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지금 화가 나는 대신, 구역질이 나기 시작했다.“그렇게 죽고 싶어? 그럼 그 소원을 들어주지!”그녀는 차가운 눈빛을 보이더니 당장이라도 그의 목을 틀어버려 속은 한을 풀고 싶었다.하지만... 끝내 그렇게 할 수 없었다.“너랑 쓸데없는 말을 더 하고 싶지 않아. 당장 원이를 내놔. 아니면 앞으로 네 얼굴을 다시는 보지 않을 거야. 나를 찾아오지도 마!”강우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나 때려죽인다고 해도 아이가 어디에 있는지는 말해줄 수 없어. 상대는 너무나도 위험한 사람이거든. 너랑 설아 씨가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만약 내가 너에게 아이의 위치를 알려준다면 너도 분명 위험해질 거야. 나도 별다른 선택이 없다는 걸 이해해 줘.”“강우혁!”배경윤은 분노가 끓어올라 발로 그를 세게 걷어찼다.“원이가 설아 언니에게도, 나에게도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몰라서 그래? 조금이라도 미안한 마음이 든다면, 전에 했던 일에 후회를 느낀다면 네가 알고 있는 모든 걸 다 나에게 말해. 내가 널 죽이고 싶게 만들지 말라고!”강우혁은 고통이 몰려오는 배를 움켜쥐며 괴로운 표정을 보였다.부드럽고 영원히 눈을 반짝이던 예전의 모습과는 달리 지금 그의 눈동자에는 눈물이 고였고, 매우 슬퍼 보였다.그는 다시 두 팔을 벌리며 거의 애원하듯이 말했다.“윤아, 날 안아줘. 응?”배경윤은 어이가 없었다.강우혁을 때려도 혼내도 위협해도 소용이 없어 배경윤은 어쩔 수 없이 전략을 바꾸고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안아주면 솔직하게 말해줄 거야?”강우혁이 흠칫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안아주면 모든 걸 말해줄게.”“그래, 그럼 한 번 안자.”배경윤이 두 팔을 벌리고는 강우혁과 포옹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그런 그가 너무 징그럽다고 생각했다.‘이 나쁜 새끼가 나를 속이고도 여기서 나를 사랑한 척을 하고 있어. 정말 징그러워 죽겠네. 원이의 행방을 알아내기 위해서가 아니면 진작 이 x끼를 죽였을 텐데 말이야.’“윤아, 그거 알아? 나는 너를 진
강우혁의 몸은 이미 많이 허약해졌다.그는 비틀거리더니 머리를 배경윤의 어깨에 기댔다.강우혁은 자기가 너무나도 큰 잘못을 저질렀고, 배경윤과 원래대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도 알아 죽을 결심을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배경윤의 얼굴을 보고 그녀를 안아보고 싶었다.그는 배경윤과 만남을 약속하기 전에 독극물을 복용했는데 그 독이 이제 퍼진 모양이다.“경윤아, 내가 이 꼴이 된 건 다 내가 자초한 거야. 많은 걸 후회하지만 널 알게 된 건 전혀 후회하지 않아. 네 품에 죽을 수 있다니 여한이 없네...”강우혁이 더듬거리며 말했다.그리고 그는 있는 힘껏 배경윤을 꼭 끌어안았는데 조금이라도 그녀의 온기를 더 느끼고 싶었다.배경윤은 눈시울을 붉히더니 차가운 얼굴로 남자를 향해 말했다.“강우혁, 정말 온갖 수작을 다 부리네. 이번에는 뭘 하려고 그래? 나한테 고육지책을 펼치려는 거야? 네 말을 절대 믿지 않을 거라고!”“셋까지 센다. 당장 원이의 행방을 말해. 아니면 나 가만히 안 있을 거야. 하나, 둘...”차설아는 그들과 조금 멀리 떨어져 있어 두 사람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전혀 몰랐다.배경윤은 한참 동안 강우혁을 때리더니, 두 사람은 또 안으면서 눈물을 훌쩍였고, 얼기설기 복잡하게 얽혀 있어 절대 떼어낼 수 없을 것 같았다.이를 보고도 차설아는 서운하거나 화가 나지 않았다.강우혁이 좋은 사람은 아니었지만 정말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배경윤에게 진심을 다한다면 그녀도 두 사람을 축복할 것이다.한 사람을 이성 잃게 만들고, 원칙을 어기게 하는 것이 바로 사랑이니 말이다.사람들은 분명 사랑의 결과가 좋지 않을 걸 알면서도, 옆에서 다른 사람이 아무리 말린다고 해도 사랑에 빠지게 된다.차설아는 심지어 성도윤이 아직 살아있으면 그에게 다시 사랑의 감정을 느낄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사람 일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다.세상 사람들이 말린다고 해도 차설아가 자기도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다시 성도윤에게 사랑에 빠질지 누가 알겠는가?‘성도윤...
