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차설아는 매혹적인 성도윤의 눈빛을 보더니 저도 모르게 그날 밤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그날도 성도윤은 지금처럼 제멋대로 앞을 막아서고는 그녀와 관계를 가졌다.하지만 그 일이 있은 후로 성도윤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무책임하게 굴었다. 그래서 차설아는 화가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승부는 이미 갈렸고, 난 남아서 당신과 있어줄 책임도 없어. 패배를 인정하지 못하겠으면 처음부터 게임을 안 했어야지.”차설아는 오랫동안 억눌렸던 분노에 싸늘한 얼굴로 말하고는 남자를 돌아보지도 않으면서 룸을 떠났다.성도윤은 제대로 충격받은 듯 무표정으로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잘생긴 얼굴의 그는 차가운 기운을 뽐내며 그 누구도 다가가지 못하게 했다.룸 안에 무거운 분위기가 계속되자 사람들은 식은땀을 흘리며 서로 눈치를 살폈다.소문에 의하면 성씨 가문의 사모님이었던 차설아는 얌전하고 단정하기로 유명했다. 마치 교양 있는 집안에서 바르게 자란 아가씨같이 말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렇게 당돌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온 해안시에서 이런 건방진 태도로 성도윤을 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그녀밖에 없을 것이다. 혹시 성도윤의 사랑을 받고 있어 두려운 게 없는 건 아닐까?진무열은 성도윤이 이미 취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과거 경험으로 볼 때 술에 취한 성도윤은 상당히 까다로웠고 끔찍한 일을 많이 저지르곤 했다. 그래서 그는 급히 사람들에게 먼저 자리를 뜰 것을 권했다. 아니면 성도윤이 술에 취해 제멋대로 한 말이나 행동이 사람들에게 알려진다면 오히려 다음 날 그만 다른 사람들의 입을 막느라 바빠질 것이다.사람들도 눈치 빠르게 인사말을 나누고는 바로 자리를 떴다.조금 나이 있는 어르신은 심지어 성도윤의 어깨를 툭툭 치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성 대표, 너무 기죽지 마. 아내가 마음이 떴다면 다시 잘 보이면 되잖아. 파이팅!”“X발, 누가 잘 보이겠대요? 돌아오려고 울고불고 사정해도 저는 다시 받아주지 않을 거예요!”성도윤은 큰 몸을 휘청거리면서 잔뜩 화가
진무열은 노래 리스트를 보자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성도윤이 예약한 첫 곡은 바로 김범수의 ‘보고 싶다’였고 두 번째 곡은 ‘끝사랑’, 세 번째 곡은 ‘슬픔보다 더 슬픈 이야기’였다...모두 가슴 아픈 이별 노래들이었는데 아마 차설아한테서 받은 충격이 적지 않은 모양이었다.성도윤은 평소에 이성적이고 멀쩡해 보였지만 술만 마시면 이렇게 허당의 모습을 보여주곤 했다.결자해지라고 성도윤이 술에 취하면 슬픈 이별 노래를 마구 부르는 버릇은 역시 차설아가 고쳐줘야 할 듯싶었다.“대표님, 먼저 마시고 계세요, 저는 먼저 화장실을 다녀올게요.”진무열은 성도윤과 같이 몇 곡을 부르다가 휴대폰을 챙기고는 화장실로 향했다.잘생긴 성도윤은 그윽한 눈빛으로 스크린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애틋하게 노래를 부르고 있었기에 진무열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진무열은 화장실에 숨어 있으면서 차설아에게 전화를 걸고는 다짜고짜 하소연하기 시작했다.“사모님, 얼른 와보셔야 해요. 대표님에게 큰일 나셨어요!”차설아는 이미 집에 도착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반신욕을 하고 있었다. 다급한 진무열의 목소리를 듣더니 그녀는 매정하게 말했다.“큰일 나든 말든 나랑 무슨 상관이에요. 무열 씨, 제멋대로 나한테 전화하지 마요. 그럼 이만 끊을게요.”“안 돼요, 사모님. 꼭 한 번 오셔야 돼요. 왜냐하면...”진무열은 어떻게 말을 해야 차설아를 불러올 수 있을지 머리를 쥐어짰다.“대표님께서는 술에 취하고 나서야 사모님과의 이혼을 원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으셨습니다. 사모님을 이대로 보낼 수 없다면서 자... 자해를 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사모님이 오지 않으시면 건물에서 뛰어내리겠다고 하십니다!”그러고는 마음속으로 바로 사죄했다.‘죄송합니다, 대표님. 대표님과 사모님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대표님의 이미지를 좀 희생해야겠습니다. 두 분의 관계가 회복되면 오히려 저를 고마워할 겁니다!’차설아는 어이가 없었다.“무열 씨, 사람 괜찮아 보이던데 왜 거짓말을 해요? 나한테 안 좋은 감정
