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설아는 의료실로 찾아와 혼수상태에 빠진 성도윤을 부축해 약 한 그릇을 남자의 입에 넣었다.“고지가 눈앞이야, 꼭 버텨야 해.”그녀는 남자의 손을 잡고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눈 깜짝할 사이에 날이 저물었다.차설아는 줄곧 침대 옆에 앉아 남자가 깨어나는 것을 애타게 기다렸다.“설아 씨, 성도윤 씨는 상태가 안정되었으니 먼저 가서 쉬세요.”여간호사가 차설아에게 말했다.“괜찮아요, 나도 여기서 그를 보면서 쉬는 게 더 마음이 편해요.”“그럼 몸조심하시고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불러주세요.”간호사는 긴 한숨을 내쉬며 의료실을 나섰다.심지 요양병원의 모든 사람이 알고 있듯이 차설아는 정말 성도윤을 비참하게 사랑하고 있었다.얼마나 지났는지 차설아는 침대 가장자리에 엎드려 잠이 들었다.잠에서 깬 성도윤의 손가락이 움직이면서 차설아의 머리카락에 닿았다.그렇게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를 휘감아 그의 마음을 어지럽혔다.“깼어요?차설아는 얕게 잤고 이내 이상을 감지해 잠에서 깨며 긴장한 얼굴로 성도윤을 바라보았다. “어때요? 아직도 아파요? 허한 거 같아요?”성도윤은 물건을 훔치다 걸린 것처럼 얼른 손을 거둬들였다. “허하긴요, 멀쩡해요.”차설아는 그의 말에 이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네, 네. 안 허해요. 내가 단어 사용이 부적절했네요.”“정말 정신이 나는 것 같아요. 어지러운 느낌도 별로 없어요.”성도윤은 팔을 움직이며 유례없는 상쾌함을 느꼈다.“잘됐네요.”차설아는 크게 기뻐했는데 보아하니 성진의 피도 매우 효과가 있는 것 같았다.민이 이모는 소식을 듣고 달려와 성도윤의 맥을 짚어준 후 기뻐하며 말했다.“도련님의 맥은 안정되고 힘찬데 심지어 상태가 이전보다 더 좋아졌어요. 이번에는 정말 좋은 약을 찾은 것 같아요!”“무슨 약이요?”성도윤은 눈살을 찌푸리며 침울한 목소리로 따져 물었다.“그냥... 평범한 약재 말이에요, 산삼 같은.”차설아는 몇 가지 약재를 마구 지껄여대며 남자에게 말했다.“몸 잘 챙겨야
차설아가 성진에 대한 인상은 순식간에 많이 바뀌었다.“아가씨, 이번 성공은 전례 없는 거예요... 우리는 어쩌면 도련님의 눈을 치료해 볼 수 있을 것 같아요.”민이 이모가 정중하게 말했다.요즘 그녀는 자기 아버지의 처방전과 결합하여 성도윤의 시력을 회복하기 위해 끊임없이 연구하며 약을 시험하고 있었다.“정말요, 어떤 조건이 필요한가요?”차설아가 격앙되어 물었다.다행이네, 이렇게 오래 기다렸는데 드디어 이날이 왔다니!“이 일은 도련님과 성진 씨의 협력이 필요한데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습니다.”민이 이모는 여기까지 말하고 걱정스러운 듯 한숨을 쉬었다. “이 방법은 관계를 끊은 저의 아버지가 만든 '방혈훈골' 요법입니다. 도련님이 성진 씨의 피를 배척하지 않는 이상 우리가 한 번 시도해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방혈훈골요법이요?”차설아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이게 무슨 의법이에요? 이름만 들어도 왜 무섭죠?”“확실히 무섭습니다. 그래서 제대로 의학을 배우는 사람들은 모두 이를 술법이라고 하며 이 방법을 쓰지 않습니다. 만약 아가씨가 정말 도련님이 낫기를 간절히 원한다면 이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물론이죠, 하지만... 성진과 성도윤의 협조가 필요하다면 설마....”차설아의 머릿속에 몇 개의 화면이 스쳐 지나가더니 이내 미간을 찌푸리고 이제는 생각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네, 바로 그거에요.”민이 이모는 차설아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을 이었다.“아가씨, 잘 생각해 보세요, 가능하다면 우리는 도련님을 치료할 준비를 할 수 있습니다.”“저... 잘 생각해 볼게요.”차설아는 입술을 깨물고 어두운 하늘을 보며 마음도 따라서 어두워졌다.밤이 깊어 인적이 없을 때 그녀는 한 점의 졸음도 느끼지 못하고 정자 기둥에 기대어 하늘의 둥근 달을 보고 있었다.바람이 살랑살랑 얼굴을 차갑게 스쳐 그녀를 깨웠다.가끔은 정말 모든 것이 꿈이었으면 좋겠다.“오늘 밤 달빛이 참 아름답죠?”뒤에서 남자의 방정맞은
