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시장은 크지 않았는데 앞뒤를 합쳐도 겨우 몇백 미터의 길이에 불과했지만 안에는 옷가지부터 수공예품까지 여러 가지가 있었다.차설아는 도자기 노점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다양한 모양의 컵과 접시가 있었는데 이 컵과 접시는 모두 도자기 재질이어서 무늬가 정교하고 섬세하며 고풍스러운 느낌이 들어 매우 보기 좋았다.그러다 그녀는 복잡한 무늬 없이 은은하게 검은색으로 물들여 태극 음양을 이루는 듯한 흰색 잔이 눈에 들어왔다.“사장님, 이 잔 디자인이 재밌는데요.”차설아는 잔을 가리키며 신이 나서 말했다.“아가씨, 안목이 좋으시군요!”노점 주인은 비록 외국인이지만 동양 문화의 팬이었다. 차설아가 물건을 알아보니 사장은 끊임없이 말하기 시작했다. “이 컵의 도안은 매우 정교하죠? 머나먼 동방 대국에서는 태극이라고 합니다. 태극은 매우 현묘한 물건인데 세상 만물을 설명할 수 있죠. 흑에는 백이 있고 백에는 흑이 있는데 서로 분리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융합된 하나죠. 서로 배척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끌어당기고 있는걸요. 둘 중 누구도 누구를 억압할 수 없고 누구를 떠날 수 없죠...”“태극이라...”차설아는 흑백이 분명한 잔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왠지 모르게 그녀와 성도윤이 생각났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대립을 세우면서도 서로에게 끌리는 것을 억누를 수 없었다.그녀는 노점상에게 컵을 가져다 달라고 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차가운 목소리가 머리 위로 떨어졌다. “이 컵, 제가 살게요.”차설아는 눈썹을 찡그리며 정색을 하고 돌아섰다. “죄송한데 이 잔은 제가 먼저...”뒤돌아보니 남자의 그윽한 눈동자와 부딪혔고 그녀는 마치 혼이 사라진 것처럼 멍하니 거기에 서서 생각할 수도 움직일 수도 없고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성도윤은 차설아보다 무려 30㎝나 더 컸는데 그는 큰 산처럼 절대적인 압박감을 가지고 있었고 그의 뒤에는 따스한 아침 햇살이 그를 빛나게 했고 눈부시게 비현실적이었다.“하지만 돈은 내가 먼저 냈는걸요.”성도윤은 유로 다발을
성도윤은 황급히 도망치는 그 아름다운 모습을 보면서 깊은 생각에 잠겼다.왜 분명 낯선 여자인데 그는 익숙한 느낌이 드는 걸까?“아는 사이인가요?”노점 주인이 잔을 포장하며 성도윤에게 건네며 궁금한 듯 물었다.“아니요, 모르는 사람입니다.”성도윤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전 어쩐지 두 사람이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고 많은 사연이 있었던 것 같다는 기분이 드는데요?”노점 주인은 미소를 지으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혹시 저 여자를 아십니까?”성도윤은 노점 주인을 돌아보며 호기심을 느꼈다.“이 마을에서 제인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노점 주인은 차설아를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고 아직도 안타까운 마음이 컸다.그날, 마을에 갑자기 큰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는데 마을의 길은 원래도 기복이 심하고 울퉁불퉁하여 걷기조차 힘이 들었다. 그녀는 한 남자가 앉아있는 휠체어를 밀며 빗속에서 사방에 도움을 청했는데 그들의 차가 고장이 났으니 누군가가 그들을 태워주기를 바란다고 했다.거동이 불편하고 실명한 남자를 돌보는 약한 여자, 어찌 인상적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그래서요?”성도윤은 노점 주인이 계속 말하기를 바라면서 걸음을 멈추었다.그때 서은아가 장터 저편에서 달려왔다.“자기야, 어디 갔었어. 한참 찾았잖아.”그녀는 성도윤의 품에 안기며 어린 소녀처럼 남자의 팔짱을 끼고 응석을 부렸다.“앞에 아주 유명한 카페가 있대, 거기 가자.”“당신 주려고 잔을 하나 샀어.”“성도윤은 그 흑백의 작은 잔을 서은아에게 건네주며 말했다.“당신 결벽증이 있잖아. 마침 이 잔으로 커피를 마실 수 있겠다.”“와, 예쁘다~ 마음에 무척 들어.”서은아는 성도윤을 끌어안고 뽀뽀를 했고 이가 녹아버릴 정도로 달콤했다.지난 반년 동안 너무 행복해 조금은 비현실적이었다. 남자는 단 한 번도 차설아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고 그의 눈에는 그녀밖에 없었다. 마치 그 여자가 그의 인생에 나타난 적이 없는 것 같았다.서은아는 매일 기도했다. 이야기가 여기서 끝나고 그
