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민이 이모는 차설아가 이미 모든 것을 알았다고 짐작하고 긴 한숨을 내쉬며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안돼요, 정말 목숨을 잃고 싶지 않으면 더는 피를 뽑을 수 없어요.”“괜찮아요. 난 조혈 능력이 뛰어나니까... 일단 빨리 뽑아요. 사람부터 구해야죠.”차설아가 이 말을 할 때도 매우 무기력한 상태였다.그녀의 몸은 예전엔 허약하지 않았지만 두 아이를 낳고부터는 줄곧 기혈이 좋지 않아 계속 보양을 해도 예전 상태로 돌아갈 수 없었다.어쩌다 거의 낫나 싶었는데 이번에는 성도윤에게 약을 주기 위해 피를 너무 많이 뽑아서 갑자기 기운이 또 없어졌다.“아가씨, 정말 뽑으면 안 돼요...”“민이 이모, 이제는 꾸물거리지 마세요. 그 사람은 더 기다릴 시간이 없어요. 이건 부탁이 아니라 명령 이에요.”차설아는 어쩔 수 없이 강제로 명령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아가씨, 이렇게 하면 제가 돌아가신 사모님한테 미안해서 어떡해요...”그녀의 명령을 거절하지 못한 민이 이모는 어쩔 수 없이 돌아서서 채혈 장비를 꺼내 차설아의 피를 다시 뽑아주려 한다.“내 피를 뽑아요.”성진은 어느 틈에 들어와 차설아를 뒤로 당기고는 소매를 걷어 올리며 민이 이모에게 찬 목소리로 말했다.“너...”차설아는 성진의 의리에 감동하였지만 여전히 냉랭하게 그를 밀어냈다.“네 피랑 내 피가 같아? 꼭 사랑하는 사람의 피여야만 된대.”“혈연으로 말하자면 나는 그의 혈육이니 당신 피보다 내 피가 더 유용할 수도 있지 않겠어요?”성진은 전에 없던 엄숙한 표정으로 또박또박 말했다.차설아가 막 반박하려고 할 때 민이 이모의 격앙된 목소리가 들렸다.“맞아, 맞아요. 내가 어떻게 그걸 잊었지? 사랑하는 사람의 피뿐만 아니라 혈육의 피도 쓸 수 있을 것 같아요, 한 번 시도해 볼 수 있어요.”“쓸데없어도 사람이 죽진 않겠죠?”성진이 물었다.“아뇨, 소용없어도 약효가 떨어질 뿐 부작용은 없습니다.”“그럼 지체 말고 뽑으시죠!”성진은 이미 결정했고 어조는 냉혹했다.“자,
차설아는 의료실로 찾아와 혼수상태에 빠진 성도윤을 부축해 약 한 그릇을 남자의 입에 넣었다.“고지가 눈앞이야, 꼭 버텨야 해.”그녀는 남자의 손을 잡고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눈 깜짝할 사이에 날이 저물었다.차설아는 줄곧 침대 옆에 앉아 남자가 깨어나는 것을 애타게 기다렸다.“설아 씨, 성도윤 씨는 상태가 안정되었으니 먼저 가서 쉬세요.”여간호사가 차설아에게 말했다.“괜찮아요, 나도 여기서 그를 보면서 쉬는 게 더 마음이 편해요.”“그럼 몸조심하시고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불러주세요.”간호사는 긴 한숨을 내쉬며 의료실을 나섰다.심지 요양병원의 모든 사람이 알고 있듯이 차설아는 정말 성도윤을 비참하게 사랑하고 있었다.얼마나 지났는지 차설아는 침대 가장자리에 엎드려 잠이 들었다.잠에서 깬 성도윤의 손가락이 움직이면서 차설아의 머리카락에 닿았다.그렇게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를 휘감아 그의 마음을 어지럽혔다.“깼어요?차설아는 얕게 잤고 이내 이상을 감지해 잠에서 깨며 긴장한 얼굴로 성도윤을 바라보았다. “어때요? 아직도 아파요? 허한 거 같아요?”성도윤은 물건을 훔치다 걸린 것처럼 얼른 손을 거둬들였다. “허하긴요, 멀쩡해요.”차설아는 그의 말에 이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네, 네. 안 허해요. 