“고민이 많아서...”차설아는 성진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뭐가 고민인데, 말해봐요.”비록 오늘 손목에 상처가 나 아파 죽을 것 같았지만 그는 정말 기뻤다.그의 여신이 드디어 그에게 관심을 보였고 그를 아껴주었고 얘기를 하고 함께 달구경까지 했으니... “민이 이모는 성도윤이 당신의 피를 배척하지 않았고 성도윤을 치료할 방법을 찾았다고 했어.”차설아의 눈빛은 의미심장했다.그러자 성진의 표정이 굳어졌다.“무슨 방법이요?”차설아는 민이 이모의 말을 전부 성진에게 전했다.“듣자 하니 내 피로 성도윤의 목숨을 잇고 내 눈으로 성도윤의 눈을 바꾸자는 거 같은데...?”“이론적으로는 그래.”차설아는 고개를 끄덕였다.성진도 그녀처럼 총명한 사람이니 이 치료법의 이름만 들어도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있었다.“웃기지 말아요.”성진의 안색은 매우 보기 흉하게 변했고 냉혹하고 실망 섞인 말투로 말했다.“차설아, 나에게 이런 말을 하는 이유가 뭐야? 내가 그렇게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죠? 도윤이는 내가 어릴 적부터 가장 이기고 싶었던 사람이고 나는 겨우 이날을 기다렸는데 당신은 내가 그에게 살길을 줄 것으로 생각해요? 더군다나 나 자신을 희생하는 방식으로?”“안 그럴 줄 알고 말하는 거야.”차설아는 냉정하게 말했다.그녀는 당연히 성진이 동의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었다. 다만 자신이 왜 그에게 이런 것을 사실대로 말했는지 본인도 알지 못했다.어쩌면 성진이 자신의 피를 성도윤에게 약으로 주려고 했을 때부터 그녀는 이 미치광이가 그가 생각하는 것만큼 나쁘지 않다는 것을 인정했을지도 모른다.지금, 이 순간 그들은 적이 아니라 같은 편에 서 있는 전우였고 따라서 그는 그것을 알 권리가 있었다.“차설아, 내가 당신을 좋아하지만 그 정도는 아니야. 내 인내심에 도전하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아니면 나도 내가 어떻게 나갈지 모르겠으니까.”성진은 차설아에게 자신이 얼마나 악랄한지 일러주기라도 하듯 냉혹하고 무자비하게 말했다.“그럼 됐어,
“정말 잘 됐어, 우리가 이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 하느님 감사합니다.”소영금은 성도윤을 끌어안고 흐느껴 울었다.“우리 아들, 네가 그동안 고생한 것은 다 내 탓이야, 간사한 자에게 틈을 주었으니... 앞으로는 좋은 일만 있을 거야.”성명원도 목이 메어 눈물을 훔쳤다.“걱정시켜 드려서 죄송해요.”성도윤은 가볍게 기침을 했고 잘생긴 얼굴은 어두웠다.그는 겹겹이 쌓인 사람들을 둘러보며 보고 싶은 사람을 찾을 수 있기를 기대했다.그러나 아무리 둘러보아도 모두 친한 친구들이었고 낯선 얼굴은 없었다.“아들, 누구를 찾는 거야?”소영금은 성도윤의 마음이 딴 데 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얼른 물었다.“그게...”성도윤은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 어렵게 입을 뗐다.“'신지 요양병원에 있지 않았어요? 누가 절 데리고 온 거예요?” “그게...”소영금과 성명원은 사실대로 말해야 할지 몰라 서로를 쳐다보았다.서은아는 남자의 손을 잡고 고개를 숙여 키스했다.“바보야, 당연히 나랑 당신 부모님이 데리고 왔지. 우리는 오 원장님께 특별히 감사 인사도 했는걸, 그동안 당신을 돌보느라 고생 많으셨잖아.”“오 원장님만?”“그렇지 않으면 또 누가 있겠어.”서은아는 얼굴도 붉히지 않고 거짓말을 했다. “당신의 눈도,우리가 오 원장님과 상의해서 신의 한 명을 찾아 치료한 거야. 나는 아직도 믿을 수 없어, 정말 성공했다니...”“하지만 내 기억으로는...”성도윤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할 수 없는 허탈감을 느꼈다. “난 또 다른 누군가가 날 돌봐줬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 사람이 계속 내 눈을 치료해주겠다고 했고...”“알아, 설아 씨 말하는 거 맞지?”서은아는 이 사람이 도저히 돌아갈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먼저 말을 꺼냈다.“그 사람은 어디 있어?”성도윤은 눈망울을 조금 환하게 빛내며 기다렸다는 듯이 물었다.그의 기억이 맞다면 그는 그 여자와 약속을 했다. 그가 시력을 회복하는 날 그는 그녀가 어떻게 생겼는지 꼭 볼 거라고.그런 바람