몽롱한 불빛의 룸 안에는 성도윤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스타일의 잘생긴 젊은 남자들도 있었다.남자들은 성도윤 앞에서 온갖 재롱을 부리고 있었다.“콜록콜록!”차설아는 어색한 마음에 목을 가다듬었다. 당장이라도 쥐구멍으로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성도윤은 차설아가 온 줄도 모르면서 마이크를 들고는 윤도현의 ‘사랑했나 봐’를 열창했다.“사랑했나 봐 잊을 수 없나 봐, 자꾸 생각나 견딜 수가 없어...”차설아는 자리를 뜨고 싶었지만 성도윤의 노래에 이끌리게 되었다.성도윤과 결혼한 지 이렇게 오래되었지만 성도윤이 노래하는 모습은 처음 보게 된 것이었다.항상 차갑고 그 어떤 감정도 가지고 있지 않은 듯한 그가 감미로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으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감미로운 목소리보다 차설아를 더 놀라게 한 건 바로 성도윤의 애절한 감정이었다. 그는 마치 실제로 절절하게 사랑한 사람과 이별했나 싶을 정도로 열창했다.‘그 사람은 과연 누굴까? 친한 친구와 곧 약혼할 첫사랑인 허청하일까, 미스터리의 Y씨일까? 아니면 그의 아이를 가진 임채원일까? 아무튼 나 차설아는 절대 아닐 거야!’성도윤이 자살 소동을 일으키지 않은 걸 보고는 차설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도 모르게 자리를 뜨려고 했지만 소파에 앉아있던 잘생긴 소년은 새침하게 손으로 입을 가리더니 비명을 질렀다.“어머, 이 여자 누구예요? 왜 수상하게 이러고 있죠?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거 아니에요?”성도윤은 노래를 멈췄고 깊은 눈망울로 천천히 문 쪽을 바라봤다.차설아를 본 순간 알코올 때문에 몽롱하던 그의 눈빛은 눈에 띄게 밝아졌다. 술이 깨서인지, 아니면 술에 더 취해서인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다.성도윤은 그저 조용히 차설아를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의 눈빛은 차가운 것도 아니었고 뜨거운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차설아를 내쫓지도 안으로 초대하지도 않았다.차설아는 그의 눈빛이 불편하게 느껴져 어색한 미소를 짓고는 젊은 남자들에게 말했다.“미안, 하던 거 마저 해.”차설아는
차설아가 말하고는 성도윤 앞으로 걸어가더니 그와 같이 발라드를 부르고 있던 잘생긴 남자에게 말했다.“친구, 자리 좀 비켜줄래? 이 사람 옆자리는 내 자리야.”젊은 남자는 겨우 스무 살 남짓해 보였다. 그는 이 노래방에서 가장 핫한 호스트였기 때문에 팔짱을 끼고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 제가 먼저 왔는데 왜 자리를 비켜야 하죠?”차설아는 턱을 치켜들더니 건방진 표정으로 말했다.“내가 이 사람 전처거든.”젊은 남자는 흠칫 놀랐다. 하지만 그는 노래방의 가장 핫한 호스트로서 이런 상황을 겪어보지 못했던 건 아니었다.“전처면 어때요? 우리는 현처가 와도 자리를 안 내줘요. 불만이 있으면 우리 로비 매니저님한테 말씀하세요. 하지만 한 가지만 미리 말해두죠, 우리 이 노래방은 뒤를 봐주고 있는 사람이 어마어마하거든요.”“너!”차설아는 화가 나 말문이 막혔다.‘지금 젊은이들 정말 대단하네. 어떻게 이렇게 뻔뻔스러울 수가 있지?’젊은 남자가 성도윤 옆에 앉아 있으면서 아예 자리를 내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차설아는 이 모든 상황이 너무 황당하게만 느껴졌다.“누님, 우리가 오빠랑 엄청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거든요. 얼른 집에 들어가세요, 괜히 여기 있으면서 분위기나 망치지 말고요. 지금 우리와 오빠의 즐거운 시간을 완전히 방해하고 있잖아요.”성도윤 옆에 앉은 다른 잘생긴 남자가 교태를 부리며 말했다. 눈꼴 시린 남자의 모습에 차설아는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얘네들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이야?’차설아는 참다못해 계속 침묵을 지킨 성도윤을 향해 말했다.“도윤 씨, 아무 말도 안 할 거야? 계속 이렇게 가만히 있으면 나 진짜 도윤 씨 두고 먼저 갈 거야, 나중에 나 몰라라 했다고 원망하지나 마.”성도윤은 술에 취했기에 머리가 어질어질했고 시선도 흐릿해졌다.그는 차설아가 나타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 시도 그녀에게서 눈을 뗀 적이 없었다. 