예상하지 못했는지 몹시 당황했다. 몇 초 후, 소영금은 애써 침착하게 대답했다.“무슨 사이긴, 사돈이지.”“엄마랑 설아 아버지는 그저 사돈 관계일 뿐이라고요?”성도윤은 소영금의 말을 믿지 않았다. 차설아의 아버지가 일기장에 기록한 내용을 보면 소영금과 차우진은 애틋한 사랑을 했던 사이였던 것이 분명했다.절대 단순한 사돈 관계가 아니었다.“도윤아, 지금 엄마를 의심하는 거야?”소영금은 덤덤하게 대답했지만 목소리에 분노가 깔려있었다.“그저 엄마한테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그렇지 않으면 불안해서...”“불안하다고?”소영금은 피식 웃더니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었다.“불안해할 필요 없어. 차설아는 너의 배다른 동생이 아니야. 네 동생이었다면 내가 너랑 차설아가 잘되게 계속 도와주었을 것 같아? 너도 참 단순하다니까...”“엄마는 내가 왜 불안해하는지 알고 있는 모양이네요. 엄마랑 설아 아버지는 예전에 연인 사이였던 거죠?”성도윤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그렇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어.”소영금은 긴 한숨을 내쉬면서 지난날들을 떠올렸다.“그 사람은 이미 하늘나라로 떠나갔어. 나도 살면 얼마나 더 살까? 시간 앞에서 과거는 한없이 초라하고 보잘것없단다. 지나간 일은 그저 지나가도록 내버려둬야 해. 이 일에 대해서 더는 묻지 마.”“하지만...”“도윤아, 늦었으니 너도 일찍 쉬어. 엄마는 늙어서 일찍 자지 않으면 다음 날에 기운이 없어. 너는 그저 설아랑 잘 지내고 차씨 가문과 성씨 가문의 인연을 계속 이어 나가면 돼. 알겠지?”소영금은 성도윤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해줄 수 있는 말이 별로 없었다.소영금은 차우진과 연관된 다른 얘기를 절대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 몇십 년을 거쳐 겨우 아문 상처를 꺼내면 곪아서 감당하기 힘든 고통을 느끼게 될 것이다.“알겠어요. 엄마, 시간 될 때 원이랑 달이를 보러 오세요. 네 식구가 함께 지내니까 얼마나 행복
그 뒤로는 전부 차씨 가문에서 벌어진 일이거나 소소한 일상이 담긴 내용이었다. 성도윤의 어머니가 언급되지 않은 일기에서 성도윤은 차설아가 어떻게 지내왔는지 알게 되었다.차설아의 부모님은 다정하고 상냥한 분이었고 차설아에게 모든 사랑을 퍼부으면서 행복하게 지냈다. 차씨 가문은 다른 재벌가보다 더 가족애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문이었다.성도윤은 미소를 지으면서 일기를 읽었다.“오늘은 우리 설아가 3살이 되는 날이다. 내 자식이지만 이렇게 사랑스럽게 클 줄 몰랐다. 설아는 다른 아이들과 사뭇 달랐다. 세 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벌써 블록을 조립하기 시작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500조각이 되는 블록을 이용해 집을 만들었다. 무려 두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총명한 기질이 드러나서 얼마나 뿌듯한지 모르겠다.”성도윤은 몇 페이지를 넘기고는 계속해서 읽었다.“시간이 흘러 어느덧 설아의 12살 생일을 맞이하게 되었다. 아내는 설아가 더 이상 어린 여자아이가 아니라고 했다.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나오지 않아서 걱정했는데 우리 설아에게도 그날이 찾아왔다. 설아는 여자라서 남자보다 더 많은 고통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대학교를 졸업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게 되면 지금 느끼는 것보다 수백 배 강한 고통을 느끼게 될 것이다. 아버지가 되어서 딸의 고통을 덜어주지 못한다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고 슬프다. 좋은 남자를 만나게 되면 그 남자에게 설아를 잘 부탁한다고 말해주고 싶다.”성도윤은 눈물을 흘리면서 읽어 내려갔다. 성도윤은 차설아에게 행복한 삶을 선물하지 못했고 차설아가 다치지 않게 보호해 주지도 못했다.성도윤은 자신이 좋은 남편이 아니라고 자책했다.“장인어른, 정말 죄송해요. 그동안 설아에게 너무 많은 상처를 주었지만 남은 생을 통해 반성하고 설아한테 모든 것을 쏟아부을 거예요. 설아를 보살피면서 행복하게 잘 살게요.”성도윤은 두 눈을 질끈 감고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두꺼운 일기장을 계속 펼쳐보았고 이상한 내용을 발견하지 못했다.그러나 마지막
