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꾸눈 남자는 원이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 점차 인내심을 잃은 남자는 마치 병아리를 들 듯이 원이의 뒷깃을 들고 위협했다.“고분고분 얌전히 있는 게 좋을 거야. 아니면 너까지 얻어맞을지도 몰라!”“그거, 놔!”강우혁은 애꾸눈 남자를 막기 위해 힘겹게 몸을 일으켰지만 또 주먹을 맞고 날아가 버렸다.“이거 놓으라고요. 아니면 아저씨 끝장이에요!”원이는 화가 나서 다리를 바둥바둥하며 애꾸눈 남자의 차에 타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반항했다.“시끄러워 죽겠네! 쥐새끼만 한 게 진짜 매를 벌지!”애꾸눈 남자는 원이의 뺨을 때리려고 했다. 순간, 대형 오프로드 차량이 빠르게 달려와 그의 차를 멀리 보내버렸다.“젠장, 대체 어느 자식이...”애꾸눈 남자는 욕설을 퍼붓더니 차의 번호판을 보고는 다리가 후들거려 바로 무릎을 꿇으며 화를 내지 못했다.원이는 기회를 틈타 그의 손에서 벗어났다. 원이의 작은 그림자는 대형 오르포드 차량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고, 당당하게 고개를 들어 운전석 위치를 보았다.운전석 창문은 닫혀있었지만, 검은 바바리코트에 검은 선글라스를 낀 냉철한 분위기의 남자가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일제히 무릎을 꿇고 이마를 땅에 대고는, 마치 염라대왕이라도 만난 표정이었다.원이는 까치발을 하고, 희고 작은 손으로 창문을 두드렸다.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화가 난 듯했다.잠시 후, 창문이 천천히 내려졌다.“아저씨가 성심 전당포 사장이세요?”원이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차 안의 남자는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커다란 선글라스는 그의 얼굴을 거의 반쯤 가렸지만, 서늘한 분위기는 가릴 수 없었다.“네가 차진원이야?”남자는 덤덤하게 입을 열었고, 목소리는 아주 낮고 차가웠다.“맞아요, 본명은 차진원이고, 그저 원이라고 부르셔도 돼요.”원이는 허리를 펴고 차 안의 남자를 향해 말했다.“차에서 내리고 저랑 말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이건 최소한의 예의잖아요.”남자는 눈썹을 치켜올렸다.“내가 싫다면?”“그럼
원이는 마치 어른처럼 턱을 쥐고 얼굴을 찡그리더니, 곰곰이 생각한 끝에 겨우 까치발을 하고 미스터 Q의 손을 잡고는 진지하게 말했다.“잘못을 바로잡을 줄 아는 사람이니 친구 해도 되겠네요. 만나서 반가워요, 앞으로 잘 부탁해요.”남자의 차가운 입꼬리는 저도 모르게 좀 더 올라가더니, 몸도 조금 구부리고 최대한 아이에게 가까이 다가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만나서 반가워. 잘 부탁해.”원이는 4살짜리 아이치고 키가 꽤 큰 편이었지만, 1m 90㎝의 남자 앞에서 유난히 작았고, 언뜻 보면 남자의 다리보다 더 작아 보였다.키 차이가 큰 두 사람이 함께 서 있으니 왠지 모르게 어울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강우혁을 포함한 주변 사람들은 모두 멍해졌다.겨우 네 살인 원이가 침착하고 배짱이 큰 모습에 놀랐고, 모두가 두려워하는 염라대왕 미스터 Q에게 이렇게 따뜻한 면이 있다는 사실에 또 놀랐다.역시 사람은 외모로 평가하면 안 되고,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것이 훨씬 낫다!강우혁은 걷어차인 통증을 참으며 지금 혼자 떠나야 할지, 아니면 미스터 Q에게 꼬마를 놓아달라고 할지 고민했다.키 크고 잘생기고, 카리스마도 강력한 미스터 Q는 애꾸눈 남자보다 훨씬 정상으로 보였다. 아마 이치를 따지지 않는 변태적인 인간은 아닐 것이다.하지만, 강우혁이 입을 열기도 전에, 원이가 그에게 다가와 말했다.“절 성심 전당포로 데려다줬으니, 아저씨는 이미 임무를 완성했어요. 돌아가서 엄마한테 전 아주 잘 지낸다고, 심지어 친구까지 사귀었으니 당분간 돌아가지 못한다고 전해주세요.”강우혁은 또 한 번 충격을 받고 당황했다.“꼬, 꼬마야.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여긴 아주 위험한 곳이야. 네가 사귄 친구도 보통 사람이 아니고. 그냥 놓아달라고 사정을 하고 빨리 엄마한테로 돌아가는 게 어때? 아마 크게 걱정하고 계실 거야!”“걱정 마세요. 제가 처음 실종된 것도 아니고, 우리 엄마는 아주 강하다고요. 제가 새 친구와 충분히 놀면 알아서 돌아간다고