마치 눈앞에 있는 여자가 진짜인지, 아니면 환각일 뿐인지 확인하고 있는 듯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숨결을 느낄 수 있을 만큼 가까이에 있었다.성도윤이 내뿜은 뜨거운 입김에는 술 냄새가 가득했다.그는 몽롱한 눈빛을 한 채 긴 손가락으로 차설아의 턱을 살짝 들고는 물었다.“그날 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데?”차설아는 미간을 구기며 의문스러운 표정을 보였다.“정말 아무것도 기억 못 하는 거야? 아니면 책임을 지기 싫어서 그러는 거야?”“한 번 말해봐.”성도윤은 장난기가 섞인 목소리로 나지막이 말했다.“말해야 내가 알 거 아니야? 내가 도대체 뭘 기억하고 뭘 잊었다는 거야?”“그날 밤...”차설아는 당장이라도 말하고 싶었지만 끝내 침묵을 지켰다.그녀는 웬만해선 술에 취하지 않았다. 취한다 하더라도 전날 밤에 무슨 말을 하고 무슨 일을 했는지 똑똑히 기억하는 편이었다. 그래서 성도윤이 아무 일도 기억할 수 없다는 걸 결코 믿을 수 없었다.‘일부러 잊은 척을 하는 거 아니야? 떠올리지 못하는 척하는 사람과 계속 말해봤자 두 사람 사이만 더 어색해질 테고.’“그날 밤, 당신은 미친개처럼 날뛰었어.”예쁜 알굴의 차설아는 차가운 기운을 내뿜으며 성도윤을 비꼬았다.“술을 잘 못 마시면 앞으로 마시지나 말든가. 술에 취했다는 핑계로 이상한 짓이나 하고, 나중에 또 모든 걸 잊은 척하니 정말 재수 없어.”성도윤은 어리둥절했다.차설아가 왜 갑자기 말을 꼬아서 하는지 모르지만 그녀의 분노가 충분히 느껴졌다.하지만 그날 밤, 먼저 그를 무안하게 만든 건 차설아가 아니던가? 그도 아직 묻고 따지질 않았는데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차설아가 먼저 선수를 치니 성도윤은 어이가 없었다.‘여자들이란 원래 다 이래?’차설아가 떠나려고 하자 성도윤은 알코올의 힘을 빌려 긴 팔로 그녀를 품에 안고는 귓가에 속삭였다.“가지 마, 나와 함께 있어줘.”또 같은 수작이었다, 그녀를 가지 못하게 붙잡는 수작 말이다.차설아는 더는 그날 밤처럼 쉽게 함정에 빠져들지 않을 것이다. 지금의 그녀는 어느 때보다도 마음이 평온했다.“성도윤, 이거 놔.”그녀의
진무열은 안경을 고쳐 쓰더니 진지한 척하며 말했다.“사모님은 모르시겠지만 대표님께서 술에 취하시면 자주 이런 행동을 취하곤 합니다. 사모님 말고도 수많은 사람들이 대표님에게 당하셨어요. 그래서 저는 알고 있죠, 이 자세로도 충분히 움직일 수 있다는걸.”“그래서 협조 부탁드릴게요. 나중에 대표님이 술에서 깨시면 사모님을 엄청 고마워하실 겁니다.”진무열은 성도윤과 차설아가 가까이 지낼 수 있는 기회를 더 많이 만들기 위해 헛소리할 수밖에 없었다.정신이 말짱한 성도윤은 죽어도 차설아에게 치근덕거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진무열은 남자가 계속 쫓아다니면 여자는 결국 넘어오게 되어있다고 생각했다.차설아는 워낙 우수하고 이제 하이 테크 협회 회장까지 맡게 되었으니 성도윤이 공을 들이지 않는다면 차설아도 쉽게 마음을 받아주지 않을 것이다.뜻밖에도 차설아는 진무열의 헛소리를 믿게 되었다.“알겠어요, 그럼 얼른 집으로 데려다줘요!”차설아는 자신을 꼭 끌어안고 놓아주지 않은 채 깊은 잠이 든 성도윤을 보더니 마음이 복잡 미묘했다.성도윤이라면 그런 버릇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날 밤 성도윤도 똑같이 그녀를 안 놓아주고 관계까지 가졌으니 말이다!성도윤의 주사가 이렇게 심할 줄 알았으면 차설아는 그와 게임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그렇게 성도윤은 차설아를 끌어안고, 진무열은 성도윤을 부축한 채 이상한 자세를 한 세 사람이 노래방을 걸어 나오고는 길가에서 택시를 잡았다.택시 안에서도 성도윤은 차설아 옆에 붙어 앉았고 차설아의 목을 끌어안은 채 놓아주지 않았다.“기사님, 조금 더 빨리 가주시겠어요?”차설아는 아무리 발버둥 쳐도 그의 품에서 벗어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택시 기사를 재촉했다.얼마 후, 성가네 별장에 도착했다.차설아가 4년 동안 있었던 곳에는 이미 그녀의 자리가 없었다. 성도윤 때문만 아니었더라면 그녀는 절대 다시 이곳에 발을 들이지 않았을 것이다.거실에는 배가 불룩하게 부풀어 오른 임채원이 눈물을 뚝뚝 흘리며 미래의 시어머니인
