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도 우리랑 같이 가자. 나랑 은아 심심풀이 상대나 해줘.”“???”“싫어?”성도윤은 순식간에 얼굴에 먹구름이 낀 듯한 차설아의 표정을 바라보며 씨익 미소지었다.“싫다면 굳이 강요하진 않을게. 하지만 너도 알 텐데, 난 보통 중요한 얘기는 다 식탁 앞에서만 하잖아.”“싫다니요, 당연히 좋죠. 두 분이랑 함께 식사하게 되다니, 영광이네요.”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려 미소 지은 차설아는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화를 억누르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자신의 오빠와 송지아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알아내야 한다는 일념만 없었다면 차설아는... 지금 당장이라도 눈앞의 성도윤을 때려눕혔을지도 모른다. 그는 차설아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봤던 사람 중 가장 얄미운 사람이었다.“굳이 그럴 필요는 없죠!”서은아가 끼어들어 차설아를 경멸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설아 씨도 아시다시피 저랑 도윤이 정말 오랜만에 만난 거라 단둘이서 나눌 얘기가 참 많아요. 그런데 그 자리에 설아 씨가 끼면, 너무 어색하지 않겠어요?”“하하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다 친구 사이인데 어색할 게 뭐가 있다고요!”차설아는 가식적인 말을 내뱉으며 속으로 힘껏 외쳤다.‘나도 당연히 어색하지, 그런데 나더러 뭘 어떡하라고. 넌 무슨 내가 정말 너희랑 같이 밥 먹고 싶은 줄 아니?!’하지만 이미 여기까지 온 이상 아무리 어색한 자리일 것 같다고 해도 절대 물러설 수 없었다. 차설아는 차라리 아예 뻔뻔하게 행동하는 것을 택했다. 어차피 그녀만 당당하다면 민망하고 어색한 것은 두 사람일 테니까.”“설아 씨!”서은아는 뻔뻔하게 나오는 차설아를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순간적으로 난감해졌다.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성도윤이 내린 결정이었으니 무작정 반대할 수만은 없었다. “그래요, 그래요. 그렇게 눈치 없게 끼고 싶다고 하니, 저야 어쩔 수 없네요. 젓가락 하나 더 올려놓으면 될 일이니까 딱히 상관없어요.”서은아는 일부러 고개를 빳빳이 쳐든 채 아무렇지도 않은 척 말했다.그렇
주위를 둘러보던 차설아는 자신의 의자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옆에 있던 직원에게 말했다.“저기요, 여기 의자 하나만 더 갖다 주실 수 있을까요?”“아, 그게요...”직원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뭐가 문제예요? 손님이 앉을 자리가 없으니까 의자 하나 더 놔달라는 건데 그게 그렇게 어려워요?”직원은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으며 난감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손님, 의자를 가져다드리는 건 아무 문제 없지만, 2인석에 의자를 하나 더 추가하는 건 조금 곤란할 것 같습니다. 저희 매장 분위기에도 안 좋고 다른 손님들 식사하시는 데도 방해될 수 있어서요.”“따지는 게 왜 이렇게 까다로워요?”답답해진 차설아의 말투가 날카로워졌다.“당연히 까다로워야죠...”서은아는 마치 왕실의 왕비라도 된듯한 기세로 성도윤의 맞은편에 앉아 냅킨을 펴며 비꼬았다.“2인석이면 2인석이지, 의자를 추가하는 법이 어디 있어요? 저였다면 제 자리가 없다고 했을 때 눈치껏 다른 곳으로 꺼져줬을 것 같네요. 이런 식으로 직원한테 억지를 부리는 건 경우가 아니죠.”이미 속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던 차설아의 분노는 서은아의 말에 그만 폭발해버리고 말았다.“그래요, 맞아요. 2인석에 의자 하나 추가되면 당연히 보기 거슬리겠지. 그러니까 너도 눈치껏 일어나지 그래!”차설아는 무례한 말투로 서은아에게 쏘아붙였다.“너, 너 지금 그게 무슨 뜻이야? 이 자리는 내 자리야! 그런데 내가 왜 일어나야 해?”서은아는 자신을 밀어내려는 차설아의 행동에 충격을 받은 듯 표정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누가 이 자리가 네 자리라고 했는데? 여기 뭐 네 이름이라도 적혀 있대? 부르면 주인님이라고 대답이라고 해준다니?”“도윤이가 앉으라고 한 거야. 그리고 난 성도윤 약혼녀고, 그럼 당연히 이 자리는 내 자리여야지!”“허, 성도윤이 앉으라고 했다고? 이 자리가 뭐 도윤 씨 아들이라도 된대? 도윤 씨가 부르면 여기서 대답 해주나?”“그, 그건...”차설아의 말에 서은아도 딱히 반박하지 못했다.
