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성진 입가의 웃음은 더 깊어졌다.그는 반짝이는 눈빛으로 차설아를 빤히 지켜보며 물었다.“지금 저를 걱정하는 거예요?”차설아는 말문이 막혔다.“피를 흘려서 설아 씨 관심을 얻을 수 있다면, 목을 베어서라도 설아 씨를 웃게 하고 싶네요.”“그럼 가서 죽어요!”차설아가 눈을 희번덕거리더니 그에게 손수건 하나 던졌다.성진은 손수건을 들더니 오뚝한 코 앞에 갖다 대고는 깊이 들이마시고서야 아쉬운 듯 피가 흘리는 목을 덮고는 매듭을 지으며 한숨을 푹 쉬었다.“좋은 손수건인 것 같은데, 이런 데에 쓰이다니 아쉽게 되었군요.”“미쳤어, 정말 미쳤어.”차설아는 머리가 지끈거렸고 후회가 몰려왔다.차설아는 성진이 아무 생각이 없는 바보인 줄 알았다. 그래서 그에게서 성대 그룹의 기밀이라도 알 수 있을까 기대했지만... 성진은 차설아를 방심하게 하기 위해 일부러 실력을 감춘 것이다. 워낙 미친 사람이라 그 어떤 정보도 얻을 수 없었다.이렇게 시간을 끈다면 오히려 그녀의 계획만 더 지체될 것이고, 또 그녀와 배경수의 사이만 점점 더 멀어질 것이다.‘실책했네, 내가 실책했어! 성진이 이렇게 미친놈일 줄이야. 먼저 목적지까지 운전하게 한 뒤 다른 방법을 생각해서 이곳을 벗어나야겠네.’차는 좌회전에 우회전하더니 넓은 평지 앞에 도착했다.“다 왔어요.”성진이 차를 멈추고 차설아에게 의미심장하게 말했다.“나 믿어요, 이곳에 온 걸 후회하지 않을 거예요.”“네, 그러길 바라네요.”차설아가 얼버무려 말했지만 마음속으로는 다른 계획을 세웠다.성진이 차에서 내리자 그녀도 따라서 내렸다. 그리고 성진이 그녀에게 다가올 때 발로 그의 배를 걷어차고는 그의 손에 쥐어진 차 키를 뺏었다.“시간이 늦어 저는 피곤해요, 더는 당신이랑 끌 시간이 없어요. 이곳이 마음에 든다면 여기에 계속 있어요, 저는 먼저 돌아가 봐야 하니까.”말을 마친 그는 차 문을 열고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려고 했다.차설아에게 차인 성진은 오장육부가 박살 나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그의
차설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아니요, 짐작 가는 것이 없어요, 추측하고 싶지도 않고요, 성진 씨가 여기서 시시콜콜 따지는 걸 들을 기분이 없어요. 그러니까 알아서 길을 비켜주는 게 좋을 거예요, 아니면 당신을 밟고 지나가도 나 원망하지 말아요!”훤칠한 성진은 나른하게 차 앞에 주저앉았는데 차설아의 경고는 들은 체도 하지 않으며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그동안 설아 씨가 많이 강해진 줄 알았는데 여전히 겁쟁이네요. 사실을 마주할 용기도 없다니. 이렇게 자신을 속이는 게 정말 못나 보여요.”“당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네요!”차설아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마지막으로 한 번 더 말할게요, 비켜요!”그녀의 발은 액셀을 밟고 있었다. 살짝 밟기만 해도 성진은 차에 깔리게 될 것이다.“흥, 나를 차로 깔아 죽인다고 해도 재수 없는 사촌 형이 죽어서 돌아올까요?”성진은 천천히 바닥에서 일어나더니 두 팔로 무릎을 지탱하고는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운전석에 앉은 여자를 바라보더니 말을 이어갔다.“제가 왜 설아 씨를 이 황폐한 산으로 데려왔는지 궁금하다고 했죠. 여기 묘지를 좀 봐봐요, 풍수가 엄청 좋아요. 여기가 바로 성씨 가문에서 성도윤을 위해 특별히 고른 묘지라고 하네요. 장례를 치르는 때가 되면 평생 도도하게 살았고, 사람들을 우습게 보던 사촌 형도 영원히 이곳에 머물게 되겠네요...”“아니, 그럴 리가 없어요. 지금 분명 저 속이고 있잖아요!”차설아의 머릿속이 하얘졌다.성진이 계속 주절주절 뭔가를 말하고 있었는데 알아듣지도 못하고, 알아들을 마음도 없었다.그녀의 귓가에는 오직 성진이 했던 말 한마디가 맴돌고 있었다.“재수 없는 사촌 형이 죽어서 돌아올까요?”‘아니, 그럴 리가 없어. 성도윤이 왜 갑자기 죽어? 구미호보다 더 대단한 사람인데. 구미호도 목숨이 아홉 개니, 성도윤은 분명 목숨이 열 개나 있을 거야. 성도윤이 이대로 죽었다는 사실은 절대로 믿지 않아!’“내가 설아 씨를 속였는지 아닌지