소영금은 습관적으로 차설아를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이 재수없는 년, 이혼한 마당에 왜 아직도 내 아들 옆에서 알짱거려? 감히 우리 집에까지 와서 도발하다니. 세상에 어쩜 너 같은 뻔뻔한 여자가 다 있는지!”진무열은 차설아를 대신해 설명하려 했으나, 차설아가 먼저 날카롭게 맞받아쳤다.“사모님, 대체 누가 누구를 귀찮게 하는지 눈 똑바로 뜨고 보세요.”“이렇게 뻔뻔한 아들을 낳았으니. 세상에 어쩜 사모님 같은 실패한 어머니가 다 있죠?”“너... 너...”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한 방 먹은 소영금은 심장병이 도질 것 같았다.“전에는 제가 며느리로서 사모님을 존경했지만, 지금은 전 이 집안과 아무런 관계도 없으니 저한테 말을 삼가해주세요. 아니면 제 변호사가 정신 손해배상 청구를 할지도 몰라요.”차설아는 말을 마치고, 혼신의 힘을 다해 성도윤에게 떨어지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성도윤! 그만하고 이거 놔! 맞고 싶어?”차설아는 주먹을 꽉 쥐고 때릴 기세였다.이 별장에 그녀는 단 1초도 머물고 싶지 않았다.진무열은 이를 보고 얼른 사람들을 불러 도와 달라고 하고, 차설아를 위해 한마디 했다.“사모님, 확실히 차설아 씨를 오해하셨어요. 오늘 저녁에는 대표님께서 술에 취해 설아 씨를 안고 놔주지 않으신 거예요. 잠든 대표님이 다치실까 봐 설아 씨가 집까지 데려다준 거고요. 사실 피해자예요.”“말도 안 돼!”소영금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내 아들은 절대 그렇게 뻔뻔하지 않아. 틀림없이 이 여우년이 내 아들을 잡고 놓아주지 않은 거야!”소영금은 씩씩거리며 두 사람에게 다가가 바로 떼어내려 했다.하지만 그녀의 아들은 진짜 뻔뻔했다. 긴 팔로 차설아의 목을 감고 놓아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낯 뜨거워진 소영금은 하는 수 없이 임채원에게 화를 냈다.“넌 거기 서서 뭐해? 빨리 와서 떼어내지 않고! 자기 남자 하나 챙기지 못하고 말이야. 앞으로 내 앞에서 다시 우물쭈물하지 마!”워낙 질투심에 미쳐있던 임채원은 차설아 때문에 호되게 욕을 먹
차설아가 떠난 후 임채원은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었다.임채원은 술취한 성도윤을 안고 소영금을 향해 말했다.“어머님, 도윤 씨 데리고 방으로 갈게요. 오늘 밤 이후로 저희 결혼 날짜가 곧 잡힐 것 같네요.”소영금은 미적지근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기회를 놓치지 말거라.”비록 임채원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차설아에 비하면 훨씬 쥐락펴락하기 좋았다.‘오늘 밤 채원이가 꼭 도윤이를 가져야 할 텐데. 다시는 그 여우 년에게 빈틈을 주어서는 안 돼!’진무열은 옆에서 초조해졌다. 성도윤을 여우 굴로 보내는 느낌이 들었다.‘설아 씨도 참. 어떻게 자기가 사랑하는 남자를 다른 여자에게 내어줄 수 있지? 이렇게 쿨하다고?’‘아니면... 정말 대표님을 사랑하지 않는 걸까?’‘만약 그렇다면 대표님이 마음 고생 좀 하겠네.’“도윤아, 방으로 가자.”임채원은 성도윤을 부축해 두 걸음 걸었다. 성도윤은 갑자기 그녀를 밀어내고 무표정한 얼굴로 차갑게 소리쳤다.“설아가 아니잖아. 비켜.”임채원은 멍해졌다. 조금 난처해서 조심스레 물었다.“도윤아, 너... 깼어?”성도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몸은 여전히 휘청거렸고, 표정이 흐리멍덩한 걸 보니 술에 취한 모습이었다.진무열은 성도윤을 부축하고 물었다.“채원 씨는 우리 대표님을 아직 잘 모르시네요. 천성적으로 여자가 만지는 걸 싫어해요. 술에 취해도 구별을 잘하시죠. 그러니 오늘 밤은 제가 챙길게요.”임채원은 진무열이 너무 마음에 안 들었다. 분명 자신을 바보 취급하고 있었다.“하하, 비서님 무슨 농담을 하세요. 여자가 만지는 걸 싫어하는데 어떻게 설아 씨를 그렇게 꼭 끌어안고 있었겠어요. 그리고 제 배는 어떻게 이렇게 커졌겠어요?”“채원 씨 배는 어떻게 커졌는지 저는 잘 모릅니다. 하지만 대표님께서 설아 씨를 꼭 끌어안은 원인은 분명하지 않을까요?”진무열은 임채원을 하찮게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왜냐하면 설아 씨는 대표님의 조강지처잖아요. 4년을 부부로 지냈으니 서로 껴안는 건 습관이겠죠. 뭣도 아닌
“설아야...”차성철이 천천히 손을 뻗더니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설아야, 그동안 나 때문에 힘들었지? 정말 고생했어. 미안해...”“오빠, 그런 말 하지 마. 오빠가 깨어날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어!”차설아는 차성철이 누워있는 병실 침대맡에 꿇어앉아 눈물을 흘렸다.“사실 의식을 잃었다는 걸 알고 있었어. 작은 상자에 갇힌 채로 꼼짝도 하지 못했던 거야. 상자를 열지 못해서 이 안에서 죽는 줄 알았거든. 그런데 자꾸 네 생각이 나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어. 난 하느님께 정말 감사해. 나에게 기회를 주어서 널 다시 만나게 되었으니 말이야.”차성철이 울먹이면서 말했다. 이번 사고로 인해 차성철은 많이 변했다. 예전처럼 날카롭고 예민하게 굴지 않았고 한결 부드러워졌고 말투도 다정해졌다.“뭘 자꾸 그런 말을 해! 오빠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면서 우리 달이랑 원이가 커서 결혼하는 모습을 봐야지. 