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설아가 말하고는 성도윤 앞으로 걸어가더니 그와 같이 발라드를 부르고 있던 잘생긴 남자에게 말했다.“친구, 자리 좀 비켜줄래? 이 사람 옆자리는 내 자리야.”젊은 남자는 겨우 스무 살 남짓해 보였다. 그는 이 노래방에서 가장 핫한 호스트였기 때문에 팔짱을 끼고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 제가 먼저 왔는데 왜 자리를 비켜야 하죠?”차설아는 턱을 치켜들더니 건방진 표정으로 말했다.“내가 이 사람 전처거든.”젊은 남자는 흠칫 놀랐다. 하지만 그는 노래방의 가장 핫한 호스트로서 이런 상황을 겪어보지 못했던 건 아니었다.“전처면 어때요? 우리는 현처가 와도 자리를 안 내줘요. 불만이 있으면 우리 로비 매니저님한테 말씀하세요. 하지만 한 가지만 미리 말해두죠, 우리 이 노래방은 뒤를 봐주고 있는 사람이 어마어마하거든요.”“너!”차설아는 화가 나 말문이 막혔다.‘지금 젊은이들 정말 대단하네. 어떻게 이렇게 뻔뻔스러울 수가 있지?’젊은 남자가 성도윤 옆에 앉아 있으면서 아예 자리를 내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차설아는 이 모든 상황이 너무 황당하게만 느껴졌다.“누님, 우리가 오빠랑 엄청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거든요. 얼른 집에 들어가세요, 괜히 여기 있으면서 분위기나 망치지 말고요. 지금 우리와 오빠의 즐거운 시간을 완전히 방해하고 있잖아요.”성도윤 옆에 앉은 다른 잘생긴 남자가 교태를 부리며 말했다. 눈꼴 시린 남자의 모습에 차설아는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얘네들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이야?’차설아는 참다못해 계속 침묵을 지킨 성도윤을 향해 말했다.“도윤 씨, 아무 말도 안 할 거야? 계속 이렇게 가만히 있으면 나 진짜 도윤 씨 두고 먼저 갈 거야, 나중에 나 몰라라 했다고 원망하지나 마.”성도윤은 술에 취했기에 머리가 어질어질했고 시선도 흐릿해졌다.그는 차설아가 나타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 시도 그녀에게서 눈을 뗀 적이 없었다. 마치 눈앞에 있는 여자가 진짜인지, 아니면 환각일 뿐인지 확인하고 있는 듯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숨결을 느낄 수 있을 만큼 가까이에 있었다.성도윤이 내뿜은 뜨거운 입김에는 술 냄새가 가득했다.그는 몽롱한 눈빛을 한 채 긴 손가락으로 차설아의 턱을 살짝 들고는 물었다.“그날 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데?”차설아는 미간을 구기며 의문스러운 표정을 보였다.“정말 아무것도 기억 못 하는 거야? 아니면 책임을 지기 싫어서 그러는 거야?”“한 번 말해봐.”성도윤은 장난기가 섞인 목소리로 나지막이 말했다.“말해야 내가 알 거 아니야? 내가 도대체 뭘 기억하고 뭘 잊었다는 거야?”“그날 밤...”차설아는 당장이라도 말하고 싶었지만 끝내 침묵을 지켰다.그녀는 웬만해선 술에 취하지 않았다. 취한다 하더라도 전날 밤에 무슨 말을 하고 무슨 일을 했는지 똑똑히 기억하는 편이었다. 그래서 성도윤이 아무 일도 기억할 수 없다는 걸 결코 믿을 수 없었다.‘일부러 잊은 척을 하는 거 아니야? 떠올리지 못하는 척하는 사람과 계속 말해봤자 두 사람 사이만 더 어색해질 테고.’“그날 밤, 당신은 미친개처럼 날뛰었어.”예쁜 알굴의 차설아는 차가운 기운을 내뿜으며 성도윤을 비꼬았다.“술을 잘 못 마시면 앞으로 마시지나 말든가. 술에 취했다는 핑계로 이상한 짓이나 하고, 나중에 또 모든 걸 잊은 척하니 정말 재수 없어.”성도윤은 어리둥절했다.차설아가 왜 갑자기 말을 꼬아서 하는지 모르지만 그녀의 분노가 충분히 느껴졌다.하지만 그날 밤, 먼저 그를 무안하게 만든 건 차설아가 아니던가? 그도 아직 묻고 따지질 않았는데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차설아가 먼저 선수를 치니 성도윤은 어이가 없었다.‘여자들이란 원래 다 이래?’차설아가 떠나려고 하자 성도윤은 알코올의 힘을 빌려 긴 팔로 그녀를 품에 안고는 귓가에 속삭였다.“가지 마, 나와 함께 있어줘.”또 같은 수작이었다, 그녀를 가지 못하게 붙잡는 수작 말이다.차설아는 더는 그날 밤처럼 쉽게 함정에 빠져들지 않을 것이다. 지금의 그녀는 어느 때보다도 마음이 평온했다.“성도윤, 이거 놔.”그녀의
