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가 맞는지 아닌지는 우리도 잘 몰라, 유일한 목격자가 도윤이었거든. 도윤이가 사고라면 사고인 거지... 이미 죽은 사람을 두고 그렇게 많이 따지고 싶지 않아.”성주혁의 의미심장한 말에 차설아는 머리가 복잡했다.“그럼 혹시 사건 현장에 목격자인 도윤 씨를 제외하고 이 모든 걸 담은 CCTV 영상이 있었다는 건 알고 있어요? 그 CCTV 영상은 도윤 씨에게 소거되었어요. 이 일이 이상하지 않으세요?”성주혁은 이미 이 일을 알고 있다는 듯이 덤덤하게 웃으며 말했다.“지극히 정상적인 일이지. 두 형제가 어려서부터 워낙 친하게 지냈어. 특히 도윤이는 자기 형을 좋아해서 형의 꼬리처럼 어딜 가나 따라갔거든. 자기 형을 아주 신처럼 생각한 모양이야. 자기가 그렇게 좋아하던 사람이 비참한 방식으로 죽었으니 도윤이에겐 그 영상은 아주 고통스러운 존재였을 거야. 자기 형의 신성한 이미지를 파괴하는 영상을 남겨두는 건 도현이에게 굴욕을 안겨줄 거라고 생각했기에 도윤이는 그 영상을 소거했겠지. 뭐가 이상해?”성주혁의 말은 그럴듯하게 들렸지만 차설아를 설득할 수는 없었다.“그때 성대 그룹의 후계자가 도현 오빠였다면서요? 그런데 하필 그 자리를 이어받으려고 귀국할 때 사고가 생겼고, 그 후계자 자리는 자연스럽게 유일한 목격자인 도윤 씨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죠. 두 사건 사이에 정말 수상한 점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차설아는 격분해서 말했다.이 일의 진실은 그녀에게 너무나도 중요했기 때문이다.차설아는 자기가 미친 듯이 사랑했던 남자가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심지어 자기 친형까지 죽이는 쓰레기가 아니길 바랐다.“수상한 점?”성주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그럼 설마 도현이의 죽음이 도윤이와 연관 있다는 거야? 아니면 도현이가 도윤이에게 살해되었다는 말이야?”“...”차설아는 말을 잇지 못하고 그저 고개를 푹 숙였다.한 번의 우연이면 몰라도 많은 우연이 겹치게 되니 차설아는 의심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성도윤을 오해하기 싫
“흥, 너야말로 어리석은 거 같은데?”성주혁이 분노의 목소리로 말했다.“설아는 이미 널 좋게 생각하고 있지 않아. 그런데 이제 와서 죽는 척을 한다고.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두 사람 점점 멀어지더니 이제 와서 이 사달을 내고. 이제 어떻게 설아의 마음을 되돌릴지 지켜보겠어.”성도윤이 말했다.“제가 알아서 잘 합니다. 어차피 제가 살아 있어도 차설아는 나를 극도로 싫어했어요. 차라리 다른 신분으로 옆에서 지켜주며 마음을 얻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말만 번지르르하게 해.”성주혁은 화난 나머지 가슴팍을 움켜쥐며 다시 성도윤을 혼냈다.“네가 뭐라도 되는 줄 알아? 이미 죽은 마당에 설아가 너를 위해 과부를 자처하겠어? 네가 무슨 계획을 하고 있든 빨리 설아에게 솔직하게 말해. 아니면 일이 점점 커질수록 수습하기 어려워질 거야. 만약 설아가 너한테 완전히 마음이 식고 다른 남자한테 덜컥 시집 가버리면 어떻게 해? 그때 가서 후회해도 늦었을 거라고!”성도윤의 눈빛이 차가워지더니 단호하게 말했다.“절대 그럴 리가 없어요!”성도윤이 죽은 척 연기를 한 건 성대 그룹의 ‘암흑’ 세력들을 일망타진하기 위해서이다.모든 게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고, 이제 손을 쓸 타이밍만 기다리면 되었는데 방금 성주혁과 차설아의 말을 들으니 성도윤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급해 났다.이대로 계속하다가는 그와 차설아의 거리가 점점 멀어져 다시는 원래처럼 되돌아올 가능성이 없어질까 봐 걱정했다. 차설아는 지금 그를 형을 죽인 범인이라고도 생각하고 있었으니 말이다.하지만 성도윤은 너무 억울했다. 그때 CCTV 영상을 지운 것도 할아버지의 뜻으로 지운 거였다.“할아버지, 아직도 왜 형이 총을 맞은 영상을 지우라고 하셨는지 모르겠어요. 그때 범인도 끝까지 쫓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이걸 설아가 오해해서 저는 후계자 자리를 위해 형을 죽인 범인으로 되었다고요.”성도윤은 한숨을 푹 쉬었다.지금 그는 이미 ‘죽은’ 신분이다. 아무리 억울해도 차설아 앞에서 해명하지