차설아는 셔틀버스를 타고 산기슭에 있는 오두막집으로 돌아갔다.이웃집 존스 씨는 황망히 뛰어나와 초조해하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제인, 드디어 돌아왔군요. 빨리 와서 진한테 가봐요. 큰일 났어요.”“네?!”차설아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차에서 빨리 내려 오두막집을 향해 다급하게 달려갔다.걸음이 너무 빨라 중간에 넘어져 무릎이 까지고 과일과 채소가 바닥에 굴러떨어지기도 했다.“제가 방금 돌아서서 주스 한 잔 따르려고 했는데 진씨가 체리나무에 올라갔다가 넘어져서 정신을 잃었어요!”존스는 차설아를 따라 뛰면서 상황을 설명했다.오두막집 마당에는 해바라기 꽃 외에 키가 큰 체리나무가 하나 더 있었는데 지금은 체리가 익을 때였고 나무에 달린 체리는 달고 즙도 많았는데 크기도 엄청나게 커 엄지손가락만 했다.차설아는 줄곧 이 체리 나무를 탐냈는데 어찌나 큰지 따기가 쉽지 않았다. 언젠가 존스의 사다리를 빌려 한 끼 배불리 먹으려던 참이었는데 성진이 그녀보다 한발 앞설 줄 생각지도 못했다...“성진!”차설아는 멀리서 성진이 체리 나무 밑에 쓰러져 있는 것을 보았고 그의 손에는 크고 붉은 체리 몇 개가 꽉 쥐어져 있었다. “뼈를 다쳤는지 몰라 못 건드렸는데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구급차를 불렀어요.”존스는 차설아의 어깨를 툭툭 치며 나지막하게 위로했다.이 두 남녀는 반년 전에 이 마을로 이사 왔을 때부터 마을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다.연약한 여자가 눈이 먼 장애인 남자를 데리고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고 그래서 모두가 기꺼이 그들을 도왔다.“성진...”차설아는 눈시울을 붉히며 남자의 손을 잡았다.“다 내 탓이야, 내가 장터까지 데리고 갔어야 하는데 내가 너무 소홀했어.”구급차가 곧 도착했고 그들은 성진의 기초적인 상처를 치료한 후 들것에 실어 읍내 병원으로 향했고 차설아도 자연스럽게 함께 갔다.한바탕 소란 끝에 의사는 성진이 허리를 다쳐 보름간 침대에 누워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진단했고 지금은 장기간 빈혈과 허약함으로
시각장애인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고정된 생활환경의 변화라 할 수 있다.반년 동안 살았던 오두막은 그의 껍데기였고 그는 껍데기 속에 숨어 있어야만 안전하다고 느꼈다.“환자분, 진정하세요. 허리를 다쳤으니 한동안 안정을 취해야 합니다. 안심하세요, 저희가 잘 돌봐 드리겠습니다.”간호사가 참을성 있게 그를 달래고 있었다.하지만 성진은 오히려 조울증 환자처럼 갑자기 손을 휘둘렀다. “꺼져, 난 당신들의 보살핌이 필요 없어, 모두 꺼져!”“가족은, 내 가족은 어디 있어? 난 내 가족만 있으면 돼!”남자의 목소리에는 버림받은 어린아이 같았는데 자신이 버림받았을까 봐 초조함과 절망감이 배어 있었다.간호사는 좀 난처했다. “죄송하지만 가족분... 환자분 가족분은 저희도 어디 있는지 모릅니다. 제가 왔을 때 이 병실에는 환자분 혼자였어요.”성진의 표정은 잿빛으로 변했고 그는 큰소리로 거의 빌듯이 간호사에게 말했다.“내가 돈을 줄게요. 그러니 날 다시 데리고 가줘요. 나는 당신에게 많은 돈을 줄 수 있어요. 내가 집에 없으면 설아가 걱정할 거예요. 내가 부탁할게요.”“정말 안돼요, 가족분의 번호가 있으세요? 제가 그분한테 전화 한 통 해드릴까요? ”“그게, 설아의 번호가...”성진은 차설아의 번호를 말하려다 문득 무언가를 깨닫고 얇은 입술을 오므리고 잠자코 있었다.“가족분의 번호가 어떻게 되세요?”“됐어요, 그럴 필요 없어요.”성진은 갑자기 조급함에서 평온함으로 변했다.만약 그녀가 정말 그를 버리고 싶다면 그녀를 돌아오게 해도 의미가 없었다.반년 동안 보살펴 준 덕분에 그는 이미 본전을 뽑았다고 생각했다, 설사 그녀가 정말 가버렸다 해도 그는 그녀를 탓하지 않을 것이다.차설아는 크고 작은 가방을 들고 병실 문을 열고 들어왔는데 성진이 잠에서 깨어있는 것을 보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깨어났구나, 놀랐잖아.”성진은 축 늘어져 있다가 갑자기 다시 살아났고 잘생긴 얼굴은 즉시 생기로 가득 찼다, “당신, 안