성진이 다리를 거두고는 고개를 돌려 차설아를 보더니 씩 웃고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저는 원래 좋은 놈 아니에요. 소문난 쓰레기라고요,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살아있는 성도윤을 상대하지 못해도 죽은 성도윤도 상대하지 못하겠어요? 수모를 안겨줄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되죠!”차설아는 눈가가 붉어진 채 이를 악물며 말했다.“당신은 미친 사람이야, 성도윤은 죽어도 당신보다 훨씬 나은 사람이라고!”성진의 눈빛이 음흉하게 번지더니 차설아에게 점점 다가가며 말했다.“그래요? 하지만 지금의 성도윤은 뭘 할 수 있을까요? 그 사람 얼굴에는 내 발자국이 찍혀 있는데요. 지금 성도윤 앞에서 그의 여자와 하룻밤을 가져도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지켜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도 저보다 낫다고요?”“뻔뻔스럽네!”차설아가 팔을 들더니 성진의 뺨을 세게 때렸다.“당신 같은 쓰레기가 무슨 엄두로 감히 나 차설아를 탐내? 주제를 모르는 놈!”차설아는 그래도 화가 안 풀리는지 가는 다리를 들어 매섭게 성진의 배를 향해 걷어찼다.“웁!”성진은 허리를 굽히더니 그대로 묘비 앞에 무릎을 꿇었다.차설아는 그를 내려다보며 발로 그의 등을 꾹 밟고는 콧방귀를 뀌었다.“이래야 사촌 형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거죠. 그래도 모르겠다면 한 번 더 가르쳐줄 수도 있어요.”“하하하, 계속 이렇게 대해줘요. 멈추지 마세요, 이런 당신이 좋으니까!”성진은 분명 차설아에게 맞아 목숨이 거덜 났는데도 이상하게 기분이 매우 고조되었다. 심지어 눈에는 흥분된 빛까지 반짝이고 있었다.“전에 물었었죠, 제가 설아 씨를 그렇게 숭배하고 좋아했는데도 설아 씨가 성도윤과 결혼하고 나서 왜 난처하게 굴고 수모를 안겨줬는지. 이제 알려주죠, 설아 씨는 그때 저를 실망하게 했기 때문이에요!”남자가 눈을 감고는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분명 설아 씨는 누구보다 훌륭한 우수한 여자이고, 그렇게 밝게 빛났는데, 그렇게 매력적이었는데, 건드릴 엄두조차 나지 않는 성스러운 존재였는데. 그런 설아 씨는
차설아는 성진과 말씨름하기도 귀찮아 돌아서서 차에 올라타고는 액셀을 밟고 이 숲을 떠났다.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소위 말하는 성도윤의 묘비를 제대로 보지 않았다. 성도윤이 죽었다는 것을 절대로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달빛을 맞으며 차설아는 가장 빠른 속도로 도심 한복판에 있는 배경윤의 아파트로 돌아갔다.오늘 그녀는 너무나도 많은 일을 겪었기에 이미 피곤할 대로 피곤했다. 눈꺼풀이 무거웠기 때문에 다른 건 신경 쓸 겨를이 없이 단지 잠을 푹 자고 싶었다.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아파트 안에는 배경윤뿐만 아니라 배경수도 있었다.성대 그룹에서 결별을 겪어 그런지 눈이 마주친 두 사람은 서로 어색하기만 했다.“설아 언니, 드디어 돌아왔네. 계속 안 돌아온다면 오빠랑 경찰에 신고할 뻔했어.”배경윤이 안도의 한숨을 쉬고는 다정하게 그녀의 팔을 끌어안으며 물었다.“안 배고파? 배고프면 내가 야식 해줄까?”차설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피곤한 눈으로 말했다.“안 배고파, 그냥 너무 졸려서 한잠 푹 자고 싶어. 그러니까 야식은 둘이 먹어.”차설아는 가벼운 목소리로 말하고는 배경수를 돌아 자기 방으로 걸어갔다.“자고 싶다고?”배경윤은 차설아의 뒷모습을 보더니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설마 원이에게서 소식이 온 건가? 아니면 설아 언니는 절대 잠을 잘 기분이 나지 않을 텐데 말이야.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원이를 찾으려고 할 텐데 잠을 자려고 하다니?’“언니, 혹시 성진 그 개자식한테 정말 당한 건 아니지? 왜 언니가 좀 이상하다고 느껴지지?”배경윤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그녀는 차설아와 배경수가 이미 헤어졌다는 걸 알고 있었다. 게다가 두 사람이 성진 같은 개자식 때문에 헤어졌다는 것도 알아 마음속으로 배경수를 다소 감싸고 있었다.오빠인 배경수는 오랫동안 두 사람의 관계를 위해 노력하고 많은 것을 바쳤기 때문이다.만약 상대가 성도윤이라면 차라리 패배를 인정하겠는데 성진 같은 쓰레기가 차설아를 가로챈다면 배경수는 물론이고 당사자가 아닌