“뭐라는 거야?”차설아는 신경 쓰지 않고 바로 전화를 끊었다.하지만 곧이어 배경윤도 전화를 걸어오고는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언니, 지금 어디에 있어? 얼른 보이 바로 가봐. 늦으면 언니가 마음에 들어 하던 택이가 더럽혀질 거야.”“더럽혀진다고?”“그래, 아까 바에 있던 사람이 나한테 도움을 요청하더라고. 택이가 너무 인기 많아서 이미 어떤 여자 보스의 눈에 들었대. 2억 내고 방으로 데려가려고 했는데 택이가 당당하게 거절하고 자기는 이미 주인 있는 몸이라고 했대. 설아 언니를 위해 몸을 지켜야 한다며.”“뭐? 나를 위해 몸을 지킨다고?”차설아는 어이가 없었다.차설아와 택이는 겨우 하룻밤을 같이 보냈고 술김에 키스한 것뿐이었다.‘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나를 위해 몸을 지키겠다고 하니, 설마 내 돈을 뜯어내려고 이러는 건가?’“양쪽에서 싸움이 났대. 언니도 알다시피 바에는 잘생긴 남자들이 많지만 다 사회 경험이 많지 않은 젊은 애들이라고. 그 여자 보스가 깡패들을 불러 모은 모양이야. 택이가 아닌 바에서 일하는 잘생긴 남자들을 위해서라도 당장 가봐야 하는 거 아니야?”배경윤이 흥분된 목소리로 차설아를 타일렀다.그녀는 마침 택이와 차설아를 어떻게 엮을지 고민하던 참에 이런 좋은 ‘기회’가 찾아온 것이었다. 이게 하늘이 준 인연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택이는 바에서 일하는 사람이라 어디 내놓긴 부끄럽지만 그래도 성도윤을 대신해 차설아의 기분을 풀어줄 수 있다면 그만이었다.지금 차설아는 스스로를 궁지에 몰아넣었기에 그런 그녀를 ‘구하고’ 같이 ‘미친 짓’을 해줄 사람이 필요했다.하지만 안타깝게도 차설아는 흥미를 보이지 않았는지 차가운 얼굴을 하며 대답했다.“도움을 요청하려면 경찰을 찾아야지, 나를 왜 찾아? 나 바쁘니까 일단 끊어!”“당연히 언니랑 상관있는 일이니까 찾지. 택이가 언니 때문에 그 여자 보스를 건드렸다잖아. 언니만을 위한 해어화가 악독한 아줌마에게 괴롭힘당하는 꼴을 꼭 봐야겠어?”“그 여자 보스, 풍채가 있으시
여자 보스가 그 말을 듣더니 벌컥 화를 냈다.“뻔뻔스러운 것. 꼭 내가 손을 써야 정신을 차리겠어? 저 녀석 끌어내!”그녀의 말에 택이의 두 팔은 검은 옷을 입은 두 사내에게 꽉 잡혀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했다.여자 보스는 몸에 지닌 채찍을 꺼내고는 택이의 가슴팍을 향해 ‘짝’ 내리쳤다.남자의 흰 셔츠는 찢어졌고, 이내 피로 빨갛게 물들었다. 그의 잘생긴 얼굴과 차가운 분위기까지 더해져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가슴이 아프게 했다.“다시 한번 물을게. 나랑 갈래? 가지 않을래?”“그분 아니면 어디도 안 가요!”“짝짝짝!”여자 보스는 또 그를 향해 채찍을 몇 번 휘둘렀다.보이 바의 사장과 직원들은 부들부들 떤 채 그저 옆에서 지켜보고 있을 뿐,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보이 바에 여자 보스의 부하들로 꽉 찼고, 택이를 위해 나선다는 건 스스로 죽음을 자초한 거나 다름없기 때문이다.여자 보스가 다시 채찍을 택이의 몸에 내리치려 할 때, 그녀는 갑자기 팔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고개를 뒤로 돌려보니 차설아의 차가운 눈빛과 마주하게 되었다.“감히 내 사람도 건드리는 거야?”말을 마친 차설아는 채찍의 다른 끝을 꼭 잡고 힘껏 당겼다.100kg 넘은 여자 보스는 그대로 멀리 날아가 버렸다!주위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깊은숨을 들이마셨다.여리여리해 보이는 차설아에게 이 정도의 힘이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놔!”차설아가 차가운 얼굴을 보이고는 택이의 두 팔을 잡고 있는 두 건장한 사내에게 명령했다.두 사내는 당연히 그녀의 말을 듣지 않았고, 오히려 그녀에게 손을 쓰려고 했는데 차설아는 바로 두 사람을 발로 세게 걷어찼다.차설아의 싸움 실력으로 이 사람들을 상대하는 건 보잘것없는 개미를 밟아 죽이는 것과도 같이 쉬웠다.깃털 가면을 쓴 남자는 깊은 눈망울을 반짝이더니 여유롭게 말했다.“당신이 날 구하러 올 줄 알고 있었어요.”왠지 모르게 차설아는 가면을 쓴 녀석이 완전히 다르게 느껴졌다. 차갑고 도도한 분위기가 ‘그 사람’
