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채원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문을 열었는데 문밖에 서 있는 사람은 바로 그녀에게 잘 보이려고 온갖 아부를 떨었던 강우혁이었다.“나 상 받으러 왔어!”강우혁은 눈이 벌게진 채로 곧장 임채원에게 달려들더니 난폭하게 그녀를 벽에 밀치고는 키스를 퍼붓기 시작했다.임채원은 두 손을 들어 무표정한 얼굴로 키스를 하는 남자를 바라봤는데 시큰둥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한바탕 키스가 끝나고 강우혁도 재미가 없는지 차가운 얼굴로 그녀를 놓아줬다.“그렇게 내가 싫으면 왜 그때 나에게 약속했어? 내가 임무만 잘 수행한다면 나한테 몸을 내어주겠다고 말이야.”그는 긴 손가락으로 부드럽고 하얀 그녀의 얼굴을 만지고는 사랑과 원한이 섞인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이를 악물었다.“넌 그저 아무 반응도 영혼도 없는 나무 같아. 나한테 상을 주는 거야? 아니면 수모를 안겨주는 거야?”임채원이 콧방귀를 뀌며 말을 이어갔다.“뭐가 그렇게 급해? 나 임채원은 약속을 지키는 여자라고. 너한테 약속한 건 반드시 내어줄게. 다만 지금은 아니야...”“또 핑계를 찾으려고 그래?”두 눈을 붉힌 강우혁은 인내심이 거의 소진되었다.“나 이렇게 오랫동안 너만을 사랑해 왔어. 그때의 너는 꽃보다 청순했던 걸 단 한시도 잊지 않았어. 나는 그때 너의 입술에 키스하는 엄두조차 나지 않았지. 우리가 헤어지고 나서야 네가 얼마나 지독한 년인지 알게 되었어...”“왜 다른 남자는 쉽게 너를 얻을 수 있는데 나는 안 돼? 내가 한이 맺혀서 그래. 그래서 너한테 이렇게 집착하는 거고. 나는 꿈에서라도 너를 갖기를 원해. 너를 얻기 위해 얼마나 나쁜 짓을 많이 했는지 알아? 나 심지어 엄청 착한 여자애에게 상처까지 줬어. 그런데 이제 와서 약속을 번복하겠다는 거야?”남자는 말할수록 손에 더 많은 힘을 주며 표독스러운 눈빛을 보였다.“나 자극하지 마. 아니면 너 끌어서라도 같이 죽을 거니까.”임채원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피식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강우혁, 왜 갑자기 통제 불능이
강우혁은 곤히 잠든 원이를 보더니 표정이 확 바뀌었다.“임채원, 미쳤어? 이젠 아이한테까지 손을 대? 성심 전당포는 어린아이가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야... 최소한의 선은 지켜야지. 하늘이 무섭지도 않아?”임채원은 그에게 ‘특수한’ 물건을 영흥 부둣가의 성심 전당포에 옮기라고 했다.성심 전당포에는 세계 각지의 진귀한 보물들이 모여있어, 겉으로는 평범한 전당포이지만, 사실 죄악이 모인 곳이었다.전당포의 사장은 범상치 않은 신분을 갖고 있었다. 일찍이 사람들에게 가장 소중한 물건만 저당한다면 그 어떤 소원도 이루어줄 수 있다고 선포했었다.어떤 사람들은 값진 보석으로 갈망하던 사랑을 얻었고, 어떤 사람들은 몸의 장기를 팔아 재부를 얻었다.아무튼... 전당포 사장이 원하는 물건만 갖고 있다면 어떤 소원이든 이룰 수 있었다.임채원이 원이를 저당하는 데 성공했다는 것은 전당포 사장과 어떤 합의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말해준다.이제 믿을만한 사람이 원이를 성심 전당포로 데려간다면, 거래는 정식으로 이루어진다!“솔직히 말해. 전당포 사장이 너한테 뭘 주기로 약속했어? 돈? 권력? 건강?”강우혁은 머리를 쥐어짜도 짐작할 수 없어 다급하게 말했다.“넌 다 가졌잖아. 하지만 이 꼬마의 인생은 이제 시작이야. 전당포에 넘어가면 인생을 망치게 된다고. 지금 멈춰도 늦지 않아, 다시 생각해 봐.”“하하!”임채원은 마치 오만한 공작새처럼 주황색 등불 아래에 꼿꼿하게 서서 비웃었다.“선을 넘는 일은 네가 더 많이 했어. 이제 와서 보살인 척 연기하기에는 좀 늦었다는 생각 안 해?”“넌 그래도 사랑하는 사람을 얻었으니, 이제 손을 떼려는 거잖아. 난 아무것도 못 가졌어. 사랑하는 남자는 이미 행방을 알 수 없고, 내가 동경하던 성가는 나를 불운한 존재로 여기고, 심지어 어머니가 될 기회조차 잃었어. 지금이라도 발버둥 치지 않으면 돌아가신 엄마가 체면을 구겼다고 밤낮으로 날 욕하고 때릴 거야. 그래서 최소한의 선이라는 게 뭔데? 먹는 거야?”요 몇 년 동안, 임채원은
