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자의 말이 끝나자 연단 아래에서 큰 박수 소리가 울렸다.업계의 거물들은 잔뜩 기대에 찬 눈빛으로 입구를 보고 있었다. 하이 테크 협회의 신임 회장이 무척 궁금하기도 하고, 또 신임 회장은 앞으로 4년 동안 하이 테크 분야의 방향을 정할 것이기 때문이다.스포트라이트 아래 검은 정장 슈트를 입고 머리를 높게 묶은 세련된 여자가 걸어 나왔다.맨 처음으로 소리를 지른 사람은 진무열이었다. 그는 눈을 비비더니 믿을 수 없는 얼굴로 말했다.“젠장, 내 눈이 이상한 건가? 왜 사모님이 나오셨지?”성도윤은 미간을 구기면서 차가운 얼굴로 세련된 모습의 차설아를 지켜봤다. 당연히 그도 적잖이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안녕하세요, 저는 하이 테크 협회의 새로운 회장직을 맡은 차설아라고 합니다.”차설아는 허리를 곧게 세우고 턱을 높이 치켜든 채 연단에 올랐다. 그 누구보다도 자신 있는 모습이었다.그녀는 줄곧 캐주얼하거나 우아한 차림이었지만 오늘의 오피스룩에 은테 안경까지 더하니 그 누구보다도 세련되고 카리스마 있어 보였다.몸에 딱 붙는 스커트 아래에 옅은 색의 스타킹은 그녀의 긴 다리를 감싸고 있었는데 덕분에 그녀의 세련된 모습에는 섹시함까지 더해졌다. 이를 본 남자들은 차설아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차설아의 외모는 완벽했지만 하이 테크 포럼에 참석하는 사람은 모두 이 분야에서의 거물들이었다. 협회 회장직을 여자에게 맡기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잠깐의 감탄 뒤에 곧바로 비판의 목소리가 거세졌다.“이분 성 대표님 아내분이 아니신가? 혹시 정신이 오락가락해서 잘못 들어온 거 아니야?”“하이 테크 협회가 언제부터 일을 이렇게 못했어? 개나 소나 다 회장을 할 수 있고 말이야. 장난해?”봇물 같은 비난에 사회자는 머쓱한 얼굴을 보였다.“여러분, 진정하시고 제 말을 들어보세요. 차설아 씨는 협회 회장으로 당선될 수 있는 자료를 모두 요구대로 제출했고, 또 충분히 회장직을 맡을 자격이 됩니다. 학업 스펙도 훌륭하고 발표한 논문은 국내외 유명
하이 테크 포럼이 끝난 후.차설아의 등장은 하이 테크 분야에 일파만파를 일으켰다.많은 사람들은 그녀를 찾아 얘기를 나누거나 사진을 찍으려고 했는데 그녀는 순식간에 이 분야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었다.관례에 따르면 하이 테크 회의가 성공적으로 끝을 맺게 되면 업계의 거물들이 한자리에 모여 식사를 하곤 했다.성도윤은 업계 최강자로, 차설아는 협회 회장으로 당연히 초대를 받게 되었다.사람들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은 같은 원형 테이블에 앉았다.분명 한때 가장 가까웠던 부부 사이였는데 두 사람은 말을 하기는커녕 서로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엄밀히 말하자면 차설아가 성도윤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었다.반대로 성도윤은 차설아가 신경 쓰였는지 계속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차설아가 술잔을 들고는 온화한 미소를 지은 채 여유롭게 업계 거물들과 얘기를 나눴다.여유로운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마치 비즈니즈계를 오랫동안 겪어온 ‘알파 우먼’ 같았다. 성씨 가문 사모님이었을 때의 수줍음과 소심함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성도윤의 얼굴색은 점점 어두워졌고 아무도 그의 곁에 다가갈 수 없었다.누군가 그에게 술을 권하러 오면 그의 싸늘한 얼굴에 겁을 먹어 뒤로 물러서고는 멀리서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현장은 극과 극인 상황으로 엇갈려졌다.차설아가 있는 쪽은 웃음이 끊이질 않았고 사람도 북적북적 많았는데, 성도윤이 있는 쪽은 아무도 말을 하지 않은 채 무거운 분위기를 이어가며 조용했다.진무열은 성도윤의 뒤에 서 있었다. 그도 성도윤과 마찬가지로 차설아만 빤히 쳐다보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대표님, 사모님께서 이런 대단한 재주도 있으셨네요. 공부만 잘했나 싶었는데 말씀도 엄청 잘하시네요. 왜 예전에는 몰랐을까요?”성도윤은 입술을 씰룩거렸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얼굴색은 한껏 더 어두워졌다.진무열은 눈치 없이 계속 물었다.“전에 대표님은 신임 회장에게 천신 그룹을 아웃시키는 일을 맡기려고 하셨잖아요.
