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윤은 심호흡을 하고 화를 애써 억누르며 차설아에게 물었다.“어떤 사람인지 알고도 가깝게 지내? 정신이 어떻게 된 거 아니야?”“어떤 사람인데?”차설아는 성도윤의 매서운 눈빛을 똑바로 바라보며 비아냥거렸다.“해커로서 돈 받고 일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뭐가 문제야?”“그러는 당신은... 애인 감싸려고 몰래 증거 인멸까지 서슴지 않았잖아. 내가 보기엔 당신이 더 이상해. 당신이야말로 거리를 두어야 할 사람이라고!”“...”성도윤은 입술을 오므리고 말문이 막혔다.차설아의 말이 맞았다. 바람보다 더 비열한 건 성도윤 자신이었다. 무슨 자격으로 바람을 비난할까?바람은 시계를 보더니 웃는 얼굴로 말했다.“대표님, 죄송하지만 기차 시간이 되어서요. 좀 비켜주시겠어요? 처음 부모님을 뵈러 가는데 늦으면 안 좋잖아요.”바람은 치명타를 날렸다!성도윤은 이미 분노가 극에 달했고, 질투도 극에 달해 다른 것은 돌볼 겨를도 없이 차설아의 손목을 잡고 말했다.“이 여자는 주인이 있어요. 당신이랑 가지 않을 거예요.”“성도윤, 뭐 하는 거야, 이거 놔!”차설아는 난처해서 남자의 손을 뿌리치려고 애를 썼다.성도윤은 더욱 힘을 주었고, 여자를 끌어안으며 더욱 강력하게 말했다.“놓아주지 않을 거야. 절대 이 사람이랑 못 가!”“당신이 뭔데?”‘성도윤 미친 거 아니야? 내가 바람의 부모님을 만나러 가는데 왜 뜬금없이 행패를 부려?’차설아는 남자를 향해 소리쳤다.“난 이미 당신이랑 이혼했어. 자유의 몸이라고! 당신이 뭔데 간섭이야?”“맞아, 우리는 이혼했어. 하지만 난 당신 할아버지랑 약속했어. 평생 당신이 부귀영화를 누리게 해 주겠다고. 이 사람은 그저 한낱 해커에 불과해. 권세도 힘도 없고, 재력도 부족해, 당신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없으니 당연히 보낼 수 없지.”“뭐라고?”차설아는 아무리 생각해도 할아버지가 언제 성도윤에게 이런 말을 했는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성도윤은 냉철한 눈빛으로 오만하게 말했다.“당신이 나랑 실력이 맞먹는 남자를
이 장면을 본 현장의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성도윤과 차설아도 놀란 얼굴로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다.바람은 눈썹을 찡그려 다소 불쾌하게 자신을 향해 무릎을 꿇고 있는 노인을 보았다.“아저씨, 제가 시간이 되면 출발한다고 했잖아요. 왜 굳이 나오셨어요?”노인은 머리를 숙이고 공손하지만 강력한 태도로 말했다.“도련님, 어르신께서 오래 기다리셨어요. 도련님이 또 마음을 바꾸실까 봐 직접 호송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헬기를 준비했으니 협조 부탁드립니다.”“호송?”바람은 불만스러운 듯 눈을 흘겼다.“호송이 아니라 거의 압송이네요.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도 할아버지는 여전히 하나도 변하지 않으셨네요. 그러니 제가 집을 나갔죠.”“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이번엔 손주 며느리를 데리고 갈 테니 절대 도중에 도망가는 일은 없어요!”이 말을 들은 오 아저씨는 눈이 반짝이더니 차설아를 한 번 훑어보았다.“이분이 미래의 작은 사모님이시겠네요. 아주 단아한 모습이 딱 어르신께서 좋아하시는... 아니, 선우 가문 전체가 원하는 미래 사모님의 이미지입니다.”“아!”차설아는 난처해서 바람을 흘겨보았고, 포도알처럼 맑은 눈동자에는 분노가 가득했다.‘바람 이 자식! 일을 크게 키웠어. 온 가문이 나서고 있잖아...”차설아는 지금 가기도 그렇고, 안 가기도 그렇고 난처한 상황이 되었다.“선우 가문?”성도윤의 눈동자는 갑자기 날카로워지더니 바람을 자세히 훑어보았다.겉보기에는 소탈하고 별 볼 것 없어 보이는 한낱 해커의 신분이 심상치 않아 보인다!“맞아요, 대표님.”바람은 고개를 끄덕이고 입가의 웃음이 깊어지더니 느릿느릿 말했다.“S 시의 지배자, 선우도환 선생님이 바로 제 친할아버지입니다.”“그럼 당신이...”“저는 선우 가문의 4대 독자이며, 할아버지의 유일한 적손인 선우시원이죠. 바람은 그저 제가 한가할 때 사용하는 해커의 신분일 뿐이에요.”“당신이었다니!”바람의 말을 들은 성도윤은 모든 것이 이해되었다.사람들은 모두 해안 시의 성가와 S 시의 선우 가