테이블 옆에 서 있던 서은아는 티격태격 중인 성도윤과 차설아를 지켜보았다. 겉으로는 싫은 척하면서도 사실은 애정이 뚝뚝 흘러넘치는 것 같은 둘의 모습에 서은아가 주먹을 꽉 쥐었다.“둘이 분위기 좋아 보이네, 도윤아. 오히려 내가 여기 끼어있는 게 어색할 정도야. 둘이 식사 천천히 해. 난 먼저 호텔로 돌아갈 테니까.”말을 마친 서은아가 황급히 자리를 뜨려 했다.하지만 차설아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녀의 손목을 탁 잡고는 웃는 얼굴로 말했다.“어색하다니, 그게 무슨 소리예요. 은아 씨가 여기 남아있어야 우리한테 스테이크도 썰어주고, 와인도 따라주고, 반찬도 이것저것 다 집어줄 거 아니야. 은아 씨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데요.”“차설아 씨, 너무하다는 생각 안 들어요? 이런 일은 원래 차설아 씨가 나한테 해줘야 하는 것들이잖아!”“누가 그래요? 혹시 제가 해드려야 한다고 법으로 정해놨어요?”“도윤이가 그랬어요!”“성도윤이 대체 뭔데 내가 그 사람 말을 다 들어줘야 해요?”“설아 씨!”두 사람의 싸움에 다시 불이 붙을 기미가 보이자 성도윤이 직접 나서서 서은아에게 말했다.“은아야, 여기 내 옆에 와서 앉아.”그 말에 금세 표정이 밝아진 서은아가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역시 도윤이야, 이럴 줄 알았어. 네가 날 저런 곳에 가만히 세워둘 리가 없지.”서은아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성도윤의 옆에 앉아 그에게 몸을 기댔다. 가까이 꼭 붙어 앉은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은 정말 곧 결혼만 남겨둔 천생연분 같아 보였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차설아는 고개를 숙이고 씁쓸해진 마음을 억누르기 위해 물을 한 모금 마셨다.얼마 지나지 않아 직원이 주문한 요리들을 하나씩 테이블 위에 올려놓기 시작했다.이번 양식은 거미 튀김 같은 이상한 음식과는 달리 매우 섬세하고 정교하게 플레이팅 된 고급 요리였는데 보기만 해도 눈이 즐겁고 식욕이 돋았다.하지만 차설아는 배가 고팠음에도 그런 고급 요리들을 온전히 즐기지 못했다. 왜인지 모르게 입맛이 떨어져 음식을 씹어도 양초
“왜 또 내일 아침으로 미루는 건데요?”차설아는 속으로 수많은 욕설을 삼키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이쯤 되니 그녀는 성도윤에게 의심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이 남자는 처음부터 자신에게 진실을 얘기해줄 마음이 없었고 그저 이 일을 빌미로 자신을 갖고 논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내일 아침이면 얘기해줄 수도 있고, 안 해줄 수도 있고.”두 손을 호주머니에 찔러넣은 성도윤이 무표정으로 말했다.“그래봤자 나한테는 네 오빠랑 다른 사람 사이의 원한을 대신 풀어줄 의무가 없거든.”“도윤 씨...”성도윤의 답변에 차설아의 말문이 막혀버렸다.이 남자는 정말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변덕스러운 사람이었다. 말 바뀌는 속도가 책장 넘기는 것보다 빨랐다.하지만 그럼에도 차설아는 뒷일을 위해 꾹 참기로 했다.“그래요, 그럼. 내일 얘기해줘도 돼요. 그럼 저도 피곤하니까 이제 푹 쉴 수 있겠네요.”그렇게 호텔로 돌아온 차설아는 바로 침대 위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최근 들어 걱정거리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기던 탓에 차설아는 이미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지금 그녀의 상태는 베개에 머리만 대면 잠들 수 있는 상태였다.그리고 성도윤과 서은아의 쪽은 문제가 조금 복잡했다.두 사람은 한 스위트룸을 이용하고 있었지만 한 사람은 거실에서 신문이나 뒤적이고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섹시한 빨간 잠옷을 입은 채 침대에 누워 상대를 기다리고 있었다.서은아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몸에 향수를 여러 번 뿌리고 있었다.향수 이름은 ‘크레이지 인 러브’로, 서은아가 꽤 특별한 경로를 통해 비싼 값을 주고 구매한 것이었다.이 향수를 뿌린 여자는 자신의 매력을 극대화해 이성을 완전히 유혹할 수 있게 되고 두 사람이 함께 뿌리면 둘은 마치 실과 바늘처럼 서로 끌리게 된다고 한다.이런 방법까지 쓰는 게 조금은 치사해 보일 수도 있지만 서은아도 어쩔 수 없었다.그녀는 성도윤과 결혼을 약속한 사이였고 성도윤 역시 서은아를 깊게 사랑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하지만... 둘 사
