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 후.이혼을 한 차설아는 곧 싱글 라이프에 적응하게 되었다.낮에는 열심히 돈을 벌었고, 저녁에는 신나게 놀며 자유로운 생활을 보냈다.그리고 오늘, 그녀는 드디어 남우 그룹과 새로운 계약서를 체결했다.남해진은 차설아의 요구에 흔쾌히 수락했는데 ‘천신 그룹’에 6000억 원을 개발 자금으로 투자했다. 하지만 천신 그룹은 첫 번째 연도에 수익을 10조 원을 보장해야 했는데 이를 어길 시, 천신 그룹은 계약서대로 30%의 지분을 배상금으로 양도해야 했다.계약 조항을 본 배경수는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남해진이란 사람도 정말 너무하네. 우리가 얼마나 큰 선물을 줬는데 말이야. 죽은 딸을 위해서라도 성의를 보일 줄 알았는데 이 계약서에는 온통 함정이잖아. 우리한테 전혀 유리한 것 없다고.”그는 의문스러운 얼굴로 차설아를 보며 말했는데 당장이라도 계약서를 찢어버리고 싶은 기분이었다.“보스, 이거 완전 우리한테 굴욕적인 계약서잖아, 왜 이 계약을 체결했어? 겨우 600억 원을 누가 못 내놓을 줄 알아? 우리를 무시하는 거 아니냐고!”하지만 차설아는 기분이 좋은지 입꼬리를 씩 끌어올렸다.“우리가 져도 겨우 30%의 지분을 잃는 것뿐이야. 하지만 우리가 이기면 남우 그룹의 5년 연속 투자를 받는 거라고. 매년 최소 2조 원의 투자액을 받을 수 있어. 난 엄청 공평하다고 생각하는데, 남해진 사장님도 성의를 보이셨고.”“성의를 보이긴 개뿔. 천신 그룹은 이제 막 성장하기 시작한 회사야. 제대로 된 제품 하나 없다고. 하이 테크 분야에서 1년에 10조 수익을 내는 게 쉬운 줄 알아?”배경수는 이마를 짚더니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전 세계의 3대 하이 테크 그룹에서도 매년 20조의 수익을 내고 있어. 우리 같은 스타트업 회사는 1년에 1조의 수익을 내도 대단한 거라고. 그런데 우리가 무슨 수로 이겨? 남우 그룹한테 작정하고 지분 30% 내주겠다는 거 아니야?”하지만 차설아는 눈썹을 치켜들더니 자신 있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나 차설아가 언제 도
“얌전했다고?”성도윤은 기다란 손가락으로 무심하게 서류를 읽어보더니 입꼬리를 씩 끌어올렸다.“도대체 그 여자한테 무슨 오해가 있었던 거야?”“오해라고 할 수는 없죠.”진무열은 마음을 다잡고는 용기를 내어 말했다.“몇 년 동안 사모님께서는 확실히 성실하고 본분을 다하셨습니다. 대표님에게도 일편다심이셨고요. 집안에서는 얌전히 시키는 일 다 하셨고, 밖에서도 그야말로 현모양처의 표본이셨습니다. 사모님께서 갑자기 바뀌신 건 아무래도... 대표님 때문인 것 같습니다.”성도윤이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나 때문이라고?”“물론이죠!”진무열은 해고당할 위험을 무릅쓰면서 차설아의 편을 들어줬다.“요 몇 년 동안 대표님은 사모님에게 쌀쌀맞게 구셨잖아요, 결국 불륜까지 저지르시고요. 사모님께서 얼마나 속상하셨겠습니까. 아니면 사모님은 배경수 같은 바람둥이와 어울리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러면 배경수와 천신 그룹을 설립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우리 성대 그룹과 대립하는 일은 더더욱 없었겠죠...”“저는 사모님의 능력이 대단하다는 걸 진작 알고 있었습니다. 사모님은 월반하던 천재시고 물리 전자파 분야의 전문가시잖아요. 사모님은 대표님을 너무 사랑하셔서 일을 그만두시고 요리하며 청소하며 대표님을 모시기 시작하셨습니다. 하지만 대표님은 그런 사모님을 아끼시고 사랑하시기는커녕 배경수 같은 바람둥이에게 당하고 말았죠. 정말 안타깝습니다!”성대 그룹에서 잃은 클라이언트 회사는 모두 천신 그룹과 계약했다. 심지어 성대 그룹과 다년간 합작한 남우 그룹마저 말이다.무서운 상승세를 보인 천신 그룹은 배경수가 재미로 설립한 회사는 절대 아니었다. 천신 그룹에서 계속 이 속도로 성장하고 발전한다면 3년이나 5년 후, 하이 테크 분야에서의 점유율은 성대 그룹과 대등해질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다.“하지만 사모님의 변화보다 저는 배경수 그 바람둥이가 더 인상적이었습니다. 분명 해안시에서 이름난 바람둥이이잖아요. 명문가의 아가씨나 여자 연예인들과 가깝게 지내던 그였는데 사모님을 위해 다른