진무열은 안경을 고쳐 쓰더니 진지한 척하며 말했다.“사모님은 모르시겠지만 대표님께서 술에 취하시면 자주 이런 행동을 취하곤 합니다. 사모님 말고도 수많은 사람들이 대표님에게 당하셨어요. 그래서 저는 알고 있죠, 이 자세로도 충분히 움직일 수 있다는걸.”“그래서 협조 부탁드릴게요. 나중에 대표님이 술에서 깨시면 사모님을 엄청 고마워하실 겁니다.”진무열은 성도윤과 차설아가 가까이 지낼 수 있는 기회를 더 많이 만들기 위해 헛소리할 수밖에 없었다.정신이 말짱한 성도윤은 죽어도 차설아에게 치근덕거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진무열은 남자가 계속 쫓아다니면 여자는 결국 넘어오게 되어있다고 생각했다.차설아는 워낙 우수하고 이제 하이 테크 협회 회장까지 맡게 되었으니 성도윤이 공을 들이지 않는다면 차설아도 쉽게 마음을 받아주지 않을 것이다.뜻밖에도 차설아는 진무열의 헛소리를 믿게 되었다.“알겠어요, 그럼 얼른 집으로 데려다줘요!”차설아는 자신을 꼭 끌어안고 놓아주지 않은 채 깊은 잠이 든 성도윤을 보더니 마음이 복잡 미묘했다.성도윤이라면 그런 버릇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날 밤 성도윤도 똑같이 그녀를 안 놓아주고 관계까지 가졌으니 말이다!성도윤의 주사가 이렇게 심할 줄 알았으면 차설아는 그와 게임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그렇게 성도윤은 차설아를 끌어안고, 진무열은 성도윤을 부축한 채 이상한 자세를 한 세 사람이 노래방을 걸어 나오고는 길가에서 택시를 잡았다.택시 안에서도 성도윤은 차설아 옆에 붙어 앉았고 차설아의 목을 끌어안은 채 놓아주지 않았다.“기사님, 조금 더 빨리 가주시겠어요?”차설아는 아무리 발버둥 쳐도 그의 품에서 벗어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택시 기사를 재촉했다.얼마 후, 성가네 별장에 도착했다.차설아가 4년 동안 있었던 곳에는 이미 그녀의 자리가 없었다. 성도윤 때문만 아니었더라면 그녀는 절대 다시 이곳에 발을 들이지 않았을 것이다.거실에는 배가 불룩하게 부풀어 오른 임채원이 눈물을 뚝뚝 흘리며 미래의 시어머니인
소영금은 습관적으로 차설아를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이 재수없는 년, 이혼한 마당에 왜 아직도 내 아들 옆에서 알짱거려? 감히 우리 집에까지 와서 도발하다니. 세상에 어쩜 너 같은 뻔뻔한 여자가 다 있는지!”진무열은 차설아를 대신해 설명하려 했으나, 차설아가 먼저 날카롭게 맞받아쳤다.“사모님, 대체 누가 누구를 귀찮게 하는지 눈 똑바로 뜨고 보세요.”“이렇게 뻔뻔한 아들을 낳았으니. 세상에 어쩜 사모님 같은 실패한 어머니가 다 있죠?”“너... 너...”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한 방 먹은 소영금은 심장병이 도질 것 같았다.“전에는 제가 며느리로서 사모님을 존경했지만, 지금은 전 이 집안과 아무런 관계도 없으니 저한테 말을 삼가해주세요. 아니면 제 변호사가 정신 손해배상 청구를 할지도 몰라요.”차설아는 말을 마치고, 혼신의 힘을 다해 성도윤에게 떨어지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성도윤! 그만하고 이거 놔! 맞고 싶어?”차설아는 주먹을 꽉 쥐고 때릴 기세였다.이 별장에 그녀는 단 1초도 머물고 싶지 않았다.진무열은 이를 보고 얼른 사람들을 불러 도와 달라고 하고, 차설아를 위해 한마디 했다.“사모님, 확실히 차설아 씨를 오해하셨어요. 오늘 저녁에는 대표님께서 술에 취해 설아 씨를 안고 놔주지 않으신 거예요. 잠든 대표님이 다치실까 봐 설아 씨가 집까지 데려다준 거고요. 사실 피해자예요.”“말도 안 돼!”소영금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내 아들은 절대 그렇게 뻔뻔하지 않아. 틀림없이 이 여우년이 내 아들을 잡고 놓아주지 않은 거야!”소영금은 씩씩거리며 두 사람에게 다가가 바로 떼어내려 했다.하지만 그녀의 아들은 진짜 뻔뻔했다. 긴 팔로 차설아의 목을 감고 놓아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낯 뜨거워진 소영금은 하는 수 없이 임채원에게 화를 냈다.“넌 거기 서서 뭐해? 빨리 와서 떼어내지 않고! 자기 남자 하나 챙기지 못하고 말이야. 앞으로 내 앞에서 다시 우물쭈물하지 마!”워낙 질투심에 미쳐있던 임채원은 차설아 때문에 호되게 욕을 먹
차설아가 떠난 후 임채원은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었다.임채원은 술취한 성도윤을 안고 소영금을 향해 말했다.“어머님, 도윤 씨 데리고 방으로 갈게요. 오늘 밤 이후로 저희 결혼 날짜가 곧 잡힐 것 같네요.”소영금은 미적지근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기회를 놓치지 말거라.”비록 임채원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차설아에 비하면 훨씬 쥐락펴락하기 좋았다.‘오늘 밤 채원이가 꼭 도윤이를 가져야 할 텐데. 다시는 그 여우 년에게 빈틈을 주어서는 안 돼!’진무열은 옆에서 초조해졌다. 성도윤을 여우 굴로 보내는 느낌이 들었다.‘설아 씨도 참. 