‘역시,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성도윤 그 자식은 죽지 않았던 거야. 누구보다도 목숨이 끈질긴 사람이 쉽게 죽을 리가 있겠어?’차설아는 종업원에게서 성도윤이 옆문으로 자리를 떴다는 말을 듣고 다급하게 옆문으로 가서 그를 뒤쫓으려고 했다...“악, 여기 사람 죽었어요, 살려주세요!”누군가가 바닥에 쓰러져 의식을 잃은 강우혁을 가리키며 소리를 질렀다.레스토랑에 있던 사람들은 대부분 겁을 먹어 뿔뿔이 흩어졌고, 간이 큰 사람들은 강우혁에게 몰려들었다.“강우혁, 이 쓰레기 자식. 죽은 척하지 마. 나 안 믿을 테니까. 경고하는데 당장 일어나!”배경윤은 공포에 질려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녀는 떨리는 두 손으로 바닥에 쓰러진 남자를 흔들었다.차설아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는 어쩔 수 없이 옆문으로 돌아왔다.“무슨 일 있었어?”차설아가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나오고는 미간을 구기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누군가가 배경윤을 가리키며 큰 소리로 말했다.“이 여자가 범인이에요. 아까 저 남자분을 계속 때리고 있더라고요. 그렇게 맞더니 이제 죽었나 보네요.”“맞아요, 저 사람이에요! 얼른 경찰에 신고해서 저 사람 잡아요, 절대 도망가게 해서는 안 된다고요!”“아, 아니야. 절대 그럴 리가 없어!”배경윤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어린아이처럼 쩔쩔매고 있었다.“이 쓰레기 자식이 겉으론 허약해 보여도 정말 그런 줄 알아? 어떻게 따귀 몇 번 맞고 죽어?”“강우혁, 연기하지 마. 이러면 재밌다고 생각하는 거야? 얼른 일어나라고!”그걸 지켜본 사람들은 분노가 끓어올라 배경윤에게 따지기 시작했다.“연기하는 사람은 당신 아니에요? 당신이 그러고도 사람이에요? 사람 죽을 정도까지 때렸는데도 가만 안 두려고 하는 거예요?”“발뺌하지 마요, 여기 있는 사람 다 증인이니까. 곧 경찰이 도착할 거예요.”사람들의 말을 들은 차설아는 머리가 지끈거려 차가운 얼굴을 보이더니 소리를 질렀다.“다 그만하세요!”그녀는 워낙 강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기에 주위는 곧바로 조용해졌
옆문은 바닷가와 연결되어 있었다.바닷바람이 살살 불어오더니 파도가 잔잔하게 일렁였다.이미 늦은 밤이었기 때문에 바닷가는 매우 어두웠다.게다가 사람도 많지 않았는데 바닷가에서 산책하고 있는 커플들밖에 없었다.차설아는 부드러운 모래를 밟으면서 예쁜 두 눈을 크게 뜨고 레이더처럼 바닷가를 수색하기 시작했다.바닷바람에 그녀의 머리카락은 헝클어졌다. 그녀가 입고 있던 하얀 드레스도 치맛자락을 날리면서 그녀의 가늘고 긴 종아리를 드러냈다.그녀는 어둠 속에서 춤을 추는 요정처럼 매혹적으로 보였다...차설아는 한참 동안 찾았지만 별 수확이 없어 그녀의 얼굴에는 점점 실망의 기색이 드러났다.‘성도윤, 이 빌어먹을 놈, 나랑 숨바꼭질을 하는 거야? 정말 유치하네.’그녀는 갑자기 성도윤을 찾고 있는 자신이 너무 바보처럼 느껴져 더는 그를 찾지 않으려고 했다.‘어차피 살아있으면 언젠간 모습을 드러내겠지.’그렇게 생각하며 차설아는 허리를 굽혀 종아리에 묻은 모래를 툭툭 털어내고는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면서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그녀가 일어설 때, 갑자기 익숙한 모습의 누군가를 발견했다.허리를 곧게 편 그는 차설아와 100m 남짓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그윽한 얼굴로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저녁이라 어둡고 잘 안 보인다고 하지만 그는 분명 훤칠하고 차가운 기운을 뿜어내는 성도윤과 똑같은 모습이었다.특히 그의 옆모습으로 완벽한 그의 이목구비가 보였는데... 성도윤이 아니라면 누구란 말인가?실망으로 가득했던 차설아는 두 눈을 다시 밝게 빛나고 있었다.“성도윤!”차설아는 저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큰 소리로 불렀다.하지만 성도윤은 그녀의 목소리를 듣자 멈춰 서기는커녕 오히려 반대 방향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차설아는 흠칫하더니 승부욕이 불타올라 그를 쫓았다.“성도윤, 왜 뛰는 거야? 거기 서! ”그녀의 다리가 나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뛰면 안 되었다.하지만 성도윤이 코앞에 있는데 어떻게 그냥 놓칠 수 있단 말인가? 그것보다 골치 아픈
