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안 시내 한복판에 있는 어느 호텔에서.원이는 양반다리로 스위트룸 거실 소파에 앉아 작은 얼굴로 열심히 TV를 보고 있었다. TV에서는 지금 ‘도라에몽’이 방송되고 있었다.임채원은 깨끗이 씻은 과일을 원이에게 넘겨주며 웃는 얼굴로 말했다.“원이야, 과일 좀 먹어, 과일을 먹어야 비타민이 보충돼.”원이는 귀여운 웃음을 활짝 짓고는 말했다.“채원이 이모, 고마워요. 채원이 이모는 정말 아름답고 마음씨도 예쁘시네요. 역시 엄마의 좋은 친구세요.”“어머, 얘가 말을 참 예쁘게 하네.”“그럼요, 원이는 채원이 이모가 직접 씻은 달콤한 과일을 먹었으니 말도 예쁘게 해야죠!”몇 차례 대화가 오고 가자 임채원은 원이 덕분에 입꼬리가 귀여 걸렸다.이 꼬마는 악녀 차설아와 성도윤의 아이라며, 성씨 가문에 시집가는 데 지장을 줄 수 있어 절대 곁에 두면 안 된다는 걸 자신에게 백 번 경고했지만 천사 같은 아이의 미소와 마음을 녹이는 달콤한 말에 임채원은 자기도 모르게 원이와 친해지고 싶었다. 마치 마가 낀 것처럼 원이에게 맛있는 음식을 먹이고, 예쁜 옷을 입히고 싶었다.임채원은 자신을 따르던 강우혁을 불러 원이를 영흥 부둣가에 있는 특별한 사람의 손에 넘기려고 했지만 원이가 자꾸 눈에 밟혀 계속 시간을 미룬 거였다.상황이 급박하고 복잡한지라 그녀는 자신에게 반드시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한다고 경고했다.‘오늘 밤 당장 원이를 보내야 해, 이대로 시간을 끌면 안 된다고...’그녀는 과일 쟁반을 든 채 원이 옆에 앉았다.볼이 볼록하게 부풀어 올라 햄스터처럼 포도를 먹는 아이를 보며 임채원은 귀여워서 미칠 지경이었다.원이는 한눈팔지 않고 열심히 애니메이션만 봤다.임채원이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원이야, 너 도라에몽 좋아하잖아, 그럼 퉁퉁이를 제일 싫어하겠네?”하지만 원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아니에요, 퉁퉁이가 전혀 싫지 않아요. 퉁퉁이는 겉으로 나빠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비록 퉁퉁이는 매회 진구를 괴롭히지만
좋은 남자는 자고로 뺏어야 하는 법이다. 좋은 남자를 가지려면 뻔뻔스러워야 하고 마음이 독해야 한다. 시집을 잘 가야만이 굳건한 지위를 유지할 수 있고, 나약한 여자는 도태될 뿐만 아니라 아이도 따라서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나야 한다고 했다.그래서 임채원은 다른 재주가 없었지만, 남자 하나는 제대로 뺏었다.성도현은 바로 그녀가 뺏어온 남자였다, 게다가 그의 마음을 제대로 사로잡았었다.바보 같은 성도현은 임채원이 자기 아이를 임신한 줄 알지만 사실 그 아이는... 성씨 가문의 핏줄이 아니었다.그 말인즉, 그녀가 임신했던 아이가 건강하다고 해도 임채원은 그 아이를 낳을 수 없었다. 그리고 차설아는 마침 그 죄명을 떠안게 되었다.성도윤은 그녀가 처음부터 눈여겨보던 남자였다.성도윤에게 시집만 갈 수 있다면 그녀는 어떤 대가라도 치를 것이다.“원이야, 채원이 이모가 좋은 사람이라는 걸 믿어야 해. 채원이 이모는 절대 원이를 다치게 하지 않을 거라고. 엄마한테 감사해야 해, 채원이 이모 같은 좋은 친구가 있다는 걸 말이야.”임채원이 미소를 지은 채 부드러운 손길로 원이의 작은 얼굴을 어루만지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임채원은 이미 마음을 굳혔다.‘왜 원이는 하필 차설아가 낳은 아이인 거야? 꼬마야, 네가 탓하려면 엄마를 탓하거라!’갑자기 원이는 애니메이션을 보지 않고 몸을 돌리고는 포도알같이 둥글고 큰 눈으로 임채원을 빤히 쳐다봤다.“왜, 왜 그래?”임채원은 원이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했다.원이는 성도윤 판박이였다.특히 웃지 않을 때의 그 눈은 성도윤과 똑같이 예리하고 엄숙했는데 마치 사람의 속을 꿰뚫어 볼 수 있는 것 같았다.“아니에요, 원이는 채원이 이모가 너무 좋아서요. 채원이 이모를 만나고 알게 된 게 너무 좋아요... 채원이 이모, 안아주세요!”녀석이 말하고는 두 팔을 활짝 벌려 임채원의 목을 끌어안았다.“어...”임채원은 몸이 굳더니 꼼짝도 못 했다.원이의 손은 말랑말랑했다.그리고 꼬순내 나는 조그마한 원이는 그녀의 마음을 움