반년 후.E 주의 어느 작은 마을, 마치 동화에서 그대로 옮겨온 듯 뾰족한 오두막집이 구름 위로 솟은 산속에 널려 있다.가장 아름다운 오두막집은 산기슭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큰 뜰에는 양지꽃이 가득 심겨 있고 따뜻한 햇볕 아래서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꽃밭 한가운데는 잘생긴 남자가 휠체어에 앉아 고개를 들고 빛이 뺨에 떨어지는 것을 만끽하며 꽃향기를 마음껏 들이마시며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다.“목마르지 않아, 물 좀 마실래?”차설아는 성진의 무릎 위에 담요를 덮어주며 부드럽게 물었다.“당신이 내린 커피를 마시고 싶어.”“그래, 햇볕 좀 쬐고 있어, 내가 커피 내려줄게.”여자가 떠나기 전에 그의 이마에 키스했다.“고마워, 자기야.”여자의 손을 잡은 성진의 목소리에는 달콤하면서도 은은한 애교가 가득했다.어느덧 벌써 반년이 지났다.비록 성진이 '방혈훈골요법'을 마친 후 그의 다리는 이미 몸을 지탱할 수 없었고 눈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으며 심지어 호흡조차 예전보다 힘에 부치는 등 세속의 폐인이었지만 그는 여전히 한순간도 후회한 적이 없다.자신을 희생하고 사랑을 얻었으니 그는 매우 가치 있는 장사라고 생각했다.차설아는 부엌에서 커피를 손으로 갈았는데 예전 성도윤에게 만들어 줄 때와 똑같은 정도로 집중했다.벌써 반년이 지났지만 그녀는 여전히 깊은 자책 속에 있었고 하루도 후회하지 않는 날이 없었다.그녀는 이기적인 사람이다. 성도윤을 낫게 하려고 파렴치하게 성진를 모험하게 했다.그녀가 성진의 인생을 망친 것이나 다름없으니 이번 생은 평생 성진의 수발을 들어도 만회할 수 없었다.거실의 텔레비전에서는 국제 뉴스를 방송하고 있었다.“보도에 따르면 성대 그룹 회장 성도윤 씨는 약혼녀 서은아 씨와 함께 3개월간의 신혼여행을 떠날 예정이며 첫 방문지는 E 주라고 합니다...”'꽈당' 하는 소리와 함께 커피잔이 바닥에 떨어졌다.차설아의 심장은 격렬하게 뛰었는데 그전까지 그녀는 너무 억압적이고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있었기에 오랫동안 광란의 느낌을
“유치하긴.”차설아는 참지 못하고 말했다.이 두 형제는 입맛이 완전히 달랐는데 성도윤은 쓴맛과 떫은맛을 좋아해 오리지널 라떼를 좋아했지만 성진은 우유와 설탕을 많이 넣은 캐러멜 마키아토를 좋아했다.그렇게 두 사람은 햇살 아래 꽃밭에서 별다른 대화 없이 모처럼의 평온을 즐겼다.성진은 커피잔의 가장자리를 어루만지며 따뜻한 열기를 느낀 후 무심코 말했다.“곧 그와 은아가 여기로 신혼여행을 온다고 들었어...”차설아는 멈칫했고 한참 만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응.”“만나러 가고 싶으면 가서 만나. 반년 동안 날 돌보느라 당신 고생한 거 알아. 만약 그를 만나는 것이 당신을 좀 더 기쁘게 한다면 나는 당신이 그를 만나는 것을 지지할 거야.”성진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애초에 그가 기꺼이 성도윤을 도와 요법을 진행했지만 벌을 받은 사람이 어디 그뿐이겠는가?그의 고통은 몸에서 오는 것이니 적어도 풀 수 있는 약이 있다.하지만 차설아의 고통은 정신에서 오는 것이니 오랜 억압은 큰 문제가 생길 것이다.“필요 없어.”차설아는 거절도 시원시원했다. “보면 뭐해, 나랑 그 사람의 인연은 반년 전에 끝났어. 이제 와서 보면 더 고통스럽겠지.”“...내가 당신을 놓아준다면?”성진은 이 말을 할 때 마음이 다 조여졌다.그는 결코 대범한 사람이 아니다, 심지어 거짓되고 이기적인 소인배일 뿐이다, 단지 그가 목숨도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 차설아를 만났기 따름이다.“당신이 날 놓아줄 수 있다 해도 내가 당신을 놓아줄 수 없어.”차설아는 뒤에서 남자를 껴안고 어린아이를 달래듯 말했다. “내가 얼마 전에 점을 보러 갔었는데 우리 둘은 궁합이 잘 맞는대. 서로 의지하며 살기에 적합하니 다시는 이렇게 나를 밀어내지 마. 그렇지 않으면 정말 갈 거야. 울고 빌어도 소용없을 거야.”성진은 눈시울을 붉히며 울먹였다. “당신이 나를 달래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지만 정말 듣기 좋은걸?”그전까지 그는 차설아가 그에게 이렇게까지 신경을 쓰기를 바라본 적이 없었다.