내가 단어 사용이 부적절했네요.”“정말 정신이 나는 것 같아요. 어지러운 느낌도 별로 없어요.”성도윤은 팔을 움직이며 유례없는 상쾌함을 느꼈다.“잘됐네요.”차설아는 크게 기뻐했는데 보아하니 성진의 피도 매우 효과가 있는 것 같았다.민이 이모는 소식을 듣고 달려와 성도윤의 맥을 짚어준 후 기뻐하며 말했다.“도련님의 맥은 안정되고 힘찬데 심지어 상태가 이전보다 더 좋아졌어요. 이번에는 정말 좋은 약을 찾은 것 같아요!”“무슨 약이요?”성도윤은 눈살을 찌푸리며 침울한 목소리로 따져 물었다.“그냥... 평범한 약재 말이에요, 산삼 같은.”차설아는 몇 가지 약재를 마구 지껄여대며 남자에게 말했다.“몸 잘 챙겨야
차설아가 성진에 대한 인상은 순식간에 많이 바뀌었다.“아가씨, 이번 성공은 전례 없는 거예요... 우리는 어쩌면 도련님의 눈을 치료해 볼 수 있을 것 같아요.”민이 이모가 정중하게 말했다.요즘 그녀는 자기 아버지의 처방전과 결합하여 성도윤의 시력을 회복하기 위해 끊임없이 연구하며 약을 시험하고 있었다.“정말요, 어떤 조건이 필요한가요?”차설아가 격앙되어 물었다.다행이네, 이렇게 오래 기다렸는데 드디어 이날이 왔다니!“이 일은 도련님과 성진 씨의 협력이 필요한데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습니다.”민이 이모는 여기까지 말하고 걱정스러운 듯 한숨을 쉬었다. “이 방법은 관계를 끊은 저의 아버지가 만든 '방혈훈골' 요법입니다. 도련님이 성진 씨의 피를 배척하지 않는 이상 우리가 한 번 시도해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방혈훈골요법이요?”차설아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이게 무슨 의법이에요? 이름만 들어도 왜 무섭죠?”“확실히 무섭습니다. 그래서 제대로 의학을 배우는 사람들은 모두 이를 술법이라고 하며 이 방법을 쓰지 않습니다. 만약 아가씨가 정말 도련님이 낫기를 간절히 원한다면 이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물론이죠, 하지만... 성진과 성도윤의 협조가 필요하다면 설마....”차설아의 머릿속에 몇 개의 화면이 스쳐 지나가더니 이내 미간을 찌푸리고 이제는 생각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네, 바로 그거에요.”민이 이모는 차설아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을 이었다.“아가씨, 잘 생각해 보세요, 가능하다면 우리는 도련님을 치료할 준비를 할 수 있습니다.”“저... 잘 생각해 볼게요.”차설아는 입술을 깨물고 어두운 하늘을 보며 마음도 따라서 어두워졌다.밤이 깊어 인적이 없을 때 그녀는 한 점의 졸음도 느끼지 못하고 정자 기둥에 기대어 하늘의 둥근 달을 보고 있었다.바람이 살랑살랑 얼굴을 차갑게 스쳐 그녀를 깨웠다.가끔은 정말 모든 것이 꿈이었으면 좋겠다.“오늘 밤 달빛이 참 아름답죠?”뒤에서 남자의 방정맞은
“고민이 많아서...”차설아는 성진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뭐가 고민인데, 말해봐요.”비록 오늘 손목에 상처가 나 아파 죽을 것 같았지만 그는 정말 기뻤다.그의 여신이 드디어 그에게 관심을 보였고 그를 아껴주었고 얘기를 하고 함께 달구경까지 했으니... “민이 이모는 성도윤이 당신의 피를 배척하지 않았고 성도윤을 치료할 방법을 찾았다고 했어.”차설아의 눈빛은 의미심장했다.그러자 성진의 표정이 굳어졌다.“무슨 방법이요?”차설아는 민이 이모의 말을 전부 성진에게 전했다.“듣자 하니 내 피로 성도윤의 목숨을 잇고 내 눈으로 성도윤의 눈을 바꾸자는 거 같은데...?”