“너도 마찬가지야.”임채원은 강우혁을 보고 비아냥거리며 원이를 보았다. 그녀의 심장은 바늘에 찔린 듯 괴로웠다.임채원은 심호흡을 하고, 주먹을 꽉 쥐며, 절대 마음 약해지지 않으려 다짐했다.“이번이 마지막이야. 일이 끝나면 약속대로 손에 있는 영상을 삭제하기를 바랄게. 우리 사이 빚은 청산하고, 서로 남남으로 살아가는 거야.”강우혁은 그렇게 말하고 원이를 안고 호텔을 나섰다.임채원은 자리에 서서 그들이 사라지는 방향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아무런 표정도 없고, 마치 영혼 없는 시체 같았다.그러더니 갑자기 쪼그리고 앉아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귀신에 홀린 듯 웃더니 땅바닥에서 뒹굴기까지 했다.“하하하, 임채원 꼴 좋다. 널 가장 사랑하는 사람조차 널 떠나버렸어. 넌 이제 아무것도 없어.”그녀는 비틀거리며 땅에서 일어서 거실에 있는 원이의 컵, 원이에게 사준 옷과 장난감을 보며 마음이 아팠지만 그 감정을 억지로 꾹 눌렀다.모든 걸 잃었으니 더더욱 질 수 없었다.‘차설아... 넌 이제 끝이야!’...강우혁은 어린 원이를 자기 차 뒷좌석에 편안히 앉히고 자상하게 담요를 덮어주었다.뽀송뽀송한 피부에 잘 생긴 얼굴의 원이는 정말 사랑스러웠다.원이를 곧 지옥 같은 성심 전당포로 보낼 생각을 하면 자기 자신을 때려죽이고 싶은 심정이었다.전당포의 사장 미스터 Q는 날이 밝기 전에 반드시 원이를 데려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약속을 어기면 임채원은 큰 보복을 당할 것이다.강우혁은 한참을 망설였지만, 결국 액셀을 밟았다.어두운 밤길을 유유히 지나며 강우혁은 깊은 정신적 갈등에 시달렸다.바로 이때, 배경윤에게서 전화가 왔다.강우혁은 미소를 짓더니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자기야, 드디어 나한테 화 풀었어? 나랑 헤어지지 않을 거야?”배경윤의 목소리는 한없이 차가웠다.“오해하지 마. 헤어지는 건 변함없어. 하지만 말을 잘 들으면 재결합할 수도 있어.”“내가 어떻게 해 줄까? 나 뭐든 할 수 있어!”강우혁은 진심으로 말했다.“솔직히 말할게.
“경윤아, 만약 네가 생각하는 만큼 내가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면, 심지어 나쁜 사람이라면, 나... 용서해줄 수 있어?”강우혁은 휴대폰을 움켜쥐고 떠보았다.“왜 그런 걸 물어? 역시 넌 좋은 사람이 아니었어!”배경윤의 말투가 예리해졌다.“하지만, 어떤 종류의 나쁜 사람인가에 달렸지. 만약 나한테만 나쁜 짓을 저질렀다면, 상황의 심각성에 따라서 용서해 줄지 생각해 볼게. 하지만 내 친구에게 상처를 줬다면, 미안하지만 난 절대 용서할 수 없어. 나한테 설아 언니는 영원히 최우선이고, 그 누구보다 소중해. 만약 이 선을 넘는다면 너랑 나랑은 완전히 끝이야, 알겠어?”배경윤과 배경수의 마음속에 차설아는 친한 친구일 뿐만 아니라, 제2의 생명을 준 은인이었다. 신과 같은 존재로 여겼기에, 그들은 최선을 다해 차설아를 지켜야 했다.강우혁은 그녀의 말을 듣고 표정이 굳어졌다.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그래, 알았어.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알겠어.”배경윤은 어리둥절했다.“그게 무슨 말이야? 앞뒤가 하나도 안 맞잖아. 그래서 그 친구한테 부탁하겠다는 거야, 말겠다는 거야?”“윤아, 미안해. 이 일은 내가 도와줄 수 없을 것 같아. 만약 이것 때문에 나랑 헤어지겠다면, 나도 붙잡지 않을게.”강우혁은 눈시울이 붉어지고, 눈물이 핑 돌더니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난 나쁜 놈이고, 쓰레기야. 난 백 번 천 번 죽어도 아깝지 않은 놈이야. 하지만 널 만난 것도, 널 사랑한 것도 후회하지 않아. 고마워, 날 구해줘서. 사랑해, 윤아!”“강우혁, 너 이 자식...”강우혁은 모질게 전화를 끊었고, 잘생긴 얼굴에는 벌써 눈물이 가득했다.사실 배경윤의 뜻은 분명했다. 지금 그녀에게 모든 것을 고백하고, 원이를 차설아의 손에 넘긴다면, 그들은 재결합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강우혁이 원이를 성심 전당포에 넘긴다면, 두 사람은 영원히 끝난 셈이다.강우혁은 배경윤을 사랑했으니 당연히 그녀와 헤어지기 싫었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의
원이는 중요한 정보를 남긴 후 즉시 전화를 끊었다. 경찰이 너무 빨리 위치를 알아내지 못하도록, 스마트 워치의 위치추적 시스템을 꺼놓았다.그리고, 원이는 호텔에서 나오면서 자신의 소지품을 두고 왔기에, 지금 경찰이 임채원을 잡으면, 그녀는 꽤 고생을 할 것이다.강우혁은 담배를 피우고 돌아와 보니 아이가 여전히 자는 것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정말 불쌍해.”강우혁은 가는 길에 주유소에 들렀고, 속도를 높여 달렸다.한밤중의 영흥 부둣가는 낮보다 더 시끌벅적하고 밝았다. 일반 사람들은 이 구역에 감히 발을 들여놓지 못했다.자칫 잘못하면 남자는 콩팥이 잘리고, 여자는 몸이 팔리는 곳이다. 원이처럼 희고 잘생긴 남자아이가 거리에 나간다면 뼈도 남지 않을 것이다!그래서 강우혁은 오는 내내 계속 전전긍긍했고, 발까지 벌벌 떨고 있었다.