“네가 보고 싶었다는 마음만 있으면 되는 거야. 차설아 일은... 그냥 말하는 게 웃겨서 심심풀이로 몇 마디 조금 나눴을 뿐이고.”성도윤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자신 스스로도 믿을 정도의 거짓말을 아무렇지 않게 했다.차설아를 대하는 자신의 감정이 어떤 것인지 스스로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분명 그녀는 자신의 원수가 맞았고 그녀와의 기억도 거의 없었다. 하지만 왜인지 모르게 이상하게도 자꾸만 차설아에게 끌렸고, 자꾸 차설아와 가깝게 진고 싶어졌다. 마치 유전자나 몸의 세포가 무의식적으로 반응하기라도 하듯 그녀의 사소한 말과 행동 하나하나에 끌렸다.하지만 이런 감정들은 서은아와 비교했을 때 한없이 약한 것이었다.성도윤은 자신이 서은아를 사랑한다는 것을 이미 의식하고 있었고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의 곁을 지켜준 그녀에 대한 감사함을 품고 평생 그녀를 떠받들며 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지어는 서은아를 위해 목숨까지 바칠 수 있었지만... 서은아와 함께 있는 시간은 별로 즐겁지 않았다.“정말? 정말 차설아 씨는 그냥 심심풀이 땅콩 같은 대상인 거지? 정말 아무 감정도 없는 거 맞지?”서은아는 성도윤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서은아도 안목 있는 사람이었다. 차설아를 대하는 성도윤의 태도가 어떤지 그녀에게도 너무 뻔히 보였다.“넌 내가 차설아한테 무슨 감정을 품었으면 하는 거야?”성도윤은 차가운 눈빛으로 서은아를 바라보며 딱딱한 목소리로 물었다.“당연히 아니지. 네 눈에는 나만 보였으면 좋겠어. 다른 여자가 있어서는 절대 안 돼.”“그럼 됐네. 내 눈에는 정말 너밖에 없거든. 다른 여자는 들어올 틈도 없어.”“말은 이렇게 해도 파파라치가 찍은 사진 보면 그렇게 생각하기 힘들던데…”“파파라치가 무슨 사진을 찍었는데?”“네가 직접 확인해봐...”서은아는 휴대폰을 꺼내 파파라치가 찍어 보내준 사진을 성도윤에게 보여주었다. 사진 속의 성도윤은 차설아와 함께 호텔로 들어가고 있었다.“나...”성도윤은 자신이 한순간에 쓰레기가 되어버린 듯한
성도윤은 최대한 서은아에게 반응하려 노력해봤지만 마음속 깊은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거부감 때문에 더 이상 그 분위기를 이어나갈 수 없었다.“그만하자. 오늘은 조금 피곤하네.”성도윤은 자신의 몸을 꼭 끌어안고 있던 서은아를 떼어내더니 깊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너도 피곤할 텐데, 이만 쉬어.”“도윤아, 또 날 거부하는 거야? 대체 왜 그래? 우리 만난 지도 이렇게 오래됐고, 곧 있으면 결혼까지 할 텐데 평생 이렇게 ‘순수한 친구’로만 지낼 생각이야?”그 말을 하는 서은아의 눈가가 점점 빨개지더니 엄청난 좌절감이 얼굴에 여실히 드러났다.어떤 여자든 남자에게 거절을 당한다면 마음에 상처를 입기 마련이다.항상 스스로를 ‘상여자’라 지칭하며 다니던 서은아도 알고 보면 섬세하고 여린 마음을 지닌 여인이었다.“미안해. 다 내 탓이야. 내가 아직 준비가 안 됐나 봐.”성도윤은 두 손가락을 교차시켜 손깍지를 끼고는 고개를 푹 숙이며 답답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성도윤은 가끔 스스로도 자신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의심해 보았다. 왜 사랑하는 서은아를 앞에 두고도 아무 반응을 못 하는 걸까?성도윤은 서은아뿐만 아니라 다른 여자들에게도 거의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하지만 차설아에게만큼은... 마치 사춘기 소년이라도 된 듯 몇 번씩이나 자제력을 잃고 선을 넘고 싶었다.“아니야, 우연이야. 분명 우연일 거야.”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쓸데없는 생각을 접으려 했다.사람이라면 성욕이 있기 마련이고, 보통 그런 성욕은 시기와 분위기가 잡힐 때 제대로 생기는 법이다.성도윤은 자신이 차설아에게 그렇게 반응했던 이유도 아마 그날의 애매한 분위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라면 그날의 몸 상태가 더 좋아서였을 수도 있었고, 더운 날씨 때문에 더 쉽게 성욕이 일었을 수도 있었다... 어쨌든 전부 다 우연이었을 뿐이었고 다른 건 없었다.“도윤아, 네가 굳이 사과할 필요는 없어. 네가 준비가 안 됐다면 우리 같이 천천히 준비해보자.”감정을 추
