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현은 차설아의 말에 눈빛이 밝아지더니 급하게 말했다.“조건이 뭔데? 소송에서 이기는 것만 도와줄 수 있다면 뭐든 말해.”차설아는 빙빙 돌리지 않고 말했다.“도현 씨 가문의 명의로 된 남쪽 외곽에 있는 땅을 30년 동안 임대하고 싶어요.”사씨 가문도 8대 가문 중 하나로, 부동산 산업을 주로 하고 있었다. 비록 단일하지만 재력이 탄탄했다.사씨 가문은 남다른 인맥으로 손에 많은 토지를 쥐고 있었고, 수많은 유명한 고급 주택과 상업센터를 개발했다. 하지만 남쪽 교외에 있는 3,000무 이상인 그 땅은 위치가 시내 중심에 많이 떨어져 개발 가치가 크지 않아 오랫동안 방치되어 잡초만 무성하게 자랐다.오랜 세월 동안 사씨 가문에서 이 땅을 남겨둔 것은, 부동산 경기가 좋지 않아 섣불리 개발하면 리스크가 너무 크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인수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인수하면 밑지는 장사이기에 그 누구도 감히 나서지 못했다.그런데 차설아가 이런 요구를 제기하다니! 아주 참신했다!“그 땅으로 뭐 하려고? 누구도 감히 인수하지 못하는 형편없는 땅이야.”사도현은 커피를 홀짝이며 궁금해서 물었다.차설아는 피식 웃었다. ‘솔직하기도 하지. 자기 집 땅을 대놓고 나무라네.”“그건 묻지 말고, 그래서 빌려 줄 거예요? 말 거예요?”차설아는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네가 원한다면 난 당연히 땡큐지. 그 땅은 투자하는 순간, 밑지는 땅이야. 다시 잘 생각해봐. 만약 부동산에 손을 대고 싶다면, 우리 집안에는 훨씬 더 좋은 땅도 많아.”사도현은 의리있게 말했다.차설아의 ‘친구’라는 단어에, 사도현은 이미 차설아를 친구로 여기고 있었다. 친구를 불구덩이로 밀어 넣을 수는 없었다.차설아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다른 건 필요 없고, 전 그 땅만 원해요. 만약 동의하시면, 제가 당장 성우 변호사님한테 말해서 도현 씨의 변호사가 되는 계약서를 준비하라고 하죠.”“좋아!”차설아의 시원시원한 모습에 사도현도 통쾌하게 동의했다.“최저가로 임대해 줄게
“푸흡!”차설아는 바로 커피를 내뿜고 얼른 입을 닦으며 믿기지 않는 듯 말했다.“얼음장 같은 성도윤이 도현 씨한테 여심 공략 비법을 배워요? 두 사람 뭐예요? 왜 이렇게 웃겨요?”“농담 아니야. 난 나의 모든 경험과 스킬을 전수해졌어. 아마 큰 수확을 얻었을 거야...”여기까지 말한 사도현은 차설아에게 자신의 여심 공략 비법을 진지하게 알려주었다.차설아가 대조해보니, 최근 성도윤의 이상한 행동들과 딱 맞아떨어져 순간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하하, 너무 웃겨요. 새로운 계정을 만들어서 매일 나랑 카톡을 하고, 돈을 주겠다고 하고, 그리고 다른 여자랑... 이게 모두 도현 씨가 알려준 비법이었군요!”차설아는 원래 성도윤에게 화가 잔뜩 났지만, 사도현이 전수해준 비법을 듣고, 그 얄미운 남자가 조금 귀엽게 느껴져, 화가 조금 풀렸다.“그 형의 속내를 누가 알아? 네가 임채원의 고소를 취하하게 만드는 게 목적이라고는 하는데, 내 생각에는 너를 어느 정도 신경 쓰고 있는 것 같아. 아니면 그 돌 같은 성격에 어떻게 그런 비굴한 짓을 하겠어.”역시나 임채원 때문이었다...차설아는 순간 정신을 차리더니 덤덤하게 말했다. “다 끝났으니 저랑 상관없어요...”“내 생각도 마찬가지야.”사도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추측했다.“청하 누나랑 진우 형 헤어졌어. 아마 도윤이 형은 청하 누나랑 재결합할 것 같아. 한때는 진짜 사랑하는 사이였으니까.”차설아는 흠칫 놀라더니 말했다.“그럼 두 사람 행복하기를 바랄게요.”“전에 어떤 원한이 있든, 앞으로 우린 친구야. 나도 네가 배경수와 행복하기를 바랄게. 애도 생겼는데 빨리 서둘러.”차설아는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렇다. 어쩌면 이것이 가장 좋은 결말일지도 모른다.며칠 후.성우는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사도현을 도와 소송에서 이겼다.여자는 원래 심장병을 앓고 있었고, 사망의 주요 원인은 약물이 아닌 본인의 질병이라는 핵심적인 증거를 찾았다. 사도현은 현장의 책임자로서 보름만 영업을