“괜찮은 게 아닌데?”배경윤은 다급한 마음에 계속 침묵을 지키던 배경수를 향해 말했다.“오빠, 무슨 방법이라도 좀 생각해 봐. 설아 언니 분명 무슨 타격을 받은 모양이야. 아니면 이렇게 기운이 없을 리가 없다고. 둘이 아무리 헤어졌다고 하지만 언니 아예 내버려 두면 안 되지. 설아 언니 기다려서 같이 잘 얘기하려고 여기서 온밤 동안 기다린 거 아니야? 왜 이제 와서 벙어리처럼 가만히 있어?”그녀는 워낙 성격이 화끈했기에 아예 배경수를 차설아 방에 밀어 넣고는 문을 쾅 닫아 밖에서 잠갔다.배경수는 마음이 조급해져 문을 열려고 했지만 전혀 열리지 않아 목소리를 높였다.“배경윤, 너 정말 나한테 혼날래? 당장 문 안 열어?”“몰라, 오늘 밤에 꼭 설아 언니 기분 풀어줘. 잘 풀어주기 전엔 그 방에서 나올 생각 하지 마.”말을 마친 배경윤은 심지어 자물쇠가 쓸모가 없을까 봐, 쇠꼬챙이까지 꽂아 두었다.‘저렇게 우물쭈물해서야. 동생인 내가 도와주지 않으면 시간을 허투루 보내겠네!”그렇게 큰 방에는 차설아와 배경수 두 사람만이 남았다.“미안해, 경윤이가 생각이 짧은 애라는 걸 알잖아.”배경수가 두 손을 주머니에 꽂고는 일부러 덤덤하고 쿨한 척했다. 마치 전에 성대 그룹에서 있었던 일이 전혀 발생하지 않은 듯이 말이다.차설아가 입꼬리를 씩 올리더니 피곤한 미소를 짓고는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말했다.“미안하다고 말해야 하는 건 나야. 성진 그 사람, 완전 정신 나간 인간이었어. 그 사람한테서 쓸만한 정보를 빼낼까 생각했지만 헛소리만 계속하더라고. 괜히 시간만 낭비했어, 게다가 우리 두 사람의 감정만 상하고. 내가 정말 바보였지!”화장대 앞에 앉은 그녀는 힘없이 고개를 축 늘어뜨렸다.그녀는 아름다운 얼굴을 두 손에 깊이 묻혔는데 마치 이 세상을 마주하기 싫은 가녀린 타조처럼 어깨를 살짝 떨었다.그 모습을 본 배경수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가슴이 아파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보아하니 그 일을 알게 된 모양인데. 만약 울고 싶다면 소리 내어서 울어
해안 시내 한복판에 있는 어느 호텔에서.원이는 양반다리로 스위트룸 거실 소파에 앉아 작은 얼굴로 열심히 TV를 보고 있었다. TV에서는 지금 ‘도라에몽’이 방송되고 있었다.임채원은 깨끗이 씻은 과일을 원이에게 넘겨주며 웃는 얼굴로 말했다.“원이야, 과일 좀 먹어, 과일을 먹어야 비타민이 보충돼.”원이는 귀여운 웃음을 활짝 짓고는 말했다.“채원이 이모, 고마워요. 채원이 이모는 정말 아름답고 마음씨도 예쁘시네요. 역시 엄마의 좋은 친구세요.”“어머, 얘가 말을 참 예쁘게 하네.”“그럼요, 원이는 채원이 이모가 직접 씻은 달콤한 과일을 먹었으니 말도 예쁘게 해야죠!”몇 차례 대화가 오고 가자 임채원은 원이 덕분에 입꼬리가 귀여 걸렸다.이 꼬마는 악녀 차설아와 성도윤의 아이라며, 성씨 가문에 시집가는 데 지장을 줄 수 있어 절대 곁에 두면 안 된다는 걸 자신에게 백 번 경고했지만 천사 같은 아이의 미소와 마음을 녹이는 달콤한 말에 임채원은 자기도 모르게 원이와 친해지고 싶었다. 마치 마가 낀 것처럼 원이에게 맛있는 음식을 먹이고, 예쁜 옷을 입히고 싶었다.임채원은 자신을 따르던 강우혁을 불러 원이를 영흥 부둣가에 있는 특별한 사람의 손에 넘기려고 했지만 원이가 자꾸 눈에 밟혀 계속 시간을 미룬 거였다.상황이 급박하고 복잡한지라 그녀는 자신에게 반드시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한다고 경고했다.‘오늘 밤 당장 원이를 보내야 해, 이대로 시간을 끌면 안 된다고...’그녀는 과일 쟁반을 든 채 원이 옆에 앉았다.볼이 볼록하게 부풀어 올라 햄스터처럼 포도를 먹는 아이를 보며 임채원은 귀여워서 미칠 지경이었다.원이는 한눈팔지 않고 열심히 애니메이션만 봤다.임채원이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원이야, 너 도라에몽 좋아하잖아, 그럼 퉁퉁이를 제일 싫어하겠네?”하지만 원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아니에요, 퉁퉁이가 전혀 싫지 않아요. 퉁퉁이는 겉으로 나빠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비록 퉁퉁이는 매회 진구를 괴롭히지만
좋은 남자는 자고로 뺏어야 하는 법이다. 좋은 남자를 가지려면 뻔뻔스러워야 하고 마음이 독해야 한다. 시집을 잘 가야만이 굳건한 지위를 유지할 수 있고, 나약한 여자는 도태될 뿐만 아니라 아이도 따라서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나야 한다고 했다.그래서 임채원은 다른 재주가 없었지만, 남자 하나는 제대로 뺏었다.성도현은 바로 그녀가 뺏어온 남자였다, 게다가 그의 마음을 제대로 사로잡았었다.바보 같은 성도현은 임채원이 자기 아이를 임신한 줄 알지만 사실 그 아이는... 성씨 가문의 핏줄이 아니었다.그 말인즉, 그녀가 임신했던 아이가 건강하다고 해도 임채원은 그 아이를 낳을 수 없었다. 그리고 차설아는 마침 그 죄명을 떠안게 되었다.성도윤은 그녀가 처음부터 눈여겨보던 남자였다.성도윤에게 시집만 갈 수 있다면 그녀는 어떤 대가라도 치를 것이다.“원이야, 채원이 이모가 좋은 사람이라는 걸 믿어야 해. 채원이 이모는 절대 원이를 다치게 하지 않을 거라고. 엄마한테 감사해야 해, 채원이 이모 같은 좋은 친구가 있다는 걸 말이야.”임채원이 미소를 지은 채 부드러운 손길로 원이의 작은 얼굴을 어루만지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임채원은 이미 마음을 굳혔다.‘왜 원이는 하필 차설아가 낳은 아이인 거야? 꼬마야, 네가 탓하려면 엄마를 탓하거라!’갑자기 원이는 애니메이션을 보지 않고 몸을 돌리고는 포도알같이 둥글고 큰 눈으로 임채원을 빤히 쳐다봤다.“왜, 왜 그래?”임채원은 원이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했다.원이는 성도윤 판박이였다.특히 웃지 않을 때의 그 눈은 성도윤과 똑같이 예리하고 엄숙했는데 마치 사람의 속을 꿰뚫어 볼 수 있는 것 같았다.“아니에요, 원이는 채원이 이모가 너무 좋아서요. 채원이 이모를 만나고 알게 된 게 너무 좋아요... 채원이 이모, 안아주세요!”녀석이 말하고는 두 팔을 활짝 벌려 임채원의 목을 끌어안았다.“어...”임채원은 몸이 굳더니 꼼짝도 못 했다.원이의 손은 말랑말랑했다.그리고 꼬순내 나는 조그마한 원이는 그녀의 마음을 움