작은 시장은 크지 않았는데 앞뒤를 합쳐도 겨우 몇백 미터의 길이에 불과했지만 안에는 옷가지부터 수공예품까지 여러 가지가 있었다.차설아는 도자기 노점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다양한 모양의 컵과 접시가 있었는데 이 컵과 접시는 모두 도자기 재질이어서 무늬가 정교하고 섬세하며 고풍스러운 느낌이 들어 매우 보기 좋았다.그러다 그녀는 복잡한 무늬 없이 은은하게 검은색으로 물들여 태극 음양을 이루는 듯한 흰색 잔이 눈에 들어왔다.“사장님, 이 잔 디자인이 재밌는데요.”차설아는 잔을 가리키며 신이 나서 말했다.“아가씨, 안목이 좋으시군요!”노점 주인은 비록 외국인이지만 동양 문화의 팬이었다. 차설아가 물건을 알아보니 사장은 끊임없이 말하기 시작했다. “이 컵의 도안은 매우 정교하죠? 머나먼 동방 대국에서는 태극이라고 합니다. 태극은 매우 현묘한 물건인데 세상 만물을 설명할 수 있죠. 흑에는 백이 있고 백에는 흑이 있는데 서로 분리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융합된 하나죠. 서로 배척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끌어당기고 있는걸요. 둘 중 누구도 누구를 억압할 수 없고 누구를 떠날 수 없죠...”“태극이라...”차설아는 흑백이 분명한 잔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왠지 모르게 그녀와 성도윤이 생각났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대립을 세우면서도 서로에게 끌리는 것을 억누를 수 없었다.그녀는 노점상에게 컵을 가져다 달라고 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차가운 목소리가 머리 위로 떨어졌다. “이 컵, 제가 살게요.”차설아는 눈썹을 찡그리며 정색을 하고 돌아섰다. “죄송한데 이 잔은 제가 먼저...”뒤돌아보니 남자의 그윽한 눈동자와 부딪혔고 그녀는 마치 혼이 사라진 것처럼 멍하니 거기에 서서 생각할 수도 움직일 수도 없고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성도윤은 차설아보다 무려 30㎝나 더 컸는데 그는 큰 산처럼 절대적인 압박감을 가지고 있었고 그의 뒤에는 따스한 아침 햇살이 그를 빛나게 했고 눈부시게 비현실적이었다.“하지만 돈은 내가 먼저 냈는걸요.”성도윤은 유로 다발을
성도윤은 황급히 도망치는 그 아름다운 모습을 보면서 깊은 생각에 잠겼다.왜 분명 낯선 여자인데 그는 익숙한 느낌이 드는 걸까?“아는 사이인가요?”노점 주인이 잔을 포장하며 성도윤에게 건네며 궁금한 듯 물었다.“아니요, 모르는 사람입니다.”성도윤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전 어쩐지 두 사람이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고 많은 사연이 있었던 것 같다는 기분이 드는데요?”노점 주인은 미소를 지으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혹시 저 여자를 아십니까?”성도윤은 노점 주인을 돌아보며 호기심을 느꼈다.“이 마을에서 제인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노점 주인은 차설아를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고 아직도 안타까운 마음이 컸다.그날, 마을에 갑자기 큰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는데 마을의 길은 원래도 기복이 심하고 울퉁불퉁하여 걷기조차 힘이 들었다. 그녀는 한 남자가 앉아있는 휠체어를 밀며 빗속에서 사방에 도움을 청했는데 그들의 차가 고장이 났으니 누군가가 그들을 태워주기를 바란다고 했다.거동이 불편하고 실명한 남자를 돌보는 약한 여자, 어찌 인상적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그래서요?”성도윤은 노점 주인이 계속 말하기를 바라면서 걸음을 멈추었다.그때 서은아가 장터 저편에서 달려왔다.“자기야, 어디 갔었어. 한참 찾았잖아.”그녀는 성도윤의 품에 안기며 어린 소녀처럼 남자의 팔짱을 끼고 응석을 부렸다.“앞에 아주 유명한 카페가 있대, 거기 가자.”“당신 주려고 잔을 하나 샀어.”“성도윤은 그 흑백의 작은 잔을 서은아에게 건네주며 말했다.“당신 결벽증이 있잖아. 마침 이 잔으로 커피를 마실 수 있겠다.”“와, 예쁘다~ 마음에 무척 들어.”서은아는 성도윤을 끌어안고 뽀뽀를 했고 이가 녹아버릴 정도로 달콤했다.지난 반년 동안 너무 행복해 조금은 비현실적이었다. 남자는 단 한 번도 차설아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고 그의 눈에는 그녀밖에 없었다. 마치 그 여자가 그의 인생에 나타난 적이 없는 것 같았다.서은아는 매일 기도했다. 이야기가 여기서 끝나고 그