아쉽게도 성심 전당포와 불과 500m 떨어진 곳에서 누군가 길을 막았다.‘펑!’ 하는 소리와 함께 강우혁의 타이어는 펑크 났고, 큰 칼자루를 든 애꾸눈 남자가 다가와 껌을 씹으며 음산하게 웃었다.“젊은이, 한밤중에 감히 영흥 부둣가로 와? 간도 크지. 근데 어쩌나? 타이어가 펑크 나 버렸네? 그래도 운이 좋아. 나 같은 사람을 만났으니까. 내가 바꿔주지.”강우혁은 핸들을 꽉 잡고 차갑게 말했다.“고맙지만, 사양할게요. 예비 타이어가 있어요.”“내 타이어와는 전혀 비교가 안 될 텐데? 내 타이어는 영흥 부둣가 통행증이거든. 부둣가를 마음대로 다닐 수 있게 지켜주지. 아니면 타이어가 또 터질지도 몰라!”강우혁의 타이어는 이 남자의 못줄에 찔려 펑크 난 것이 분명했다. 대놓고 돈을 달라는 것이다.강우혁은 더 시간을 끌기 귀찮아 물었다.“당신 타이어는 얼만데요?”“그건 너한테 어떤 값어치 있는 물건이 있는가에 달렸지.”애꾸눈 남자는 껌을 씹으며 목을 쭉 뻗어 차 안을 훑어보았다. 귀한 물건을 찾으려다가 뒷좌석에 누워 자는 원이를 보고는 눈이 번쩍 뜨였다.“이 꼬마가 아주 값져 보이네. 희고 귀여운 것이 데려가서
“악!”원이의 갑작스러운 말에 안 그래도 전전긍긍하던 강우혁은 겁에 질려 말을 더듬었다.“너, 너, 깼어?”원이는 눈을 희번덕이더니 작은 얼굴로 침착하게 지휘했다.“바보! 난 진작에 깨났어요. 빨리 앞을 보고 액셀을 밟아요. 핸들을 좌회전 방향으로 끝까지 돌리고 그대로 뛰쳐나가면 돼요. 아니면 우리 모두 죽은 목숨이라고요!”원이는 원래 자는 척하려고 했지만, 강우혁이 너무 믿음직스럽지 못했다. 전방에서 차가 달려오는 걸 보면서도 전속력으로 피하지 않는 그의 모습을 보고 마음이 급해났다.“뭐? 너?”강우혁은 원이의 말에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전방 상황을 보니 확실히 원이의 말대로 움직여야 했다.강우혁은 더는 생각하지 않고 핸들을 잡고 말했다.“전속력으로 방향을 틀 거야. 꽉 잡아!”‘부릉부릉’ 소리가 부둣가 전체에 울리더니 차는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작은 틈새로 빠져나갈 기미가 보였다. 하지만 또 다른 차량이 하나 더 오더니 그들의 길을 완전히 막아버렸다.가장 비참한 것은, 방금의 전속력으로 펑크 난 타이어는 완전히 맛이 갔고, 새 타이어로 교체하지 않으면 전혀 작동할 수 없었다.“이제 어떡해?”강우혁은 핸들을 잡고 절망 속에 빠졌다. 강우혁 자신은 죽는 것이 두렵지 않지만, 원이가 애꾸눈 남자의 손에 들어가게 된다면 그 결과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다.“꼬마야, 아저씨가 문을 열 테니까 넌 빨리 내려서 성심 전당포로 뛰어가. 가서 네 이름을 말하면 그 사람은 널 지켜줄 거야.”성심 전당포는 사람들의 인식 속에 신분이 신비롭고 세력이 강한 곳이라고는 하지만, 사장 미스터 Q의 명성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원한이 있으면 반드시 갚고, 손맛이 매섭다는 것 외에는 어떤 변태적인 소문이 없었다.그래서 미스터 Q가 애꾸눈 남자보다는 안전할 것이다.“일단 아저씨부터 챙기고 말하죠? 창문 거의 부서지게 생겼어요.”원이는 창밖을 가리키며 담담한 표정으로 강우혁에게 말했다.애꾸눈 남자는 커다란 칼로 운전석 유리창을 두세 번 내리찍더니 바
애꾸눈 남자는 원이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 점차 인내심을 잃은 남자는 마치 병아리를 들 듯이 원이의 뒷깃을 들고 위협했다.“고분고분 얌전히 있는 게 좋을 거야. 아니면 너까지 얻어맞을지도 몰라!”“그거, 놔!”강우혁은 애꾸눈 남자를 막기 위해 힘겹게 몸을 일으켰지만 또 주먹을 맞고 날아가 버렸다.“이거 놓으라고요. 아니면 아저씨 끝장이에요!”원이는 화가 나서 다리를 바둥바둥하며 애꾸눈 남자의 차에 타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반항했다.“시끄러워 죽겠네! 쥐새끼만 한 게 진짜 매를 벌지!”애꾸눈 남자는 원이의 뺨을 때리려고 했다. 순간, 대형 오프로드 차량이 빠르게 달려와 그의 차를 멀리 보내버렸다.“젠장, 대체 어느 자식이...”애꾸눈 남자는 욕설을 퍼붓더니 차의 번호판을 보고는 다리가 후들거려 바로 무릎을 꿇으며 화를 내지 못했다.원이는 기회를 틈타 그의 손에서 벗어났다. 원이의 작은 그림자는 대형 오르포드 차량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고, 당당하게 고개를 들어 운전석 위치를 보았다.운전석 창문은 닫혀있었지만, 검은 바바리코트에 검은 선글라스를 낀 냉철한 분위기의 남자가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일제히 무릎을 꿇고 이마를 땅에 대고는, 마치 염라대왕이라도 만난 표정이었다.원이는 까치발을 하고, 희고 작은 손으로 창문을 두드렸다.