화려한 불빛으로 가득 채워진 룸 안에는 한껏 꾸민 남자들이 한 줄로 서 있었다.차설아를 본 그들 중에 눈을 찡그리며 매력적인 미소를 짓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순진무구한 미소를 짓거나 우울함이 덕지덕지 묻어 있는 얼굴을 보인 사람도 있었다. 또 차도남처럼 차가워 보이는 사람도 있었다.“이, 이게 무슨 상황이지?”차설아는 뜬금없이 나타난 남자들을 보더니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전화기 너머로 뿌듯함이 담겨 있는 배경윤의 흥분된 목소리가 들려왔다.“언니, 룸에 도착했어? 내가 준비한 선물 어때? 다 엄청 잘생겼지?”룸 입구에 서 있던 차설아는 어안이 벙벙했다.“경윤아, 이게 다 뭐야?”“잊었어? 그날 밤에 언니 이혼하는 거 축하할 때 언니 스카이 클럽 앞에서 말했었잖아. 성도윤보다 잘생긴 남자는 널리고 널렸다고, 원하는 남자 다 가질 거라고.”“하하하, 오늘 언니를 위해 거금을 들였으니까 원하는 스타일 한 번 마음껏 골라봐. 그리고 내가 특별히 오빠도 따돌렸으니 마음 놓고 즐겨. 내가 언니 동생으로서 준비한 거니까 너무 감동하지는 마.”“배경윤, 너 너무하는 거 아니야?”차설아는 원망스러운 말투로 말했다.“너 나를 불구덩이로 밀어 넣는 거야. 내가 어떻게 감당한다고 그래...”말하는 사이에 그녀는 룸 안에 있는 남자들을 훑어봤다.‘역시... 경윤이는 내 찐친이야. 내 취향을 참 잘 알아.’룸 안에 있는 남자들은 서로 다른 스타일이었지만 모두 얼굴이 예술이었다. 눈앞에 보이는 잘생긴 얼굴에 그녀는 정신이 없었다.“됐어, 지금 바쁘니까 먼저 끊을게. 다음에 봐.”차설아는 다가올 상황이 너무 기대가 되어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누나, 안녕하세요!”겨우 스무 살 되어 보이는 잘생기고 풋풋한 남자애가 차설아에게 가까이 다가갔다.“누나, 수고하셨어요. 제가 누나를 위해 맛있는 디저트랑 과일을 준비했으니까 얼른 들어오세요!”차설아는 남자애가 유난히 눈에 익었다.“쪼꼬미, 널 어디서 봤던 것 같은데?”이 남자애뿐만 아니라 룸 안에 있는 다른
“뭐라고 부르는데?”차설아는 남자애에게 대답하고 있었지만 눈을 ‘차도남’에게서 뗄 수 없었다.이런 설레는 기분은 워낙 오랜만이라 차설아는 온몸이 저려왔다. 요 몇 년 동안 그녀는 이런 감정을 오직 ‘누군가’에게서만 느꼈었는데 말이다.“지훈이 형의 얼굴이 너무 잘생겼잖아요. 성대 그룹의 대표님이신 성도윤 님과 비슷한 구석이 있기 때문에 팬분들은 지훈이 형을 ‘리틀 성도윤’이라고 불러요...”“성도윤?”그 말을 들은 차설아는 흥미가 뚝 떨어졌다.‘왜 어디서나 그 사람 얘기를 들을 수 있는 거야? 영혼이 나를 따라다니나?’남자애는 차설아가 성도윤을 모르는 줄 알고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열심히 설명하기 시작했다.“누나 혹시 성도윤 님이 어떻게 생기셨는지 아세요? 모르신다면 여기에 사진이 있어요... 우리 지훈이 형이랑 많이 닮으셨죠?”차설아는 사진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온통 이 생각뿐이었다.‘재수 없어! 이혼하고 겨우 내 마음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남자를 만났는데 리틀 성도윤이라니, 너무 재수 없잖아!’리틀 성도윤은 예쁜 손가락으로 스위치 버튼을 누르면서 게임에 집중하고 있었는데 차설아에게 눈길 한 번 주질 않고는 덤덤한 말투로 말했다.“당연히 성도윤이 누군지 아시겠지, 저분 남편이니까.”“뭐라고? 그럼 예쁜이 누나가... 성도윤 님의 아내분이셨어요?”남자애는 깜짝 놀라더니 뒤로 물러서면서 차설아와 거리를 뒀다.다른 남자들도 맹수를 피하듯 차설아와 멀리 거리를 두려고 했다.“돈 벌기 정말 쉽지 않네. 우리 아이돌들은 걸핏하면 기획사에게 손님 접대나 강요받고, 심지어 오늘은 성대 그룹 대표님의 아내분까지 모셔야 한다니, 자칫하면 앞날을 망칠 수 있다고... 아무리 많은 돈을 준다고 해도 못하겠어!”“나도 안 할래, 안 하겠어!”그러더니 꽃미남들은 잇달아 제복을 벗으면서 자리를 뜨려고 했다.차설아는 다급히 그들의 마음을 달랬다.“다들 너무 겁먹지 마. 남편이 워낙 오픈 마인드라서 괜찮아. 남편도 다른 여자랑 놀고
“그게...”남자랑 너무 가까워진 나머지 성도윤을 빼닮은 얼굴은 무한히 확대되었다.차설아는 숨을 죽이며 괜히 긴장하기 시작했다.그는 성도윤과 똑같이 깊은 눈망울을 가지고 있었는데 마치 그녀의 모든 속셈을 꿰뚫고 있는 것 같았다.굳이 두 사람의 차이를 구별하자면 성도윤의 분위기에는 카리스마가 더해졌고, 그와 반대로 지훈은 사연이 많은 사람처럼 눈망울에 차가움과 우울함이 묻어나 있었다.‘참 신기하다니까. 사람은 정말 이상한 동물이야, 왜 항상 똑같은 사람에게 끌리는 것이지?’4년 전 그녀는 성도윤에게 첫눈에 반했었다.4년 후의 지금, 그녀는 또 성도윤과 비슷하게 생긴 남자 때문에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도대체 자신을 설레게 하는 사람이 눈앞에 잘생긴 남자인지 성도윤인지 차설아 본인조차도 구분할 수 없을 정도였다.“무슨 생각 해요?”남자는 차설아에게 점점 가까이 다가갔다.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이 다가갔다.지훈의 낮은 목소리는 오래된 와인처럼 감미로웠고 매혹적이었다.“아니야, 난 이만 갈게.”차설아는 뒷걸음질을 쳤다. 하지만 너무 당황한 나머지 하마터면 바닥에 넘어질 뻔했다.남자는 긴 팔로 손쉽게 그녀의 가녀린 허리를 꼭 끌어안고는 입꼬리를 씩 올렸다.