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18개의 관문은 문무를 겸비한 수리, 문화, 역사, 철학 등 모든 방면의 문제를 다뤘다.첫 번째 관문은 문학에 관한 것으로, 남자 쪽에서 중국 한악부 시인의 ‘공작동남비’를 완전히 외워야 했다.‘공작동남비’는 가슴 뭉클한 사랑을 노래한 서사시이다.신랑단 일행은 모두 키가 크고 잘생긴 명문가의 부잣집 도련님들이었고, 해외 유학파 출신이 대부분이었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 서로 마주 보면서 머리가 텅 비어있었다.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누가 한가해서 중국의 수천 자나 되는 고문을 외우고 있겠는가?“외울 수 있는 사람이 없는 거죠?”신부 측 사람은 의기양양해서 말했다.“돈을 지불하고 통관할 수도 있어요. 적어도 1억은 줘야 해요.”“좋아요, 지금 당장 지불하죠.”사도현은 휴대폰을 꺼내며 안달 난 표정이었다.“진작에 말하지.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에 뭐 하러 시간을 낭비해요.”“잠깐.”이때 차설아가 나서더니 말했다.“제가 외울 수 있어요.”“공작동남비는 중국 육조 시대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장편 서사시이죠. 전문은 공작이 동남쪽으로 날아가 저 멀리서 배회하네...”차설아는 구구절절 또렷하게 외우기 시작했다.사람들은 잇달아 그녀를 보며 불가사의한 표정을 지었다.사도현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장난인 줄 알았는데 진짜 외우고 있어? 대단하네!”성도윤은 의외로 담담했고 자랑스레 말했다.“이 정도야 뭐. 내가 전에 말했잖아. 설아 모범생이라고!”10여 분 만에 차설아는 드디어 ‘공작동남비’를 모두 외웠고, 사람들의 큰 박수를 받았다.“잘했어요!”신부 측 사람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역시 강씨 집안은 권력 다툼만 하는 그런 속물이 아닌 줄 알았어요. 이 여자분 같은 인재가 있다니!”차설아는 겸손하게 손사래를 쳤다.“별것 아니네요. 그저 심심할 때 옛날 시를 외우는 것뿐이에요.”하지만, 차설아는 속으로 ‘공작동남비’는 남녀의 비극적인 사랑을 노래한 내용이라 결혼식에 사용하기에는 알맞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신랑단은
사람들은 모두 성도윤을 바라보며 불가사의한 표정을 지었다.그들은 모두 성도윤, 강진우 그리고 허청하의 스토리를 알고 있었다.성도윤이 결혼식에 참석한 것에 대해 이미 많은 사람이 놀랐는데, 지금은 성도윤을 불러 혼사를 돕다니! 성도윤은 정말 대인배라는 생각이 들었다.성도윤은 얇은 입술을 오므리고, 아무 말도,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마치 내키지 않은 듯싶었다.분위기는 순식간에 어두워졌고 아주 난처해졌다.시간이 거의 다가오자 사도현은 조급해하며 한숨을 내쉬었다.“형, 우리도 형한테 이 일을 부탁하는 건 아니라는 걸 알아...”“하지만 청하 누나가 전에 형한테 죄책감을 갖고 있다고 했잖아. 형의 축복을 받아야 누나가 문을 열 것 같아. 그러니까 형이 좀 나서줄래?”강진우는 미간을 찌푸렸다.“도현아, 도윤이 난처하게 만들지 마. 도윤이한테 이 일을 맡기는 건 너무 가혹해.”“하지만...” 사도현이 뭔가를 말하려 했지만, 성도윤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괜찮아. 내가 직접 나서야 한다면, 알겠어.”성도윤은 눈살을 찌푸리고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가볍게 방문을 두드리며 말했다.“청하야, 안심하고 문 열어. 난 이미 오래전에 내려놓았고, 너랑 진우가 행복하기를 진심으로 축복하고 있어.”쥐 죽은 듯 조용하던 방 안에서 드디어 인기척이 났다.허청하는 연약하고 죄책감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도윤아, 진우 오빠랑 내가 너한테 많이 미안해. 네가 그 말을 해주기만을 기다렸어. 고마워. 진짜 고마워.”그리고 방문에 틈이 생겼다.신랑단은 서둘러 여세를 몰아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허청하의 친구들은 강하게 저항했다.순간, 현장은 혼란스러워지더니 열기가 뜨거워졌다.성도윤은 꼿꼿한 몸을 세우고 사람들의 가장자리에 서서, 이 모든 것을 묵묵히 바라볼 뿐 참여하지 않았다. 미간에는 숨길 수 없는 우울함이 비쳤다.차설아는 안전을 위해 인파와 멀리 떨어져 있었다.차설아는 몰래 성도윤을 힐긋 쳐다보았다. 그의 우울한 모습에 차설아는 또 마음이 약해졌