“???”차설아는 부하들을 이끌고 바를 떠난 여자 보스를 보고는 어안이 벙벙했다.‘뭐야? 나 농락하는 거야? 싸울 것처럼 하더니 왜 갑자기 가는 거야?’바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사장과 젊은 남자들이 차설아를 둘러싸더니 그녀를 우상 보듯 숭배의 눈빛으로 바라봤다. 당장이라도 그녀를 위해 무릎도 꿇을 수 있었다.“차설아 씨, 역시 여장부시네요, 실검에 떴던 동영상에서보다도 싸움을 잘하시는데요, 너무 멋있어요!”“차설아 씨, 앞으로 우리 바를 책임져 주세요. 저렇게 막 나가는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더 상대하기 어렵다니까요. 괴롭힘을 당했던 애들이 얼마나 많은데요!”바 사장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차설아에게 애원했다.“특히 우리 택이 말이에요. 워낙 잘생긴 얼굴로 사람들을 놀라게 했으니 개나 소나 다 넘보려고 해요. 오늘 그 여자 보스의 뒤를 봐주고 있는 세력이 대단해요. 차설아 씨가 아니었다면 우리 택이는...”차설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자신의 뒤에 서 있는 택이를 보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어때? 버틸 수 있겠어?”“캑캑.”택이는 몸을 비틀거리더니 기침을 하면서 창백한 얼굴을 보이고는 허약한 목소리로 말했다.“아직 버틸 수 있어요. 단지 오늘 그 손님의 미움을 샀으니까 나중에 반드시 저에게 복수하려 할 거예요. 오늘이야 별일 없이 여기를 떠날 수 있겠지만 내일 또 그 여자 손에 들어가게 되면 어떻게 해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모르겠네요!”남자가 말하고는 당장이라도 바닥에 쓰러질 기세였다.“조심해!”차설아는 재빠르게 그를 부축했다.택이는 차설아가 자신을 부축하자 갑자기 힘을 못 쓰더니 그대로 차설아의 어깨를 감싸고는 그녀의 몸에 찰싹 달라붙었다.옆에 서 있던 다른 잘생긴 남자들이 속삭였다.“역시 택이야. 이 와중에 꼬리 치고 있는 것 좀 봐. 정말 사람 마음을 잘 홀린다니까!”“택이가 뭘 잘못했겠어. 저렇게 예쁜 선을 가진 다리라면 나는 더 꽉 끌어안겠는걸?”바 사장도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 재
“먼저 상처부터 치료하는 게 좋겠어요.”차설아는 택이를 병원에 데려가려고 했지만 택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이 정도 상처로 병원으로 갈 것 없어요. 날 집에 데려다줘요, 며칠 누워있으면 괜찮아질 것이니.”차설아는 얼른 이 성가신 놈을 보내고 싶었다. 그러면 자기가 해야 할 일은 다 했으니 마음 놓고 떠날 수 있었다.“알겠어, 데려다줄게.”택이의 집은 바 근처에 있었는데 아파트 투룸이었다. 인테리어는 매혹적인 겉모습과는 달리 아늑하고 포근했다.“됐어, 집까지 데려다줬으니까 푹 쉬어. 시간이 늦었고, 나는 이만 갈게.”차설아는 그래도 선을 지키며 밖에 선 채 작별 인사를 건넸다.한밤중에 두 사람이 같이 있는 게 다른 사람에게 알려지면 안 좋으니 말이다.훤칠한 택이는 차설아의 부축 없이 병약한 모습을 보이며 휘청거렸다.그는 또 입꼬리를 씩 올리더니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왜요? 제가 잡아먹을까 봐 들어오지 못하는 거예요?”“그건 아니고!”차설아는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면서 남자를 샅샅이 훑어보고는 군침을 꿀꺽 삼켰다.“내가 주체하지 못하고 널 잡아먹을까 봐 겁이 나.”“...”가면에 가려진 남자의 잘생긴 얼굴은 순식간에 차가워졌고, 그의 얼굴색도 한껏 어두워졌다.그는 당연히 택이가 아닌 성질 나쁘고 소유욕이 강한 성도윤이었다.오늘 밤에 있었던 일은 모두 그의 자작극이었다.그는 택이의 신분으로 모두를 속였는데 합당한 이유로 뻔뻔스럽게 차설아의 옆을 독차지하려고 했다.바에서 일하는 남자로 차설아의 취향을 쉽게 만족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너무나도 수월하게 그녀에게 다가갈 수 있었다.‘차설아, 이렇게 원칙 없는 여자였어? 이렇게 쉽게 걸려드는 거였어?’“괜찮아요, 저는 어차피 당신 거잖아요. 좋을 대로 저를 즐겨주세요, 저는 아무 불평도 하지 않을 거예요.”성도윤은 어금니를 꽉 깨물며 말했다.“그게...”그의 말은 차설아를 난감한 상황에 부닥치게 했다.차설아는 그저 택이에게 이 세상이 얼마나 무섭고 험악한지