성도윤은 마치 위엄 있는 왕처럼 제자리에 가만히 앉아있었다. 그는 차가운 얼굴로 차설아의 손에 든 잔에 가득 담긴 오렌지주스를 보더니 코웃음을 쳤다.“당신의 성의는 겨우 이것뿐이야?”“난 진심을 다했어, 오렌지주스를 마신다고 성의를 보이지 않았다는 당신 말엔 동의할 수 없어.”차설아는 고개를 돌려 거물들을 바라보며 공손하게 말했다.“여러분, 저는 알코올 알레르기가 있어요, 그러니 술 대신 오렌지주스를 마시는 걸 용서해 주세요. 이렇게 부탁드릴게요.”“술 대신 오렌지주스를 마신다고?”성도윤은 어이없는 듯 입꼬리를 끌어올렸다.“무슨 소꿉놀이하러 왔어? 비즈니스라는 건 아주 엄숙한 일이야, 당신과 놀아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적응 못하겠으면 얼른 집이나 가.”성도윤의 말에 사람들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다. 이때 라인을 제대로 타지 않으면 앞으로의 나날들이 많이 힘들어질 것을 예상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들도 덩달아 부추기면서 차설아를 쏘아붙였다.“차설아 씨, 대표님 말씀이 맞아요, 술자리에서 오렌지주스를 마시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지금 우리를 무시하는 거 아니에요?”“신임 협회 회장님이시잖아요, 여자라고 우리가 특별히 봐줄 것 같았어요?”“협회 회장으로서 앞으로 술자리는 더 많아질 거예요. 오렌지주스를 마시느니 지금 바로 사퇴하세요.”성도윤은 손에 든 와인을 흔들면서 만족스러운 듯 눈썹을 치켜들더니 마치 그녀를 이 바닥에 나타날 자격이 안 되는 개미처럼 보면서 거만한 태도를 보였다.차설아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성도윤은 어쩜 속이 콩알만큼 좁을까? 나를 난처하게 만들 기회를 전혀 놓치질 않네.’사실 차설아는 주량이 어마어마했다, 온 저녁을 마셔도 취하지 않곤 했다.다만 그녀는 지금 임신한 상태였기 때문에 술을 입에 댈 수 없을 뿐이었다.‘그래, 나 도발했다 이거지? 당장 후회하게 만들어줄게.’“대표님 말씀이 지당하시네요. 내가 생각이 짧았어, 지금 마실게.”차설아가 말하고는 잔에 담긴 오렌지주스를 모두 마셔버렸다. 그리고
“정말 알코올 알레르기가 있다면 지금이라도 패배를 인정해.”성도윤은 차가운 얼굴로 차설아에게 말했다.그는 단지 차설아에게 교훈을 주고 싶었지, 정말 그녀의 몸을 망가뜨리고 싶진 않았다.하지만 차설아는 입을 삐죽 내밀더니 한껏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괜찮아, 여러분들한테 내 성의를 보이면 되는 거 아니야?”‘정말 고집불통이네!’성도윤은 인내심이 바닥나 턱을 치켜들고는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시작해.”사람들은 숨을 죽인 채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그들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다.그들은 말 그대로 손을 넣었다 뺐다 하는 보리보리쌀을 진행했다.성도윤 같은 차도남들은 대체로 게임을 잘 하지 않는 편이다. 그는 아주 가끔 술자리에서 강진우, 사도현과 몇 번 게임을 해본 적이 있긴 했다.성도윤은 자신이 게임을 잘 하는 편이 아닌 건 알고 있었지만 차설아 같은 아마추어는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예상 밖으로 차설아는 그와 몇 번을 주고받았고 승부가 나지 않았다.“보리!”“보리!”“보리!”현장의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자 성도윤은 미간을 구기며 게임에 더 집중했다.