성진은 마침내 잠이 들었고 입가에는 옅은 미소를 머금었는데 안심하고 달콤한 표정이었다.그는 어린아이처럼 차설아를 그의 삶의 전부로 삼았다.차설아가 있을 때는 하늘도 맑고 바람도 부드럽고 공기도 달았다.하지만 차설아가 사라지면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는데 그는 살아갈 의욕조차 없었다.그는 자신이 병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점점 중독되어 빠져나갈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차설아는 잠든 남자를 말없이 바라보며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힘든가?당연히 힘들지, 어떻게 안 힘들 수가 있겠는가.몸만 힘든 게 아니라 마음도 피곤했다.성진은 원래 미치광이여서 일을 하는 것이 매우 극단적이었는데 예전에도 너 죽고 나 죽자는 가치관을 내세워 항상 질서정연한 국면을 엉망으로 만드는 것을 좋아했다.지금은 착한 아이가 되어버렸는데 더 이상 날뛰지 않고 미친 듯이 비판하지도 않고 오직 그녀만을 하늘로 여기는 것이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하지만 성진이 그럴수록 차설아의 심리적 압박은 더욱 커졌다.어쩐지 그가 너무 불쌍하고 그런 억압 속에 있는 소심함이 안쓰러웠다.그리고 이 모든 것은 그녀가 초래한 것이다.그러다 낮에 성도윤을 우연히 만난 장면이 떠올라 괜히 짜증이 났다.왜 분명히 만나서는 안 될 사람이 그녀의 평온한 삶에 침입하여 그녀의 평온한 마음을 어지럽히는가 말이다.결국은 그녀 스스로 생각을 정리하지 못했을 뿐이다... 정말 가증스럽다.차설아는 병실을 나와 어두컴컴한 복도 입구에 이르러 담배에 불을 붙였다.이따금 피어오르는 불은 엷은 연기와 함께 어둠 속에서 사라졌다.니코틴 냄새가 그녀의 뇌를 좀 풀어주었다.지난 반년 동안 심리적 압박감이 컸는지 그녀는 담배를 배우기 시작했다.그녀는 이것이 좋은 습관이 아니라 그녀의 건강을 해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여전히 참을 수 없었다.있어서는 안 되는 감정처럼 일단 생기면 재앙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그러다 간호사 두 명이 와서 담배 한 개비에 불을 붙이고 잡담을 하기
“오, 그러네. 제인 이네? 이제야 제대로 보인다.”두 간호사 모두 차설아한테 유난히 다정하고 따뜻했다.병원 전체에서 차설아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차설아는 반년 동안 자주 성진을 데리고 병원에 왔기 때문에 모두 그녀를 잘 알고 있었다.차설아는 그들과 또 몇 마디 인사말을 주고받더니 이번에는 서은아의 수술실이 어디인지는 물론이고 서은아와 성도윤이 어느 호텔에 묵고 있는지까지 알게 됐다.“얘기하고 있어요. 전 진이 어떻게 되었는지 보러 갈게요.”차설아는 담배 한 대를 피우고 두 간호사에게 인사를 한 후 복도를 떠났다.그녀는 원래 성진이 있는 층으로 가려고 했는데 귀신같이 서은아의 수술이 있는 층으로 오게 되었다.복도 모퉁이에 몸을 숨긴 채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자 수술실 앞을 지키고 있는 성도윤이 눈에 들어왔다.낮에 우연히 만났을 때의 캐주얼한 흰 셔츠에는 얼룩덜룩한 핏자국이 물들었고 그의 손에도 핏자국이 남아 있었는데 씻을 틈이 없었던 것 같았다.그가 정말 긴장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표정도 어두웠다.따지고 보면 그가 서은아를 병원에 데려온 후 지금까지 대여섯 시간이 흘렀다.그 뜻인즉슨 대여섯 시간 동안 쉬지 않고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다는 얘기다...이 녀석도 겨우 나은지 반년밖에 안 됐는데 또 몸을 망치기 시작하다니... 그녀는 그런 그를 초조하게 보고 있었다.차설아는 입술을 깨물며 잠시 생각하더니 아래층으로 내려가 그녀가 자주 찾는 근처 중식당으로 달려가 해물 완탕 한 그릇을 포장했다.그녀의 기억이 맞다면 중국 음식을 좋아하지 않는 그는 완탕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데 특히 해산물 냄새를 맡으면 식욕이 돋울 것이다.수술실 문 앞에 성도윤은 가슴이 타들어 가는 듯했다.시간은 1분 1초가 지났고 안에는 여전히 인기척이 없었다.“다 내 탓이야!”만약 그가 서은아에게 그 컵을 선물하지 않았다면 그녀는 그 컵을 주우러 가기 위해서 차에 치이지 않았을 것이다.달콤한 신혼여행을 위해 두 사람은 가장 낭만적인 도시를 골라 세기의 결