차는 어느새 유명한 성심 전당포에 도착했다. 소문에 의하면 이곳은 보물의 집결지로, 세계 각지에서 온 진기한 보물, 고물, 진기한 짐승 등이 진열되어 있다고 한다.하지만 전당포의 전체 면적은 그리 크지 않았다. 경비도 삼엄하지 않아 주변의 단독주택과 별 차이가 없었다.차는 전당포 차고로 들어갔고, 미스터 Q는 차를 세우고는 여전히 덤덤한 원이를 보고 물었다. “진짜 나랑 같이 들어갈 거야? 성심 전당포에 발을 들여놓으면, 네 운명은 더 이상 네 것이 아니야.”“전 어린 아이예요. 제 운명을 아저씨 마음대로 할 수 있는지는 저희 엄마한테 물어보세요.”원이는 빛나는 큰 눈을 껌벅이여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그는 자신의 어린 나이를 무기로 주도권을 잡는 것에 능했다. 웬만한 어른보다 더 똑똑했다!“또 엄마라니!”남자는 기다란 손가락으로 핸들을 두드렸다. 깃털 가면은 그의 윤곽과 입체적인 얼굴, 그리고 입가의 미소도 가릴 수 없었다.“오는 내내 엄마 말만 하고 있었어. 너희 엄마가 그렇게 대단해? 많이 사랑해?”“당연하죠! 우리 엄마가 얼마나 대단한데요. 엄마는 뭐든지 할 줄 알아요. 이 세상에 엄마만큼 대단한 사람은 없어요. 너무너무 사랑해요!”원이는 순진한 눈빛으로 확고하게 말했고, 표정도 매우 교만했다.하지만, 원이의 밝은 눈은 급히 어두워지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하지만, 엄마는 지금 라이벌이 생겼어요. 그래서 제가 대신 그 라이벌을 제거하려고요. 엄마가 너무 힘들지 않게요.”남자는 짙은 눈썹을 저도 모르게 치켜올렸다.“그래?”“분명 그 라이벌이 누군지 궁금하시죠? 사실 별로 어렵지 않아요. 엄마는 그 라이벌이 아주 나쁜 사람이라고 했어요. 해안에서 그 사람을 무너뜨리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고요. 아저씨도 같은 마음일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아저씨를 찾아와, 저희 엄마를 도와달라고 하고 싶었어요. 엄마가 성공하면, 절대 푸대접하지 않을 거예요.”원이는 강렬한 카리스마를 내뿜는 미스터 Q를 마주하면서,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
“아빠는...”원이는 눈동자를 굴리며 속으로 생각했다.‘절대 이 사람이 내 아버지가 성도윤이라는 사실을 알아서는 안 돼. 아니면 엄마의 조력자가 되어 달라고 한 말이 너무 설득력이 떨어지잖아?’원이는 진지하게 말했다.“제 아버지는 배경수예요. 혹시 아세요? 해안 8대 가문 중의 하나인 배씨 가문의 미래의 후계자라고 하던데요. 엄마가 차씨 가문과 배씨 가문이 힘을 합치면 성가를 물리치는 건 시간문제라고 했어요.”“그래? 너희 엄마는 정말 야심이 크구나!”미스터 Q는 차가운 말투였고, 조금 화난 듯한 모습이었다.‘교활한 임채원, 감히 날 속이다니! 하지만, 이 자식이 성도윤의 핏줄이든 아니든, 차설아의 아이가 확실하다면, 이건 가치 있는 거래야!’그는 무표정으로 차 문을 열고 긴 다리를 뻗어 전당포 안으로 들어갔다.원이도 그의 뒤를 졸래졸래 따라갔다. 마치 자기 집으로 돌아온 것처럼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사장님, 오셨어요? 이분이 바로 사장님이 말씀하신 귀중한 보물인가요?”흰 셔츠를 입은 청초한 젊은 남자가 반갑게 맞이했다.그의 이름은 장재혁으로, 전당포의 주요 책임자였다. 나이는 어리지만 남다른 안목을 갖고 있어 보물 업계에서는 독보적인 인물이었다.성심 전당포의 많은 보물들은 그가 먼저 확인해야 저당할 수 있었다.장재혁은 원이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이 아이는 확실히 귀엽고 잘생겼어요. 하지만 딱 보아도 온실 속에서 자란 도련님이네요. 고생도 못 하고, 돈이 되지 못하는데 왜 데리고 오셨죠?”며칠 전, 장재혁은 미스터 Q가 직접 나서서 보기 드문 보물을 받아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밤잠도 설치면서 새로운 보물을 기대했는데... 웬 어린아이라니!“알 필요 없어. 며칠 동안만 사람 붙여서 잘 보살피면 돼.”미스터 Q는 양손을 주머니에 넣고 뒤돌아보며 어린 원이를 보았다. 마치 어린아이와 거리를 두려는 듯 다소 도도한 태도였다.그런데 원이가 갑자기 달려들어 그의 긴 다리를 껴안고 귀엽게 말했다.“미스터
그녀의 못난 오빠 배경수도 소파에 누워 쿨쿨 자고 있었다. 옷도 단정하게 입은 채로, 심지어 머리카락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두 사람은 어젯밤 또 ‘아무 일도’ 없었다.‘휴, 두 사람 얽히고설킨 지 거의 10년이 되어가는데 아직도 우정보다 가깝고 사랑보다는 먼 거리를 유지하다니! 내가 급해 죽겠어, 아주 그냥!’“콜록, 두 사람 그만 자고 일어나!”배경윤은 허탈한 마음으로 방에 들어가 커튼을 열어젖혔고, 방안에는 햇빛이 가득했다.배경수는 얼굴을 찡그리더니 벌떡 일어나 배경윤의 목덜미를 잡고 잘못을 추궁했다.“미친 계집애. 이제야 문을 연 거야? 간이 배 밖으로 나왔지? 어떻게 이런 장난을 할 수 있어? 