“쌀!”차설아는 재빠르게 주먹을 성도윤의 벌린 손에서 빼냈다. 그녀는 아이처럼 해맑게 웃으면서 박수를 치고 있었다.“미안, 내가 이겼네. 얼른 마셔!”“내가 졌다고?”성도윤은 어안이 벙벙했다.그는 몇 초 전까지 차설아를 봐줄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져버렸다니.구경꾼들도 모두 놀란 기색을 보였는데 아무도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남자가 여자한테 게임을 지다니, 이보다 더 쪽팔린 일은 없을 것이다.성도윤은 차가운 얼굴로 진무열에게 술 한 잔을 받고는 단번에 마셔버렸다. 그리고 차설아에게 말했다.“한 판 더.”“대표님은 정말 신사시네요. 아깐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부터는 나 안 봐줘도 되니까 실력대로 해.”차설아는 겨우 웃음을 참으면서 성도윤에게 고마운 척 말했다.성도윤의 얼굴색은 흙빛이 되었고 그는 입술을 씰룩거리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
“그럼?”차설아는 매혹적인 성도윤의 눈빛을 보더니 저도 모르게 그날 밤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그날도 성도윤은 지금처럼 제멋대로 앞을 막아서고는 그녀와 관계를 가졌다.하지만 그 일이 있은 후로 성도윤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무책임하게 굴었다. 그래서 차설아는 화가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승부는 이미 갈렸고, 난 남아서 당신과 있어줄 책임도 없어. 패배를 인정하지 못하겠으면 처음부터 게임을 안 했어야지.”차설아는 오랫동안 억눌렸던 분노에 싸늘한 얼굴로 말하고는 남자를 돌아보지도 않으면서 룸을 떠났다.성도윤은 제대로 충격받은 듯 무표정으로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잘생긴 얼굴의 그는 차가운 기운을 뽐내며 그 누구도 다가가지 못하게 했다.룸 안에 무거운 분위기가 계속되자 사람들은 식은땀을 흘리며 서로 눈치를 살폈다.소문에 의하면 성씨 가문의 사모님이었던 차설아는 얌전하고 단정하기로 유명했다. 마치 교양 있는 집안에서 바르게 자란 아가씨같이 말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렇게 당돌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온 해안시에서 이런 건방진 태도로 성도윤을 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그녀밖에 없을 것이다. 혹시 성도윤의 사랑을 받고 있어 두려운 게 없는 건 아닐까?진무열은 성도윤이 이미 취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과거 경험으로 볼 때 술에 취한 성도윤은 상당히 까다로웠고 끔찍한 일을 많이 저지르곤 했다. 그래서 그는 급히 사람들에게 먼저 자리를 뜰 것을 권했다. 아니면 성도윤이 술에 취해 제멋대로 한 말이나 행동이 사람들에게 알려진다면 오히려 다음 날 그만 다른 사람들의 입을 막느라 바빠질 것이다.사람들도 눈치 빠르게 인사말을 나누고는 바로 자리를 떴다.조금 나이 있는 어르신은 심지어 성도윤의 어깨를 툭툭 치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성 대표, 너무 기죽지 마. 아내가 마음이 떴다면 다시 잘 보이면 되잖아. 파이팅!”“X발, 누가 잘 보이겠대요? 돌아오려고 울고불고 사정해도 저는 다시 받아주지 않을 거예요!”성도윤은 큰 몸을 휘청거리면서 잔뜩 화가