“현관 캐비닛에 있어요. 폐를 끼쳐드려 정말 죄송해요.”성도윤이 허약한 목소리로 말했는데 연기 대상을 받아도 될 정도로 사람의 마음을 간드러지게 하는 불쌍한 연기를 선보였다.차설아는 현관 캐비닛에서 알코올, 연고 등 여러 가지 약이 들어 있는 약상자를 발견했다. 그녀는 소파에 다시 돌아왔다.완벽에 가까운 얼굴과 보일 듯 말 듯 한 근육 라인, 그리고 차가운 분위기를 보인 남자에게 자꾸만 눈이 갔다. 아니, 눈이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먼저 옷 벗어.”차설아는 마치 경험이 많은 바람둥이처럼 남자를 내려다보며 명령했다.‘이렇게 거침없이 말한다고?’성도윤은 오히려 부끄러워 두 손으로 가슴팍을 가로막고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옷은 왜 벗어요? 지금 이런 꼴로 무슨 일을 하기는 불편할 거예요... 물론 당신이 굳이 요구한다면 저도 잘 협조할게요.”차설아는 얼굴을 붉히더니 어금니를 깨물며 말했다.“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옷을 벗으라고 한 건 너에게 약을 발라주기 위해서야. 옷을 벗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너 약 발라줘?”그의 흰 셔츠는 이미 채찍으로 찢어져 있었고, 얼룩덜룩한 붉은 핏자국은 마치 매혹적인 꽃처럼 그를 더 돋보이게 했다. 차설아는 밤새 그의 얼굴을 감상하고 싶은 지경이었다.하지만 약을 바르기 위해 옷은 벗어야 했으니.“그래요...”성도윤의 목소리에는 실망이 담겨 있었다.그는 방금 차설아의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자신을 ‘희생’할 각오를 했는데... 결국 약을 바르는 거였다니?‘하지만 괜찮아, 앞으로 시간은 많이 남았으니까. 내가 고생해서 만든 완벽한 몸이 차설아를 언젠간 홀리겠지!’성도윤은 기다란 손가락으로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기 시작했다.섹시한 쇄골부터 튼실한 가슴팍, 그리고 초콜릿 복근까지, 하나하나씩 드러났다...차설아는 마치 신이 만들어낸 완벽한 예술작품을 보듯 성도윤의 몸을 뚫어지게 살펴봤다.그러더니 갑자기 복숭아처럼 얼굴이 불그스름해졌는데 차가운 그녀의 얼굴에서 귀여움이 엿보였다.‘쯧쯧, 몸매가 대박
성도윤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제가 겉으로는 바에서 노래나 하는 바람둥이처럼 보이지만 사실 1급 자격증이 있는 심리상담사예요. 심리상담, 심리치유, 재건심리학, 그리고 최면술을 잘해요. 친구분께서 당신에게 안 좋은 일들이 일어나 기분이 우울하다고 하셨는데 제가 당신을 도와주길 바랐어요. 혹시 저를 믿는다면 제가 도와줄게요.”“1급 자격증이 있는 심리상담사라고?”차설아는 의외이기도 하면서 어색한 마음이 들었다.눈앞의 녀석이 온전히 얼굴로만 돈을 버는 줄 알았으니 말이다.“그게 무슨 표정이에요?”성도윤이 웃으면서 부드러운 손길로 그녀의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헤치며 감미롭고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저 못 믿으시는 거예요? 아니면 실망스러운 거예요? 사실 마음을 치유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당신의 몸도 치유할 수 있는데요, 필요하다면요.”“아니, 필요 없어. 고마워.”차설아는 얼굴이 빨개진 채 남자의 몸을 확 밀어내고는 자리에 곧게 앉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당연히 너를 믿지 못하는 거지. 네가 온밤 동안 이상한 말을 하고 있는데 심리상담사일 리가 있겠어?”1급 자격증은 심리상담사 자격증 중에서도 최고급의 자격증이었다. 탄탄한 전문지식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공감 능력과 상황판별 능력이 필요한데 겨우 얼굴로 돈을 버는 사람이 어떻게 그 자격증을 딸 수 있단 말인가?“믿지 못하시겠으면 한 번 실험을 해볼까요? 제가 거짓말을 했는지?”“무슨 실험?”“혹시 그림 심리테스트 들어봤어요?”“들어보긴 했지만... 그냥 흰 종이에 집, 나무, 사람 그리는 거 아니야?”“맞아요.”성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림을 다 그리시면 제가 분석을 시작할게요. 만약 제 분석이 맞는다면 저 믿으실 수 있겠죠?”차설아는 심리 테스트가 나름 재밌어 보여 흔쾌히 동의했다.“그래, 한 번 그려보지 뭐. 네가 심리상담사인지 아닌지도 곧 알게 될 거야.”성도윤은 색연필과 종이를 찾아내고는 차설아에게 건네면서 기대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한 번 그려보세요