그가 말하고는 당연하다는 듯이 차설아를 자기 옆으로 끌어당기려 했다.“그래요?”성도윤은 당연히 차설아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도도한 얼굴로 건방지게 말했다.“그럼 당신한테 그런 재주가 있는지 한 번 봐야겠네요!”그렇게 차설아는 인형처럼 두 남자에게 한 쪽씩 끌려다니며 고생했다.“그만!”차설아는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소리를 지르고는 한 사람씩 발로 걷어차며 겨우 두 사람에게서 벗어났다.“두 사람 정신이 어떻게 된 거 아니야? 내가 인형이야? 막무가내로 막 뺏을 수 있는? 내 의견은 안 물어보냐고?”성도윤과 선우시원은 마침내 힘겨루기를 멈추고는 모두 차설아를 바라봤다.성도윤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생각이 있으면 이 남자가 불순한 동기를 가지고 당신에게 접근한 걸 알아챘어야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는 뻔하잖아.”선우시원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솔직하게 말했다.“불순한 동기가 있었던 건 맞아, 이미 너에게 푹 빠졌어. 네가 선우 가문의 미래 여주인이 되었으면 좋겠고. 선우 가문은 성씨 가문 못지않게 너에게 풍요롭고 안정된 삶을 줄 수 있어.”차설아는 성도윤을 보다가, 또 선우시원을 보더니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선우시원 쪽에 서고는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뻔하긴 해. 한 사람은 나에게 상처를 안겨줬고, 다른 한 사람은 곧 나에게 행복을 가져다줄 건데 내가 누굴 선택하겠어?”말을 마친 그녀는 선우시원의 팔짱을 끼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탑승구로 향했다.이 순간, 그녀는 전에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쾌감을 느꼈다. 그리고 성도윤에게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그녀가 다른 사람에게는 충분히 빛나 보인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성도윤은 멀어져 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고는 가슴이 아팠다. 마치 중요한 뭔가를 다른 사람에게 뺏기고 영혼이 털린 느낌이었다.옆에 있을 때는 소중함을 모르고 살았지만, 막상 잃게 되니 그는 마음이 허전하고 괴로웠다.차설아는 선우시원과 비행기에 올라탔다. 그녀는 허리를
차설아가 고개를 돌리자 선우시원의 깊은 눈망울과 눈이 마주치고는 저도 모르게 흠칫했다.그리고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너는? 너는 진심이야?”선우시원은 가슴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고 표정이 매우 부자연스러웠다.‘미치겠네. 그냥 장난으로 시작했는데 왜 갑자기 내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진 것 같지?’그는 눈썹을 치켜들더니 농담 반 진심 반으로 말했다.“나야 당연히 진심이지. 네가 스파크라는 걸 알게 된 후로 4년 전에 너랑 결혼하지 않은 걸 매일 후회하고 있어...”“그래?”차설아는 입꼬리를 씩 올리며 말했다.“하지만 난 이혼한 여자야. 선우 가문은 그래도 명망 있는 가문인데 이혼한 여자를 집에 들이겠어?”“이혼한 여자가 뭐 어때서.”선우시원이 바로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이혼한 여자야말로 일류 아니야? 미련한 남자들이 보는 눈이 없어 그렇지, 난 오히려 이혼한 여자가 더 좋은데? 완전 땡큐라고!”“네가 괜찮다고 하더라도 너희 가문에서 신경 안 쓰는 건 아니잖아.”“걱정하지 마. 선우 가문에서 아무도 뭐라고 하지 못할 거야. 오히려 두 팔 벌려 널 환영할 거라고!”선우시원이 말을 이어갔다.“우리 할아버지는 그 누구에게도 쉽게 고개를 숙이지 않는 분이신데, 유일하게 너희 할아버지만을 진심으로 존경해. 네가 차무진 장군님의 손녀라는 걸 알게 된다면 아마 그 자리에서 우리 둘의 혼사를 정할걸? 성씨 가문에서는 널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선우 가문은 무조건 널 반기고 아껴줄 거라고. 그러니 한번 생각해 보는 건 어때?”선우시원은 계속 차설아에게 어필했다.그런 그의 말에 차설아도 우울했던 마음이 한껏 가벼워지고 유쾌해졌다.“그래, 그럼 잘 생각해 볼게.”그녀의 말에 선우시원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좋아, 그럼 동의한 걸로 알고 있을게!”해안에서 S시까지 비행기로 세 시간을 가야 했다.차설아와 선우시원은 한참 수다를 떨다가 잠이 들었고, 그녀가 깨어났을 때 비행기는 이미 착륙했다.“이따가 비행기에서 내릴