임채원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문을 열었는데 문밖에 서 있는 사람은 바로 그녀에게 잘 보이려고 온갖 아부를 떨었던 강우혁이었다.“나 상 받으러 왔어!”강우혁은 눈이 벌게진 채로 곧장 임채원에게 달려들더니 난폭하게 그녀를 벽에 밀치고는 키스를 퍼붓기 시작했다.임채원은 두 손을 들어 무표정한 얼굴로 키스를 하는 남자를 바라봤는데 시큰둥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한바탕 키스가 끝나고 강우혁도 재미가 없는지 차가운 얼굴로 그녀를 놓아줬다.“그렇게 내가 싫으면 왜 그때 나에게 약속했어? 내가 임무만 잘 수행한다면 나한테 몸을 내어주겠다고 말이야.”그는 긴 손가락으로 부드럽고 하얀 그녀의 얼굴을 만지고는 사랑과 원한이 섞인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이를 악물었다.“넌 그저 아무 반응도 영혼도 없는 나무 같아. 나한테 상을 주는 거야? 아니면 수모를 안겨주는 거야?”임채원이 콧방귀를 뀌며 말을 이어갔다.“뭐가 그렇게 급해? 나 임채원은 약속을 지키는 여자라고. 너한테 약속한 건 반드시 내어줄게. 다만 지금은 아니야...”“또 핑계를 찾으려고 그래?”두 눈을 붉힌 강우혁은 인내심이 거의 소진되었다.“나 이렇게 오랫동안 너만을 사랑해 왔어. 그때의 너는 꽃보다 청순했던 걸 단 한시도 잊지 않았어. 나는 그때 너의 입술에 키스하는 엄두조차 나지 않았지. 우리가 헤어지고 나서야 네가 얼마나 지독한 년인지 알게 되었어...”“왜 다른 남자는 쉽게 너를 얻을 수 있는데 나는 안 돼? 내가 한이 맺혀서 그래. 그래서 너한테 이렇게 집착하는 거고. 나는 꿈에서라도 너를 갖기를 원해. 너를 얻기 위해 얼마나 나쁜 짓을 많이 했는지 알아? 나 심지어 엄청 착한 여자애에게 상처까지 줬어. 그런데 이제 와서 약속을 번복하겠다는 거야?”남자는 말할수록 손에 더 많은 힘을 주며 표독스러운 눈빛을 보였다.“나 자극하지 마. 아니면 너 끌어서라도 같이 죽을 거니까.”임채원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피식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강우혁, 왜 갑자기 통제 불능이
성도윤은 차가워진 밤공기보다 소영금이 숨긴 사실이 더 궁금했다. 민이 이모는 젊었을 때부터 차씨 가문에서 일했기에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도 있었다.“조금 쌀쌀해지긴 했어요. 마침 추웠는데 가져다주셔서 감사해요.”성도윤은 문을 열면서 미소를 지었다.“도련님한테 괜히 제가 더 미안해져요. 설아 아가씨는 어릴 적부터 고집이 세고 뒤끝이 길거든요. 아직도 도련님한테 화가 났는지 계속 오두막에서 지내게 하네요. 이 이불을 덮으면 따뜻할 거예요.”민이 이모는 침대 위에 이불을 펴주면서 부드럽게 말했다.“이모님, 차씨 가문에서 일한 지 몇 년 되셨어요?”민이 이모는 멈칫하더니 어색하게 웃으면서 물었다.“갑자기 그런 건 왜 물으시는 거예요? 도련님이 궁금해할 줄은 몰랐어요.”“이모님처럼 한 가문에서 평생 일하시는 분은 드물잖아요. 게다가 진심으로 차씨 가문 사람들을 생각해 주고 보살펴주는 게 대단해서요.”“저는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에요. 회장님과 사모님이 저한테 아주 잘해주셨어요. 그래서 할 수 있을 때까지 일하는 거고요.”“설아한테서 들었는데 이모님은 대대로 의학을 전공했다면서요? 이모님 아버지는 이름을 날린 의사였고 이모님 실력도 훌륭하다고 들었어요. 사용인이 아니라 의학의 길을 걸으셨다면 더 큰 재부를 누리셨을 텐데, 미래를 포기하고 차씨 가문에 평생을 바쳤다는 게 정말 대단하고 멋져요.”“설아 아가씨가 과장해서 설명한 것 같아요. 저의 실력은 어디 내놓을 만큼 대단한 수준이 아니거든요. 긴급상황이 벌어지면 머리가 하얘져요. 그리고 누군가를 보살피는 게 더 적성에 맞고요. 설아 아가씨는 저를 가족의 일원으로 인정해 주셨어요. 설아 아가씨와 원이 도련님, 달이 아가씨를 보살피는 것만으로도 정말 행복해요.”민이 이모는 성도윤이 무언가를 물어보려고 한다는 것을 눈치채고는 말을 이었다.“도련님, 궁금한 것이 있으면 편하게 말씀하세요. 알고 있는 건 전부 알려드릴게요.”“역시 이모님은 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알고 계시네요.”성도윤은 어색하게