네 사람은 분위기 좋은 한 레스토랑에 도착했다.사도현과 성우는 원래 사이가 안 좋았지만, 이번 소송을 통해 생사를 넘나드는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성 변, 우리 한잔해. 성 변의 재치있는 말솜씨가 없었다면 난 끝장났을 거야. 우리 집 영감탱이가 분명 내 다리를 부러뜨렸을 거라고!”사도현은 자신의 와인잔을 들고 성우의 와인잔에 부딪쳤다.성우는 대표인 차설아를 잊지 않고 챙겼다.“저한테 감사할 필요 없으세요. 전 그저 우리 보스의 도구일 뿐이에요. 보스의 명령이 없었다면 전 이 소송을 맡지도 않았겠죠.”“맞아. 설아도 같이 한잔해.”사도현은 와인잔을 차설아를 향해 치켜들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했다.“앞으로 너를 설아 쨩으로 부를게.”말을 마친 사도현은 노래를 하기 시작했다.“삭막했던 나의 삶에 당신은 한 줄기 햇살처럼 다가와...”차설아는 환하게 웃으며 그의 노래를 주의 깊게 듣더니 눈썹을 치켜 올렸다.“사도현 씨, 노래를 이렇게 잘하는 줄 몰랐네요? 반할 뻔했어요.”“이제야 알았어?”차설아의 말을 들은 사도현은 신이 나서 입방정을 떨었다.“나 한때 업계에서 알아주는 러브송 왕자였어. 나의 창작 실력에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빠졌다고, 하마터면 데뷔할 뻔했잖아? 나 인기 있는 가수한테 곡도 써준 적 있어. 안 믿어지면 도윤이 형한테 물어봐...”사도현은 옆에 앉은 성도윤을 보며 물었다.“맞지? 형. 말 좀 해줘!”성도윤은 고개를 숙인 채 스테이크를 썰며, 잘생긴 얼굴로 거리감 느껴지는 분위기를 자아냈다.그는 기분이 언짢은 듯 ‘찌익찌익’ 소리를 내며 스테이크를 썰더니 차갑게 말했다.“말이 참 많아. 꿈이 만담가야?”“형, 왜 말을 그렇게 속상하게 해!”사도현은 좀 난처해졌다.“난 늘 말이 많았어. 왜 처음 보는 사람처럼 그래? 내가 형한테 뭐 잘못했어? 왜 갑자기 화를 내?”“화 안 났어!”성도윤은 스테이크를 씹으며 차갑게 대답했다.오늘의 스테이크는 유난히 이에 끼어 성도윤은 매우 불쾌했다.“말하는 꼴을 보니 분명
“흥!”성도윤의 안색은 한층 더 어두워졌다. 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코웃음을 쳤는데 도대체 무엇 때문에 화가 났는지는 그도 알 수 없었다!아무튼, 차설아가 그 어떤 남자를 가까이해도 그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흥은 무슨 흥이야, 도윤 형, 이래도 질투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어? 얼굴이 완전 붉으락푸르락한데 말이야...”사도현이 말을 이어갔다.“전에 설아 쨩이 마음에 안 들었던 건 사실이야. 도윤 형에게서 돈을 뜯어내기 위한 여우 년이라고 생각했어. 성씨 가문의 인맥과 힘을 빌려야만 겨우 살아남을 수 있는 그런 여자인 줄 알았다고. 설아 쨩과 같이 있으면 형만 불행해질 것 같았어...”“하지만 이제 두 사람이 이혼한 후에야 설아 쨩이 엄청 대단하다는 걸 깨닫게 되었어. 천신 그룹과 성운 법률사무소를 되살렸을 뿐만 아니라 우리 집 땅까지 임대했어. 아마 큰일을 벌일 것 같은데 말이야. 절대 연약한 사람이 아닌 강인한 사람이야! 나 설아 쨩 엄청 존경해!”사도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성우도 차설아를 칭찬하기 시작했다.“당연하죠, 우리 보스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에요. 지략이 있고, 계획도 잘 세워서 우리 법률사무소의 세 변호사는 모두 보스를 잘 따라요. 성운 법률사무소 모든 직원들이 이렇게 으쌰으쌰 열정적인 모습은 처음 봐요. 더는 예전의 축 처진 분위기가 아니라고요. 보스가 그만큼 매력이 있으니까 우리도 잘 따르고 있겠죠?”차설아는 두 남자의 칭찬에 쑥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손을 저었다.“아니에요, 아니에요. 저야 자유를 회복했으니 활기가 넘쳐서 그렇죠. 응당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에요...”성도윤은 그들의 칭찬에서 유용한 정보만 쏙 빼내 들었다. 그는 미간을 구기며 차설아에게 물었다.“땅까지 임대했어? 뭘 하려고 그래?”“그건 성도윤 대표님께 알릴 의무가 없지 않나?”“설마 직접 상품을 만들려는 건 아니지?”“역시 성도윤 대표님은 똑똑하시네. 하지만... 절반밖에 맞추지 않았어.”차설아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천신 그룹은 제조사