차설아가 입을 삐죽 내밀고는 곧바로 성지훈을 놓아줬다.그리고 몸을 일으켜 옷매무새를 정리하고는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그러니까 아까 그 블루 칵테일을 네가 주문했다는 거야?”성지훈은 자리에서 일어서지 않고 오히려 느긋하게 모래에 기대앉더니 두 팔로 몸을 받치고는 고개를 들어 차설아에게 물었다.“왜요? 도윤이 형이 특별히 만들어준 거라고 생각했어요?”차설아가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힐끔 보고는 어둡고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를 내다보며 도도한 공작새처럼 붉은 입술을 꼭 다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성지훈이 설명했다.“전에 도윤이 형이 특별히 나를 위해 이 술을 만들어준 적이 있었어요. 한참 동안 조르고서야 레시피를 알려주더라고요. 이 칵테일은 당신이 만들어낸 거라고 했어요. 레시피를 알고 나니 조금 신기했어요. 보드카의 강렬함과 민트의 청량함이 만났는데 가장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조합이 오히려 신기한 맛을 낸다니... 꼭 당신과 도윤이 형 두 사람 사이 같았어요.”차설아가 입을 삐죽 내밀더니 콧방귀를 뀌었다.“너무 멀리 간 거 아니야. 난 그때 그냥 대충 만든 거라고. 그렇게 많은 생각을 하지 않았어. 네가 오늘 주문하지 않았더라면 난 이 레시피를 까먹었을지도 몰라.”“왜 아직도 거짓말을 하고 있어요? 만약 이 레시피를 정말 까먹었다면 아까처럼 미친 듯이 쫓아오지도 않았겠죠.”“그래서 일부러 나 놀렸다는 거 인정하는 거야?”차설아가 미간을 구기더니 성지훈을 째려보며 물었다.“내가 바보 같아? 너에게 당하는 모습을 보니까 재밌어? 역시 성씨 가문 남자들은 정상인이 하나도 없어. 성도윤은 차갑기만 하지, 성진은 미친놈이지. 너는 유치한 어린애야!”방금 헐레벌떡 쫓아오며 소리를 지르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며 차설아는 얼굴을 붉혔다.그녀는 성지훈에게 화가 났을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화가 났다.‘왜 성도윤은 옆모습만으로도 이렇게 나에게 창피를 줄 수 있는 거야?’성지훈은 더는 변명하지 않고 옆자리를 툭툭 치며 차설아에게 말했다.“지난번
“나?”차설아가 미간을 찌푸리며 성지훈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랐다.그녀는 지금 성도윤과 접점이 없었고, 성씨 가문과는 더더욱 연관이 없었다. 그런데 성지훈이 그녀에게 도움을 청하다니, 그녀를 너무 착하게만 생각하는 거 아닌가?성지훈은 무거운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난 반년 전에 KCL 그룹의 수석 연구개발사 자리를 사임하고, 동시에 수중의 일부 지분을 매각했어요. 지금의 KCL 그룹은 주인이 바뀌었다고 말할 수 있죠. 신임 대표도 기술직 출신이지만 저보다 사업 능력이 더 뛰어나다고 해요. 그 사람은 KCL 그룹 전체를 처음부터 끝까지 뒤바꾸어놨고, 난 이미 사임했기에 지금 KCL 그룹에서 별 힘이 없어요...”차설아가 눈썹을 들썩이더니 별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기업은 하나의 왕국과 같은 거야. 왕국이 아무리 번창한다고 해도 결국 세대교체를 겪어야 하지. 도대체 뭘 말하고 싶은 거야?”“나는 구속받는 걸 싫어하기 때문에 그들의 싸움에 가세할 생각 없었어요. 그래서 KCL 그룹이 어떻게 되든 나도 상관이 없었고요. 그동안 나와 도윤이 형의 관계로 KCL 그룹은 성대 그룹과 많은 비즈니스를 했고, 서로의 이익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파트너가 되었죠. 하지만 도윤이 형에게 이런 변고 생겼고, 신임 대표는 변화를 원하기 때문에 두 회사의 협력이 앞으로 영향을 받을까 봐 걱정이 돼요...”성지훈이 한숨을 푹 내쉬고는 걱정 어린 얼굴로 말했다.“성대 그룹은 그동안 도윤이 형 덕분에 버티고 있었어요. 하지만 하필 이 시각에 일이 터지고 말았죠. 성대 그룹은 곧 KCL 그룹과 G6 칩에 관한 프로젝트를 시작할 텐데 이건 전체 하이 테크를 뒤바꿀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한 일이에요. 절대 차질이 생겨서는 안 된다고요. 아니면 성대 그룹은 큰 타격을 받을 거예요.”“그래서?”차설아가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성대 그룹이 타격을 받든 안 받든 나랑 무슨 상관이야? 내가 뭘 도울 수 있다고 그래?”“큰 도움이 될 수 있죠, 당신이 원한다면요!”성지훈이 의미
성지훈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이번에 성대 그룹은 큰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게다가 중요한 시기에 성도윤조차 생사를 알 수 없는 행방불명이 되었다. 그만큼 성도윤은 살아있다고 해도 몸이 성한 상황은 아닐 것이다.‘하지만 그래도 나랑 무슨 상관이야?’흥망성쇠는 불변의 진리이다. 성대 그룹이 오랫동안 업계 일인자 자리를 차지해 왔으니 이제 추락하는 것도 당연했다.그녀가 성지훈의 제의에 동의한다고 해도, 성도윤을 대신해 성대 그룹은 안정시킨다고 해도 성대 그룹이 추락하는 걸 막을 수 없을 것이다.하지만 도대체 누가 감히 성씨 가문의 후계자에게 연거푸 두 번이나 손을 썼는지 궁금하기도 했다.