“저는 당신 남편을 닮은 것뿐이지, 당신 남편은 아니잖아요. 그런데 왜 저를 두려워해요?”“두려워하지 않았거든!”차설아는 얼굴이 빨개진 채로 목소리를 높여 반박했다.‘그래, 이 녀석은 그저 도윤 씨랑 비슷하게 생긴 것뿐이야, 도윤 씨도 아닌데 내가 왜 겁을 먹었지? 다른 애들은 내가 성도윤의 아내라는 걸 알고 모두 도망갔는데 이 녀석은 도망가지 않기는커녕 오히려 나를 도발하고 있잖아? 그럼 성도윤을 아예 신경 쓰지 않는다는 말인데, 이 점만으로도 제대로 즐겨야 하겠는걸?’이 생각에 차설아는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그녀는 수줍은 자태를 거두고 오히려 당당하게 남자의 턱을 치켜들고는 입꼬리를 올렸다.“너를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네가 나한테 겁을 먹을까 봐 걱정돼!
차설아는 택시를 잡아 지훈과 함께 차에 올랐다.택시 기사에게 주소를 말한 후 불과 20여 분 만에 목적지에 도착했다.“도착했으니까 내려.”차설아는 강아지를 이끌듯 남자의 넥타이를 잡으며 차에서 내렸다.그들의 눈앞에 보이는 둥그런 돔 모양에 형광색 지붕의 작은 집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어둠 속에서 작은 집은 그윽하고 차가운 빛을 뿜어냈는데 마치 반짝반짝 빛나는 별과 같아 꽤나 낭만적이었다.“어때? 널찍하고 예쁘지?”차설아는 고개를 돌려 지훈을 보더니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여기는 내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비밀 아지트야. 웬만한 사람한테는 알려주지 않는다고!”“비밀 아지트요?”지훈은 여러 개의 집을 보더니 눈썹을 치켜들며 흥미를 보였다.“재밌네요.”직원은 가까이 다가오며 그들을 반갑게 맞이했다.“차설아 님, 안녕하세요. 그전처럼 3호실을 고르실 거죠? 물건은 다 준비해 드렸습니다.”3호실은 거리가 가장 멀었지만 시설이 최고급이었고 또 조용했기에 방해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차설아는 익숙한 듯이 곧바로 3호실로 향하고는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문을 열었다.“들어와, 너 오늘 밤 나랑 놀아주기로 한 거다?”지훈은 이곳이 도대체 어떤 분위기의 모텔인지 궁금했다. 하지만 방에 들어서자마자 어안이 벙벙했다.“여... 여기는 뭐 하는 곳이죠?”“바보야, 보면 모르겠어?”차설아는 기다렸다는 듯이 방으로 달려가고는 최신형 기계식 키보드를 쓰다듬으면서 눈을 반짝였다.“이 XF 키보드는 수많은 게이머들이 2년을 꼬박 기다린 신제품이야. 키 입력할 때 손가락으로 전해지는 느낌은 아주 뚜렷하고 부드러워. 타이핑에 따라 LED 조명이 커졌다 꺼졌다 할 수 있고 무엇보다 반응 속도가 정말 대박이야. 최상급 서버와 모니터만 있다면 그 어떤 게임에서도 우리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야!”지훈은 차설아의 말을 이해하는 데에 5분이나 걸렸다.“그러니까 여기는 모텔이 아니라... PC방이에요?”“모텔?”차설아는 지훈의 이마를 툭 치며 인상
전화기 너머로 딱딱한 통화 안내음이 울렸다.“지금 고객님께서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없는 번호?!성도윤은 애써 화를 억누르고 있었다.‘나 피하려고 일부러 전화번호까지 바꾸진 않았을 텐데 말이야.’그는 다시 차설아와의 채팅창을 열어 물음표 하나를 보냈다.하지만 문자를 보낸 순간 수신이 거부되었는데 아마도 차설아는 성도윤을 차단한 듯했다.“젠장!”성도윤은 싸늘한 얼굴을 보였다.‘정말 독한 여자네. 이렇게 철저하게 연락을 끊겠다고?’그들이 이혼한 지 겨우 일주일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차설아는 벌써 성대 그룹의 클라이언트를 모두 채갔다. 그뿐만 아니라 매일 밤 여러 클럽을 누비면서 매번 다른 남자와 즐기곤 했는데 그야말로 최고로 자유로운 삶을 보내고 있었다.심지어 이제는 남자와 방까지 잡는다고 하니 ‘전 남편’은 아예 안중에도 없을 것이다!성도윤은 큰 손으로 이마를 짚더니 한참 고민에 잠긴 후 곧바로 비서 진무열에게 전화를 걸었다.“30분 뒤에 해안시의 모든 호텔이나 모텔의 투숙객 정보를 알아야겠어!”진무열은 어리둥절한 채로 조심스럽게 물었다.“대표님,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왜 갑자기 투숙객 정보를 알아내려고 하시는 겁니까? 혹시... 불륜을 잡으려고 하시는 겁니까?”“내가 너한테 보고해야 해?”“아닙니다, 지금 바로 움직이겠습니다!”하지만 진무열은 궁금증을 참지 못해 한마디를 보탰다.“그리고... 사모님은 그냥 즐기려는 마음이 있는 것뿐이지, 다른 남자와 방을 잡지는 않았을 겁니다. 걱정하지 마세요!”성도윤의 안색은 한껏 어두워졌다.“닥쳐!”30분 후, 진무열은 한 묶음의 호텔 투숙객 정보를 가져왔지만 그 안에는 차설아의 체크인 기록이 없었다.“대표님,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얌전하고 본분을 지키시는 사모님께서 대표님을 그렇게 사랑하시는데 왜 다른 남자랑 방을 잡겠어요? 전에 클럽을 돌아다니고 젊은 남자들과 어울려서 찍힌 사진들도 아마 일부러 대표님의 질투를 유발하려고 했을 겁니다.”진무열은 방관자로서 조리 정연하게