차는 차씨 저택 앞에 도착했다.사도현이 차를 멈추고는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괜찮은 곳이긴 한데, 인기가 좀 없네. 몇 년 전에 여기 귀신 나타났다면서? 그래서 꽤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떠났다고. 혼자 이 큰 집에 사는 거 무섭지 않아?”차설아가 웃으며 말했다.“귀신이 뭐가 무서운데요, 사람이 귀신보다 훨씬 무섭죠. 사람도 안 무서워하는데, 귀신은 더 무서워할 리가 없죠.”그녀는 안전 벨트를 풀고는 조수석 문을 열어 차에서 내릴 준비를 했다.사도현은 긴 팔을 운전대에 올려놓은 채 여자의 모습을 보던 중 갑자기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더니 뻔뻔스럽게 말했다.“차라도 한잔하자고 안 하네?”차설아가 고개를 돌리더니 뽀얀 얼굴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드리웠다.“당연히 되죠, 집에 마침 좋은 보이차가 준비되어 있어요.”활짝 핀 붉은 장미처럼 환하고 빛난 차설아의 미소에 사도현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그는 괜히 수줍어하더니 부자연스럽게 시선을 옮기고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그럼 실례할게요.”두 사람이 차에서 내린 후 차씨 저택으로 향했다.요 며칠 동안, 차설아와 민이 이모의 노력 끝에 차씨 저택은 더는 예전처럼 낡고 잡초가 가득한 피폐한 곳이 아닌 아름다운 꽃들로 가득 차 있었는데 꿈나라처럼 환했다.“우와, 저택이 겉으로는 그럭저럭해 보이지만 안은 상쾌하고 우아하네. 신경 좀 썼겠어?”사도현이 깊은숨을 들이마시더니 기지개를 쭉 켜며 더 뻔뻔스럽게 말했다.“집에 빈방 있어? 나 여기서 며칠 있으면 안 돼? 숙박비는 호텔 방값 열 배로 계산해줄게...”“어휴, 설아 쨩은 모르겠지만 그 소송 때문에 요즘 얼마나 스트레스인지. 릴랙스가 필요하다고. 몸을 회복하기엔 여기가 그 어떤 휴양지보다도 좋은데?”사도현은 전혀 예의를 차리지 않았고, 마치 본인이 주인인 양 소파에 축 늘어졌다.“너무 뻔뻔스러운 거 아니에요? 적당히 해요!”차설아가 말하고는 벽장을 열어 오랫동안 소중히 간직한 보이차를 꺼내 사도현을 위해 우리기 시작했다.민이 이모는 장을
사도현이 또 물었다.“...”차설아는 웃더니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고개를 숙여 차를 음미했다.“안 알려주면 내가 직접 찾아봐야지.”사도현은 휴대폰을 꺼내 검색창을 열어 해바라기 꽃말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답을 얻고는 곧바로 큰 목소리로 읊었다.“해바라기 꽃말은 동경과 숭배, 기다림, 영원한 사랑이네... 설마 도윤이 형을 향한 설아 쨩의 마음이 이렇다는 거야?”“...”차설아가 고개를 돌리고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해바라기만을 바라봤다. 그녀는 여전히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사도현은 눈치 없이 꼬치꼬치 캐물었다.“그렇게 도윤이 형을 사랑한 거였어? 다른 사람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사랑하는 거야? 전에는 설아 쨩이 단순히 도윤이 형에게 빌붙으려고 가까이한 줄 알았는데 말이야!”차설아가 고개를 저으며 부인했다.“예전엔 다른 사람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그 사람을 사랑했는데 이젠 아니에요. 지금은 정신을 차려서 절대 그 사람한테 목을 매지 않겠어요. 이미 마음을 비웠으니 맞는 사람만 있다면 바로 그 사람에게 마음을 줄 거예요.”“잠시만!”사도현은 곧바로 예리하게 정보를 포착하고는 따져 물었다.“이미 마음을 비웠으니 맞는 사람을 만난다면 마음을 줄 거라고? 그러니까 아직 마음 맞는 사람 없단 말이야?”“그게...”차설아는 자신의 속마음이 탄로나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사도현은 그녀가 배경수의 아이를 임신했다고 알고 있다. 그러니 마음 맞는 사람을 아직 못 만났다는 건 당연히 그에게 이상하게 들릴 것이다.“난감해할 필요 없어. 남녀가 충동적인 마음에 사랑을 나누는 건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야...”사도현은 경험자의 자태로 차설아를 이해하는 듯이 말했다.“설아 쨩이랑 배경수는 딱 봐도 뜨거운 하룻밤을 보낸 사이야, 두 사람 사이에 감정이 보이지 않는다고. 배경수는 철딱서니 없는 애야, 나보다 더 믿을 수 없는 인간이라고. 하루빨리 아이를 지우는 게 좋을 거야, 그리고 될수록 빨리 헤어져.”“아, 그게... 생각해볼게