“그게...”차설아는 잠시 말을 잃었다. 거짓말을 잘하지 못하는 그녀는 특히 자신이 아끼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그랬다.“임신 테스트기도 다 믿으면 안 돼요. 이게 호르몬과 관련이 있는데 때로는 남자의 에스트로겐 수치가 너무 높으면 임신 반응이 나올 때도 있거든요.”박성훈이 차설아를 대신해 설명했다.비록 이 설명이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성도윤 같은 남자에게는 충분히 먹힐 만했다.역시나 성도윤은 그 말을 믿었고 얼굴에 실망한 감정이 가득했다.“정말 그럴 수도 있나요?”“그래. 혈액 수치가 가장 정확한 증거야. 혈액 검사 결과, 차설아 씨는 정말로 임신하지 않았어.”박성훈이 성도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위로했다.“괜찮아, 두 사람 아직 젊으니 앞으로 가능성이 많을 거야.”“미안해요, 도윤 씨. 나도 사실 두 줄이 나와서 임신한 줄 알았어요. 괜히 실망하게 해서 미안해요.”차설아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성도윤에게 사과했다.그의 마음은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실망한 기분도 잠시, 그는 차설아를 서둘러 달랬다.“바보야, 내가 미안해. 다 내가 부족해서야. 약속할게 이제부터 매일 밤 더 열심히 할 거야.”“엣헴!”박성훈이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이 두 사람 또 닭살 돋게 하네. 매일 밤 열심히 한다고? 뭘? 이러다 어떻게 열심히 하는지까지 말할 기세군.’“형, 목이 마르면 거실에 나가서 커피나 좀 마시세요. 이제 검사도 필요 없는 것 같은데.”성도윤이 직설적으로 내뱉었다.“설아 씨가 임신 안 됐다고 하자마자 바로 나를 쫓아내려고 하네? 아침에 그 애타게 부탁하던 모습 성도윤은 어디 갔지? 이제 다시 나를 모셔 오기 힘들 텐데.”박성훈이 팔짱을 끼고 웃으며 말했다.‘팔불출에는 정말 약이 없군.’“그럼 형은 그냥 여기 있어요. 내 능력으로 한 달 안에 아린이가 반드시 아기를 가질 수 있을 것 같으니까.”성도윤이 조금 유치하게 말했다. 아무리 도도하고 성숙한 남자라도 사랑 앞에서는 마치 어린아이 같았다.차설아가 남자의 팔을 잡고 말렸다.
“잘됐네요. 마침 딱 배고팠는데!”차설아는 피곤하고 정신이 흐릿했지만 기대에 가득 찬 목소리로 성도윤을 반겼다.성도윤이 사 온 케이크는 차설아가 가장 좋아하는 케이크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가게 주인은 분점을 열 계획도 없고 배달도 하지 않으며 매일 일정 수량만 판매했다.그래서 정말 오래 기다려야 하고 운이 좋아야만 살 수 있었다.가게 주인의 기분도 들쑥날쑥해서 기분이 좋을 때는 많이 팔지만 기분이 나쁘면 그날은 일찍 가게 문을 닫기 일쑤였다.단순히 줄을 서서 맛있는 케이크를 먹는 것도 있지만 케이크를 사기 위해 기다린 사람들의 수고와 정성도 들어 있었다.차설아는 숟가락으로 케이크 한 조각을 떠서 입에 넣었다. 그 부드럽고 차가운 질감에 그녀는 감동해서 눈물이 날 뻔했다.“맛없어?”차설아의 표정을 보고 성도윤이 이마를 찌푸리며 걱정스레 물었다.“아니요. 너무 맛있어서... 이제 다시 이런 케이크를 못 먹으면 너무 슬플 것 같아서요.”“바보, 그런 말을 왜 해? 앞으로 당신이 원하면 매일 사다 줄게.”성도윤이 차설아의 손을 잡고 진지하게 약속했다.“좋아요, 그럼 매일 먹고 싶어요. 당신이 매일 사다줘요...”차설아는 입술에 크림을 묻힌 채 남자에게 물었다.“그런데 매일 줄 서서 사 오느라 면 당신이 힘들지 않을까요?”“걱정 붙들어 매, 당신이 질리지만 않는다면 매일 가서 사 올 수 있어. 정 안 되면 내가 그 가게 주인을 찾아서 배워서 매일 내가 직접 만들어서 줄게...”성도윤은 차설아의 입가를 닦아주며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혹시 나한테 뭔가 숨기고 있는 거 아니야?”“어, 뭐가요?”차설아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그녀는 그의 관찰력이 이렇게 예리할 줄 몰랐다.“분명히 뭔가 있어.”성도윤이 단호하게 말했다.그는 돌아오자마자 분위기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지만 참으면서 기다렸다.그러다 차설아가 케이크를 먹으며 그런 말을 하자 분명히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있었던 걸 확신했다.“역시 당신 눈을 피할 수는 없네요. 사실,
박성훈은 비관적인 차설아를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몇 달 전만 해도 그녀는 자신감 넘치고 자유롭고 시원시원한 여자였다.그런데 지금은 눈을 잃고 독에 중독되어 마치 시들어버린 꽃처럼 처량해 보였다.“설아 씨, 제가 살아있는 허준 선생처럼 신통한 의사는 아니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약속할 수 있습니다. 반드시 최선을 다해 당신을 치료할 것이고 당신의 눈도 적합한 이식자가 나타나기만 하면 다시 원래대로 회복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너무 절망하지 마세요. 살아있는 한, 희망은 있는 법입니다.”그는 진중한 목소리로 차설아를 위로했다.물론 중금속 중독을 완전히 해독하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다.지금까지 성공 사례가 많지 않지만 의학 역사 속에서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과거에도 성공한 사례가 있는 만큼 자신도 연구를 거듭하면 반드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고마워요, 박 선생님. 그 말 한마디가 저한테 용기를 주네요.”