‘전쟁이 난 건가? 아니면 내가 뭘 잘못한 건가?’선우시원은 부드러운 손길로 그녀의 머리를 만지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이게 우리 선우 가문에서 손님을 맞이하는 관례야. 많이 화려하지? 그래서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잖아!”“그런 거야?”차설아는 그제야 마음이 놓여 투덜대기 시작했다.“어디 화려한 것뿐이야? 나 너무 놀랐잖아... 난 그저 여자친구인 척하며 너와 함께 부모님을 뵈러 왔을 뿐인데 여기서 목숨을 내놔야 하는 줄 알았어!”“걱정하지 마, 너는 우리 선우 가문의 손님이라서 최고 예우를 해준 것뿐이야. 너를 반겨주고 아껴주느라 바쁠 텐데 왜 목숨을 내놓으라고 하겠어?”선우시원이 말하고는 갑자기 차설아의 손을 잡았다.“연기를 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진짜 커플처럼 다정하게 행동해. 할아버지가 워낙 눈치가 빠르셔서 자칫하면 들통날 거야.”차설아는 오히려 선우시원의 손을 꼭 잡으며 의리 있게 말했다.“알겠어, 나한테 맡겨!”그렇게 두 사람은 손을 꼭 잡은 채 비행기에서 내렸다.차설아는 저 멀리 병사들이 서 있는 끝에서, 훈장이 가득 달린 군복을 입은 노인이 한 남자와 한 여자의 부축을 받으며 차에서 내려오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노인은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할아버지! 아빠! 엄마!”선우시원은 뜨거운 눈물을 글썽이며 감격에 겨운 표정으로 그들을 향해 손을 저으며 인사했다.그는 집을 떠난 지 오래되어 그를 예뻐하던 할아버지와 부모님이 많이 그리웠다.그는 차설아의 손을 놓고 두 팔을 벌려 그들과 뜨거운 포옹을 나누고 싶었지만 포옹은커녕, 할아버지는 손으로 그의 얼굴을 툭 치며 말했다.“녀석아, 비켜. 길 막지 말고!”선우도환은 귀찮다는 듯이 선우시원을 밀어내고는 얼굴에 자애로운 미소를 가득 머금고 선우시원의 뒤에 있던 차설아를 향해 말했다.“네가 설아야? 차무진 장군님 친손녀?”차설아는 선우도환의 열정적인 모습에 난감한 얼굴을 보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네, 제가 차설아입니다. 차무진은 저희 할아버지고요.”
“선물이요?”차설아는 손을 젓더니 뒷걸음질을 치며 말했다.“할아버님, 마음만 받을게요. 선물은 정말 괜찮아요. 오히려 제가 선물을 준비했어야 하는데요. 이러실 필요 없으세요.”차씨 가문이 몰락하고 성씨 가문에 시집간 뒤로부터 차설아는 그동안 수많은 모욕과 외면을 당했다. 이렇게 사람들의 존중과 사랑을 느껴본 지는 너무 오래되었다.그래서 선우 가문의 아낌없는 친절에 차설아는 감동하기도 했고, 또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그녀는 지금 선우시원과 함께 연기하고 있을 뿐이었고, 그들을 속인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선우도환이 미간을 구기며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얘야, 그게 무슨 말이냐. 그럴 필요가 없다니. 나 선우도환은 한다면 하는 사람이야. 네가 선우 가문의 미래 여주인이라고 말했던 건 절대 농담 아니라고. 그러니까 절대 선물을 그냥 주는 거 아니야. 예물이라고 생각해도 돼!”“그... 그럴 필요 없지 않을까요?”차설아는 어색한 마음에 당장이라도 이곳에서 도망가고 싶었다.선우 가문의 사람들이 이렇게 진지할 줄 알았으면 절대 선우시원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을 것이다!차설아는 계속 선우시원에게 눈짓을 했는데 선우시원은 못 본 척했고, 심지어 흥미로운 얼굴로 선우도환을 향해 말했다.“할아버지, 말로만 선물 준다고 하지 마세요. 예물을 제대로 준비하지 않았다면 오히려 제가 부끄러워 쥐구멍을 찾아야 한다고요!”“전에 성씨 가문에서 설아를 집에 들일 때, 예물로 몇백억짜리 별장을 줬다고 하네요. 할아버지는... 얼마를 줄 셈이세요?”“쳇, 돈 얘기를 하면 속물로 보이잖니. 지금 세상에 돈 부족한 사람 어디 있어? 성씨네 같은 벼락부자나 그런 걸 좋아하지.”선우도환은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는 해안시 8대 가문에서도 서열 1위인 성씨 가문이 전혀 안중에도 없었다.선우도환은 턱을 치켜들더니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줄을 지어 서 있던 총을 메고 있는 병사들을 가리키며 차설아에게 말했다.“설아야, 넌 형님 친손녀야, 장군님의 피를 물려받