임채원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문을 열었는데 문밖에 서 있는 사람은 바로 그녀에게 잘 보이려고 온갖 아부를 떨었던 강우혁이었다.“나 상 받으러 왔어!”강우혁은 눈이 벌게진 채로 곧장 임채원에게 달려들더니 난폭하게 그녀를 벽에 밀치고는 키스를 퍼붓기 시작했다.임채원은 두 손을 들어 무표정한 얼굴로 키스를 하는 남자를 바라봤는데 시큰둥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한바탕 키스가 끝나고 강우혁도 재미가 없는지 차가운 얼굴로 그녀를 놓아줬다.“그렇게 내가 싫으면 왜 그때 나에게 약속했어? 내가 임무만 잘 수행한다면 나한테 몸을 내어주겠다고 말이야.”그는 긴 손가락으로 부드럽고 하얀 그녀의 얼굴을 만지고는 사랑과 원한이 섞인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이를 악물었다.“넌 그저 아무 반응도 영혼도 없는 나무 같아. 나한테 상을 주는 거야? 아니면 수모를 안겨주는 거야?”임채원이 콧방귀를 뀌며 말을 이어갔다.“뭐가 그렇게 급해? 나 임채원은 약속을 지키는 여자라고. 너한테 약속한 건 반드시 내어줄게. 다만 지금은 아니야...”“또 핑계를 찾으려고 그래?”두 눈을 붉힌 강우혁은 인내심이 거의 소진되었다.“나 이렇게 오랫동안 너만을 사랑해 왔어. 그때의 너는 꽃보다 청순했던 걸 단 한시도 잊지 않았어. 나는 그때 너의 입술에 키스하는 엄두조차 나지 않았지. 우리가 헤어지고 나서야 네가 얼마나 지독한 년인지 알게 되었어...”“왜 다른 남자는 쉽게 너를 얻을 수 있는데 나는 안 돼? 내가 한이 맺혀서 그래. 그래서 너한테 이렇게 집착하는 거고. 나는 꿈에서라도 너를 갖기를 원해. 너를 얻기 위해 얼마나 나쁜 짓을 많이 했는지 알아? 나 심지어 엄청 착한 여자애에게 상처까지 줬어. 그런데 이제 와서 약속을 번복하겠다는 거야?”남자는 말할수록 손에 더 많은 힘을 주며 표독스러운 눈빛을 보였다.“나 자극하지 마. 아니면 너 끌어서라도 같이 죽을 거니까.”임채원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피식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강우혁, 왜 갑자기 통제 불능이
강우혁은 곤히 잠든 원이를 보더니 표정이 확 바뀌었다.“임채원, 미쳤어? 이젠 아이한테까지 손을 대? 성심 전당포는 어린아이가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야... 최소한의 선은 지켜야지. 하늘이 무섭지도 않아?”임채원은 그에게 ‘특수한’ 물건을 영흥 부둣가의 성심 전당포에 옮기라고 했다.성심 전당포에는 세계 각지의 진귀한 보물들이 모여있어, 겉으로는 평범한 전당포이지만, 사실 죄악이 모인 곳이었다.전당포의 사장은 범상치 않은 신분을 갖고 있었다. 일찍이 사람들에게 가장 소중한 물건만 저당한다면 그 어떤 소원도 이루어줄 수 있다고 선포했었다.어떤 사람들은 값진 보석으로 갈망하던 사랑을 얻었고, 어떤 사람들은 몸의 장기를 팔아 재부를 얻었다.아무튼... 전당포 사장이 원하는 물건만 갖고 있다면 어떤 소원이든 이룰 수 있었다.임채원이 원이를 저당하는 데 성공했다는 것은 전당포 사장과 어떤 합의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말해준다.이제 믿을만한 사람이 원이를 성심 전당포로 데려간다면, 거래는 정식으로 이루어진다!“솔직히 말해. 전당포 사장이 너한테 뭘 주기로 약속했어? 돈? 권력? 건강?”강우혁은 머리를 쥐어짜도 짐작할 수 없어 다급하게 말했다.“넌 다 가졌잖아. 하지만 이 꼬마의 인생은 이제 시작이야. 전당포에 넘어가면 인생을 망치게 된다고. 지금 멈춰도 늦지 않아, 다시 생각해 봐.”“하하!”임채원은 마치 오만한 공작새처럼 주황색 등불 아래에 꼿꼿하게 서서 비웃었다.“선을 넘는 일은 네가 더 많이 했어. 이제 와서 보살인 척 연기하기에는 좀 늦었다는 생각 안 해?”“넌 그래도 사랑하는 사람을 얻었으니, 이제 손을 떼려는 거잖아. 난 아무것도 못 가졌어. 사랑하는 남자는 이미 행방을 알 수 없고, 내가 동경하던 성가는 나를 불운한 존재로 여기고, 심지어 어머니가 될 기회조차 잃었어. 지금이라도 발버둥 치지 않으면 돌아가신 엄마가 체면을 구겼다고 밤낮으로 날 욕하고 때릴 거야. 그래서 최소한의 선이라는 게 뭔데? 먹는 거야?”요 몇 년 동안, 임채원은
“너도 마찬가지야.”임채원은 강우혁을 보고 비아냥거리며 원이를 보았다. 그녀의 심장은 바늘에 찔린 듯 괴로웠다.임채원은 심호흡을 하고, 주먹을 꽉 쥐며, 절대 마음 약해지지 않으려 다짐했다.“이번이 마지막이야. 일이 끝나면 약속대로 손에 있는 영상을 삭제하기를 바랄게. 우리 사이 빚은 청산하고, 서로 남남으로 살아가는 거야.”강우혁은 그렇게 말하고 원이를 안고 호텔을 나섰다.임채원은 자리에 서서 그들이 사라지는 방향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아무런 표정도 없고, 마치 영혼 없는 시체 같았다.그러더니 갑자기 쪼그리고 앉아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귀신에 홀린 듯 웃더니 땅바닥에서 뒹굴기까지 했다.“하하하, 임채원 꼴 좋다. 널 가장 사랑하는 사람조차 널 떠나버렸어. 넌 이제 아무것도 없어.”그녀는 비틀거리며 땅에서 일어서 거실에 있는 원이의 컵, 원이에게 사준 옷과 장난감을 보며 마음이 아팠지만 그 감정을 억지로 꾹 눌렀다.모든 걸 잃었으니 더더욱 질 수 없었다.‘차설아... 