성도윤은 그제야 차설아의 말을 깨닫고 어이가 없었다.‘내가 어딜 봐서 괴로워하는 사람으로 보이지?’방금 그의 기분은 확실히 좀 가라앉았지만, 허청하때문이 전혀 아니었다.단지 차설아와 결혼할 때 너무 간단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식 같은 것도 너무 건성이었고 기념할 만한 과정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 후회되었다.심지어, 앞으로 차설아와 재결합한다면 그들의 결혼식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지까지 계획하고 있었다.하지만 성도윤은 당연히 솔직히 말할 리 없었고, 이 기회를 타 차설아를 놀리기 시작했다.성도윤은 잘생긴 얼굴에 슬픈 얼굴을 하고 말했다.“맞아, 괴로워 죽겠어. 마음이 너무 아파.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지? 너무 화가 나. 어떻게 하면 좋을까?”차설아는 더욱 마음이 약해져 아이를 달래듯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괜찮아. 정신 바짝 차려. 내 생각에 최고의 복수는 당신이 더 행복해지는 거야. 저 사람들보다 더 달콤한 사랑을 하는 거지!”“하지만 난 없어...”성도윤은 비참한 표정을 지었다.“난 글렀어. 다들 내가 당신이랑 이혼한 것도 알고, 당신이 배경수랑 붙어 다니는 것도 알고 있어. 너무 창피해. 사람들은 날 어떻게 생각할까?”“기다려봐. 내가 말했잖아. 오늘 절대 지지 않게 해준다고! 그래도 내 전 남편인데, 당신이 너무 비참한 모습이면 나도 창피해.”두 사람의 속삭임을 허청하는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허청하는 웃으며 강진우와 이야기를 하고, 여러 가지 게임을 하며 행복해 보였지만, 속으로는 씁쓸하기 그지없었다.‘두 사람 이혼한 거 아니었어? 왜 저렇게 친해 보여? 여기서 손까지 잡고 난리야? 괜히 신경 쓰이게!’“도윤아, 계속 밖에 서 있지 마. 나랑 진우 오빠가 가장 축복받고 싶은 사람이 바로 너였어...”허청하는 변두리에 서 있는 성도윤을 보며 말했다.“도윤아, 우리 세 사람 같이 사진 한 장 찍었으면 좋겠어.”모두들 흥미진진한 표정을 지었다.‘참, 고집이 있는 신부네. 기어코 어색한 상황을 만들어야겠어?’‘응석
모두 깜짝 놀랐다!성도윤의 행동은 마치 천둥번개처럼 현장을 산산조각 냈다.모두의 인상 속에 성도윤은 차갑고 절제된 모습의 재벌가 이미지였다. 절대 대중 앞에서 스킨십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헉!”차설아는 눈이 휘둥그레졌고, 머리가 하얘졌다.그녀는 본능적으로 남자를 밀어내려 했지만, 방금 그에게 절대 지게 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일이 떠올랐다.‘이 상황에서 반항하면 이 녀석 체면이 구겨지겠지?’그래서 차설아는 남자의 키스를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열정적이고 애틋한 키스는 차설아의 평온한 마음을 어지럽혔다.차설아는 마치 불가마에 들어간 듯,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고, 자신도 모르게 그의 키스에 응하고 있었다.“좋아요! 바로 이렇게 달콤하고 정열적으로 하는 거예요. 현장에 있는 커플분들 잘 배워두세요!”사진작가는 흥분한 표정으로 셔터를 미친 듯이 누르며 이 소중한 장면을 놓치지 않으려 했다.모두 달콤한 로맨스 연극을 무료로 감상하는 듯 집중하기 시작했고, 마음이 간지러웠다.사도현과 같은 경험이 풍부한 선수도 박수를 치며 외쳤다.“우리 형, 진짜 멋있어. 이걸 누가 감당하겠어? 보아하니 여자를 사로잡는 데에도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것 같네. 부러워!”강진우는 전 과정을 지켜보며 복잡한 표정으로 웃더니 약간 부러운 말투로 말했다.“서로 사랑한다는 게 이런 거구나. 우리 도윤이 이젠 잘하네...”유독 허청하의 아름다운 얼굴에는 아무리 숨겨도 감출 수 없는 상심이 가득했다.그녀가 아무리 손가락을 꽉 조르고, 있는 힘을 다해 자신을 억제하려 했지만, 참지 못하고 크게 외쳤다.“그만!”이 소리는 너무 갑작스러워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은 허청하에게 쏠렸다.허청하는 입술을 떨며 상기된 얼굴로, 농담조로 말했다.“오늘은 나랑 진우 오빠 결혼식이야. 스포트라이트를 빼앗아 가면 우린 어떡해?”성도윤은 그제야 차설아를 놓아줬고, 잘생긴 얼굴에는 아직 여운이 남은 듯했다.“맞네. 이런 일은 남녀 간에 문을 닫고 해야지... 우리가 스포트라이트를