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화가 난 듯했다.잠시 후, 창문이 천천히 내려졌다.“아저씨가 성심 전당포 사장이세요?”원이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차 안의 남자는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커다란 선글라스는 그의 얼굴을 거의 반쯤 가렸지만, 서늘한 분위기는 가릴 수 없었다.“네가 차진원이야?”남자는 덤덤하게 입을 열었고, 목소리는 아주 낮고 차가웠다.“맞아요, 본명은 차진원이고, 그저 원이라고 부르셔도 돼요.”원이는 허리를 펴고 차 안의 남자를 향해 말했다.“차에서 내리고 저랑 말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이건 최소한의 예의잖아요.”남자는 눈썹을 치켜올렸다.“내가 싫다면?”“그럼
원이는 마치 어른처럼 턱을 쥐고 얼굴을 찡그리더니, 곰곰이 생각한 끝에 겨우 까치발을 하고 미스터 Q의 손을 잡고는 진지하게 말했다.“잘못을 바로잡을 줄 아는 사람이니 친구 해도 되겠네요. 만나서 반가워요, 앞으로 잘 부탁해요.”남자의 차가운 입꼬리는 저도 모르게 좀 더 올라가더니, 몸도 조금 구부리고 최대한 아이에게 가까이 다가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만나서 반가워. 잘 부탁해.”원이는 4살짜리 아이치고 키가 꽤 큰 편이었지만, 1m 90㎝의 남자 앞에서 유난히 작았고, 언뜻 보면 남자의 다리보다 더 작아 보였다.키 차이가 큰 두 사람이 함께 서 있으니 왠지 모르게 어울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강우혁을 포함한 주변 사람들은 모두 멍해졌다.겨우 네 살인 원이가 침착하고 배짱이 큰 모습에 놀랐고, 모두가 두려워하는 염라대왕 미스터 Q에게 이렇게 따뜻한 면이 있다는 사실에 또 놀랐다.역시 사람은 외모로 평가하면 안 되고,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것이 훨씬 낫다!강우혁은 걷어차인 통증을 참으며 지금 혼자 떠나야 할지, 아니면 미스터 Q에게 꼬마를 놓아달라고 할지 고민했다.키 크고 잘생기고, 카리스마도 강력한 미스터 Q는 애꾸눈 남자보다 훨씬 정상으로 보였다. 아마 이치를 따지지 않는 변태적인 인간은 아닐 것이다.하지만, 강우혁이 입을 열기도 전에, 원이가 그에게 다가와 말했다.“절 성심 전당포로 데려다줬으니, 아저씨는 이미 임무를 완성했어요. 돌아가서 엄마한테 전 아주 잘 지낸다고, 심지어 친구까지 사귀었으니 당분간 돌아가지 못한다고 전해주세요.”강우혁은 또 한 번 충격을 받고 당황했다.“꼬, 꼬마야.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여긴 아주 위험한 곳이야. 네가 사귄 친구도 보통 사람이 아니고. 그냥 놓아달라고 사정을 하고 빨리 엄마한테로 돌아가는 게 어때? 아마 크게 걱정하고 계실 거야!”“걱정 마세요. 제가 처음 실종된 것도 아니고, 우리 엄마는 아주 강하다고요. 제가 새 친구와 충분히 놀면 알아서 돌아간다고
바람은 얇은 셔츠를 입고 서 있었고 어깨를 으쓱하면서 말했다.“네가 여기에 앉았을 때부터 뒤에 숨어있었어.”“너 바보야? 6시간 동안 가만히 앉아 있는다는 게 얼마나 힘든지 몰라?”차설아는 투덜거리면서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바람은 차설아의 곁에 앉으면서 미소를 지었다.“힘든 줄 모르니까 이 시간까지 앉아 있었던 거겠지.”“난 생각할 것이 있어서 시간 가는 줄도 몰랐어.”“나도 똑같아. 네 얼굴을 보고만 있어도 재밌어서 계속 쳐다보고 싶었어. 6시간이나 지난 줄 몰랐거든.”“그런 장난도 지긋지긋하다.”차설아는 바람을 주먹으로 때리고는 긴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오후에 있었던 일은 정말 미안하게 생각해. 오빠 생각에 미쳐서 주변 사람들을 전부 의심했던 것 같아. 네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어도 그랬을 거야. 그러니까 마음에 두지 말았으면 좋겠어...”차설아의 말에 바람이 피식 웃더니 입을 열었다.“사과하지 않아도 돼. 난 신비한 컨셉이라 의심받은 적이 셀 수 없을 만큼 많거든. 그러니까 자책하지 마. 네가 속상해하면 마음이 너무 아프거든...”바람은 차설아가 죄책감 때문에 자신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사실 바람은 누구한테 의심받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바람의 유일한 목표는 차설아와 결혼해서 선우 가문을 빛내려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나쁜 짓을 하든 암암리에 손을 쓰든 중요하지 않았다. 차설아의 마음을 얻을 수만 있다면 바람은 무슨 짓이든 할 것이다.“누가 자책했다고 그래. 넌 여우처럼 교활하니까 당연히 의심받지. 아무도 너의 속내를 꿰뚫어 보지 못하잖아.”차설아는 바람의 이마를 툭 치면서 말을 이었다.“우리 둘이 그저 해커였다면 얼마나 좋을까? 시합에 참가해서 상금을 타고 돈이나 벌었으면 복잡한 가문의 일을 해결하지 않아도 되잖아. 복수할 것도 없으니 해커 활동이나 하면서 편안하게 지냈으면 되었을 텐데 말이야.”“생각해 보면 너랑 같이 시합에 참가해서 겨루던 날들이 제일 재밌었어.”바람은 잔잔한 호수를 바라보
