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렇게 싫어? 마주치면 치워버리고 싶을 만큼 싫냐고.”성도윤은 침대에 누워 평온한 표정으로 차설아를 쳐다보며 물었다. 두 사람 사이에 깊은 원한이 있는 것 같았고 차설아와 차성철이 성도윤을 죽이기 위해 판을 짠 적도 있지만 성도윤은 차설아를 도저히 미워할 수가 없었다.저도 모르게 시선이 차설아한테로 향했고 차설아가 있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변강섭과의 협력 관계를 통해 말 한마디면 차설아를 구해낼 수 있었지만 성도윤은 직접 금변시로 왔다. 성도윤은 차설아를 만나기 위해 먼 곳까지 갈 정도로 애절한 감정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난 내가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고 싶어. 당신이 도와줄 수 있어? 기억을 되찾는 방법을 알고 있다면 말해줘.”“알아, 난 똑똑하니까...”“어떻게 하면 되는데?”“예를 들면...”차설아는 눈을 깜빡이더니 성도윤한테 귓속말하려고 몸을 숙였다. 성도윤은 바짝 긴장했지만 기다림 끝에 들려온 것은 차설아의 숨소리였다.“하!”성도윤은 차설아가 그대로 자버리는 바람에 화가 솟구쳐 올랐고 궁금해서 미칠 것 같았다. 당장 차설아를 흔들어 깨워서 따져 묻고 싶었지만 변강섭을 상대하고 곧바로 헌혈까지 한 여자를 차마 깨우지 못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성도윤은 차설아에게 베푼 선심이 어떤 ‘보답’으로 돌아올지 몰랐다.술에 취한 차설아는 잠버릇이 유난히 심했는데, 침대에서 뒹굴다가 성도윤을 베개처럼 안기도 하고 성도윤의 팔을 베고 자기도 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발로 찼고 주먹질을 해대서 성도윤은 차설아가 일부러 연기하는 줄 알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차설아가 뒤에서 성도윤을 꼭 끌어안고 등에 얼굴을 갖다 댔다.“날 못 자게 할 셈이야?”성도윤이 뒤돌아 따져 물으려 했지만 귀여운 아기처럼 잠이 든 차설아의 얼굴을 보니 화를 낼 수가 없었다. 성도윤이 한숨을 내쉬고는 조심스럽게 팔을 뻗어 차설아를 품에 안았다.“내 팔 베고 누워, 착하지.”차설아는 뒤척이더니 성도윤을 더 꽉 끌어안았다. 따뜻하고 커다란 물체를 안고 있어서 안전
성도윤은 샤워하다가 밖에서 누군가 웅얼거리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이때 차설아가 긴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채 욕실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이게 뭐 하는 짓이야!”성도윤은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그 자리에 얼어붙었고 손이 덜덜 떨렸다.“나 씻을 거야.”차설아는 굳은 얼굴로 샤워기 쪽으로 걸어갔고 성도윤과 마주 보았다.“너무 더워서 씻으려고.”“큼!”샤워기가 뿜어낸 물에 차설아의 머리카락이 조금씩 젖어 들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옷과 바지가 흠뻑 젖으며 살갗에 달라붙었다. 차설아의 몸매가 젖은 옷 아래로 적나라하게 드러났고 성도윤은 뜨거운 무언가가 솟구쳐 오르는 것을 느꼈다.“시원해!”차설아는 눈을 감고 물로 온몸을 적셨고 시원한 물줄기를 만끽하며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설마 이것도 계획의 일부인가?”성도윤은 완벽한 몸매의 소유자로서 정교하게 깎아진 조각상 같았지만 차설아한테 알몸을 보여주는 것이 어쩐지 난처했다. 차설아는 그런 마음을 모르는지 성도윤과 마주 섰음에도 불구하고 차가운 물로 몸을 식히는 것에 집중했다. 