“그렇게 보여?”성도윤은 착잡한 표정으로 입꼬리를 씩 올리고는 물었다.“그럼 나 어떻게 해야 하는데? 사랑을 위해서 결혼식을 끝장낼까?”그 말을 들은 차설아는 여러 가지 생각으로 복잡한 마음에 흠칫했다. 성도윤의 말을 들어보니 그가 아직 허청하에게 마음이 있는 걸 확신했다.그가 한편으로 안쓰럽긴 했지만, 과거의 자신을 생각하면 더없이 마음이 아팠다.그녀와 성도윤의 4년 동안의 결혼 생활은 이제 와서 보니 철저한 실패였다. 임채원이 끼어들지 않았다고 해도 그의 마음속엔 영원히 그녀의 자리가 있을 수 없을 것이다.이미 마음을 모두 첫사랑에게 줬는데 차설아라고 어떻게 그의 마음을 뺏어올 수 있겠는가?“정말 내려놓지 못하겠다면 청하 씨한테 똑똑히 말해. 결혼식 전에 말한다면 되돌릴 수 있을 거야...”차설아는 씁쓸한 마음을 감추면서 애써 쿨한 척 성도윤을 타일렀다.“그리고 청하 씨를 정말로 사랑한다면 유치한 방법으로 괜히 약 올리지 말고. 아까 몰래 관찰했는데 당신이 나랑 입을 맞췄을 때 청하 씨는 진심으로 서운해하는 표정을 지었어. 아무리 당신이 이긴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 패배한 거나 다름없어.”성도윤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진지한 척하며 말했다.“당신 말이 맞아. 덕분에 생각이 많이 정리됐어.”그러고는 곧바로 말을 이어갔다.“하지만 이 바다가 정말 아름답네. 지금이 마침 썰물 때라 넓은 바다가 한눈에 보일 거야. 예쁜 모양의 조개도 많은 것이고. 같이 조개 주우러 갈래?”“나랑 같이?”“당신만 알고 있잖아, 내가 여전히 그 사람한테 마음이 있다는걸. 그래서 도움을 부탁할 수 있는 사람은 당신밖에 없어. 나 그 사람한테 서프라이즈 하고 싶단 말이야.”성도윤이 도도하게 말했다. 전혀 사람한테 부탁하는 간절한 말투가 아니었다.그의 말을 들은 차설아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참으로 부탁하는 말투네. 내가 뭐 당신한테 빚을 졌어? 왜 꼭 조개 주우러 같이 가야 하는데?’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남자의 부탁을 들어줬다.“도와줄게, 하지만 공짜는
돈도 받겠다, 차설아는 열심히 조개를 줍기 시작했다.성도윤은 두 손을 주머니에 꽂아 넣고는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곳에서 차설아를 따라다니며 지켜보고 있었다. 마치 아버지가 한껏 신난 아이를 따라다니듯이 말이다.바닷바람이 살랑살랑 불면서 드넓은 황금빛 모래에는 두 사람의 발자국이 옅고 깊게 남았다. 두 사람의 그림자도 겹치면서 로맨틱한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이 모든 게 너무 아름답게만 느껴졌다...“어머! 나 찾았어! 찾았다고!”차설아는 바위 뒤에서 한참을 헤집더니 잔뜩 흥분에 겨워 소리를 질렀다.성도윤이 약간 눈썹을 치켜들었다.‘정말 있는 거야?’그는 확고한 유물론자였기 때문에 모든 일을 이성적으로 바라봤다. 그래서 차설아가 말한 소위 ‘전설’은 전혀 믿지 않았다.하지만 한껏 흥분한 차설아의 모습을 보고 성도윤은 보기 드물게 초를 치지 않았다. 오히려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가고는 흥미가 있는 척하며 물었다.“어떻게 생겼는지 한 번 봐봐.”“봐봐, 이게 바로 ‘오션 하트’야. 하트 모양 같지 않아? 게다가 핑크색이잖아!”차설아는 하트 모양의 조개를 바다에 헹구고는 조심스럽게 손에 쥐더니 활짝 웃는 얼굴로 성도윤에게 건넸다.햇살 아래 핑크색 하트 모양의 조개는 환상적인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심지어 공기 중에도 핑크색 버블이 가득 채워진 것만 같았다.“캑캑!”성도윤이 마른기침을 했다. 전에 따이띠에서 휴가를 보낼 때도 모래에 이런 조개가 온통 널려있어 그에게는 전혀 놀랍지 않다는 사실을 차설아에게 알려주고 싶었다.하지만 그는 끝내 뱉으려던 말을 꾹 삼키고는 덤덤하게 거짓말을 했다.“응, 괜찮네.”그는 줄곧 독단적으로 행동하던 자신이 왜 이렇게 남의 마음을 잘 헤아리게 되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아마도 눈앞의 이 여자가 모처럼 날카로운 모습이 아닌 귀여운 모습을 드러냈기에 그도 이 훈훈한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하지만 차설아는 곧바로 웃음을 거두고는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계산하기 시작했다.“조개를 줍는데 총
인기 여배우 조여빈이 두 팔을 두르고는 서서히 성당 쪽으로 걸어오는 성도윤과 차설아 두 사람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녀의 눈빛은 온통 질투로 가득 찼다.그녀는 배우가 되기 전부터 성도윤을 좋아했었다. 기필코 성도윤과 잘해보려고 마음먹었으나 그녀가 뜨기 전에도 성도윤은 결혼하게 되었다.겨우 좋아하는 남자가 이혼할 때까지 기다리게 되었는데... 보아하니 수상쩍은 상황이었다.“누가 알아? 어차피 오빠도 차설아 안 좋아해. 아마 차설아가 뻔뻔하게 빌붙어 있는 거 아닐까?”차설아를 바라보는 소이서의 눈빛에는 경멸이 깃들어 있었다. 그녀는 조여빈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여빈 언니, 언니가 너무 주저해서 그래. 그렇게 오랫동안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니 내가 다 답답하단 말이야. 어차피 두 사람은 이혼했으니 얼른 가서 오빠한테 말이라도 걸어봐... 오빠가 돈도 많고 잘생겨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눈 뜨고 지켜보고 있는데? 그래도 가만히 있을 수 있겠어?”