남자는 산책이라도 나가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복잡한 머리를 비우기로 했다.둘이 머무는 호텔은 환경이 꽤 좋은 곳이었다. 전형적인 동남아 스타일로 정원에는 다양한 열대 식물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예를 들면 야자수나 큰 선인장 같은 것들이었는데 그 가운데를 걷다 보면 마치 원시림 속을 걷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정원을 거닐던 성도윤은 낯익은 실루엣을 발견했다. 차설아였다.“설아...”그녀를 부르려던 성도윤은 문득 차설아에게 몽유병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설마 또 몽유병이 도진 건가?그렇게 성도윤은 몰래 차설아의 뒤로 다가가 그녀의 상태를 살펴보기로 했다.차설아는 커다란 선인장 앞으로 다가가 거침없이 웅크려 앉더니 선인장에게 속삭이기 시작했다.“고슴도치야, 무서워하지 마. 난 널 정말 좋아하니까. 널 해칠 생각은 없는데, 가시 하나만 뽑아가도 돼?”“고슴도치야, 넌 정말 귀엽다. 근데 몸에 가시가 너무 많아서 속상해. 내가 다 뽑아줄까?”“하나, 둘, 셋...”차설아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더니 선인장의 가시를 뽑기 시작했다.그녀의 진지한 모습에 성도윤은 그만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이 여자는 정말 어디가 아픈 걸까, 아니면 아픈 척 연기하는 걸까? 선인장을 고슴도치로 착각한 것도 모자라 사기를 다 뽑아주겠다는 말을 하다니, 너무 귀여운 거 아닌가?하지만 평소와는 달리 멍하고 흐린 눈빛으로 보아 지금 차설아는 몽유병이 도진 게 분명했다.성도윤은 차설아의 안전을 위해 그녀를 직접 깨우지 않고 숨죽인 채 그녀의 행동을 지켜보는 쪽을 택했다.“넷, 다섯, 여섯...”계속해서 낮은 소리로 숫자를 세며 많은 가시를 모은 차설아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이제 드디어 고슴도치의 가시를 손에 넣었다. 난 더 이상 무서울 게 없는 사람이야!”“푸하하!”결국, 성도윤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뒤돌아 그를 발견한 차설아는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나쁜 놈. 내 가시 훔치려고 온 거지? 찔러버릴 거야!”“뭐, 뭐라고?”“찔
“젠장, 방금 뿌렸던 그 향수가 효과를 발휘한 게 분명해!”방문 옆에 기댄 성도윤은 이마에서 흐르는 뜨거운 땀방울을 닦으며 가까스로 호흡을 조절했다.그는 문 앞에 서서 나가야 할지 들어가야 할지 망설이고 있었다.나가자니 제정신도 아닌 차설아가 선인장 가시로 자해라도 하면 어떡하지?그렇다고 또 들어가자니 지금 자신이 상태가 가장 위험해 보였다.앞서 걷던 차설아는 “쿵” 소리와 함께 기둥에 부딪히더니 잠에서 깼다.“???”그녀는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선인장 가시를 보더니 다시 주변을 둘러보며 혼란 속에서 세 가지 질문을 던졌다.“난 누구지?”“여긴 어디지?”“난 뭘 하고 있었던 거지?”“차설아, 너... 꺤 거야?”성도윤은 침을 꿀꺽 삼키더니 다급한 말투로 물었다.그 소리에 고개를 돌린 차설아는 표정도 잔뜩 일그러진 채 고통을 호소 중인 성도윤을 보자마자 재빨리 달려가 그를 붙잡고 물었다.“도윤 씨, 무슨 일이에요? 몸이 왜 이렇게 뜨거운 거예요? 얼굴도 새빨갛고, 열 나는 거예요?”“나 건드리지 마!”차설아를 밀어낸 성도윤은 자신의 목 아래로 땀방울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그는 자신의 몸에 일어나는 변화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성도윤은 더 이상 점잖은 신사가 아니라 아무도 막을 수 없는 짐승으로 변해 있었다.만약 여기서 차설아를 밀어내지 않는다면 이 토끼 같은 여자는 산채로 성도윤에게 잡아먹힐지도 몰랐다.“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예요? 무슨 일인지 얘기해줘야 제가 돕죠...”성도윤이 고열로 인해 정신을 잃었다고 생각한 차설아는 그를 가만히 내버려 둘 수 없어 계속해서 부축하며 말했다.“일단 제 방으로 들어가요. 방 안에 해열제가 있거든요.”“건드리지 말라고 했잖아. 분명 너도 같이 위험해질 거야...”“어차피 이번이 처음도 아니잖아요. 게다가 지금 열이 이렇게 펑펑 끓고 있는데, 내버려 뒀다가 뇌척수막염이라도 걸려서 바보 되면 어쩌려고요? 그걸 두고만 볼 수가 없죠.”성도윤을 끝까지 자리 방으로 끌고 들어간
“정말 예상도 못 했어. 분명히 조치를 다 했는데 말이야.”차설아는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하지만 이미 찾아온 생명이니 기왕 이렇게 된 거 잘 키울 생각이었다.“이건 운명이야! 아무리 막아도 올 아이는 오게 돼 있다니까! 하하하! 그런데 말이야, 성 대표, 또 아빠가 된다는 걸 알면 얼마나 좋아할까?”배경윤이 진심으로 차설아를 축하하며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좋아할 게 뭐가 있어... 사실, 지금 우리 상황은 아이를 가질 때가 아니야.”차설아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지금은 그녀와 성도윤에게 가장 큰 압박이 몰려오는 시기였다.정확히 말하면, 성도윤에게 가장 힘든 시기였다. 밖으로는 성대그룹 대표 자리를 확고히 다져야 했고 안으로는 앞을 보지 못하는 그녀를 돌봐야 했다.그런 상황에서 아이까지 생긴다면 그는 혼자서 네 사람의 책임을 짊어져야 했다.