부끄러워하던 성도윤은 차설아가 자신의 몸에 흥미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마음이 편안해졌다.“너무 시원해. 아, 이거지!”차설아는 성도윤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고 젖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면서 아이처럼 순진한 미소를 지었다. 성도윤은 차설아를 붙잡고 따져 묻기 시작했다.“날 유혹하려고 일부러 관심 없는 척하는 거 다 알아. 연기도 이쯤에서 그만하지 그래?”성도윤은 만족스러운 답을 들으면 어쩐지 오늘 밤은 차설아에게 따뜻한 품을 내어줄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곧 이상함을 감지하게 되었다. 차설아는 샤워하면서 횡설수설했고 성도윤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 행동했다. 성도윤은 차설아에게 몽유병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순간부터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그 자리에 굳어있었다. 몽유한 사람을 깨우면 깜짝 놀라서 죽을 수도 있다는 소문 때문에 두려웠던 것이다. 만약 차설아가 정신을 차렸을 때, 알몸인 성도윤과 같이 씻고 있었다는 사
성도윤은 뜨거운 숨을 내뱉으며 눈앞의 여자를 덮치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참고 있었다. 차설아가 실컷 만지고 욕실을 나가면 이 욕구도 사라질 거라고 믿었다.“우리 귀염둥이, 참 착해.”차설아는 미소를 지으며 성도윤의 등을 토닥였다. 위기를 넘긴 줄 알았던 성도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방심하던 찰나, 차설아가 두 손으로 성도윤의 아랫도리를 움켜쥐었다. 성도윤은 깜짝 놀라서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내 목숨줄을 아무렇게나 잡다니!’“귀염둥이, 나랑 같이 자자. 이제는 시원해서 잘 수 있을 것 같아.”차설아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채 성도윤을 향해 말했다.“같이 자는 건 맞는데, 이 손부터 좀 놓으면 안 될까? 당신이 이렇게 움켜쥐면 내가...”“나랑 같이 자는 거다!”차설아가 두 손에 힘을 주고 잡아당기는 모습은 18세 관람가에서도 보기 힘든 장면이었다. 성도윤은 그대로 욕실에서 끌려 나가게 되었다.불행 중 다행인 것은 욕실을 나가자마자 차설아는 침대에 쓰러져 잠에 들었다. “하!”조용히 잠든 차설아를 지켜보던 성도윤은 한숨을 내쉬었고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몇분 안 되는 시간이 몇백 년같이 느껴질 만큼 고통스러워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다음날.차설아는 밀려오는 두통에 눈을 떴고 몸에 걸친 얇은 잠옷과 곁에서 곤히 잠든 성도윤을 번갈아 보더니 소리를 질렀다.“아!”차설아는 성도윤을 흔들어 깨웠다.“당신 도대체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죠? 이상한 식당에 가서 밥을 먹이고 술을 권한 건 이런 짓을 벌이려고 그런 건가요?”성도윤은 차설아 때문에 온밤을 뜬눈으로 지새우다가 잠에든지 한 시간 밖에 지나지 않았기에 눈 밑에 짙은 다크서클이 자리 잡았다. 성도윤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그건 내가 할 말인 것 같은데? 날 유혹한 건 당신이야.”“내가 유혹했다고요?”차설아는 씩씩대며 팔짱을 끼고 말했다.“제 말 기분 나빠하지 말고 들어요. 내가 오라고 손가락질만 해도 당신이 날 덮칠 텐데, 굳이 왜 유혹하겠어요? 당신은 말 잘