오늘 널 제대로 혼내지 않으면 내가 네 오빠가 아니라 동생이다!”“악, 이거 놔. 다 두 사람을 위한 거였잖아. 그런데 내 성의를 이렇게 무시할 수 있어?”배경윤은 이를 악물고 반항했지만, 배경수의 앞에서는 빠져나올 힘이 없는 병아리에 불과했다.“언니, 살려줘. 오빠가 미쳤어. 날 죽이려고 해!”급해 난 배경윤은 차설아에게 구원을 요청했다.이상하게도, 이렇게 큰 소란에도 차설아는 침대에 누워 인형처럼 똑같은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뭐지? 왜 설아 언니가 좀 이상해 보이지?”배경윤과 배경수는 한바탕 소란을 피운 후 차설아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발견했다.“어젯밤 내가 언니 위로해 주라고 했잖아, 어떻게 됐어? 혹시 다른 사람한테 괴롭힘당한 거 아니야?”“누가 보스를 괴롭히겠어?”배경수는 양손을 주머니에 넣고 차설아의 뒷모습을 보며 나지막이 말했다.“내 생각에 보스는 지금 자아 복구 중이야.”“자아 복구?”배경윤은 어리둥절했다.하지만 배경수가 이렇게 침착한 것을 보니 큰 문제는 아닌 것 같았다.배경수는 말을 이었다.“사람은 큰 충격을 받고 나면 동물과 마찬가지로 자아 복구 모드에 들어가. 어떤 사람은 크게 울고, 어떤 사람은 소란을 피우고, 또 과식하거나 이성을 만나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 보스는 잠으로 그 상처를 치유하고 있
배경수와 배경윤은 눈을 마주치더니, 차설아가 아직 자는 줄 알고 대신 전화를 받을 생각이었다.하지만 차설아는 말없이 일어나 덤덤하게 전화를 받았다.“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차설아이고, 차진원은 제 아들이 맞아요. 연락을 받았다는 거죠?”대화를 나눈 후,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바로 갈게요.”여자의 아름다운 얼굴은 별로 놀라지도 않고 덤덤한 표정으로 일관했다.배경수와 배경윤이 오히려 흥분했다.“언니, 경찰에서 연락 온 거야? 원이를 찾았대?”배경윤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원이를 유괴한 사람만 잡았대. 구체적인 건 가봐야 알 것 같아.”차설아는 나지막이 말하더니 기지개를 켜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드레스룸으로 들어가 갈아입을 옷을 챙겼다.차설아가 너무 침착해서, 오히려 보는 사람을 더 걱정하게 했다.배경수는 어두운 얼굴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보스, 괜찮아?”차설아의 긴 손가락이 예쁜 드레스를 스치다가 갑자기 멈추더니 어깨를 으쓱하고 말했다.“걱정 마. 너희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나약하지도 않고 수면으로 상처를 치유할 필요도 없어. 그저 피곤해서 푹 쉬고 싶었을 뿐이야. 지금은 잘 쉬었고, 모두 정상으로 돌아왔어.”배경윤은 마음이 놓이지 않아 그녀에게 다가가서 눈시울을 붉히더니,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고 울먹였다.“설아 언니, 속상한 거 알아. 성도윤이 아무리 나쁜 인간이라고 해도, 언니가 깊이 사랑했던 남자고, 언니를 구하려다가 죽었으니, 어떻게 아무렇지 않겠어. 속에 담아두지 말고 표현해도 돼. 울어도 좋고, 소란을 피워도 좋고, 폭식해도 좋아. 절대 마음에 담아두면 안 돼. 그러다 병 걸려.”“슬픈 건 맞지만, 미쳐버릴 정도는 아니야. 그저 좀 아쉽다고 할까?”차설아는 긴 한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돌려 배경윤을 향해 웃었다.“걱정 마. 난 이성적인 사람이야. 그 인간이 죽었든 살았든 우리의 계획은 변함없어... 차씨 가문과 배씨 가문은 머지않아 해안 8대 가문 중의 최강자가 될 거야.”배경윤은
담당 경찰관은 고개를 들고 얼굴을 찡그리며 물었다.“아이가 사라진 지 이렇게 오래됐는데 부모로서 실종신고도 안 하고 아주 간이 크군요. 아이가 하도 똑똑해서 직접 경찰에 신고했으니 다행이죠. 아직 어디에 있는지 모르지만 유괴 용의자는 찾았으니 상황이 그리 심각하지는 않을 거예요.”차설아는 계속 고개를 끄덕였다.“네, 경찰관님 말대로 저희가 너무 소홀했어요.”하지만 속으로는 묵묵히 생각했다.‘휴, 또 어떤 재수 없는 놈이 원이의 손에 걸려든 거야. 원이에게 유괴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네.’예전에 원이는 스스로 집을 나간 적이 많았기에, 의도가 불순한 사람을 여러 번 만났었다. 하지만 매번 나쁜 사람이 경찰에 전화를 걸어 구조 요청을 했다. 원이에게 호되게 당한 것이다.담당 경찰관은 말을 이어갔다.“용의자는 범죄 사실을 숨기지 않고 자백했지만 아이의 행방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고 있어요. 