넌 이제 끝이야!’...강우혁은 어린 원이를 자기 차 뒷좌석에 편안히 앉히고 자상하게 담요를 덮어주었다.뽀송뽀송한 피부에 잘 생긴 얼굴의 원이는 정말 사랑스러웠다.원이를 곧 지옥 같은 성심 전당포로 보낼 생각을 하면 자기 자신을 때려죽이고 싶은 심정이었다.전당포의 사장 미스터 Q는 날이 밝기 전에 반드시 원이를 데려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약속을 어기면 임채원은 큰 보복을 당할 것이다.강우혁은 한참을 망설였지만, 결국 액셀을 밟았다.어두운 밤길을 유유히 지나며 강우혁은 깊은 정신적 갈등에 시달렸다.바로 이때, 배경윤에게서 전화가 왔다.강우혁은 미소를 짓더니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자기야, 드디어 나한테 화 풀었어? 나랑 헤어지지 않을 거야?”배경윤의 목소리는 한없이 차가웠다.“오해하지 마. 헤어지는 건 변함없어. 하지만 말을 잘 들으면 재결합할 수도 있어.”“내가 어떻게 해 줄까? 나 뭐든 할 수 있어!”강우혁은 진심으로 말했다.“솔직히 말할게.
“경윤아, 만약 네가 생각하는 만큼 내가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면, 심지어 나쁜 사람이라면, 나... 용서해줄 수 있어?”강우혁은 휴대폰을 움켜쥐고 떠보았다.“왜 그런 걸 물어? 역시 넌 좋은 사람이 아니었어!”배경윤의 말투가 예리해졌다.“하지만, 어떤 종류의 나쁜 사람인가에 달렸지. 만약 나한테만 나쁜 짓을 저질렀다면, 상황의 심각성에 따라서 용서해 줄지 생각해 볼게. 하지만 내 친구에게 상처를 줬다면, 미안하지만 난 절대 용서할 수 없어. 나한테 설아 언니는 영원히 최우선이고, 그 누구보다 소중해. 만약 이 선을 넘는다면 너랑 나랑은 완전히 끝이야, 알겠어?”배경윤과 배경수의 마음속에 차설아는 친한 친구일 뿐만 아니라, 제2의 생명을 준 은인이었다. 신과 같은 존재로 여겼기에, 그들은 최선을 다해 차설아를 지켜야 했다.강우혁은 그녀의 말을 듣고 표정이 굳어졌다.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그래, 알았어.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알겠어.”배경윤은 어리둥절했다.“그게 무슨 말이야? 앞뒤가 하나도 안 맞잖아. 그래서 그 친구한테 부탁하겠다는 거야, 말겠다는 거야?”“윤아, 미안해. 이 일은 내가 도와줄 수 없을 것 같아. 만약 이것 때문에 나랑 헤어지겠다면, 나도 붙잡지 않을게.”강우혁은 눈시울이 붉어지고, 눈물이 핑 돌더니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난 나쁜 놈이고, 쓰레기야. 난 백 번 천 번 죽어도 아깝지 않은 놈이야. 하지만 널 만난 것도, 널 사랑한 것도 후회하지 않아. 고마워, 날 구해줘서. 사랑해, 윤아!”“강우혁, 너 이 자식...”강우혁은 모질게 전화를 끊었고, 잘생긴 얼굴에는 벌써 눈물이 가득했다.사실 배경윤의 뜻은 분명했다. 지금 그녀에게 모든 것을 고백하고, 원이를 차설아의 손에 넘긴다면, 그들은 재결합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강우혁이 원이를 성심 전당포에 넘긴다면, 두 사람은 영원히 끝난 셈이다.강우혁은 배경윤을 사랑했으니 당연히 그녀와 헤어지기 싫었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의
원이는 중요한 정보를 남긴 후 즉시 전화를 끊었다. 경찰이 너무 빨리 위치를 알아내지 못하도록, 스마트 워치의 위치추적 시스템을 꺼놓았다.그리고, 원이는 호텔에서 나오면서 자신의 소지품을 두고 왔기에, 지금 경찰이 임채원을 잡으면, 그녀는 꽤 고생을 할 것이다.강우혁은 담배를 피우고 돌아와 보니 아이가 여전히 자는 것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정말 불쌍해.”강우혁은 가는 길에 주유소에 들렀고, 속도를 높여 달렸다.한밤중의 영흥 부둣가는 낮보다 더 시끌벅적하고 밝았다. 일반 사람들은 이 구역에 감히 발을 들여놓지 못했다.자칫 잘못하면 남자는 콩팥이 잘리고, 여자는 몸이 팔리는 곳이다. 원이처럼 희고 잘생긴 남자아이가 거리에 나간다면 뼈도 남지 않을 것이다!그래서 강우혁은 오는 내내 계속 전전긍긍했고, 발까지 벌벌 떨고 있었다.아쉽게도 성심 전당포와 불과 500m 떨어진 곳에서 누군가 길을 막았다.‘펑!’ 하는 소리와 함께 강우혁의 타이어는 펑크 났고, 큰 칼자루를 든 애꾸눈 남자가 다가와 껌을 씹으며 음산하게 웃었다.“젊은이, 한밤중에 감히 영흥 부둣가로 와? 간도 크지. 근데 어쩌나? 타이어가 펑크 나 버렸네? 그래도 운이 좋아. 나 같은 사람을 만났으니까. 내가 바꿔주지.”강우혁은 핸들을 꽉 잡고 차갑게 말했다.“고맙지만, 사양할게요. 예비 타이어가 있어요.”“내 타이어와는 전혀 비교가 안 될 텐데? 내 타이어는 영흥 부둣가 통행증이거든. 부둣가를 마음대로 다닐 수 있게 지켜주지. 아니면 타이어가 또 터질지도 몰라!”강우혁의 타이어는 이 남자의 못줄에 찔려 펑크 난 것이 분명했다. 대놓고 돈을 달라는 것이다.강우혁은 더 시간을 끌기 귀찮아 물었다.“당신 타이어는 얼만데요?”“그건 너한테 어떤 값어치 있는 물건이 있는가에 달렸지.”애꾸눈 남자는 껌을 씹으며 목을 쭉 뻗어 차 안을 훑어보았다. 귀한 물건을 찾으려다가 뒷좌석에 누워 자는 원이를 보고는 눈이 번쩍 뜨였다.“이 꼬마가 아주 값져 보이네. 희고 귀여운 것이 데려가서