조여빈도 조급한 얼굴로 말했다.“내가 다가가기 싫어서가 아니라. 지금 한창 작품도 잘 되고 있고, 곧 새 영화 들어가는데 스캔들이 뜨면 상황이 복잡해진단 말이야.”“오빠가 지금 솔로라서 오빠 마음을 잡을 수 있다면 사람들은 오히려 언니를 부러워하겠지. 그런 걸 스캔들이라고 할 수도 있나?”소이서는 한숨을 푹 쉬며 말을 이어갔다.“하지만 오빠한테 다가가되 차설아를 꼭 조심했으면 좋겠어. 겉으로는 아무 욕심도 없는 척하지만 얼마나 독한 사람인데. 전에 채원 언니가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는데도 차설아가 온갖 수단을 써서 그 아이를 죽였어. 나도 지금 감히 건드릴 엄두가 나지 않아 멀리 피하고 있잖아.”임채원이 모습을 감춘 뒤로 소이서는 새언니로 될 사람을 물색하고 있었다. 조여빈은 의심할 여지 없이 최고의 후보였다.차가운 얼굴의 조여빈은 입꼬리를 씩 올리더니 자신감을 드러내며 도도하게 말했다.“연예계에서는 그런 걸 수법으로 쳐주지도 않아. 어린애들 장난 같은 거라고. 난 밑바닥에서부터 여기까지 올라왔
“아니.”성도윤은 차가운 말투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말했다.“그럴 리가 없어!”허청하는 하늘이 무너진 것만 같아 눈물이 실이 끊어진 구슬처럼 뚝뚝 떨어졌다.그녀는 성도윤의 목을 꽉 끌어안고는 예전처럼 남자의 얼굴을 맞대면서 그의 마음을 붙잡으려고 했다.“진우 오빠한테 미안해서 그러는 거지? 그래서 나에 대한 사랑을 애써 숨기는 거지? 사실 너도 나를 못 잊었잖아, 맞지?”“진우랑은 상관없어.”성도윤의 눈빛은 더 싸늘해졌다. 그는 차가운 손길로 허청하의 손을 자신의 목에서 떼어내며 말했다.“네가 진우랑 연애하지 않았더라도 난 너에게 돌아가지 않았을 거야. 그러니 이성적으로 행동하길 바라.”“왜?”허청하는 괴로운 듯 성도윤을 바라보더니 울먹이며 물었다. 그녀는 남자가 더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예전의 너는 그렇게 나를 사랑했잖아. 벗꽃나무 아래서 네가 어떻게 나한테 고백했고 키스했던 것까지 다 기억나. 네가 진심이었던 걸 알아. 심지어 나를 위해서 성씨 가문의 후계자 자리도 포기할 수 있다고 했잖아. 해외에 가서 같이 더 공부하기로 했고. 그렇게 깊었던 감정을 이제 내려놓을 수 있다고?”“인정해, 너한테 마음이 뺏겼던 걸. 나도 널 진심으로 사랑했어, 하지만 그건 과거일 뿐이라고. 너도나도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을 소중히 여겨야 해.”성도윤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그는 예전에 허청하를 사랑한 게 맞았다. 심지어 차설아와 결혼하고서도 허청하를 사랑한다고 착각했었다.하지만 차설아와 이혼하고 다시 자유의 몸으로 돌아오게 되자 그는 문득 깨달았다. 허청하를 사랑하는 게 아닌 진심을 다했던, 순수한 감정을 지닌 그때를 내려놓지 못했다는 것을.“하하, 눈앞의 사람을 소중히 여기자고? 그게 누군데?”허청하는 눈물을 글썽이며 코웃음을 쳤다.“넌 모르겠지, 진우 오빠가 얼마나 위선적인 사람인 것을. 사실 진우 오빠는 날 그렇게 사랑하지도 않아. 그냥 내 신분이나 배경이 강씨 가문 며느리로서 적합하다고 느꼈을 거야. 강씨
“그게...”차설아는 잠시 말을 잃었다. 거짓말을 잘하지 못하는 그녀는 특히 자신이 아끼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그랬다.“임신 테스트기도 다 믿으면 안 돼요. 이게 호르몬과 관련이 있는데 때로는 남자의 에스트로겐 수치가 너무 높으면 임신 반응이 나올 때도 있거든요.”박성훈이 차설아를 대신해 설명했다.비록 이 설명이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성도윤 같은 남자에게는 충분히 먹힐 만했다.역시나 성도윤은 그 말을 믿었고 얼굴에 실망한 감정이 가득했다.“정말 그럴 수도 있나요?”“그래. 혈액 수치가 가장 정확한 증거야. 혈액 검사 결과, 차설아 씨는 정말로 임신하지 않았어.”박성훈이 성도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위로했다.“괜찮아, 두 사람 아직 젊으니 앞으로 가능성이 많을 거야.”“미안해요, 도윤 씨. 나도 사실 두 줄이 나와서 임신한 줄 알았어요. 괜히 실망하게 해서 미안해요.”차설아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성도윤에게 사과했다.그의 마음은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실망한 기분도 잠시, 그는 차설아를 서둘러 달랬다.“바보야, 내가 미안해. 다 내가 부족해서야. 약속할게 이제부터 매일 밤 더 열심히 할 거야.”“엣헴!”박성훈이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이 두 사람 또 닭살 돋게 하네. 매일 밤 열심히 한다고? 뭘? 이러다 어떻게 열심히 하는지까지 말할 기세군.’“형, 목이 마르면 거실에 나가서 커피나 좀 마시세요. 이제 검사도 필요 없는 것 같은데.”성도윤이 직설적으로 내뱉었다.“설아 씨가 임신 안 됐다고 하자마자 바로 나를 쫓아내려고 하네? 아침에 그 애타게 부탁하던 모습 성도윤은 어디 갔지? 이제 다시 나를 모셔 오기 힘들 텐데.”박성훈이 팔짱을 끼고 웃으며 말했다.‘팔불출에는 정말 약이 없군.’“그럼 형은 그냥 여기 있어요. 내 능력으로 한 달 안에 아린이가 반드시 아기를 가질 수 있을 것 같으니까.”성도윤이 조금 유치하게 말했다. 아무리 도도하고 성숙한 남자라도 사랑 앞에서는 마치 어린아이 같았다.차설아가 남자의 팔을 잡고 말렸다.