어떻게 자기가 사랑하는 남자를 다른 여자에게 내어줄 수 있지? 이렇게 쿨하다고?’‘아니면... 정말 대표님을 사랑하지 않는 걸까?’‘만약 그렇다면 대표님이 마음 고생 좀 하겠네.’“도윤아, 방으로 가자.”임채원은 성도윤을 부축해 두 걸음 걸었다. 성도윤은 갑자기 그녀를 밀어내고 무표정한 얼굴로 차갑게 소리쳤다.“설아가 아니잖아. 비켜.”임채원은 멍해졌다. 조금 난처해서 조심스레 물었다.“도윤아, 너... 깼어?”성도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몸은 여전히 휘청거렸고, 표정이 흐리멍덩한 걸 보니 술에 취한 모습이었다.진무열은 성도윤을 부축하고 물었다.“채원 씨는 우리 대표님을 아직 잘 모르시네요. 천성적으로 여자가 만지는 걸 싫어해요. 술에 취해도 구별을 잘하시죠. 그러니 오늘 밤은 제가 챙길게요.”임채원은 진무열이 너무 마음에 안 들었다. 분명 자신을 바보 취급하고 있었다.“하하, 비서님 무슨 농담을 하세요. 여자가 만지는 걸 싫어하는데 어떻게 설아 씨를 그렇게 꼭 끌어안고 있었겠어요. 그리고 제 배는 어떻게 이렇게 커졌겠어요?”“채원 씨 배는 어떻게 커졌는지 저는 잘 모릅니다. 하지만 대표님께서 설아 씨를 꼭 끌어안은 원인은 분명하지 않을까요?”진무열은 임채원을 하찮게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왜냐하면 설아 씨는 대표님의 조강지처잖아요. 4년을 부부로 지냈으니 서로 껴안는 건 습관이겠죠. 뭣도 아닌
다음날 성도윤은 머리가 깨질 듯 어지러웠다.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진무열이 침대 앞에 앉아서 얼굴을 찡그리며 성도윤을 관찰하고 있었다.“대표님, 드디어 깨어나셨네요. 그럼 제 임무는 끝났으니 이만 가볼게요.”진무열은 형기가 차서 풀려난 사람처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더없이 흥분했다.어제 성도윤은 만취했고, 임채원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어 그는 한 발자국도 떨어지지 않고 성도윤의 곁을 지켰다. 임채원이 기회를 타서 성도윤의 몸을 탐할까 봐 걱정되었다.성도윤은 긴 손가락으로 이마를 짚고 미간을 약간 찌푸리며 어젯밤의 일을 회상하기 시작했다.그의 유일한 기억은 차설아와 게임을 하다가 참패한 것에 머물러있다.“나 어젯밤에 취했어?”성도윤의 목소리는 덤덤했다. 다시 차갑고 도도한 상태로 돌아가 자신있게 말했다.“난 그래도 절대 실수하지 않았을 거야.”진무열은 어이가 없었다.‘자신만만하기는! 매번 술에 취하면 필름이 다 끊겨서 아무것도 기억을 못 하면서!’그래서 전날 밤까지 못 박았던 일을 다음날 모두 뒤집고 하나도 인정하지 않았다.오랜 세월을 함께하며 그의 습관을 잘 알고 있는 진무열은 절대 성도윤을 술에 취하지 않게 하려고 노력했다.하지만 어젯밤에는 진무열이 소홀했다. 차설아의 게임 실력을 과소평가한 탓으로, 결국... 일이 터지고 말았다.진무열은 진지하게 말했다.“네, 실수하지 않으셨어요. 그냥 미치셨죠.”“말도 안 돼!”성도윤은 차가운 눈빛과 거만한 태도로 말했다.“내 술버릇은 내가 잘 알아. 어떻게 미칠 수가 있어.”역시, 성도윤은 인정하지 않으니 진무열은 방법이 없었다.성도윤처럼 당당하게 시치미를 떼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이번에 미리 증거를 준비하지 않았다면, 진무열도 자신이 헛소문을 퍼뜨린다고 의심했을 것이다.“대표님,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말 기억이 하나도 안 나세요?”진무열은 떠보듯 성도윤에게 물었다.성도윤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진지하게 말했다.“설아랑 게임을 하다 설아가 가겠다고 해서, 난... 그
오늘은 차설아가 정식으로 천수 하우스를 떠나는 날이다.이렇게 빨리 이사를 가는 이유는 맞은 편에 사는 전 남편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서이고, 또 하나는 입주를 앞둔 곳은 그녀가 4년 내내 바라던 꿈의 집이기 때문이다.그곳은 바로 차씨 가문의 저택이다!4년 전, 가문이 파산하고 화려한 3층짜리 별장도 법원에 압류되어 경매에 부쳐졌다.하지만 차설아의 부모가 투신하여 사망하면서, 이 집은 외부인에게 흉가가 되었다. 경매 가격이 이미 시장 가격보다 훨씬 낮았지만 아무도 감히 사지 않으려 했다.며칠 전, 법원은 또 한 번 경매를 진행했다.차설아는 망설이지 않고 2억 원의 가격으로 낙찰받았다.그녀가 이사한다는 소식은 배경수와 배경윤만 알고 있었다. 두 남매는 일찍부터 집들이를 하겠다고 소란을 피웠고, 배경윤은 신비한 친구까지 데려오겠다고 했다.차설아도 여러 해 동안 황폐해진 집이 시끌벅적하기를 바라며 흔쾌히 승낙했다.천수 하우스에 산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짐이 별로 없어 화물차 한 대로 충분했다.