손주도 봐야 하는데 불길한 말은 하지 마. 오빠는 그냥 오래 잠들어 있다가 깨어난 거야. 하느님의 힘을 빌릴 정도까지는 아니었어. 다시 깨어나 줘서 정말 고마워... 오빠가 너무 보고 싶었어.”차설아는 눈물을 닦으면서 차성철을 와락 안았다.“그래. 너랑 달이, 원이를 위해서라도 건강하게 지내야지. 앞으로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가자. 우리 가족 모두 모여서 재밌게 지내자. 네가 하고 싶었던 걸 같이 하고 가족 여행도 가자.”“말한 대로 해야 해. 지금 약속하자. 앞으로 오빠가 또 다치면 다시는 나 못 볼 줄 알아! 그때는 오빠를 용서하지 않을 거야.”남매는 새끼손가락을 걸고 눈물의 약속을 했다. 보는 사람마저 눈물이 나는 광경이었다. 배경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물만 흘렸다. 배경윤은 배경수가 생각났던 것이다.차설아의 말에 의하면 배경수는 아주 멀리 떨어진 마을에서 처음 보는 여자와 결혼했다. 배경윤은 배경수가 걱정되었다. 차설아는 울다가 차성철이 베고 있는 베개의 아래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은반지였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값이 꽤 되는
바람이 멈칫하더니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뭐, 뭐라고?”“네가 스파이지? 네가 사주받고 우리 오빠를 죽이려고 한 거잖아! 그렇지 않으면 왜 우리가 식당에 간 사이에 오빠한테 이런 일이 벌어진 거냐고!”차설아는 붉어진 두 눈을 하고서 물었다. 그동안 차성철의 상태에 대해 아는 사람은 바람과 차설아 두 사람뿐이었다.‘아무리 바람이 날 보살펴 주고 내 곁을 지켰다고 해도 누군가가 바람한테 지시해서 나를 감시하는 것일 수도 있잖아. 내가 방심한 틈을 타서... 그래. 바람은 선우 가문 사람이니까 가문의 이익을 위해서 오빠를 죽이려고 했을 수도 있어. 그러면 차씨 가문의 자리를 빼앗을 수도 있으니까!’배경윤이 차설아를 뜯어말렸다.“설아야, 말이 좀 심하다? 바람 씨가 어떻게 사주를 받고 그랬을 수가 있어. 네 말이 사실이라면 바람 씨가 너한테 온갖 심혈을 쏟아부을 리가 없잖아. 성철 오빠를 죽일 생각이었다면 진작에 움직였겠지. 바람 씨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차설아는 고개를 돌려 배경윤을 쳐다보며 물었다.“넌 알고 있었지?”“그, 그게...”배경윤은 주먹을 꽉 쥔 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이때 의사와 간호사들이 병실에서 걸어 나왔다.“의사 선생님, 오빠 어떻게 되었어요?”차설아는 사건의 배후에 대한 생각을 뒤로 하고 의사한테 다가가 물었다.“제때 발견한 덕분에 환자의 목숨을 살릴 수 있었어요. 호흡도 정상적으로 돌아왔으니 걱정하지 마세요.”“다행이에요. 정말 감사해요...”차설아는 식은땀을 흘리면서 고개 숙여 인사했다. 최근 차설아는 감정 기복이 심해서 울었다 웃기를 반복했다. 몸에 무리가 가면서 차설아도 점점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들어가 봐도 돼요. 박 선생님의 말씀대로 곧 깨어날 것 같거든요.”의사의 말에 차설아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감사해요!”차설아는 병실로 들어가 차성철을 바라보았다. 배경윤도 그 뒤를 따라갔지만 바람은 굳은 표정을 하고서 밖에 서 있었다.“바람 씨, 거기서 뭐 해?”배경윤이 고개를 돌려
검은 그림자는 다름 아닌 서씨 가문 서은아였다. 서은아는 그동안 차설아를 감시하고 있었다. 차설아가 식당에 밥 먹으러 간 사이에 차성철이 있는 병실을 책임지는 간호사에게 돈을 쥐여주었고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수술을 마친 뒤, 침대에 누워 간신히 숨을 쉬고 있는 차성철은 살짝 다쳐도 부서질 것처럼 나약해 보였다. 서은아는 병실 침대 앞에 서서 한참을 쳐다보다가 작은 물건을 차성철 베개 옆에 올려놓고는 산소마스크를 벗겼다.“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지만 미안해. 당신이 식물인간이 되면 당신 여동생도 기가 죽어서 나대지 못할 거라고 믿었어. 그런데 박성훈이 와서 당신을 살렸지 뭐야? 성도윤이 박성훈한테 부탁한 거라면서? 정말 어이가 없더라. 보나 마나 차설아가 성도윤한테 부탁한 거겠지. 뻔뻔스러운 년이...”서은아의 눈에 살기가 돌았다.“날 탓하지 마. 탓하려면 그 못난 여동생을 탓해. 차설아는 내가 성도윤과 약혼한 사이란 것을 알고 있으면서 성도윤한테 달라붙으면서 날 괴롭혔어. 동생이 저지른 잘못은 오빠인 당신이 책임져야지. 안 그래?”서은아는 말을 마친 뒤, 감시 카메라를 피해 조용히 병원을 나섰다. 식당에 앉아 있던 차설아는 바람이 포장한 음식을 보면서도 어쩐지 불안해서 먹고 싶지 않았다.