그 생각에 차설아는 컴퓨터를 켜고 그해 성도현이 살해당한 뉴스를 찾기 시작했다.하지만 안타깝게도 성도현에 대한 뉴스는 거의 없다시피 적었다.아마도 성씨 가문에서 큰 도련님의 죽음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아 일부러 이에 관한 뉴스를 모두 지웠을 것이다.그 사건은 5년 전, 뉴욕에서 일어났다.차설아는 어쩌면 현지 경찰서에 이 사건에 관한 상세한 기록을 두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현지 경찰서의 파일 시스템을 해킹하려고 했다.뉴욕 경찰의 파일 시스템은 세계적으로도 복잡하기로 유명했다. 가장 원시적인 2진법 암호를 사용했는데, 마침 차설아가 제일 어려워하는 부분이기도 했다.그해 어느 글로벌 해킹대회에서 그녀는 어려워하던 2진법 때문에 마침 2진법을 정통한 바람에 졌었다.‘설마 또 바람을 불러야 하나? 하지만 그놈을 건드리면 한동안 잠잠할 날이 없잖아. 요새 겨우 잠잠해져 나를 귀찮게 하지 않던데, 지금 먼저 그를 찾아간다면 고생을 사서 하는 거나 다름없어!’고민 끝에 차설아는 스스로 암호를 풀어보기로 했다.그녀는 긴 손가락으로 키보드를 두드리며 한 번 또 한 번 해킹하려고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결국 그녀는 해킹 시도를 너무 많이 했기 때문에 현지 경찰의 주의를 끌었고, 그녀의 IP 주소 또한 경찰에게 드러났다.“젠장!”차설아는 안전을 위해 먼
문이 열리자 차설아는 뜻밖의 사람을 맞이했다.문밖에는 다름 아닌 그녀가 그리워하던 귀염둥이 아들, 원이가 서 있었다!“엄마, 오랜만이에요. 원이는 엄마가 너무 보고 싶었어요. 나 안아줘요!”원이는 그동안 아무 걱정 없이 지낸 듯이 얼굴은 희고 깨끗했다. 그는 덤덤한 얼굴로 차설아를 향해 두 팔을 벌렸는데 납치당한 어린이처럼 초라하거나 낭패한 모습은 전혀 아니었다.차설아의 기쁨은 곧 분노로 바뀌었고, 그녀는 허리에 손을 얹더니 원이를 혼내기 시작했다.“이놈아, 놀 거 다 놀고, 인제야 나 찾아온 거야?”“내가 해바라기 섬을 떠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 사달을 냈어. 우리가 걱정할 거라고 생각 안 했어? 일부러 나 약 올리려고 작정했지?”“엄마, 화내지 마세요. 제가 이렇게 돌아왔잖아요...”원이는 능구렁이처럼 빠져나가면서 괜찮다는 듯이 어깨를 들썩였다. 그리고 다짜고짜 차설아의 품에 확 안기고는 포도알 같은 두 눈을 깜빡이며 세상에서 가장 순진하고 귀여운 얼굴을 드러냈다.“제가 얼마나 똑똑한지 엄마가 모르는 것도 아니고요, 왜 걱정하세요. 괜한 걱정은 하지 않는 게 좋아요... 하지만 엄마가 저를 너무 사랑해서 그러는 거 알아요. 엄마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사람이에요. 원이는 엄마를 제일 사랑해요!”녀석은 어려서부터 차설아의 성격을 훤히 알고 있었다.차설아가 팔랑귀이기도 하고, 애교에 살살 녹는 걸 알고는 매번 사고를 치고 달콤한 말로 차설아의 마음을 돌리려고 했다. 게다가 순진하고 귀여운 그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차설아는 마음이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이번에 차설아는 그렇게 쉽게 넘어오지 않았다.그녀는 원이의 얼굴을 마구 어루만지고 싶은 충동을 겨우 참고는 엄숙한 얼굴로 말했다.“차진원, 너 어디서 귀여운 척을 하는 거야? 나 이제 안 넘어가. 솔직하게 말해봐, 왜 이 난리를 쳤어?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거야?”원이는 애교를 부려도 차설아가 넘어오지 않자 더는 애교를 부리지 않고 차갑고 도도하던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그는 두
“그게...”차설아는 잠시 말을 잃었다. 거짓말을 잘하지 못하는 그녀는 특히 자신이 아끼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그랬다.“임신 테스트기도 다 믿으면 안 돼요. 이게 호르몬과 관련이 있는데 때로는 남자의 에스트로겐 수치가 너무 높으면 임신 반응이 나올 때도 있거든요.”박성훈이 차설아를 대신해 설명했다.비록 이 설명이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성도윤 같은 남자에게는 충분히 먹힐 만했다.역시나 성도윤은 그 말을 믿었고 얼굴에 실망한 감정이 가득했다.“정말 그럴 수도 있나요?”“그래. 혈액 수치가 가장 정확한 증거야. 혈액 검사 결과, 차설아 씨는 정말로 임신하지 않았어.”박성훈이 성도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위로했다.“괜찮아, 두 사람 아직 젊으니 앞으로 가능성이 많을 거야.”“미안해요, 도윤 씨. 나도 사실 두 줄이 나와서 임신한 줄 알았어요. 괜히 실망하게 해서 미안해요.”차설아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성도윤에게 사과했다.그의 마음은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실망한 기분도 잠시, 그는 차설아를 서둘러 달랬다.“바보야, 내가 미안해. 