차설아 씨와 개인적인 원한 때문에 아이에게 손을 댔다고 분명히 밝혔고, 또 단둘이 이야기하고 싶다고 요구했어요.”“개인적인 원한이요?”차설아는 자신도 모르게 경각심을 세웠고, 이내 긴장된 표정이었다.그녀의 적수라면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다. 그녀와 원수를 맺을 수 있는 사람은 결코 좋은 사람이 아니다.만약 그들이 원이를 찾았다면, 원이의 상황은 그녀가 생각하는 것만큼 낙관적이지 않을 것이다.차설아는 주먹을 꽉 쥐고 서둘러 말했다.“지금 어디 있죠? 당장 만날게요.”“데리고 들어오세요.”경찰관은 무전기에 대고 말했다.곧 취조실 문이 열렸고, 임채원은 은빛 수갑에 두 손이 묶인 채 냉담한 표정으로 걸어 들어왔다.차설아와 눈이 마주쳤을 때, 임채원은 갑자기 기운을 차리더니 웃는 듯 마는 듯 말했다.“차설아, 왜 벌써 찾아왔어? 좀 더 늦게 왔어야지. 조금만 더 기다리면 누군가 널 찾아와 원이의 행방을 알려줄 텐데.”차설아는 임채원을 한 대 때리고 싶은 충동을 애써 억눌렀다.“모든 원한과 빚은 다 나한테 있잖아? 그럼 나를 향해 복수해야지, 왜
경찰관은 차설아의 요구에 동의했다.그들이 자리를 뜨자 취조실에는 차설아와 임채원 두 사람만 남았지만, 그들의 말과 행동은 실시간으로 모니터링되고 있었다.임채원은 비록 수갑을 차고 있었지만 여전히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차설아를 향해 비꼬아 말했다.“저 사람들을 보내면 내가 원이의 위치를 알려줄 것 같아? 하하, 순진하기도 하지. 네 아들에게 손을 댄 이유는 바로 너한테 복수하기 위해서야. 이제 겨우 네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봤는데 내가 왜 벌써 손을 떼겠어?”“고통?”차설아는 담담하게 의자에 기대어 나른하고 차가운 미소를 보였다.“내가 고통스러워한다고? 누가 그래? 내 아들이 얼마나 똑똑한데, 분명 스스로 위험에서 벗어났을 거야. 하지만 넌... 내가 기소를 하면 남은 인생을 감옥에서 보내게 되겠지. 네가 안타까워.”“그 아이가 똑똑한 건 인정해. 하지만 그 사람 손에서 벗어나는 건 허황한 꿈이야. 빨리 정신을 차리는 게 좋을 거야.”임채원은 조금씩 화가 나서 하얗게 질린 차설아의 얼굴을 보며 마치 악마가 피를 보듯 강렬한 성취감을 느꼈다.그녀도 취조실에 카메라가 있는 걸 알고, 일어나 차설아의 귀에 대고 말했다.“빨리 집에 돌아가는 게 좋을 거야. 여기서 나랑 시간 낭비하지 말고, 돌아가서 시신을 넣을 관이라도 알아봐 둬.”“닥쳐!”그녀의 악독한 말에 차설아는 제대로 폭발했다.차설아는 벌떡 일어나 긴 팔을 휘두르더니 손으로 임채원의 경동맥 위치를 꽉 잡았다. 아름다운 눈동자에는 차가운 빛이 비쳤다.“살기 귀찮은 것 같으니, 지금 그 목숨을 끊어주지!”임채원은 숨을 쉴 수 없어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지만 험상궂게 웃었다.“하하하, 어디 한번 날 죽여봐. 내가 원하는 게 바로 이거야. 네가 날 죽이면, 도윤이도 널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 난 영원히 도윤이 마음속에 남을 것이고! 그거면 돼!”차설아의 차가운 눈동자에 약간의 변화가 생기더니 차갑게 말했다.“성도윤, 이미 죽은 사람까지 들먹이는 건 좀 웃기지 않아?”“뭐... 뭐라고
바람은 얇은 셔츠를 입고 서 있었고 어깨를 으쓱하면서 말했다.“네가 여기에 앉았을 때부터 뒤에 숨어있었어.”“너 바보야? 6시간 동안 가만히 앉아 있는다는 게 얼마나 힘든지 몰라?”차설아는 투덜거리면서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바람은 차설아의 곁에 앉으면서 미소를 지었다.“힘든 줄 모르니까 이 시간까지 앉아 있었던 거겠지.”“난 생각할 것이 있어서 시간 가는 줄도 몰랐어.”“나도 똑같아. 네 얼굴을 보고만 있어도 재밌어서 계속 쳐다보고 싶었어. 6시간이나 지난 줄 몰랐거든.”“그런 장난도 지긋지긋하다.”차설아는 바람을 주먹으로 때리고는 긴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오후에 있었던 일은 정말 미안하게 생각해. 오빠 생각에 미쳐서 주변 사람들을 전부 의심했던 것 같아. 네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어도 그랬을 거야. 그러니까 마음에 두지 말았으면 좋겠어...”차설아의 말에 바람이 피식 웃더니 입을 열었다.“사과하지 않아도 돼. 난 신비한 컨셉이라 의심받은 적이 셀 수 없을 만큼 많거든. 그러니까 자책하지 마. 네가 속상해하면 마음이 너무 아프거든...”바람은 차설아가 죄책감 때문에 자신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사실 바람은 누구한테 의심받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바람의 유일한 목표는 차설아와 결혼해서 선우 가문을 빛내려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나쁜 짓을 하든 암암리에 손을 쓰든 중요하지 않았다. 차설아의 마음을 얻을 수만 있다면 바람은 무슨 짓이든 할 것이다.“누가 자책했다고 그래. 넌 여우처럼 교활하니까 당연히 의심받지. 아무도 너의 속내를 꿰뚫어 보지 못하잖아.”차설아는 바람의 이마를 툭 치면서 말을 이었다.“우리 둘이 그저 해커였다면 얼마나 좋을까? 시합에 참가해서 상금을 타고 돈이나 벌었으면 복잡한 가문의 일을 해결하지 않아도 되잖아. 복수할 것도 없으니 해커 활동이나 하면서 편안하게 지냈으면 되었을 텐데 말이야.”“생각해 보면 너랑 같이 시합에 참가해서 겨루던 날들이 제일 재밌었어.”바람은 잔잔한 호수를 바라보