“설아야, 네가 제일 좋아하는 탕수육이야. 다른 식당에서 하는 건 눅눅해서 맛없지만 이 식당에서 하는 건 바삭하잖아. 바람 씨가 널 위해서 사 온 건데, 한 입이라도 먹어 봐.”배경윤은 불안해하는 차설아와 맞은편에 앉아 있는 바람을 번갈아 보면서 말했다.“이 식당에 줄을 서려고 아침 일찍 깨어났어. 하지만 스파크가 좋아하는 거라면 눈이 오든 비가 내리든 사러 가야지.”바람이 머리를 긁적이더니 피식 웃었다. 그동안 차설아에게 밥을 먹이기 위해 온갖 시도를 해보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쯧쯧. 바람 씨한테 설아를 맡겼다가는 뚱보가 되겠어. 한 달 안에 10킬로 찐다는 것에 내 머리카락을 걸겠어.”“스파크는 살이 쪄도 예뻐서 괜찮아. 지금처럼 귀여울 거
배경윤은 박성훈을 노려보면서 말했다. 박성훈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성도윤이 데려온 의사라는 말에 성도윤처럼 나쁜 사람인 줄 알고 경계했다.“경윤아, 그러지 마. 박 선생님은 며칠 동안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오빠를 위해서 최선을 다해준 분이야. 오빠가 깨어날 수만 있다면 차씨 가문의 은인이 될 분이거든.”차설아는 다시 일어나더니 박성훈한테 허리를 숙여 공손히 인사했다.“박 선생님, 죄송해요. 경윤이는 늘 저를 아껴주고 보호해 주는 사람이라 이런 일에서는 예민하게 굴거든요. 나쁜 뜻으로 하는 말은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괜찮아요. 병원에서는 예민할 수밖에 없죠. 만나본 보호자 중에서 제일 정상적인 반응이거든요. 저는 이해해요.”박성훈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저 말고 성 대표님께 고맙다고 해야죠. 저는 수술할 생각이 없었는데 성 대표님이 간절하게 부탁했고 제가 좋아하는 바다낚시까지 같이 해주셔서 거절할 수가 없었어요. 게다가 바다낚시 내기에서도 졌으니 성 대표님 말대로 수술해야 했어요.”“성도윤이 어렵게 모신 분인 건 알고 있었어요. 나중에 오빠가 깨어나면 인사하려고요.”“잘 생각했어요.”박성훈이 차설아의 어깨를 토닥이더니 말을 이었다.“생각이 많으면 마음이 힘들 거예요. 사실 생각처럼 최악의 상황까지 가는 일은 없으니 마음 편안하게 먹고 환자분이 깨어나길 기다리세요.”말을 마친 박성훈은 사무실로 돌아가서 옷을 갈아입었다. 지금 오후 4시라서 박성훈이 말한 시간까지는 아직도 4시간이나 남아있었다. 배경윤은 차설아가 또 쓰러질까 봐 걱정되었다.“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밥부터 먹자.”“괜찮아. 난 배고프지 않아. 오빠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고 싶어. 오빠가 일어나야 내 마음도 편해질 것 같아.”차설아는 병실 밖에 서서 침대에 누워있는 차성철을 바라보며 말했다.“너 이러다가 또 쓰러지면 어쩌려고 그래? 오빠도 네가 이러는 걸 원하지 않을 거야.”차설아는 고개를 돌려 배경윤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배경윤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설마 네가 말한 사람이 그 나쁜 놈은 아니겠지? 아니라고 말해.”차설아가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그 사람 말고 또 누가 있겠어. 그래도 도움받았잖아.”“아...”배경윤은 주먹을 꽉 쥔 채 머뭇거렸다. 차설아한테 사실대로 말해야 할지 고민되는 순간이었다. 이 사고는 목적, 증언, 사건 발생 시간으로 보았을 때 성도윤이 배후일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하지만 확실한 증거 없이 성도윤을 범인으로 몰아갈 수 없었다. 만약 이 말을 꺼냈다가 차설아와 성도윤이 싸우게 된다면 손해 보는 건 차설아일 것이다. 하지만 사실대로 솔직하게 말하지 않으면 성도윤이 또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일이었다.“설아야, 그저 네가 걱정되어서 하는 말인데 성도윤을 너무 믿지 마. 성도윤이 어떤 사람인지 네가 제일 잘 알잖아. 진심을 드러내지 말고 계속 지켜보는 게 좋을 것 같아. 알겠지?”배경윤은 머뭇거리다가 결국 직설적으로 말하지 못했다.“나도 알아. 지금까지 성도윤을 용서한 적 단 한 번도 없어. 오빠 얼굴에 남은 흉터를 볼 때마다 성도윤이 떠올라서 화가 솟구쳐 오르거든... 성도윤이랑 잘 해볼 생각이 아니라 그저 좋은 의사를 데려와 주어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을 뿐이야. 네가 걱정하는 일은 없을 거야.”차설아는 수술실을 바라보면서 말했고 눈시울이 점점 붉어졌다. 눈에 핏줄이 가득 서렸지만 차성철이 나올 때까지 쉴 수 없었다. 성도윤에 관한 생각을 하면 할수록 차설아의 마음이 아팠기에 더는 신경 쓰지 않았고 애매모호한 선을 넘지 않았다. 지금처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더 마주치지 않는 것이 두 사람을 위한 일이었다.“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야. 더 이상 그 사람과 엮이고 싶어 하지 않는 건 알지만 항상 경계해야 해. 그 사람이 얼마나...”“알겠어. 곧 수술이 끝날 테니 다른 건 생각하지 말고 오빠가 무사히 나오기를 바라면서 기다리자.”차설아는 배경윤의 말을 끊었다.“그래. 같이 기다려보자.”배경윤은 슬픔이 가득 서려 있는 차