이 행동을 다른 사람이 했다면 어색하게 보일 수도 있었지만 차설아가 하니 전혀 이상해할 것 없었다. 마치 그녀는 전투를 위해 태어난 것처럼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잘됐네, 참 잘됐어!”옆에 서 있던 선우도환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흐뭇한 표정을 지은 채 눈물을 글썽였다.‘형님, 그곳에서 보고 계십니까? 설아는 형님의 유전자를 그대로 물려받았나 봅니다. 타고난 장수라고요! 설아의 미래가 아주 기대됩니다!’선우준수와 양보아는 손을 맞잡더니 눈물을 글썽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너무 멋지네. 우리 못난 아들이 드디어 한 건 했군! 완전 우리가 꿈꾸던 며느리 아니야?”하지만 선우시원은 이 상황이 불편하기만 했다.‘어떡하지? 할아버지 완전 진지해 보이시는데. 군단까지 선물했으니. 이제 거짓말이 들통난다면 난 과연 무사할 수 있을까?’그들은 고급 군용차를 타고 S시의 가장 럭셔리한 레스토랑으로 향했다.양보아는 차설아를 미래 며느리로 결정한 모양인지 아들까지 내팽개치며 차설아 옆에 꼭 붙어 앉았다.“설아라고 불러도 되지? 설아야, 저 쇼핑몰이 보여? 우리 선우 가문 소유야. 저 오피스텔도 우리 선우 가문 소유고... 그리고 멀리 보이는 높은 방송탑이 보이지? 5개의 지역 방송국이 다 저 방송탑을 사용하고 있어, 저것도 우리 선우 가문에서 투자한 거야...”차설아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선우 가문의 실력은 성씨 가문과 막상막하일 정도로 대단했다. 하지만 두 가문은 조금의 차이가 있었다.성씨 가문이 자리 잡고 있는 해안시는 연해와 가깝고 교통이 발달했기 때문에 경제도 고도로 발달했다. 그래서 비즈니스계에서는 그야말로 일인자라고 할 수 있었다.하지만 S시는 달랐다. 내륙 지역이기 때문에 비즈니스는 상대적으로 그렇게 발달한 편이 아니었다. 선우 가문은 높은 권력으로 자원을 독점했기에 발전하고 강대해질 수 있었다.두 가문 모두 실력이 대단했다. 하지만 선우도환과 성주혁이 서로 원한이 있는 관계로 두 집안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다행히 그들은 서로 간섭하지
“누가 이렇게 겁도 없이 쳐들어 와? 참으로 건방지구먼!”선우도환이 식탁을 내리치더니 싸늘한 목소리로 종업원을 향해 말했다.“들어오라고 해. S시에서 감히 선우 가문 지역에 쳐들어오려고 한 사람은 오랜만이니까.”차설아도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입구를 바라봤다.선우 가문은 S시에서 워낙 큰 권력을 쥐고 있었다. 그런 선우 가문에게 도전장을 내밀다니, 상대도 분명 예사롭지 않을 것 같았다.연회장 두 문이 열렸다.고급 비단의 옷을 입고, 값비싼 명품 가방을 든 우아하고 화려한 여인이 여유롭게 걸어 들어왔다.“오랜만이네요, 큰아버지. 조카가 너무 보고 싶어서 특별히 해안에서 찾아왔어요. 큰아버지, 혹시 저도 같이 식사를 해도 될까요?”여인은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20억짜리 에르메스 가방을 식탁에 올려두고는 자연스럽게 착석했다.우아하고 건방진 여인은 다름 아닌 차설아의 전 시어머니, 소영금이었다!“어머님!”차설아는 너무 놀란 나머지 저도 모르게 입을 열고는 다급하게 호칭을 바꿨다.“여사님, 이곳엔 어쩐 일로 오셨어요? 여긴 S시라고요!”‘여긴 해안이 아니라 선우 가문의 지역이라고. 선우 가문과 성씨 가문 사이에 원한이 있는 걸 모르고 왔나? 엄청난 수모를 당할 건데.’“어머나!”소영금은 곧바로 옆에 있던 차설아를 보더니 놀란 표정을 짓고는 눈썹을 치켜들며 말했다.“설아야, 우리 착한 며느리. 오랜만이네. 이게 무슨 우연이야. 왜 여기에 있는 거야? 방금 나 뭐라고 불렀어? 한 번 더 불러볼래?”차설아는 말문이 막혔다.‘어제 금방 봤는데 호들갑이긴. 그리고 우리가 언제부터 이렇게 친했다고. 연기를 참으로 잘하네!’이 자리에서 가장 흥분하고 화가 난 사람은 선우시원의 어머니인 양보아였다.그녀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대문을 가리키며 말했다.“소영금, 며느리란 말은 함부로 하는 거 아니야... 당신 아들과 설아가 이혼한 건 전 세계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야. 설아는 지금 나 양보아의 미래 며느리라고. 어디서 친한 척이야. 여기