“무슨 사이냐고?”소영금은 성도윤이 이런 질문을 던질 줄 예상하지 못했는지 몹시 당황했다. 몇 초 후, 소영금은 애써 침착하게 대답했다.“무슨 사이긴, 사돈이지.”“엄마랑 설아 아버지는 그저 사돈 관계일 뿐이라고요?”성도윤은 소영금의 말을 믿지 않았다. 차설아의 아버지가 일기장에 기록한 내용을 보면 소영금과 차우진은 애틋한 사랑을 했던 사이였던 것이 분명했다.절대 단순한 사돈 관계가 아니었다.“도윤아, 지금 엄마를 의심하는 거야?”소영금은 덤덤하게 대답했지만 목소리에 분노가 깔려있었다.“그저 엄마한테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그렇지 않으면 불안해서...”“불안하다고?”소영금은 피식 웃더니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었다.“불안해할 필요 없어. 차설아는 너의 배다른 동생이 아니야. 네 동생이었다면 내가 너랑 차설아가 잘되게 계속 도와주었을 것 같아? 너도 참 단순하다니까...”“엄마는 내가 왜 불안해하는지 알고 있는 모양이네요. 엄마랑 설아 아버지는 예전에 연인 사이였던 거죠?”성도윤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그렇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어.”소영금은 긴 한숨을 내쉬면서 지난날들을 떠올렸다.“그 사람은 이미 하늘나라로 떠나갔어. 나도 살면 얼마나 더 살까? 시간 앞에서 과거는 한없이 초라하고 보잘것없단다. 지나간 일은 그저 지나가도록 내버려둬야 해. 이 일에 대해서 더는 묻지 마.”“하지만...”“도윤아, 늦었으니 너도 일찍 쉬어. 엄마는 늙어서 일찍 자지 않으면 다음 날에 기운이 없어. 너는 그저 설아랑 잘 지내고 차씨 가문과 성씨 가문의 인연을 계속 이어 나가면 돼. 알겠지?”소영금은 성도윤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해줄 수 있는 말이 별로 없었다.소영금은 차우진과 연관된 다른 얘기를 절대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 몇십 년을 거쳐 겨우 아문 상처를 꺼내면 곪아서 감당하기 힘든 고통을 느끼게 될 것이다.“알겠어요. 엄마, 시간 될 때 원이랑 달이를 보러 오세요. 네 식구가 함께 지내니까 얼마나 행복
그 뒤로는 전부 차씨 가문에서 벌어진 일이거나 소소한 일상이 담긴 내용이었다. 성도윤의 어머니가 언급되지 않은 일기에서 성도윤은 차설아가 어떻게 지내왔는지 알게 되었다.차설아의 부모님은 다정하고 상냥한 분이었고 차설아에게 모든 사랑을 퍼부으면서 행복하게 지냈다. 차씨 가문은 다른 재벌가보다 더 가족애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문이었다.성도윤은 미소를 지으면서 일기를 읽었다.“오늘은 우리 설아가 3살이 되는 날이다. 내 자식이지만 이렇게 사랑스럽게 클 줄 몰랐다. 설아는 다른 아이들과 사뭇 달랐다. 세 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벌써 블록을 조립하기 시작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500조각이 되는 블록을 이용해 집을 만들었다. 무려 두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총명한 기질이 드러나서 얼마나 뿌듯한지 모르겠다.”성도윤은 몇 페이지를 넘기고는 계속해서 읽었다.“시간이 흘러 어느덧 설아의 12살 생일을 맞이하게 되었다. 아내는 설아가 더 이상 어린 여자아이가 아니라고 했다.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나오지 않아서 걱정했는데 우리 설아에게도 그날이 찾아왔다. 설아는 여자라서 남자보다 더 많은 고통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대학교를 졸업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게 되면 지금 느끼는 것보다 수백 배 강한 고통을 느끼게 될 것이다. 아버지가 되어서 딸의 고통을 덜어주지 못한다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고 슬프다. 좋은 남자를 만나게 되면 그 남자에게 설아를 잘 부탁한다고 말해주고 싶다.”성도윤은 눈물을 흘리면서 읽어 내려갔다. 성도윤은 차설아에게 행복한 삶을 선물하지 못했고 차설아가 다치지 않게 보호해 주지도 못했다.성도윤은 자신이 좋은 남편이 아니라고 자책했다.“장인어른, 정말 죄송해요. 그동안 설아에게 너무 많은 상처를 주었지만 남은 생을 통해 반성하고 설아한테 모든 것을 쏟아부을 거예요. 설아를 보살피면서 행복하게 잘 살게요.”성도윤은 두 눈을 질끈 감고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두꺼운 일기장을 계속 펼쳐보았고 이상한 내용을 발견하지 못했다.그러나 마지막