“잘됐네요. 마침 딱 배고팠는데!”차설아는 피곤하고 정신이 흐릿했지만 기대에 가득 찬 목소리로 성도윤을 반겼다.성도윤이 사 온 케이크는 차설아가 가장 좋아하는 케이크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가게 주인은 분점을 열 계획도 없고 배달도 하지 않으며 매일 일정 수량만 판매했다.그래서 정말 오래 기다려야 하고 운이 좋아야만 살 수 있었다.가게 주인의 기분도 들쑥날쑥해서 기분이 좋을 때는 많이 팔지만 기분이 나쁘면 그날은 일찍 가게 문을 닫기 일쑤였다.단순히 줄을 서서 맛있는 케이크를 먹는 것도 있지만 케이크를 사기 위해 기다린 사람들의 수고와 정성도 들어 있었다.차설아는 숟가락으로 케이크 한 조각을 떠서 입에 넣었다. 그 부드럽고 차가운 질감에 그녀는 감동해서 눈물이 날 뻔했다.“맛없어?”차설아의 표정을 보고 성도윤이 이마를 찌푸리며 걱정스레 물었다.“아니요. 너무 맛있어서... 이제 다시 이런 케이크를 못 먹으면 너무 슬플 것 같아서요.”“바보, 그런 말을 왜 해? 앞으로 당신이 원하면 매일 사다 줄게.”성도윤이 차설아의 손을 잡고 진지하게 약속했다.“좋아요, 그럼 매일 먹고 싶어요. 당신이 매일 사다줘요...”차설아는 입술에 크림을 묻힌 채 남자에게 물었다.“그런데 매일 줄 서서 사 오느라 면 당신이 힘들지 않을까요?”“걱정 붙들어 매, 당신이 질리지만 않는다면 매일 가서 사 올 수 있어. 정 안 되면 내가 그 가게 주인을 찾아서 배워서 매일 내가 직접 만들어서 줄게...”성도윤은 차설아의 입가를 닦아주며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혹시 나한테 뭔가 숨기고 있는 거 아니야?”“어, 뭐가요?”차설아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그녀는 그의 관찰력이 이렇게 예리할 줄 몰랐다.“분명히 뭔가 있어.”성도윤이 단호하게 말했다.그는 돌아오자마자 분위기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지만 참으면서 기다렸다.그러다 차설아가 케이크를 먹으며 그런 말을 하자 분명히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있었던 걸 확신했다.“역시 당신 눈을 피할 수는 없네요. 사실,
박성훈은 비관적인 차설아를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몇 달 전만 해도 그녀는 자신감 넘치고 자유롭고 시원시원한 여자였다.그런데 지금은 눈을 잃고 독에 중독되어 마치 시들어버린 꽃처럼 처량해 보였다.“설아 씨, 제가 살아있는 허준 선생처럼 신통한 의사는 아니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약속할 수 있습니다. 반드시 최선을 다해 당신을 치료할 것이고 당신의 눈도 적합한 이식자가 나타나기만 하면 다시 원래대로 회복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너무 절망하지 마세요. 살아있는 한, 희망은 있는 법입니다.”그는 진중한 목소리로 차설아를 위로했다.물론 중금속 중독을 완전히 해독하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다.지금까지 성공 사례가 많지 않지만 의학 역사 속에서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과거에도 성공한 사례가 있는 만큼 자신도 연구를 거듭하면 반드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고마워요, 박 선생님. 그 말 한마디가 저한테 용기를 주네요.”차설아는 힘겹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박성훈이 있는 방향을 향해 말했다.“해독을 할 수 있든 없든, 그리고 제 눈이 다시 보이든 아니든, 한 가지만 부탁드리고 싶어요. 이 사실을 도윤 씨한테는 절대 알리지 말아 주세요. 도윤 씨가 지금 너무 지쳐 있어요. 더 이상 그이가 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아요.”“걱정 마세요. 저는 그런 말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박성훈은 차설아의 성도윤을 향한 깊은 감정에 감탄했다.이토록 힘든 상황에서도 자신보다 사랑하는 남자를 먼저 걱정하는 차설아를 보면서그녀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느껴졌다.“제 아이도 지킬 수 없겠죠?”차설아가 한참을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박성훈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맞아요. 아이는 지킬 수 없습니다.”그가 힘겹게 이어 말했다.“설아 씨가 현재 중금속 중독 상태고 해독을 위해 강한 약을 복용해야 합니다. 이 약들은 태아의 성장에 심각한 영향을 미쳐요. 제 의견으로는 아직 초기일 때 아이를 포기하는 것이 낫습니다.”“그럴 줄 알았어