“이론적으로는 그래.”차설아는 고개를 끄덕였다.성진도 그녀처럼 총명한 사람이니 이 치료법의 이름만 들어도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있었다.“웃기지 말아요.”성진의 안색은 매우 보기 흉하게 변했고 냉혹하고 실망 섞인 말투로 말했다.“차설아, 나에게 이런 말을 하는 이유가 뭐야? 내가 그렇게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죠? 도윤이는 내가 어릴 적부터 가장 이기고 싶었던 사람이고 나는 겨우 이날을 기다렸는데 당신은 내가 그에게 살길을 줄 것으로 생각해요? 더군다나 나 자신을 희생하는 방식으로?”“안 그럴 줄 알고 말하는 거야.”차설아는 냉정하게 말했다.그녀는 당연히 성진이 동의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었다. 다만 자신이 왜 그에게 이런 것을 사실대로 말했는지 본인도 알지 못했다.어쩌면 성진이 자신의 피를 성도윤에게 약으로 주려고 했을 때부터 그녀는 이 미치광이가 그가 생각하는 것만큼 나쁘지 않다는 것을 인정했을지도 모른다.지금, 이 순간 그들은 적이 아니라 같은 편에 서 있는 전우였고 따라서 그는 그것을 알 권리가 있었다.“차설아, 내가 당신을 좋아하지만 그 정도는 아니야. 내 인내심에 도전하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아니면 나도 내가 어떻게 나갈지 모르겠으니까.”성진은 차설아에게 자신이 얼마나 악랄한지 일러주기라도 하듯 냉혹하고 무자비하게 말했다.“그럼 됐어,
“정말 잘 됐어, 우리가 이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 하느님 감사합니다.”소영금은 성도윤을 끌어안고 흐느껴 울었다.“우리 아들, 네가 그동안 고생한 것은 다 내 탓이야, 간사한 자에게 틈을 주었으니... 앞으로는 좋은 일만 있을 거야.”성명원도 목이 메어 눈물을 훔쳤다.“걱정시켜 드려서 죄송해요.”성도윤은 가볍게 기침을 했고 잘생긴 얼굴은 어두웠다.그는 겹겹이 쌓인 사람들을 둘러보며 보고 싶은 사람을 찾을 수 있기를 기대했다.그러나 아무리 둘러보아도 모두 친한 친구들이었고 낯선 얼굴은 없었다.“아들, 누구를 찾는 거야?”소영금은 성도윤의 마음이 딴 데 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얼른 물었다.“그게...”성도윤은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 어렵게 입을 뗐다.“'신지 요양병원에 있지 않았어요? 누가 절 데리고 온 거예요?” “그게...”소영금과 성명원은 사실대로 말해야 할지 몰라 서로를 쳐다보았다.서은아는 남자의 손을 잡고 고개를 숙여 키스했다.“바보야, 당연히 나랑 당신 부모님이 데리고 왔지. 우리는 오 원장님께 특별히 감사 인사도 했는걸, 그동안 당신을 돌보느라 고생 많으셨잖아.”“오 원장님만?”“그렇지 않으면 또 누가 있겠어.”서은아는 얼굴도 붉히지 않고 거짓말을 했다. “당신의 눈도,우리가 오 원장님과 상의해서 신의 한 명을 찾아 치료한 거야. 나는 아직도 믿을 수 없어, 정말 성공했다니...”“하지만 내 기억으로는...”성도윤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할 수 없는 허탈감을 느꼈다. “난 또 다른 누군가가 날 돌봐줬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 사람이 계속 내 눈을 치료해주겠다고 했고...”“알아, 설아 씨 말하는 거 맞지?”서은아는 이 사람이 도저히 돌아갈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먼저 말을 꺼냈다.“그 사람은 어디 있어?”성도윤은 눈망울을 조금 환하게 빛내며 기다렸다는 듯이 물었다.그의 기억이 맞다면 그는 그 여자와 약속을 했다. 그가 시력을 회복하는 날 그는 그녀가 어떻게 생겼는지 꼭 볼 거라고.그런 바람