차설아의 산뜻한 기분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웃음을 머금은 그녀의 얼굴이 굳어지더니 마치 무슨 재수 없는 것을 보기라도 한 듯 고개를 돌렸다.‘내가 정말 게으른 버릇은 고쳐야 한다니까. 이미 이사를 결심했으면서 왜 아직도 집을 안 찾아보고 버티고 있었던 거야? 바로 맞은편에 살아서 아무리 애써 외면한다고 하더라도 오늘처럼 이렇게 마주하게 되잖아!’차설아는 한참 동안 엘리베이터에서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문은 천천히 닫히기 시작했다.성도윤은 긴 팔을 내밀어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는 것을 막았다.그의 잘생긴 얼굴에는 알 수 없는 표정이 담겨 있었다.“왜? 나 만나기 부끄러워? 즐길 것 다 즐기더니 이제 양심에 찔려?”양심에 찔린다고?그 말은 차설아의 승부욕을 자극했다.그녀는 허리를 곧게 펴고 엘리베이터를 나서더니 고개를 들고는 당당한 표정으로 말했다.“성도윤 대표님, 장난이 지나치시네요. 즐겁게 살고 있는 게 뭐 어때서? 내가 무슨 남의 물건을 훔치기라도 했어, 아니면 뺏어오기나 했어. 내가 왜 양심에 찔려야 하는데?”“오히려 한 회사의 대표인 당신이 늦은 밤에 자지도 않고 왜 여자 혼자 살고 있는 집 앞에 서 있는 거야? 마침 나한테 들켰으니 양심에 찔려야 하는 쪽은 그쪽이 아닌가?”성도윤은 논리적인 차설아에 말문이 막혔다. 그는 한참 고민하더니 차가운 얼굴을 보이며 말했다.“당신이 얼마나 막 나가는지는 모르지만 당신 신분을 명심하라고. 요 며칠 다른 남자들과 연예면 기사 난 걸 자랑으로 생각하는 거야?”차설아는 더 화가 나지도 않았다.‘이 남자는 정말 언제나 이렇게 오만방자하네! 내가 전에 콩깍지가 제대로 씌웠지, 이런 남자를 4년 동안이나 진심으로 사랑했으니 말이야. 괜히 이 사람을 사랑하게 되어서 나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가면서 내가 제일 싫어하는 사랑밖에 모르는 여자로 되었잖아? 그래도 다행이지, 이제 정신을 차렸으니까. 더는 성도윤의 뜻을 따르기 위해 나 자신을 희생하는 일은 없을 거야!’차설아는 담담한 표정으로 남자를 보더니
“그게...”차설아는 잠시 말을 잃었다. 거짓말을 잘하지 못하는 그녀는 특히 자신이 아끼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그랬다.“임신 테스트기도 다 믿으면 안 돼요. 이게 호르몬과 관련이 있는데 때로는 남자의 에스트로겐 수치가 너무 높으면 임신 반응이 나올 때도 있거든요.”박성훈이 차설아를 대신해 설명했다.비록 이 설명이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성도윤 같은 남자에게는 충분히 먹힐 만했다.역시나 성도윤은 그 말을 믿었고 얼굴에 실망한 감정이 가득했다.“정말 그럴 수도 있나요?”“그래. 혈액 수치가 가장 정확한 증거야. 혈액 검사 결과, 차설아 씨는 정말로 임신하지 않았어.”박성훈이 성도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위로했다.“괜찮아, 두 사람 아직 젊으니 앞으로 가능성이 많을 거야.”“미안해요, 도윤 씨. 나도 사실 두 줄이 나와서 임신한 줄 알았어요. 괜히 실망하게 해서 미안해요.”차설아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성도윤에게 사과했다.그의 마음은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실망한 기분도 잠시, 그는 차설아를 서둘러 달랬다.“바보야, 내가 미안해. 다 내가 부족해서야. 약속할게 이제부터 매일 밤 더 열심히 할 거야.”“엣헴!”박성훈이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이 두 사람 또 닭살 돋게 하네. 매일 밤 열심히 한다고? 뭘? 이러다 어떻게 열심히 하는지까지 말할 기세군.’“형, 목이 마르면 거실에 나가서 커피나 좀 마시세요. 이제 검사도 필요 없는 것 같은데.”성도윤이 직설적으로 내뱉었다.“설아 씨가 임신 안 됐다고 하자마자 바로 나를 쫓아내려고 하네? 아침에 그 애타게 부탁하던 모습 성도윤은 어디 갔지? 이제 다시 나를 모셔 오기 힘들 텐데.”박성훈이 팔짱을 끼고 웃으며 말했다.‘팔불출에는 정말 약이 없군.’“그럼 형은 그냥 여기 있어요. 내 능력으로 한 달 안에 아린이가 반드시 아기를 가질 수 있을 것 같으니까.”성도윤이 조금 유치하게 말했다. 아무리 도도하고 성숙한 남자라도 사랑 앞에서는 마치 어린아이 같았다.차설아가 남자의 팔을 잡고 말렸다.