성도윤의 말을 듣던 서은아는 피식 웃더니 팔짱을 꼈다. 은색 반지를 병실 침대에 두고 온 뒤로 이날이 오기만을 기다렸었다.“맞아. 그 반지는 내가 일부러 차성철 침대맡에 두고 온 거야. 너랑 차설아 그년을 갈라놓으려고 그랬어! 날 욕하든 때리든 상관없어. 난 절대 후회하지 않을 테니 네 마음대로 해.”서은아는 두 눈을 감은 채 성도윤이 결정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넌 정말 무서운 여자야. 내가 알던 네가 아닌 것 같아.”성도윤은 서은아가 단번에 인정할 줄 꿈에도 몰랐다. 서은아의 말에 어이가 없어서 어떻게 말해야 할지 감도 오지 않았다.‘이 여자에게 벌을 주어야 하나? 옛 추억을 떠올리면 절대 그럴 수 없어. 은아가 나한테 얼마나 잘해주었는데... 하지만 없던 일로 할 수도 없어서 괴로워. 은아가 어쩌다가 이런 짓을 벌인 걸까?’“난 그 여자랑 아무 사이도 아니고 너만 사랑해. 그러니까 네가 한 짓들은 아무 의미도 없어. 네가 그럴수록 난 점점 네가 싫어져.”성도윤은 침을 넘길 때마다 느껴지는 고통에 미간을 찌푸렸다. 허약해진 몸 때문에 제대로 일어날 수도 없어서 가슴 한편이 답답하기만 했다.“뭐? 나만 사랑한다고?”서은아는 깔깔 웃더니 말을 이었다.“도윤아, 내가 그 말에 속을 것 같아? 우리 서로 솔직해지자. 네가 마음에 누구를 담고 있는지 다 알고 있었어. 나도 이러기는 싫었지만 네가 지금껏 나를 봐주지도 않았고 날 안으려고 하지도 않았어. 내가 보고 싶다고 말해도 너는 날 밀어내기만 했잖아. 나를 거절하고 만나러 간 건 그년이었어!”서은아가 손을 덜덜 떨면서 말했다.“난 너의 약혼녀고 우리 곧 결혼해. 그런데 그년이랑 빌붙어서 병원에서 밤을 새워? 너답지 않게 한낱 의사랑 바다낚시나 하면서 그년을 도와줬잖아. 그런데도 그년이랑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그게 네가 날 사랑하는 방식이야?”서은아는 그동안 꾹 참았던 것들을 전부 쏟아냈다. 갑자기 들이닥친 홍수처럼 성도윤을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내가 무슨 짓이라도 하지 않으면 그년이랑
“내가 못 할 것 같아? 날 우습게 보지 마.”차설아의 눈빛에 살기가 돌더니 손에 힘을 주어 성도윤의 목을 꽉 잡았다. 몇 년 동안 무술을 익혔던 차설아가 성도윤을 목 졸라 죽이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날 죽일 용기도 없는 것 같은데? 당신 겨우 이 정도였어?”성도윤은 일말의 두려움 없이 온몸을 차설아에게 맡겼고 차설아가 죽여주기를 바라는 표정을 지었다.“그래. 당신이 죽고 싶다면 내가 직접 죽여줘야지.”차설아는 이를 꽉 문 채 온 힘을 다해 성도윤의 목을 졸랐다.“윽!”성도윤의 얼굴은 삽시에 빨갛게 달아올랐고 이마와 목에 핏줄이 서렸다. 성도윤은 숨이 막혀서 곧 죽기 직전이었다.“당, 당신 손에 죽는다면... 여한이 없을 거야. 어서 죽여줘...”성도윤은 고통을 참으면서 겨우 말 한마디를 내뱉었다. 의식이 흐려지기 시작하자 입가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목을 조금만 더 꽉 잡는다면 이 세상에 더 이상 성도윤이란 사람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하지만 차설아는 성도윤을 차마 죽이지 못했다. 차설아가 손을 놓자 소파에 내팽개쳐진 성도윤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당신을 죽이면 내 손이 더러워질 테니 오늘은 봐줄게. 당신이 밑바닥까지 떨어지게 해줄 테니 딱 기다려. 난 당신처럼 더러운 수를 쓰는 사람이 아니야.”말을 마친 차설아는 뒤돌아 나갔다.“차...”성도윤은 시야가 흐릿해지더니 차설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의식을 잃었다.“도윤아, 얼른 일어나봐! 도윤아!”누군가가 성도윤을 다급히 흔들어 깨웠다. 성도윤이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병원이었다. 목에 붕대를 감고 며칠 동안 의식을 잃은 채 누워있었다.“며칠이나 지났지?”성도윤은 입술이 텄고 목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차설아가 힘껏 목 조르는 바람에 성대도 어느 정도 손상을 입었다. 성도윤은 갈라지는 목소리로 말했다.“두 날째 누워있었어. 아주머니랑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서은아는 성도윤의 손을 꼭 잡고는 눈물을 흘렸다.“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 지경이 된 거야!