떠나기 전에 차설아는 맞은편 문을 보고 씁쓸하게 웃었다.지금쯤 성도윤은 침대에 누워 임채원과 알콩달콩 결혼 문제를 상의하고 있겠지.그녀가 이사한다는 사실도 어쩌면 그 남자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차설아는 심호흡을 하고, 머리를 내저으며, 빨리 머리에서 성도윤의 생각을 떨쳐내려했다.끝났다. 모든 것이 끝났다!앞으로 두 사람은 두 개의 평행선이다. 사업상의 라이벌이라는 것 외에는 아무런 교점도 없고, 교점이 있어서도 안 된다.차는 번화한 시내를 지나 서쪽 외곽의 한적한 곳에 이르렀다.해안시에는 ‘남쪽이 북쪽보다 부유하고 서쪽이 동쪽보다 고귀하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그래서 예로부터 서쪽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신분이 고귀한 사람들이었다.예를 들어, 권세가 높은 관리거나, 학계의 거물급 인물, 혹은 조상 3대가 황친국척인 귀족 인사들. 오히려 부를 추구하는 재벌들은 여기에 잘 살지 않았다.차설아의 할아버지는 전쟁터에서 공을 세운 대장군이고,
녹슨 철책의 핀은 누군가에 의해 뽑혔고, 정원에 있는 잡초도 밟힌 흔적이 있는 것 같았고, 젖은 흙에는 깊고 옅은 발자국이 남아 있었다.분명 누군가가 미리 집에 왔다는 것을 설명한다. 발자국은 안으로 들어가는 방향만 있고 나오는 방향은 없었다.즉, 누군가 아직 집 안에 있을 가능성이 크다!뒤에서 이삿짐 아저씨는 차설아의 짐을 문 앞에 두고 땀을 닦으며 말했다.“아가씨, 물건은 모두 여기에 둘게요. 전 더 이상 들어가지 않을게요... 여긴 너무 음산해요. 경제적 여유가 있다면 빨리 다른 곳으로 이사 가세요.”차설아는 고개를 돌려 아저씨를 바라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아저씨, 모두들 이 집에 문제가 있다고 하는데, 대체 뭐가 문제인지 아세요?”아저씨는 침을 삼키고 겁에 질린 얼굴로 집을 한 번 쳐다보고 말했다.“못 들어봤어요? 집주인 부부가 투신해서 죽었는데 망혼이 떠나지 않아서 이 집은 귀신 나오는 흉가가 되었어요.”“주인 부부가 투신해 죽었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귀신이 나온다는 건 실제 증거가없는 헛소문 아닌가요?”“아니에요, 절대로 헛소문 아니에요.”아저씨는 손을 흔들며 딱 잘라 말했다.“많은 사람들이 직접 봤어요. 전에 내가 이 근처에 왔을 때도 한 번 봤어요!”“여주인이 한밤중이 되면 흰 옷을 입고 창문을 서성거리고, 울음소리는 밤하늘에 퍼지고, 아주 괴이했다니까요!”“내 팔자가 좋으니 망정이죠. 게다가 내가 돈이 궁핍하지 않았다면 오늘 안 왔어요!”말을 마친 아저씨는 저도 모르게 몸서리를 치더니, 발바닥에 기름을 바른 듯 차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차설아를 향해 손을 흔들며 작별 인사를 했다.“아가씨, 나 먼저 가요. 몸 조심해요!”차설아는 아저씨의 말에 놀라지 않았고, 오히려 기대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한밤중에 목격한 ‘흰옷 여자’가 오늘 밤에도 나타날까?차설아는 짐에서 야구 방망이를 꺼내 철책을 밀어젖히고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갔다.살던 집으로 돌아가니, 모든 구석구석 하나에 추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라 차설아
다음날.아침햇살이 비추는 섬은 몽롱하고 매력적이었다.아침 조깅하는 습관 있는 배경윤은 다들 자고 있을 때 이미 일어나 뛰고 있었다.산 주위를 따라 2킬로 정도 뛰면서 땀에 흠뻑 젖은 그녀는 개운한 느낌이었다.산 중턱에 있는 전망대에 서서 파란 바닷가를 보고 있자니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이었다.“좋은 아침이에요.”배경윤이 기지개를 켜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 뒤돌아보았더니 진찬영이었다.“이런 우연이. 찬영 오빠도 조깅하러 오셨어요?”진찬영을 향해 손을 흔드는 그녀의 얼굴은 자기도 모르게 발그레해졌다.어제저녁 진찬영이 대놓고 고백하는 바람에 두 사람 사이의 장벽이 무너져 이제는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몰랐다.“우연이 아니라...”진찬영은 오늘 흰 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살짝 가르마를 탄 머리 스타일을 하고 있어 청춘 로코물에 나오는 여주인공이 잊지 못하는 킹카처럼 보였다.그는 난간을 잡고 옆모습으로 의미심장하게 배경윤을 쳐다보았다.“저번에 경윤 씨가 조깅하는 습관이 있다고 들어서... 일부러 만나려고 온 거예요.”배경윤과 이곳에서 만나려고 그녀보다 한 시간이나 더 일찍 일어난 것이다.