차설아는 힘겹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박성훈이 있는 방향을 향해 말했다.“해독을 할 수 있든 없든, 그리고 제 눈이 다시 보이든 아니든, 한 가지만 부탁드리고 싶어요. 이 사실을 도윤 씨한테는 절대 알리지 말아 주세요. 도윤 씨가 지금 너무 지쳐 있어요. 더 이상 그이가 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아요.”“걱정 마세요. 저는 그런 말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박성훈은 차설아의 성도윤을 향한 깊은 감정에 감탄했다.이토록 힘든 상황에서도 자신보다 사랑하는 남자를 먼저 걱정하는 차설아를 보면서그녀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느껴졌다.“제 아이도 지킬 수 없겠죠?”차설아가 한참을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박성훈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맞아요. 아이는 지킬 수 없습니다.”그가 힘겹게 이어 말했다.“설아 씨가 현재 중금속 중독 상태고 해독을 위해 강한 약을 복용해야 합니다. 이 약들은 태아의 성장에 심각한 영향을 미쳐요. 제 의견으로는 아직 초기일 때 아이를 포기하는 것이 낫습니다.”“그럴 줄 알았어
박성훈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이런 상황이라면 차라리 빨리 죽는 게 낫다고 할 수도 없고...’하지만 그는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했다.혈액 검사 보고서에 따르면 차설아의 여러 혈액 수치에서 이상이 발견되었고 그녀의 지금 상태로 본 결과, 박성훈은 차설아가 중금속 중독에 걸렸다고 판단했다.중금속 중독은 쉽게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지는 않지만 서서히 신체의 각 기관을 쇠약하게 만들고 신경을 마비시키는 증상이었다.초기에는 극심한 피로와 졸음을 유발하며 무기력하게 만들지만 후기로 갈수록 신경과 장기가 손상되며 극심한 통증을 수반하게 되고 이러한 증상은 그야말로 생지옥과도 같았으며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정도의 고통이었다.박성훈은 어떻게 입을 열어야 할지 고민하다 결국 우선 잔인한 진실을 감추기로 결정했다.“어쨌든 걱정 마세요. 저희가 반드시 치료해 드릴 겁니다.”그렇게 말은 했지만, 사실 중금속 중독을 완전히 치료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게다가 투여된 독의 종류를 정확히 파악해야만 적절한 치료법을 적용할 수 있었고 그러려면 독을 투여한 사람이 어떤 중금속 원소를 사용했는지 솔직하게 밝혀야 한다.“지금부터 최근 식사 내용을 정확히 말해 주세요. 혹시 식사 외에도 평소 드시지 않던 걸 섭취한 적 있나요?”박성훈이 진지한 눈빛으로 물었다.“저 중독된 거죠?”차설아는 질문에 답하지 않고 되레 되물었다.“어떤 독에 중독됐는지 알 수 있어요?”“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초기 판단으로는 중금속 중독일 가능성이 큽니다.”박성훈은 차설아가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다는 사실에 순간 당황했지만 곧바로 숨김없이 사실을 털어놓았다.이런 경우, 환자와 의사가 완전히 솔직하게 소통해야만 치료에 도움이 되기에 아무리 잔인한 현실일지라도 그녀가 사실을 알아야 했다.“중금속 중독...”차설아는 그 단어를 듣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몸이 서서히 차가워지며 절망감이 엄습했다.그녀는 예전에 비슷한 뉴스를 본 적이 있었다.한 명문대 여학생이 룸메이트의 질투로
“무슨 일인데요?”박성훈이 갑자기 진지해지며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차설아를 바라보았다.“뭘 알아내든 상관없어요. 도윤 씨한테는 좋은 얘기만 해주세요. 안 좋은 결과는 절대 말하지 마시고요.”차설아가 간결하게 자신이 원하는 걸 얘기했다.그녀는 방금 전에 애써 성도윤을 떨어뜨려 놓으려 했던 이유가, 그가 걱정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 거짓말을 유지하려면 박성훈의 협조가 필요했다.“하... 역시 그럴 줄 알았어요.”박성훈은 차설아가 이런 부탁을 할 것이라는 걸 예상했지만 그녀를 보며 여전히 마음이 아팠다.그런 상태에서 차설아는 여전히 성도윤을 걱정하며 그가 조금이라도 슬퍼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두 사람 서로를 진짜로 사랑하나 보네...’“걱정 말아요. 내가 분위기 못 읽고 아무 말이나 하는 사람도 아니고 어떤 걸 얘기할지 잘 알고 있어요.”박성훈이 차설아를 안심시키듯 말했다.“그리고 설아 씨도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요. 내가 신의 손을 가진 명의는 아니지만 그래도 의술은 좀 하는 편이니까 저희 말대로만 따르면 큰 문제는 없을 거예요. 게다가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니잖아요. 어쩌면 단순히 임신 초기에 너무 피곤해서 그런 걸 수도 있어요.”