차설아는 성도윤의 말을 듣더니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었다.“그럴 일 없으니까 꿈도 꾸지 말아요.”“알겠어. 이만 가볼게.”성도윤은 풀이 죽은 채 뒷마당에 있는 오두막으로 들어가서 휴식했다. 그리고 오전에 발견했던 그림 한 장이 계속 마음에 걸려서 뭐라도 찾으려고 했다.단서가 될 만한 것은 전부 차설아의 아버지가 쓰던 오두막 안에 있기 때문이다.만약 차설아의 아버지가 성도윤의 어머니를 사랑해서 그린 그림이라면 성도윤과 차설아가 한 가족이 될 가능성도 있었다.성도윤은 불안한 마음에 문을 안에서 잠그고 서재를 샅샅이 훑어보았다. 낡은 일기장이 유독 눈에 띄었는데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성도윤은 일기장을 손에 든 채 어쩔 줄 몰라 했다.‘장인어른의 일기장을 내가 봐도 되는 걸까? 하지만 보지 않으면 그 그림에 대해 설명할 수가 없어. 설아에게 전부 얘기해주기로 했으니까 확인해야 해.’주저하던 성도윤은 결국 자물쇠를 풀고 단서를 꼭 찾아야겠다고 다짐했다.자물쇠의 비밀번호는 소중한 사람의 생일로 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성도윤은 차설아의 아버지, 어머니, 차설아의 생일을 순서대로 입력했지만 자물쇠가 열리지 않았다.“설마 어머니의 생일은 아니겠지? 그, 그럴 리가 없어.”성도윤은 중얼거리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만약 일기장 자물쇠의 비밀번호가 성도윤의 어머니 생일이라면 드라마틱한 상황이 벌어질 것이 뻔했다.성도윤은 저도 모르게 손을 덜덜 떨었다.소영금의 생일은 3월 31일이었고 별자리는 전형적인 양자리였다. 솔직하고 화끈한 성격에 착한 마음씨를 지녀서 매력덩어리였다.성도윤이 소영금의 생일을 입력하자 자물쇠가 기적적으로 열렸다.“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성도윤은 차설아와 한 가족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머리가 하얘졌다. 그리고 잔뜩 긴장한 채 일기를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10월 17일, 날씨 맑음. 화창한 날씨와는 달리, 나의 마음속에 먹구름만 가득했다. 오늘은 나랑 영금이가 헤어진 지 5년이 되는 날이다. 나는 영금을 진작
차성철은 차설아를 설득할 수 없었기에 차설아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두었다.“설아야, 시간도 늦었으니 일찍 쉬어. 성도윤이 너한테 도움이 되면 이용해도 좋지만 계속 의지하고 기대면 결국 너만 힘들어져.”“그럼 도윤 씨랑 다시 만나도 간섭하지 않겠다는 뜻이야? 오빠는 역시 내 편이었어!”차설아는 신이 나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차성철과 성도윤 사이의 원한은 오래전부터 존재했었다. 그래서 차설아가 성도윤과 다시 만나게 되면 차성철이 극구 반대할 줄 알았다.하지만 차성철은 두 사람을 응원하기로 했다.“내가 반대해도 소용없다는 걸 알잖아. 어차피 네 선택이니 나는 너를 믿어보기로 했어. 성도윤과 싸우면서 둘 다 크게 다쳤지만 성도윤은 결국 나를 구해주었지. 이제는 원한 따위 내려놓아야 할 것 같아.”차성철은 흉터 회복 수술을 받은 후부터 성도윤을 향한 원망과 분노가 사그라들었다.게다가 두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고 의식을 되찾았기에 생명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되었다. 차설아가 살아만 있다면 다른 건 더 바라지 않는 오빠의 마음이었다.“오빠, 고맙고 사랑해. 오빠가 나를 응원해 주니까 마음이 놓여. 정말 다행이야!”차설아는 감동의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차성철이 반대할까 봐 성도윤을 다시 만난다는 소식을 차마 전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다른 차성철의 반응에 차설아는 감동했고 날아갈 듯이 기뻤다.“나는 응원해 준다고 한 적 없어. 성도윤이 믿음직스러운 남자인지 아닌지는 집으로 돌아가서 직접 보고 판단할 거야. 만약 내 마음에 들지 않게 행동한다면 집에서 내쫓을 테니까 각오하라고 전해. 내 동생이 좋아하는 남자라도 일단 내 눈에 들어야 해.”“알겠어. 오빠가 올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고 있을게. 오빠, 얼른 끝마치고 집으로 와.”차성철은 가라앉은 보물과 배를 찾고 당당하게 돌아가고 싶었다. 그래야만 성도윤과 대면했을 때 기죽지 않을 것이다.전화를 끊은 뒤, 차설아와 성도윤 사이에 오묘한 기류가 흘렀다. 차설아는 성도윤의 표정을