그때는 아직 날도 밝지 않았던 때였다. 그는 혼자서 산 중턱에 있는 전망대로 올라와 하늘이 서서히 물들어지는 것을 보면서 세상이 참 아름답다는 느낌이 들었다. 속으론 배경윤과 함께 이 경치를 보면 얼마나 좋았겠냐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배경윤이 흔들린 표정으로 말했다.“그런데 제가 이 코스를 달릴지 어떻게 알았어요? 그러다 못 만나면요?”“만나지 못해도 아쉬운 대로 아름다운 경치를 봤잖아요.”진찬영은 고개돌려 전방에 있는 아름다운 경치를 보면서 부드럽게 말했다.“저는 어떤 일이든 결과를 바라지 않아요. 과정만 아름다우면 된 거예요. 그리고 결국엔 경윤 씨를 만났잖아요.”배경윤은 잘생긴 그의 옆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따뜻해지는 느낌에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그렇다. 결과보다는 과정만 아름다우면 되었다.이 부분에서는 진찬영과 생각이 똑
“에헴!”하늘을 신경 쓰지도 않던 사도현은 두 사람이 신나게 이야기하고 있길래 질투심을 느꼈다.하늘도 그제야 선을 넘었다는 것을 눈치채고 바로 입을 닫으면서 자세를 고쳐잡았다.“죄송해요. 경윤 씨, 저는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어요. 다른 사람을 선택해 보세요.”“그게 뭐 어때서요? 어차피 저희 서로 선택하는 과정이잖아요. 하늘 씨가 마음에 들어 하는 분과 셋이 함께 스노클링하면 되잖아요. 둘이든 셋이든 저는 상관없어요.”배경윤이 웃으면서 말했다.그녀는 하늘이 컨트롤하기 쉬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거기다 제일 안전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진찬영에게 폐를 끼치지도 않고 사도현도 어쩔 수가 없었다.“그래요? 경윤 씨는 정말 내일 아침 제가 마음에 들어 하는 사람과 함께 스노클링할 수 있는 거예요?”하늘은 억울한 강아지처럼 순진한 표정으로 배경윤을 쳐다보고 있었다.“그럼요. 저는 마음이 넓은 사람이에요. 3각 구도는 제일 안정적이니까요.”배경윤이 익살스럽게 말했다.이렇게 말하면 안 된다는 걸 알지만 입이 자기 말을 듣지 않았다.“그래요. 그러면 내일 경윤 씨, 저, 그리고 제가 마음에 들어 하는 분, 세 명이 함께 스노클링하는 거예요. 마음이 변하면 안 돼요.”“걱정하지 마세요. 절대 빠지는 일이 없을 거예요. 제가 빠지면 평생 짝을 찾지 못할 거예요.”배경윤은 하늘에 대고 진지하게 맹세했다.이때 하늘이 진지하게 말했다.“사실 제가 마음에 들어 하는 사람은 사도현 씨에요. 그리고 오늘 모든 사람 앞에서 사실대로 말했고요.”사도현이 눈썹을 움찔하더니 웃을 듯 말 듯 한 표정으로 배경윤을 쳐다보았다.“저희 내일 봐요.”‘왜 이렇게 된 거지?’배경윤은 흐뭇한 표정의 사도현을 보면서 그가 일부러 함정을 파놓았다고 의심하기 시작했다.바로 이때, 진찬영이 입을 열었다.“3각 구도가 안정적이긴 하지만 재미가 없잖아요. 저도 끼워주시면 안 돼요?”진찬영은 사도현을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사도현을 쳐다보았다.“제가 마음에 들어 하는 분은 배경윤
“처음 그대를 만났을 때 다부진 몸매에 끌려 그대를 쭉 지켜보게 되었어요. 텔레비전에 나오는 그대의 모습을 보면서 심장이 떨려왔어요. 자신감이 넘치는 그대가 유독 빛나 보였거든요. 그대는 정말 멋진 사람이에요.”하늘은 배경윤이 쓴 편지를 천천히 읽으면서 진찬영을 힐끗 쳐다보았다. 남성 참가자 중에서 진찬영이 텔레비전에 가장 많이 나왔기 때문이다.진찬영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앉아 있었다. 사도현은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고 당장이라도 한 대 때릴 것 같은 모습이었다.“첫인상 1위가 누구냐고 물으면 그대라고 하고 싶어요. 하늘 씨, 앞으로 우리 잘 지내봐요. 하늘 씨랑 좋은 인연을 이어가고 싶어요. 하늘 씨의 마음도 궁금해요. 단둘이 얘기 나누고 싶어요.”편지를 다 읽은 하늘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하늘은 부끄러워하면서 머리를 긁적였고 배경윤을 쳐다보면서 물었다.“경윤 씨, 언제부터 저한테 호감이 생긴 거예요?”하늘을 포함한 게스트들은 전부 두 눈을 크게 뜨고 배경윤을 쳐다보았다. 많은 일이 일어났지만 배경윤은 사도현, 진찬영이 아닌 뜬금없는 하늘한테 고백했던 것이다.[지금 사람 마음 갖고 장난하는 거야? 거짓말하지 마. 누구한테 마음이 있는지 다 보이는데 왜 저러는 거야?][이거 대본 맞지? 대본의 냄새를 맡았어. 제작진한테 너무 실망이야.][대본이든 말든 나는 사도현과 배경윤이 이어지길 기도할 거야. 두 사람 진짜 잘 어울리잖아. 이러다가 진짜 이어져서 결혼할 수도 있어.][결혼이라니, 너무 앞서간 거 아니야? 사도현이 혼자 짝사랑하는 것 같아. 배경윤은 진찬영을 더 좋아한다고!]네티즌은 댓글 수백 개씩 달면서 열렬하게 토론했다. 진찬영의 평온한 얼굴에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사도현도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사도현은 하늘을 쳐다보면서 피식 웃더니 입을 열었다.“내가 열렬하게 구애했는데도 하늘 씨한테 졌어요. 정말 아쉬워요.”“사도현 씨, 제 말 좀 들어봐요. 경윤 씨가 장난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그래요. 저는 오늘 경윤 씨랑