“정말 그런 거였으면 좋겠네요.”차설아는 힘없이 미소를 지으며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하지만 검사 결과가 결코 좋을 리 없다는 것을 그녀는 이미 직감하고 있었다. 상대는 처음부터 그녀를 해칠 작정이었고 가볍게 봐줄 리가 없었다.만약 배경윤이 조금만 늦게 알아차렸더라면 지금쯤 그녀는 이미 손쓸 수 없는 상태였을지도 모른다.지금 당장은 그 정도까지는 아닐지라도 분명 좋은 상태는 아닐 것이다.얼마 지나지 않아 혈액 검사 결과가 나왔다.검사 결과를 살피던 그의 표정은 한층 무거워졌고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검사 결과는 너무 처참했다.“어때요, 박 선생님?”차설아는 몽롱한 상태에서 거의 잠들 뻔했지만 억지로 정신을 붙잡고는 줄곧 침묵하고 있는 박성훈에게 물었다.“뭐라고 말해야
성도윤은 자책감에 사로잡혀 당장이라도 할복이라도 할 기세였고 박성훈은 그런 그를 진정시키려 일부러 괜찮을 거라고 말한 것이었다.하지만 사실, 차설아의 심장 박동은 이상했고 거의 보름 동안 지속된 무기력함과 과도한 졸음까지 고려했을 때, 그녀의 몸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게 분명했다.그리고 그 원인은 단순히 임신 때문이 아니라는 것도 박성훈은 어렴풋이 감이 왔다.하지만 지금 당장 혈액 검사 결과도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성급하게 결론을 내릴 수는 없었다.괜히 성도윤에게 불안감을 주면 그가 차설아에 대한 과보호 수준을 고려할 때 당장이라도 미쳐버릴 게 뻔했기 때문이다.“정상이면 다행이야.”성도윤은 박성훈의 말을 듣자마자 한숨을 내쉬며 마치 온 세상의 짐이 내려간 듯 안도했다.“들었지, 당신 괜찮대. 그냥 임신해서 피곤한 것뿐이래. 내가 괜히 겁먹고 난리 친 거야. 미안해. 내가 이런 경험이 없다 보니까 괜히 걱정했네.”성도윤은 기뻐하며 차설아를 꼭 끌어안았다.그리고 그녀의 배를 손으로 가볍게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야, 꼬맹이. 엄마 너무 힘들게 하지 마라? 너 때문에 엄마가 얼마나 피곤해하는지 봤지? 만약 엄마를 더 힘들게 하면, 네가 세상에 나오는 순간, 아빠가 먼저 너 혼쭐낼 거야!”차설아는 그의 유치한 농담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그만 해요. 진짜 왜 이렇게 점잖지 못해요?”“하아, 두 사람 오늘 너무 닭살 커플인 거 아니야?”옆에서 이 모든 걸 보고 있던 박성훈이 질색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 정도면 거의 ‘고문 수준’의 애정 행각이었다.그때, 차설아가 성도윤을 바라보며 갑자기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도윤 씨, 나 갑자기 케이크가 먹고 싶어졌어요. 지금 가서 사 올 수 있어요?”“지금?”성도윤은 순간 당황했다.그는 케이크를 사 오는 게 싫은 게 아니었다. 하지만 혈액 검사 결과가 아직 나오지 않은 상태라 결과를 확인한 후에 움직이고 싶었다.“네. 지금 당장이요. 지금 먹고 싶다고요.”차설아가 일부러 짓궂게 물었다.“
박성훈은 처음엔 가벼운 농담을 던지며 분위기를 풀어주고 있었지만 곧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잠깐만!”그는 이마를 찌푸리며 성도윤을 바라보더니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왼쪽 아래로 2~3cm 정도 더 옮겨 봐.”성도윤도 덩달아 긴장해졌다.그는 박성훈의 지시대로 청진기를 차설아의 심장 왼쪽 아래 3cm 지점으로 옮기며 조심스럽게 물었다.“뭔가 이상한 점 있나요?”“...”박성훈은 대답하지 않고 그저 얼굴을 굳힌 채 조용히 청진기에 집중했다.한참 후에야 그는 청진기를 내려놓으며 말했다.“지금은 확실하게 들리는 건 없어. 혈액 검사 결과까지 봐야 정확하게 알 거야.”차설아는 처음부터 차분하게 검사를 받으며 잘 협조하고 있었지만 무언가를 깨달은 듯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그리고 박성훈을 향해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늘 검사는 여기까지만 할까요? 박 선생님도 도착하자마자 이것저것 살펴보셔서 피곤할 테고 저도 피를 너무 많이 뽑아서 그런지 좀 지치네요. 나머지는 내일 하는 게 어때요?”사실 그녀는 자신의 몸에 뭔가 이상이 있다는 걸 감지하고 있었다.하지만 그게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확신할 수 없었고 괜히 성도윤이나 다른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게다가 현이를 통해 누군가 자신을 해치려 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아냈다.그 사람의 정체만 밝혀지면 직접 해결할 생각이었다.“온 지 얼마 안 돼서 피곤하지는 않은데요? 게다가 그냥 검사 결과만 보면 되는 거라 괜찮아요.”박성훈이 어깨를 으쓱하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저택에 온 지 이제 겨우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았고 그동안 한 거라곤 심장 소리 한 번 들은 게 전부인데 대체 뭐가 그렇게 피곤하다는 건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제가 피곤해서 그래요. 그리고 오늘 꼭 검사를 다 마쳐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차설아의 목소리는 차분하면서도 단호했고 명확한 거절의 의미였다.더 이상 검사에 협조할 생각이 없는 듯한 그녀를 보면서 박성훈은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그리고 잠시 고