차설아는 성도윤이 대답하기도 전에 휴대폰을 재빨리 빼앗았다.“오빠도 얼른 쉬어. 나중에 또 연락할게.”차설아가 전화를 끊으려 하자 차성철은 한숨을 내쉬면서 대답했다.“그래. 상처가 아무니까 다쳤던 기억을 잊은 거겠지. 지금은 성도윤을 감싸고 돌아도 예전처럼 후회하게 될 거야.”“오빠, 그동안 도윤 씨랑 나 사이에 많은 일이 있었어. 하루라도 더 행복하게 지내고 싶은 내 마음이 과연 욕심일까? 그저 잠시라도 도윤 씨랑 함께하고 싶어. 도윤 씨 덕분에 요즘 정말 즐겁고 마음 편하게 지내고 있어.”차설아의 말에 슬픔이 가득 묻어있었다. 실명하고 나서 뒤바뀐 인생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런데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할 수도 없다면 차라리 죽어버리는 것이 나았다.차설아는 어둠 속에 갇혀있기보다 성도윤의 손을 잡고 같이 행복해지고 싶었다.“성도윤과 네가 계속 이대로 같이 지낼 수 있을 것 같아? 요즘 조사하면서 차씨 가문을 망하게 하려고 연합한 가문에 대한 자료를 찾아냈어. 우리가 상대할 사람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강하다고!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말이야.”차성철의 말이 무겁게 다가왔다. 차성철은 차설아한테 가문의 복수에 관한 얘기를 하지 않으려고 했었다. 그러나 매일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내다보면서 아무런 수확도 없이 외롭게 견디던 차성철은 지쳐갔다. 그래서 차설아에게 전부 털어놓으려고 했었다.“어느 가문인지 알아냈다는 뜻이야? 그 자료를 나도 한 번 봐야겠어. 상대가 누구든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차설아는 주먹을 꽉 쥔 채 격동된 어조로 말했다. 차설아는 실명했지만 부모님을 죽게 만든 원수를 두 손으로 직접 죽이고 싶었다.잘 나가다가 다른 가문의 함정에 빠져 몰락한 차씨 가문을 위해 목숨 걸고 복수하고 싶었다.“자료만 보고 알 수 있는 게 아니야. 집으로 돌아가서 천천히 설명할게. 이 일은 성도윤도 알아야 해.”차성철은 머뭇거리면서 말끝을 흐렸다.“도윤 씨도 알아야 한다고? 그럼 성씨 가문과 연관되어
성도윤은 일부러 특별한 호칭으로 차설아를 부르면서 다가갔다.“주인님, 무슨 일로 저를 부르셨어요?”“장난하지 말고 잘 들어요. 지금 아주 중요한 일이 있어요.”차설아가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조금 전에 오빠랑 통화하면서 부지런한 사용인을 구했다고 자랑했어요. 그런데 오빠는 당신이 나를 해칠까 봐 걱정하는 모양이더라고요. 다시 전화를 걸면 당신이 알아서 잘 대처하고 절대 신분을 들키면 안 돼요. 오빠의 심기를 건드리면 우리 둘 다 끝장이에요.”“나랑 다시 만나는 게 그렇게 부끄러워? 나를 당신의 남자라고 소개하기 싫어?”“그런 게 아니라 말하기 민망해서 그래요. 당신이랑 다시 만나지 않겠다고 했으면서 또 사랑하게 되었다고 말하면 오빠가 가만히 있을 것 같아요? 한두 번이 아니라 여러 번 큰소리쳐서 내 입장이 난처하게 되었어요.”차설아는 팔짱을 끼고 한숨을 내쉬었다.재벌가 아가씨로서 인간관계의 원칙을 칼같이 지켰었지만 성도윤을 만나고부터 모든 것이 뒤바뀌었다. 차설아는 성도윤 앞에만 서면 원칙을 어겼고 선을 넘었다.했던 말과 다르게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게 되었다.“내 목소리를 들으면 바로 들통날 텐데...”“그럼 일부러 가늘고 예쁜 목소리로 대화해봐요. 젊은 여자인 줄 알면 오빠도 더 의심하지 않을 거예요. 몇 마디만 하고 전화를 끊으면 돼요.”차설아는 말하면서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성도윤이 차성철을 속이길 바랐고 성도윤이 여자의 목소리를 따라 한다면 얼마나 웃길지 기대하고 있었다.“알겠어.”성도윤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미소를 지었다. 차설아가 전화를 건네자 곧바로 차성철에게 전화를 걸었다.“여보세요. 그쪽이 설아가 새로 들인 사용인이에요?”차성철은 엄숙한 어조로 말했다.“맞아요.”성도윤은 약속대로 여자의 목소리로 대화하지 않았다.“안녕하세요. 성도윤이에요.”“누, 누구라고요?”차성철은 기가 막혀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옆에 있던 차설아는 깜짝 놀라서 성도윤을 툭툭 쳤다.“도윤 씨,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오빠한