박성훈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이런 상황이라면 차라리 빨리 죽는 게 낫다고 할 수도 없고...’하지만 그는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했다.혈액 검사 보고서에 따르면 차설아의 여러 혈액 수치에서 이상이 발견되었고 그녀의 지금 상태로 본 결과, 박성훈은 차설아가 중금속 중독에 걸렸다고 판단했다.중금속 중독은 쉽게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지는 않지만 서서히 신체의 각 기관을 쇠약하게 만들고 신경을 마비시키는 증상이었다.초기에는 극심한 피로와 졸음을 유발하며 무기력하게 만들지만 후기로 갈수록 신경과 장기가 손상되며 극심한 통증을 수반하게 되고 이러한 증상은 그야말로 생지옥과도 같았으며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정도의 고통이었다.박성훈은 어떻게 입을 열어야 할지 고민하다 결국 우선 잔인한 진실을 감추기로 결정했다.“어쨌든 걱정 마세요. 저희가 반드시 치료해 드릴 겁니다.”그렇게 말은 했지만, 사실 중금속 중독을 완전히 치료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게다가 투여된 독의 종류를 정확히 파악해야만 적절한 치료법을 적용할 수 있었고 그러려면 독을 투여한 사람이 어떤 중금속 원소를 사용했는지 솔직하게 밝혀야 한다.“지금부터 최근 식사 내용을 정확히 말해 주세요. 혹시 식사 외에도 평소 드시지 않던 걸 섭취한 적 있나요?”박성훈이 진지한 눈빛으로 물었다.“저 중독된 거죠?”차설아는 질문에 답하지 않고 되레 되물었다.“어떤 독에 중독됐는지 알 수 있어요?”“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초기 판단으로는 중금속 중독일 가능성이 큽니다.”박성훈은 차설아가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다는 사실에 순간 당황했지만 곧바로 숨김없이 사실을 털어놓았다.이런 경우, 환자와 의사가 완전히 솔직하게 소통해야만 치료에 도움이 되기에 아무리 잔인한 현실일지라도 그녀가 사실을 알아야 했다.“중금속 중독...”차설아는 그 단어를 듣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몸이 서서히 차가워지며 절망감이 엄습했다.그녀는 예전에 비슷한 뉴스를 본 적이 있었다.한 명문대 여학생이 룸메이트의 질투로
“무슨 일인데요?”박성훈이 갑자기 진지해지며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차설아를 바라보았다.“뭘 알아내든 상관없어요. 도윤 씨한테는 좋은 얘기만 해주세요. 안 좋은 결과는 절대 말하지 마시고요.”차설아가 간결하게 자신이 원하는 걸 얘기했다.그녀는 방금 전에 애써 성도윤을 떨어뜨려 놓으려 했던 이유가, 그가 걱정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 거짓말을 유지하려면 박성훈의 협조가 필요했다.“하... 역시 그럴 줄 알았어요.”박성훈은 차설아가 이런 부탁을 할 것이라는 걸 예상했지만 그녀를 보며 여전히 마음이 아팠다.그런 상태에서 차설아는 여전히 성도윤을 걱정하며 그가 조금이라도 슬퍼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두 사람 서로를 진짜로 사랑하나 보네...’“걱정 말아요. 내가 분위기 못 읽고 아무 말이나 하는 사람도 아니고 어떤 걸 얘기할지 잘 알고 있어요.”박성훈이 차설아를 안심시키듯 말했다.“그리고 설아 씨도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요. 내가 신의 손을 가진 명의는 아니지만 그래도 의술은 좀 하는 편이니까 저희 말대로만 따르면 큰 문제는 없을 거예요. 게다가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니잖아요. 어쩌면 단순히 임신 초기에 너무 피곤해서 그런 걸 수도 있어요.”“정말 그런 거였으면 좋겠네요.”차설아는 힘없이 미소를 지으며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하지만 검사 결과가 결코 좋을 리 없다는 것을 그녀는 이미 직감하고 있었다. 상대는 처음부터 그녀를 해칠 작정이었고 가볍게 봐줄 리가 없었다.만약 배경윤이 조금만 늦게 알아차렸더라면 지금쯤 그녀는 이미 손쓸 수 없는 상태였을지도 모른다.지금 당장은 그 정도까지는 아닐지라도 분명 좋은 상태는 아닐 것이다.얼마 지나지 않아 혈액 검사 결과가 나왔다.검사 결과를 살피던 그의 표정은 한층 무거워졌고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검사 결과는 너무 처참했다.“어때요, 박 선생님?”차설아는 몽롱한 상태에서 거의 잠들 뻔했지만 억지로 정신을 붙잡고는 줄곧 침묵하고 있는 박성훈에게 물었다.“뭐라고 말해야