다 내가 부족해서야. 약속할게 이제부터 매일 밤 더 열심히 할 거야.”“엣헴!”박성훈이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이 두 사람 또 닭살 돋게 하네. 매일 밤 열심히 한다고? 뭘? 이러다 어떻게 열심히 하는지까지 말할 기세군.’“형, 목이 마르면 거실에 나가서 커피나 좀 마시세요. 이제 검사도 필요 없는 것 같은데.”성도윤이 직설적으로 내뱉었다.“설아 씨가 임신 안 됐다고 하자마자 바로 나를 쫓아내려고 하네? 아침에 그 애타게 부탁하던 모습 성도윤은 어디 갔지? 이제 다시 나를 모셔 오기 힘들 텐데.”박성훈이 팔짱을 끼고 웃으며 말했다.‘팔불출에는 정말 약이 없군.’“그럼 형은 그냥 여기 있어요. 내 능력으로 한 달 안에 아린이가 반드시 아기를 가질 수 있을 것 같으니까.”성도윤이 조금 유치하게 말했다. 아무리 도도하고 성숙한 남자라도 사랑 앞에서는 마치 어린아이 같았다.차설아가 남자의 팔을 잡고 말렸다.
“잘됐네요. 마침 딱 배고팠는데!”차설아는 피곤하고 정신이 흐릿했지만 기대에 가득 찬 목소리로 성도윤을 반겼다.성도윤이 사 온 케이크는 차설아가 가장 좋아하는 케이크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가게 주인은 분점을 열 계획도 없고 배달도 하지 않으며 매일 일정 수량만 판매했다.그래서 정말 오래 기다려야 하고 운이 좋아야만 살 수 있었다.가게 주인의 기분도 들쑥날쑥해서 기분이 좋을 때는 많이 팔지만 기분이 나쁘면 그날은 일찍 가게 문을 닫기 일쑤였다.단순히 줄을 서서 맛있는 케이크를 먹는 것도 있지만 케이크를 사기 위해 기다린 사람들의 수고와 정성도 들어 있었다.차설아는 숟가락으로 케이크 한 조각을 떠서 입에 넣었다. 그 부드럽고 차가운 질감에 그녀는 감동해서 눈물이 날 뻔했다.“맛없어?”차설아의 표정을 보고 성도윤이 이마를 찌푸리며 걱정스레 물었다.“아니요. 너무 맛있어서... 이제 다시 이런 케이크를 못 먹으면 너무 슬플 것 같아서요.”“바보, 그런 말을 왜 해? 앞으로 당신이 원하면 매일 사다 줄게.”성도윤이 차설아의 손을 잡고 진지하게 약속했다.“좋아요, 그럼 매일 먹고 싶어요. 당신이 매일 사다줘요...”차설아는 입술에 크림을 묻힌 채 남자에게 물었다.“그런데 매일 줄 서서 사 오느라 면 당신이 힘들지 않을까요?”“걱정 붙들어 매, 당신이 질리지만 않는다면 매일 가서 사 올 수 있어. 정 안 되면 내가 그 가게 주인을 찾아서 배워서 매일 내가 직접 만들어서 줄게...”성도윤은 차설아의 입가를 닦아주며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혹시 나한테 뭔가 숨기고 있는 거 아니야?”“어, 뭐가요?”차설아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그녀는 그의 관찰력이 이렇게 예리할 줄 몰랐다.“분명히 뭔가 있어.”성도윤이 단호하게 말했다.그는 돌아오자마자 분위기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지만 참으면서 기다렸다.그러다 차설아가 케이크를 먹으며 그런 말을 하자 분명히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있었던 걸 확신했다.“역시 당신 눈을 피할 수는 없네요. 사실,
박성훈은 비관적인 차설아를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몇 달 전만 해도 그녀는 자신감 넘치고 자유롭고 시원시원한 여자였다.그런데 지금은 눈을 잃고 독에 중독되어 마치 시들어버린 꽃처럼 처량해 보였다.“설아 씨, 제가 살아있는 허준 선생처럼 신통한 의사는 아니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약속할 수 있습니다. 반드시 최선을 다해 당신을 치료할 것이고 당신의 눈도 적합한 이식자가 나타나기만 하면 다시 원래대로 회복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너무 절망하지 마세요. 살아있는 한, 희망은 있는 법입니다.”그는 진중한 목소리로 차설아를 위로했다.물론 중금속 중독을 완전히 해독하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다.지금까지 성공 사례가 많지 않지만 의학 역사 속에서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과거에도 성공한 사례가 있는 만큼 자신도 연구를 거듭하면 반드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고마워요, 박 선생님. 그 말 한마디가 저한테 용기를 주네요.”차설아는 힘겹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박성훈이 있는 방향을 향해 말했다.“해독을 할 수 있든 없든, 그리고 제 눈이 다시 보이든 아니든, 한 가지만 부탁드리고 싶어요. 이 사실을 도윤 씨한테는 절대 알리지 말아 주세요. 도윤 씨가 지금 너무 지쳐 있어요. 더 이상 그이가 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아요.”“걱정 마세요. 저는 그런 말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박성훈은 차설아의 성도윤을 향한 깊은 감정에 감탄했다.이토록 힘든 상황에서도 자신보다 사랑하는 남자를 먼저 걱정하는 차설아를 보면서그녀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느껴졌다.“제 아이도 지킬 수 없겠죠?”차설아가 한참을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박성훈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맞아요. 아이는 지킬 수 없습니다.”그가 힘겹게 이어 말했다.“설아 씨가 현재 중금속 중독 상태고 해독을 위해 강한 약을 복용해야 합니다. 이 약들은 태아의 성장에 심각한 영향을 미쳐요. 제 의견으로는 아직 초기일 때 아이를 포기하는 것이 낫습니다.”“그럴 줄 알았어