차설아는 성도윤의 말을 듣더니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었다.“그럴 일 없으니까 꿈도 꾸지 말아요.”“알겠어. 이만 가볼게.”성도윤은 풀이 죽은 채 뒷마당에 있는 오두막으로 들어가서 휴식했다. 그리고 오전에 발견했던 그림 한 장이 계속 마음에 걸려서 뭐라도 찾으려고 했다.단서가 될 만한 것은 전부 차설아의 아버지가 쓰던 오두막 안에 있기 때문이다.만약 차설아의 아버지가 성도윤의 어머니를 사랑해서 그린 그림이라면 성도윤과 차설아가 한 가족이 될 가능성도 있었다.성도윤은 불안한 마음에 문을 안에서 잠그고 서재를 샅샅이 훑어보았다. 낡은 일기장이 유독 눈에 띄었는데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성도윤은 일기장을 손에 든 채 어쩔 줄 몰라 했다.‘장인어른의 일기장을 내가 봐도 되는 걸까? 하지만 보지 않으면 그 그림에 대해 설명할 수가 없어. 설아에게 전부 얘기해주기로 했으니까 확인해야 해.’주저하던 성도윤은 결국 자물쇠를 풀고 단서를 꼭 찾아야겠다고 다짐했다.자물쇠의 비밀번호는 소중한 사람의 생일로 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성도윤은 차설아의 아버지, 어머니, 차설아의 생일을 순서대로 입력했지만 자물쇠가 열리지 않았다.“설마 어머니의 생일은 아니겠지? 그, 그럴 리가 없어.”성도윤은 중얼거리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만약 일기장 자물쇠의 비밀번호가 성도윤의 어머니 생일이라면 드라마틱한 상황이 벌어질 것이 뻔했다.성도윤은 저도 모르게 손을 덜덜 떨었다.소영금의 생일은 3월 31일이었고 별자리는 전형적인 양자리였다. 솔직하고 화끈한 성격에 착한 마음씨를 지녀서 매력덩어리였다.성도윤이 소영금의 생일을 입력하자 자물쇠가 기적적으로 열렸다.“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성도윤은 차설아와 한 가족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머리가 하얘졌다. 그리고 잔뜩 긴장한 채 일기를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10월 17일, 날씨 맑음. 화창한 날씨와는 달리, 나의 마음속에 먹구름만 가득했다. 오늘은 나랑 영금이가 헤어진 지 5년이 되는 날이다. 나는 영금을 진작
차성철은 차설아를 설득할 수 없었기에 차설아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두었다.“설아야, 시간도 늦었으니 일찍 쉬어. 성도윤이 너한테 도움이 되면 이용해도 좋지만 계속 의지하고 기대면 결국 너만 힘들어져.”“그럼 도윤 씨랑 다시 만나도 간섭하지 않겠다는 뜻이야? 오빠는 역시 내 편이었어!”차설아는 신이 나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차성철과 성도윤 사이의 원한은 오래전부터 존재했었다. 그래서 차설아가 성도윤과 다시 만나게 되면 차성철이 극구 반대할 줄 알았다.하지만 차성철은 두 사람을 응원하기로 했다.“내가 반대해도 소용없다는 걸 알잖아. 어차피 네 선택이니 나는 너를 믿어보기로 했어. 성도윤과 싸우면서 둘 다 크게 다쳤지만 성도윤은 결국 나를 구해주었지. 이제는 원한 따위 내려놓아야 할 것 같아.”차성철은 흉터 회복 수술을 받은 후부터 성도윤을 향한 원망과 분노가 사그라들었다.게다가 두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고 의식을 되찾았기에 생명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되었다. 차설아가 살아만 있다면 다른 건 더 바라지 않는 오빠의 마음이었다.“오빠, 고맙고 사랑해. 오빠가 나를 응원해 주니까 마음이 놓여. 정말 다행이야!”차설아는 감동의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차성철이 반대할까 봐 성도윤을 다시 만난다는 소식을 차마 전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다른 차성철의 반응에 차설아는 감동했고 날아갈 듯이 기뻤다.“나는 응원해 준다고 한 적 없어. 성도윤이 믿음직스러운 남자인지 아닌지는 집으로 돌아가서 직접 보고 판단할 거야. 만약 내 마음에 들지 않게 행동한다면 집에서 내쫓을 테니까 각오하라고 전해. 내 동생이 좋아하는 남자라도 일단 내 눈에 들어야 해.”“알겠어. 오빠가 올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고 있을게. 오빠, 얼른 끝마치고 집으로 와.”차성철은 가라앉은 보물과 배를 찾고 당당하게 돌아가고 싶었다. 그래야만 성도윤과 대면했을 때 기죽지 않을 것이다.전화를 끊은 뒤, 차설아와 성도윤 사이에 오묘한 기류가 흘렀다. 차설아는 성도윤의 표정을