성도윤은 자책감에 사로잡혀 당장이라도 할복이라도 할 기세였고 박성훈은 그런 그를 진정시키려 일부러 괜찮을 거라고 말한 것이었다.하지만 사실, 차설아의 심장 박동은 이상했고 거의 보름 동안 지속된 무기력함과 과도한 졸음까지 고려했을 때, 그녀의 몸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게 분명했다.그리고 그 원인은 단순히 임신 때문이 아니라는 것도 박성훈은 어렴풋이 감이 왔다.하지만 지금 당장 혈액 검사 결과도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성급하게 결론을 내릴 수는 없었다.괜히 성도윤에게 불안감을 주면 그가 차설아에 대한 과보호 수준을 고려할 때 당장이라도 미쳐버릴 게 뻔했기 때문이다.“정상이면 다행이야.”성도윤은 박성훈의 말을 듣자마자 한숨을 내쉬며 마치 온 세상의 짐이 내려간 듯 안도했다.“들었지, 당신 괜찮대. 그냥 임신해서 피곤한 것뿐이래. 내가 괜히 겁먹고 난리 친 거야. 미안해. 내가 이런 경험이 없다 보니까 괜히 걱정했네.”성도윤은 기뻐하며 차설아를 꼭 끌어안았다.그리고 그녀의 배를 손으로 가볍게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야, 꼬맹이. 엄마 너무 힘들게 하지 마라? 너 때문에 엄마가 얼마나 피곤해하는지 봤지? 만약 엄마를 더 힘들게 하면, 네가 세상에 나오는 순간, 아빠가 먼저 너 혼쭐낼 거야!”차설아는 그의 유치한 농담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그만 해요. 진짜 왜 이렇게 점잖지 못해요?”“하아, 두 사람 오늘 너무 닭살 커플인 거 아니야?”옆에서 이 모든 걸 보고 있던 박성훈이 질색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 정도면 거의 ‘고문 수준’의 애정 행각이었다.그때, 차설아가 성도윤을 바라보며 갑자기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도윤 씨, 나 갑자기 케이크가 먹고 싶어졌어요. 지금 가서 사 올 수 있어요?”“지금?”성도윤은 순간 당황했다.그는 케이크를 사 오는 게 싫은 게 아니었다. 하지만 혈액 검사 결과가 아직 나오지 않은 상태라 결과를 확인한 후에 움직이고 싶었다.“네. 지금 당장이요. 지금 먹고 싶다고요.”차설아가 일부러 짓궂게 물었다.“
박성훈은 처음엔 가벼운 농담을 던지며 분위기를 풀어주고 있었지만 곧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잠깐만!”그는 이마를 찌푸리며 성도윤을 바라보더니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왼쪽 아래로 2~3cm 정도 더 옮겨 봐.”성도윤도 덩달아 긴장해졌다.그는 박성훈의 지시대로 청진기를 차설아의 심장 왼쪽 아래 3cm 지점으로 옮기며 조심스럽게 물었다.“뭔가 이상한 점 있나요?”“...”박성훈은 대답하지 않고 그저 얼굴을 굳힌 채 조용히 청진기에 집중했다.한참 후에야 그는 청진기를 내려놓으며 말했다.“지금은 확실하게 들리는 건 없어. 혈액 검사 결과까지 봐야 정확하게 알 거야.”차설아는 처음부터 차분하게 검사를 받으며 잘 협조하고 있었지만 무언가를 깨달은 듯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그리고 박성훈을 향해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늘 검사는 여기까지만 할까요? 박 선생님도 도착하자마자 이것저것 살펴보셔서 피곤할 테고 저도 피를 너무 많이 뽑아서 그런지 좀 지치네요. 나머지는 내일 하는 게 어때요?”사실 그녀는 자신의 몸에 뭔가 이상이 있다는 걸 감지하고 있었다.하지만 그게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확신할 수 없었고 괜히 성도윤이나 다른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게다가 현이를 통해 누군가 자신을 해치려 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아냈다.그 사람의 정체만 밝혀지면 직접 해결할 생각이었다.“온 지 얼마 안 돼서 피곤하지는 않은데요? 게다가 그냥 검사 결과만 보면 되는 거라 괜찮아요.”박성훈이 어깨를 으쓱하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저택에 온 지 이제 겨우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았고 그동안 한 거라곤 심장 소리 한 번 들은 게 전부인데 대체 뭐가 그렇게 피곤하다는 건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제가 피곤해서 그래요. 그리고 오늘 꼭 검사를 다 마쳐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차설아의 목소리는 차분하면서도 단호했고 명확한 거절의 의미였다.더 이상 검사에 협조할 생각이 없는 듯한 그녀를 보면서 박성훈은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그리고 잠시 고