반년 후.E 주의 어느 작은 마을, 마치 동화에서 그대로 옮겨온 듯 뾰족한 오두막집이 구름 위로 솟은 산속에 널려 있다.가장 아름다운 오두막집은 산기슭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큰 뜰에는 양지꽃이 가득 심겨 있고 따뜻한 햇볕 아래서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꽃밭 한가운데는 잘생긴 남자가 휠체어에 앉아 고개를 들고 빛이 뺨에 떨어지는 것을 만끽하며 꽃향기를 마음껏 들이마시며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다.“목마르지 않아, 물 좀 마실래?”차설아는 성진의 무릎 위에 담요를 덮어주며 부드럽게 물었다.“당신이 내린 커피를 마시고 싶어.”“그래, 햇볕 좀 쬐고 있어, 내가 커피 내려줄게.”여자가 떠나기 전에 그의 이마에 키스했다.“고마워, 자기야.”여자의 손을 잡은 성진의 목소리에는 달콤하면서도 은은한 애교가 가득했다.어느덧 벌써 반년이 지났다.비록 성진이 '방혈훈골요법'을 마친 후 그의 다리는 이미 몸을 지탱할 수 없었고 눈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으며 심지어 호흡조차 예전보다 힘에 부치는 등 세속의 폐인이었지만 그는 여전히 한순간도 후회한 적이 없다.자신을 희생하고 사랑을 얻었으니 그는 매우 가치 있는 장사라고 생각했다.차설아는 부엌에서 커피를 손으로 갈았는데 예전 성도윤에게 만들어 줄 때와 똑같은 정도로 집중했다.벌써 반년이 지났지만 그녀는 여전히 깊은 자책 속에 있었고 하루도 후회하지 않는 날이 없었다.그녀는 이기적인 사람이다. 성도윤을 낫게 하려고 파렴치하게 성진를 모험하게 했다.그녀가 성진의 인생을 망친 것이나 다름없으니 이번 생은 평생 성진의 수발을 들어도 만회할 수 없었다.거실의 텔레비전에서는 국제 뉴스를 방송하고 있었다.“보도에 따르면 성대 그룹 회장 성도윤 씨는 약혼녀 서은아 씨와 함께 3개월간의 신혼여행을 떠날 예정이며 첫 방문지는 E 주라고 합니다...”'꽈당' 하는 소리와 함께 커피잔이 바닥에 떨어졌다.차설아의 심장은 격렬하게 뛰었는데 그전까지 그녀는 너무 억압적이고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있었기에 오랫동안 광란의 느낌을
“유치하긴.”차설아는 참지 못하고 말했다.이 두 형제는 입맛이 완전히 달랐는데 성도윤은 쓴맛과 떫은맛을 좋아해 오리지널 라떼를 좋아했지만 성진은 우유와 설탕을 많이 넣은 캐러멜 마키아토를 좋아했다.그렇게 두 사람은 햇살 아래 꽃밭에서 별다른 대화 없이 모처럼의 평온을 즐겼다.성진은 커피잔의 가장자리를 어루만지며 따뜻한 열기를 느낀 후 무심코 말했다.“곧 그와 은아가 여기로 신혼여행을 온다고 들었어...”차설아는 멈칫했고 한참 만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응.”“만나러 가고 싶으면 가서 만나. 반년 동안 날 돌보느라 당신 고생한 거 알아. 만약 그를 만나는 것이 당신을 좀 더 기쁘게 한다면 나는 당신이 그를 만나는 것을 지지할 거야.”성진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애초에 그가 기꺼이 성도윤을 도와 요법을 진행했지만 벌을 받은 사람이 어디 그뿐이겠는가?그의 고통은 몸에서 오는 것이니 적어도 풀 수 있는 약이 있다.하지만 차설아의 고통은 정신에서 오는 것이니 오랜 억압은 큰 문제가 생길 것이다.