“악!”원이의 갑작스러운 말에 안 그래도 전전긍긍하던 강우혁은 겁에 질려 말을 더듬었다.“너, 너, 깼어?”원이는 눈을 희번덕이더니 작은 얼굴로 침착하게 지휘했다.“바보! 난 진작에 깨났어요. 빨리 앞을 보고 액셀을 밟아요. 핸들을 좌회전 방향으로 끝까지 돌리고 그대로 뛰쳐나가면 돼요. 아니면 우리 모두 죽은 목숨이라고요!”원이는 원래 자는 척하려고 했지만, 강우혁이 너무 믿음직스럽지 못했다. 전방에서 차가 달려오는 걸 보면서도 전속력으로 피하지 않는 그의 모습을 보고 마음이 급해났다.“뭐? 너?”강우혁은 원이의 말에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전방 상황을 보니 확실히 원이의 말대로 움직여야 했다.강우혁은 더는 생각하지 않고 핸들을 잡고 말했다.“전속력으로 방향을 틀 거야. 꽉 잡아!”‘부릉부릉’ 소리가 부둣가 전체에 울리더니 차는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작은 틈새로 빠져나갈 기미가 보였다. 하지만 또 다른 차량이 하나 더 오더니 그들의 길을 완전히 막아버렸다.가장 비참한 것은, 방금의 전속력으로 펑크 난 타이어는 완전히 맛이 갔고, 새 타이어로 교체하지 않으면 전혀 작동할 수 없었다.“이제 어떡해?”강우혁은 핸들을 잡고 절망 속에 빠졌다. 강우혁 자신은 죽는 것이 두렵지 않지만, 원이가 애꾸눈 남자의 손에 들어가게 된다면 그 결과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다.“꼬마야, 아저씨가 문을 열 테니까 넌 빨리 내려서 성심 전당포로 뛰어가. 가서 네 이름을 말하면 그 사람은 널 지켜줄 거야.”성심 전당포는 사람들의 인식 속에 신분이 신비롭고 세력이 강한 곳이라고는 하지만, 사장 미스터 Q의 명성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원한이 있으면 반드시 갚고, 손맛이 매섭다는 것 외에는 어떤 변태적인 소문이 없었다.그래서 미스터 Q가 애꾸눈 남자보다는 안전할 것이다.“일단 아저씨부터 챙기고 말하죠? 창문 거의 부서지게 생겼어요.”원이는 창밖을 가리키며 담담한 표정으로 강우혁에게 말했다.애꾸눈 남자는 커다란 칼로 운전석 유리창을 두세 번 내리찍더니 바
성도윤은 차가워진 밤공기보다 소영금이 숨긴 사실이 더 궁금했다. 민이 이모는 젊었을 때부터 차씨 가문에서 일했기에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도 있었다.“조금 쌀쌀해지긴 했어요. 마침 추웠는데 가져다주셔서 감사해요.”성도윤은 문을 열면서 미소를 지었다.“도련님한테 괜히 제가 더 미안해져요. 설아 아가씨는 어릴 적부터 고집이 세고 뒤끝이 길거든요. 아직도 도련님한테 화가 났는지 계속 오두막에서 지내게 하네요. 이 이불을 덮으면 따뜻할 거예요.”민이 이모는 침대 위에 이불을 펴주면서 부드럽게 말했다.“이모님, 차씨 가문에서 일한 지 몇 년 되셨어요?”민이 이모는 멈칫하더니 어색하게 웃으면서 물었다.“갑자기 그런 건 왜 물으시는 거예요? 도련님이 궁금해할 줄은 몰랐어요.”“이모님처럼 한 가문에서 평생 일하시는 분은 드물잖아요. 게다가 진심으로 차씨 가문 사람들을 생각해 주고 보살펴주는 게 대단해서요.”“저는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에요. 회장님과 사모님이 저한테 아주 잘해주셨어요. 그래서 할 수 있을 때까지 일하는 거고요.”“설아한테서 들었는데 이모님은 대대로 의학을 전공했다면서요? 이모님 아버지는 이름을 날린 의사였고 이모님 실력도 훌륭하다고 들었어요. 사용인이 아니라 의학의 길을 걸으셨다면 더 큰 재부를 누리셨을 텐데, 미래를 포기하고 차씨 가문에 평생을 바쳤다는 게 정말 대단하고 멋져요.”“설아 아가씨가 과장해서 설명한 것 같아요. 저의 실력은 어디 내놓을 만큼 대단한 수준이 아니거든요. 긴급상황이 벌어지면 머리가 하얘져요. 그리고 누군가를 보살피는 게 더 적성에 맞고요. 설아 아가씨는 저를 가족의 일원으로 인정해 주셨어요. 설아 아가씨와 원이 도련님, 달이 아가씨를 보살피는 것만으로도 정말 행복해요.”민이 이모는 성도윤이 무언가를 물어보려고 한다는 것을 눈치채고는 말을 이었다.“도련님, 궁금한 것이 있으면 편하게 말씀하세요. 알고 있는 건 전부 알려드릴게요.”“역시 이모님은 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알고 계시네요.”성도윤은 어색하게