사도현은 깊은숨을 들이마시더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무슨 냄새가 나? 차의 향기밖에 나지 않는데?”“아니에요!”예리한 차설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연기 냄새가 나는 것 같은데요? 엄청 강하게 나요!”“연기 냄새?”사도현은 다시 한번 깊은숨을 들이마시더니 차설아의 말대로 과연 연기 냄새가 났다. 하지만 그는 전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는 손을 저었다.“신경 쓸 것 없어. 근처에서 누가 바비큐 파티를 하는 거 아닐까?”“안 되겠어요, 나가봐야겠어요.”차설아는 더는 앉아 있을 수가 없어 즉시 자리에서 일어서고는 찻실을 나와 자세히 살펴보기로 했다.“아악!”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차설아는 깜짝 놀랐다.저택 밑바닥에서 어느새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불은 순식간에 2층까지 번지면서 집안에 연기가 가득 찼다.“젠장, 언제 불이 붙은 거야?”사도현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불이 점점 거세지면서 순식간에 그들을 에워쌌다. 계단은 원목으로 만들어졌기에 엄청난 불길에 곧 무너질 것만 같았다.“어떻게 해, 어떻게 해? 지금 당장 여길 떠나야 하는데 말이야...”사도현은 다급한 나머지 큰 체구를 숙이더니 자기 등을 가리키고는 차설아에게 말했다.“얼른 올라와, 밑층까지 내가 업고 갈게.”차설아는 잠깐 멈칫했다.털털한 사도현이 이렇게 의리가 있을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거센 불길 앞에서 혼자 살자고 도망간 것이 아닌 그녀의 목숨부터 살리자고 했으니 말이다...차설아는 감동하여 이 은혜를 잊지 않기로 다짐했다.“계단이 불에 타서 무너지고 있는 거 안 보여요? 이때 계단으로 간다면 죽으려고 작정한 거라고요.”차설아는 점점 가까워지는 불길을 보며 침착하게 분석을 시작했다.“그럼 어떻게 해? 여기서 죽을 때까지 기다려? X발, 불이 점점 더 거세지고 있네. 이제 도망가지 않으면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다고!”사도현은 다급한 마음에 땀을 뻘뻘 흘리며 말했다. 그는 당장이라도 차설아를 기절시켜 그녀를 업고 현장을 벗어나고 싶었다.
남자가 말하고는 차설아를 업고 창문에서 기어나가기 시작했다.등에 사람을 업고 있었기에 그는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유난히 조심스러웠다. 그리고 유난히 힘이 들었기에 팔에 힘을 꽉 주어야만 순조롭게 내려갈 수 있었다...짙은 연기와 함께 불길이 치솟아 오르면서 마치 죽음의 신이 그들을 ‘추격’하는 것 같았다.사도현은 차설아를 업은 채 한 걸음 한 걸음 내려가고 있었다. 빗방울처럼 땀이 뚝뚝 떨어지면서 얼굴을 스쳐 그의 옷을 적셨다.그는 힘을 너무 준 나머지 잘생긴 얼굴은 핏대가 서고 빨갛게 달아오르기까지 했는데 그가 얼마나 괴로운지를 잘 보여주고 있었다.그들은 지금 1층과 2층 중간쯤 되는 위치에 있어 위쪽은 활활 타오르는 불길, 아래쪽은 단단한 바닥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만약 사도현이 혼자였다면 그대로 뛰어내린다고 해도 큰 문제가 없을 것이다.하지만 차설아를 업고 있으니 그는 한 걸음 한 걸음 신중해야 했기에 시간이 지체될 수밖에 없었다.두 사람은 중간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어찌할 바를 몰랐다.차설아는 그런 사도현이 안쓰럽기도 했고, 고맙기도 해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도현 씨, 정 버티기 힘들다면 그대로 뛰어내려요, 그럼 우리 두 사람 중에서... 한 사람은 살 수 있겠죠.”“헛소리하지 말라고!”사도현은 목소리까지 잠겼다. 그는 어금니를 깨물며 말을 이어갔다.“나 힘든 거 알면 그만 약 올려. 곧 내려갈 수 있을 거니까!”남자는 주위를 살펴보더니 마침내 발 디딜 곳을 찾았다.하지만 그는 힘이 남지 않아 이를 악물며 버티면서 등에 업힌 차설아에게 말했다.“잘 들어, 이따가 설아 쨩을 에어컨 실외기에 놔줄 테니까 그 실외기를 따라 조심스럽게 착지하면 별문제가 없을 거야...”“그럼 도현 씨는? 실외기 위에 오를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뿐이잖아요. 날 거기에 놔주면 도현 씨는 어떻게 해요?”“날 신경 쓰지 말고. 설아 쨩이 착지하면 내가 따라서 갈게!”“하지만...”“그만해. X발 설아 쨩이 얼마나 무거운 줄 알아?