복도 모퉁이에서 차설아는 혼돈을 다 먹어치운 성도윤을 보고 흐뭇하게 웃었다.그래, 사람은 밥심인데 아무리 애타는 일이라도 굶으면 안 되는 거 아니겠는가그렇게 또 몇 시간이 흐른 뒤 드디어 수술실 문이 열렸다.의사가 걸어 나오자 성도윤이 쏜살같이 의사를 맞았다.“안심하세요, 수술은 잘 됐습니다. 다만 허리와 다리에 심한 상처를 입어서 한동안 누워 휴식을 취해야 합니다.”의사가 성도윤을 향해 말을 이었다.“그동안은 가족들이 잘 돌봐줘야 할 겁니다.”“다행이에요, 정말 다행이에요.”순간적으로 성도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마음속의 큰 돌멩이를 내려놓을 수 있었다.구석의 차설아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키고 말았다.서은아도 허리에 큰 상처를 입었다고? 공교롭게 말이야...더욱 공교로운 일을 차설아는 모르고 있었다. 바로 정형외과 병실이 모두 같은 층에 있다는 것이었는데 그 뜻은 성진과 서은아의 병실이 같은 층에 있다는 거다.그러면 그녀와 성도윤은 조만간 곧 만나게 될 것이다.차설아는 이런 난처한 상황을 마주 하고 싶지 않아서 가능한 한 일찍 나가고 늦게 돌아오는 것을 선택했고 항상 성진과 붙어있었는데 부득이하게 필요한 것이 있으면 모두 간호사에게 도움을 청했다.그 노력으로 2, 3일이 지나도록 그녀는 성도윤과 마주치지 않았다.그러던 어느 날 서은아의 병실.성도윤은 여자에게 사과를 깎아주고 있었고 서은아는 온몸이 아파 죽을 것 같았지만 마음만은 달콤했다.간호사가 와서 서은아의 링거를 바꿔주었다.간호사는 성도윤이 서은아에게 사과를 먹여주는 것을 보고 입을 열었다.“서은아 님한테 정말 지극정성이신 것 같아요. 동양인들의 사랑은 모두 이렇게 아름답고 따뜻한가 봐요.”“사랑은 다 따뜻하고 달콤한 것 아녜요? 사랑에 동서양을 나누나요?”서은아가 웃으며 대답했다.“저도 원래 동양과 서양을 구분하지 않았는데 제가 최근에 만난 또 다른 커플도 동양인이어서요, 아마도 그래서 그런 생각이 든 것 같네요...”“저희 마을에는 모범커플이라고 할 수 있
“성도윤 님, 여기 완탕이요. 뜨거울 때 드세요.”간호사가 뜨끈뜨끈한 완탕을 식탁에 놓으며 말했다.“감사합니다.”성도윤은 고개를 끄덕였고 입에는 이미 군침이 돌았다.습관이란 게 참 무서운 것인 것 같다. 얼마 지나지도 않은 것 같은데 벌써 이 완탕이 기다려지니 말이다.서은아는 간호사를 힐끗 보더니 갑자기 위기감이 몰려왔다.“어디서 난 완탕이죠? 이건 동양인들이 즐겨 먹는 거잖아요? 저도 한 그릇 주시면 안 돼요?”“그건 안 됩니다.”간호사가 단칼에 거절했다.이 완탕은 제인이 특별히 성도윤한테 사다준 것인데 한 그릇 더 만들어 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왜 안 되죠? 혹시 제 약혼자를 위해 만든 거예요? 그렇다면 정말 오지랖도 넓으신 거 아닌가요?”“그... 저...”간호사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그러자 옆에서 지켜보던 성도윤이 입을 열었다.“당신이 아직 회복기라 해산물 못 먹는대.”“네, 맞아요. 상처가 아직 다 낫지 않아 해산물을 드시면 염증이 심해질 수 있어요.”간호사는 한숨 돌렸다.“안 먹어도 되는데... 이 완탕이 어디서 났는지는 알려줄 수도 있는 거 아닌가요?”서은아는 여전히 포기를 몰랐다.지금 성도윤의 곁에 나타난 모든 여자는 다 그녀의 적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녀는 반드시 정신을 차려야 했다.“저희 구내식당에서 만든 거예요. 동양인들을 위해 만든 거죠.”간호사는 어색하게 대답했는데 거짓말에 능숙하지 않아 보였다.“진짜요?”“그럼요.”“그럼 지금 해물 완탕 하나만 해줘요. 먹지 않고 냄새만 맡으면 되잖아요.”“그, 그게...”성도윤은 서은아가 간호사를 난감하게 만드는 것을 보고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농담 그만해. 요즘 당신 보살피느라 고생 많이 하셨어.”그러고는 간호사를 향해 말했다.“이만 나가봐요, 여긴 내가 있으니까.”간호사가 병실을 나간 후 서은아는 화가 난 듯 고개를 돌렸다.“왜 그래?”성도윤이 침착하게 그녀를 달랬다.“내가 완탕 한번 먹었다고 화낼 거야? 당신이 내가
다음날.아침햇살이 비추는 섬은 몽롱하고 매력적이었다.아침 조깅하는 습관 있는 배경윤은 다들 자고 있을 때 이미 일어나 뛰고 있었다.산 주위를 따라 2킬로 정도 뛰면서 땀에 흠뻑 젖은 그녀는 개운한 느낌이었다.산 중턱에 있는 전망대에 서서 파란 바닷가를 보고 있자니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이었다.“좋은 아침이에요.”배경윤이 기지개를 켜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 뒤돌아보았더니 진찬영이었다.“이런 우연이. 찬영 오빠도 조깅하러 오셨어요?”진찬영을 향해 손을 흔드는 그녀의 얼굴은 자기도 모르게 발그레해졌다.어제저녁 진찬영이 대놓고 고백하는 바람에 두 사람 사이의 장벽이 무너져 이제는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몰랐다.“우연이 아니라...”진찬영은 오늘 흰 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살짝 가르마를 탄 머리 스타일을 하고 있어 청춘 로코물에 나오는 여주인공이 잊지 못하는 킹카처럼 보였다.그는 난간을 잡고 옆모습으로 의미심장하게 배경윤을 쳐다보았다.“저번에 경윤 씨가 조깅하는 습관이 있다고 들어서... 일부러 만나려고 온 거예요.”배경윤과 이곳에서 만나려고 그녀보다 한 시간이나 더 일찍 일어난 것이다.그때는 아직 날도 밝지 않았던 때였다. 