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윤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자신에게 바싹 달라붙은 서은아의 팔을 떼어내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집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으랬잖아, 왜 여기까지 따라온 거야?”“네가 걱정돼서 참을 수가 없었어. 그래서 실장님한테까지 졸라서 네가 어디 있는지 알아내고 제일 빠른 항공편으로 여기까지 온 거야.”서은아는 다시 성도윤에게 꼭 달라붙으며 애교를 부렸다.“하여간 진무열은 그 입이 문제야. 그만두고 싶어서 안달이 난 모양이지?”성도윤의 준수한 얼굴에는 미처 억누르지 못한 분노가 서려 눈빛은 무서울 정도로 차가워졌다.그는 서은아의 갑작스러운 방문이 전혀 반갑지 않았다.그렇다고 성도윤이 죄책감을 느낀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런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곳에 서은아 같은 귀한 집안의 딸이 와 있다는 사실 자체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도윤아, 표정이 왜 그래. 안 기뻐? 내가 안 보고 싶었던 거야?”“기쁘긴 한데, 이런 곳은 네가 있을 곳이 아니야.”“대체 뭐가 문제인데? 여긴 유명한 관광지잖아. 난 그냥 여행 겸 가족 방문하러 온 거고. 누가 나 잡아서 인신매매라도 할까 봐 그래?”“이런 뒤 세계는 너처럼 귀하게 자란 공주님이 감히 상상할 수 있는 곳이 아니야. 혼자 여기까지 오는 동안 아무 일도 없었다는 건 네가 운이 좋았던 거야.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겼다면 나만 또 죄책감 때문에 한동안 계속 힘들어했겠지.”말을 마친 성도윤은 서은아를 위아래로 살펴보며 부드럽게 그녀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넌 내 약혼녀잖아. 그러니까 자꾸 나 걱정시키지 마.”“알겠어, 걱정하지 마. 그리고 난 서씨 가문의 장녀야. 그 아무도 날 함부로 대할 수 없어. 봐, 지금도 이렇게 멀쩡하잖아?”서은아는 귀엽게 웃으며 자신의 치마를 살짝 들어 올리더니 제자리에서 한 바퀴 빙 돌았다. 그러고는 옆에 서 있던 차설아를 바라보더니 비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그리고, 설아 씨도 혼자 여기까지 왔잖아. 그렇게 찢어지게 가난하고 힘도 없는 집 딸도 아무렇지 않게 오
“너도 우리랑 같이 가자. 나랑 은아 심심풀이 상대나 해줘.”“???”“싫어?”성도윤은 순식간에 얼굴에 먹구름이 낀 듯한 차설아의 표정을 바라보며 씨익 미소지었다.“싫다면 굳이 강요하진 않을게. 하지만 너도 알 텐데, 난 보통 중요한 얘기는 다 식탁 앞에서만 하잖아.”“싫다니요, 당연히 좋죠. 두 분이랑 함께 식사하게 되다니, 영광이네요.”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려 미소 지은 차설아는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화를 억누르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자신의 오빠와 송지아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알아내야 한다는 일념만 없었다면 차설아는... 지금 당장이라도 눈앞의 성도윤을 때려눕혔을지도 모른다. 그는 차설아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봤던 사람 중 가장 얄미운 사람이었다.“굳이 그럴 필요는 없죠!”