사도현은 턱을 쳐들더니 거만하게 말했다.“내가 바로 배경윤 남자 친구예요.”사도현의 말에 같이 식사하던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두 사람이 보통 사이가 아닌 것은 알고 있었지만 연예계에서 알아주는 회사 대표가 당당하게 공개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뭐?”배경윤은 어이가 없었다. 사도현이 미친 짓을 저지를 줄 예상 못했는지 사도현을 향해 부르짖었다.“사도현, 너 정말 미친 거야? 장난이 너무 심하잖아!”‘헤어진 지 얼마나 지났는데 이제 와서 남자 친구라고? 게다가 내가 좋아하는 찬영 오빠 앞에서 공개하다니... 정말 제대로 미친놈이구나. 내 미래의 남자 친구가 될 수도 있는 사람한테 알려주려고 작정한 거야!’“내 말이 틀렸어? 우리 사귀는 사이 맞잖아. 그렇지 않으면 이곳에 온 첫 번째 날에 어떻게 같은 방, 같은 침대에서 잤겠어?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을 텐데 말이야.”사도현이 피식 웃더니 부르짖는 배경윤을 보면서 만족감을 느꼈다. 배경윤의 시선을 느끼면서 이제야 자신의 것을 되찾은 것 같았다.“그, 그건...”배경윤은 말문이 막혔다. 설명하면 할수록 말려드는 것 같아서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이때 진찬영이 입술을 깨물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만약 두 사람이 한방에 들어가는 것이 사귄다는 증거라면, 사도현 씨는 배경윤 씨가 아니라 윤설 씨의 남자 친구인 것 같은데요? 윤설 씨 곁을 떠난 적이 없잖아요. 도대체 두 분 중에서 누구의 남자 친구인지 헷갈리네요. 아니면 두 분을 속여서 양다리를 걸친 게 아닐까 싶어요.”진찬영의 말을 들은 배경윤은 반격할 수 있는 틈을 찾았다. 그러고는 도덕적인 면에서 사도현을 비난하기 시작했다.“맞아요! 같은 방을 쓰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라 그날에 남은 방이 하나밖에 없어서 그랬어요. 우리 두 사람 모두 외양간에서 자기 싫었거든요. 그날 밤에 아무 일도 없었지만 윤설 씨랑 사도현 씨 사이는 각별했어요. 정성을 다해서 보살핀 여자랑 사귀는 것 같은데 왜 나를 언급하고 난리야! 난 너처럼 미친놈이랑 사귈 바
그 말을 들은 장윤태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장윤태가 다급히 뜯어말렸다.“집에 갈 정도로 싫으면 안 하면 되는 거죠! 그런 설정을 할 생각도 없었어요. 찬영이도 커플 설정을 원하지 않을 테니 강요할 수 없었거든요. 다들 장난치는 거니까 마음에 담아두지 말아요.”장윤태는 게스트들이 말하는 커플 중 한 쌍이 진찬영과 배경윤임을 확신했다. 옆에 앉아 있던 사도현은 굳은 표정으로 진찬영을 노려보고 있었다.“장 감독님, 그것 때문에 이러는 거 아니에요.”배경윤이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개인적인 일로 해안시에 다시 돌아가야 해요. 프로그램 촬영하는 동안 정말 재밌었어요. 게다가 찬영 오빠랑 커플로 촬영할 수 있다고 하면 더 행복했을 거예요.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돌아가야 해요.”“잘생긴 남자라면 다 좋아하나 보지?”말을 마친 사도현은 혼자서 술을 벌컥벌컥 마셨다. 장윤태는 배경윤을 설득하지 못하자 재빨리 다른 제안을 했다.“급한 일이 있으니 어쩔 수 없죠. 곧 연애 예능 촬영이 있는데 그때 시간이 되면 우리 찬영이랑 같이 게스트로 출연하지 않을래요?”“좋아요!”배경윤은 망설임 없이 동의했다. 진찬영과 함께 촬영할 수 있다면 무슨 프로그램이든지 무조건 출연할 것이다. 진찬영과 떨어지려니 아쉬웠지만 돌아가서 차설아의 곁을 지켜야 했기에 어쩔 수 없이 작별 인사를 했다.“배경윤 씨랑 같이 출연한다면 저도 좋아요.”진찬영은 배경윤을 향해 말했다. 애초에 진찬영은 배경윤이 출연한다는 소식에 이 마을까지 달려왔던 것이다. 그러기에 배경윤이 있는 곳에 꼭 따라갈 것이다.“그럼 두 사람이 사인한 계약서 말고 다른 계약서를 준비할 테니 이제 만나서 얘기해요. 조건을 구체적으로 적으면 이 프로그램 계약서대로 하지 않아도 법적 책임을 지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요.”장윤태는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너무 기쁜 나머지 술을 마시면서 껄껄 웃었다.“안 돼요.”사도현이 차갑게 말했다.“배경윤은 너무 바빠서 연애 프로그램에 출연할 시간이 없을 거예요.”배경윤