“잘됐네요. 마침 딱 배고팠는데!”차설아는 피곤하고 정신이 흐릿했지만 기대에 가득 찬 목소리로 성도윤을 반겼다.성도윤이 사 온 케이크는 차설아가 가장 좋아하는 케이크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가게 주인은 분점을 열 계획도 없고 배달도 하지 않으며 매일 일정 수량만 판매했다.그래서 정말 오래 기다려야 하고 운이 좋아야만 살 수 있었다.가게 주인의 기분도 들쑥날쑥해서 기분이 좋을 때는 많이 팔지만 기분이 나쁘면 그날은 일찍 가게 문을 닫기 일쑤였다.단순히 줄을 서서 맛있는 케이크를 먹는 것도 있지만 케이크를 사기 위해 기다린 사람들의 수고와 정성도 들어 있었다.차설아는 숟가락으로 케이크 한 조각을 떠서 입에 넣었다. 그 부드럽고 차가운 질감에 그녀는 감동해서 눈물이 날 뻔했다.“맛없어?”차설아의 표정을 보고 성도윤이 이마를 찌푸리며 걱정스레 물었다.“아니요. 너무 맛있어서... 이제 다시 이런 케이크를 못 먹으면 너무 슬플 것 같아서요.”“바보, 그런 말을 왜 해? 앞으로 당신이 원하면 매일 사다 줄게.”성도윤이 차설아의 손을 잡고 진지하게 약속했다.“좋아요, 그럼 매일 먹고 싶어요. 당신이 매일 사다줘요...”차설아는 입술에 크림을 묻힌 채 남자에게 물었다.“그런데 매일 줄 서서 사 오느라 면 당신이 힘들지 않을까요?”“걱정 붙들어 매, 당신이 질리지만 않는다면 매일 가서 사 올 수 있어. 정 안 되면 내가 그 가게 주인을 찾아서 배워서 매일 내가 직접 만들어서 줄게...”성도윤은 차설아의 입가를 닦아주며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혹시 나한테 뭔가 숨기고 있는 거 아니야?”“어, 뭐가요?”차설아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그녀는 그의 관찰력이 이렇게 예리할 줄 몰랐다.“분명히 뭔가 있어.”성도윤이 단호하게 말했다.그는 돌아오자마자 분위기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지만 참으면서 기다렸다.그러다 차설아가 케이크를 먹으며 그런 말을 하자 분명히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있었던 걸 확신했다.“역시 당신 눈을 피할 수는 없네요. 사실,
박성훈은 비관적인 차설아를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몇 달 전만 해도 그녀는 자신감 넘치고 자유롭고 시원시원한 여자였다.그런데 지금은 눈을 잃고 독에 중독되어 마치 시들어버린 꽃처럼 처량해 보였다.“설아 씨, 제가 살아있는 허준 선생처럼 신통한 의사는 아니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약속할 수 있습니다. 반드시 최선을 다해 당신을 치료할 것이고 당신의 눈도 적합한 이식자가 나타나기만 하면 다시 원래대로 회복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너무 절망하지 마세요. 살아있는 한, 희망은 있는 법입니다.”그는 진중한 목소리로 차설아를 위로했다.물론 중금속 중독을 완전히 해독하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다.지금까지 성공 사례가 많지 않지만 의학 역사 속에서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과거에도 성공한 사례가 있는 만큼 자신도 연구를 거듭하면 반드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고마워요, 박 선생님. 그 말 한마디가 저한테 용기를 주네요.”차설아는 힘겹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박성훈이 있는 방향을 향해 말했다.“해독을 할 수 있든 없든, 그리고 제 눈이 다시 보이든 아니든, 한 가지만 부탁드리고 싶어요. 이 사실을 도윤 씨한테는 절대 알리지 말아 주세요. 도윤 씨가 지금 너무 지쳐 있어요. 더 이상 그이가 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아요.”“걱정 마세요. 저는 그런 말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박성훈은 차설아의 성도윤을 향한 깊은 감정에 감탄했다.이토록 힘든 상황에서도 자신보다 사랑하는 남자를 먼저 걱정하는 차설아를 보면서그녀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느껴졌다.“제 아이도 지킬 수 없겠죠?”차설아가 한참을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박성훈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맞아요. 아이는 지킬 수 없습니다.”그가 힘겹게 이어 말했다.“설아 씨가 현재 중금속 중독 상태고 해독을 위해 강한 약을 복용해야 합니다. 이 약들은 태아의 성장에 심각한 영향을 미쳐요. 제 의견으로는 아직 초기일 때 아이를 포기하는 것이 낫습니다.”“그럴 줄 알았어