“테크닉이 뭐?”성도윤은 차설아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눈치채고는 차가운 어조로 물었다.“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니에요.”차설아는 살고 싶은 마음에 본능적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고 입을 꼭 다물고 있었다.“뭐가 아닌데.”성도윤은 천천히 차설아 곁으로 다가갔고 두 팔로 상체를 지탱하며 차설아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내 테크닉이 별로라는 뜻이야?”“당신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죠.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본인의 실력을 아주 잘 알고 있는 모양이네요.”차설아는 웃음을 간신히 참으며 진지하게 말했다.“내 테크닉이 별로인지 아닌지는 곧 알게 될 거야.”성도윤은 말이 끝나기 바쁘게 차설아의 턱을 움켜쥐고 키스를 퍼부었고 커다란 손으로 차설아의 여린 몸을 탐색했다.“웁!”차설아는 성도윤이 당돌하게 덮칠 줄 몰랐기에 당황해서 버둥거리기만 했다.‘왜 갑자기 성도윤이랑 이러고 있는지 누가 좀 알려줘... 안돼, 이번만큼은 절대 안 돼. 차설아, 이 고비를 넘기지 못하면 과거로 돌아가는 거나 마찬가지야. 다시 엮이지 마.’“싫어요!”차설아는 있는 힘을 다해 성도윤을 침대에서 밀어버렸고 이불로 몸을 감싸면서 말했다.“성 대표님, 이러지 마세요. 곧 결혼한다는 분이 바람났다는 구설수에 오르지 않게 조심하셔야죠.”바닥에 떨어진 성도윤은 씩 웃더니 차갑게 말했다.“내가 뭘 어쨌다고 그래? 당신이 선을 넘으면서 날 유혹한 거잖아. 난 정상적인 남자로서 반응할 수밖에 없었어.”“거짓말하지 마세요. 방귀 낀 놈이 성낸다더니, 내가 언제 당신을 유혹했다고 그래요? 나한테 술을 권한 것도, 이 호텔까지 데려온 것도 전부 당신이면서... 같은 침대에서 자고 눈 뜨자마자 입부터 맞춘 건 당신이잖아요!”“날 안 믿어?”성도윤은 눈썹을 치켜세우더니 휴대폰을 꺼내 어젯밤에 찍은 영상을 틀었다.“누가 누굴 유혹했는지, 당신 두 눈으로 직접 봐.”“이게 뭐예요?”차설아는 미간을 찌푸린 채 영상을 보았다. 어젯밤에 욕실로 뛰어가서 성도윤과 함께 씻다가 성도윤의
“차설아, 우리 이혼해.”등 뒤에서 성도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을 때 차설아는 스테이크를 굽고 있었다.지글거리는 뜨거운 기름이 얼굴에 튀었지만, 아무런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우리는 명의상 부부일 뿐 정은 없잖아. 이제 4년이란 시간도 채웠으니, 이쯤에서 끝내자.”얼음장처럼 차가운 남자의 목소리는 왠지 모르게 소외감이 느껴졌다.차설아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드디어 이날이 왔군.’4년 전 차씨 집안이 파산당하면서 그녀의 부모님은 부담감에 못 이겨 아파트에서 뛰어내렸고, 결국 차설아는 홀로 모든 뒤처리를 감당하게 되었다.차설아의 할아버지와 성도윤의 할아버지는 함께 전쟁을 치른 전우였고, 차설아의 할아버지가 전쟁터에서 성도윤의 할아버지를 구해준 적이 있었다.차설아의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계속 눈에 밟히던 사람이 바로 어린 손녀딸이기에 성도윤의 할아버지한테 잘 좀 챙겨달라고 신신당부했다.그래서 이런 유명무실한 혼인을 치르게 된 것이다.다만 어느 순간부터 그녀는 결혼 생활을 이어가면서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버렸고, 성도윤한테 푹 빠졌다.그녀는 시간이 지날수록 ‘아내’라는 역할만 충실히 이행한다면 언젠간 그의 마음을 얻을 거로 믿었다.