병실을 나선 배경윤은 차설아를 데리고 비상계단 쪽으로 향했다.“그 반지... 성도윤이 끼고 있던 거지?”“맞아.”차설아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나한테 숨기는 거 있어? 저번부터 표정이 안 좋더라.”“그, 그러니까...”배경윤은 더 이상 숨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모든 것을 털어놓기로 마음먹었다.“성철 오빠가 수술을 받고 의식을 잃은 뒤에 누군가가 일부러 손을 쓴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성형 병원으로 다시 찾아갔고 간호사한테서 단서를 찾은 거야.”“단서라니?”차설아가 인상을 찌푸리고는 잔뜩 긴장한 채 물었다.“간호사의 말에 의하면 성철 오빠가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에 의사가 윤설이랑 통화했다는 거야. 깔끔하게 처리하라고 했대. 그래서 나는 윤설이 촬영하는 곳까지 찾아가서 따졌고 윤설은 성도윤의 지시를 받은 것이라고 말하더라고...”배경윤은 긴 한숨을 내쉬더니 말을 이었다.“윤설이 일부러 거짓 정보를 흘렸을까 봐 증거를 더 모은 뒤에 너한테 알려주려고 했어. 그런데 갑자기 성도윤의 반지를 발견했으니 숨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어.”“경윤아, 고마워. 사실 네가 알려주기 전부터 나는 줄곧 의심하고 있었어. 하지만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너무 힘들었어. 그래서 성도윤이 그 정도로 나쁜 사람은 아닐 거라고 나 자신을 속이고 있었던 거야.”“설아야, 너랑 성도윤은 아무 잘못도 없어. 성도윤은 너를 완전히 잊었으니 나처럼 그저 아는 사람일 뿐인 거야. 성도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하는 사람이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해.”배경윤은 차설아의 어깨를 토닥이면서 위로해 주었다.“나, 나도 알아... 성도윤은 진작에 날 잊었지만 난 희망의 끈을 놓지 못하고 나를 기억해 주길 바랐어. 전부 내 탓이야!”차설아는 심호흡하면서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눈물을 삼켰다.“그럼 이제는 어떻게 할 생각이야? 성도윤과 맞서려고?”배경윤의 말에 차설아는 벽에 기대 한숨을 내쉬고는 차갑게 웃었다.“나도 잘 모르겠어. 오
“설아야...”차성철이 천천히 손을 뻗더니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설아야, 그동안 나 때문에 힘들었지? 정말 고생했어. 미안해...”“오빠, 그런 말 하지 마. 오빠가 깨어날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어!”차설아는 차성철이 누워있는 병실 침대맡에 꿇어앉아 눈물을 흘렸다.“사실 의식을 잃었다는 걸 알고 있었어. 작은 상자에 갇힌 채로 꼼짝도 하지 못했던 거야. 상자를 열지 못해서 이 안에서 죽는 줄 알았거든. 그런데 자꾸 네 생각이 나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어. 난 하느님께 정말 감사해. 나에게 기회를 주어서 널 다시 만나게 되었으니 말이야.”차성철이 울먹이면서 말했다. 이번 사고로 인해 차성철은 많이 변했다. 예전처럼 날카롭고 예민하게 굴지 않았고 한결 부드러워졌고 말투도 다정해졌다.“뭘 자꾸 그런 말을 해! 오빠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면서 우리 달이랑 원이가 커서 결혼하는 모습을 봐야지. 손주도 봐야 하는데 불길한 말은 하지 마. 오빠는 그냥 오래 잠들어 있다가 깨어난 거야. 하느님의 힘을 빌릴 정도까지는 아니었어. 다시 깨어나 줘서 정말 고마워... 오빠가 너무 보고 싶었어.”차설아는 눈물을 닦으면서 차성철을 와락 안았다.“그래. 너랑 달이, 원이를 위해서라도 건강하게 지내야지. 앞으로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가자. 우리 가족 모두 모여서 재밌게 지내자. 네가 하고 싶었던 걸 같이 하고 가족 여행도 가자.”“말한 대로 해야 해. 지금 약속하자. 앞으로 오빠가 또 다치면 다시는 나 못 볼 줄 알아! 그때는 오빠를 용서하지 않을 거야.”남매는 새끼손가락을 걸고 눈물의 약속을 했다. 보는 사람마저 눈물이 나는 광경이었다. 배경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물만 흘렸다. 배경윤은 배경수가 생각났던 것이다.차설아의 말에 의하면 배경수는 아주 멀리 떨어진 마을에서 처음 보는 여자와 결혼했다. 배경윤은 배경수가 걱정되었다. 차설아는 울다가 차성철이 베고 있는 베개의 아래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은반지였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값이 꽤 되는