박성훈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이런 상황이라면 차라리 빨리 죽는 게 낫다고 할 수도 없고...’하지만 그는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했다.혈액 검사 보고서에 따르면 차설아의 여러 혈액 수치에서 이상이 발견되었고 그녀의 지금 상태로 본 결과, 박성훈은 차설아가 중금속 중독에 걸렸다고 판단했다.중금속 중독은 쉽게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지는 않지만 서서히 신체의 각 기관을 쇠약하게 만들고 신경을 마비시키는 증상이었다.초기에는 극심한 피로와 졸음을 유발하며 무기력하게 만들지만 후기로 갈수록 신경과 장기가 손상되며 극심한 통증을 수반하게 되고 이러한 증상은 그야말로 생지옥과도 같았으며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정도의 고통이었다.박성훈은 어떻게 입을 열어야 할지 고민하다 결국 우선 잔인한 진실을 감추기로 결정했다.“어쨌든 걱정 마세요. 저희가 반드시 치료해 드릴 겁니다.”그렇게 말은 했지만, 사실 중금속 중독을 완전히 치료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게다가 투여된 독의 종류를 정확히 파악해야만 적절한 치료법을 적용할 수 있었고 그러려면 독을 투여한 사람이 어떤 중금속 원소를 사용했는지 솔직하게 밝혀야 한다.“지금부터 최근 식사 내용을 정확히 말해 주세요. 혹시 식사 외에도 평소 드시지 않던 걸 섭취한 적 있나요?”박성훈이 진지한 눈빛으로 물었다.“저 중독된 거죠?”차설아는 질문에 답하지 않고 되레 되물었다.“어떤 독에 중독됐는지 알 수 있어요?”“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초기 판단으로는 중금속 중독일 가능성이 큽니다.”박성훈은 차설아가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다는 사실에 순간 당황했지만 곧바로 숨김없이 사실을 털어놓았다.이런 경우, 환자와 의사가 완전히 솔직하게 소통해야만 치료에 도움이 되기에 아무리 잔인한 현실일지라도 그녀가 사실을 알아야 했다.“중금속 중독...”차설아는 그 단어를 듣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몸이 서서히 차가워지며 절망감이 엄습했다.그녀는 예전에 비슷한 뉴스를 본 적이 있었다.한 명문대 여학생이 룸메이트의 질투로
“무슨 일인데요?”박성훈이 갑자기 진지해지며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차설아를 바라보았다.“뭘 알아내든 상관없어요. 도윤 씨한테는 좋은 얘기만 해주세요. 안 좋은 결과는 절대 말하지 마시고요.”차설아가 간결하게 자신이 원하는 걸 얘기했다.그녀는 방금 전에 애써 성도윤을 떨어뜨려 놓으려 했던 이유가, 그가 걱정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 거짓말을 유지하려면 박성훈의 협조가 필요했다.“하... 역시 그럴 줄 알았어요.”박성훈은 차설아가 이런 부탁을 할 것이라는 걸 예상했지만 그녀를 보며 여전히 마음이 아팠다.그런 상태에서 차설아는 여전히 성도윤을 걱정하며 그가 조금이라도 슬퍼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두 사람 서로를 진짜로 사랑하나 보네...’“걱정 말아요. 내가 분위기 못 읽고 아무 말이나 하는 사람도 아니고 어떤 걸 얘기할지 잘 알고 있어요.”박성훈이 차설아를 안심시키듯 말했다.“그리고 설아 씨도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요. 내가 신의 손을 가진 명의는 아니지만 그래도 의술은 좀 하는 편이니까 저희 말대로만 따르면 큰 문제는 없을 거예요. 게다가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니잖아요. 어쩌면 단순히 임신 초기에 너무 피곤해서 그런 걸 수도 있어요.”“정말 그런 거였으면 좋겠네요.”차설아는 힘없이 미소를 지으며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하지만 검사 결과가 결코 좋을 리 없다는 것을 그녀는 이미 직감하고 있었다. 상대는 처음부터 그녀를 해칠 작정이었고 가볍게 봐줄 리가 없었다.만약 배경윤이 조금만 늦게 알아차렸더라면 지금쯤 그녀는 이미 손쓸 수 없는 상태였을지도 모른다.지금 당장은 그 정도까지는 아닐지라도 분명 좋은 상태는 아닐 것이다.얼마 지나지 않아 혈액 검사 결과가 나왔다.검사 결과를 살피던 그의 표정은 한층 무거워졌고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검사 결과는 너무 처참했다.“어때요, 박 선생님?”차설아는 몽롱한 상태에서 거의 잠들 뻔했지만 억지로 정신을 붙잡고는 줄곧 침묵하고 있는 박성훈에게 물었다.“뭐라고 말해야