서은아가 끼어들어 차설아를 경멸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설아 씨도 아시다시피 저랑 도윤이 정말 오랜만에 만난 거라 단둘이서 나눌 얘기가 참 많아요. 그런데 그 자리에 설아 씨가 끼면, 너무 어색하지 않겠어요?”“하하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다 친구 사이인데 어색할 게 뭐가 있다고요!”차설아는 가식적인 말을 내뱉으며 속으로 힘껏 외쳤다.‘나도 당연히 어색하지, 그런데 나더러 뭘 어떡하라고. 넌 무슨 내가 정말 너희랑 같이 밥 먹고 싶은 줄 아니?!’하지만 이미 여기까지 온 이상 아무리 어색한 자리일 것 같다고 해도 절대 물러설 수 없었다. 차설아는 차라리 아예 뻔뻔하게 행동하는 것을 택했다. 어차피 그녀만 당당하다면 민망하고 어색한 것은 두 사람일 테니까.”“설아 씨!”서은아는 뻔뻔하게 나오는 차설아를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순간적으로 난감해졌다.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성도윤이 내린 결정이었으니 무작정 반대할 수만은 없었다. “그래요, 그래요. 그렇게 눈치 없게 끼고 싶다고 하니, 저야 어쩔 수 없네요. 젓가락 하나 더 올려놓으면 될 일이니까 딱히 상관없어요.”서은아는 일부러 고개를 빳빳이 쳐든 채 아무렇지도 않은 척 말했다.그렇
주위를 둘러보던 차설아는 자신의 의자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옆에 있던 직원에게 말했다.“저기요, 여기 의자 하나만 더 갖다 주실 수 있을까요?”“아, 그게요...”직원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뭐가 문제예요? 손님이 앉을 자리가 없으니까 의자 하나 더 놔달라는 건데 그게 그렇게 어려워요?”직원은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으며 난감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손님, 의자를 가져다드리는 건 아무 문제 없지만, 2인석에 의자를 하나 더 추가하는 건 조금 곤란할 것 같습니다. 저희 매장 분위기에도 안 좋고 다른 손님들 식사하시는 데도 방해될 수 있어서요.”“따지는 게 왜 이렇게 까다로워요?”답답해진 차설아의 말투가 날카로워졌다.“당연히 까다로워야죠...”서은아는 마치 왕실의 왕비라도 된듯한 기세로 성도윤의 맞은편에 앉아 냅킨을 펴며 비꼬았다.“2인석이면 2인석이지, 의자를 추가하는 법이 어디 있어요? 저였다면 제 자리가 없다고 했을 때 눈치껏 다른 곳으로 꺼져줬을 것 같네요. 이런 식으로 직원한테 억지를 부리는 건 경우가 아니죠.”이미 속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던 차설아의 분노는 서은아의 말에 그만 폭발해버리고 말았다.“그래요, 맞아요. 2인석에 의자 하나 추가되면 당연히 보기 거슬리겠지. 그러니까 너도 눈치껏 일어나지 그래!”차설아는 무례한 말투로 서은아에게 쏘아붙였다.“너, 너 지금 그게 무슨 뜻이야? 이 자리는 내 자리야! 그런데 내가 왜 일어나야 해?”서은아는 자신을 밀어내려는 차설아의 행동에 충격을 받은 듯 표정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누가 이 자리가 네 자리라고 했는데? 여기 뭐 네 이름이라도 적혀 있대? 부르면 주인님이라고 대답이라고 해준다니?”“도윤이가 앉으라고 한 거야. 그리고 난 성도윤 약혼녀고, 그럼 당연히 이 자리는 내 자리여야지!”“허, 성도윤이 앉으라고 했다고? 이 자리가 뭐 도윤 씨 아들이라도 된대? 도윤 씨가 부르면 여기서 대답 해주나?”“그, 그건...”차설아의 말에 서은아도 딱히 반박하지 못했다.