박성훈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이런 상황이라면 차라리 빨리 죽는 게 낫다고 할 수도 없고...’하지만 그는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했다.혈액 검사 보고서에 따르면 차설아의 여러 혈액 수치에서 이상이 발견되었고 그녀의 지금 상태로 본 결과, 박성훈은 차설아가 중금속 중독에 걸렸다고 판단했다.중금속 중독은 쉽게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지는 않지만 서서히 신체의 각 기관을 쇠약하게 만들고 신경을 마비시키는 증상이었다.초기에는 극심한 피로와 졸음을 유발하며 무기력하게 만들지만 후기로 갈수록 신경과 장기가 손상되며 극심한 통증을 수반하게 되고 이러한 증상은 그야말로 생지옥과도 같았으며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정도의 고통이었다.박성훈은 어떻게 입을 열어야 할지 고민하다 결국 우선 잔인한 진실을 감추기로 결정했다.“어쨌든 걱정 마세요. 저희가 반드시 치료해 드릴 겁니다.”그렇게 말은 했지만, 사실 중금속 중독을 완전히 치료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게다가 투여된 독의 종류를 정확히 파악해야만 적절한 치료법을 적용할 수 있었고 그러려면 독을 투여한 사람이 어떤 중금속 원소를 사용했는지 솔직하게 밝혀야 한다.“지금부터 최근 식사 내용을 정확히 말해 주세요. 혹시 식사 외에도 평소 드시지 않던 걸 섭취한 적 있나요?”박성훈이 진지한 눈빛으로 물었다.“저 중독된 거죠?”차설아는 질문에 답하지 않고 되레 되물었다.“어떤 독에 중독됐는지 알 수 있어요?”“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초기 판단으로는 중금속 중독일 가능성이 큽니다.”박성훈은 차설아가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다는 사실에 순간 당황했지만 곧바로 숨김없이 사실을 털어놓았다.이런 경우, 환자와 의사가 완전히 솔직하게 소통해야만 치료에 도움이 되기에 아무리 잔인한 현실일지라도 그녀가 사실을 알아야 했다.“중금속 중독...”차설아는 그 단어를 듣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몸이 서서히 차가워지며 절망감이 엄습했다.그녀는 예전에 비슷한 뉴스를 본 적이 있었다.한 명문대 여학생이 룸메이트의 질투로
“무슨 일인데요?”박성훈이 갑자기 진지해지며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차설아를 바라보았다.“뭘 알아내든 상관없어요. 도윤 씨한테는 좋은 얘기만 해주세요. 안 좋은 결과는 절대 말하지 마시고요.”차설아가 간결하게 자신이 원하는 걸 얘기했다.그녀는 방금 전에 애써 성도윤을 떨어뜨려 놓으려 했던 이유가, 그가 걱정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 거짓말을 유지하려면 박성훈의 협조가 필요했다.“하... 역시 그럴 줄 알았어요.”박성훈은 차설아가 이런 부탁을 할 것이라는 걸 예상했지만 그녀를 보며 여전히 마음이 아팠다.그런 상태에서 차설아는 여전히 성도윤을 걱정하며 그가 조금이라도 슬퍼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두 사람 서로를 진짜로 사랑하나 보네...’“걱정 말아요. 내가 분위기 못 읽고 아무 말이나 하는 사람도 아니고 어떤 걸 얘기할지 잘 알고 있어요.”박성훈이 차설아를 안심시키듯 말했다.“그리고 설아 씨도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요. 내가 신의 손을 가진 명의는 아니지만 그래도 의술은 좀 하는 편이니까 저희 말대로만 따르면 큰 문제는 없을 거예요. 게다가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니잖아요. 어쩌면 단순히 임신 초기에 너무 피곤해서 그런 걸 수도 있어요.”“정말 그런 거였으면 좋겠네요.”차설아는 힘없이 미소를 지으며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하지만 검사 결과가 결코 좋을 리 없다는 것을 그녀는 이미 직감하고 있었다. 상대는 처음부터 그녀를 해칠 작정이었고 가볍게 봐줄 리가 없었다.만약 배경윤이 조금만 늦게 알아차렸더라면 지금쯤 그녀는 이미 손쓸 수 없는 상태였을지도 모른다.지금 당장은 그 정도까지는 아닐지라도 분명 좋은 상태는 아닐 것이다.얼마 지나지 않아 혈액 검사 결과가 나왔다.검사 결과를 살피던 그의 표정은 한층 무거워졌고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검사 결과는 너무 처참했다.“어때요, 박 선생님?”차설아는 몽롱한 상태에서 거의 잠들 뻔했지만 억지로 정신을 붙잡고는 줄곧 침묵하고 있는 박성훈에게 물었다.“뭐라고 말해야