성도윤은 자책감에 사로잡혀 당장이라도 할복이라도 할 기세였고 박성훈은 그런 그를 진정시키려 일부러 괜찮을 거라고 말한 것이었다.하지만 사실, 차설아의 심장 박동은 이상했고 거의 보름 동안 지속된 무기력함과 과도한 졸음까지 고려했을 때, 그녀의 몸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게 분명했다.그리고 그 원인은 단순히 임신 때문이 아니라는 것도 박성훈은 어렴풋이 감이 왔다.하지만 지금 당장 혈액 검사 결과도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성급하게 결론을 내릴 수는 없었다.괜히 성도윤에게 불안감을 주면 그가 차설아에 대한 과보호 수준을 고려할 때 당장이라도 미쳐버릴 게 뻔했기 때문이다.“정상이면 다행이야.”성도윤은 박성훈의 말을 듣자마자 한숨을 내쉬며 마치 온 세상의 짐이 내려간 듯 안도했다.“들었지, 당신 괜찮대. 그냥 임신해서 피곤한 것뿐이래. 내가 괜히 겁먹고 난리 친 거야. 미안해. 내가 이런 경험이 없다 보니까 괜히 걱정했네.”성도윤은 기뻐하며 차설아를 꼭 끌어안았다.그리고 그녀의 배를 손으로 가볍게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야, 꼬맹이. 엄마 너무 힘들게 하지 마라? 너 때문에 엄마가 얼마나 피곤해하는지 봤지? 만약 엄마를 더 힘들게 하면, 네가 세상에 나오는 순간, 아빠가 먼저 너 혼쭐낼 거야!”차설아는 그의 유치한 농담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그만 해요. 진짜 왜 이렇게 점잖지 못해요?”“하아, 두 사람 오늘 너무 닭살 커플인 거 아니야?”옆에서 이 모든 걸 보고 있던 박성훈이 질색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 정도면 거의 ‘고문 수준’의 애정 행각이었다.그때, 차설아가 성도윤을 바라보며 갑자기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도윤 씨, 나 갑자기 케이크가 먹고 싶어졌어요. 지금 가서 사 올 수 있어요?”“지금?”성도윤은 순간 당황했다.그는 케이크를 사 오는 게 싫은 게 아니었다. 하지만 혈액 검사 결과가 아직 나오지 않은 상태라 결과를 확인한 후에 움직이고 싶었다.“네. 지금 당장이요. 지금 먹고 싶다고요.”차설아가 일부러 짓궂게 물었다.“
박성훈은 처음엔 가벼운 농담을 던지며 분위기를 풀어주고 있었지만 곧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잠깐만!”그는 이마를 찌푸리며 성도윤을 바라보더니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왼쪽 아래로 2~3cm 정도 더 옮겨 봐.”성도윤도 덩달아 긴장해졌다.그는 박성훈의 지시대로 청진기를 차설아의 심장 왼쪽 아래 3cm 지점으로 옮기며 조심스럽게 물었다.“뭔가 이상한 점 있나요?”“...”박성훈은 대답하지 않고 그저 얼굴을 굳힌 채 조용히 청진기에 집중했다.한참 후에야 그는 청진기를 내려놓으며 말했다.“지금은 확실하게 들리는 건 없어. 혈액 검사 결과까지 봐야 정확하게 알 거야.”차설아는 처음부터 차분하게 검사를 받으며 잘 협조하고 있었지만 무언가를 깨달은 듯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그리고 박성훈을 향해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늘 검사는 여기까지만 할까요? 박 선생님도 도착하자마자 이것저것 살펴보셔서 피곤할 테고 저도 피를 너무 많이 뽑아서 그런지 좀 지치네요. 나머지는 내일 하는 게 어때요?”사실 그녀는 자신의 몸에 뭔가 이상이 있다는 걸 감지하고 있었다.하지만 그게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확신할 수 없었고 괜히 성도윤이나 다른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게다가 현이를 통해 누군가 자신을 해치려 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아냈다.그 사람의 정체만 밝혀지면 직접 해결할 생각이었다.“온 지 얼마 안 돼서 피곤하지는 않은데요? 게다가 그냥 검사 결과만 보면 되는 거라 괜찮아요.”박성훈이 어깨를 으쓱하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저택에 온 지 이제 겨우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았고 그동안 한 거라곤 심장 소리 한 번 들은 게 전부인데 대체 뭐가 그렇게 피곤하다는 건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제가 피곤해서 그래요. 그리고 오늘 꼭 검사를 다 마쳐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차설아의 목소리는 차분하면서도 단호했고 명확한 거절의 의미였다.더 이상 검사에 협조할 생각이 없는 듯한 그녀를 보면서 박성훈은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그리고 잠시 고