하지만 이혼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너한테 보상으로 800억이랑 동탄구 아파트 펜트하우스를 줄게. 이건 이혼 신고서야. 별다른 문제 없다면 사인해.”성도윤은 무표정한 얼굴로 차설아에게 서류 더미를 건넸다. 대수롭지 않은 그의 태도는 마치 이혼마저 하나의 사업처럼 여기는 것 같았다.차설아는 서류를 건네받아 일련의 숫자를 내려다보았다.4년에 800억이라...성씨 집안은 역시나 씀씀이가 달랐다.“꼭 해야겠어?”차설아는 서류를 내려놓고 눈앞의 남자를 올려다보았다.그녀가 4년 동안 사랑한 남자는 조각 같은 외모에 훤칠한 몸매를 가졌는데, 매사에 진지하고 끊고 맺음이 분명했다. 그는 마치 전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처럼 닿을 수 없는 그런 존재이다.“응.”성도윤의 싸늘한 음성에는 일말의 망
어쩐지 성도윤이 오늘 밤에 나가라고 하더니, 새로운 애인을 집에 빨리 들이기 위해서일 줄이야!아까 고작 이런 남자 때문에 가슴 아파한 자신을 떠올리자 머리를 쥐어뜯고 싶은 심정이었다.임채원은 도도하게 차설아 앞으로 걸어가 거만한 말투로 쌀쌀맞게 말했다.“당신이 차설아야? 아직도 안 갔어? 도윤이가 가라고 하지 않았나? 여태껏 미적거리며 버티고 있었던 거야? 뻔뻔스럽기도 하네.”차설아는 그녀의 도발 따위 가뿐히 무시하고 계속해서 땅바닥에 널브러진 짐을 챙겼다.“이봐, 당신 귀먹었어? 내 말 안 들려?”“미안, 못 들었어.”차설아는 그제야 고개를 들고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개가 멍멍 짖는 소리만 들렸거든.”“감히 나한테 욕한 거야?!”“내가 언제 욕했어? 본인이 직접 인정하는데 나라고 별수 있나?”말을 마친 그녀는 캐리어를 끌고 길을 막는 임채원을 향해 고개를 까닥했다.“비켜줄래? 사람이 지나가면 개도 눈치껏 피해준다고.”“이...!”임채원은 화가 나서 발발 동동 굴렀고,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전설 속 성씨 집안 둘째 며느리는 동네북으로 소문났을 텐데, 입이 이토록 거침없을 줄이야!이를 본 도우미가 쪼르르 달려가 아첨하기 급급했다.“채원 양, 화 푸세요. 집에서 쫓겨난 여자 때문에 몸이라도 상하면 본인만 손해잖아요. 앞으로 이 별장의 안주인은 채원 양이라고요, 저 여자는 아무것도 아니죠. 둘째 도련님의 부탁대로 채원 양이 지낼 방을 마련했으니 지금 바로 안내해 드릴게요.”도우미의 말이 기분이 풀어진 임채원은 차설아를 공기 취급한 채 도우미를 따라 별장으로 들어갔다.매서운 찬바람이 불어닥치는 밖에 또다시 차설아만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눈앞의 웅장한 저택을 바라보는 그녀의 마음은 착잡하기 그지없었다.이곳에서 4년이란 시간을 보냈는데 결국엔 이처럼 초라한 결말을 마주하니, 정말 아이러니했다!“안녕!”차설아는 심호흡을 크게 하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그날 밤 도심으로 올라온 그녀는 원룸을 계약했다.비록 방이 크지는
다음날.9시에 만나기로 약속했지만, 차설아는 8시 30분부터 구청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그녀는 일찍 도착한 건 물론 화장까지 정성껏 했다. 그리고 제일 좋아하는 빨간색 롱드레스를 입고 그동안 풀어헤쳤던 머리카락마저 높게 묶어 백조처럼 길고 하얀 목덜미를 훤히 드러냈다.멀리서 보면 여신이 따로 없었고, 우아하면서도 시크하고 기품이 흘러넘쳤다.하지만 그날 밤 찬바람을 맞아서 그런지 열이 살짝 난 탓에 컨디션이 좋은 편이 아니었다.9시 정각이 되자, 은색 부가티 베이런이 지상 주차장으로 천천히 들어섰다.성도윤은 싸늘한 얼굴로 차에서 내렸다.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는 차설아를 발견하자 그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지만, 이내 알 수 없는 불쾌감이 몰려왔다.