“무슨 사이냐고?”소영금은 성도윤이 이런 질문을 던질 줄 예상하지 못했는지 몹시 당황했다. 몇 초 후, 소영금은 애써 침착하게 대답했다.“무슨 사이긴, 사돈이지.”“엄마랑 설아 아버지는 그저 사돈 관계일 뿐이라고요?”성도윤은 소영금의 말을 믿지 않았다. 차설아의 아버지가 일기장에 기록한 내용을 보면 소영금과 차우진은 애틋한 사랑을 했던 사이였던 것이 분명했다.절대 단순한 사돈 관계가 아니었다.“도윤아, 지금 엄마를 의심하는 거야?”소영금은 덤덤하게 대답했지만 목소리에 분노가 깔려있었다.“그저 엄마한테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그렇지 않으면 불안해서...”“불안하다고?”소영금은 피식 웃더니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었다.“불안해할 필요 없어. 차설아는 너의 배다른 동생이 아니야. 네 동생이었다면 내가 너랑 차설아가 잘되게 계속 도와주었을 것 같아? 너도 참 단순하다니까...”“엄마는 내가 왜 불안해하는지 알고 있는 모양이네요. 엄마랑 설아 아버지는 예전에 연인 사이였던 거죠?”성도윤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그렇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어.”소영금은 긴 한숨을 내쉬면서 지난날들을 떠올렸다.“그 사람은 이미 하늘나라로 떠나갔어. 나도 살면 얼마나 더 살까? 시간 앞에서 과거는 한없이 초라하고 보잘것없단다. 지나간 일은 그저 지나가도록 내버려둬야 해. 이 일에 대해서 더는 묻지 마.”“하지만...”“도윤아, 늦었으니 너도 일찍 쉬어. 엄마는 늙어서 일찍 자지 않으면 다음 날에 기운이 없어. 너는 그저 설아랑 잘 지내고 차씨 가문과 성씨 가문의 인연을 계속 이어 나가면 돼. 알겠지?”소영금은 성도윤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해줄 수 있는 말이 별로 없었다.소영금은 차우진과 연관된 다른 얘기를 절대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 몇십 년을 거쳐 겨우 아문 상처를 꺼내면 곪아서 감당하기 힘든 고통을 느끼게 될 것이다.“알겠어요. 엄마, 시간 될 때 원이랑 달이를 보러 오세요. 네 식구가 함께 지내니까 얼마나 행복
그 뒤로는 전부 차씨 가문에서 벌어진 일이거나 소소한 일상이 담긴 내용이었다. 성도윤의 어머니가 언급되지 않은 일기에서 성도윤은 차설아가 어떻게 지내왔는지 알게 되었다.차설아의 부모님은 다정하고 상냥한 분이었고 차설아에게 모든 사랑을 퍼부으면서 행복하게 지냈다. 차씨 가문은 다른 재벌가보다 더 가족애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문이었다.성도윤은 미소를 지으면서 일기를 읽었다.“오늘은 우리 설아가 3살이 되는 날이다. 내 자식이지만 이렇게 사랑스럽게 클 줄 몰랐다. 설아는 다른 아이들과 사뭇 달랐다. 세 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벌써 블록을 조립하기 시작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500조각이 되는 블록을 이용해 집을 만들었다. 무려 두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총명한 기질이 드러나서 얼마나 뿌듯한지 모르겠다.”성도윤은 몇 페이지를 넘기고는 계속해서 읽었다.“시간이 흘러 어느덧 설아의 12살 생일을 맞이하게 되었다. 아내는 설아가 더 이상 어린 여자아이가 아니라고 했다.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나오지 않아서 걱정했는데 우리 설아에게도 그날이 찾아왔다. 설아는 여자라서 남자보다 더 많은 고통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대학교를 졸업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게 되면 지금 느끼는 것보다 수백 배 강한 고통을 느끼게 될 것이다. 아버지가 되어서 딸의 고통을 덜어주지 못한다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고 슬프다. 좋은 남자를 만나게 되면 그 남자에게 설아를 잘 부탁한다고 말해주고 싶다.”성도윤은 눈물을 흘리면서 읽어 내려갔다. 성도윤은 차설아에게 행복한 삶을 선물하지 못했고 차설아가 다치지 않게 보호해 주지도 못했다.성도윤은 자신이 좋은 남편이 아니라고 자책했다.“장인어른, 정말 죄송해요. 그동안 설아에게 너무 많은 상처를 주었지만 남은 생을 통해 반성하고 설아한테 모든 것을 쏟아부을 거예요. 설아를 보살피면서 행복하게 잘 살게요.”성도윤은 두 눈을 질끈 감고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두꺼운 일기장을 계속 펼쳐보았고 이상한 내용을 발견하지 못했다.그러나 마지막