“위치 추적 장치?”성도윤은 깜짝 놀라며 엄지를 치켜세웠다.“대단한데? 내 몸에 추적 장치를 달아놓고도 내가 전혀 몰랐다니. 영화 속 첩보 요원도 너만큼은 못 하겠다.”차설아는 우쭐한 표정으로 말했다.“당연하죠! 난 영화 속 첩보 요원보다 훨씬 대단하거든요. 그러니까 나 잘 모셔야 해요. 괜히 나한테 못되게 굴었다간 아주 끔찍한 최후를 맞이할걸요?”그녀는 자신만만하면서도 살짝 장난스러운 눈빛을 보냈다.“어찌 감히 여왕님께 잘못하겠습니까? 남은 생애, 충성을 다해 모시겠습니다!”“흠, 그거면 됐어요. 아주 착하네!”차설아는 만족스럽다는 듯 성도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그러고는 몸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졸리고 추워 죽겠어요! 빨리 이불 속으로 안내해요.”이렇게 지내다 보니, 그녀는 어느새 그와 함께 자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렸다.오늘 밤,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던 이유를 생각해 보니, 아마도 그가 곁에 없어서일 것이다.그래서 결국 그를 찾아온 것이었다.“어서 와. 이불 속은 이미 따뜻하게 데워놨지.”성도윤은 능청스럽게 ‘충실한 침대 보좌관’처럼 행동하며 그녀를 이불 속으로 이끌었다.차가운 밤, 따뜻한 이불 속에서 서로를 감싸는 것만큼 행복한 일이 또 있을까.차설아는 옆으로 돌아누워 다리를 오므린 채 마치 엄마 뱃속에 있는 태아처럼 몸을 웅크렸다.성도윤은 뒤에서 그녀를 꼭 안아주었다.그 온기는 마치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보호막 같았고 덕분에 차설아는 금세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하지만 성도윤은 오히려 정신이 말똥말똥해졌다.“여보, 우리 오늘 밤에 그 두 유치한 녀석들 갈라놓은 거... 혹시 너무한 거 아닐까?”그가 말한 ‘두 유치한 녀석’이란 당연히 사도현과 배경윤을 뜻했다.솔직히, 그 둘은 늘 티격태격하는 사이였고 아마 다음 날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 화해할지도 모른다.하지만 오늘 밤 자신들이 개입하면서 상황은 좀 더 심각해져 이러다가 정말 절교로 이어지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성도윤의 머리가 아파졌다.“혹시 사도현이 끝
“그게 뭔데?”“두 사람 서로의 감정을 확실히 깨닫고 흔들림 없이 서로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해줄 그 한 가지.”차설아는 이번만큼은 저 두 사람이 깨닫기를 바랐다.그녀와 성도윤도 그 기나긴 길을 돌아왔기 때문에 그 답답하고 혼란스러운 감정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사람은 함께 많은 일들을 겪어야만 ‘이 사람을 절대로 놓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차설아와 배경윤의 긴 대화가 이어질수록, 밤은 더욱 깊어졌다.배경윤은 많은 이야기를 쏟아내다 지쳐 잠들었고 그녀의 뺨에는 여전히 눈물이 맺혀 있었다.하지만 차설아는 도무지 잠이 들지 않았다.지금의 이 고요함이 너무 불안했다. 이렇게 평온할 때일수록 더 큰 위기가 다가오는 법이었다.같은 시각, 성진의 차가 그녀의 집 아래에 멈춰 서 있었다.가로등 불빛이 차 위로 희미하게 드리웠고 차 안의 남자는 어둠과 빛 속에서 조각 같은 얼굴을 드러냈다.그 역시 때로는 빛 속에 머물고 때로는 어둠 속에 숨어 지내면서 가끔은 스스로조차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었다.사실, 그는 이미 한참 전부터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저택 안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대화 소리도 들었고 차설아가 실명한 게 사실이라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그렇다면 그녀의 눈을 누구에게 줬을지,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성진은 차를 몰고 오는 동안 머릿속에 수많은 말들이 떠올랐다. 그는 여자의 어깨를 붙잡고 미친 듯이 소리치고 싶었다.“왜 그렇게 바보 같은 짓을 했어? 왜 네 소중한 눈을 나 같은 인간한테 줬냐고!”하지만 정작 그녀의 집 앞에 도착해 그렇게 따져 묻고 눈을 돌려주려 했던 순간, 그는 망설였다.그는 한때 지옥을 경험한 사람이었다.어둠 속에서 길을 잃은 것이 얼마나 끔찍한지 그 절망 속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이 얼마나 처참한지 아직도 잊지 않았다.그리고 한 남자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 속옷 하나조차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챙길 수 없는 처지가 되는 것이 얼마나