박성훈은 말을 마치고 청진기를 꺼냈다. 그러더니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차설아의 옷 안으로 넣으려 했다.“잠깐!”성도윤이 그 장면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재빠르게 박성훈의 손을 붙잡고 제지했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청진하고 있지 그럼 내가 뭐 하는 걸로 보여?”박성훈이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내가 해요.”성도윤이 단호하게 청진기를 낚아채더니, 정색하며 말했다.“내 아내는 부끄러움을 많이 타요. 이런 건 내가 직접 할 테니까, 형은 듣기만 해요.”박성훈이 말없이 그를 보고 있자 성도윤이 되물었다.“왜, 문제 있어요?”“문제라기보단... 좀 오버 아니야?”“어디가 오버에요? 형이 직접 하는 게 더 이상한 거지.”‘누가 알아? 검사하는 동안 실수로 엉뚱한 곳이라도 건드릴지.’보통 때는 몰라도 지금처럼 바로 눈앞에서 보고 있는 상황에선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하아... 역시 소설에서만 보던 ‘집착광공’이 실존하는구나.”박성훈이 이마를 짚으며 감탄했다.자신이 가끔 보던 ‘재벌 남주’ 소설들이 그냥 창작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었다.현실이 오히려 소설보다 더 과장되어 있었다.“헛소리 말고 어디에 대야 하는지만 알려 줘요.”성도윤이 청진기를 들고 박성훈을 노려보았다.“음... 왼쪽 쇄골 중앙선과 다섯 번째 갈비뼈 사이 경계에 대면 돼.”성도윤의 태도가 워낙 단호해서 박성훈은 그냥 순순히 위치를 알려 주었다.“잠시만요.”성도윤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청진기를 차설아의 잠옷 안으로 밀어 넣었다.그러더니 여기저기 더듬으며 위치를 찾기 시작했다.“쯧쯧.”박성훈은 청진기를 끼고 있었기에 성도윤이 어떻게 검사하고 있는지 소리로 다 들을 수 있었다.하지만 감히 뭐라고 할 수도 없었고 결국은 그냥 내버려두기로 했다.‘어휴, 성도윤이니까 참는 거지.’그가 속으로 체념하는 사이, 성도윤이 한참 동안 위치를 못 찾자 결국 한마디 내뱉었다.“이 정도도 못 견디면 나중에 내진 검사할 때는 난리 나겠네?”“뭐요?”
차설아는 앞이 보이지 않는 대신 촉각과 후각이 무척 예민했다.방에 들어서는 순간, 그녀는 공간이 달라졌다는 걸 바로 알아차렸다.예전엔 책 냄새가 가득하던 방이 이제는 소독약 냄새로 가득 차 있었고 조명도 더 밝고 뜨거워진 느낌이었다.이제 차설아는 자신의 모든 걸 성도윤에게 맡긴 상태였다.그가 정말로 해부라도 하겠다고 나선다면 그저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당신 상상력 정말 대단한데? 우리 애도 나중에 소설가 체질이었으면 좋겠다.”성도윤은 차설아의 넘치는 상상력에 웃음이 터졌고 그녀의 손을 잡고 안쪽으로 이끌었다.“차설아 씨, 지금 혈액 검사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전반적인 건강 상태를 확인해야 하거든요.”간호사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설명했다.“네, 하세요. 어차피 지금 나는 도마 위 생선이라 목숨은 이미 여러분들 손에 있으니까요.”차설아는 자조적인 농담을 하며 팔을 내밀었다.곧이어, 조용한 방 안에 사각사각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바늘이 그녀의 정맥을 찔렀다.“살살 좀 해 주세요.”성도윤은 차설아의 살짝 찡그린 얼굴과 연달아 뽑혀 나오는 혈액을 보며 속이 상해 간호사에게 신신당부했다.그때, 앞쪽에서 장난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성 대표님의 아내 사랑이 참 넘치시네요. 난 조용히 보조만 하려고 온 건데 이렇게까지 과한 애정 행각을 볼 줄은 몰랐어요. 좀 자제하세요.”그 말투를 보아하니 성도윤이 말했던 ‘대단한 의사’가 틀림없었다.차설아는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그리고 순간 놀란 듯 말했다.“이 목소리... 어쩐지 익숙한데요?”“당연하지. 우리랑 꽤 인연이 깊은 사람이거든.”성도윤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설마... 이분...”차설아는 머릿속에서 기억을 더듬었다.그리고 순간적으로 깨닫고 외쳤다.“박 선생님?”“하하하. 나를 이렇게 빨리 기억해 주다니, 영광인데요? 이걸로 승부는 끝났네요.”“도윤아, 나중에 밥 한 끼 사.”박성훈은 호탕하게 웃으며 차설아가 자신을 단번에 알아본 것이 무척이나 자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