차설아는 성도윤의 말을 듣더니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었다.“그럴 일 없으니까 꿈도 꾸지 말아요.”“알겠어. 이만 가볼게.”성도윤은 풀이 죽은 채 뒷마당에 있는 오두막으로 들어가서 휴식했다. 그리고 오전에 발견했던 그림 한 장이 계속 마음에 걸려서 뭐라도 찾으려고 했다.단서가 될 만한 것은 전부 차설아의 아버지가 쓰던 오두막 안에 있기 때문이다.만약 차설아의 아버지가 성도윤의 어머니를 사랑해서 그린 그림이라면 성도윤과 차설아가 한 가족이 될 가능성도 있었다.성도윤은 불안한 마음에 문을 안에서 잠그고 서재를 샅샅이 훑어보았다. 낡은 일기장이 유독 눈에 띄었는데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성도윤은 일기장을 손에 든 채 어쩔 줄 몰라 했다.‘장인어른의 일기장을 내가 봐도 되는 걸까? 하지만 보지 않으면 그 그림에 대해 설명할 수가 없어. 설아에게 전부 얘기해주기로 했으니까 확인해야 해.’주저하던 성도윤은 결국 자물쇠를 풀고 단서를 꼭 찾아야겠다고 다짐했다.자물쇠의 비밀번호는 소중한 사람의 생일로 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성도윤은 차설아의 아버지, 어머니, 차설아의 생일을 순서대로 입력했지만 자물쇠가 열리지 않았다.“설마 어머니의 생일은 아니겠지? 그, 그럴 리가 없어.”성도윤은 중얼거리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만약 일기장 자물쇠의 비밀번호가 성도윤의 어머니 생일이라면 드라마틱한 상황이 벌어질 것이 뻔했다.성도윤은 저도 모르게 손을 덜덜 떨었다.소영금의 생일은 3월 31일이었고 별자리는 전형적인 양자리였다. 솔직하고 화끈한 성격에 착한 마음씨를 지녀서 매력덩어리였다.성도윤이 소영금의 생일을 입력하자 자물쇠가 기적적으로 열렸다.“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성도윤은 차설아와 한 가족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머리가 하얘졌다. 그리고 잔뜩 긴장한 채 일기를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10월 17일, 날씨 맑음. 화창한 날씨와는 달리, 나의 마음속에 먹구름만 가득했다. 오늘은 나랑 영금이가 헤어진 지 5년이 되는 날이다. 나는 영금을 진작
차성철은 차설아를 설득할 수 없었기에 차설아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두었다.“설아야, 시간도 늦었으니 일찍 쉬어. 성도윤이 너한테 도움이 되면 이용해도 좋지만 계속 의지하고 기대면 결국 너만 힘들어져.”“그럼 도윤 씨랑 다시 만나도 간섭하지 않겠다는 뜻이야? 오빠는 역시 내 편이었어!”차설아는 신이 나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차성철과 성도윤 사이의 원한은 오래전부터 존재했었다. 그래서 차설아가 성도윤과 다시 만나게 되면 차성철이 극구 반대할 줄 알았다.하지만 차성철은 두 사람을 응원하기로 했다.“내가 반대해도 소용없다는 걸 알잖아. 어차피 네 선택이니 나는 너를 믿어보기로 했어. 성도윤과 싸우면서 둘 다 크게 다쳤지만 성도윤은 결국 나를 구해주었지. 이제는 원한 따위 내려놓아야 할 것 같아.”차성철은 흉터 회복 수술을 받은 후부터 성도윤을 향한 원망과 분노가 사그라들었다.게다가 두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고 의식을 되찾았기에 생명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되었다. 차설아가 살아만 있다면 다른 건 더 바라지 않는 오빠의 마음이었다.“오빠, 고맙고 사랑해. 오빠가 나를 응원해 주니까 마음이 놓여. 정말 다행이야!”차설아는 감동의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차성철이 반대할까 봐 성도윤을 다시 만난다는 소식을 차마 전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다른 차성철의 반응에 차설아는 감동했고 날아갈 듯이 기뻤다.“나는 응원해 준다고 한 적 없어. 성도윤이 믿음직스러운 남자인지 아닌지는 집으로 돌아가서 직접 보고 판단할 거야. 만약 내 마음에 들지 않게 행동한다면 집에서 내쫓을 테니까 각오하라고 전해. 내 동생이 좋아하는 남자라도 일단 내 눈에 들어야 해.”“알겠어. 오빠가 올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고 있을게. 오빠, 얼른 끝마치고 집으로 와.”차성철은 가라앉은 보물과 배를 찾고 당당하게 돌아가고 싶었다. 그래야만 성도윤과 대면했을 때 기죽지 않을 것이다.전화를 끊은 뒤, 차설아와 성도윤 사이에 오묘한 기류가 흘렀다. 차설아는 성도윤의 표정을