사도현은 직설적으로 말했다. 누가 진찬영을 밀어주든지 상관없이 배경윤에게 나쁜 의도를 갖고 접근한다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재벌가 아가씨의 마음을 얻으면 평생 먹고 살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요? 윤설 씨가 사도현 씨한테 빌붙어서 드라마 여주인공 역만 맡는 것처럼요?”진찬영이 말을 이었다.“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는 말이 맞는 것 같아요. 그래서 다른 사람도 사도현 씨랑 같은 줄 알고 섣불리 판단할 수밖에 없겠죠. 더 이상 의미 없는 대화는 하지 않는 게 좋겠어요.”진찬영이 가마뚜껑을 열어보자 향긋한 냄새가 풍겨왔다. 추어탕 안에 청양고추를 넣으니 배경윤이 좋아하는 매콤한 추어탕이 완성되었다. 사도현이 뭐라고 더 말하려고 할 때, 진찬영이 추어탕을 옮겨 담고는 주방을 나섰다. 사도현은 불을 피우면서 흘러나오는 연기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두 남자의 대결은 사도현의 패배로 막을 내렸다.“여러분, 오늘 메뉴는 추어탕이에요! 어서 드셔보세요!”진찬영은 환하게 웃으면서 쉬고 있던 게스트들을 불렀다. 배경윤은 터벅터벅 걸어 나와서 식탁 앞에 마주 앉았다. 진찬영이 해준 밥을 먹어서 기쁘긴 했지만 웃을 힘조차 없었다. 무슨 일이 있다는 것을 눈치챈 진찬영은 직접 국을 떠주면서 말했다.“먼저 밥부터 먹고 다시 생각해요. 배경윤 씨를 위해 만든 건데, 한 입도 먹지 않으면 좀 속상할 것 같거든요.”“아, 죄송해요. 생각할 게 많아서 신경 쓰지 못했어요.”배경윤은 고개를 푹 숙이고는 추어탕을 먹기 시작했다.“먹어봤던 추어탕 중에서 제일 맛있어요!”“당연히 그렇겠죠. 추어탕에 진찬영 씨의 사랑이 가득 들어갔으니 맛없을 리가 없잖아요. 우리 같은 구경꾼들은 배경윤 씨가 부러워 죽겠다니까요!”“최우수 남우주연상을 받은 분이 누군가를 위해서 직접 미꾸라지를 손질했다니깐요. 보통 정성이 아니에요! 그 여자 덕분에 저희도 이렇게 맛있는 추어탕을 먹어보네요.”추어탕을 맛보던 게스트들이 깔깔 웃으면서 말했다. 진찬영은 옅은 미소를 지은 채 들으면서 배
윤설이 피식 웃더니 입을 열었다.“나는 그렇다고 한 적 없어요.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이것뿐이라 더 알려줄 것도 없고요. 정말 궁금하다면 의심 가는 사람을 찾아가서 물어보세요.”배경윤은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쥔 채 온몸을 덜덜 떨었다. 이미 배후가 밝혀진 마당에 더 캐묻는 건 멍청한 사람이나 할 짓이었다. “그리고 이건 진심으로 하는 말이니 새겨들어요. 도현 씨랑 성도윤은 생사를 함께 겪은 형제이니 도현 씨를 멀리하는 게 좋을 거예요. 무슨 일이 있어도 도현 씨는 성도윤 편을 들 테니까요. 그렇지 않으면 차성철이 수술했다는 것을 성도윤이 어떻게 알 수 있었겠어요? 게다가 성형외과 의사의 전화번호를 알고 있다는 것도 이상하지 않아요?”윤설은 배경윤의 반응을 지켜보더니 계속해서 말했다. ‘사실 성도윤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어. 성도윤이 사랑하는 사람과 조금 연관된 일이긴 하지만 그게 결국 성도윤의 일이 되는 거지. 난 사실만 말했으니 아무 잘못도 없어. 배경윤, 이제는 도현 씨 곁에서 떨어져!’“난 성도윤이 그런 일을 벌일 줄 알았어요! 천하의 나쁜 놈 같으니라고...”윤설의 말을 들은 배경윤은 모든 것이 성도윤과 연관된 일이라고 확신했고 사도현이 성도윤을 도와주었다고 여겼다. ‘계속 여기에 남아있어서는 안 돼. 얼른 해안시로 돌아가서 설아한테 알려줘야지. 그놈 때문에 또 누군가가 다칠 수도 있어! 설아야, 조금만 기다려줘!’주방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은 두 남자의 대결을 의미하는 것 같았다. 진찬영은 앞치마를 두르고 소매를 올린 채 두부를 썰었다. 집중하는 모습은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멋있어서 여자든 남자든 진찬영에게 반하고 말 것이다.하지만 부뚜막 앞에 앉아 불을 피우고 있는 사도현은 진찬영을 노려보기에 바빴다. 사도현은 장작을 진찬영의 팔이라고 생각하면서 두 토막으로 끊이고 불 속에 집어넣더니 차갑게 말했다.“우리 둘밖에 없으니 솔직하게 말해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거예요? 돈 때문이라면 원하는 만큼 줄 테니 말해봐요. 얼마면 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