테이블 옆에 서 있던 서은아는 티격태격 중인 성도윤과 차설아를 지켜보았다. 겉으로는 싫은 척하면서도 사실은 애정이 뚝뚝 흘러넘치는 것 같은 둘의 모습에 서은아가 주먹을 꽉 쥐었다.“둘이 분위기 좋아 보이네, 도윤아. 오히려 내가 여기 끼어있는 게 어색할 정도야. 둘이 식사 천천히 해. 난 먼저 호텔로 돌아갈 테니까.”말을 마친 서은아가 황급히 자리를 뜨려 했다.하지만 차설아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녀의 손목을 탁 잡고는 웃는 얼굴로 말했다.“어색하다니, 그게 무슨 소리예요. 은아 씨가 여기 남아있어야 우리한테 스테이크도 썰어주고, 와인도 따라주고, 반찬도 이것저것 다 집어줄 거 아니야. 은아 씨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데요.”“차설아 씨, 너무하다는 생각 안 들어요? 이런 일은 원래 차설아 씨가 나한테 해줘야 하는 것들이잖아!”“누가 그래요? 혹시 제가 해드려야 한다고 법으로 정해놨어요?”“도윤이가 그랬어요!”“성도윤이 대체 뭔데 내가 그 사람 말을 다 들어줘야 해요?”“설아 씨!”두 사람의 싸움에 다시 불이 붙을 기미가 보이자 성도윤이 직접 나서서 서은아에게 말했다.“은아야, 여기 내 옆에 와서 앉아.”그 말에 금세 표정이 밝아진 서은아가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역시 도윤이야, 이럴 줄 알았어. 네가 날 저런 곳에 가만히 세워둘 리가 없지.”서은아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성도윤의 옆에 앉아 그에게 몸을 기댔다. 가까이 꼭 붙어 앉은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은 정말 곧 결혼만 남겨둔 천생연분 같아 보였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차설아는 고개를 숙이고 씁쓸해진 마음을 억누르기 위해 물을 한 모금 마셨다.얼마 지나지 않아 직원이 주문한 요리들을 하나씩 테이블 위에 올려놓기 시작했다.이번 양식은 거미 튀김 같은 이상한 음식과는 달리 매우 섬세하고 정교하게 플레이팅 된 고급 요리였는데 보기만 해도 눈이 즐겁고 식욕이 돋았다.하지만 차설아는 배가 고팠음에도 그런 고급 요리들을 온전히 즐기지 못했다. 왜인지 모르게 입맛이 떨어져 음식을 씹어도 양초
“왜 또 내일 아침으로 미루는 건데요?”차설아는 속으로 수많은 욕설을 삼키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이쯤 되니 그녀는 성도윤에게 의심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이 남자는 처음부터 자신에게 진실을 얘기해줄 마음이 없었고 그저 이 일을 빌미로 자신을 갖고 논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내일 아침이면 얘기해줄 수도 있고, 안 해줄 수도 있고.”두 손을 호주머니에 찔러넣은 성도윤이 무표정으로 말했다.“그래봤자 나한테는 네 오빠랑 다른 사람 사이의 원한을 대신 풀어줄 의무가 없거든.”“도윤 씨...”성도윤의 답변에 차설아의 말문이 막혀버렸다.이 남자는 정말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변덕스러운 사람이었다. 말 바뀌는 속도가 책장 넘기는 것보다 빨랐다.하지만 그럼에도 차설아는 뒷일을 위해 꾹 참기로 했다.“그래요, 그럼. 내일 얘기해줘도 돼요. 그럼 저도 피곤하니까 이제 푹 쉴 수 있겠네요.”그렇게 호텔로 돌아온 차설아는 바로 침대 위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최근 들어 걱정거리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기던 탓에 차설아는 이미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지금 그녀의 상태는 베개에 머리만 대면 잠들 수 있는 상태였다.그리고 성도윤과 서은아의 쪽은 문제가 조금 복잡했다.