차설아는 성도윤이 대답하기도 전에 휴대폰을 재빨리 빼앗았다.“오빠도 얼른 쉬어. 나중에 또 연락할게.”차설아가 전화를 끊으려 하자 차성철은 한숨을 내쉬면서 대답했다.“그래. 상처가 아무니까 다쳤던 기억을 잊은 거겠지. 지금은 성도윤을 감싸고 돌아도 예전처럼 후회하게 될 거야.”“오빠, 그동안 도윤 씨랑 나 사이에 많은 일이 있었어. 하루라도 더 행복하게 지내고 싶은 내 마음이 과연 욕심일까? 그저 잠시라도 도윤 씨랑 함께하고 싶어. 도윤 씨 덕분에 요즘 정말 즐겁고 마음 편하게 지내고 있어.”차설아의 말에 슬픔이 가득 묻어있었다. 실명하고 나서 뒤바뀐 인생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런데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할 수도 없다면 차라리 죽어버리는 것이 나았다.차설아는 어둠 속에 갇혀있기보다 성도윤의 손을 잡고 같이 행복해지고 싶었다.“성도윤과 네가 계속 이대로 같이 지낼 수 있을 것 같아? 요즘 조사하면서 차씨 가문을 망하게 하려고 연합한 가문에 대한 자료를 찾아냈어. 우리가 상대할 사람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강하다고!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말이야.”차성철의 말이 무겁게 다가왔다. 차성철은 차설아한테 가문의 복수에 관한 얘기를 하지 않으려고 했었다. 그러나 매일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내다보면서 아무런 수확도 없이 외롭게 견디던 차성철은 지쳐갔다. 그래서 차설아에게 전부 털어놓으려고 했었다.“어느 가문인지 알아냈다는 뜻이야? 그 자료를 나도 한 번 봐야겠어. 상대가 누구든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차설아는 주먹을 꽉 쥔 채 격동된 어조로 말했다. 차설아는 실명했지만 부모님을 죽게 만든 원수를 두 손으로 직접 죽이고 싶었다.잘 나가다가 다른 가문의 함정에 빠져 몰락한 차씨 가문을 위해 목숨 걸고 복수하고 싶었다.“자료만 보고 알 수 있는 게 아니야. 집으로 돌아가서 천천히 설명할게. 이 일은 성도윤도 알아야 해.”차성철은 머뭇거리면서 말끝을 흐렸다.“도윤 씨도 알아야 한다고? 그럼 성씨 가문과 연관되어
성도윤은 일부러 특별한 호칭으로 차설아를 부르면서 다가갔다.“주인님, 무슨 일로 저를 부르셨어요?”“장난하지 말고 잘 들어요. 지금 아주 중요한 일이 있어요.”차설아가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조금 전에 오빠랑 통화하면서 부지런한 사용인을 구했다고 자랑했어요. 그런데 오빠는 당신이 나를 해칠까 봐 걱정하는 모양이더라고요. 다시 전화를 걸면 당신이 알아서 잘 대처하고 절대 신분을 들키면 안 돼요. 오빠의 심기를 건드리면 우리 둘 다 끝장이에요.”“나랑 다시 만나는 게 그렇게 부끄러워? 나를 당신의 남자라고 소개하기 싫어?”“그런 게 아니라 말하기 민망해서 그래요. 당신이랑 다시 만나지 않겠다고 했으면서 또 사랑하게 되었다고 말하면 오빠가 가만히 있을 것 같아요? 한두 번이 아니라 여러 번 큰소리쳐서 내 입장이 난처하게 되었어요.”차설아는 팔짱을 끼고 한숨을 내쉬었다.재벌가 아가씨로서 인간관계의 원칙을 칼같이 지켰었지만 성도윤을 만나고부터 모든 것이 뒤바뀌었다. 차설아는 성도윤 앞에만 서면 원칙을 어겼고 선을 넘었다.했던 말과 다르게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게 되었다.“내 목소리를 들으면 바로 들통날 텐데...”“그럼 일부러 가늘고 예쁜 목소리로 대화해봐요. 젊은 여자인 줄 알면 오빠도 더 의심하지 않을 거예요. 몇 마디만 하고 전화를 끊으면 돼요.”차설아는 말하면서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성도윤이 차성철을 속이길 바랐고 성도윤이 여자의 목소리를 따라 한다면 얼마나 웃길지 기대하고 있었다.“알겠어.”성도윤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미소를 지었다. 차설아가 전화를 건네자 곧바로 차성철에게 전화를 걸었다.“여보세요. 그쪽이 설아가 새로 들인 사용인이에요?”차성철은 엄숙한 어조로 말했다.“맞아요.”성도윤은 약속대로 여자의 목소리로 대화하지 않았다.“안녕하세요. 성도윤이에요.”“누, 누구라고요?”차성철은 기가 막혀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옆에 있던 차설아는 깜짝 놀라서 성도윤을 툭툭 쳤다.“도윤 씨,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오빠한