병실을 나선 배경윤은 차설아를 데리고 비상계단 쪽으로 향했다.“그 반지... 성도윤이 끼고 있던 거지?”“맞아.”차설아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나한테 숨기는 거 있어? 저번부터 표정이 안 좋더라.”“그, 그러니까...”배경윤은 더 이상 숨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모든 것을 털어놓기로 마음먹었다.“성철 오빠가 수술을 받고 의식을 잃은 뒤에 누군가가 일부러 손을 쓴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성형 병원으로 다시 찾아갔고 간호사한테서 단서를 찾은 거야.”“단서라니?”차설아가 인상을 찌푸리고는 잔뜩 긴장한 채 물었다.“간호사의 말에 의하면 성철 오빠가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에 의사가 윤설이랑 통화했다는 거야. 깔끔하게 처리하라고 했대. 그래서 나는 윤설이 촬영하는 곳까지 찾아가서 따졌고 윤설은 성도윤의 지시를 받은 것이라고 말하더라고...”배경윤은 긴 한숨을 내쉬더니 말을 이었다.“윤설이 일부러 거짓 정보를 흘렸을까 봐 증거를 더 모은 뒤에 너한테 알려주려고 했어. 그런데 갑자기 성도윤의 반지를 발견했으니 숨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어.”“경윤아, 고마워. 사실 네가 알려주기 전부터 나는 줄곧 의심하고 있었어. 하지만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너무 힘들었어. 그래서 성도윤이 그 정도로 나쁜 사람은 아닐 거라고 나 자신을 속이고 있었던 거야.”“설아야, 너랑 성도윤은 아무 잘못도 없어. 성도윤은 너를 완전히 잊었으니 나처럼 그저 아는 사람일 뿐인 거야. 성도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하는 사람이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해.”배경윤은 차설아의 어깨를 토닥이면서 위로해 주었다.“나, 나도 알아... 성도윤은 진작에 날 잊었지만 난 희망의 끈을 놓지 못하고 나를 기억해 주길 바랐어. 전부 내 탓이야!”차설아는 심호흡하면서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눈물을 삼켰다.“그럼 이제는 어떻게 할 생각이야? 성도윤과 맞서려고?”배경윤의 말에 차설아는 벽에 기대 한숨을 내쉬고는 차갑게 웃었다.“나도 잘 모르겠어. 오
“설아야...”차성철이 천천히 손을 뻗더니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설아야, 그동안 나 때문에 힘들었지? 정말 고생했어. 미안해...”“오빠, 그런 말 하지 마. 오빠가 깨어날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어!”차설아는 차성철이 누워있는 병실 침대맡에 꿇어앉아 눈물을 흘렸다.“사실 의식을 잃었다는 걸 알고 있었어. 작은 상자에 갇힌 채로 꼼짝도 하지 못했던 거야. 상자를 열지 못해서 이 안에서 죽는 줄 알았거든. 그런데 자꾸 네 생각이 나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어. 난 하느님께 정말 감사해. 나에게 기회를 주어서 널 다시 만나게 되었으니 말이야.”차성철이 울먹이면서 말했다. 이번 사고로 인해 차성철은 많이 변했다. 예전처럼 날카롭고 예민하게 굴지 않았고 한결 부드러워졌고 말투도 다정해졌다.“뭘 자꾸 그런 말을 해! 오빠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면서 우리 달이랑 원이가 커서 결혼하는 모습을 봐야지. 손주도 봐야 하는데 불길한 말은 하지 마. 오빠는 그냥 오래 잠들어 있다가 깨어난 거야. 하느님의 힘을 빌릴 정도까지는 아니었어. 다시 깨어나 줘서 정말 고마워... 오빠가 너무 보고 싶었어.”차설아는 눈물을 닦으면서 차성철을 와락 안았다.“그래. 너랑 달이, 원이를 위해서라도 건강하게 지내야지. 앞으로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가자. 우리 가족 모두 모여서 재밌게 지내자. 