두 사람은 한 스위트룸을 이용하고 있었지만 한 사람은 거실에서 신문이나 뒤적이고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섹시한 빨간 잠옷을 입은 채 침대에 누워 상대를 기다리고 있었다.서은아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몸에 향수를 여러 번 뿌리고 있었다.향수 이름은 ‘크레이지 인 러브’로, 서은아가 꽤 특별한 경로를 통해 비싼 값을 주고 구매한 것이었다.이 향수를 뿌린 여자는 자신의 매력을 극대화해 이성을 완전히 유혹할 수 있게 되고 두 사람이 함께 뿌리면 둘은 마치 실과 바늘처럼 서로 끌리게 된다고 한다.이런 방법까지 쓰는 게 조금은 치사해 보일 수도 있지만 서은아도 어쩔 수 없었다.그녀는 성도윤과 결혼을 약속한 사이였고 성도윤 역시 서은아를 깊게 사랑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하지만... 둘 사
“차설아, 우리 이혼해.”등 뒤에서 성도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을 때 차설아는 스테이크를 굽고 있었다.지글거리는 뜨거운 기름이 얼굴에 튀었지만, 아무런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우리는 명의상 부부일 뿐 정은 없잖아. 이제 4년이란 시간도 채웠으니, 이쯤에서 끝내자.”얼음장처럼 차가운 남자의 목소리는 왠지 모르게 소외감이 느껴졌다.차설아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드디어 이날이 왔군.’4년 전 차씨 집안이 파산당하면서 그녀의 부모님은 부담감에 못 이겨 아파트에서 뛰어내렸고, 결국 차설아는 홀로 모든 뒤처리를 감당하게 되었다.차설아의 할아버지와 성도윤의 할아버지는 함께 전쟁을 치른 전우였고, 차설아의 할아버지가 전쟁터에서 성도윤의 할아버지를 구해준 적이 있었다.차설아의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계속 눈에 밟히던 사람이 바로 어린 손녀딸이기에 성도윤의 할아버지한테 잘 좀 챙겨달라고 신신당부했다.그래서 이런 유명무실한 혼인을 치르게 된 것이다.다만 어느 순간부터 그녀는 결혼 생활을 이어가면서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버렸고, 성도윤한테 푹 빠졌다.그녀는 시간이 지날수록 ‘아내’라는 역할만 충실히 이행한다면 언젠간 그의 마음을 얻을 거로 믿었다.하지만 이혼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너한테 보상으로 800억이랑 동탄구 아파트 펜트하우스를 줄게. 이건 이혼 신고서야. 별다른 문제 없다면 사인해.”성도윤은 무표정한 얼굴로 차설아에게 서류 더미를 건넸다. 대수롭지 않은 그의 태도는 마치 이혼마저 하나의 사업처럼 여기는 것 같았다.차설아는 서류를 건네받아 일련의 숫자를 내려다보았다.4년에 800억이라...성씨 집안은 역시나 씀씀이가 달랐다.“꼭 해야겠어?”차설아는 서류를 내려놓고 눈앞의 남자를 올려다보았다.그녀가 4년 동안 사랑한 남자는 조각 같은 외모에 훤칠한 몸매를 가졌는데, 매사에 진지하고 끊고 맺음이 분명했다. 그는 마치 전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처럼 닿을 수 없는 그런 존재이다.“응.”성도윤의 싸늘한 음성에는 일말의 망
어쩐지 성도윤이 오늘 밤에 나가라고 하더니, 새로운 애인을 집에 빨리 들이기 위해서일 줄이야!아까 고작 이런 남자 때문에 가슴 아파한 자신을 떠올리자 머리를 쥐어뜯고 싶은 심정이었다.임채원은 도도하게 차설아 앞으로 걸어가 거만한 말투로 쌀쌀맞게 말했다.“당신이 차설아야? 아직도 안 갔어? 도윤이가 가라고 하지 않았나? 여태껏 미적거리며 버티고 있었던 거야? 뻔뻔스럽기도 하네.”차설아는 그녀의 도발 따위 가뿐히 무시하고 계속해서 땅바닥에 널브러진 짐을 챙겼다.“이봐, 당신 귀먹었어? 내 말 안 들려?”“미안, 못 들었어.”