이 부담은 단순히 경제적인 문제가 아니었으며 감정적인 부담이 더 컸다.사랑하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적들에게 잡힐 약점도 많아지는 법이었고 지금의 그들에게는 너무도 위험한 일이었다.“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 이미 온 생명인데, 어쩌겠어? 애초에 달이랑 원이 가졌을 때도 그렇게 좋은 상황이 아니었잖아? 그런데 지금 얼마나 사랑스럽니? 후회해?”“당연히 후회 안 해.”“그럼 됐잖아!”배경윤이 단호하게 말했다.“게다가 이번에 태어날 아기가 달이랑 원이 장점만 쏙 빼닮았다고 생각해 봐! 완벽하지 않겠어?”“그러게... 그러면 정말 좋겠다.”차설아는 두 아이를 떠올리며 배 위에 손을 얹었다. 이제야 이 갑작스러운 생명이 조금씩 기대되기 시작했다.“임신 초기에 필요한 게 뭐가 있을까? 칼슘 보충해야 하나? 엽산도 챙겨야 하고, DHA도 먹어야 하지?”배경윤이 이미 휴대폰을 꺼내 온라인 쇼핑몰에서 폭풍 주문을 하기 시작했다.마치 자신의 아이처럼 뱃속 아이를 챙기며 태어나기도 전에 애지중지하는 모습이었다.“근데 이번 아기는 아들일까, 딸일까? 아니면 또 쌍둥이일 수도 있
“임신이라고...?”차설아는 잠시 기억을 더듬어 보더니 고개를 단호하게 저으며 말했다.“말도 안 돼. 절대 그럴 리 없어.”“정말 그런지 아닌지, 테스트해 보면 알겠지.”배경윤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내가 가서 임신 테스트기를 사 올게. 잠깐만 기다려!”그녀는 말이 끝나기 바쁘게 곧바로 근처 약국으로 달려가 임신 테스트기를 사 왔다.배경윤이 다시 돌아왔을 때, 가정부 현이가 커피에 무언가를 섞고 있었다.“현이 씨, 그게 뭐예요?”배경윤이 커피잔을 흘끗 보며 물었다.“어... 아무것도 아니에요!”현이는 당황한 듯 허둥지둥 커피를 쏟으며 말했다.“설아 씨가 커피가 많이 쓰다면서 설탕을 좀 많이 넣으라고 해서요.”“그래요?”배경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설아가 단 커피를 좋아한다고? 입맛이 바뀌었나?’분명 차설아는 블랙커피만 선호했었다. 하지만 배경윤은 지금 더 중요한 일이 있었기에 신경 쓰지 않고 곧장 임신 테스트기를 들고 차설아를 찾으러 갔다.차설아는 처음엔 테스트하기를 꺼렸다.어차피 임신일 리가 없는데 뭐 하러 하냐고 거절했지만 배경윤이 끈질기게 떠들어대는 바람에 결국 마지못해 테스트를 해보기로 했다.그리고 얼마 후,“꺅!”배경윤의 날카로운 비명이 집안에 울려 퍼졌다.“진짜 임신이잖아! 내가 뭐랬어! 네가 원래 그렇게 활기 넘치는 사람이었는데 갑자기 축 처지고 졸린 게 다 이유가 있었던 거라니까!”차설아가 임신했다는 사실에 배경윤은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한편으로는 기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걱정스러웠다.“지난번에 네가 달이랑 원이 가졌을 때 내가 제대로 챙겨주지 못했잖아. 이번엔 달라! 내가 반드시 널 전적으로 돌볼 거야. 꼭 좋은 대모가 되고 말겠어!”배경윤은 차설아의 팔을 붙잡고는 벌써 세 아이가 함께하는 미래를 상상하며 설레했다.마치 자신이 임신한 것처럼 들떠서는 말을 이었다.“근데 성도윤 그놈, 이번엔 진심일까? 진심이라면, 우리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자. 아버지로서 제대로 역할을 하게 해야지. 아이
만약 할아버지마저 성진의 꾀에 넘어갔다면 앞으로 가문에서 그의 발언권은 크게 줄어들 것이고 지위도 그보다 아래로 내려가게 될 터였다.이런 일들을 생각하기만 해도 머리가 아팠지만 차설아까지 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성도윤은 단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나에겐 당신과 아이들만 있으면 돼. 다른 건 중요하지 않아... 자, 이제 자자.”성도윤이 낮게 한숨을 내쉬며 차설아를 안은 채 조용히 말했다.“...”예민한 차설아는 그의 말투에서 나는 실망감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녀도 덩달아 걱정이 되어 어떻게 되던 그를 도와야겠다고 다짐했다.다음 날 아침성도윤은 또다시 성대그룹으로 향했고 배경윤은 집에 머물며 차설아를 돌보기로 했다.“다시는 설아를 데리고 밖에 나가지 마. 또 어제 같은 일이 생기면 이번엔 정말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성도윤은 떠나기 전에 배경윤에게 여러 번 신신당부했다.“알았어, 알았다고! 절대 안 데리고 나갈게. 설령 데리고 나가더라도 걱정 마, 이제 내 목소리도 돌아왔잖아. 누가 감히 어제처럼 날 괴롭히면 정말 지 엄마도 못 알아볼 정도로 만들어 줄 거야.”배경윤이 우유를 마시면서 신나서 떠들어댔다.성도윤은 그녀를 한동안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정말 시끄러운 여자야. 차라리 말 못 하는 게 나았을지도... 대체 사도현은 어떻게 견디는 거야?’성정엽이 떠난 후, 배경윤은 기지개를 켜며 몸을 풀고는 차설아가 어젯밤 몰래 방문한 오두막으로 향했다.차설아는 여전히 자고 있었고 침대에서 일어날 생각도 없었다.“아직도 안 일어났어? 요즘 너 왜 이렇게 게을러졌어? 예전 같지 않네.”배경윤이 침대 옆에 앉아 축 늘어진 차설아를 보며 감탄했다.“으음... 몰라. 요즘 너무 졸려. 너무 여유롭게 지내서 그런가 봐. 자꾸 나태해지네.”차설아는 눈도 뜨지 않은 채 중얼거리듯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녀도 스스로 이상하다고 느꼈다. 평소에는 활력이 넘치던 그녀였는데 요즘은 마치 기운이 쭉 빠진 것처럼 앉아 있는 것조