저녁 식사를 마친 뒤, 차설아는 차성철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동안 몸 상태가 좋지 않아서 차성철이 전화를 걸어올 때마다 핑계를 대며 다급히 끊었다.그러나 자신의 상황을 받아들이고 마음의 여유를 되찾은 지금, 차설아는 차성철과 덤덤하게 얘기를 나눌 수 있다고 생각했다.몇 초 후, 차성철이 전화를 받았다.“설아야,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너답지 않게 먼저 연락해서 놀랐어. 별일 없지?”차성철은 남부 지역에서 인력과 물자를 모아서 보물과 함께 가라앉은 배를 찾으려고 했었다. 배에 있던 보물은 하나도 찾지 못했고 차성철은 점점 지쳐갔다.차성철은 차설아가 해안시에서 혼자 지내다가 안 좋은 일이 생겨도 당장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늘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었다.그래서 차설아의 연락을 받고 마음이 더 무거워졌던 것이다. 차성철은 먼저 연락한 차설아를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차설아는 어려운 문제에 봉착하지 않은 이상, 먼저 차성철에게 연락할 리 없었다.“오빠, 그렇게 진지하게 물을 필요 없어. 기쁜 일이 생겨서 오빠한테 알려주려고 용기 내서 전화한 거야.”차설아는 소파에 편하게 누워서 다리를 꼬았다. 그러고는 미소를 지으면서 애교 섞인 어조로 말했다.“들어보니 기분이 좋은 모양이네. 무엇이 우리 설아를 기쁘게 했는지 들어나 볼까?”차성철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씩 웃으면서 대답했다.“음... 우리 집에 일도 잘하고 요리도 잘하는 사용인이 한 명 들어왔어. 월급을 적게 주는데도 군소리하지 않고 아주 부지런하게 일해. 오빠, 이런 사용인이 있어서 얼마나 편한지 몰라.”차설아는 드라마 여주인공처럼 수줍어했고 다른 사람에게 자꾸만 자랑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차성철과 성도윤은 원수 사이였기에 성도윤을 사용인이라고 둘러댔다.“그래? 네가 편하면 돼.”“너무 편해서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어. 어쩌다가 이런 사용인이 우리 집에 오게 된 건지...”“사용인을 쉽게 믿지 말고 계속 지켜봐. 집에서 너를 보살피는 사람인데 만약 겉모습에 속아서 경계하지
차설아는 깨어난 척하면서 기지개를 켜고는 성도윤이 떨어진 방향을 향해 말했다.“도, 도윤 씨? 도윤 씨가 어떻게 저의 방에 들어온 거예요? 그렇게 안 봤는데 진짜 변태 같아요. 그리고 장난감이라고 한 건 뭐죠? 도윤 씨가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알아듣지 못하겠어요.”성도윤은 차설아가 사실을 왜곡함으로써 자존심을 되찾는 모습을 보면서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검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고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당신 말대로 나는 뻔뻔스러운 변태 같은 남자야. 그래서 아이가 있는 여자의 방에 가만히 들어가서 장난감 역할을 자처하곤 했어. 주인님이 깨어났으니 이제는 주인님을 모시고 내려가서 음식을 대접해야지.”“음... 그래요. 푹 자서 그런지 기분이 좋아요. 당신의 상황극에 맞춰줄 테니 어서 옷부터 갈아입혀 줘요.”차설아는 긴 팔을 뻗고는 성도윤이 옷을 갈아입혀 주기를 기다렸다. 성도윤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안의 불을 켰고 편안한 잠옷을 찾아서 갈아입혀 주었다.두 사람은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이 붙어 섰고 애틋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차설아는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옷을 입은 뒤, 성도윤은 차설아의 가는 허리를 감싸면서 귓가에 속삭였다.“나를 유혹해 놓고 혼자 발 빼는 게 어디 있어? 당신이 모르는 척한다는 걸 다 알아. 나중에 우리 둘 다 몸이 회복하면 오늘 진 빚을 제대로 갚아야 할 거야. 알겠어?”“흥! 변태 같은 당신을 다시는 방 안에 들이지 않을 거예요. 이 손 치워요.”차설아는 장난스럽게 말하면서 성도윤의 팔을 툭 쳤다. 어릴 적부터 독하게 마음먹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 어른스럽게 행동했던 차설아는 여린 면을 내보이지 않았다.그러나 성도윤 앞에서는 마음이 편해져서 연약한 모습이거나 귀여운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다. 예전에 사도현이 차설아를 보면 ‘사랑스러운 여왕’이라고 불렀던 것도 그래서였다.차설아는 성도윤만 보면 저도 모르게 거만한 모습 대신 사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게 되었다. 그래서 부끄럽기도 하고 수치스럽기도 했다.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