그는 혼자서 산 중턱에 있는 전망대로 올라와 하늘이 서서히 물들어지는 것을 보면서 세상이 참 아름답다는 느낌이 들었다. 속으론 배경윤과 함께 이 경치를 보면 얼마나 좋았겠냐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배경윤이 흔들린 표정으로 말했다.“그런데 제가 이 코스를 달릴지 어떻게 알았어요? 그러다 못 만나면요?”“만나지 못해도 아쉬운 대로 아름다운 경치를 봤잖아요.”진찬영은 고개돌려 전방에 있는 아름다운 경치를 보면서 부드럽게 말했다.“저는 어떤 일이든 결과를 바라지 않아요. 과정만 아름다우면 된 거예요. 그리고 결국엔 경윤 씨를 만났잖아요.”배경윤은 잘생긴 그의 옆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따뜻해지는 느낌에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그렇다. 결과보다는 과정만 아름다우면 되었다.이 부분에서는 진찬영과 생각이 똑
“에헴!”하늘을 신경 쓰지도 않던 사도현은 두 사람이 신나게 이야기하고 있길래 질투심을 느꼈다.하늘도 그제야 선을 넘었다는 것을 눈치채고 바로 입을 닫으면서 자세를 고쳐잡았다.“죄송해요. 경윤 씨, 저는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어요. 다른 사람을 선택해 보세요.”“그게 뭐 어때서요? 어차피 저희 서로 선택하는 과정이잖아요. 하늘 씨가 마음에 들어 하는 분과 셋이 함께 스노클링하면 되잖아요. 둘이든 셋이든 저는 상관없어요.”배경윤이 웃으면서 말했다.그녀는 하늘이 컨트롤하기 쉬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거기다 제일 안전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진찬영에게 폐를 끼치지도 않고 사도현도 어쩔 수가 없었다.“그래요? 경윤 씨는 정말 내일 아침 제가 마음에 들어 하는 사람과 함께 스노클링할 수 있는 거예요?”하늘은 억울한 강아지처럼 순진한 표정으로 배경윤을 쳐다보고 있었다.“그럼요. 저는 마음이 넓은 사람이에요. 3각 구도는 제일 안정적이니까요.”배경윤이 익살스럽게 말했다.이렇게 말하면 안 된다는 걸 알지만 입이 자기 말을 듣지 않았다.“그래요. 그러면 내일 경윤 씨, 저, 그리고 제가 마음에 들어 하는 분, 세 명이 함께 스노클링하는 거예요. 마음이 변하면 안 돼요.”“걱정하지 마세요. 절대 빠지는 일이 없을 거예요. 제가 빠지면 평생 짝을 찾지 못할 거예요.”배경윤은 하늘에 대고 진지하게 맹세했다.이때 하늘이 진지하게 말했다.“사실 제가 마음에 들어 하는 사람은 사도현 씨에요. 그리고 오늘 모든 사람 앞에서 사실대로 말했고요.”사도현이 눈썹을 움찔하더니 웃을 듯 말 듯 한 표정으로 배경윤을 쳐다보았다.“저희 내일 봐요.”‘왜 이렇게 된 거지?’배경윤은 흐뭇한 표정의 사도현을 보면서 그가 일부러 함정을 파놓았다고 의심하기 시작했다.바로 이때, 진찬영이 입을 열었다.“3각 구도가 안정적이긴 하지만 재미가 없잖아요. 저도 끼워주시면 안 돼요?”진찬영은 사도현을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사도현을 쳐다보았다.“제가 마음에 들어 하는 분은 배경윤
“처음 그대를 만났을 때 다부진 몸매에 끌려 그대를 쭉 지켜보게 되었어요. 텔레비전에 나오는 그대의 모습을 보면서 심장이 떨려왔어요. 자신감이 넘치는 그대가 유독 빛나 보였거든요. 그대는 정말 멋진 사람이에요.”하늘은 배경윤이 쓴 편지를 천천히 읽으면서 진찬영을 힐끗 쳐다보았다. 남성 참가자 중에서 진찬영이 텔레비전에 가장 많이 나왔기 때문이다.진찬영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앉아 있었다. 사도현은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고 당장이라도 한 대 때릴 것 같은 모습이었다.“첫인상 1위가 누구냐고 물으면 그대라고 하고 싶어요. 하늘 씨, 앞으로 우리 잘 지내봐요. 하늘 씨랑 좋은 인연을 이어가고 싶어요. 하늘 씨의 마음도 궁금해요. 단둘이 얘기 나누고 싶어요.”편지를 다 읽은 하늘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하늘은 부끄러워하면서 머리를 긁적였고 배경윤을 쳐다보면서 물었다.“경윤 씨, 언제부터 저한테 호감이 생긴 거예요?”하늘을 포함한 게스트들은 전부 두 눈을 크게 뜨고 배경윤을 쳐다보았다. 많은 일이 일어났지만 배경윤은 사도현, 진찬영이 아닌 뜬금없는 하늘한테 고백했던 것이다.[지금 사람 마음 갖고 장난하는 거야? 거짓말하지 마. 누구한테 마음이 있는지 다 보이는데 왜 저러는 거야?][이거 대본 맞지? 대본의 냄새를 맡았어. 제작진한테 너무 실망이야.][대본이든 말든 나는 사도현과 배경윤이 이어지길 기도할 거야. 두 사람 진짜 잘 어울리잖아. 이러다가 진짜 이어져서 결혼할 수도 있어.][결혼이라니, 너무 앞서간 거 아니야? 사도현이 혼자 짝사랑하는 것 같아. 배경윤은 진찬영을 더 좋아한다고!]네티즌은 댓글 수백 개씩 달면서 열렬하게 토론했다. 진찬영의 평온한 얼굴에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사도현도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사도현은 하늘을 쳐다보면서 피식 웃더니 입을 열었다.“내가 열렬하게 구애했는데도 하늘 씨한테 졌어요. 정말 아쉬워요.”“사도현 씨, 제 말 좀 들어봐요. 경윤 씨가 장난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그래요. 저는 오늘 경윤 씨랑