성도윤은 자책감에 사로잡혀 당장이라도 할복이라도 할 기세였고 박성훈은 그런 그를 진정시키려 일부러 괜찮을 거라고 말한 것이었다.하지만 사실, 차설아의 심장 박동은 이상했고 거의 보름 동안 지속된 무기력함과 과도한 졸음까지 고려했을 때, 그녀의 몸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게 분명했다.그리고 그 원인은 단순히 임신 때문이 아니라는 것도 박성훈은 어렴풋이 감이 왔다.하지만 지금 당장 혈액 검사 결과도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성급하게 결론을 내릴 수는 없었다.괜히 성도윤에게 불안감을 주면 그가 차설아에 대한 과보호 수준을 고려할 때 당장이라도 미쳐버릴 게 뻔했기 때문이다.“정상이면 다행이야.”성도윤은 박성훈의 말을 듣자마자 한숨을 내쉬며 마치 온 세상의 짐이 내려간 듯 안도했다.“들었지, 당신 괜찮대. 그냥 임신해서 피곤한 것뿐이래. 내가 괜히 겁먹고 난리 친 거야. 미안해. 내가 이런 경험이 없다 보니까 괜히 걱정했네.”성도윤은 기뻐하며 차설아를 꼭 끌어안았다.그리고 그녀의 배를 손으로 가볍게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야, 꼬맹이. 엄마 너무 힘들게 하지 마라? 너 때문에 엄마가 얼마나 피곤해하는지 봤지? 만약 엄마를 더 힘들게 하면, 네가 세상에 나오는 순간, 아빠가 먼저 너 혼쭐낼 거야!”차설아는 그의 유치한 농담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그만 해요. 진짜 왜 이렇게 점잖지 못해요?”“하아, 두 사람 오늘 너무 닭살 커플인 거 아니야?”옆에서 이 모든 걸 보고 있던 박성훈이 질색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 정도면 거의 ‘고문 수준’의 애정 행각이었다.그때, 차설아가 성도윤을 바라보며 갑자기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도윤 씨, 나 갑자기 케이크가 먹고 싶어졌어요. 지금 가서 사 올 수 있어요?”“지금?”성도윤은 순간 당황했다.그는 케이크를 사 오는 게 싫은 게 아니었다. 하지만 혈액 검사 결과가 아직 나오지 않은 상태라 결과를 확인한 후에 움직이고 싶었다.“네. 지금 당장이요. 지금 먹고 싶다고요.”차설아가 일부러 짓궂게 물었다.“
박성훈은 처음엔 가벼운 농담을 던지며 분위기를 풀어주고 있었지만 곧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잠깐만!”그는 이마를 찌푸리며 성도윤을 바라보더니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왼쪽 아래로 2~3cm 정도 더 옮겨 봐.”성도윤도 덩달아 긴장해졌다.그는 박성훈의 지시대로 청진기를 차설아의 심장 왼쪽 아래 3cm 지점으로 옮기며 조심스럽게 물었다.“뭔가 이상한 점 있나요?”“...”박성훈은 대답하지 않고 그저 얼굴을 굳힌 채 조용히 청진기에 집중했다.한참 후에야 그는 청진기를 내려놓으며 말했다.“지금은 확실하게 들리는 건 없어. 혈액 검사 결과까지 봐야 정확하게 알 거야.”차설아는 처음부터 차분하게 검사를 받으며 잘 협조하고 있었지만 무언가를 깨달은 듯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그리고 박성훈을 향해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늘 검사는 여기까지만 할까요? 박 선생님도 도착하자마자 이것저것 살펴보셔서 피곤할 테고 저도 피를 너무 많이 뽑아서 그런지 좀 지치네요. 나머지는 내일 하는 게 어때요?”사실 그녀는 자신의 몸에 뭔가 이상이 있다는 걸 감지하고 있었다.하지만 그게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확신할 수 없었고 괜히 성도윤이나 다른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게다가 현이를 통해 누군가 자신을 해치려 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아냈다.그 사람의 정체만 밝혀지면 직접 해결할 생각이었다.“온 지 얼마 안 돼서 피곤하지는 않은데요? 게다가 그냥 검사 결과만 보면 되는 거라 괜찮아요.”박성훈이 어깨를 으쓱하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저택에 온 지 이제 겨우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았고 그동안 한 거라곤 심장 소리 한 번 들은 게 전부인데 대체 뭐가 그렇게 피곤하다는 건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제가 피곤해서 그래요. 그리고 오늘 꼭 검사를 다 마쳐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차설아의 목소리는 차분하면서도 단호했고 명확한 거절의 의미였다.더 이상 검사에 협조할 생각이 없는 듯한 그녀를 보면서 박성훈은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그리고 잠시 고