위층에서도 차설아와 배경윤이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숨죽여 통곡하던 배경윤이 갑자기 흥분해서 소리쳤다.“나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나 말할 수 있다고! 드디어 목소리가 돌아왔어!”배경윤이 눈물을 닦고 기쁨에 겨워 차설아를 와락 끌어안으며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설아야, 나도 목소리 되찾았으니까, 너도 분명 다시 볼 수 있을 거야! 걱정하지 마, 내가 꼭 방법을 찾아볼게!”“잘 됐어! 네 목소리가 돌아온 건 정말 다행이야. 아니면 우리 전투력이 너무 약해질 뻔했잖아. 팬들 상대로 밀려서 너무 힘들었어.”차설아가 진심으로 기뻐하며 웃었다.오늘 오전, 그녀와 배경윤이 무기력하게 몰려다니며 반격조차 못 했던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배경윤이 목소리를 잃었기 때문이었다.대학교 시절, 차설아, 배경수, 그리고 배경윤은 유명한 삼총사였다.셋이 무적이었던 이유는 각자의 역할이 명확했기 때문이었다.차설아는 ‘물리적 공격’을 담당했고, 배경수는 ‘두뇌 플레이’를 맡았다. 그리고 배경윤은 ‘언어 공격’을 담당했다.하지만 지금 차설아는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의 ‘물리적 공격’ 능력이 반감되었고, 설상가상으로 배경윤마저 목소리를 잃었으니, ‘언어 공격'도 무용지물이 된 셈이었다.그렇다 보니 팬들이 둘을 조롱하며 몰아붙이는 걸 막을 방법이 없었다.“맞아! 만약 내가 오늘 말을 할 수 있었더라면 저 미친 팬들 제대로 박살 냈을 거야! 아까, 정말 속이 터지는 줄 알았어. 내가 제대로 반격도 못 했잖아! 안 되겠어, 사도현 찾아가서 다시 따질 거야!”배경윤이 소매를 걷어 올리며 당장이라도 사도현과 한바탕 말싸움을 벌일 기세였다.차설아는 재빨리 그녀를 붙잡았다.“이기고 싶다면 지금은 절대 그를 찾아가면 안 돼. 그리고 당분간 연락도 하지 마. 만약 그가 진짜 너에게 마음이 있다면 반드시 너에게 만족할 만한 답을 줄 거야.”“그 답을 내가 받을 수나 있을까? 그냥 당장 그랑 싸우는 게 속이 더 후련할 것 같은데.”“어떻게 그렇게 확신해? 왜 네
성도윤이 진심 어린 충고를 건넸다.“???”사도현은 남자의 말을 듣고는 눈살을 찌푸렸다.“형, 이게 정말 형 입에서 나온 말이야? 여자가 원하는 대로 해야 한다고? 그럼 그게 완전 ‘호구’랑 뭐가 달라? 그렇게 냉정하고 도도하던 형이 어쩌다... 이제는 아내가 하라는 대로 한다고? 이건 형답지 않아...”사도현은 여자를 쫓아다니긴 하지만 성도윤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이었다.여자에게 돈을 쓰고 달콤한 말을 하긴 해도 어떤 여자도 그의 행동을 통제하거나 그의 사고를 지배할 수 없었다.어떤 여자가 그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는 순간, 그는 단호하게 다른 여자를 찾았다.배경윤도 예외는 아니었다. 자신의 원칙이 걸린 문제라면 절대 양보하지 않았기에 오늘도 이렇게 끝없는 논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나도 오랜 시간 고민해서 얻은 결론이야.”성도윤이 드물게 인내심을 가지고 사도현에게 연애 철학을 설파했다.“인생을 살면서 우리는 많은 사람과 일들을 만나게 되지. 그 중요도를 정하는 객관적인 기준은 없어. 중요한 건, 네 마음속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 아는 거야.”“네가 스스로의 자아를 지키는 것이 그 여자와의 관계보다 더 중요하다면, 그 여자를 포기하면 되는 거고.”그는 부드러운 어조로 덧붙였다.“네가 여자를 유혹하는 데 능숙한 건 알지만 결국 진정성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무기야. 나는 아내의 말을 듣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혹시 네가 그렇게 못하는 건, 단순히 네가 상대방을 충분히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성도윤은 날카롭게 바라보며 정확한 지적을 했다.“나는...”사도현은 그런 게 아니라고 바로 반박하려 했지만 막상 입 밖으로 내뱉으려 하자 말문이 막혔다.그는 다른 사람을 속일 수도 있고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 속일 수도 있었다.하지만 성도윤만큼은 속일 수 없었다.성도윤은 누구보다 그를 잘 아는 사람이었다.자신의 마음속 가장 솔직한 감정을 그가 단번에 꿰뚫어 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형은 내가 좀