“그래요. 내가 묻는 말에 전부 솔직하게 대답해 줘요.”차설아는 곧바로 가방에서 은색 반지를 꺼내고는 물었다.“이 반지가 누구 것인지 알아보겠어요?”성도윤은 눈을 살짝 뜬 채 반지를 쳐다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내가 계속 끼고 있는 반지야.”“계속 끼고 있는 반지라고요...”차설아의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졌다. 이미 누가 저지른 짓인지 알게 되었지만 여전히 미련 가득한 차설아는 계속 물었다.“당신이 계속 끼고 있는 반지가 왜 우리 오빠의 병실 침대에 놓여있었던 거죠?”“당신 오빠 병실 침대에 있었다고?”성도윤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두 눈을 커다랗게 떴다. 차설아의 질문에 정신이 든 성도윤은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차설아는 깜짝 놀란 성도윤을 바라보면서 사그라들었던 희망의 불씨가 다시 타오르는 것 같았다.“이 반지가 왜 우리 오빠가 누워있던 침대에 나타났는지 모르는 거죠? 도윤 씨, 반지를 잃어버리거나 다른 사람에게 맡긴 적이 있어요?”차설아는 성도윤이 이러한 이유로 반지를 빼버렸다고 하면 차설아는 성도윤이 이 일과 아무런 연관이 없다고 굳게 믿을 것이다. 하지만 돌아온 성도윤의 대답은 전혀 달랐다.“누구한테 준 적도 잃어버린 적도 없어. 이 반지는 내가 차성철의 침대맡에 두고 온 거야.”“뭐, 뭐라고요?”차설아는 성도윤을 노려보면서 주먹을 꽉 쥐었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바람 말대로 성도윤은 자신이 저지른 짓을 인정하고 솔직하게 말하는 남자였다. 성도윤은 차설아를 속일 생각조차 없었다.“나 같은 나쁜 놈에게 무슨 기대를 한 거야? 차라리 미워해.”성도윤은 반지를 꽉 쥐고는 눈을 감은 채 소파에 누웠다. 차설아는 성도윤의 건방진 모습에 화가 났고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왜 그랬는지 알려줘요. 오빠를 죽일 생각이었다면 애초에 박성훈을 찾아가지 않아도 되었잖아요. 나의 의심을 받지 않으려고 지금 막말하는 거죠? 무슨 사연이 있으니까 당신도 이러는 거라고 말해요!”차설아는 여전히 성도윤이 극악무도한 사람이라는 것을 믿고 싶지 않
전화 한 편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지금 만날 수 있어요? 묻고 싶은 것도 있고 해서 전화했어요.”“홍안루에 있어. 이쪽으로 와.”성도윤은 기사한테 차를 홍안루 문 앞에 세워두라고 지시했다. 얼마 후, 차설아는 홍안루 문 앞에 도착했고 차창을 두드렸다. 기사 장이섭이 차 문을 열고는 차설아한테 인사했다.“차설아 씨, 오셨어요. 성 대표님께서 오늘 술을 많이 마셨어요. 취한 것 같은데 두 분을 호텔로 모실까요? 아니면...”장이섭은 성도윤과 차설아가 늦은 시각에 만나기 적합한 장소가 호텔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차설아는 뒷좌석에 기대 자고 있는 성도윤을 힐끗 쳐다보더니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큰집으로 데려다주세요.”“알겠어요. 차에 오르시죠.”장이섭은 충신처럼 주인의 사생활에 대해 더 묻지 않고 지시에 따랐다. 차설아는 조수석에 앉았고 큰집에 도착할 때까지 차 안은 적막이 흘렀다.성도윤은 두 눈을 감은 채 뒷좌석에 기대있었지만 자고 있는지 자는 척하는지 아무도 몰랐다. 차설아는 불안한 마음에 손가락만 만지작거렸다.한참 후, 차는 익숙한 별장 앞에서 천천히 멈춰 섰다. 이곳은 차설아와 성도윤이 함께 지냈던 집이었지만 임채원이 별장을 차지했었다. 임채원한테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진 뒤, 아무도 살지 않는 별장에 가끔 도우미 아줌마가 와서 청소했고 그 덕분에 별장은 여전히 원래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다. “집에 왔으니 얼른 내려요!”차설아는 고개를 돌려 성도윤을 불렀지만 아무 대답도 없었다. 성도윤은 여전히 뒷좌석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다.“아니, 얼마나 마셨길래 이러는 거야! 술도 못 마시는 사람이 술을 왜 마셔!”차설아는 미간을 찌푸린 채 날을 잘못 잡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여기까지 온 마당에 다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차설아는 차에서 내려 뒷좌석 문을 열었고 성도윤을 부축해서 별장 안으로 천천히 들어갔다.“왜 이렇게 무거워...”차설아는 별장 안으로 들어가는 길 내내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투덜거렸다.“이 나쁜