배경윤은 먼저 손을 내밀었다. 진찬영은 배경윤이 손을 아무리 뻗어도 닿을 수 없는 존재였다. 그동안 꾸준하게 좋아했던 연예인이기도 했다.배경윤은 그동안 진찬영과 지내면서 연예인이 아닌 사람으로서의 매력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열정적인 팬에서부터 진찬영을 좋아하는 여자가 되었다.가끔 진찬영과 손을 잡고 천천히 늙어가는 평화로운 삶을 그리기도 했었다.진찬영은 자신을 향해 뻗은 배경윤의 손을 보고 환하게 웃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불쾌함을 전부 씻어버리고 손을 잡으려고 했었다.그런데 이때 사도현이 갑자기 나타나서 배경윤의 손을 잡았다.“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 다들 기다리고 있어요. 오늘 밤에 가장 중요한 것이 남아있으니 아무도 빠지면 안 된다고 했어요.”말을 마친 사도현은 진찬영을 힐끗 쳐다보고는 씩 웃었다. 그리고 배경윤을 데리고 게스트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이 손 안 놔? 누구 마음대로 내 손을 덥석 잡는 거야? 때리기 전에 놔줘.”배경윤은 살기가 넘치는 눈으로 사도현을 쳐다보면서 주먹을 꽉 쥐었다. 당장 사도현을 바다에 던져버리고 싶었다.사도현은 진찬영과 배경윤이 한 발짝 더 가까이 가려고 하면 어김없이 나타나 훼방했다.“내가 잡고 싶어서 잡은 줄 알아? 제작진이 너를 데리고 오라고 했어.”사도현은 게스트들의 주목을 받으면서 배경윤을 데리고 왔다. 그러고는 사회자 최빈을 향해 말했다.“다 모인 것 같으니 시작하죠.”최빈은 뒤쪽에 서 있는 진찬영을 향해 손을 흔들면서 말했다.“찬영 씨, 얼른 이쪽으로 오세요. 곧 고백 편지를 쓰는 시간을 가질 거예요.”>은 매일 밤에 게스트들이 모여 앉아 호감이 있는 사람한테 진심이 담긴 편지를 써야 했다. 다 쓴 편지는 추첨함에 넣고 제작진이 지목한 게스트가 나와서 뽑은 편지를 읽으면 되었다.낯부끄러운 시간이었지만 시청자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하루 종일 붙어 있으면서 게스트들의 마음이 어디로 향했는지 아주 궁금했다.마음을 편지에 담아 공개하기에
배경윤은 초가집의 뒷문으로 나온 뒤에 일부러 바닷가를 돌아서 바비큐 파티가 열린 곳으로 향했다. 게스트들은 배경윤을 향해 손을 흔들면서 반가워했다.“경윤 언니, 오셨어요? 언니가 오기만을 기다렸어요. 경윤 언니가 와서 너무 기뻐요.”장유빈이 머무는 숙소는 배경윤과 얼마 떨어져 있지 않았기에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장유빈은 바비큐 파티에 같이 참가하자고 했지만 배경윤은 단호하게 거절했었다. 못내 아쉬웠던 장유빈은 배경윤을 발견하고는 신나서 벌떡 일어났다.“모두 참가했는데 저만 빠지면 그렇잖아요. 저만 유별난 것도 아니고요. 아무튼 늦게 와서 죄송해요.”배경윤은 어색하게 웃으면서 머리를 긁적였다.“이제라도 와줘서 고마워요. 경윤 씨, 이것 좀 봐요. 찬영 오빠가 경윤 씨를 위해서 쉬지 않고 고기만 구웠어요. 경윤 씨가 고기를 그렇게 좋아한다더라고요.”소수민은 불판에 올려진 고기를 보면서 부러운 어조로 말했다.“같은 여자라도 어떤 남자를 만나는지에 따라 달라요. 저희는 먹고 싶은 걸 구워주는 사람이 없어서 직접 구웠어요. 그런데 경윤 씨가 고기를 좋아하니까 찬영 오빠가 양념 고기, 불닭 소스 고기, 허니 고기를 준비했대요. 먹음직스러워서 침이 저절로 고였어요.”배경윤은 진찬영을 바라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한편으로 고마웠고 다른 한편으로 미안했다.“찬영 오빠, 고기를 굽느라 고생 많았어요. 이제는 그러지 않아도 돼요. 제가 오빠를 위해서 뭐라도 할게요.”배경윤은 진찬영의 옆으로 걸어가서 같이 고기를 굽고 양념을 발랐다.“조심해요!”진찬영은 튀어 오르는 숯불을 막아주기 위해 손을 뻗었다. 숯불은 그대로 진찬영의 손에 튀었다.“찬영 오빠, 괜찮아요? 이 고귀한 손으로 왜 막은 거예요! 흉이 지면 안 되니까 얼른 가서 약부터 발라요.”소수민은 입을 틀어막고 기겁하더니 이내 소리를 질렀다.“찬영 오빠, 저... 죄송해요. 괜히 저 때문에 오빠가 다쳤어요.”깜짝 놀란 배경윤은 어쩔 줄 몰라 했다.“괜찮아요. 덴 것도 아