네가 하고 싶었던 걸 같이 하고 가족 여행도 가자.”“말한 대로 해야 해. 지금 약속하자. 앞으로 오빠가 또 다치면 다시는 나 못 볼 줄 알아! 그때는 오빠를 용서하지 않을 거야.”남매는 새끼손가락을 걸고 눈물의 약속을 했다. 보는 사람마저 눈물이 나는 광경이었다. 배경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물만 흘렸다. 배경윤은 배경수가 생각났던 것이다.차설아의 말에 의하면 배경수는 아주 멀리 떨어진 마을에서 처음 보는 여자와 결혼했다. 배경윤은 배경수가 걱정되었다. 차설아는 울다가 차성철이 베고 있는 베개의 아래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은반지였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값이 꽤 되는
바람이 멈칫하더니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뭐, 뭐라고?”“네가 스파이지? 네가 사주받고 우리 오빠를 죽이려고 한 거잖아! 그렇지 않으면 왜 우리가 식당에 간 사이에 오빠한테 이런 일이 벌어진 거냐고!”차설아는 붉어진 두 눈을 하고서 물었다. 그동안 차성철의 상태에 대해 아는 사람은 바람과 차설아 두 사람뿐이었다.‘아무리 바람이 날 보살펴 주고 내 곁을 지켰다고 해도 누군가가 바람한테 지시해서 나를 감시하는 것일 수도 있잖아. 내가 방심한 틈을 타서... 그래. 바람은 선우 가문 사람이니까 가문의 이익을 위해서 오빠를 죽이려고 했을 수도 있어. 그러면 차씨 가문의 자리를 빼앗을 수도 있으니까!’배경윤이 차설아를 뜯어말렸다.“설아야, 말이 좀 심하다? 바람 씨가 어떻게 사주를 받고 그랬을 수가 있어. 네 말이 사실이라면 바람 씨가 너한테 온갖 심혈을 쏟아부을 리가 없잖아. 성철 오빠를 죽일 생각이었다면 진작에 움직였겠지. 바람 씨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차설아는 고개를 돌려 배경윤을 쳐다보며 물었다.“넌 알고 있었지?”“그, 그게...”배경윤은 주먹을 꽉 쥔 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이때 의사와 간호사들이 병실에서 걸어 나왔다.“의사 선생님, 오빠 어떻게 되었어요?”차설아는 사건의 배후에 대한 생각을 뒤로 하고 의사한테 다가가 물었다.“제때 발견한 덕분에 환자의 목숨을 살릴 수 있었어요. 호흡도 정상적으로 돌아왔으니 걱정하지 마세요.”“다행이에요. 정말 감사해요...”차설아는 식은땀을 흘리면서 고개 숙여 인사했다. 최근 차설아는 감정 기복이 심해서 울었다 웃기를 반복했다. 몸에 무리가 가면서 차설아도 점점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들어가 봐도 돼요. 박 선생님의 말씀대로 곧 깨어날 것 같거든요.”의사의 말에 차설아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감사해요!”차설아는 병실로 들어가 차성철을 바라보았다. 배경윤도 그 뒤를 따라갔지만 바람은 굳은 표정을 하고서 밖에 서 있었다.“바람 씨, 거기서 뭐 해?”배경윤이 고개를 돌려
검은 그림자는 다름 아닌 서씨 가문 서은아였다. 서은아는 그동안 차설아를 감시하고 있었다. 차설아가 식당에 밥 먹으러 간 사이에 차성철이 있는 병실을 책임지는 간호사에게 돈을 쥐여주었고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수술을 마친 뒤, 침대에 누워 간신히 숨을 쉬고 있는 차성철은 살짝 다쳐도 부서질 것처럼 나약해 보였다. 서은아는 병실 침대 앞에 서서 한참을 쳐다보다가 작은 물건을 차성철 베개 옆에 올려놓고는 산소마스크를 벗겼다.“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지만 미안해. 당신이 식물인간이 되면 당신 여동생도 기가 죽어서 나대지 못할 거라고 믿었어. 그런데 박성훈이 와서 당신을 살렸지 뭐야? 성도윤이 박성훈한테 부탁한 거라면서? 정말 어이가 없더라. 보나 마나 차설아가 성도윤한테 부탁한 거겠지. 뻔뻔스러운 년이...”서은아의 눈에 살기가 돌았다.“날 탓하지 마. 탓하려면 그 못난 여동생을 탓해. 차설아는 내가 성도윤과 약혼한 사이란 것을 알고 있으면서 성도윤한테 달라붙으면서 날 괴롭혔어. 동생이 저지른 잘못은 오빠인 당신이 책임져야지. 안 그래?”서은아는 말을 마친 뒤, 감시 카메라를 피해 조용히 병원을 나섰다. 식당에 앉아 있던 차설아는 바람이 포장한 음식을 보면서도 어쩐지 불안해서 먹고 싶지 않았다.“설아야, 네가 제일 좋아하는 탕수육이야. 다른 식당에서 하는 건 눅눅해서 맛없지만 이 식당에서 하는 건 바삭하잖아. 바람 씨가 널 위해서 사 온 건데, 한 입이라도 먹어 봐.”배경윤은 불안해하는 차설아와 맞은편에 앉아 있는 바람을 번갈아 보면서 말했다.“이 식당에 줄을 서려고 아침 일찍 깨어났어. 하지만 스파크가 좋아하는 거라면 눈이 오든 비가 내리든 사러 가야지.”바람이 머리를 긁적이더니 피식 웃었다. 그동안 차설아에게 밥을 먹이기 위해 온갖 시도를 해보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쯧쯧. 바람 씨한테 설아를 맡겼다가는 뚱보가 되겠어. 한 달 안에 10킬로 찐다는 것에 내 머리카락을 걸겠어.”“스파크는 살이 쪄도 예뻐서 괜찮아. 지금처럼 귀여울 거