진무열은 노래 리스트를 보자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성도윤이 예약한 첫 곡은 바로 김범수의 ‘보고 싶다’였고 두 번째 곡은 ‘끝사랑’, 세 번째 곡은 ‘슬픔보다 더 슬픈 이야기’였다...모두 가슴 아픈 이별 노래들이었는데 아마 차설아한테서 받은 충격이 적지 않은 모양이었다.성도윤은 평소에 이성적이고 멀쩡해 보였지만 술만 마시면 이렇게 허당의 모습을 보여주곤 했다.결자해지라고 성도윤이 술에 취하면 슬픈 이별 노래를 마구 부르는 버릇은 역시 차설아가 고쳐줘야 할 듯싶었다.“대표님, 먼저 마시고 계세요, 저는 먼저 화장실을 다녀올게요.”진무열은 성도윤과 같이 몇 곡을 부르다가 휴대폰을 챙기고는 화장실로 향했다.잘생긴 성도윤은 그윽한 눈빛으로 스크린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애틋하게 노래를 부르고 있었기에 진무열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진무열은 화장실에 숨어 있으면서 차설아에게 전화를 걸고는 다짜고짜 하소연하기 시작했다.“사모님, 얼른 와보셔야 해요. 대표님에게 큰일 나셨어요!”차설아는 이미 집에 도착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반신욕을 하고 있었다. 다급한 진무열의 목소리를 듣더니 그녀는 매정하게 말했다.“큰일 나든 말든 나랑 무슨 상관이에요. 무열 씨, 제멋대로 나한테 전화하지 마요. 그럼 이만 끊을게요.”“안 돼요, 사모님. 꼭 한 번 오셔야 돼요. 왜냐하면...”진무열은 어떻게 말을 해야 차설아를 불러올 수 있을지 머리를 쥐어짰다.“대표님께서는 술에 취하고 나서야 사모님과의 이혼을 원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으셨습니다. 사모님을 이대로 보낼 수 없다면서 자... 자해를 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사모님이 오지 않으시면 건물에서 뛰어내리겠다고 하십니다!”그러고는 마음속으로 바로 사죄했다.‘죄송합니다, 대표님. 대표님과 사모님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대표님의 이미지를 좀 희생해야겠습니다. 두 분의 관계가 회복되면 오히려 저를 고마워할 겁니다!’차설아는 어이가 없었다.“무열 씨, 사람 괜찮아 보이던데 왜 거짓말을 해요? 나한테 안 좋은 감정
몽롱한 불빛의 룸 안에는 성도윤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스타일의 잘생긴 젊은 남자들도 있었다.남자들은 성도윤 앞에서 온갖 재롱을 부리고 있었다.“콜록콜록!”차설아는 어색한 마음에 목을 가다듬었다. 당장이라도 쥐구멍으로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성도윤은 차설아가 온 줄도 모르면서 마이크를 들고는 윤도현의 ‘사랑했나 봐’를 열창했다.“사랑했나 봐 잊을 수 없나 봐, 자꾸 생각나 견딜 수가 없어...”차설아는 자리를 뜨고 싶었지만 성도윤의 노래에 이끌리게 되었다.성도윤과 결혼한 지 이렇게 오래되었지만 성도윤이 노래하는 모습은 처음 보게 된 것이었다.항상 차갑고 그 어떤 감정도 가지고 있지 않은 듯한 그가 감미로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으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감미로운 목소리보다 차설아를 더 놀라게 한 건 바로 성도윤의 애절한 감정이었다. 그는 마치 실제로 절절하게 사랑한 사람과 이별했나 싶을 정도로 열창했다.‘그 사람은 과연 누굴까? 친한 친구와 곧 약혼할 첫사랑인 허청하일까, 미스터리의 Y씨일까? 