배경윤은 먼저 손을 내밀었다. 진찬영은 배경윤이 손을 아무리 뻗어도 닿을 수 없는 존재였다. 그동안 꾸준하게 좋아했던 연예인이기도 했다.배경윤은 그동안 진찬영과 지내면서 연예인이 아닌 사람으로서의 매력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열정적인 팬에서부터 진찬영을 좋아하는 여자가 되었다.가끔 진찬영과 손을 잡고 천천히 늙어가는 평화로운 삶을 그리기도 했었다.진찬영은 자신을 향해 뻗은 배경윤의 손을 보고 환하게 웃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불쾌함을 전부 씻어버리고 손을 잡으려고 했었다.그런데 이때 사도현이 갑자기 나타나서 배경윤의 손을 잡았다.“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 다들 기다리고 있어요. 오늘 밤에 가장 중요한 것이 남아있으니 아무도 빠지면 안 된다고 했어요.”말을 마친 사도현은 진찬영을 힐끗 쳐다보고는 씩 웃었다. 그리고 배경윤을 데리고 게스트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이 손 안 놔? 누구 마음대로 내 손을 덥석 잡는 거야? 때리기 전에 놔줘.”배경윤은 살기가 넘치는 눈으로 사도현을 쳐다보면서 주먹을 꽉 쥐었다. 당장 사도현을 바다에 던져버리고 싶었다.사도현은 진찬영과 배경윤이 한 발짝 더 가까이 가려고 하면 어김없이 나타나 훼방했다.“내가 잡고 싶어서 잡은 줄 알아? 제작진이 너를 데리고 오라고 했어.”사도현은 게스트들의 주목을 받으면서 배경윤을 데리고 왔다. 그러고는 사회자 최빈을 향해 말했다.“다 모인 것 같으니 시작하죠.”최빈은 뒤쪽에 서 있는 진찬영을 향해 손을 흔들면서 말했다.“찬영 씨, 얼른 이쪽으로 오세요. 곧 고백 편지를 쓰는 시간을 가질 거예요.”>은 매일 밤에 게스트들이 모여 앉아 호감이 있는 사람한테 진심이 담긴 편지를 써야 했다. 다 쓴 편지는 추첨함에 넣고 제작진이 지목한 게스트가 나와서 뽑은 편지를 읽으면 되었다.낯부끄러운 시간이었지만 시청자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하루 종일 붙어 있으면서 게스트들의 마음이 어디로 향했는지 아주 궁금했다.마음을 편지에 담아 공개하기에
배경윤은 초가집의 뒷문으로 나온 뒤에 일부러 바닷가를 돌아서 바비큐 파티가 열린 곳으로 향했다. 게스트들은 배경윤을 향해 손을 흔들면서 반가워했다.“경윤 언니, 오셨어요? 언니가 오기만을 기다렸어요. 경윤 언니가 와서 너무 기뻐요.”장유빈이 머무는 숙소는 배경윤과 얼마 떨어져 있지 않았기에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장유빈은 바비큐 파티에 같이 참가하자고 했지만 배경윤은 단호하게 거절했었다. 못내 아쉬웠던 장유빈은 배경윤을 발견하고는 신나서 벌떡 일어났다.“모두 참가했는데 저만 빠지면 그렇잖아요. 저만 유별난 것도 아니고요. 아무튼 늦게 와서 죄송해요.”배경윤은 어색하게 웃으면서 머리를 긁적였다.“이제라도 와줘서 고마워요. 경윤 씨, 이것 좀 봐요. 찬영 오빠가 경윤 씨를 위해서 쉬지 않고 고기만 구웠어요. 경윤 씨가 고기를 그렇게 좋아한다더라고요.”소수민은 불판에 올려진 고기를 보면서 부러운 어조로 말했다.“같은 여자라도 어떤 남자를 만나는지에 따라 달라요. 저희는 먹고 싶은 걸 구워주는 사람이 없어서 직접 구웠어요. 그런데 경윤 씨가 고기를 좋아하니까 찬영 오빠가 양념 고기, 불닭 소스 고기, 허니 고기를 준비했대요. 먹음직스러워서 침이 저절로 고였어요.”배경윤은 진찬영을 바라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한편으로 고마웠고 다른 한편으로 미안했다.“찬영 오빠, 고기를 굽느라 고생 많았어요. 이제는 그러지 않아도 돼요. 제가 오빠를 위해서 뭐라도 할게요.”배경윤은 진찬영의 옆으로 걸어가서 같이 고기를 굽고 양념을 발랐다.“조심해요!”진찬영은 튀어 오르는 숯불을 막아주기 위해 손을 뻗었다. 숯불은 그대로 진찬영의 손에 튀었다.“찬영 오빠, 괜찮아요? 이 고귀한 손으로 왜 막은 거예요! 흉이 지면 안 되니까 얼른 가서 약부터 발라요.”소수민은 입을 틀어막고 기겁하더니 이내 소리를 질렀다.“찬영 오빠, 저... 죄송해요. 괜히 저 때문에 오빠가 다쳤어요.”깜짝 놀란 배경윤은 어쩔 줄 몰라 했다.“괜찮아요. 덴 것도 아