배경윤은 박성훈을 노려보면서 말했다. 박성훈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성도윤이 데려온 의사라는 말에 성도윤처럼 나쁜 사람인 줄 알고 경계했다.“경윤아, 그러지 마. 박 선생님은 며칠 동안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오빠를 위해서 최선을 다해준 분이야. 오빠가 깨어날 수만 있다면 차씨 가문의 은인이 될 분이거든.”차설아는 다시 일어나더니 박성훈한테 허리를 숙여 공손히 인사했다.“박 선생님, 죄송해요. 경윤이는 늘 저를 아껴주고 보호해 주는 사람이라 이런 일에서는 예민하게 굴거든요. 나쁜 뜻으로 하는 말은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괜찮아요. 병원에서는 예민할 수밖에 없죠. 만나본 보호자 중에서 제일 정상적인 반응이거든요. 저는 이해해요.”박성훈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저 말고 성 대표님께 고맙다고 해야죠. 저는 수술할 생각이 없었는데 성 대표님이 간절하게 부탁했고 제가 좋아하는 바다낚시까지 같이 해주셔서 거절할 수가 없었어요. 게다가 바다낚시 내기에서도 졌으니 성 대표님 말대로 수술해야 했어요.”“성도윤이 어렵게 모신 분인 건 알고 있었어요. 나중에 오빠가 깨어나면 인사하려고요.”“잘 생각했어요.”박성훈이 차설아의 어깨를 토닥이더니 말을 이었다.“생각이 많으면 마음이 힘들 거예요. 사실 생각처럼 최악의 상황까지 가는 일은 없으니 마음 편안하게 먹고 환자분이 깨어나길 기다리세요.”말을 마친 박성훈은 사무실로 돌아가서 옷을 갈아입었다. 지금 오후 4시라서 박성훈이 말한 시간까지는 아직도 4시간이나 남아있었다. 배경윤은 차설아가 또 쓰러질까 봐 걱정되었다.“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밥부터 먹자.”“괜찮아. 난 배고프지 않아. 오빠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고 싶어. 오빠가 일어나야 내 마음도 편해질 것 같아.”차설아는 병실 밖에 서서 침대에 누워있는 차성철을 바라보며 말했다.“너 이러다가 또 쓰러지면 어쩌려고 그래? 오빠도 네가 이러는 걸 원하지 않을 거야.”차설아는 고개를 돌려 배경윤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배경윤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설마 네가 말한 사람이 그 나쁜 놈은 아니겠지? 아니라고 말해.”차설아가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그 사람 말고 또 누가 있겠어. 그래도 도움받았잖아.”“아...”배경윤은 주먹을 꽉 쥔 채 머뭇거렸다. 차설아한테 사실대로 말해야 할지 고민되는 순간이었다. 이 사고는 목적, 증언, 사건 발생 시간으로 보았을 때 성도윤이 배후일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하지만 확실한 증거 없이 성도윤을 범인으로 몰아갈 수 없었다. 만약 이 말을 꺼냈다가 차설아와 성도윤이 싸우게 된다면 손해 보는 건 차설아일 것이다. 하지만 사실대로 솔직하게 말하지 않으면 성도윤이 또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일이었다.“설아야, 그저 네가 걱정되어서 하는 말인데 성도윤을 너무 믿지 마. 성도윤이 어떤 사람인지 네가 제일 잘 알잖아. 진심을 드러내지 말고 계속 지켜보는 게 좋을 것 같아. 알겠지?”배경윤은 머뭇거리다가 결국 직설적으로 말하지 못했다.“나도 알아. 지금까지 성도윤을 용서한 적 단 한 번도 없어. 오빠 얼굴에 남은 흉터를 볼 때마다 성도윤이 떠올라서 화가 솟구쳐 오르거든... 성도윤이랑 잘 해볼 생각이 아니라 그저 좋은 의사를 데려와 주어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을 뿐이야. 네가 걱정하는 일은 없을 거야.”차설아는 수술실을 바라보면서 말했고 눈시울이 점점 붉어졌다. 눈에 핏줄이 가득 서렸지만 차성철이 나올 때까지 쉴 수 없었다. 성도윤에 관한 생각을 하면 할수록 차설아의 마음이 아팠기에 더는 신경 쓰지 않았고 애매모호한 선을 넘지 않았다. 지금처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더 마주치지 않는 것이 두 사람을 위한 일이었다.“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야. 더 이상 그 사람과 엮이고 싶어 하지 않는 건 알지만 항상 경계해야 해. 그 사람이 얼마나...”“알겠어. 곧 수술이 끝날 테니 다른 건 생각하지 말고 오빠가 무사히 나오기를 바라면서 기다리자.”차설아는 배경윤의 말을 끊었다.“그래. 같이 기다려보자.”배경윤은 슬픔이 가득 서려 있는 차