아니면 그의 아이를 가진 임채원일까? 아무튼 나 차설아는 절대 아닐 거야!’성도윤이 자살 소동을 일으키지 않은 걸 보고는 차설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도 모르게 자리를 뜨려고 했지만 소파에 앉아있던 잘생긴 소년은 새침하게 손으로 입을 가리더니 비명을 질렀다.“어머, 이 여자 누구예요? 왜 수상하게 이러고 있죠?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거 아니에요?”성도윤은 노래를 멈췄고 깊은 눈망울로 천천히 문 쪽을 바라봤다.차설아를 본 순간 알코올 때문에 몽롱하던 그의 눈빛은 눈에 띄게 밝아졌다. 술이 깨서인지, 아니면 술에 더 취해서인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다.성도윤은 그저 조용히 차설아를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의 눈빛은 차가운 것도 아니었고 뜨거운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차설아를 내쫓지도 안으로 초대하지도 않았다.차설아는 그의 눈빛이 불편하게 느껴져 어색한 미소를 짓고는 젊은 남자들에게 말했다.“미안, 하던 거 마저 해.”차설아는
차설아가 말하고는 성도윤 앞으로 걸어가더니 그와 같이 발라드를 부르고 있던 잘생긴 남자에게 말했다.“친구, 자리 좀 비켜줄래? 이 사람 옆자리는 내 자리야.”젊은 남자는 겨우 스무 살 남짓해 보였다. 그는 이 노래방에서 가장 핫한 호스트였기 때문에 팔짱을 끼고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 제가 먼저 왔는데 왜 자리를 비켜야 하죠?”차설아는 턱을 치켜들더니 건방진 표정으로 말했다.“내가 이 사람 전처거든.”젊은 남자는 흠칫 놀랐다. 하지만 그는 노래방의 가장 핫한 호스트로서 이런 상황을 겪어보지 못했던 건 아니었다.“전처면 어때요? 우리는 현처가 와도 자리를 안 내줘요. 불만이 있으면 우리 로비 매니저님한테 말씀하세요. 하지만 한 가지만 미리 말해두죠, 우리 이 노래방은 뒤를 봐주고 있는 사람이 어마어마하거든요.”“너!”차설아는 화가 나 말문이 막혔다.‘지금 젊은이들 정말 대단하네. 어떻게 이렇게 뻔뻔스러울 수가 있지?’젊은 남자가 성도윤 옆에 앉아 있으면서 아예 자리를 내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차설아는 이 모든 상황이 너무 황당하게만 느껴졌다.“누님, 우리가 오빠랑 엄청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거든요. 얼른 집에 들어가세요, 괜히 여기 있으면서 분위기나 망치지 말고요. 지금 우리와 오빠의 즐거운 시간을 완전히 방해하고 있잖아요.”성도윤 옆에 앉은 다른 잘생긴 남자가 교태를 부리며 말했다. 눈꼴 시린 남자의 모습에 차설아는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얘네들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이야?’차설아는 참다못해 계속 침묵을 지킨 성도윤을 향해 말했다.“도윤 씨, 아무 말도 안 할 거야? 계속 이렇게 가만히 있으면 나 진짜 도윤 씨 두고 먼저 갈 거야, 나중에 나 몰라라 했다고 원망하지나 마.”성도윤은 술에 취했기에 머리가 어질어질했고 시선도 흐릿해졌다.그는 차설아가 나타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 시도 그녀에게서 눈을 뗀 적이 없었다. 마치 눈앞에 있는 여자가 진짜인지, 아니면 환각일 뿐인지 확인하고 있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