이틀 뒤, 차설아는 수술복으로 갈아입고 성진과 함께 별장의 무균 수술실로 들어갔다.“두 분은 수술대에 누워주세요.”안과 교수는 둘을 데리고 간단한 검사를 진행한 뒤 마취 테스트를 마치고는 간호사더러 그들을 수술대에 눕히게 했다.차설아는 검사를 진행하는 와중에도 말 한마디 하지 않은 채 모자만 푹 눌러쓰고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수술대에 멍하니 누워있었다.엄청 큰 수술대 위에는 환한 전등이 아주 많이 달려있었는데 그것들이 하도 눈부셔서 차설아는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광환이 감긴 눈앞을 스쳐 지나가자 차설아는 그제야 자신이 지옥문 앞에 와있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후회돼요?”그때 옆에서 성진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후회되면 지금이라도 가요.”“후회 안 해요.”하지만 차설아는 태연하게 웃으며 답했다.“눈 하나로 그렇게 많은 돈을 얻는데 제가 왜 후회하겠어요.”“그래요. 절대 손해 본다고 느끼지 않게 내가 달라는 거 다 줄게요.”성진이 확신에 찬 약속을 하자 마취제 배합을 마친 의사가 차설아와 성진을 향해 말했다.“이제 마취 시작할 건데 전신 마취라서 두 분 다 의식을 잃으실 거예요. 깨어나는 시간은 체질에 따라 다른데 일반적으로 3시간에서 6시간 사이로 의식 차리실 겁니다.”“네.”“시작해주세요.”“시작하시죠.”의사의 말에 차설아와 성진 모두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자신의 등을 통해 약물이 주입되는 걸 느끼던 차설아는 빠르게 의식을 잃었고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차설아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하나 알 수 있는 건 자신의 세상이 비로소 어두워졌다는 것이다.“거... 거기 누구 있어요?”처음 겪어보는 암흑에 심연에 빠진 것 같은 두려움을 느끼며 몸을 떨던 차설아는 허공에 대고 손을 저어보았다.“깨어났어요? 어때요, 눈은 안 아파요? 의사 선생님이 적어도 일주일은 있어야 상처가 다 낫는다고 하셨어요. 엄청 아프죠...”귓가에 들려오는 목소리가 박서영이 아님을 알아챈 차설아는 잔
대단한 집안 아가씨가 평생 숨겨야 할 남자들에게 강간당한 일을 이렇게 수면 위로 꺼낸 건 다 진무열의 신임을 얻기 위해서였다.성도윤의 최측근이 진무열이 자신을 믿고 도와준다면 성도윤과의 관계발전도 아주 쉬워질 것이기 때문이었다.“아가씨가 대표님을 그 정도로 사랑할 거라고는 정말 생각도 못 했어요...”모든 얘기를 들은 진무열의 마음에는 거센 파동이 일었다.성도윤을 향한 차설아의 사랑은 달빛처럼 부드럽고 깨끗하기만 하다면 서은아의 사랑은 뜨거운 태양처럼, 영원히 빛을 낼 것처럼 정열적이었다.둘 중에 어떤 사랑이 성도윤한테 더 맞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뜨거운 편이 나은 것 같았다.“서은아 씨랑 대표님 감정은 아직도 전과 다를 바가 없으니까 걱정은 마세요. 대표님이 요즘 바빠서 그렇지 서은아 씨 생각은 항상 하고 계세요. 바쁜 일만 다 처리하면 예전처럼 더 좋아질 거예요.”상태가 안 좋은 저를 위로하기 위한 말임을 눈치챈 서은아는 진무열을 노려보며 말했다.“지금 어린 애 달래요?”“도윤이가 누굴 생각하는지는 진 비서님이 더 잘 알잖아요. 그냥 잠깐 나를 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뿐이고 나중에 기억 돌아오면 또 차설아한테 가버릴 건데... 그럼 나는 비서님 말대로 그저 해프닝, 변수가 되어버리겠죠!”“수술 결과가 어떨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죠. 만약 대표님이 기억해낸 게 서은아 씨와 보냈던 행복한 일상이면 서은아 씨를 선택할 수도 있지 않겠어요?”“그럴 리가요. 도윤이랑 그 여자가 얼마나 깊이 얽혔는데 기억만 돌아온다면 내 자리는 없어지는 거나 마찬가지예요.”“그럼 서은아 씨는 뭘 원하는 거예요?”진무열은 울면서 고통스러워하는 서은아를 슬쩍 떠보듯 물었다.“도윤이 아직 다 나은 것도 아니고 뇌가 다친 적도 있으니까 의사 선생님 말씀대로 일단은 그냥 놔두는 게 어떠냐는 말을 하는 거예요. 그냥... 이 수술 하지 말고 계속 기억 안 나는 채로 살아도 되는 거잖아요. 내가 진짜 잘할게요!”한시가 급했던 서은아는 이 수술을 원하지 않
그 말을 들은 서은아는 표정을 굳히며 오만한 태도로 진무열을 바라보았다.“무슨 뜻이에요? 지금 도윤이에 대한 내 마음을 의심하는 거예요?”“아니요, 마음을 의심하는 게 아니라 진심이 어느 정도인지를 확인하고 싶은 거예요. 정확히 말하면 대표님을 위해서 어떤 희생까지 할 수 있는지가 궁금한 거죠.”이기적이고 강압적인 보스라 할지라도 감정에서는 많은 시련을 겪었었기에 진무열은 서은아가 성도윤에게 정말 어울리는 짝인지를 확인하고 싶었다.차설아 때문에 죽을 뻔했는데 만약 서은아도 이상한 마음을 품는다면 성도윤이 또 위험해질 수도 있기 때문에 진무열이 걱정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도윤이를 위해서라면 뭐든 다 할 수 있어요 나는. 목숨까지도 내어줄 거에요.”진무열의 말에 서은아는 입술을 깨문 채 힘들었던 지난날을 떠올리며 눈시울을 붉혔다.“그때 그 여자 오빠가 미친 사람처럼 도윤이 납치해갔을 때 내가 도윤이 구하려고 무슨 짓까지 했는지 진 비서님은 모르죠?”이 얘기는 처음 듣는 진무열은 호기심에 차 물었다.“무... 