사도현은 배경윤의 귓가에 속삭였다.“지금 가서 문을 열어주면 어떻게 될까?”“그러지 마!”배경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사도현의 팔을 꼭 붙잡았다. 사도현은 꼼짝도 하지 못하게 되었다.“이상한 소리라도 낸다면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입 다물고 있어.”배경윤은 진찬영한테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진찬영과 시작해 보지도 않고 끝나기에는 너무 아쉬웠다.뻔뻔스러운 감이 있긴 하지만 인성은 늘 그렇듯 욕심이 끝도 없었다.“안에 누구 없어요? 없으면 문 열고 들어갈게요.”쾅!소수민은 문을 점점 세게 두드렸고 허술하게 지어진 초가집이 무너질 것 같았다. 벽이 흔들거렸고 먼지가 떨어졌다.배경윤은 사도현을 끌어안은 채 미간을 찌푸렸고 이 난감한 상황이 빨리 지나기만을 기다렸다. 사도현은 잔뜩 긴장해 있는 배경윤이 우스웠다.어쩐지 기분이 언짢았던 사도현은 일부러 배경윤의 겨드랑이를 간지럽혔다.“하하하!”배경윤은 참지 못하고 소리를 내고 말았다. 문밖에 서 있던 진찬영과 소수민은 그 소리를 듣게 되었다. 소수민은 큰 소리로 물었다.“계세요? 화장실을 쓰고 싶은데 문을 열어주세요. 저기요!”배경윤은 입을 틀어막고는 사도현을 노려보았다. 사도현은 눈썹을 치켜세우더니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고 약을 올렸다.“안에 사람이 있는 것 같으니 다른 곳에 가봐요. 쉬고 있는 사람을 방해하면 안 되니까요.”진찬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알겠어요. 찬영 오빠는 참 다정해요.”소수민은 짜증이 밀려왔지만 진찬영과 같이 다른 곳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발걸음 소리가 희미해지자 배경윤은 한숨을 내쉬었다.그러고는 주먹으로 사도현을 마구 때리면서 말했다.“사도현, 너 진짜 미친 거지! 일부러 나를 난처하게 만들었잖아. 이러고도 네가 남자야?”“사람들은 이미 우리를 한 쌍의 커플로 보고 있어. 커플이 같은 침대를 쓰는 게 그렇게 부끄러운 일이야?”사도현은 굳은 표정을 하고서 배경윤을 내려다보았다. 배경윤이 진찬영의 목소리에 반응한 것이 마음에 걸렸고 신경이 거슬렸
“그, 그게...”배경윤은 입술을 깨물면서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사실 배경윤은 사도현을 아직도 좋아하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도대체 무슨 감정이 드는지도 몰랐다.‘내가 아직 좋아하고 있는 걸까? 그래도 설레는 순간은 있었어.’배경윤은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매일 마음을 졸여야 하는 사도현보다 잔잔한 물결 같은 진찬영이 더 좋았다. 진찬영은 다정하고 친절해서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했다. 그래서 진찬영과 진지하게 만나서 결혼할 생각도 있었다.만약 이 프로그램을 통해 두 사람이 더 깊은 관계로 발전한다면 그대로 진찬영한테 모든 것을 쏟아붓고 싶었다.사도현은 빛이 나는 태양이라 열정적이고 인기가 많았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다치는 건 결국 배경윤이었다.진찬영은 차가워 보이지만 어둠으로 모든 것을 품어주는 달이었다. 달을 바라보고 가까이하는 것만으로 행복해서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도현아, 사실 나는...”배경윤은 심호흡하고는 솔직한 감정을 전달하려고 했다. 그런데 사도현은 이미 대답을 알고 있는 것처럼 배경윤의 입을 막아버렸다.“읍!”배경윤은 또다시 사도현과 입을 맞추게 될 줄 몰랐다. 요트 위에서 나눴던 키스와는 달리 한편으로는 부드럽고 다른 한편으로는 조심스러운 입맞춤이었다.가볍게 부딪친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사도현은 두려워했고 비굴하게 보이더라도 배경윤한테 떠나지 말라고 빌고 싶었다.화가 나서 밀치려고 했던 배경윤은 손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가만히 쳐다보다가 더 가까이 다가가 입을 맞추었다.‘이 세상에 불쌍하고 가엾은 강아지 같은 남자를 마다할 여자는 없을 거야. 그저 불쌍해 보여서 어쩔 수 없었어.’두 사람은 서로를 껴안고 사랑을 퍼부었다. 몸이 달아올라서 주체할 수가 없었다.“너의 대답이 무엇이든 중요하지 않아. 네가 내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사도현은 배경윤의 얼굴을 내려다보면서 진지하게 말했다.“도현아, 혹시 아까 그것도 작정하고 그런 거야? 너는 나를 너무 잘 알아. 나는 네가 미워!”배경윤의