“내가 왜 경윤이한테 뭐라고 해야 하죠?”차설아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사도현에게 물었다.“만약 내가 도현 씨라면 이 일이 윤설과 관련이 있든 없든, 나는 단번에 배경윤을 위해 나섰을 거예요. 좋아하는 여자가 이렇게 큰 모욕을 당했는데 괴롭힌 사람을 찾아서 따지기는커녕 내 여자에게 참으라고 한다면, 그건 도현 씨가 그 여자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겠죠.”“지금 이간질하려는 건 아니지? 사람마다 일을 처리하는 방식이 다르다고. 무턱대고 화를 내고 일이 커지면 더 큰 소란을 일으킬 수도 있는데, 그게 과연 좋은 방법일까?”사도현은 당황해서 말을 잇지 못했다. 자신이 떠받들던 차설아가 자기편을 들지 못할 뿐만 아니라 배경윤과의 관계를 파탄으로 몰고 가려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아직도 이해를 못 하시네요.”차설아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이 일에서 중요한 건 결과가 아니라 도현 씨의 태도예요. 그런 태도라면 어떤 여자라도 상처받을 수밖에 없어요.”“그게 아니라...”사도현은 머리를 긁적이며 생각했다. 좋아하는 감정을 이렇게 표현하는 게 정말 힘들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설아야, 역시 나를 이해하는 사람은 너뿐이구나!]배경윤은 타자한 후, 서러운 마음에 바로 차설아를 껴안았다.[이런 마음은 여자만이 이해할 수 있어! 도현 씨는 그저 내가 징징거린다고만 생각하겠지!]“도현 씨, 3일 안에 경윤이한테 사과할 기회를 줄게요. 하지만 어떻게 사과할지는 도현 씨가 알아서 해야 해요. 경윤아, 우리 오늘 같이 자자. 할 얘기가 정말 많을 것 같아!”차설아의 말에 배경윤도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팔을 잡고 계단을 올라갔다.아래층에서는 두 남자가 멍하니 서로를 쳐다보며 어리둥절해 있었다.성도윤은 왜 남의 커플 문제에 자신이 이렇게 끼어들어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반대로 사도현은 왜 이해심 많던 차설아가 갑자기 이렇게 고집불통이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형, 우리 커플 일에 형수가 너무 과하게 간섭하는 거 아니야? 원래 하루이틀이면 해
“그때는 그때고, 사람은 성장하는 법이잖아.”샤워를 마친 차설아가 계단을 내려오며 말했다.2층에서 사도현과 배경윤이 성도윤을 둘러싸고 다투는 소리를 듣고 성도윤 대신에 반박하며 나선 것이다.세 사람은 고개를 들어 목욕 가운을 입고 나온 차설아를 보고 급하게 다가갔다.“설아야, 너 혼자 내려왔어? 움직이지 마, 잠깐만.”성도윤이 제일 먼저 달려가 아기를 돌보듯 세심하게 챙기며 말했다.배경윤과 사도현도 마치 공주를 대하듯 신중하게 행동했다.[괜찮아? 기분 나쁘거나 불편한 거 없어?]성도윤이 차설아를 거실 소파에 앉히자 배경윤이 그녀의 옆에 앉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난 괜찮아. 기분도 나쁘지 않고 아픈 곳도 없어. 내가 전에 겪은 일에 비하면 몇 명 애들이 장난친 정도인데 뭐가 대수겠어.”차설아가 배경윤의 손등을 가볍게 쓰다듬으며 안심시키려 했다.“경윤아, 네가 더 걱정이야. 기분 잡치게 하는 사람들을 마음속에 담아두지 마. 그러면 오히려 너 자신이 힘들어져. 그냥 흘려보내. 신경 쓸 필요 없어.”그 말을 들은 배경윤은 그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의미심장하게 한마디 했다.[맞아, 맞아. 어떤 사람은 정말 마음에 두지 않더라고. 그 사람 때문에 화내는 내가 진짜 등신이지.]그녀는 당연히 차설아가 말한 ‘기분을 잡치는 사람’이 사도현이라고 생각했지만, 사도현은 오히려 차설아가 배경윤에게 작은 일로 문제를 일으키지 말고 더 관대해지라고 충고하는 것으로 이해했다.“들었어? 역시 형수가 마음이 넓어. 미친개한테 물렸다고 너도 같이 물려고?”사도현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사도현은 배경윤이 절대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는 고집 센 여자인 걸 잘 알고 있었지만 차설아의 말만큼은 예외라는 걸 알고 있었다.차설아는 배경윤의 정신적 지주이자 인간적 우상이었기 그녀의 말이면 배경윤은 무엇이든 믿었다.[도현 씨가 그 미친개라는 말이지?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배경윤이 분노를 담아 타자기를 두드리며, 마치 사도현을 죽일 듯 차가운 눈빛
사도현은 배경윤이 적은 글을 보고 낮게 한숨을 쉬었다.“윤설 씨에게 공개 사과를 요구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그렇게 하면 더 큰 사이버 폭력이 일어날 수도 있어. 난 그냥 소란을 일으킨 사람들에게 책임을 묻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해. 연예인 본인까지 끌어들일 필요는 없어.”[흠, 당연히 연예인 본인까지 끌어들이지 않길 바랄 거야. 그 사람들 도현 씨 팬들이잖아. 게다가 윤설 씨까지 얽혀서 그 여자가 곤란해질까 봐 그런 거지?]배경윤은 그가 누군가에게 이렇게 신경을 쓰는 모습을 처음 봤다. 윤설이 첫 번째이자 아마 유일한 사람일 거라는 생각에 그녀는 눈앞의 이 남자를 더 용서할 수 없었다.‘이런 바람둥이!’“조금만 머리 쓰면 내가 왜 이렇게 하는지 알 텐데.”사도현은 배경윤의 ‘모함’을 듣고 이 오명을 씻을 수 없다는 생각에 더 이상 해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차갑게 말했다.“네가 뭐라고 생각하든, 나는 이 사건에 연예인 본인을 끌어들이는 걸 절대로 허용하지 않아.”그도 어쨌든 윈스 엔터테인먼트의 CEO였고 연예계의 돌아가는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때로는 하나의 루머가 칼날처럼 되어 사람을 죽음의 길로 몰아넣을 수 있다.