무슨 일을 겪었는데요?”“차설아 씨 오빠가 도윤이를 얼마나 싫어하는지는 비서님도 알죠?”“대표님과 자정 살인마가 오랫동안 싸우기는 했죠. 많은 일이 있었지만... 그래도 지금은 지나간 일은 다 잊고 잘 지내는 걸로 알고 있어요.”두 사람의 원한에는 깊은 관여를 하지 않고 가끔 조언을 해준 게 전부였기에 진무열은 자세히는 모르지만 그래도 둘 다 원한을 내려놓고 화해하는 게 서로에게 나은 선택이라고 생각했었다.성대 그룹의 고위 간부들은 이 기회에 자정 살인마를 제대로 눌러놔야 한다며 성도윤을 부추겼지만 성도윤은 결국 박성훈을 보내 차성철을 구해주며 그와의 화해를 선택했다.타인에게 장미를 건네면 내 손엔 그 잔향이 남는다고 그 인연으로 성도윤도 이번에 박성훈에게 수술받아 기억을 되찾을 기회를 잡게 된 것이다.이렇게 보니 마음을 곱게 쓰는 사람은 하늘도 굽어살펴 주는 것 같았다.“둘은 화해했지만 나는... 내가 받은 상처는
그 모습을 보던 성도윤은 눈썹은 꿈틀거렸지만 더 이상 묻지는 않았다.“됐어, 성훈이 형 실력이면 너희들이 아무리 숨겨도 어차피 다 알게 될 텐데 뭐.”그 말을 들은 서은아는 저도 모르게 손이 떨려와 들고 있던 보온 용기까지 떨어트려 버렸다.“아! 아파...”뜨거운 국물에 덴 손이 아픈지 그녀가 비명을 지르자 성도윤도 빠르게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으며 그녀에게로 향했다.“괜찮아?”“응, 그냥 살짝 데인 것뿐이야.”말로는 괜찮다고 하지만 서은아의 표정은 서러움 그 자체였다.“봐봐.”여자의 앞에 쭈그려 앉은 성도윤은 빨개진 손등을 보며 미간을 찌푸리더니 진무열을 향해 말했다.“진무열, 은아 보건실로 데려가.”“괜찮아, 나 진짜 아무렇지도 않아.”하지만 서은아는 계속 괜찮다고 하며 바닥에 엎질러진 국물을 보며 말했다.“너 주려고 온 오후 끓인 건데 다 쏟아버려서 어떡해... 그리고 네 러그도 더러워졌네.”“그거야 다시 끓이면 되고 러그도 사람 불러서 청소하면 되는 거지. 그런데 네가 여기서 다치면 내가 미안하잖아 괜히. 그러니까 말 들어.”“알, 알겠어.”성도윤의 다정한 모습을 다시 본 서은아는 밀려오는 행복감에 어찌할 줄을 몰라했다.하지만 만약 수요일의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난다면 성도윤은 다시는 자신에게 이토록 다정한 모습은 보여주지 않을 것이다.기억을 되찾은 그라면 전에 자신이 의사를 매수해 뇌에 이상이 생기게 만든 걸 알아내는 것도 시간문제일 텐데 그래서 서은아는 지금 시한폭탄을 안고 있는 것 마냥 불안했다.“아가씨, 저 따라오세요.”서은아를 데리고 성대 그룹 보건실로 향한 진무열은 의료진이 처치를 해주는 걸 보며 팔짱을 끼더니 서은아를 향해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졌다.“우리 대표님 마음 사로잡기가 쉽지 않죠?”“진 비서님도 내가 너무 달라붙으니까 꼴사나워 보여요?”“아가씨가 대표님을 진심으로 좋아한다면 전혀 꼴사납지 않죠.”진무열은 또 옛날의 차설아를 떠올리며 말했다.“예전 사모님도 서은아 씨처럼 우리 대표님한테 지
보온 용기를 들고 들어온 서은아는 활짝 웃으며 성도윤에게로 다가섰다.“보신탕 끓여왔는데 이게 위에 좋대, 너 안 그래도 위 안 좋은데 얼른 마셔봐.”그녀가 뚜껑을 열자마자 향기로운 보신탕의 냄새가 확 풍겨오자 진무열은 감탄을 자아내기 시작했다.“와, 냄새 너무 좋은데요. 서씨 집안 아가씨로 살면서 요리는 언제 배우셨어요?”책상을 마주 앉아 계약서를 넘기던 성도윤은 눈길도 돌리지 않은 채 무미건조하게 말했다.“그렇게 좋으면 가져가서 마시던가.”“...”성도윤에게 보신탕을 덜어주려던 서은아는 매정한 남자의 말에 행동을 멈추었는데 진무열도 바보는 아닌지라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다급히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아가씨가 대표님 위해서 직접 만들어 오신 건데 제가 뭐라고 감히 그걸 마셔요, 저는 그냥 뜨거운 물 마실게요.”그 말에 빠르게 마음을 가다듬은 서은아가 진무열을 보며 웃었다.“많이 해와서 괜찮아요. 드실 거면 덜어드릴게요.”“말씀은 너무 감사하지만 그냥 장난이었어요. 대표님 요새 마침 속 안 좋으신데 대표님 다 드리세요. 앞으로 종종 해주시면 좋고요...”말을 하던 진무열은 갑자기 제 아내를 떠올리며 말했다.“대표님 이혼 전에는 사모님도 이런 보신탕 자주 해왔었는데 대표님만 드리는 게 아니라 회사에서 만나는 사람들한테마다 다 나눠줬었어요. 회사 복지라면서 곳곳에 놔두고 왔었는데 사람은 보이지 않아서 우렁각시라는 별명도 얻었죠.”“그... 그래요?”자신을 난처하게 하는 진무열의 말에 서은아는 얼굴이 빨개진 채로 대꾸했다.이렇게 눈치 빠르고 일 잘하는 사람이 성도윤 옆에 있으면 언젠가는 자신의 일을 방해할 게 분명했기에 서은아는 하루빨리 진무열부터 내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한편 일에 열중하며 진무열과 서은아의 대화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던 성도윤은 갑자기 들리는 ‘이혼’과 ‘사모님’이라는 단어에 고개를 들며 물었다.“진 비서, 아까 이혼이라고 했어?”그는 미간을 찌푸린 채로 캐묻기 시작했다.“내가 전에 결혼을 했었어? 그리고