“위치 추적 장치?”성도윤은 깜짝 놀라며 엄지를 치켜세웠다.“대단한데? 내 몸에 추적 장치를 달아놓고도 내가 전혀 몰랐다니. 영화 속 첩보 요원도 너만큼은 못 하겠다.”차설아는 우쭐한 표정으로 말했다.“당연하죠! 난 영화 속 첩보 요원보다 훨씬 대단하거든요. 그러니까 나 잘 모셔야 해요. 괜히 나한테 못되게 굴었다간 아주 끔찍한 최후를 맞이할걸요?”그녀는 자신만만하면서도 살짝 장난스러운 눈빛을 보냈다.“어찌 감히 여왕님께 잘못하겠습니까? 남은 생애, 충성을 다해 모시겠습니다!”“흠, 그거면 됐어요. 아주 착하네!”차설아는 만족스럽다는 듯 성도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그러고는 몸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졸리고 추워 죽겠어요! 빨리 이불 속으로 안내해요.”이렇게 지내다 보니, 그녀는 어느새 그와 함께 자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렸다.오늘 밤,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던 이유를 생각해 보니, 아마도 그가 곁에 없어서일 것이다.그래서 결국 그를 찾아온 것이었다.“어서 와. 이불 속은 이미 따뜻하게 데워놨지.”성도윤은 능청스럽게 ‘충실한 침대 보좌관’처럼 행동하며 그녀를 이불 속으로 이끌었다.차가운 밤, 따뜻한 이불 속에서 서로를 감싸는 것만큼 행복한 일이 또 있을까.차설아는 옆으로 돌아누워 다리를 오므린 채 마치 엄마 뱃속에 있는 태아처럼 몸을 웅크렸다.성도윤은 뒤에서 그녀를 꼭 안아주었다.그 온기는 마치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보호막 같았고 덕분에 차설아는 금세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하지만 성도윤은 오히려 정신이 말똥말똥해졌다.“여보, 우리 오늘 밤에 그 두 유치한 녀석들 갈라놓은 거... 혹시 너무한 거 아닐까?”그가 말한 ‘두 유치한 녀석’이란 당연히 사도현과 배경윤을 뜻했다.솔직히, 그 둘은 늘 티격태격하는 사이였고 아마 다음 날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 화해할지도 모른다.하지만 오늘 밤 자신들이 개입하면서 상황은 좀 더 심각해져 이러다가 정말 절교로 이어지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성도윤의 머리가 아파졌다.“혹시 사도현이 끝
“그게 뭔데?”“두 사람 서로의 감정을 확실히 깨닫고 흔들림 없이 서로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해줄 그 한 가지.”차설아는 이번만큼은 저 두 사람이 깨닫기를 바랐다.그녀와 성도윤도 그 기나긴 길을 돌아왔기 때문에 그 답답하고 혼란스러운 감정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사람은 함께 많은 일들을 겪어야만 ‘이 사람을 절대로 놓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차설아와 배경윤의 긴 대화가 이어질수록, 밤은 더욱 깊어졌다.배경윤은 많은 이야기를 쏟아내다 지쳐 잠들었고 그녀의 뺨에는 여전히 눈물이 맺혀 있었다.하지만 차설아는 도무지 잠이 들지 않았다.지금의 이 고요함이 너무 불안했다. 이렇게 평온할 때일수록 더 큰 위기가 다가오는 법이었다.같은 시각, 성진의 차가 그녀의 집 아래에 멈춰 서 있었다.가로등 불빛이 차 위로 희미하게 드리웠고 차 안의 남자는 어둠과 빛 속에서 조각 같은 얼굴을 드러냈다.그 역시 때로는 빛 속에 머물고 때로는 어둠 속에 숨어 지내면서 가끔은 스스로조차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었다.사실, 그는 이미 한참 전부터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저택 안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대화 소리도 들었고 차설아가 실명한 게 사실이라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그렇다면 그녀의 눈을 누구에게 줬을지,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성진은 차를 몰고 오는 동안 머릿속에 수많은 말들이 떠올랐다. 그는 여자의 어깨를 붙잡고 미친 듯이 소리치고 싶었다.“왜 그렇게 바보 같은 짓을 했어? 왜 네 소중한 눈을 나 같은 인간한테 줬냐고!”하지만 정작 그녀의 집 앞에 도착해 그렇게 따져 묻고 눈을 돌려주려 했던 순간, 그는 망설였다.그는 한때 지옥을 경험한 사람이었다.어둠 속에서 길을 잃은 것이 얼마나 끔찍한지 그 절망 속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이 얼마나 처참한지 아직도 잊지 않았다.그리고 한 남자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 속옷 하나조차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챙길 수 없는 처지가 되는 것이 얼마나