사도현은 턱을 쳐들더니 거만하게 말했다.“내가 바로 배경윤 남자 친구예요.”사도현의 말에 같이 식사하던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두 사람이 보통 사이가 아닌 것은 알고 있었지만 연예계에서 알아주는 회사 대표가 당당하게 공개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뭐?”배경윤은 어이가 없었다. 사도현이 미친 짓을 저지를 줄 예상 못했는지 사도현을 향해 부르짖었다.“사도현, 너 정말 미친 거야? 장난이 너무 심하잖아!”‘헤어진 지 얼마나 지났는데 이제 와서 남자 친구라고? 게다가 내가 좋아하는 찬영 오빠 앞에서 공개하다니... 정말 제대로 미친놈이구나. 내 미래의 남자 친구가 될 수도 있는 사람한테 알려주려고 작정한 거야!’“내 말이 틀렸어? 우리 사귀는 사이 맞잖아. 그렇지 않으면 이곳에 온 첫 번째 날에 어떻게 같은 방, 같은 침대에서 잤겠어?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을 텐데 말이야.”사도현이 피식 웃더니 부르짖는 배경윤을 보면서 만족감을 느꼈다. 배경윤의 시선을 느끼면서 이제야 자신의 것을 되찾은 것 같았다.“그, 그건...”배경윤은 말문이 막혔다. 설명하면 할수록 말려드는 것 같아서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이때 진찬영이 입술을 깨물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만약 두 사람이 한방에 들어가는 것이 사귄다는 증거라면, 사도현 씨는 배경윤 씨가 아니라 윤설 씨의 남자 친구인 것 같은데요? 윤설 씨 곁을 떠난 적이 없잖아요. 도대체 두 분 중에서 누구의 남자 친구인지 헷갈리네요. 아니면 두 분을 속여서 양다리를 걸친 게 아닐까 싶어요.”진찬영의 말을 들은 배경윤은 반격할 수 있는 틈을 찾았다. 그러고는 도덕적인 면에서 사도현을 비난하기 시작했다.“맞아요! 같은 방을 쓰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라 그날에 남은 방이 하나밖에 없어서 그랬어요. 우리 두 사람 모두 외양간에서 자기 싫었거든요. 그날 밤에 아무 일도 없었지만 윤설 씨랑 사도현 씨 사이는 각별했어요. 정성을 다해서 보살핀 여자랑 사귀는 것 같은데 왜 나를 언급하고 난리야! 난 너처럼 미친놈이랑 사귈 바
그 말을 들은 장윤태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장윤태가 다급히 뜯어말렸다.“집에 갈 정도로 싫으면 안 하면 되는 거죠! 그런 설정을 할 생각도 없었어요. 찬영이도 커플 설정을 원하지 않을 테니 강요할 수 없었거든요. 다들 장난치는 거니까 마음에 담아두지 말아요.”장윤태는 게스트들이 말하는 커플 중 한 쌍이 진찬영과 배경윤임을 확신했다. 옆에 앉아 있던 사도현은 굳은 표정으로 진찬영을 노려보고 있었다.“장 감독님, 그것 때문에 이러는 거 아니에요.”배경윤이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개인적인 일로 해안시에 다시 돌아가야 해요. 프로그램 촬영하는 동안 정말 재밌었어요. 게다가 찬영 오빠랑 커플로 촬영할 수 있다고 하면 더 행복했을 거예요.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돌아가야 해요.”“잘생긴 남자라면 다 좋아하나 보지?”말을 마친 사도현은 혼자서 술을 벌컥벌컥 마셨다. 장윤태는 배경윤을 설득하지 못하자 재빨리 다른 제안을 했다.“급한 일이 있으니 어쩔 수 없죠. 곧 연애 예능 촬영이 있는데 그때 시간이 되면 우리 찬영이랑 같이 게스트로 출연하지 않을래요?”“좋아요!”배경윤은 망설임 없이 동의했다. 진찬영과 함께 촬영할 수 있다면 무슨 프로그램이든지 무조건 출연할 것이다. 진찬영과 떨어지려니 아쉬웠지만 돌아가서 차설아의 곁을 지켜야 했기에 어쩔 수 없이 작별 인사를 했다.“배경윤 씨랑 같이 출연한다면 저도 좋아요.”진찬영은 배경윤을 향해 말했다. 애초에 진찬영은 배경윤이 출연한다는 소식에 이 마을까지 달려왔던 것이다. 그러기에 배경윤이 있는 곳에 꼭 따라갈 것이다.“그럼 두 사람이 사인한 계약서 말고 다른 계약서를 준비할 테니 이제 만나서 얘기해요. 조건을 구체적으로 적으면 이 프로그램 계약서대로 하지 않아도 법적 책임을 지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요.”장윤태는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너무 기쁜 나머지 술을 마시면서 껄껄 웃었다.“안 돼요.”사도현이 차갑게 말했다.“배경윤은 너무 바빠서 연애 프로그램에 출연할 시간이 없을 거예요.”배경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