전화를 끊은 차설아는 생각 없이 말만 내뱉는 제 입을 원망하기 시작했다.어릴 때부터 죽마고우로 지내오다가 이제야 사랑의 결실을 맺는 사람들을 응원은 못 할망정 저런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었으니, 혹시라도 그게 도화선이 되 둘 사이에 무슨 문제라도 생길까 봐 차설아는 점점 두려워졌다.무슨 일이 있어도 남의 혼사는 깨는 게 아니라는데 이런 금기를 범했으니 재수 없는 일이 생길 것만 같았다.한편 성도윤은 전화가 끊긴 핸드폰을 든 채 복잡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성대 그룹 대표 사무실에 앉아있던 그의 옆에는 진무열과 그가 불러온 해커도 함께 있었다.“찾았어?”“네, 찾았습니다.”성도윤이 전화를 할 때도 열심히 키보드만 두드리고 있던 젊은 남자 하나가 흥분에 찬 목소리로 답했다.“전화 신호가 잡히는 곳은 해안시에서 8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수림입니다.”남자가 빠르게 좌표를 찍어주자 진무열은 그걸 인터넷에 검색해봤는데 이내 난처한 기색을 드러내며 말했다.“대표님, 이 별장... 성진 씨 별장인데 차설아 씨가 성진 씨랑 같이 있는 걸까요?”“나도 눈 있으니까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돼.”함께 화면을 보고 있던 성도윤은 주먹으로 책상을 세게 내리치며 헛웃음을 흘렸다.“옛친구랑 이렇게 뜨거운 재회를 하는지도 모르고 내가 괜히 걱정했네.”“대표님, 진정하세요. 차설아 씨는 이제 자유의 몸인데 그분이 누굴 만나든 누구랑 데이트를 하든 그건 다 그분 자유죠. 이건 선 넘으시는 거예요.”기억을 잃은 탓에 많은 일들을 기억 못 하는 성도윤이지만 차설아에 대한 마음만큼은 뼛속 깊이 새겨져 있는지 그녀의 일이라면 성도윤은 늘 이성을 잃곤 했다.비서로서 그 모든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진무열은 가슴이 아파서 제 보스가 하루빨리 끝난 사이는 떨쳐버리고 새로운 인연과 함께 새 삶을 살길 바랐다.“아까 서은아 씨한테서 연락이 왔는데 몸도 아직 다 회복 못 하셨는데 야근부터 하신다고 걱정 많이 하셨어요. 지금 보신탕 가지고 오신대요.”서은아의 말을 기억하고 있던 진무열이
그에 차설아가 놀라워하고 있는데 그 순간 공교롭게도 성도윤에게서 또 전화가 걸려왔다.입술을 깨물며 고민하던 차설아가 전화를 받자 수화기 너머에서는 불쾌함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성도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왜 이제야 전화를 받는 거야, 죽은 줄 알았잖아!”그에 핸드폰을 귀에서 뗀 차설아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전화는 왜 한 거예요, 우리가 이 정도로 친한 사이였어요?”“하하, 아니지.”그녀의 말에 성도윤은 웃으며 비꼬기 시작했다.“그냥 하룻밤 잔 사이니까 이런 연락은 불필요한 거긴 하지.”남사스러운 말에 얼굴이 빨개진 차설아는 차갑게 대꾸했다.“용건 있으면 빨리 말하고 없으면 끊을게요.”“잠깐만!”끊는다는 말에 조급해진 성도윤이 소리치며 물었다.“너 지금 어디야? 누구랑 같이 있어? 거기 안전하긴 한 거야?”“내가 어디에 있는지 누구랑 같이 있는지를 당신한테 보고할 이유는 없죠. 그래도 물어보니까 얘기는 하는데... 아주 안전해요. 그러니까 당신이랑 이딴 쓸데없는 통화도 하는 거겠죠?”차설아는 혹시나 성도윤이 의심할까 봐 일부러 가벼운 말투로 대꾸했다.“진짜야?”하지만 성도윤은 조심성이 많고 예리한 사람이었기에 그녀의 말을 쉽게 믿지 않았다.“나는 못 믿겠는데, 네가 영상통화를 건다면 몰라도.”“영상통화라니, 드디어 미친 거예요? 우리는 친구도 못 되는 사이인데 도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내가 뭐 하는지를 알고 싶어 해요?”“굳이 그걸 알자는 게 아니고 그냥 네가 걱정돼서 그래.”표정을 잔뜩 굳힌 성도윤은 진지하게 다시 한번 물었다.“마지막으로 한 번만 물을게. 지금 어디야, 혹시 내 도움 필요해?”“친구 집에 있어요. 친구랑 사이도 좋고 잘 먹고 잘 지내고 있으니까 쓸데없는 걱정 하지 말고 본인이나 잘 챙겨요.”성도윤의 관심 따위 매정하게 넘기면 그만이었겠지만 얼마 전 원이가 한 말이 떠오른 차설아는 걱정되는 마음에 한마디 덧붙였다.“그건 무슨 말이야? 뭘 알기라도 한 거야?”성도윤처럼 예민한 사람은 차설아가 흘리듯