예상치 못한 성도윤의 반응에 박성훈은 진지하게 물었다.“이런 일이 있었다는 걸 몰랐던 건 아니지?”성도윤은 입을 꾹 다문 채 굳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종업원이 다른 술잔을 가지고 달려오더니 술잔에 술을 따라주었다.“정말 모르고 있었던 거야?”박성훈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말했다.“그럴 리 없었을 텐데... 너랑 차설아 씨는 특별한 사이잖아. 차설아 씨의 오빠한테 그런 일이 생겼으면 제일 먼저 너한테 전화해야 하는 거 아니야?”“특별한 사이 아닌데요.”성도윤은 술을 한 모금 마시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뭘 또 부정하고 그래! 누가 봐도 두 사람은 서로 미칠 듯이 사랑하는데 티 내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 같았어.”박성훈은 한 도시에 정착하지 않고 여행 다녀서 해안시의 상황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성도윤과 차설아가 원래 부부였다는 것을 모른 채 지켜보아도 성도윤과 차설아 사이의 기류가 미묘하다는 것쯤은 눈치챌 수 있었다.“예전에 머리를 다치는 바람에 차설아와 어떤 사이였고 어떤 일이 벌어졌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아요. 주변 사람들은 차설아가 나를 해치려고 했다고 말했고 차설아도 인정하는 눈치였어요. 차설아는 내가 하마터면 차설아의 손에 죽을 뻔했고 그 일로 인해 머리를 다쳤다고 했지만 나는...”성도윤은 격동된 어조로 말하더니 미간을 찌푸린 채 술만 들이켰다. 박성훈은 반짝이는 두 눈을 하고서 성도윤을 지그시 바라보았고 계속해서 물었다.“다쳤다고 했지만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데?”“아무것도 아니에요.”성도윤은 술을 연거푸 마시면서 대답하려고 하지 않았다.“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말해 봐. 내가 너한테 도움이 될지 누가 알아? 나 이래봬도 신경외과 의사야. 네가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아줄 수도 있어.”“정말이에요?”성도윤은 고개를 쳐들고는 활짝 웃었다. 여태껏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던 성도윤이 처음으로 마음을 연 순간이었다.“기억을 되찾게 해줄 수 있다고요?”사실 성도윤은 지난번 수술 뒤로 실력 있는 의사를 찾아 다시 치료하고 싶은 마음이
차설아는 고개를 푹 숙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성도윤이 맞나보네. 스파크, 내 말이 맞지?”바람은 지난 일을 떠올리더니 차설아가 걱정하는 것이 무언인지 단번에 알아챘다. 하지만 유독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만약 성도윤이 성철 형을 죽이려고 했다면 박성훈을 굳이 찾아가지 않아도 되잖아. 성도윤이 벌인 짓이라기에는 미심쩍은 부분이 많아.”“글쎄, 박성훈을 데려오면 내가 의심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어. 그리고 더 잔인한 방법으로 오빠를 죽이려고 했을 거야. 오빠만 죽인다면 차씨 가문과 영흥 부둣가에 배치한 세력은 성도윤이 손쉽게 처리할 수 있으니까...”차설아는 주먹을 꽉 쥔 채 말했다. 차설아는 사람을 쉽게 믿었었지만 극악무도한 사람한테 여러 번 배신당했었다. 그래서 지금도 성도윤이 나쁜 사람처럼 느껴진 것이다.“네 말도 일리가 있지만 물어보지 않고 섣불리 판단하는 건 좀 아닌 것 같아. 성도윤은 솔직한 사람이라 거짓말하지는 않을 거야. 직접 만나서 물어봐.”차설아는 바람을 지그시 쳐다보더니 피식 웃었다.“너 오늘 좀 이상한 거 알아?”“진심으로 한 말인데 뭐가 이상하다는 거야?”“진심으로 하는 말인 것 같아서 이상하다는 거지.”차설아는 날이 갈수록 바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계산적인 사람인 것 같았지만 바람은 의외로 단순하고 착한 사람이었다.“선우 가문과 성씨 가문은 늘 사이가 좋지 않았어. 이 기회에 나랑 성도윤을 완전히 갈라놓을 수도 있었는데 오해일 수도 있다면서 직접 물어보라고 부추겼잖아. 오해라는 것이 밝혀지면 더더욱 갈라놓을 수 없을 거야.”“난 이간질하는 사람이 아니야. 비열한 수법으로 두 사람을 갈라놓는다고 해도 속이 시원하지 않을 거라고...”바람은 반짝이는 두 눈을 하고서 차설아를 바라보았다.“난 네가 지금처럼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어. 복수할 용기도 없고 이번 일을 없던 일로 할 수도 없어서 매일 마음 아파하고 있었잖아. 공원에서 6시간 동안 앉아 있을 바에는 직접 찾아가서 물
바람은 얇은 셔츠를 입고 서 있었고 어깨를 으쓱하면서 말했다.“네가 여기에 앉았을 때부터 뒤에 숨어있었어.”“너 바보야? 6시간 동안 가만히 앉아 있는다는 게 얼마나 힘든지 몰라?”차설아는 투덜거리면서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바람은 차설아의 곁에 앉으면서 미소를 지었다.“힘든 줄 모르니까 이 시간까지 앉아 있었던 거겠지.”“난 생각할 것이 있어서 시간 가는 줄도 몰랐어.”“나도 똑같아. 네 얼굴을 보고만 있어도 재밌어서 계속 쳐다보고 싶었어. 6시간이나 지난 줄 몰랐거든.”“그런 장난도 지긋지긋하다.”차설아는 바람을 주먹으로 때리고는 긴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오후에 있었던 일은 정말 미안하게 생각해. 오빠 생각에 미쳐서 주변 사람들을 전부 의심했던 것 같아. 네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어도 그랬을 거야. 그러니까 마음에 두지 말았으면 좋겠어...”차설아의 말에 바람이 피식 웃더니 입을 열었다.“사과하지 않아도 돼. 난 신비한 컨셉이라 의심받은 적이 셀 수 없을 만큼 많거든. 그러니까 자책하지 마. 네가 속상해하면 마음이 너무 아프거든...”바람은 차설아가 죄책감 때문에 자신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사실 바람은 누구한테 의심받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바람의 유일한 목표는 차설아와 결혼해서 선우 가문을 빛내려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나쁜 짓을 하든 암암리에 손을 쓰든 중요하지 않았다. 차설아의 마음을 얻을 수만 있다면 바람은 무슨 짓이든 할 것이다.“누가 자책했다고 그래. 넌 여우처럼 교활하니까 당연히 의심받지. 아무도 너의 속내를 꿰뚫어 보지 못하잖아.”차설아는 바람의 이마를 툭 치면서 말을 이었다.“우리 둘이 그저 해커였다면 얼마나 좋을까? 시합에 참가해서 상금을 타고 돈이나 벌었으면 복잡한 가문의 일을 해결하지 않아도 되잖아. 복수할 것도 없으니 해커 활동이나 하면서 편안하게 지냈으면 되었을 텐데 말이야.”“생각해 보면 너랑 같이 시합에 참가해서 겨루던 날들이 제일 재밌었어.”바람은 잔잔한 호수를 바라보