위층에서도 차설아와 배경윤이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숨죽여 통곡하던 배경윤이 갑자기 흥분해서 소리쳤다.“나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나 말할 수 있다고! 드디어 목소리가 돌아왔어!”배경윤이 눈물을 닦고 기쁨에 겨워 차설아를 와락 끌어안으며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설아야, 나도 목소리 되찾았으니까, 너도 분명 다시 볼 수 있을 거야! 걱정하지 마, 내가 꼭 방법을 찾아볼게!”“잘 됐어! 네 목소리가 돌아온 건 정말 다행이야. 아니면 우리 전투력이 너무 약해질 뻔했잖아. 팬들 상대로 밀려서 너무 힘들었어.”차설아가 진심으로 기뻐하며 웃었다.오늘 오전, 그녀와 배경윤이 무기력하게 몰려다니며 반격조차 못 했던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배경윤이 목소리를 잃었기 때문이었다.대학교 시절, 차설아, 배경수, 그리고 배경윤은 유명한 삼총사였다.셋이 무적이었던 이유는 각자의 역할이 명확했기 때문이었다.차설아는 ‘물리적 공격’을 담당했고, 배경수는 ‘두뇌 플레이’를 맡았다. 그리고 배경윤은 ‘언어 공격’을 담당했다.하지만 지금 차설아는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의 ‘물리적 공격’ 능력이 반감되었고, 설상가상으로 배경윤마저 목소리를 잃었으니, ‘언어 공격'도 무용지물이 된 셈이었다.그렇다 보니 팬들이 둘을 조롱하며 몰아붙이는 걸 막을 방법이 없었다.“맞아! 만약 내가 오늘 말을 할 수 있었더라면 저 미친 팬들 제대로 박살 냈을 거야! 아까, 정말 속이 터지는 줄 알았어. 내가 제대로 반격도 못 했잖아! 안 되겠어, 사도현 찾아가서 다시 따질 거야!”배경윤이 소매를 걷어 올리며 당장이라도 사도현과 한바탕 말싸움을 벌일 기세였다.차설아는 재빨리 그녀를 붙잡았다.“이기고 싶다면 지금은 절대 그를 찾아가면 안 돼. 그리고 당분간 연락도 하지 마. 만약 그가 진짜 너에게 마음이 있다면 반드시 너에게 만족할 만한 답을 줄 거야.”“그 답을 내가 받을 수나 있을까? 그냥 당장 그랑 싸우는 게 속이 더 후련할 것 같은데.”“어떻게 그렇게 확신해? 왜 네
성도윤이 진심 어린 충고를 건넸다.“???”사도현은 남자의 말을 듣고는 눈살을 찌푸렸다.“형, 이게 정말 형 입에서 나온 말이야? 여자가 원하는 대로 해야 한다고? 그럼 그게 완전 ‘호구’랑 뭐가 달라? 그렇게 냉정하고 도도하던 형이 어쩌다... 이제는 아내가 하라는 대로 한다고? 이건 형답지 않아...”사도현은 여자를 쫓아다니긴 하지만 성도윤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이었다.여자에게 돈을 쓰고 달콤한 말을 하긴 해도 어떤 여자도 그의 행동을 통제하거나 그의 사고를 지배할 수 없었다.어떤 여자가 그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는 순간, 그는 단호하게 다른 여자를 찾았다.배경윤도 예외는 아니었다. 자신의 원칙이 걸린 문제라면 절대 양보하지 않았기에 오늘도 이렇게 끝없는 논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나도 오랜 시간 고민해서 얻은 결론이야.”성도윤이 드물게 인내심을 가지고 사도현에게 연애 철학을 설파했다.“인생을 살면서 우리는 많은 사람과 일들을 만나게 되지. 그 중요도를 정하는 객관적인 기준은 없어. 중요한 건, 네 마음속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 아는 거야.”“네가 스스로의 자아를 지키는 것이 그 여자와의 관계보다 더 중요하다면, 그 여자를 포기하면 되는 거고.”그는 부드러운 어조로 덧붙였다.“네가 여자를 유혹하는 데 능숙한 건 알지만 결국 진정성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무기야. 나는 아내의 말을 듣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혹시 네가 그렇게 못하는 건, 단순히 네가 상대방을 충분히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성도윤은 날카롭게 바라보며 정확한 지적을 했다.“나는...”사도현은 그런 게 아니라고 바로 반박하려 했지만 막상 입 밖으로 내뱉으려 하자 말문이 막혔다.그는 다른 사람을 속일 수도 있고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 속일 수도 있었다.하지만 성도윤만큼은 속일 수 없었다.성도윤은 누구보다 그를 잘 아는 사람이었다.자신의 마음속 가장 솔직한 감정을 그가 단번에 꿰뚫어 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형은 내가 좀