사도현은 배경윤의 귓가에 속삭였다.“지금 가서 문을 열어주면 어떻게 될까?”“그러지 마!”배경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사도현의 팔을 꼭 붙잡았다. 사도현은 꼼짝도 하지 못하게 되었다.“이상한 소리라도 낸다면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입 다물고 있어.”배경윤은 진찬영한테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진찬영과 시작해 보지도 않고 끝나기에는 너무 아쉬웠다.뻔뻔스러운 감이 있긴 하지만 인성은 늘 그렇듯 욕심이 끝도 없었다.“안에 누구 없어요? 없으면 문 열고 들어갈게요.”쾅!소수민은 문을 점점 세게 두드렸고 허술하게 지어진 초가집이 무너질 것 같았다. 벽이 흔들거렸고 먼지가 떨어졌다.배경윤은 사도현을 끌어안은 채 미간을 찌푸렸고 이 난감한 상황이 빨리 지나기만을 기다렸다. 사도현은 잔뜩 긴장해 있는 배경윤이 우스웠다.어쩐지 기분이 언짢았던 사도현은 일부러 배경윤의 겨드랑이를 간지럽혔다.“하하하!”배경윤은 참지 못하고 소리를 내고 말았다. 문밖에 서 있던 진찬영과 소수민은 그 소리를 듣게 되었다. 소수민은 큰 소리로 물었다.“계세요? 화장실을 쓰고 싶은데 문을 열어주세요. 저기요!”배경윤은 입을 틀어막고는 사도현을 노려보았다. 사도현은 눈썹을 치켜세우더니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고 약을 올렸다.“안에 사람이 있는 것 같으니 다른 곳에 가봐요. 쉬고 있는 사람을 방해하면 안 되니까요.”진찬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알겠어요. 찬영 오빠는 참 다정해요.”소수민은 짜증이 밀려왔지만 진찬영과 같이 다른 곳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발걸음 소리가 희미해지자 배경윤은 한숨을 내쉬었다.그러고는 주먹으로 사도현을 마구 때리면서 말했다.“사도현, 너 진짜 미친 거지! 일부러 나를 난처하게 만들었잖아. 이러고도 네가 남자야?”“사람들은 이미 우리를 한 쌍의 커플로 보고 있어. 커플이 같은 침대를 쓰는 게 그렇게 부끄러운 일이야?”사도현은 굳은 표정을 하고서 배경윤을 내려다보았다. 배경윤이 진찬영의 목소리에 반응한 것이 마음에 걸렸고 신경이 거슬렸
“그, 그게...”배경윤은 입술을 깨물면서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사실 배경윤은 사도현을 아직도 좋아하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도대체 무슨 감정이 드는지도 몰랐다.‘내가 아직 좋아하고 있는 걸까? 그래도 설레는 순간은 있었어.’배경윤은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매일 마음을 졸여야 하는 사도현보다 잔잔한 물결 같은 진찬영이 더 좋았다. 진찬영은 다정하고 친절해서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했다. 그래서 진찬영과 진지하게 만나서 결혼할 생각도 있었다.만약 이 프로그램을 통해 두 사람이 더 깊은 관계로 발전한다면 그대로 진찬영한테 모든 것을 쏟아붓고 싶었다.사도현은 빛이 나는 태양이라 열정적이고 인기가 많았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다치는 건 결국 배경윤이었다.진찬영은 차가워 보이지만 어둠으로 모든 것을 품어주는 달이었다. 달을 바라보고 가까이하는 것만으로 행복해서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도현아, 사실 나는...”배경윤은 심호흡하고는 솔직한 감정을 전달하려고 했다. 그런데 사도현은 이미 대답을 알고 있는 것처럼 배경윤의 입을 막아버렸다.“읍!”배경윤은 또다시 사도현과 입을 맞추게 될 줄 몰랐다. 요트 위에서 나눴던 키스와는 달리 한편으로는 부드럽고 다른 한편으로는 조심스러운 입맞춤이었다.가볍게 부딪친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사도현은 두려워했고 비굴하게 보이더라도 배경윤한테 떠나지 말라고 빌고 싶었다.화가 나서 밀치려고 했던 배경윤은 손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가만히 쳐다보다가 더 가까이 다가가 입을 맞추었다.‘이 세상에 불쌍하고 가엾은 강아지 같은 남자를 마다할 여자는 없을 거야. 그저 불쌍해 보여서 어쩔 수 없었어.’두 사람은 서로를 껴안고 사랑을 퍼부었다. 몸이 달아올라서 주체할 수가 없었다.“너의 대답이 무엇이든 중요하지 않아. 네가 내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사도현은 배경윤의 얼굴을 내려다보면서 진지하게 말했다.“도현아, 혹시 아까 그것도 작정하고 그런 거야? 너는 나를 너무 잘 알아. 나는 네가 미워!”배경윤의