연예계에서 온라인 폭력에 의해 처참하게 망가진 스타들이 많았고 배경윤과 차설아 같은 일반인은 그 악플의 고통을 더 견디기 힘들 것이다.[헐, 이제 나를 협박하겠다는 거야? 도현 씨가 그렇게 말할수록 난 더 윤설을 찾아갈 거야. 날 어떻게 할 건데?]배경윤은 분노를 담아 빠르게 타자를 했다. 소리 없이 치는 타자 소리만으로도 그녀의 분노가 느껴졌다.성도윤은 그들 옆에서 분위기를 살피며 처음으로 연애 문제가 이렇게 복잡하고 피곤할 수 있다는 걸 실감했다.이 두 사람은 분명 서로에게 감정이 있었지만 계속해서 상처가 되는 말들을 주고받으며 관계를 망쳐가고 있었다.‘내가 보기엔 차설아와 내 관계가 훨씬 더 순수하고 아름다운 것 같아. 내가 정말 운이 좋아.’차설아를 떠올리며 성도윤은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지금 2층으로
“오늘 소란을 일으킨 사람 중에 내 팬도 있었던 거 확실해?”사도현은 사실 명성과 노출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배경윤 때문이 아니라면 절대 미디어에 얼굴을 비추지 않았을 것이고 그런 어색한 연애 프로그램 같은 것도 참가하지 않았을 것이다.그가 이렇게 많은 팬을 얻게 된 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는 조용한 성격이라 팬들도 비슷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팬들이... 오물을 던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충격을 받았다.“믿을 수 없지?”배경윤이 오늘 자신과 차설아가 괴롭힘을 당한 영상 파일을 사도현에게 보여주었다.“봐봐, 그 팬이라는 여자들이 뭐라고 말하는지. 도현 씨가 잘생기고, 부유하고, 성격도 좋고, 완벽한 남자라며 윤설과 천생연분이라고 하더라. 도현 씨가 윤설의 왕자인데 내가 그 악녀가 되어 두 사람의 관계를 망쳤다고 하면서, 심지어 설아까지 모욕했어. 정말 너무한 거 아니야?”“뭐, 우리 설아까지 욕했다고?”옆에서 무표정하게 싸움을 구경하던 성도윤은 배경윤의 말을 듣고 나서 차설아에게 더 한없이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그는 사도현이 들고 있던 핸드폰을 빼앗 분노에 차서 영상을 확인한 뒤 싸늘하게 말했다.“이 사람들, 이런 짓을 할 용기가 있다면 그 자만과 잘못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할 거야.”“어떻게 할 건데?”배경윤이 성도윤에게 물었다. 이전과 달리 이제는 거부하는 태도가 없었다.“갖은 방법을 동원해서 이 사람들 다 찾아낸 뒤, 두 사람 앞에서 머리 조아려 사과하게 해야지.”성도윤이 이를 갈며 한 글자씩 뱉어냈다.이 말은 결코 가벼운 말이 아니었다. 마음만 먹으면 끝까지 추궁할 수 있는 말이었다.“그나마 다행이네...”배경윤이 사도현을 보며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저것 봐, 사랑하는 여자가 괴롭힘을 당했으면 정상적인 반응은 저런 건데, 도현 씨는... 아니지. 도현 씨한테는 사랑하는 여자가 괴롭힘을 당한 게 아니라 사랑하는 여자의 팬이 그냥 길 가던 사람을 괴롭힌 정도잖아. 이제야 왜 이렇게 무관심한지 알
[무슨 소리야, 그건 옛날얘기지. 지금은 완전히 아니라고! 나도 한때 도현 씨를 내 ‘남신’이라고 했었잖아? 그런데 그 결과가 어땠어? 겉은 번지르르하지만 속은 형편없더라!]배경윤이 가차 없이 쏘아붙였다.[두 사람, 완전 끼리끼리야. 나랑 설아는 이제 두 사람이랑 거리를 둬야 해. 안 그러면 우리도 불행해질 거야. 봐, 오늘 내가 이렇게 재수 없는 일을 겪은 것도 다 네 탓이야.]“아니, 이게 왜 또 내 탓이야?”사도현은 어이없다는 듯 두 손을 들었다.그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는데 갑자기 죄인처럼 배경윤의 분노를 한 몸에 받고 있었다.[당연히 도현 씨 탓이지! 오늘 나랑 설아에게 똥물을 뿌린 사람들이 누구인 줄 알아?]배경윤이 팔짱을 끼고 사도현을 노려봤다.“누군데?”사도현이 황당한 표정으로 되물었다.‘아무리 세상이 험악해졌다고 해도 앞을 못 보는 여자랑 말을 못 하는 여자를 상대로 그런 짓을 할 정도면 정말 제정신 아닌 인간들 아니야?’[한쪽은 도현 씨 팬들이고, 다른 한쪽은 윤설의 광적인 팬들이야.]“뭐?”사도현의 표정이 얼어붙었다.[내가 도현 씨를 알지 않았으면 윤설이랑 엮일 일도 없었을 거고, 그 여자의 팬들에게 이런 일을 당하지도 않았을 거야. 그리고 당신 팬들도 마찬가지야. 윤설 팬들이랑 다를 게 뭐야? 둘 다 극성맞고 정신 나간 사람들뿐이야. 그러니까 이 모든 게 도현 씨 탓이라고!]배경윤은 흥분해서 글을 계속해서 쳐냈다. 사도현은 그녀가 쓴 긴 글을 읽고 머리가 핑 돌 지경이었다. 글에는 온통 그에 대한 비난이 가득했다.사도현은 억울한 마음이 치밀어 올랐다.“근데 말이야, 팬들이 한 행동을 내가 어떻게 책임져? 사람마다 다 성격이 다르고 수천, 수만 명의 팬을 내가 어떻게 다 통제해?”[핑계 대지 마!]배경윤은 여전히 흥분한 상태였다.[팬들의 행동은 결국 본인이 책임지는 거야. 팬덤 문화 몰라? ‘팬들의 행동은 본인이 책임진다.’ 이게 기본 원칙이야! 팬들이 왜 그렇게 극성인지 알아? 그건 본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