“내가 왜 경윤이한테 뭐라고 해야 하죠?”차설아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사도현에게 물었다.“만약 내가 도현 씨라면 이 일이 윤설과 관련이 있든 없든, 나는 단번에 배경윤을 위해 나섰을 거예요. 좋아하는 여자가 이렇게 큰 모욕을 당했는데 괴롭힌 사람을 찾아서 따지기는커녕 내 여자에게 참으라고 한다면, 그건 도현 씨가 그 여자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겠죠.”“지금 이간질하려는 건 아니지? 사람마다 일을 처리하는 방식이 다르다고. 무턱대고 화를 내고 일이 커지면 더 큰 소란을 일으킬 수도 있는데, 그게 과연 좋은 방법일까?”사도현은 당황해서 말을 잇지 못했다. 자신이 떠받들던 차설아가 자기편을 들지 못할 뿐만 아니라 배경윤과의 관계를 파탄으로 몰고 가려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아직도 이해를 못 하시네요.”차설아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이 일에서 중요한 건 결과가 아니라 도현 씨의 태도예요. 그런 태도라면 어떤 여자라도 상처받을 수밖에 없어요.”“그게 아니라...”사도현은 머리를 긁적이며 생각했다. 좋아하는 감정을 이렇게 표현하는 게 정말 힘들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설아야, 역시 나를 이해하는 사람은 너뿐이구나!]배경윤은 타자한 후, 서러운 마음에 바로 차설아를 껴안았다.[이런 마음은 여자만이 이해할 수 있어! 도현 씨는 그저 내가 징징거린다고만 생각하겠지!]“도현 씨, 3일 안에 경윤이한테 사과할 기회를 줄게요. 하지만 어떻게 사과할지는 도현 씨가 알아서 해야 해요. 경윤아, 우리 오늘 같이 자자. 할 얘기가 정말 많을 것 같아!”차설아의 말에 배경윤도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팔을 잡고 계단을 올라갔다.아래층에서는 두 남자가 멍하니 서로를 쳐다보며 어리둥절해 있었다.성도윤은 왜 남의 커플 문제에 자신이 이렇게 끼어들어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반대로 사도현은 왜 이해심 많던 차설아가 갑자기 이렇게 고집불통이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형, 우리 커플 일에 형수가 너무 과하게 간섭하는 거 아니야? 원래 하루이틀이면 해
“그때는 그때고, 사람은 성장하는 법이잖아.”샤워를 마친 차설아가 계단을 내려오며 말했다.2층에서 사도현과 배경윤이 성도윤을 둘러싸고 다투는 소리를 듣고 성도윤 대신에 반박하며 나선 것이다.세 사람은 고개를 들어 목욕 가운을 입고 나온 차설아를 보고 급하게 다가갔다.“설아야, 너 혼자 내려왔어? 움직이지 마, 잠깐만.”성도윤이 제일 먼저 달려가 아기를 돌보듯 세심하게 챙기며 말했다.배경윤과 사도현도 마치 공주를 대하듯 신중하게 행동했다.[괜찮아? 기분 나쁘거나 불편한 거 없어?]성도윤이 차설아를 거실 소파에 앉히자 배경윤이 그녀의 옆에 앉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난 괜찮아. 기분도 나쁘지 않고 아픈 곳도 없어. 내가 전에 겪은 일에 비하면 몇 명 애들이 장난친 정도인데 뭐가 대수겠어.”차설아가 배경윤의 손등을 가볍게 쓰다듬으며 안심시키려 했다.“경윤아, 네가 더 걱정이야. 기분 잡치게 하는 사람들을 마음속에 담아두지 마. 그러면 오히려 너 자신이 힘들어져. 그냥 흘려보내. 신경 쓸 필요 없어.”그 말을 들은 배경윤은 그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의미심장하게 한마디 했다.[맞아, 맞아. 어떤 사람은 정말 마음에 두지 않더라고. 그 사람 때문에 화내는 내가 진짜 등신이지.]그녀는 당연히 차설아가 말한 ‘기분을 잡치는 사람’이 사도현이라고 생각했지만, 사도현은 오히려 차설아가 배경윤에게 작은 일로 문제를 일으키지 말고 더 관대해지라고 충고하는 것으로 이해했다.“들었어? 역시 형수가 마음이 넓어. 미친개한테 물렸다고 너도 같이 물려고?”사도현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사도현은 배경윤이 절대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는 고집 센 여자인 걸 잘 알고 있었지만 차설아의 말만큼은 예외라는 걸 알고 있었다.차설아는 배경윤의 정신적 지주이자 인간적 우상이었기 그녀의 말이면 배경윤은 무엇이든 믿었다.[도현 씨가 그 미친개라는 말이지?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배경윤이 분노를 담아 타자기를 두드리며, 마치 사도현을 죽일 듯 차가운 눈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