병실을 나선 배경윤은 차설아를 데리고 비상계단 쪽으로 향했다.“그 반지... 성도윤이 끼고 있던 거지?”“맞아.”차설아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나한테 숨기는 거 있어? 저번부터 표정이 안 좋더라.”“그, 그러니까...”배경윤은 더 이상 숨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모든 것을 털어놓기로 마음먹었다.“성철 오빠가 수술을 받고 의식을 잃은 뒤에 누군가가 일부러 손을 쓴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성형 병원으로 다시 찾아갔고 간호사한테서 단서를 찾은 거야.”“단서라니?”차설아가 인상을 찌푸리고는 잔뜩 긴장한 채 물었다.“간호사의 말에 의하면 성철 오빠가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에 의사가 윤설이랑 통화했다는 거야. 깔끔하게 처리하라고 했대. 그래서 나는 윤설이 촬영하는 곳까지 찾아가서 따졌고 윤설은 성도윤의 지시를 받은 것이라고 말하더라고...”배경윤은 긴 한숨을 내쉬더니 말을 이었다.“윤설이 일부러 거짓 정보를 흘렸을까 봐 증거를 더 모은 뒤에 너한테 알려주려고 했어. 그런데 갑자기 성도윤의 반지를 발견했으니 숨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어.”“경윤아, 고마워. 사실 네가 알려주기 전부터 나는 줄곧 의심하고 있었어. 하지만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너무 힘들었어. 그래서 성도윤이 그 정도로 나쁜 사람은 아닐 거라고 나 자신을 속이고 있었던 거야.”“설아야, 너랑 성도윤은 아무 잘못도 없어. 성도윤은 너를 완전히 잊었으니 나처럼 그저 아는 사람일 뿐인 거야. 성도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하는 사람이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해.”배경윤은 차설아의 어깨를 토닥이면서 위로해 주었다.“나, 나도 알아... 성도윤은 진작에 날 잊었지만 난 희망의 끈을 놓지 못하고 나를 기억해 주길 바랐어. 전부 내 탓이야!”차설아는 심호흡하면서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눈물을 삼켰다.“그럼 이제는 어떻게 할 생각이야? 성도윤과 맞서려고?”배경윤의 말에 차설아는 벽에 기대 한숨을 내쉬고는 차갑게 웃었다.“나도 잘 모르겠어. 오
“설아야...”차성철이 천천히 손을 뻗더니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설아야, 그동안 나 때문에 힘들었지? 정말 고생했어. 미안해...”“오빠, 그런 말 하지 마. 오빠가 깨어날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어!”차설아는 차성철이 누워있는 병실 침대맡에 꿇어앉아 눈물을 흘렸다.“사실 의식을 잃었다는 걸 알고 있었어. 작은 상자에 갇힌 채로 꼼짝도 하지 못했던 거야. 상자를 열지 못해서 이 안에서 죽는 줄 알았거든. 그런데 자꾸 네 생각이 나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어. 난 하느님께 정말 감사해. 나에게 기회를 주어서 널 다시 만나게 되었으니 말이야.”차성철이 울먹이면서 말했다. 이번 사고로 인해 차성철은 많이 변했다. 예전처럼 날카롭고 예민하게 굴지 않았고 한결 부드러워졌고 말투도 다정해졌다.“뭘 자꾸 그런 말을 해! 오빠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면서 우리 달이랑 원이가 커서 결혼하는 모습을 봐야지. 손주도 봐야 하는데 불길한 말은 하지 마. 오빠는 그냥 오래 잠들어 있다가 깨어난 거야. 하느님의 힘을 빌릴 정도까지는 아니었어. 다시 깨어나 줘서 정말 고마워... 오빠가 너무 보고 싶었어.”차설아는 눈물을 닦으면서 차성철을 와락 안았다.“그래. 너랑 달이, 원이를 위해서라도 건강하게 지내야지. 앞으로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가자. 우리 가족 모두 모여서 재밌게 지내자. 네가 하고 싶었던 걸 같이 하고 가족 여행도 가자.”“말한 대로 해야 해. 지금 약속하자. 앞으로 오빠가 또 다치면 다시는 나 못 볼 줄 알아! 그때는 오빠를 용서하지 않을 거야.”남매는 새끼손가락을 걸고 눈물의 약속을 했다. 보는 사람마저 눈물이 나는 광경이었다. 배경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물만 흘렸다. 배경윤은 배경수가 생각났던 것이다.차설아의 말에 의하면 배경수는 아주 멀리 떨어진 마을에서 처음 보는 여자와 결혼했다. 배경윤은 배경수가 걱정되었다. 차설아는 울다가 차성철이 베고 있는 베개의 아래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은반지였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값이 꽤 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