저녁 식사를 마친 뒤, 차설아는 차성철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동안 몸 상태가 좋지 않아서 차성철이 전화를 걸어올 때마다 핑계를 대며 다급히 끊었다.그러나 자신의 상황을 받아들이고 마음의 여유를 되찾은 지금, 차설아는 차성철과 덤덤하게 얘기를 나눌 수 있다고 생각했다.몇 초 후, 차성철이 전화를 받았다.“설아야,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너답지 않게 먼저 연락해서 놀랐어. 별일 없지?”차성철은 남부 지역에서 인력과 물자를 모아서 보물과 함께 가라앉은 배를 찾으려고 했었다. 배에 있던 보물은 하나도 찾지 못했고 차성철은 점점 지쳐갔다.차성철은 차설아가 해안시에서 혼자 지내다가 안 좋은 일이 생겨도 당장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늘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었다.그래서 차설아의 연락을 받고 마음이 더 무거워졌던 것이다. 차성철은 먼저 연락한 차설아를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차설아는 어려운 문제에 봉착하지 않은 이상, 먼저 차성철에게 연락할 리 없었다.“오빠, 그렇게 진지하게 물을 필요 없어. 기쁜 일이 생겨서 오빠한테 알려주려고 용기 내서 전화한 거야.”차설아는 소파에 편하게 누워서 다리를 꼬았다. 그러고는 미소를 지으면서 애교 섞인 어조로 말했다.“들어보니 기분이 좋은 모양이네. 무엇이 우리 설아를 기쁘게 했는지 들어나 볼까?”차성철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씩 웃으면서 대답했다.“음... 우리 집에 일도 잘하고 요리도 잘하는 사용인이 한 명 들어왔어. 월급을 적게 주는데도 군소리하지 않고 아주 부지런하게 일해. 오빠, 이런 사용인이 있어서 얼마나 편한지 몰라.”차설아는 드라마 여주인공처럼 수줍어했고 다른 사람에게 자꾸만 자랑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차성철과 성도윤은 원수 사이였기에 성도윤을 사용인이라고 둘러댔다.“그래? 네가 편하면 돼.”“너무 편해서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어. 어쩌다가 이런 사용인이 우리 집에 오게 된 건지...”“사용인을 쉽게 믿지 말고 계속 지켜봐. 집에서 너를 보살피는 사람인데 만약 겉모습에 속아서 경계하지
차설아는 깨어난 척하면서 기지개를 켜고는 성도윤이 떨어진 방향을 향해 말했다.“도, 도윤 씨? 도윤 씨가 어떻게 저의 방에 들어온 거예요? 그렇게 안 봤는데 진짜 변태 같아요. 그리고 장난감이라고 한 건 뭐죠? 도윤 씨가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알아듣지 못하겠어요.”성도윤은 차설아가 사실을 왜곡함으로써 자존심을 되찾는 모습을 보면서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검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고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당신 말대로 나는 뻔뻔스러운 변태 같은 남자야. 그래서 아이가 있는 여자의 방에 가만히 들어가서 장난감 역할을 자처하곤 했어. 주인님이 깨어났으니 이제는 주인님을 모시고 내려가서 음식을 대접해야지.”“음... 그래요. 푹 자서 그런지 기분이 좋아요. 당신의 상황극에 맞춰줄 테니 어서 옷부터 갈아입혀 줘요.”차설아는 긴 팔을 뻗고는 성도윤이 옷을 갈아입혀 주기를 기다렸다. 성도윤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안의 불을 켰고 편안한 잠옷을 찾아서 갈아입혀 주었다.두 사람은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이 붙어 섰고 애틋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차설아는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옷을 입은 뒤, 성도윤은 차설아의 가는 허리를 감싸면서 귓가에 속삭였다.“나를 유혹해 놓고 혼자 발 빼는 게 어디 있어? 당신이 모르는 척한다는 걸 다 알아. 나중에 우리 둘 다 몸이 회복하면 오늘 진 빚을 제대로 갚아야 할 거야. 알겠어?”“흥! 변태 같은 당신을 다시는 방 안에 들이지 않을 거예요. 이 손 치워요.”차설아는 장난스럽게 말하면서 성도윤의 팔을 툭 쳤다. 어릴 적부터 독하게 마음먹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 어른스럽게 행동했던 차설아는 여린 면을 내보이지 않았다.그러나 성도윤 앞에서는 마음이 편해져서 연약한 모습이거나 귀여운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다. 예전에 사도현이 차설아를 보면 ‘사랑스러운 여왕’이라고 불렀던 것도 그래서였다.차설아는 성도윤만 보면 저도 모르게 거만한 모습 대신 사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게 되었다. 그래서 부끄럽기도 하고 수치스럽기도 했다.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