바람이 멈칫하더니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뭐, 뭐라고?”“네가 스파이지? 네가 사주받고 우리 오빠를 죽이려고 한 거잖아! 그렇지 않으면 왜 우리가 식당에 간 사이에 오빠한테 이런 일이 벌어진 거냐고!”차설아는 붉어진 두 눈을 하고서 물었다. 그동안 차성철의 상태에 대해 아는 사람은 바람과 차설아 두 사람뿐이었다.‘아무리 바람이 날 보살펴 주고 내 곁을 지켰다고 해도 누군가가 바람한테 지시해서 나를 감시하는 것일 수도 있잖아. 내가 방심한 틈을 타서... 그래. 바람은 선우 가문 사람이니까 가문의 이익을 위해서 오빠를 죽이려고 했을 수도 있어. 그러면 차씨 가문의 자리를 빼앗을 수도 있으니까!’배경윤이 차설아를 뜯어말렸다.“설아야, 말이 좀 심하다? 바람 씨가 어떻게 사주를 받고 그랬을 수가 있어. 네 말이 사실이라면 바람 씨가 너한테 온갖 심혈을 쏟아부을 리가 없잖아. 성철 오빠를 죽일 생각이었다면 진작에 움직였겠지. 바람 씨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차설아는 고개를 돌려 배경윤을 쳐다보며 물었다.“넌 알고 있었지?”“그, 그게...”배경윤은 주먹을 꽉 쥔 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이때 의사와 간호사들이 병실에서 걸어 나왔다.“의사 선생님, 오빠 어떻게 되었어요?”차설아는 사건의 배후에 대한 생각을 뒤로 하고 의사한테 다가가 물었다.“제때 발견한 덕분에 환자의 목숨을 살릴 수 있었어요. 호흡도 정상적으로 돌아왔으니 걱정하지 마세요.”“다행이에요. 정말 감사해요...”차설아는 식은땀을 흘리면서 고개 숙여 인사했다. 최근 차설아는 감정 기복이 심해서 울었다 웃기를 반복했다. 몸에 무리가 가면서 차설아도 점점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들어가 봐도 돼요. 박 선생님의 말씀대로 곧 깨어날 것 같거든요.”의사의 말에 차설아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감사해요!”차설아는 병실로 들어가 차성철을 바라보았다. 배경윤도 그 뒤를 따라갔지만 바람은 굳은 표정을 하고서 밖에 서 있었다.“바람 씨, 거기서 뭐 해?”배경윤이 고개를 돌려
검은 그림자는 다름 아닌 서씨 가문 서은아였다. 서은아는 그동안 차설아를 감시하고 있었다. 차설아가 식당에 밥 먹으러 간 사이에 차성철이 있는 병실을 책임지는 간호사에게 돈을 쥐여주었고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수술을 마친 뒤, 침대에 누워 간신히 숨을 쉬고 있는 차성철은 살짝 다쳐도 부서질 것처럼 나약해 보였다. 서은아는 병실 침대 앞에 서서 한참을 쳐다보다가 작은 물건을 차성철 베개 옆에 올려놓고는 산소마스크를 벗겼다.“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지만 미안해. 당신이 식물인간이 되면 당신 여동생도 기가 죽어서 나대지 못할 거라고 믿었어. 그런데 박성훈이 와서 당신을 살렸지 뭐야? 성도윤이 박성훈한테 부탁한 거라면서? 정말 어이가 없더라. 보나 마나 차설아가 성도윤한테 부탁한 거겠지. 뻔뻔스러운 년이...”서은아의 눈에 살기가 돌았다.“날 탓하지 마. 탓하려면 그 못난 여동생을 탓해. 차설아는 내가 성도윤과 약혼한 사이란 것을 알고 있으면서 성도윤한테 달라붙으면서 날 괴롭혔어. 동생이 저지른 잘못은 오빠인 당신이 책임져야지. 안 그래?”서은아는 말을 마친 뒤, 감시 카메라를 피해 조용히 병원을 나섰다. 식당에 앉아 있던 차설아는 바람이 포장한 음식을 보면서도 어쩐지 불안해서 먹고 싶지 않았다.“설아야, 네가 제일 좋아하는 탕수육이야. 다른 식당에서 하는 건 눅눅해서 맛없지만 이 식당에서 하는 건 바삭하잖아. 바람 씨가 널 위해서 사 온 건데, 한 입이라도 먹어 봐.”배경윤은 불안해하는 차설아와 맞은편에 앉아 있는 바람을 번갈아 보면서 말했다.“이 식당에 줄을 서려고 아침 일찍 깨어났어. 하지만 스파크가 좋아하는 거라면 눈이 오든 비가 내리든 사러 가야지.”바람이 머리를 긁적이더니 피식 웃었다. 그동안 차설아에게 밥을 먹이기 위해 온갖 시도를 해보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쯧쯧. 바람 씨한테 설아를 맡겼다가는 뚱보가 되겠어. 한 달 안에 10킬로 찐다는 것에 내 머리카락을 걸겠어.”“스파크는 살이 쪄도 예뻐서 괜찮아. 지금처럼 귀여울 거