“꽤 적극적이네?”성도윤은 무심한 표정으로 차설아를 스쳐 지나가 기다란 다리로 접수창구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별난 놈이야.’차설아는 듬직하면서도 어딘가 쌀쌀맞아 보이는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몰래 생각했다.‘뒤꽁무니에 불이라도 붙은 줄 알았네! 자기도 급하게 가면서 왜 나한테만 뭐라 그래?’이혼 신고는 생각보다 빨리 처리되었다. 사인하고 날인하는 데 10분도 안 걸렸다.“새로 도입된 법에 따르면 이혼하고 나서 한 달 동안 숙려기간이 있는데, 등록일로부터 30일 이내에 이혼을 원치 않은 사람이 있다면 둘 중에서 아무나 접수증을 들고 와서 취소해도 돼요.”구청 직원은 말을 마치고 이혼 접수증 2부를 각각 나눠줬다.매일 매일 이혼을 접수하면서 울고불고 심지어 현장에서 싸우기는 별의별 상황을 다 접했지만, 이렇게 무덤덤하게 처리하는 부부는 처음 본다.게다가 남자는 키도 크고 잘생기고, 여자는 날씬하고 예쁘기만 한데 누가 봐도 잘 어울리는 한 쌍이 어쩌다 이혼까지 하게 되었단 말인가?차설아는 접수증을 건네받아 빼곡히 적힌 내용을 들여다보자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이혼할 때 숙려기간이 있으면서 결혼하기 전에는 왜 없대? 만약 혼인 신고할 때 숙려기간이 있다면...”성도윤의 얼굴이 어두워지더
대체 무슨 낯짝으로 이리 당당하단 말이지?차설아는 모든 게 어이가 없었다.그동안 성도윤은 속세를 벗어난 선비처럼 남녀관계에 관심이 없고, 여자를 돌같이 볼 줄 알았는데 결국 소리소문없이 시한폭탄을 터뜨렸다.애인을 집에 들이는 것도 모자라 아이까지 가지다니?순간 정신이 번쩍 든 차설아는 마음속에 조금이나마 남아있던 슬픔마저 말끔히 사라졌다.“그러니까 지금 불륜이란 말이지?”성도윤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임채원은 눈물을 글썽이며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차설아 씨, 이게 다 제 탓이에요. 화풀이하고 싶으면 저한테 해요!”이 여자가 지금 뭐 하자는 거지? 피해자 코스프레를 제대로 보여주네?“그래?”차설아는 당장이라도 뺨을 때릴 기세로 팔을 높이 들어 올렸다.임채원은 새된 비명을 지르며 깜짝 놀라 성도윤의 등 뒤로 쏙 숨었다.“자기한테 화풀이하라더니 왜 숨는데?”차설아는 그대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작작 좀 해, 난 나름 소양 있는 사람이라 내연녀와 개싸움 벌이고 싶은 생각은 없거든? 둘이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데 방해하기는커녕 그 소원을 이뤄줘야 하지 않겠어?”“뭐... 뭐라고?”생각지도 못한 반응에 임채원은 어리둥절했다. 몰래 준비한 ‘감성팔이’ 작전도 무용지물이 된 듯싶었다.보아하니 성도윤과 차설아가 아무런 감정이 없는 계약 부부에 불과하다는 소문이 사실인 것 같았다.아니면 내연녀를 마주친 상황에서 대체 어떤 와이프가 이처럼 무심하고 관대할 수 있겠는가?이내 차설아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다만 불륜인 만큼 이혼 합의서에 적힌 재산분할에 관한 내용을 다시 협상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임채원은 차설아가 재산을 언급하자 조급한 나머지 가식을 떨기는커녕 한층 격앙된 어조로 말했다.“도윤이가 당신한테 800억에 동탄구 아파트 펜트하우스까지 넘겨주지 않았어? 이 정도면 충분히 잘해줬다고 보는데? 게다가 그동안 도윤네 집에서 그쪽 집안 뒤처리하느라 얼마나 고생했다고! 사람이 너무 욕심을 부리면 못 써.”차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