박성훈은 말을 마치고 청진기를 꺼냈다. 그러더니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차설아의 옷 안으로 넣으려 했다.“잠깐!”성도윤이 그 장면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재빠르게 박성훈의 손을 붙잡고 제지했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청진하고 있지 그럼 내가 뭐 하는 걸로 보여?”박성훈이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내가 해요.”성도윤이 단호하게 청진기를 낚아채더니, 정색하며 말했다.“내 아내는 부끄러움을 많이 타요. 이런 건 내가 직접 할 테니까, 형은 듣기만 해요.”박성훈이 말없이 그를 보고 있자 성도윤이 되물었다.“왜, 문제 있어요?”“문제라기보단... 좀 오버 아니야?”“어디가 오버에요? 형이 직접 하는 게 더 이상한 거지.”‘누가 알아? 검사하는 동안 실수로 엉뚱한 곳이라도 건드릴지.’보통 때는 몰라도 지금처럼 바로 눈앞에서 보고 있는 상황에선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하아... 역시 소설에서만 보던 ‘집착광공’이 실존하는구나.”박성훈이 이마를 짚으며 감탄했다.자신이 가끔 보던 ‘재벌 남주’ 소설들이 그냥 창작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었다.현실이 오히려 소설보다 더 과장되어 있었다.“헛소리 말고 어디에 대야 하는지만 알려 줘요.”성도윤이 청진기를 들고 박성훈을 노려보았다.“음... 왼쪽 쇄골 중앙선과 다섯 번째 갈비뼈 사이 경계에 대면 돼.”성도윤의 태도가 워낙 단호해서 박성훈은 그냥 순순히 위치를 알려 주었다.“잠시만요.”성도윤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청진기를 차설아의 잠옷 안으로 밀어 넣었다.그러더니 여기저기 더듬으며 위치를 찾기 시작했다.“쯧쯧.”박성훈은 청진기를 끼고 있었기에 성도윤이 어떻게 검사하고 있는지 소리로 다 들을 수 있었다.하지만 감히 뭐라고 할 수도 없었고 결국은 그냥 내버려두기로 했다.‘어휴, 성도윤이니까 참는 거지.’그가 속으로 체념하는 사이, 성도윤이 한참 동안 위치를 못 찾자 결국 한마디 내뱉었다.“이 정도도 못 견디면 나중에 내진 검사할 때는 난리 나겠네?”“뭐요?”
차설아는 앞이 보이지 않는 대신 촉각과 후각이 무척 예민했다.방에 들어서는 순간, 그녀는 공간이 달라졌다는 걸 바로 알아차렸다.예전엔 책 냄새가 가득하던 방이 이제는 소독약 냄새로 가득 차 있었고 조명도 더 밝고 뜨거워진 느낌이었다.이제 차설아는 자신의 모든 걸 성도윤에게 맡긴 상태였다.그가 정말로 해부라도 하겠다고 나선다면 그저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당신 상상력 정말 대단한데? 우리 애도 나중에 소설가 체질이었으면 좋겠다.”성도윤은 차설아의 넘치는 상상력에 웃음이 터졌고 그녀의 손을 잡고 안쪽으로 이끌었다.“차설아 씨, 지금 혈액 검사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전반적인 건강 상태를 확인해야 하거든요.”간호사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설명했다.“네, 하세요. 어차피 지금 나는 도마 위 생선이라 목숨은 이미 여러분들 손에 있으니까요.”차설아는 자조적인 농담을 하며 팔을 내밀었다.곧이어, 조용한 방 안에 사각사각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바늘이 그녀의 정맥을 찔렀다.“살살 좀 해 주세요.”성도윤은 차설아의 살짝 찡그린 얼굴과 연달아 뽑혀 나오는 혈액을 보며 속이 상해 간호사에게 신신당부했다.그때, 앞쪽에서 장난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성 대표님의 아내 사랑이 참 넘치시네요. 난 조용히 보조만 하려고 온 건데 이렇게까지 과한 애정 행각을 볼 줄은 몰랐어요. 좀 자제하세요.”그 말투를 보아하니 성도윤이 말했던 ‘대단한 의사’가 틀림없었다.차설아는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그리고 순간 놀란 듯 말했다.“이 목소리... 어쩐지 익숙한데요?”“당연하지. 우리랑 꽤 인연이 깊은 사람이거든.”성도윤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설마... 이분...”차설아는 머릿속에서 기억을 더듬었다.그리고 순간적으로 깨닫고 외쳤다.“박 선생님?”“하하하. 나를 이렇게 빨리 기억해 주다니, 영광인데요? 이걸로 승부는 끝났네요.”“도윤아, 나중에 밥 한 끼 사.”박성훈은 호탕하게 웃으며 차설아가 자신을 단번에 알아본 것이 무척이나 자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