“제가 그분이었으면 진작에 신분을 밝히고 감사 인사라도 받았겠죠. 뭐하러 성진 씨를 속이겠어요?”“그 사람은 나한테 감사 인사를 받고 싶어 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그래서 청아 씨가 더... 그 사람 같은 거예요.”“착각하신 거예요. 저는 그분이 아니에요. 제가 눈을 내어주는 건 돈을 위해서인데 그분은 뭘 위해서 당신에게 눈을 내어줄 거라고 생각하시는 거예요?”“그 사람은...”자신의 커리어가 있고 아이도 있고 성도윤과 한평생 행복하게 보낼 수 있는 그녀가 갑자기 모든 걸 포기하고 자신 같은 병신을 구해줄 리가 없었기에 성진은 차설아의 질문에 답을 하지 못했다.정말 헛된 꿈을 꾼 것만 같아 성진은 차설아의 손을 놓으며 차갑게 말했다.“그럼 이만 돌아가 보세요. 이틀 뒤에 뵙죠. 수술만 잘 끝나면 얼마를 원하든지 다 드릴게요, 그쪽이랑 가족분들 노후까지 제가 다 책임지겠습니다.”“감사합니다, 그 말을 들으니까 저도 든든하네요.”말을 마친 차설아는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남자와 가슴을 부딪치고는 정원을 빠져나갔다.그때 아래에서 손을 가만두지 못하며 기다리고 있던 박서영이 내려오는 그녀를 보더니 빠르게 달려가며 물었다.“어때요, 안 들켰어요?”“들킬뻔했어요.”“그래서 어떻게 했어요?”“잘 넘어갔죠.”정원 쪽을 보며 한숨을 쉬던 차설아가 말을 이었다.“저 정도로 순정파일 줄 몰랐는데, 이젠 눈을 줄 수밖에 없게 됐네요. 안 돌려주면 발 뻗고 못 잘 것 같아요.”“잘 부탁드려요.”“다른 볼일 없으면 난 이만 지하실로 돌아갈게요. 밖에 돌아다니다가 들키면 곤란하잖아요.”차설아는 눈시울을 붉힌 채 말하는 박서영을 보면서도‘움직이는 기관창고’답게 담담히 자신이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려 했다.“죄송해요...”그녀의 태연함 앞에서 박서영은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전에는 차설아가 배은망덕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녀를 데려오려고 애썼는데... 제 도련님이 눈여겨 본 사람은 결코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이렇게 너그
갑자기 말을 거는 성진에 깜짝 놀란 차설아는 손을 빼려다 커피잔까지 엎어버리고 말았다.“죄송해요!”서둘러 종이로 커피를 닦아내기 시작한 차설아는 여전히 대학생의 목소리를 유지하고 있었다.하지만 이미 그녀의 정체를 의심하기 시작한 성진은 그녀의 팔목을 잡아오며 물었다.“당신 도대체 누굽니까?”“저는 강청아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제 몸에 손대지 말아 주실래요? 저는 몸은 안 팔아요.”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만 했기에 차설아는 일부러 언짢은 척하며 성진에게 잡힌 손목을 빼내었다.“강청아라고요?”하지만 성진은 초점 잃은 두 눈을 하고 아주 예리한 질문을 던졌다.“아까 그 이름도 임기응변으로 지어낸 이름인가 보네요. 혹시... 제 오랜 친구예요?”“도대체 저를 누구라고 생각하시는 거예요?”“그 사람 같아요...”미간을 찌푸리며 잠시 생각하던 성진은 이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하지만 그럴 리가 없죠. 그 사람은 지금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랑 행복하게 살고 있을 텐데 나 같은 병신을 기억하진 못할 거에요.”“그런 말씀 마세요.”줄곧 침착하던 차설아는 성진이 자신을 병신이라 칭하는 걸 듣고 마음 아파하며 말했다.“성진 씨가 그분을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시는 걸 보면 그분도 좋은 사람일 게 분명한데 혹시 알아요? 다른 사람이랑 행복한 인생을 보내는 게 아니라 언제나 성진 씨 걱정만 하고 있을지?”“내 걱정을 한다고요?”성진은 씁쓸하게 웃더니 고개를 저어 보였다.“나도 알 거 다 알아요. 그 사람이 날 걱정할 리가 없어요. 내 두 눈으로 그 사람을 반년이나 곁에 뒀으니 나는 그걸로 만족해요.”지난 반년을 떠올리던 성진의 우울하던 얼굴에 점차 온화한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반년이라는 시간이 아주 짧기는 했지만 그 사람이랑 같이 지내던 시간이라 나한테는 엄청 소중해요. 청아 씨가 비웃을 수도 있겠지만 그 반년 동안 나는 우리가 부부가 된 것 같았어요.”성진은 추억을 회상하며 슬픔에 잠긴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하나 아쉬운 건 내가 보지도 못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