박성훈은 말을 마치고 청진기를 꺼냈다. 그러더니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차설아의 옷 안으로 넣으려 했다.“잠깐!”성도윤이 그 장면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재빠르게 박성훈의 손을 붙잡고 제지했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청진하고 있지 그럼 내가 뭐 하는 걸로 보여?”박성훈이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내가 해요.”성도윤이 단호하게 청진기를 낚아채더니, 정색하며 말했다.“내 아내는 부끄러움을 많이 타요. 이런 건 내가 직접 할 테니까, 형은 듣기만 해요.”박성훈이 말없이 그를 보고 있자 성도윤이 되물었다.“왜, 문제 있어요?”“문제라기보단... 좀 오버 아니야?”“어디가 오버에요? 형이 직접 하는 게 더 이상한 거지.”‘누가 알아? 검사하는 동안 실수로 엉뚱한 곳이라도 건드릴지.’보통 때는 몰라도 지금처럼 바로 눈앞에서 보고 있는 상황에선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하아... 역시 소설에서만 보던 ‘집착광공’이 실존하는구나.”박성훈이 이마를 짚으며 감탄했다.자신이 가끔 보던 ‘재벌 남주’ 소설들이 그냥 창작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었다.현실이 오히려 소설보다 더 과장되어 있었다.“헛소리 말고 어디에 대야 하는지만 알려 줘요.”성도윤이 청진기를 들고 박성훈을 노려보았다.“음... 왼쪽 쇄골 중앙선과 다섯 번째 갈비뼈 사이 경계에 대면 돼.”성도윤의 태도가 워낙 단호해서 박성훈은 그냥 순순히 위치를 알려 주었다.“잠시만요.”성도윤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청진기를 차설아의 잠옷 안으로 밀어 넣었다.그러더니 여기저기 더듬으며 위치를 찾기 시작했다.“쯧쯧.”박성훈은 청진기를 끼고 있었기에 성도윤이 어떻게 검사하고 있는지 소리로 다 들을 수 있었다.하지만 감히 뭐라고 할 수도 없었고 결국은 그냥 내버려두기로 했다.‘어휴, 성도윤이니까 참는 거지.’그가 속으로 체념하는 사이, 성도윤이 한참 동안 위치를 못 찾자 결국 한마디 내뱉었다.“이 정도도 못 견디면 나중에 내진 검사할 때는 난리 나겠네?”“뭐요?”
차설아는 앞이 보이지 않는 대신 촉각과 후각이 무척 예민했다.방에 들어서는 순간, 그녀는 공간이 달라졌다는 걸 바로 알아차렸다.예전엔 책 냄새가 가득하던 방이 이제는 소독약 냄새로 가득 차 있었고 조명도 더 밝고 뜨거워진 느낌이었다.이제 차설아는 자신의 모든 걸 성도윤에게 맡긴 상태였다.그가 정말로 해부라도 하겠다고 나선다면 그저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당신 상상력 정말 대단한데? 우리 애도 나중에 소설가 체질이었으면 좋겠다.”성도윤은 차설아의 넘치는 상상력에 웃음이 터졌고 그녀의 손을 잡고 안쪽으로 이끌었다.“차설아 씨, 지금 혈액 검사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전반적인 건강 상태를 확인해야 하거든요.”간호사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설명했다.“네, 하세요. 어차피 지금 나는 도마 위 생선이라 목숨은 이미 여러분들 손에 있으니까요.”차설아는 자조적인 농담을 하며 팔을 내밀었다.곧이어, 조용한 방 안에 사각사각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바늘이 그녀의 정맥을 찔렀다.“살살 좀 해 주세요.”성도윤은 차설아의 살짝 찡그린 얼굴과 연달아 뽑혀 나오는 혈액을 보며 속이 상해 간호사에게 신신당부했다.그때, 앞쪽에서 장난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성 대표님의 아내 사랑이 참 넘치시네요. 난 조용히 보조만 하려고 온 건데 이렇게까지 과한 애정 행각을 볼 줄은 몰랐어요. 좀 자제하세요.”그 말투를 보아하니 성도윤이 말했던 ‘대단한 의사’가 틀림없었다.차설아는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그리고 순간 놀란 듯 말했다.“이 목소리... 어쩐지 익숙한데요?”“당연하지. 우리랑 꽤 인연이 깊은 사람이거든.”성도윤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설마... 이분...”차설아는 머릿속에서 기억을 더듬었다.그리고 순간적으로 깨닫고 외쳤다.“박 선생님?”“하하하. 나를 이렇게 빨리 기억해 주다니, 영광인데요? 이걸로 승부는 끝났네요.”“도윤아, 나중에 밥 한 끼 사.”박성훈은 호탕하게 웃으며 차설아가 자신을 단번에 알아본 것이 무척이나 자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