당장이라도 별이 쏟아질 것처럼 몽환적인 순간이었다. 배경윤은 사도현의 어깨에 기대고는 조용히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 사이에 알 수 없는 기류가 흘렀고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이렇게 많은 별을 볼 수 있다는 게 꿈만 같아. 몇 년 전에 보고 나서 한 번도 보지 못했었는데 말이야...”배경윤은 제일 빛나는 별 하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슬픔이 가득 묻어나는 눈으로 사도현을 바라보았다.“마지막으로 별을 본 건 대학교 시절에 나, 우리 오빠와, 설아까지 셋이 외국에 여행 갔을 때야. 높은 산과 낮은 산 사이에 있는 구역에 차를 세우고 텐트를 쳤어. 밤만 되면 두 설산 사이로 반짝이는 별들이 얼마나 예뻤는지... 그 별을 따라 가면 이 은하의 끝에 닿을 것만 같아서 손을 뻗어보기도 했어.”“네 말을 들으니까 상상이 돼.”사도현은 아름다운 밤하늘을 바라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고원지대에서 보는 별을 사뭇 다르다고 들었기에 늘 가보고 싶어 했다. 하지만 바삐 돌아치는 바람에 가보지 못해서 아쉬웠다. 배경윤의 말을 들은 사도현은 마치 고원지대에 간 것처럼 기분이 묘했다.“그때의 우리는 걱정할 것도 없이 행복하게 지냈어. 시간이 나면 운전해서 바람 쐬러 갔고 등산도 자주 갔었어. 바다를 많이 보지 못한 게 아쉽지만 어쩔 수 없었지. 별들은 여전히 그대로이고 제 자리를 잘 지키는데 우리는 왜 이렇게 변했을까?”배경윤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행복했던 대학 시절을 돌이켜보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사도현은 고개를 돌려 배경윤을 쳐다보더니 피식 웃었다.“평소에는 성격이 시원시원하고 긍정적인 여자인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진지하고 우울한 면이 있었네? 의외의 모습을 보게 되었어.”배경윤은 사도현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별똥별이 한 획을 긋고 떨어지는 것처럼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너는 모든 사람이 너처럼 겉만 화려하고 속은 텅 빈 줄 알아? 사람은 대자연 앞에서 한없이 작아진다는 말도 모르냐고!”“공주님이 웬일로 울고 있어? 그렇게 슬
“응. 보고 싶어. 그게 어딘데?”배경윤은 진지한 표정을 한 사도현을 바라보았고 심장이 미칠 듯이 뛰었다. 그래서 겨우 진정하고 태연하게 물었다.“그럼 나랑 같이 가볼래?”사도현은 배경윤한테 손을 내밀면서 부드럽게 물었다.“이 시간 때에 가야 볼 수 있어. 너만 괜찮다면 같이 가고 싶어. 네가 싫다면 강요하지 않을게.”배경윤은 사도현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더니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가자! 혼자서 심심했었어.”“나의 공주님한테는 최고의 선물이 될 거야.”사도현은 눈이 휘어지게 웃으면서 배경윤을 데리고 자신만의 아지트로 달려갔다.두 사람이 멀어진 뒤로 배경윤이 처음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날이었다.사도현은 자신이 암컷 돼지의 출산을 도와준 모습에 배경윤이 감동했을 것이라고 여겼다.몇 분 후, 두 사람은 섬의 다른 한 끝에 도착했다. 그곳은 사도현이 지내는 초가집이었고 마당에서 게스트들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모여 앉아 해산물을 구워 먹고 기타를 쳤다. 남성 참가자와 여성 참가자 사이에 핑크빛 기류가 흘렀고 분위기가 한층 더 무르익어갔다.“설마 제일 예쁜 풍경이 저 사람들이 해산물을 구워 먹는 모습은 아니겠지?”배경윤은 멀리서부터 한곳에 모여 놀고 있는 게스트들을 발견했다. 사도현한테 속은 것 같아서 화가 솟구쳐 올랐고 배신감이 들었다.‘이럴 줄 알았어. 진지한 척만 하고 항상 나를 놀리고 싶어 했지. 내가 또 속을 줄 알아?’“그쪽 말고 여기로 가자.”사도현은 배경윤을 데리고 아무도 모르게 뒷문으로 초가집 안에 들어갔다. 배경윤은 미간을 찌푸린 채 사도현을 노려보았다.“고작 초가집을 보여주려고 데리고 온 거야? 그럴 바에는 나가서 다른 사람들이랑 노는 게 낫겠어. 너는 왜 항상 나를 놀리는 건데? 단 한 번만이라도 진지할 수는 없어?”“잠깐만 기다려 줘. 곧 보게 될 거야.”사도현은 배경윤의 두 눈을 손으로 가리고 불을 껐다.“사도현, 너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또 허튼수작을 부렸다가는 소리 질러서 너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