차설아는 그제야 고개를 들고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개가 멍멍 짖는 소리만 들렸거든.”“감히 나한테 욕한 거야?!”“내가 언제 욕했어? 본인이 직접 인정하는데 나라고 별수 있나?”말을 마친 그녀는 캐리어를 끌고 길을 막는 임채원을 향해 고개를 까닥했다.“비켜줄래? 사람이 지나가면 개도 눈치껏 피해준다고.”“이...!”임채원은 화가 나서 발발 동동 굴렀고,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전설 속 성씨 집안 둘째 며느리는 동네북으로 소문났을 텐데, 입이 이토록 거침없을 줄이야!이를 본 도우미가 쪼르르 달려가 아첨하기 급급했다.“채원 양, 화 푸세요. 집에서 쫓겨난 여자 때문에 몸이라도 상하면 본인만 손해잖아요. 앞으로 이 별장의 안주인은 채원 양이라고요, 저 여자는 아무것도 아니죠. 둘째 도련님의 부탁대로 채원 양이 지낼 방을 마련했으니 지금 바로 안내해 드릴게요.”도우미의 말이 기분이 풀어진 임채원은 차설아를 공기 취급한 채 도우미를 따라 별장으로 들어갔다.매서운 찬바람이 불어닥치는 밖에 또다시 차설아만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눈앞의 웅장한 저택을 바라보는 그녀의 마음은 착잡하기 그지없었다.이곳에서 4년이란 시간을 보냈는데 결국엔 이처럼 초라한 결말을 마주하니, 정말 아이러니했다!“안녕!”차설아는 심호흡을 크게 하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그날 밤 도심으로 올라온 그녀는 원룸을 계약했다.비록 방이 크지는
다음날.9시에 만나기로 약속했지만, 차설아는 8시 30분부터 구청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그녀는 일찍 도착한 건 물론 화장까지 정성껏 했다. 그리고 제일 좋아하는 빨간색 롱드레스를 입고 그동안 풀어헤쳤던 머리카락마저 높게 묶어 백조처럼 길고 하얀 목덜미를 훤히 드러냈다.멀리서 보면 여신이 따로 없었고, 우아하면서도 시크하고 기품이 흘러넘쳤다.하지만 그날 밤 찬바람을 맞아서 그런지 열이 살짝 난 탓에 컨디션이 좋은 편이 아니었다.9시 정각이 되자, 은색 부가티 베이런이 지상 주차장으로 천천히 들어섰다.성도윤은 싸늘한 얼굴로 차에서 내렸다.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는 차설아를 발견하자 그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지만, 이내 알 수 없는 불쾌감이 몰려왔다.“꽤 적극적이네?”성도윤은 무심한 표정으로 차설아를 스쳐 지나가 기다란 다리로 접수창구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별난 놈이야.’차설아는 듬직하면서도 어딘가 쌀쌀맞아 보이는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몰래 생각했다.‘뒤꽁무니에 불이라도 붙은 줄 알았네! 자기도 급하게 가면서 왜 나한테만 뭐라 그래?’이혼 신고는 생각보다 빨리 처리되었다. 사인하고 날인하는 데 10분도 안 걸렸다.“새로 도입된 법에 따르면 이혼하고 나서 한 달 동안 숙려기간이 있는데, 등록일로부터 30일 이내에 이혼을 원치 않은 사람이 있다면 둘 중에서 아무나 접수증을 들고 와서 취소해도 돼요.”구청 직원은 말을 마치고 이혼 접수증 2부를 각각 나눠줬다.매일 매일 이혼을 접수하면서 울고불고 심지어 현장에서 싸우기는 별의별 상황을 다 접했지만, 이렇게 무덤덤하게 처리하는 부부는 처음 본다.게다가 남자는 키도 크고 잘생기고, 여자는 날씬하고 예쁘기만 한데 누가 봐도 잘 어울리는 한 쌍이 어쩌다 이혼까지 하게 되었단 말인가?차설아는 접수증을 건네받아 빼곡히 적힌 내용을 들여다보자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이혼할 때 숙려기간이 있으면서 결혼하기 전에는 왜 없대? 만약 혼인 신고할 때 숙려기간이 있다면...”성도윤의 얼굴이 어두워지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