박성훈은 말을 마치고 청진기를 꺼냈다. 그러더니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차설아의 옷 안으로 넣으려 했다.“잠깐!”성도윤이 그 장면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재빠르게 박성훈의 손을 붙잡고 제지했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청진하고 있지 그럼 내가 뭐 하는 걸로 보여?”박성훈이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내가 해요.”성도윤이 단호하게 청진기를 낚아채더니, 정색하며 말했다.“내 아내는 부끄러움을 많이 타요. 이런 건 내가 직접 할 테니까, 형은 듣기만 해요.”박성훈이 말없이 그를 보고 있자 성도윤이 되물었다.“왜, 문제 있어요?”“문제라기보단... 좀 오버 아니야?”“어디가 오버에요? 형이 직접 하는 게 더 이상한 거지.”‘누가 알아? 검사하는 동안 실수로 엉뚱한 곳이라도 건드릴지.’보통 때는 몰라도 지금처럼 바로 눈앞에서 보고 있는 상황에선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하아... 역시 소설에서만 보던 ‘집착광공’이 실존하는구나.”박성훈이 이마를 짚으며 감탄했다.자신이 가끔 보던 ‘재벌 남주’ 소설들이 그냥 창작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었다.현실이 오히려 소설보다 더 과장되어 있었다.“헛소리 말고 어디에 대야 하는지만 알려 줘요.”성도윤이 청진기를 들고 박성훈을 노려보았다.“음... 왼쪽 쇄골 중앙선과 다섯 번째 갈비뼈 사이 경계에 대면 돼.”성도윤의 태도가 워낙 단호해서 박성훈은 그냥 순순히 위치를 알려 주었다.“잠시만요.”성도윤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청진기를 차설아의 잠옷 안으로 밀어 넣었다.그러더니 여기저기 더듬으며 위치를 찾기 시작했다.“쯧쯧.”박성훈은 청진기를 끼고 있었기에 성도윤이 어떻게 검사하고 있는지 소리로 다 들을 수 있었다.하지만 감히 뭐라고 할 수도 없었고 결국은 그냥 내버려두기로 했다.‘어휴, 성도윤이니까 참는 거지.’그가 속으로 체념하는 사이, 성도윤이 한참 동안 위치를 못 찾자 결국 한마디 내뱉었다.“이 정도도 못 견디면 나중에 내진 검사할 때는 난리 나겠네?”“뭐요?”
차설아는 앞이 보이지 않는 대신 촉각과 후각이 무척 예민했다.방에 들어서는 순간, 그녀는 공간이 달라졌다는 걸 바로 알아차렸다.예전엔 책 냄새가 가득하던 방이 이제는 소독약 냄새로 가득 차 있었고 조명도 더 밝고 뜨거워진 느낌이었다.이제 차설아는 자신의 모든 걸 성도윤에게 맡긴 상태였다.그가 정말로 해부라도 하겠다고 나선다면 그저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당신 상상력 정말 대단한데? 우리 애도 나중에 소설가 체질이었으면 좋겠다.”성도윤은 차설아의 넘치는 상상력에 웃음이 터졌고 그녀의 손을 잡고 안쪽으로 이끌었다.“차설아 씨, 지금 혈액 검사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전반적인 건강 상태를 확인해야 하거든요.”간호사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설명했다.“네, 하세요. 어차피 지금 나는 도마 위 생선이라 목숨은 이미 여러분들 손에 있으니까요.”차설아는 자조적인 농담을 하며 팔을 내밀었다.곧이어, 조용한 방 안에 사각사각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바늘이 그녀의 정맥을 찔렀다.“살살 좀 해 주세요.”성도윤은 차설아의 살짝 찡그린 얼굴과 연달아 뽑혀 나오는 혈액을 보며 속이 상해 간호사에게 신신당부했다.그때, 앞쪽에서 장난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성 대표님의 아내 사랑이 참 넘치시네요. 난 조용히 보조만 하려고 온 건데 이렇게까지 과한 애정 행각을 볼 줄은 몰랐어요. 좀 자제하세요.”그 말투를 보아하니 성도윤이 말했던 ‘대단한 의사’가 틀림없었다.차설아는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그리고 순간 놀란 듯 말했다.“이 목소리... 어쩐지 익숙한데요?”“당연하지. 우리랑 꽤 인연이 깊은 사람이거든.”성도윤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설마... 이분...”차설아는 머릿속에서 기억을 더듬었다.그리고 순간적으로 깨닫고 외쳤다.“박 선생님?”“하하하. 나를 이렇게 빨리 기억해 주다니, 영광인데요? 이걸로 승부는 끝났네요.”“도윤아, 나중에 밥 한 끼 사.”박성훈은 호탕하게 웃으며 차설아가 자신을 단번에 알아본 것이 무척이나 자랑