차설아는 성도윤이 대답하기도 전에 휴대폰을 재빨리 빼앗았다.“오빠도 얼른 쉬어. 나중에 또 연락할게.”차설아가 전화를 끊으려 하자 차성철은 한숨을 내쉬면서 대답했다.“그래. 상처가 아무니까 다쳤던 기억을 잊은 거겠지. 지금은 성도윤을 감싸고 돌아도 예전처럼 후회하게 될 거야.”“오빠, 그동안 도윤 씨랑 나 사이에 많은 일이 있었어. 하루라도 더 행복하게 지내고 싶은 내 마음이 과연 욕심일까? 그저 잠시라도 도윤 씨랑 함께하고 싶어. 도윤 씨 덕분에 요즘 정말 즐겁고 마음 편하게 지내고 있어.”차설아의 말에 슬픔이 가득 묻어있었다. 실명하고 나서 뒤바뀐 인생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런데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할 수도 없다면 차라리 죽어버리는 것이 나았다.차설아는 어둠 속에 갇혀있기보다 성도윤의 손을 잡고 같이 행복해지고 싶었다.“성도윤과 네가 계속 이대로 같이 지낼 수 있을 것 같아? 요즘 조사하면서 차씨 가문을 망하게 하려고 연합한 가문에 대한 자료를 찾아냈어. 우리가 상대할 사람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강하다고!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말이야.”차성철의 말이 무겁게 다가왔다. 차성철은 차설아한테 가문의 복수에 관한 얘기를 하지 않으려고 했었다. 그러나 매일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내다보면서 아무런 수확도 없이 외롭게 견디던 차성철은 지쳐갔다. 그래서 차설아에게 전부 털어놓으려고 했었다.“어느 가문인지 알아냈다는 뜻이야? 그 자료를 나도 한 번 봐야겠어. 상대가 누구든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차설아는 주먹을 꽉 쥔 채 격동된 어조로 말했다. 차설아는 실명했지만 부모님을 죽게 만든 원수를 두 손으로 직접 죽이고 싶었다.잘 나가다가 다른 가문의 함정에 빠져 몰락한 차씨 가문을 위해 목숨 걸고 복수하고 싶었다.“자료만 보고 알 수 있는 게 아니야. 집으로 돌아가서 천천히 설명할게. 이 일은 성도윤도 알아야 해.”차성철은 머뭇거리면서 말끝을 흐렸다.“도윤 씨도 알아야 한다고? 그럼 성씨 가문과 연관되어
성도윤은 일부러 특별한 호칭으로 차설아를 부르면서 다가갔다.“주인님, 무슨 일로 저를 부르셨어요?”“장난하지 말고 잘 들어요. 지금 아주 중요한 일이 있어요.”차설아가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조금 전에 오빠랑 통화하면서 부지런한 사용인을 구했다고 자랑했어요. 그런데 오빠는 당신이 나를 해칠까 봐 걱정하는 모양이더라고요. 다시 전화를 걸면 당신이 알아서 잘 대처하고 절대 신분을 들키면 안 돼요. 오빠의 심기를 건드리면 우리 둘 다 끝장이에요.”“나랑 다시 만나는 게 그렇게 부끄러워? 나를 당신의 남자라고 소개하기 싫어?”“그런 게 아니라 말하기 민망해서 그래요. 당신이랑 다시 만나지 않겠다고 했으면서 또 사랑하게 되었다고 말하면 오빠가 가만히 있을 것 같아요? 한두 번이 아니라 여러 번 큰소리쳐서 내 입장이 난처하게 되었어요.”차설아는 팔짱을 끼고 한숨을 내쉬었다.재벌가 아가씨로서 인간관계의 원칙을 칼같이 지켰었지만 성도윤을 만나고부터 모든 것이 뒤바뀌었다. 차설아는 성도윤 앞에만 서면 원칙을 어겼고 선을 넘었다.했던 말과 다르게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게 되었다.“내 목소리를 들으면 바로 들통날 텐데...”“그럼 일부러 가늘고 예쁜 목소리로 대화해봐요. 젊은 여자인 줄 알면 오빠도 더 의심하지 않을 거예요. 몇 마디만 하고 전화를 끊으면 돼요.”차설아는 말하면서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성도윤이 차성철을 속이길 바랐고 성도윤이 여자의 목소리를 따라 한다면 얼마나 웃길지 기대하고 있었다.“알겠어.”성도윤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미소를 지었다. 차설아가 전화를 건네자 곧바로 차성철에게 전화를 걸었다.“여보세요. 그쪽이 설아가 새로 들인 사용인이에요?”차성철은 엄숙한 어조로 말했다.“맞아요.”성도윤은 약속대로 여자의 목소리로 대화하지 않았다.“안녕하세요. 성도윤이에요.”“누, 누구라고요?”차성철은 기가 막혀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옆에 있던 차설아는 깜짝 놀라서 성도윤을 툭툭 쳤다.“도윤 씨,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오빠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