배경윤은 박성훈을 노려보면서 말했다. 박성훈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성도윤이 데려온 의사라는 말에 성도윤처럼 나쁜 사람인 줄 알고 경계했다.“경윤아, 그러지 마. 박 선생님은 며칠 동안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오빠를 위해서 최선을 다해준 분이야. 오빠가 깨어날 수만 있다면 차씨 가문의 은인이 될 분이거든.”차설아는 다시 일어나더니 박성훈한테 허리를 숙여 공손히 인사했다.“박 선생님, 죄송해요. 경윤이는 늘 저를 아껴주고 보호해 주는 사람이라 이런 일에서는 예민하게 굴거든요. 나쁜 뜻으로 하는 말은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괜찮아요. 병원에서는 예민할 수밖에 없죠. 만나본 보호자 중에서 제일 정상적인 반응이거든요. 저는 이해해요.”박성훈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저 말고 성 대표님께 고맙다고 해야죠. 저는 수술할 생각이 없었는데 성 대표님이 간절하게 부탁했고 제가 좋아하는 바다낚시까지 같이 해주셔서 거절할 수가 없었어요. 게다가 바다낚시 내기에서도 졌으니 성 대표님 말대로 수술해야 했어요.”“성도윤이 어렵게 모신 분인 건 알고 있었어요. 나중에 오빠가 깨어나면 인사하려고요.”“잘 생각했어요.”박성훈이 차설아의 어깨를 토닥이더니 말을 이었다.“생각이 많으면 마음이 힘들 거예요. 사실 생각처럼 최악의 상황까지 가는 일은 없으니 마음 편안하게 먹고 환자분이 깨어나길 기다리세요.”말을 마친 박성훈은 사무실로 돌아가서 옷을 갈아입었다. 지금 오후 4시라서 박성훈이 말한 시간까지는 아직도 4시간이나 남아있었다. 배경윤은 차설아가 또 쓰러질까 봐 걱정되었다.“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밥부터 먹자.”“괜찮아. 난 배고프지 않아. 오빠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고 싶어. 오빠가 일어나야 내 마음도 편해질 것 같아.”차설아는 병실 밖에 서서 침대에 누워있는 차성철을 바라보며 말했다.“너 이러다가 또 쓰러지면 어쩌려고 그래? 오빠도 네가 이러는 걸 원하지 않을 거야.”차설아는 고개를 돌려 배경윤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배경윤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설마 네가 말한 사람이 그 나쁜 놈은 아니겠지? 아니라고 말해.”차설아가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그 사람 말고 또 누가 있겠어. 그래도 도움받았잖아.”“아...”배경윤은 주먹을 꽉 쥔 채 머뭇거렸다. 차설아한테 사실대로 말해야 할지 고민되는 순간이었다. 이 사고는 목적, 증언, 사건 발생 시간으로 보았을 때 성도윤이 배후일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하지만 확실한 증거 없이 성도윤을 범인으로 몰아갈 수 없었다. 만약 이 말을 꺼냈다가 차설아와 성도윤이 싸우게 된다면 손해 보는 건 차설아일 것이다. 하지만 사실대로 솔직하게 말하지 않으면 성도윤이 또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일이었다.“설아야, 그저 네가 걱정되어서 하는 말인데 성도윤을 너무 믿지 마. 성도윤이 어떤 사람인지 네가 제일 잘 알잖아. 진심을 드러내지 말고 계속 지켜보는 게 좋을 것 같아. 알겠지?”배경윤은 머뭇거리다가 결국 직설적으로 말하지 못했다.“나도 알아. 지금까지 성도윤을 용서한 적 단 한 번도 없어. 오빠 얼굴에 남은 흉터를 볼 때마다 성도윤이 떠올라서 화가 솟구쳐 오르거든... 성도윤이랑 잘 해볼 생각이 아니라 그저 좋은 의사를 데려와 주어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을 뿐이야. 네가 걱정하는 일은 없을 거야.”차설아는 수술실을 바라보면서 말했고 눈시울이 점점 붉어졌다. 눈에 핏줄이 가득 서렸지만 차성철이 나올 때까지 쉴 수 없었다. 성도윤에 관한 생각을 하면 할수록 차설아의 마음이 아팠기에 더는 신경 쓰지 않았고 애매모호한 선을 넘지 않았다. 지금처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더 마주치지 않는 것이 두 사람을 위한 일이었다.“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야. 더 이상 그 사람과 엮이고 싶어 하지 않는 건 알지만 항상 경계해야 해. 그 사람이 얼마나...”“알겠어. 곧 수술이 끝날 테니 다른 건 생각하지 말고 오빠가 무사히 나오기를 바라면서 기다리자.”차설아는 배경윤의 말을 끊었다.“그래. 같이 기다려보자.”배경윤은 슬픔이 가득 서려 있는 차