“필요 없어.”차설아는 거절도 시원시원했다. “보면 뭐해, 나랑 그 사람의 인연은 반년 전에 끝났어. 이제 와서 보면 더 고통스럽겠지.”“...내가 당신을 놓아준다면?”성진은 이 말을 할 때 마음이 다 조여졌다.그는 결코 대범한 사람이 아니다, 심지어 거짓되고 이기적인 소인배일 뿐이다, 단지 그가 목숨도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 차설아를 만났기 따름이다.“당신이 날 놓아줄 수 있다 해도 내가 당신을 놓아줄 수 없어.”차설아는 뒤에서 남자를 껴안고 어린아이를 달래듯 말했다. “내가 얼마 전에 점을 보러 갔었는데 우리 둘은 궁합이 잘 맞는대. 서로 의지하며 살기에 적합하니 다시는 이렇게 나를 밀어내지 마. 그렇지 않으면 정말 갈 거야. 울고 빌어도 소용없을 거야.”성진은 눈시울을 붉히며 울먹였다. “당신이 나를 달래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지만 정말 듣기 좋은걸?”그전까지 그는 차설아가 그에게 이렇게까지 신경을 쓰기를 바라본 적이 없었다.
작은 시장은 크지 않았는데 앞뒤를 합쳐도 겨우 몇백 미터의 길이에 불과했지만 안에는 옷가지부터 수공예품까지 여러 가지가 있었다.차설아는 도자기 노점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다양한 모양의 컵과 접시가 있었는데 이 컵과 접시는 모두 도자기 재질이어서 무늬가 정교하고 섬세하며 고풍스러운 느낌이 들어 매우 보기 좋았다.그러다 그녀는 복잡한 무늬 없이 은은하게 검은색으로 물들여 태극 음양을 이루는 듯한 흰색 잔이 눈에 들어왔다.“사장님, 이 잔 디자인이 재밌는데요.”차설아는 잔을 가리키며 신이 나서 말했다.“아가씨, 안목이 좋으시군요!”노점 주인은 비록 외국인이지만 동양 문화의 팬이었다. 차설아가 물건을 알아보니 사장은 끊임없이 말하기 시작했다. “이 컵의 도안은 매우 정교하죠? 머나먼 동방 대국에서는 태극이라고 합니다. 태극은 매우 현묘한 물건인데 세상 만물을 설명할 수 있죠. 흑에는 백이 있고 백에는 흑이 있는데 서로 분리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융합된 하나죠. 서로 배척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끌어당기고 있는걸요. 둘 중 누구도 누구를 억압할 수 없고 누구를 떠날 수 없죠...”“태극이라...”차설아는 흑백이 분명한 잔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왠지 모르게 그녀와 성도윤이 생각났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대립을 세우면서도 서로에게 끌리는 것을 억누를 수 없었다.그녀는 노점상에게 컵을 가져다 달라고 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차가운 목소리가 머리 위로 떨어졌다. “이 컵, 제가 살게요.”차설아는 눈썹을 찡그리며 정색을 하고 돌아섰다. “죄송한데 이 잔은 제가 먼저...”뒤돌아보니 남자의 그윽한 눈동자와 부딪혔고 그녀는 마치 혼이 사라진 것처럼 멍하니 거기에 서서 생각할 수도 움직일 수도 없고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성도윤은 차설아보다 무려 30㎝나 더 컸는데 그는 큰 산처럼 절대적인 압박감을 가지고 있었고 그의 뒤에는 따스한 아침 햇살이 그를 빛나게 했고 눈부시게 비현실적이었다.“하지만 돈은 내가 먼저 냈는걸요.”성도윤은 유로 다발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