당장이라도 별이 쏟아질 것처럼 몽환적인 순간이었다. 배경윤은 사도현의 어깨에 기대고는 조용히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 사이에 알 수 없는 기류가 흘렀고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이렇게 많은 별을 볼 수 있다는 게 꿈만 같아. 몇 년 전에 보고 나서 한 번도 보지 못했었는데 말이야...”배경윤은 제일 빛나는 별 하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슬픔이 가득 묻어나는 눈으로 사도현을 바라보았다.“마지막으로 별을 본 건 대학교 시절에 나, 우리 오빠와, 설아까지 셋이 외국에 여행 갔을 때야. 높은 산과 낮은 산 사이에 있는 구역에 차를 세우고 텐트를 쳤어. 밤만 되면 두 설산 사이로 반짝이는 별들이 얼마나 예뻤는지... 그 별을 따라 가면 이 은하의 끝에 닿을 것만 같아서 손을 뻗어보기도 했어.”“네 말을 들으니까 상상이 돼.”사도현은 아름다운 밤하늘을 바라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고원지대에서 보는 별을 사뭇 다르다고 들었기에 늘 가보고 싶어 했다. 하지만 바삐 돌아치는 바람에 가보지 못해서 아쉬웠다. 배경윤의 말을 들은 사도현은 마치 고원지대에 간 것처럼 기분이 묘했다.“그때의 우리는 걱정할 것도 없이 행복하게 지냈어. 시간이 나면 운전해서 바람 쐬러 갔고 등산도 자주 갔었어. 바다를 많이 보지 못한 게 아쉽지만 어쩔 수 없었지. 별들은 여전히 그대로이고 제 자리를 잘 지키는데 우리는 왜 이렇게 변했을까?”배경윤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행복했던 대학 시절을 돌이켜보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사도현은 고개를 돌려 배경윤을 쳐다보더니 피식 웃었다.“평소에는 성격이 시원시원하고 긍정적인 여자인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진지하고 우울한 면이 있었네? 의외의 모습을 보게 되었어.”배경윤은 사도현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별똥별이 한 획을 긋고 떨어지는 것처럼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너는 모든 사람이 너처럼 겉만 화려하고 속은 텅 빈 줄 알아? 사람은 대자연 앞에서 한없이 작아진다는 말도 모르냐고!”“공주님이 웬일로 울고 있어? 그렇게 슬
“응. 보고 싶어. 그게 어딘데?”배경윤은 진지한 표정을 한 사도현을 바라보았고 심장이 미칠 듯이 뛰었다. 그래서 겨우 진정하고 태연하게 물었다.“그럼 나랑 같이 가볼래?”사도현은 배경윤한테 손을 내밀면서 부드럽게 물었다.“이 시간 때에 가야 볼 수 있어. 너만 괜찮다면 같이 가고 싶어. 네가 싫다면 강요하지 않을게.”배경윤은 사도현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더니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가자! 혼자서 심심했었어.”“나의 공주님한테는 최고의 선물이 될 거야.”사도현은 눈이 휘어지게 웃으면서 배경윤을 데리고 자신만의 아지트로 달려갔다.두 사람이 멀어진 뒤로 배경윤이 처음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날이었다.사도현은 자신이 암컷 돼지의 출산을 도와준 모습에 배경윤이 감동했을 것이라고 여겼다.몇 분 후, 두 사람은 섬의 다른 한 끝에 도착했다. 그곳은 사도현이 지내는 초가집이었고 마당에서 게스트들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모여 앉아 해산물을 구워 먹고 기타를 쳤다. 남성 참가자와 여성 참가자 사이에 핑크빛 기류가 흘렀고 분위기가 한층 더 무르익어갔다.“설마 제일 예쁜 풍경이 저 사람들이 해산물을 구워 먹는 모습은 아니겠지?”배경윤은 멀리서부터 한곳에 모여 놀고 있는 게스트들을 발견했다. 사도현한테 속은 것 같아서 화가 솟구쳐 올랐고 배신감이 들었다.‘이럴 줄 알았어. 진지한 척만 하고 항상 나를 놀리고 싶어 했지. 내가 또 속을 줄 알아?’“그쪽 말고 여기로 가자.”사도현은 배경윤을 데리고 아무도 모르게 뒷문으로 초가집 안에 들어갔다. 배경윤은 미간을 찌푸린 채 사도현을 노려보았다.“고작 초가집을 보여주려고 데리고 온 거야? 그럴 바에는 나가서 다른 사람들이랑 노는 게 낫겠어. 너는 왜 항상 나를 놀리는 건데? 단 한 번만이라도 진지할 수는 없어?”“잠깐만 기다려 줘. 곧 보게 될 거야.”사도현은 배경윤의 두 눈을 손으로 가리고 불을 껐다.“사도현, 너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또 허튼수작을 부렸다가는 소리 질러서 너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