사도현은 턱을 쳐들더니 거만하게 말했다.“내가 바로 배경윤 남자 친구예요.”사도현의 말에 같이 식사하던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두 사람이 보통 사이가 아닌 것은 알고 있었지만 연예계에서 알아주는 회사 대표가 당당하게 공개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뭐?”배경윤은 어이가 없었다. 사도현이 미친 짓을 저지를 줄 예상 못했는지 사도현을 향해 부르짖었다.“사도현, 너 정말 미친 거야? 장난이 너무 심하잖아!”‘헤어진 지 얼마나 지났는데 이제 와서 남자 친구라고? 게다가 내가 좋아하는 찬영 오빠 앞에서 공개하다니... 정말 제대로 미친놈이구나. 내 미래의 남자 친구가 될 수도 있는 사람한테 알려주려고 작정한 거야!’“내 말이 틀렸어? 우리 사귀는 사이 맞잖아. 그렇지 않으면 이곳에 온 첫 번째 날에 어떻게 같은 방, 같은 침대에서 잤겠어?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을 텐데 말이야.”사도현이 피식 웃더니 부르짖는 배경윤을 보면서 만족감을 느꼈다. 배경윤의 시선을 느끼면서 이제야 자신의 것을 되찾은 것 같았다.“그, 그건...”배경윤은 말문이 막혔다. 설명하면 할수록 말려드는 것 같아서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이때 진찬영이 입술을 깨물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만약 두 사람이 한방에 들어가는 것이 사귄다는 증거라면, 사도현 씨는 배경윤 씨가 아니라 윤설 씨의 남자 친구인 것 같은데요? 윤설 씨 곁을 떠난 적이 없잖아요. 도대체 두 분 중에서 누구의 남자 친구인지 헷갈리네요. 아니면 두 분을 속여서 양다리를 걸친 게 아닐까 싶어요.”진찬영의 말을 들은 배경윤은 반격할 수 있는 틈을 찾았다. 그러고는 도덕적인 면에서 사도현을 비난하기 시작했다.“맞아요! 같은 방을 쓰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라 그날에 남은 방이 하나밖에 없어서 그랬어요. 우리 두 사람 모두 외양간에서 자기 싫었거든요. 그날 밤에 아무 일도 없었지만 윤설 씨랑 사도현 씨 사이는 각별했어요. 정성을 다해서 보살핀 여자랑 사귀는 것 같은데 왜 나를 언급하고 난리야! 난 너처럼 미친놈이랑 사귈 바
그 말을 들은 장윤태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장윤태가 다급히 뜯어말렸다.“집에 갈 정도로 싫으면 안 하면 되는 거죠! 그런 설정을 할 생각도 없었어요. 찬영이도 커플 설정을 원하지 않을 테니 강요할 수 없었거든요. 다들 장난치는 거니까 마음에 담아두지 말아요.”장윤태는 게스트들이 말하는 커플 중 한 쌍이 진찬영과 배경윤임을 확신했다. 옆에 앉아 있던 사도현은 굳은 표정으로 진찬영을 노려보고 있었다.“장 감독님, 그것 때문에 이러는 거 아니에요.”배경윤이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개인적인 일로 해안시에 다시 돌아가야 해요. 프로그램 촬영하는 동안 정말 재밌었어요. 게다가 찬영 오빠랑 커플로 촬영할 수 있다고 하면 더 행복했을 거예요.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돌아가야 해요.”“잘생긴 남자라면 다 좋아하나 보지?”말을 마친 사도현은 혼자서 술을 벌컥벌컥 마셨다. 장윤태는 배경윤을 설득하지 못하자 재빨리 다른 제안을 했다.“급한 일이 있으니 어쩔 수 없죠. 곧 연애 예능 촬영이 있는데 그때 시간이 되면 우리 찬영이랑 같이 게스트로 출연하지 않을래요?”“좋아요!”배경윤은 망설임 없이 동의했다. 진찬영과 함께 촬영할 수 있다면 무슨 프로그램이든지 무조건 출연할 것이다. 진찬영과 떨어지려니 아쉬웠지만 돌아가서 차설아의 곁을 지켜야 했기에 어쩔 수 없이 작별 인사를 했다.“배경윤 씨랑 같이 출연한다면 저도 좋아요.”진찬영은 배경윤을 향해 말했다. 애초에 진찬영은 배경윤이 출연한다는 소식에 이 마을까지 달려왔던 것이다. 그러기에 배경윤이 있는 곳에 꼭 따라갈 것이다.“그럼 두 사람이 사인한 계약서 말고 다른 계약서를 준비할 테니 이제 만나서 얘기해요. 조건을 구체적으로 적으면 이 프로그램 계약서대로 하지 않아도 법적 책임을 지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요.”장윤태는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너무 기쁜 나머지 술을 마시면서 껄껄 웃었다.“안 돼요.”사도현이 차갑게 말했다.“배경윤은 너무 바빠서 연애 프로그램에 출연할 시간이 없을 거예요.”배경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